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_id":"book-9791189163006","title":"해병대의 뿌리 신현준(국군열전)","description":"‘해병대의 뿌리, 신현준’은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申鉉俊) 장군의 치열했던 삶을 다룬 평전(評傳)이다. 1949년 2월 1일, 초대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이 신현준 중령을 해병대사령관에 임명하고 해병대를 창설하라고 지시했다. 부대를 만들기 전에 사령관부터 임명한 것이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그런 까닭에 신현준은 부대의 위치, 병력, 무기, 보급품 등 모든 창설 업무를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이렇듯 해병대 창설이 신현준 한 사람에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후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일제강점기인 1915년, 경상북도 금릉(현재의 김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난 신현준은 처절할 정도의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던 신현준의 아버지는 신현준이 네 살 때인 1919년,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하지만 이국땅인 만주에서의 생활은 고향보다 더 힘들었다. 신현준 가족은 만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소작 농사를 지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1928년에는 가족 모두가 하얼빈 시내에 설치된 빈민구제소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신현준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자식을 교육시켰다. 이 덕분에 신현준은 하얼빈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에 이어 만주까지 집어삼켰다.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1932년 3월 1일,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그해, 신현준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하얼빈에 진출해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통역 일을 하게 된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서였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1934년, 신현준이 전속으로 통역을 했던 일본군 장교가 만주군 수석고문으로 전출을 가게 됐다. 만주군으로 옮겨가 통역 일을 계속하던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인 봉천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한다. 장교가 되어 좀 더 많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1936년 4월, 봉천군관학교 제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신현준은 만주군 장교로 변신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937년 7월, 일본은 만주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여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1년 12월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다. 스스로 파멸의 불구덩이에 뛰어든 것이다.\u003cbr\u003e\n\u003cbr\u003e\n 1945년 8월 15일, 결국 일본은 연합국 측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던 신현준은 한동안 광복군 평진대대 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46년 5월에 부산으로 귀국했다. 그해 6월에 해군의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에 견습사관(見習士官)으로 입대한 신현준은 11월 21일, 부위(중위)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해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1949년 2월 1일,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1949년 4월 15일, 드디어 진해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에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 총 380명으로 편성된 해병대가 창설식을 가졌다. 창설식이 끝난 후의 기념행사부터 해병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간부와 사병 전원이 완전군장을 하고 해발 500m의 천자봉(天子峰) 정상까지 행군을 한 것이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시작부터 남달랐던 해병대는 6·25전쟁 중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은 무적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1950년 8월, 북한군 7사단 선발대가 경남 통영까지 밀고 내려왔다. 8월 17일, 김성은이 지휘하는 1개 대대의 해병대가 통영에 상륙하여 북한군 7사단 선발대를 궤멸시켰다. 이 작전으로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1951년 6월에는 강원도 도솔산지구를 배경으로 공방을 벌인 도솔산전투에서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북한군이 24개의 요새를 구축한 도솔산지구는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 1사단도 탈환에 실패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런 곳을 한국 해병 1연대가 단 보름여 만에 탈환하자, 이에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이 해병 1연대에게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내린 것이다. \u003cbr\u003e\n\u003cbr\u003e\n 무(無)에서 시작하여 ‘귀신 잡는 해병’을 창조한 신현준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무공훈장 중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했다. 대한민국 군인들 중 태극무공훈장을 두 번이나 수훈한 사람은 신현준 장군이 유일하다.","brand":"My Store","offers":[{"title":"Default Title","offer_id":48961406042364,"sku":"9791189163006","price":14.61,"currency_code":"USD","in_stock":true}],"thumbnail_url":"\/\/cdn.shopify.com\/s\/files\/1\/0730\/4681\/9068\/files\/9791189163006.jpg?v=1776019580","url":"https:\/\/bookstore12.com\/products\/book-9791189163006","provider":"Bookstore 12","version":"1.0","type":"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