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_id":"book-9788984947702","title":"조계의 달 무학","description":"지공-나옹과 함께 '삼화상'으로서 \u003cbr\u003e\n여말선초 불교계를 대표한 무학대사를 재조명하다!\u003cbr\u003e\n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왕사로서 오늘날 서울인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한 인물로, 고려를 창업한 왕건의 스승 도선과 비견되고 있지만 무학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무학대사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대중들로부터 주목받아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한양 천도나 이성계와 관련된 사실들이 잘못 알려지거나 과대 포장된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어 있을 뿐이며, 진정 고승으로서의 면모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u003cbr\u003e\n저자 황인규 동국대 명예교수는 무학대사에 관련한 연구를 1996년 무렵부터 시작하였다. 무학에 관련한 광범한 자료를 수집, 체계적 학술적 검토를 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양서적과 학계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술서적을 집필한 바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동국대학교 정년을 기념하고 30년에 걸친 무학대사 연구를 집적하여, 교양서로서 저술, 간행한 것이다.\u003cbr\u003e\n저자는 무학에 대해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고 야사와 설화에서 기록된 이야기와 구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논문의 형식을 띠고 번거롭지만 인용문과 각주에 원전 사료를 달면서도 가능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였고, 서론과 결론 및 참고문헌은 과감히 삭제하였다. 여러 논문을 단순히 배열한 것이 아니라 고승 무학과 관련한 논지를 부각시켜 그 의미를 찾으려고 공을 들였다.\u003cbr\u003e\n이 책에서는 무학대사, 곧 무학 자초(無學 自超),를 중심으로 여말선초 불교계 고승의 혁신과 대응을 살펴보았다. 무학대사는 권승(權僧)이나 술승(術僧)이 아니라 불교를 수호한 참된 고승[眞僧]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무학대사와 그의 스승 나옹선사과 지공화상 등 삼화상(三和尙)을 비롯한 고승과 순천 송광사와 개성 보제사[연복사]와 양주 회암사 등 중요 사찰 도량에 대해 탐구하였다.\u003cbr\u003e\n무학 자초의 신분은 양인이었으며 가계는 그다지 높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듯하다. 무학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합천군 대병면 구리듬은 그의 부모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일대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다. 1344년 18세에 송광사 제10세 사주 혜감국사 만항의 수제자인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해인 1346년 「능엄경」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았고, 1352년 여름 묘향산 금강굴에서 다시 득도하였다. 1353년 가을 원에 유학가서 지공 선현을 참예하고, 이듬해 나옹선사를 연경의 법원사와 영암사에서 참예하였고, 1356년 귀국하였다.\u003cbr\u003e\n무학대사는 고려말 고승 나옹의 대표적 계승자로서 '나옹의 적자, 태조의 왕사'였다. 젊은 무학은 원나라에서 나옹에게 도를 인가받고 서산 영암사에서 2년여 동안 사사받음으로써 깊은 감화를 받았다. 나옹에게 도를 인가받은 시와 수서(手書)를 받았고, 귀국 직후 원효암에서 나옹에게 신표로 불자를 받았으며 신광사에서도 시를 받았다. 특히 나옹이 왕사로 책봉되어 송광사 주지를 한 후, 무학은 나옹에 이어 송광사 주지를 하였으며, 나옹과 함께 지공의 유훈을 받들어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나옹의 입적 후에도 무학은 지공과 나옹의 추념 불사를 하였으며 두 스승의 흥법의 뜻을 받들고자 새 왕조 창업에 참여하였으며 건국 직후 왕사로 책봉되어 두 스승의 도량이라고 할 회암사에 체류하면서 나옹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법맥을 정리하여 「불조종파지도」를 간행하였다. 1403년(태종 3) 1월에 회암사에서 나와 입적할 때까지 금강산에 2년 9개월 체류하였다. 1403년 1월부터 4월까지 금강산 진불암에 머무르다가 1405년 금강산 금장암으로 옮긴 후 9월 11일에 입적하였다.\u003cbr\u003e\n무학대사는 \"평소에는 아이 같다가 안목을 갖춘 이를 만나면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듯 버티었다. 겸손하고 겸손하여 나라에 존중함이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뛰어난 선지식일 뿐만 아니라 풍수와 인문 등 뛰어난 식견으로 여말선초 불교와 사회의 혁신을 위하여 애썼다. 더욱이 마지막 왕사로서 조선왕조의 창업과 한양 전도 등 국가 대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무학은 팔만 가지의 보살행(菩薩行) 중 으뜸이라면서 중생을 갓난아이[赤子]처럼 보살피라는 '영아행(?兒行)'을 펼치면 나라와 백성이 평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초기 이래 지공과 나옹의 문도, 특히 나옹의 상수제자 무학의 문도가 향후 조계종단을 이끌어갔다. 무학과 그 제자인 진산과 함허 기화 등의 법맥이 조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불교계 고승들의 삼화상의 추념은 조선후기에도 게속되었다. 이것은 16세기 중엽 이후 청허 휴정의 문도들이 태고 보우를 법통으로 강조한 사실과는 대비가 되는 것이다.\u003cbr\u003e\n무학대사는 세상 식견이 뛰어나 스스로 초월하여[自超]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고[無學], 계월헌(溪月軒), 즉 \"조계(曹溪)의 달(曹溪月)\"이라 불렸다. \"조계의 달\"은 조계산(曹溪山)의 달처럼 항상 밝고 청정하여,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선(禪)에서 깨달음의 경지, 혹은 본래 청정한 마음의 성품을 표현하는 말이다. 순천 송광사의 근대 고승 금명 보정(錦溟 寶鼎) 선사는 「불조록찬송(佛祖錄贊頌)」에서 무학대사를 \"초연한?도의?기운은?조계의?달이며(超然道氣曹溪月), 천년의?향기로운?이름은?한양을?남겼다(千載芳名遺漢陽)\"라고 하여 '조계의 달'이라고 찬송하였다.\u003cbr\u003e\n조선후기 이후 청허 휴정과 그 문도에 의해서 한국 불교가 '평산 처림→ 태고 보우→ 환암 혼수'로 이어지는 법통으로 확정되면서 16세기 이후의 법통설에서는 대부분 무학이 법맥의 주류가 아니라고 비정하였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이다. 무학대사는 석가의 후신 또는 생불이라 불리었던 지공과 나옹의 대표적인 계승자로서, 고려말 조선초 불교 법맥의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법맥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brand":"Bookstore 12","offers":[{"title":"Default Title","offer_id":49212204876028,"sku":"9788984947702","price":31.46,"currency_code":"USD","in_stock":true}],"thumbnail_url":"\/\/cdn.shopify.com\/s\/files\/1\/0730\/4681\/9068\/files\/9788984947702.jpg?v=1781898853","url":"https:\/\/bookstore12.com\/products\/book-9788984947702","provider":"Bookstore 12","version":"1.0","type":"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