{"product_id":"book-9788959595990","title":"아! 숭례문과 나의 삶","description":"나의 젊음을 받친 대한민국 국보 제1호 서울시 남대문\u003cbr\u003e\n1961년 나의 건축과 대학 졸업 논문은 한국 고전 건축양식이었다. 1950년 박정희 군사정부 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고 나라 예산에 남대문 보수는 빠듯한 지출이었다. 6·25 한국전쟁 중에 포격의 상처로 남대문의 구조에 무너질 위험이 컸다. 서울대학교 건축과 김정수 교수님은 나를 남대문 보수공사 현장에서 일하도록 주선하셨고 1961년 봄에 중수공사가 시작되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서울시에서 주관하고 문교부 문화재 위원들의 자문으로 시작하는 공사장에는 8명의 건축 제도사들과 조원재 도편수가 지명되었고 30여 명의 고 건축 목수들이 공사를 시작하였다. 임천 단청사가 단청을 지휘하였고 일본에서 활동하는 젊은 고고학자 김정기 씨는 문교부 파견 현지 감독으로 지명되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지붕에서 기와를 들어 내리면 자로 재서 크기를 기록하고 문양을 탁본하고 복원 공사에 재사용 여부를 결정하였다. 처마에 기와 문양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그림을 조각하였고 하늘을 나는 용의 모습은 참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예술이었다.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전수해 온 정교하고 안정된 예술과 기술이 건축물의 모든 부분에서 감탄을 멈출 길이 없었다. 내 나이 가장 민감한 때에 남달리 도취하였다. 지붕에 흙을 내리는 중에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조선 건국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로 옮기고 서둘러 성곽을 짓고 남대문을 세웠을 때에 붓글씨로 쓰인 원래의 상량문이 기록된 대들보가 톱으로 무자비하게 잘려진 모습으로 흙속에 묻혀 있었다. 발견된 기록에 의해서 이태조 5년 1396년 음력 10월 6일에 세워졌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임진왜란 후에 기록이 없는 보수 공사가 있었음을 상상하도록 하였다.\u003cbr\u003e\n\u003cbr\u003e\n건물 부재가 하나하나 해체되어 내려올 적마다 정확한 규정 치수를 찾아 실측도 기록을 작성한 후에 복원 설계의 자료를 얻고 곧 복원 도면 설계를 시작하였다. 나는 도편수 조원재 씨와 같이 생활하면서 역사 속에 사라져 가는 우리 선조들의 고전 건축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일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듣고 배웠다. 설계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네 모퉁이에 추녀 설계였다.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의 원형을 전면에서 찾고 측면에서 찾아 두 개의 곡선을 맞추어 높이와 길이를 정한 다음 추녀의 설계를 해체된 추녀에서 확인하였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옛사람들은 건물 부재들의 용도에 적합한 여러 가지 나무들을 산에서 찾아 가장 적절한 시기에 베어서 바닷물에 수년 동안 침수한 다음 다시 그늘에서 수년 동안 말려서 나무의 결을 따라 부재 용도에 맞는 모양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제한된 공정과 재료 공급에 따라 그러한 원칙은 최선을 다하여 공사를 진행한다고 도편수는 설명하였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우리나라 고전 건축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지붕과 기둥 사이에서 지붕의 무게를 모아 기둥에 전해 주는 공포구조와 양식에 있다. 수많은 크고 작은 부재들을 조립하여 구성한 구조물은 지붕과 처마의 무게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포라고 불리는 작은 구조물을 만들어 기둥에 전해 준다. 그 기능에 맞는 예술적 표현은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다. 동아세아 목조 건축양식은 당송대의 양식과 원명대의 양식으로 나누어지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목조 건축양식은 후자에 속하고 일본에 남은 우리나라 백제의 공장들이 지어 남긴 나라현 법륭사, 일본 최초의 사원 아스카데라 목조 건물들은 전자에 속한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일본에 백제의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사상과 교리뿐 아니라 백제 선진 문물의 획기적 수용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원 건축은 건축·토목·회화·금속 공예·기와 제작 등 다양한 선진 기술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에서 한반도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한 7세기를 ‘아스카(飛鳥) 시대’라고 하는데, 그 시작이 바로 백제 건축가의 일본에 건설한 아스카데라의 건립이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남대문을 공사하는 동안 서울 시민들에 떠도는 소문들이 있었다. “지붕에서 용이 하늘로 올랐다”, “구렁이가 나왔다”, “처녀 몸의 유골이 나왔다” 시민들이 궁금해 하기에 나는 서울 일간지에 계속해서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건축 잡지에 보고서도 출간하였다. 현장 일들은 힘들고 지루하였기에 처음부터 시작한 건축가들과 제도사들은 하나둘씩 모두 떠났지만 나는 역사적인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복원도를 완성할 무렵 공대 건축과 동창 친구들 여상현과 장석진을 불러 복원공사에 시간을 맞춰 필요한 모든 도면을 완성하였다. 그 후에 40여년이 지났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지난 2008년 2월 8일 일요일 아침 7시경에 내가 평시에 즐겨보는 24시간 한국 뉴스 TV를 켰을 때 나는 내 인생에 가장 슬픈 순간을 보았다. 숭례문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나는 TV 앞 방바닥에 주저앉아 아픈 가슴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었다. 3시간동안 내 집이 불타고 있었다. 내 가족이 죽어가고 있었다. 소방대들의 물줄기는 기와지붕 위에 소나기물처럼 처마 끝으로 흘러내리고 건물 안에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를 뿐, 무기력한 소방 작업에 천년의 민족혼이 맥박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의 젊음을 통째로 바쳐 일한 건축 인생에 최고의 자랑이 검고 하얀 연기로 서울의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목사인 내 아내도 교회를 잊고 내 옆에서 같이 슬퍼하고 있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돌연한 화제로 소실된 숭례문은 엄격한 문화재 보수공사 과정을 거쳐 다시 복원하면 국보 1호의 위치로 환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기록은 1963년에 재작한 실측도였다. 미국에 유학 올 때 집에 남겨둔 실측도를 어머님이 알아보시고 20년 동안 잘 보관하셨다가 도미하실 때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 주셨다. 다시 20여 년 동안 내 책장에 잘 보관되었다. 40여 년 후에 남대문을 다시 세우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누각 일층에 재사용할 수 있는 잔여 부재들을 모두 다시 사용하고 실측 기록들과 도면에 따라 새로운 부재를 정확하게 원형과 맞추어 건물의 모든 부분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된다면 문화재의 가치는 다시 살아난다. 서울의 얼굴이 회복한다. 민족의 혼이 다시 일어선다. 1961년에 조원재 도편수와 같이 일한 이광규와 신응수 도편수들이 있었다. 2008년 신응수 도편수를 다시 만나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남대문의 위용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u003cbr\u003e\n\u003cbr\u003e\n〈이하 생략〉\u003cbr\u003e\n\u003cbr\u003e\n - 〈시작하는 글〉 중에서 발췌","brand":"My Store","offers":[{"title":"Default Title","offer_id":48980960641276,"sku":"9788959595990","price":16.85,"currency_code":"USD","in_stock":true}],"thumbnail_url":"\/\/cdn.shopify.com\/s\/files\/1\/0730\/4681\/9068\/files\/9788959595990.jpg?v=1776500338","url":"https:\/\/bookstore12.com\/products\/book-9788959595990","provider":"Bookstore 12","version":"1.0","type":"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