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duct_id":"book-9791192651491","title":"모란이 아닌 당신(시인수첩 시인선 109)","description":"피지 않은 모란이 자라는 뜰 - 조영란의 부재 시학\u003cbr\u003e\n조영란 시인이 시집 『모란이 아닌 당신』(시인수첩 시인선 109)을 펴냈다. 4부에 걸쳐 56편의 시를 싣고, 말미에 산문 「독특한 틈」을 더했다. 시인의 말 첫 문장은 \"도착하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 있다\"이다. 이 한 줄은 서문을 넘어 차례 전체를 다시 읽게 하는 색인이 된다. 끝내 오지 않은 것, 이미 떠나버린 것,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는 것. 시인은 그것들을 불러들이려 애쓰기보다, 그것들이 비워둔 자리의 윤곽을 더듬는다.\u003cbr\u003e\n 표제작 「모란이 아닌 당신」은 이 시집의 무게 중심이다. \"나의 뜰에는 모란은 없지만 \/ 아직도 모란은 자라고\". 김영랑의 시가 모란이 피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면, 이 시의 모란은 피지 않은 채로 자란다. 부재는 결핍으로 머물지 않고, \"기억으로 회자되는 사적인 계절\"을 길러내는 토양이 되어 준다. 제목의 '아닌' 또한 부정의 표지라기보다 누군가의 자리를 비워두는 문법에 더 가까워 보인다. 비워둔 그 자리에는 \"모른 체했던 시간들\"이 남아 있다. 시인은 그 시간을 \"영영 끝내지 못할 시 한 편\"이라  부른다.\u003cbr\u003e\n 이번 시집의 가장 독창적인 동작은 '떠내기'다. 「한순간의 스냅」에서 시인은 화산재 속에 몸의 형상만 남긴 폼페이 여인 앞에 선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는 떠낼 것이다 \/ 사라진 문장의 뼈와 살을,\". 「나무에 등을 대고」에서는 \"상처투성이 영혼을 탁본\"하고, 「흑백사진」에서는 \"어둠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을 인화\"한다. 사라진 것은 음각으로 남고, 시는 그 음각에 언어를 부어 형상을 되살린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작업의 위험도 알고 있다. 「도마의 일」에서 \"상처가 그려낸 그림을 아름다운 무늬라 오해\"하고, 끝내 \"그걸 운명이라고 믿게 될까 봐\" 두렵다고 고백한다. 상처를 떠내되 그것을 박제된 아름다움으로 굳히지 않으려는 태도가 시집 전편에 서늘한 윤리를 부여한다.\u003cbr\u003e\n 떠내는 손이 있다면, 멈추지 않는 발도 있다. 「배회의 기술」의 화자는 달이 보이는 골목을 찾아 헤매다 \"배회하는 일이 점점 기술이 되어간다\"라고 적는다. 이어 「화살표를 따라가다가」의 화자는 \"걸음을 멈춘 적 없는데 도착을 안 하네\"라고 중얼거리다 되묻는다. \"도착은 꼭 해야 하나\". 「종점을 향해」라는 만원 버스의 하루를 버티는 몸을 따라가다 \"아직, \/ 내리지 않는다\"라는 마지막 두 행으로 끝을 유예한다. 흥미롭게도 「화살표를 따라가다가」라는 「어떤 슬픔은 냄새를 가질 수도 있다」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결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시는 다시 출발한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 길을 잃는 일은 실패가 아니라 걸음을 이어 가는 또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시인의 말에 적힌 대로, 배회하던 하루에도 그 나름의 눈부심이 어려 있다.\u003cbr\u003e\n 관계를 다루는 시편에서도 시인은 거리를 지우지 않는다. 「수평」에서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선 두 사람은 밀어내지도, 끌어당기지도 않는다. 화자는 \"우리 사이에 있는 거리가 \/ 서로를 붙잡아주는 끈이었다\"라는 사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우리'라는 이름의 거리」는 오해와 침묵이 서로를 살찌우는 \"기형적인 평화\"를, 「불협화음」은 어긋나는 들숨과 날숨이 \"이상하게 아름답다\"라는 발견을 기록한다. 「마요네즈」는 서로의 경계가 지워진 관계의 끝을 비춘다. 경계가 무너진 끝에 남는 것은 \"누구의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섞임뿐이다. 가까움을 지키는 것은 포옹이 아니라 간격이라는 역설. 이 시집의 관계론은 거기서 비롯된다.\u003cbr\u003e\n 4부에 이르면 그 거리의 감각은 타자의 생으로 넓어진다. 「진열된 울음」은 펫숍 케이지 안의 강아지를, 「선반」은 가족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구가 되기 위해 벽이 된 사람\"을 비춘다. 「만보」에는 걸음 수를 채우려 \"돌아갈 이유가 없는 골목을 한 번 더\" 도는 저녁이 놓여 있다. 그중에서도 「애벌레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은 유독 오래 남는다. 개미 떼에게서 구해냈다고 믿은 애벌레가 \"자꾸 \/ 흩어졌던 개미들이 다시 모인 곳으로 기어간다\". 구하려는 손길마저 하나의 간섭일 수 있다는 듯, 시인은 그 어긋남을 교훈으로 바꾸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지켜본다.\u003cbr\u003e\n 시집 끝에 실린 산문 「독특한 틈」은 이 바라봄의 기원을 들려준다. 맞지 않는 모자를 쓴 채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어울리는 사람답게\" 살아온 시간이 먼저 펼쳐진다. 그 시간이 벌려 놓은 \"'가장 나답지 않은 나'와 '가장 나다운 나'와의 간극\"이 곧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이었다고 시인은 털어놓는다. 그러니 시는 해답을 내놓는 일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 된다. 안전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목격자', 시인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길이다.\u003cbr\u003e\n\u003cbr\u003e\n 1부의 마지막 시 「갱신」에서 시인은 손바닥을 펼친다. 너무 세게 움켜쥐어 짓무른 이름들, 굳은살이 된 자리, 지문만 남은 손. 그리고 바닥을 짚으며 \"조금 더 버텨보는 빈손\"이라 쓴다. 『모란이 아닌 당신』의 56편은 그 빈손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쥔 것 하나 없이, 쥐었던 자리만 선명한 채로.","brand":"Bookstore 12","offers":[{"title":"Default Title","offer_id":67813860409596,"sku":"9791192651491","price":13.48,"currency_code":"USD","in_stock":true}],"thumbnail_url":"\/\/cdn.shopify.com\/s\/files\/1\/0730\/4681\/9068\/files\/9791192651491.jpg?v=1792488847","url":"https:\/\/bookstore12.com\/products\/book-9791192651491","provider":"Bookstore 12","version":"1.0","type":"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