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사랑한 화가 윤두서(책마을 인물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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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년 5월 20일, 윤두서는 해남 윤씨 18대손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점괘가 길하자, 이 아기를 18대 종손 윤이석에게 입적시켰다. 윤두서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종손이 된 것이다. 해남 윤씨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연이어 나왔다. 남인 세력의 대표적 집안으로 재산도 학문도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의 종순이 어찌하여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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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벼슬길을 마다한 선비 화가 윤두서
그림 속에 백성을 담다!
■ 줄거리
남쪽 끝자락에 있는 해남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산처럼 높이 치솟은 파도는 집을 죄다 무너뜨리고 논과 밭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다. 굶주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날 궁리를 했다. 이때 윤두서가 마을 사람들한테 자신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염전을 만들라고 했다.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선뜻 재산을 내놓아 구휼한 것이다.
서당의 훈장이 걸핏하면 윤두서를 칭송하자 도령은 윤두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몰래 따라다닌다. 윤두서는 하루 종일 말을 바라보고, 짚신 삼는 노인을, 나물 캐는 아낙들을 바라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자세히 관찰한 것이다. 선비라면 산수화를 그려야지 왜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그리느냐는 도령의 말에 윤두서는 일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라고, 선비는 땀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윤두서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과 벗을 잃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학문을 연구하며,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작품의 특징
□ 유명 가문의 종손 윤두서, 선비 화가가 되다!
1668년 5월 20일, 윤두서는 해남 윤씨 18대손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점괘가 길하자, 이 아기를 18대 종손 윤이석에게 입적시켰다. 윤두서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종손이 된 것이다.
해남 윤씨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연이어 나왔다. 남인 세력의 대표적 집안으로 재산도 학문도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의 종순이 어찌하여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숙종 시절, 남인은 서인과의 당쟁에서 패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윤두서의 형제, 친지들도 온갖 모함을 받았다. 셋째 형 윤종서는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죽고, 친한 벗 이잠은 끌려간 지 나흘 만에 곤장을 맞다 숨을 거두었다. 결국 윤두서는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은일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윤두서는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술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 끊임없는 관찰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다!
윤두서는 말을 좋아해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해 보기를 몇 년 간 계속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그릴 때면 머슴아이를 세워 놓고서 돌아보고 또 움직이게 하면서 참모습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승려 그림을 그릴 때면 성총이라는 스님을 앞에 앉혀 두고 오랫동안 관찰해서 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윤두서는 끊임없는 관찰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두서는 인물, 산수, 동물, 정물, 풍속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이전 회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서양의 명암법을 반영한 정물화를 그렸으며, 말을 아끼고 사랑하여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가 돋보이는 말 그림을 그렸다. 윤두서는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났는데,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깊이 있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윤두서는 선비 화가로는 최초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윤두서에서 시작된 풍속화는 후에 김홍도, 신윤복에 이르러서 활짝 꽃피게 된다. <나물 캐는 여인>은 사대부 선비가 노동하는 여성을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윤두서는 일하는 백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진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풍속화의 시대를 연 선구적인 작품이다.
□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일상생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큰 기근이 들자 염전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또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받아야 할 빚 문서는 스스로 불에 태워 버렸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노비에 대해서 부당하게 대하는 것에 분노하고, 인격적으로 잘 대해 주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예절전>을 지으면서는 노비의 신분이 세습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윤두서의 노비에 대한 생각은 시대를 앞서간 진보적인 생각이었고, 이후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훌륭한 인품의 학자요, 화가였던 윤두서는 불후의 명작 <자화상>을 남긴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살아온 세월을 담은 일기와 같다. 윤두서의 슬픔과 번뇌, 고독과 절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게 윤두서는 자화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에 감기를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100여 년 뒤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은 윤두서의 덧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겼다. 해남의 종가에는 윤두서가 남긴 글씨와 그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림 속에 백성을 담다!
■ 줄거리
남쪽 끝자락에 있는 해남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산처럼 높이 치솟은 파도는 집을 죄다 무너뜨리고 논과 밭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다. 굶주림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날 궁리를 했다. 이때 윤두서가 마을 사람들한테 자신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염전을 만들라고 했다.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선뜻 재산을 내놓아 구휼한 것이다.
서당의 훈장이 걸핏하면 윤두서를 칭송하자 도령은 윤두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몰래 따라다닌다. 윤두서는 하루 종일 말을 바라보고, 짚신 삼는 노인을, 나물 캐는 아낙들을 바라본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자세히 관찰한 것이다. 선비라면 산수화를 그려야지 왜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그리느냐는 도령의 말에 윤두서는 일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라고, 선비는 땀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윤두서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과 벗을 잃었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학문을 연구하며,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작품의 특징
□ 유명 가문의 종손 윤두서, 선비 화가가 되다!
1668년 5월 20일, 윤두서는 해남 윤씨 18대손 윤이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이다. 윤선도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점괘가 길하자, 이 아기를 18대 종손 윤이석에게 입적시켰다. 윤두서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종손이 된 것이다.
해남 윤씨 집안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들이 연이어 나왔다. 남인 세력의 대표적 집안으로 재산도 학문도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의 종순이 어찌하여 화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숙종 시절, 남인은 서인과의 당쟁에서 패해 귀양을 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윤두서의 형제, 친지들도 온갖 모함을 받았다. 셋째 형 윤종서는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죽고, 친한 벗 이잠은 끌려간 지 나흘 만에 곤장을 맞다 숨을 거두었다. 결국 윤두서는 벼슬자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은일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윤두서는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술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 끊임없는 관찰로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다!
윤두서는 말을 좋아해서 말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말을 그릴 때면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해 보기를 몇 년 간 계속했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그릴 때면 머슴아이를 세워 놓고서 돌아보고 또 움직이게 하면서 참모습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승려 그림을 그릴 때면 성총이라는 스님을 앞에 앉혀 두고 오랫동안 관찰해서 그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윤두서는 끊임없는 관찰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두서는 인물, 산수, 동물, 정물, 풍속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이전 회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서양의 명암법을 반영한 정물화를 그렸으며, 말을 아끼고 사랑하여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가 돋보이는 말 그림을 그렸다. 윤두서는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났는데,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깊이 있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윤두서는 선비 화가로는 최초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윤두서에서 시작된 풍속화는 후에 김홍도, 신윤복에 이르러서 활짝 꽃피게 된다. <나물 캐는 여인>은 사대부 선비가 노동하는 여성을 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윤두서는 일하는 백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진지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만큼 완성도가 높지는 않지만 풍속화의 시대를 연 선구적인 작품이다.
□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일상생활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큰 기근이 들자 염전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또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재산을 나누어 주었고, 받아야 할 빚 문서는 스스로 불에 태워 버렸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노비에 대해서 부당하게 대하는 것에 분노하고, 인격적으로 잘 대해 주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예절전>을 지으면서는 노비의 신분이 세습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윤두서의 노비에 대한 생각은 시대를 앞서간 진보적인 생각이었고, 이후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훌륭한 인품의 학자요, 화가였던 윤두서는 불후의 명작 <자화상>을 남긴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살아온 세월을 담은 일기와 같다. 윤두서의 슬픔과 번뇌, 고독과 절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렇게 윤두서는 자화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에 감기를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100여 년 뒤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은 윤두서의 덧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겼다. 해남의 종가에는 윤두서가 남긴 글씨와 그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목차
목차
빚 문서를 모두 태워 버리다
아낙네를 훔쳐보다
형과 벗을 잃고 슬픔에 빠지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아낙네를 훔쳐보다
형과 벗을 잃고 슬픔에 빠지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저자
저자
김해원
저자 김해원은 글을 쓰면서 내내 윤두서 자화상을 들여다봤어요. 처음에는 부리부리한 눈이 무서워 보였지만, 자꾸 보니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화가 윤두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윤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윤두서가 살아온 길을 좇으면서 내내 즐거웠어요.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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