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반도의 세계전쟁
소장학자가 묻고 원로학자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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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한국전쟁 76주년을 맞으면서
세기의 유전(流轉)
스탈린이 학교 교재처럼 별로 크지 않은 지도를 압정으로 벽에 붙였다. "자,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봅시다. … 우리가 국경을 레닌그라드에서 더 멀리 옮겼어. 발트해 연안은 다시 우리 것이 됐는데, 여긴 옛날부터 러시아 땅이야. … 스탈린의 시선이 동부 국경 쪽으로 옮겨갔다. … 여긴 어떤가 … 쿠릴 열도는 이제 우리 것이고, 사할린도 전부 우리 거야. 다들 보시오. 얼마나 좋소! 그리고 여순항도 우리 것이고 대련도 우리 것이야." 그리고서 그는 담뱃대로 중국 전체를 죽 내리 그었다. "동청 철도도 우리 것이고. 중국, 몽골 … 다 좋아."
펠릭스 추예프 저, 이완종 역, 「몰로토프 회고록: 스탈린을 위한 변명」에서 인용
「세계와 한국전쟁」의 출판 후 7년이 지나 이 책을 전면 개정하고 체제를 달리하여 다시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새삼 역사적인 사건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어떤 특정한 개인의 역할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현실의 객관적인 제 여건들과 이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인물의 역할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국제 정치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어떤 나라들을 마치 사람들처럼 의인화하여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고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 혹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국익이란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흔히 이분들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은 돌이켜 살펴보면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예가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했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 와중에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혹은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에 생각이 미치면 그야말로 역사의 부조리 밖에는 머리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살육은 전선에서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오래된 갈등과 감정이 전쟁으로 초래된 혼란과 무질서의 틈바구니에서 살상으로 이어졌습니다(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2018).
3년간에 걸친 살육과 파괴 그리고 물거품이 된 고귀한 자기희생들 후에 한반도는 예전보다 더 요새화한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단은 한민족의 마음속에 더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전쟁의 살육과 파괴가 지금도 세계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두 차례나 대전을 치른 유럽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장은 한반도에도 미쳐서 76년 전의 끔찍한 참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인물은 바로 스탈린입니다. 물론 김일성도 오랫동안 전쟁을 하려고 몸이 달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 비정규 전투원들을 대규모로 훈련하여 남한에 파견하여 내부 혼란을 야기하는 것 같은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실은 이면에서 남북한이 모두 외부의 지원 없이 대규모 전면전을 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의 이런 갑작스러운 결정은 한반도의 전략적인 가치나 그 땅 자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에 임박하여서 이 땅을 쉽게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38도선 분할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중국 그리고 일본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에 집중했는데 앞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군 측이 승기를 잡고 중원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기까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 통일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한 후, 그리고 특히 중국 측의 집요한 영토 반환 요구에 직면한 후 그의 첫 반응이 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정을 한 시점에 마오쩌둥 일행도 모스크바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명목상 스탈린의 생일 축하차 방문이었지만 실은 중원 평정에 성공하고 소련이 차지한 중국 영토 내의 온갖 이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온갖 방식으로 이를 회피하려 하였지만 이들이 그 대안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척 움직임을 보이자 마침내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중원의 통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오 정권의 대만 통합을 좌절시킬 수는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차지한 이권의 일부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덕택에 대만은 아직도 중국에게 '수복'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49년 겨울 스탈린은 북한에 있는 소련 군사고문단에게 전쟁 준비 지시를 보냅니다. 김일성 일행에게는 다음 해 3월에서야 정식으로 개전 허락과 함께 여러 가지 전략 전술 지침도 하달합니다. 이 지침들은 단순히 전쟁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개전 전 남한에 평화 회담을 제안하고 남한 측이 거부하면 이를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같은 지침도 있습니다.
이 불행한 전쟁에 초강대국 둘을 포함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나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주역은 역시 소련 그리고 스탈린 개인이었습니다. 개전 자체가 그의 발상과 결정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하여서 중요한 결정들은, 정전협정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모두 그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북중 간의 갈등이나 이견 대립으로 합의가 어렵게 되는 경우에도 최종 판결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미국도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소련의 붕괴 후 기밀 문서들이 공개된 후였습니다. 키신저도 그때에서야 스탈린의 복잡한 계산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김일성도 전세가 역전되어 긴급하게 소련의 도움을 청했다가 한마디로 거절을 당하였을 때에 스탈린의 속셈을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속인 사람들 중에는 그의 측근인 중요 외교관들도 있었습니다. 말리크, 그로미코 … 최고위 외교관들도 모두 끝까지 스탈린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전 직후 말리크가 그 사이 보이콧 하고 있었던 UN의 안보이사회에 출석하여 미국이 UN의 이름으로 출병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급히 의견 개진을 하였지만 스탈린은 조용하게 이를 거부합니다. 그로미코는 훗날 은퇴 후 쓴 자서전에서도 스탈린의 이런 결정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스탈린이 미국 출병을 예상(기대)하였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그로미코 저, 박형규 역, 「그로미코 회고록」, 문학과사상사, 1990, 125쪽 이하).
최근 러시아에서는 김일성의 첫 소련 방문을 기념하는 동판을 설치하였는데 그 제막식에 양국의 외교부 수장이 참여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 자체보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념식이 있기까지 76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는가 생각할 것입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의 초상화를 자개로 조각한 꽃병과 모두 '26종 39점'의 선물을 갖고 소련을 찾았다고 합니다("정용수의 평양, 평양 사람들", 중앙일보, 2024.11.21, 27쪽). 그때만 하여도 스탈린은 전쟁은 물론, 고위 정치 영역에서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6개월 후에는 모든 것이 바뀝니다. 76년이 지난 후 새삼 양국이 그 사이 잊고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물을 만들고 제막 행사를 하는 것은 특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지난 세기 중반의 기억을 되살리며 불길한 생각을 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사이 북한과 소련의 후신 러시아 사이의 상대적 관계의 변화를 생각할 것입니다.
김일성과 북한에게 소련과 특히 스탈린은 엄청난 존재감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북한 점령 하에서 경험한 분들은 도처에 있던 김일성의 초상화와 함께 있던 엄청나게 큰 '스탈린 대원수'의 초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소련과 특히 스탈린의 위상과 영향력은 지금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로서 전후 두 초강대국의 하나로서의 위상만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물리적인 파괴와 살상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핵무기까지 등장하여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던 모든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들이 파괴된 묘지에 남겨진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와 스탈린은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마치 바티칸이나 교황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갖는 것과 유사한 희망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사이 이런 것은 신기루 같이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은 오늘날 인류의 희망보다는 폭군과 폭정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소련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스스로 붕괴한 실패한 체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는 70년대 말 구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체류하면서 그 나라 사회의 여러 면을 살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의 일반인 생활수준은 남한보다 훨씬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대외적으로 초강대국의 위상을 유지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후일 양국 간 관계가 정상화된 후 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야전 의료를 지원하던 전 소련 군의관 한 분을 초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개전 초기 미군의 인천 상륙 때까지 서울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가량 체류 후 그가 떠날 때 저는 그 당시에 비하여 서울이 어떤가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뜻밖에, 우유와 빵이 수량이나 종류, 질 모두가 소련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놀랍다는 것이었습니다(라종일, 「세계의 발견」,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2010, 28쪽). 현재 북한 주민은 구소련의 주민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있습니다. 북-러 관계의 새로운 동태는 어떤 것인지, 76년 전 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인이던 보편적인 이념이나 체제의 문제는 현재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앞으로 우크라이나전쟁 이후에도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매우 다른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양상이 출현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남북 사이 관계나 안보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100년간의 실패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76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관리하고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햇볕정책은 긍정적인 진전을 이룩하였지만 역시 기대했던 것 같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가히 100년간의 실패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 빠르게 주변의 정세에 반응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지도 나라를 지키지도 못하였고 수많은 영웅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 투쟁을 하나로 세력화된 집단으로 수행하지 못하여 자주 통일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잃고 국토가 분단되고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는 결말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도 역시 불행하였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두 정부는 모두 통일을 추구하면서 정치가 아닌 군사적인 해결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느 쪽이거나 모두 전면전을 수행할 자체적인 능력은 없었습니다. 각기 후견인 같은 두 초강대국에 더 많은 군사원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ㆍ소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룰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어느 한편에서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어느 편이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반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김일성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렵게 건국을 하였지만 모든 면에서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국민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해외에서도 특히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그저 현상 유지 정도의 관심뿐이었고 오히려 이승만이 이것을 위태롭게 할까 염려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승만 정부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더욱 '북진통일'같은 전혀 가당치 않은 구호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1949년 중반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북한의 군사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북한의 위협보다 이승만의 북진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1950년 봄 북한의 군사적인 위협이 점점 더 강화되자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특별 사절단을 보냅니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대표로 국회의원 2인(라용균, 이훈구)과 국회 사무총장(이종선), 그 당시로는 비용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였습니다(조규갑, "국회 사절단 노정일기", 4283.3.18.~4283.4.15). 이들은 거의 한 달 동안을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여러 요인들과 여러 곳을 방문하여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귀국 길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와도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지치고 실망한 사절단이 귀국한 지 2개월여 만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그때까지 별관심도 없던 "이상한 나라(strange land)"의 "이상한 전쟁(strange war)"에 뛰어듭니다(James Brady, The Coldest War, A Memoir of Korea, Superchic Media, Inc. 1990).
돌이켜 생각해 보면 김일성이 군사적인 해결만 집착하지 않고 평화통일 정책을 기초로 남한 정부의 취약점을 공략하였더라면 자신의 목적인 '국토완정'과 사회주의 실현을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통일 정책에는 항상 두 가지 차원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는 군사적인 차원입니다. 남침으로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남한 내부에서 이른바 진보적인 세력의 역량이 성숙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큰 변혁적인 계기를 만들지만 만약 자체 역량만으로 혁명을 성취할 수 없으면 그때 북한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국토완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두 노선을 추구하였지만 항상 군사적인 노선이 우선이었습니다. 전쟁 전의 대남노선에도 강동 정치학원에서 정치 교양과 훈련을 받은 남한 출신 비정규군 작전에 주력하였습니다.
만약 군사적인 노선보다 약체인 이승만 정부를 상대로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 등을 주제로 한 남북 협상을 제안하는 등 노선을 추구하였더라면 남한 내부나 나아가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들의 진보적 인사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여지도 없고 만약 동서 대립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지킨다는 약속으로 미국을 설득하였더라면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도하는 공산당 주도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민족의 역사상 대참사를 야기하고도 실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분단을 더욱 고착시킨 군사적 시도보다는 성공의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상상력을 더 확장하면 냉전 해소의 시기 현재의 대한민국보다는 여러 면에서 후진적이지만 통일된 나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나 혹은 좌우가 공존하면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정권이 바뀌는 나라가 될 수는 없었겠는가. 김일성이 그 당시 세계 정세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살펴볼 능력이 있었더라면 스탈린의 속셈에 그렇게 쉽게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정도의 지적 혹은 정치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이런 상상속 세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어 지금 우리가 보고 겪는 되풀이 되는 현실에 갇혀 있습니다.
매우 특이한 전쟁
한국전쟁 특히 그 원인에 관하여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 전쟁이 당시 한반도 내의 모순에 의하여 일어난 내전이라는 주장도 한때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해석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내전을 치루었습니다. 그간에 축적된 내부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38선에서 그리고 후방에서도 무장 투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국 대륙 내부에서 공산 측에 의한 통일의 급격한 변화와 이 변화에 대한 스탈린다운 독특한 반응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전쟁이 얼핏 76년 전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의 새로운 전조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물론 현 상황은 20세기 중엽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당시 소련은 내부의 취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두 초강대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 외에 소련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주국 같았습니다. 지난 세기 중엽 소련은 모든 면에서 북한의 모델이었습니다. 양국 간의 관계 양상도 상전벽해 같은 엄청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구소련의 붕괴 후 러시아는 한동안 북한과의 관계를 등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UN 상임 이사국으로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관한 제재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이어가야 하는 나라는 76년 전 당시와는 매우 다른 위상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북한이 남한과는 같은 민족도 아니고 단지 군사적인 적대적 관계일 뿐이라고 한 것은 그 사이 모든 면에서 남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미국 정보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 정부가 러시아 측에 먼저 파병을 제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와 북한은 정치나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앞으로 여러 면에서 활발하게 되는 경우 지켜 볼만한 양상이 많이 노출되리라 여깁니다.
북한의 실패
북한의 가장 큰 실패는 정권을 승계하는 것을 제도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2대의 집권자 김정일은 자기 이후 권력 승계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였다고 하지만 말년에 시간에 몰리자 결국은 3대 세습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권력 승계의 제도화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에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나라는 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미국도 최근에 대선 결과 불복으로 말썽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80년대 말에 가서야 이 문제가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생 독립국가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강대국들 중에도 이 문제 때문에 국내외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북한의 경우처럼 한 가족 세습의 가장 큰 문제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르는 개혁을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선대를 미이라로 만들고 계속 추앙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북진통일' 구호는 자신이 약체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북한의 호전적인 언사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독특한 북한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유격대 국가', '극장 국가', '가족 국가'. 그리고 최근에 '피줄 국가'라는 명칭도 나왔습니다(이형우, 「피줄 국가 북한: 구석기. 인류. 인종」, 박영사, 2024). 그 외에 '마피아 국가'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부나 국민들이 지켜야 하는 규범률이 대내적인 차원과 대외적인 차원에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에 착안한 명칭입니다. 어떻게 보아 이것은 근대국가의 공통적인 부정적 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북한은 이 정도가 특히 심하기 때문에 생긴 정의가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정부의 외교관들도 해외에서 위조지폐, 밀수, 마약 거래, 사이버 금융사기, 암살, 대규모 납치 등 폭력행위를 국가의 주요 시책같이 자행합니다. 이런 불법적인 행위들도 수령 혹은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내부에서 정당화 됩니다. 마피아 조직이 '오메르타' 같은 독특한 내적인 행위 규범이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많은 국가들이 실은 이런 불법적인 행위의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그 정도가 너무 크고 거의 국가적인 대외 활동에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특히 이런 명칭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모로 보아 북한은 실패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실패는 우리 자신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북한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 대한민국 정도의 개방적이고 민주적 발전을 이룩하였다면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물론 여러 가지 방식을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가면서 평화적 통일의 전망도 누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혹 북한의 실패가 민족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적어도 평화적인 통일의 길에 장애이며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위협입니다.
만약 북한 정부가 위기에 처하여 국내에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은 통일에 유리한 기회가 아니라 한반도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위기가 될 전망이 큽니다. 우선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위기입니다. 2천여만 주민의 일상적인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큰 문제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군사적인 위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인구에 비하여 큰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백만이 넘는 상비군 외에도 비정규 예비군도 수백만으로 추산됩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포함하여 화생방 분야의 무기도 개발하여 상당한 양을 비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큰 군을 통솔하는 정부가 무기력하게 되었을 때 그 부정적 여파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끝으로 국제 정치 차원의 위기도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네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이 한반도 일부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반응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이들의 반응을 우리가 바라는 바에 유리하도록 조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가장 큰 우려는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양측이 모두 고성능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76년 전 같은 전쟁을 하는 것은 매우 엄중한 고려를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이미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모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개전을 현 상황의 타개책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기록
민족적인 차원에서 한국전쟁 자체도 커다란 실패였지만 그 이후 한 세기가 가까워지는 시점까지 지속적인 실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 체제의 구축은커녕 갈등과 대결의 관리에도 실패하였습니다. 때때로 전향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는 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양측이 모두 이런 기회를 전략 혹은 전술적인 계기로 활용하는 차원을 탈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저변에는 상호간에 상대방에 대한 엄청난 적대감과 불신을 버릴 수 없었고 양측의 정권은 이런 상황을 순화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강대국 간의 밀고 당기기의 지루한 과정 끝에 마침내 정전이 이룩된 후부터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주역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우리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정전 역시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남한은 줄기차게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전에 반대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전쟁을 시작한 북한은 그리고 중국도 일부, 이미 승산이 없고 피해만 늘어가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였지만 스탈린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스탈린의 사후에서야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남정옥, "휴전 협상 배경과 정전협정 체결", 라종일 외, 「정전 70년, 정전체제의 이해와 역사적 전망」, 전쟁기념사업회, 2023).
이 전쟁 아닌 전쟁에 참가하였던 외국인들은 정전과 함께 대부분 이 전쟁을 잊고 각자 자기들의 일에 몰두하였습니다(양성철, 라종일 편,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예진, 1991). 정작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주관으로 전쟁을 치르지도 못한 한국인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새로운 적의와 새로운 전의에 목이 매인 채 손에 손에 무기를 잡은 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라종일, 「끝나지 않은 전쟁」, 도서출판 전예원, 1994).
실제로 한반도에는 때때로 무장 충돌이 발생하여 젊은 생명들이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특히 북한은 무장 병력을 남한에 침투시켜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일도 있었고 대규모 무장 병력이 남한에 침입하여 이른바 '혁명 기지촌'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그외에 남한의 군에 침투하여 병사들과 중하급 장교들이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공작도 하였습니다. 60년대 후반에도 역시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저강도 전투가 비무장 지대를 중심으로 한동안 지속되어 미군을 포함 양측에 각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문관현, 「임진 스카웃」, 정음서원, 2022).
특히 베트남전쟁 종결 직후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전쟁을 시작할 생각으로 중국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북한에 상당한 수의 비정규군을 침투시킨 일이 있지만 그 인원수나 활동 규모에 있어서 북한의 경우보다는 훨씬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종일,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창비, 2013). 그리고 한반도는 여전히 혹은 이전보다 더 엄중하게 무장 충돌 내지는 전면전의 위협 하에 있습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전쟁 가능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최근 공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누구보다 먼저 UN군 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는 조건하에 조기 정전할 것을 호소하였다가 소련으로부터 "미국에 대해 약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불이익을 초래하였다"는 질책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남정옥, "휴전 협상 배경과 정전 협정 체결", 라종일 외, 전게서, 111~112쪽). 그 후 스탈린의 변사로 전쟁을 끝내게 된 후에는 자신들이 승리하였다는 주장을 하며 승전 기념도 합니다.
이승만의 경우에도 반성이나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전쟁을 미리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처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전황이 명백한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기고 있는 것 같은 허위 성명으로 국민을 오도하고는 자신만 서울을 탈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시민이 적 치하에서 많은 고통과 처형 그리고 납치 등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런 면에 관하여 책임이 있는 조치나 사죄의 말은 없었습니다.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던 해에 중국의 한 매체가 어째서 한반도에는 아직도 평화가 요원한가 하는 주제의 글을 청하였을 때 저는 이 전쟁에 책임이 있는 두 지도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J. Y. Ra, "60 Years of Paradox and Failure", The China Daily, July 26, 2013, 라종일, "유감과 동정-60년의 역설과 실패", 라종일 외, 「정전 70년, 정전체제의 이해와 역사적 전망」).
오래 전이라 확실한 기억이 없지만 역시 전쟁인가 정전인가 30주년 되던 해 6월에 어떤 신문사에서 기고 청탁을 받았는데 전사한 인민군 병사의 위령비를 세워주자는 글을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첫 해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낙동강 주변에서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던 미군들이 인민군 4사단 병사의 유해를 23구나 발견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 유해를 보존하여 북한에 보내려 하였지만 북한은 수령을 거부하였습니다. 남한 당국도 북한군의 유해를 안장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결국 미군이 스님들을 초청하여 불교 예식을 치른 후 다시 안장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기사를 보고 매우 통탄하고 한심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령비' 이야기를 한 것이었는데 이 글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후에 기고 청탁을 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사내에서 약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게재하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기회가 있을 때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해 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물론 작은 것 같지만 결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에 희생이 된 동족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어리석음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상대방의 잘못 그리고 그에 대한 원한만이 있었습니다. 그 후 남한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이나 영화 같은 문화 영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고 이제 북한군 유해도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만 북한은 여전히 이 유해의 인수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미얀마 감옥에서 죽은 북한 테러리스트의 전기를 쓴 일이 있습니다. 이때의 경험도 우리가 아직 지나간 전쟁의 괴로운 경험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 10대 말 군에 입대하여 바로 특수 부대에 편입되어 엄청나게 고된 훈련을 겪고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미얀마에 보내어진 3인의 테러리스트 그룹 중의 1인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흉악한 테러리스트이며 그와 그의 집단이 저지른 행동은 어떤 처벌을 받아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의 현실과 함께 집권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에게 남은 인생을 감옥 밖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노력들은 별 성과가 없었고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불구의 몸으로 25년간의 수형 생활 끝에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그는 25세이었고 사망 당시 나이는 50세이어서 그의 일생은 정확하게 북한과 미얀마의 감옥으로 나뉘어진 셈입니다. 그때 나는 글로라도 민족의 실패로 망가진 그의 일생을 남겨 우리가 처한 분단의 현실에 관한 경각심을 환기하려 하였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책이 영역이 되기도 전에 1면 톱으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실고 따로 3면에 저의 회견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이어서 일본, 인도, 싱가포르, 네덜란드 등 … 여러 나라들의 매체들이 뒤를 이었고 몇 군데에서는 강연 초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몇 군데 신문이 이 책의 주지와는 결이 다른 정치적인 관점에서 논평을 한 이외에는 인터넷에 냉소적인 혹은 적대적인 반응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은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습니다. 전쟁을 하겠다고 졸라서 시작한 김일성은 곧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애원을 하였지만 스탈린에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큰 실패를 당한 이승만은 전쟁을 더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민족적인 차원의 비극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한을 지닌 채 남북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아픔을 지닌 채 한 세기 가깝게 살고 있는 민족은 드물 것입니다. 해방이 되고 남북이 갈리면서 월북과 월남의 인파가 이어지면서 이 아픔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이 비극을 크게 증폭시켰습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남측 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중에는 정치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산가족의 비극은 이어졌습니다. 납북된 후 혹은 방북 중 북한에 억류된 사람들, 탈북한 사람들이 북에 남기고 온 가족 친지 등 이산가족의 애달픈 사연들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의 한을 풀어줄 조치는 없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이런 문제는 애초에 지도자들이 관심있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점은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매우 상이한 점입니다. 그사이 4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이산가족의 문제나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남한 인사의 석방 문제는 중요 안건에 포함된 일도 없습니다. 혹 남북 관계가 반짝 좋아지는 계기에 양측의 협의와 각기 많은 사전 준비 후에 통제된 상황 하에 제한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어떤 상시적인 마련이나 우편 교환까지도 안 됩니다. 전쟁 중 헤어진 부자가 철새의 발목에 매달아 보낸 인식표로 마침내 생사를 확인하였지만 이웃나라 일본의 주선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회도 못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쟁 때 헤어진 부부가 이웃나라 중국의 경로를 통하여 잠시 재회를 하였지만 결국 또 헤어져야 하였다는 이야기나, 해방 직후 소련 군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가 47년 만에 서울에서 가족과 다시 만난 이야기도 있습니다(라종일, "유감과 동정"). 이런 이야기들은 후일 세상에 전하여져서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과 한국 민족의 무정, 무능한 실패에 관한 증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상황은 얼핏 76년 전을 상기하게 합니다. 남북은 여전히 적대적인 대치 상황을 개선하고 있지 못하고 세계는 또 다시 양 진영으로 나뉘어 호시탐탐 패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은 76년 전과는 많이 다른 유동적인 양상을 보이며 남ㆍ북 모두가 후원국에 의존하는 정도에도 그 당시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세계의 가장 강력한 네 강대국이 있고 아울러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의 극적인 연결 교량과 같은 지정학적인 숙명적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76년 전 우리는 가장 어리석고 슬픈 일을 저지르고 또 당하였습니다. 이제 우선 그 때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여깁니다.
세기의 유전(流轉)
스탈린이 학교 교재처럼 별로 크지 않은 지도를 압정으로 벽에 붙였다. "자,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는지 봅시다. … 우리가 국경을 레닌그라드에서 더 멀리 옮겼어. 발트해 연안은 다시 우리 것이 됐는데, 여긴 옛날부터 러시아 땅이야. … 스탈린의 시선이 동부 국경 쪽으로 옮겨갔다. … 여긴 어떤가 … 쿠릴 열도는 이제 우리 것이고, 사할린도 전부 우리 거야. 다들 보시오. 얼마나 좋소! 그리고 여순항도 우리 것이고 대련도 우리 것이야." 그리고서 그는 담뱃대로 중국 전체를 죽 내리 그었다. "동청 철도도 우리 것이고. 중국, 몽골 … 다 좋아."
펠릭스 추예프 저, 이완종 역, 「몰로토프 회고록: 스탈린을 위한 변명」에서 인용
「세계와 한국전쟁」의 출판 후 7년이 지나 이 책을 전면 개정하고 체제를 달리하여 다시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새삼 역사적인 사건에서 사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어떤 특정한 개인의 역할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현실의 객관적인 제 여건들과 이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이지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인물의 역할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국제 정치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어떤 나라들을 마치 사람들처럼 의인화하여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고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 혹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국익이란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흔히 이분들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새삼 하는 것은 돌이켜 살펴보면 국가를 운영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예가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했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 와중에 생명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혹은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에 생각이 미치면 그야말로 역사의 부조리 밖에는 머리에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살육은 전선에서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오래된 갈등과 감정이 전쟁으로 초래된 혼란과 무질서의 틈바구니에서 살상으로 이어졌습니다(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2018).
3년간에 걸친 살육과 파괴 그리고 물거품이 된 고귀한 자기희생들 후에 한반도는 예전보다 더 요새화한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단은 한민족의 마음속에 더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 전쟁의 살육과 파괴가 지금도 세계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두 차례나 대전을 치른 유럽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장은 한반도에도 미쳐서 76년 전의 끔찍한 참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인물은 바로 스탈린입니다. 물론 김일성도 오랫동안 전쟁을 하려고 몸이 달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 비정규 전투원들을 대규모로 훈련하여 남한에 파견하여 내부 혼란을 야기하는 것 같은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실은 이면에서 남북한이 모두 외부의 지원 없이 대규모 전면전을 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의 이런 갑작스러운 결정은 한반도의 전략적인 가치나 그 땅 자체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에 임박하여서 이 땅을 쉽게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38도선 분할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중국 그리고 일본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에 집중했는데 앞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산군 측이 승기를 잡고 중원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기까지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 통일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한 후, 그리고 특히 중국 측의 집요한 영토 반환 요구에 직면한 후 그의 첫 반응이 한국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정을 한 시점에 마오쩌둥 일행도 모스크바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명목상 스탈린의 생일 축하차 방문이었지만 실은 중원 평정에 성공하고 소련이 차지한 중국 영토 내의 온갖 이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스탈린은 온갖 방식으로 이를 회피하려 하였지만 이들이 그 대안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척 움직임을 보이자 마침내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중원의 통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오 정권의 대만 통합을 좌절시킬 수는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차지한 이권의 일부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덕택에 대만은 아직도 중국에게 '수복'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49년 겨울 스탈린은 북한에 있는 소련 군사고문단에게 전쟁 준비 지시를 보냅니다. 김일성 일행에게는 다음 해 3월에서야 정식으로 개전 허락과 함께 여러 가지 전략 전술 지침도 하달합니다. 이 지침들은 단순히 전쟁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개전 전 남한에 평화 회담을 제안하고 남한 측이 거부하면 이를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 같은 지침도 있습니다.
이 불행한 전쟁에 초강대국 둘을 포함하여 세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나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주역은 역시 소련 그리고 스탈린 개인이었습니다. 개전 자체가 그의 발상과 결정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하여서 중요한 결정들은, 정전협정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모두 그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북중 간의 갈등이나 이견 대립으로 합의가 어렵게 되는 경우에도 최종 판결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미국도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소련의 붕괴 후 기밀 문서들이 공개된 후였습니다. 키신저도 그때에서야 스탈린의 복잡한 계산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김일성도 전세가 역전되어 긴급하게 소련의 도움을 청했다가 한마디로 거절을 당하였을 때에 스탈린의 속셈을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속인 사람들 중에는 그의 측근인 중요 외교관들도 있었습니다. 말리크, 그로미코 … 최고위 외교관들도 모두 끝까지 스탈린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전 직후 말리크가 그 사이 보이콧 하고 있었던 UN의 안보이사회에 출석하여 미국이 UN의 이름으로 출병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급히 의견 개진을 하였지만 스탈린은 조용하게 이를 거부합니다. 그로미코는 훗날 은퇴 후 쓴 자서전에서도 스탈린의 이런 결정을 비판합니다. 이들은 스탈린이 미국 출병을 예상(기대)하였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그로미코 저, 박형규 역, 「그로미코 회고록」, 문학과사상사, 1990, 125쪽 이하).
최근 러시아에서는 김일성의 첫 소련 방문을 기념하는 동판을 설치하였는데 그 제막식에 양국의 외교부 수장이 참여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뉴스를 보는 사람들 중에는 이 사실 자체보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념식이 있기까지 76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는가 생각할 것입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의 초상화를 자개로 조각한 꽃병과 모두 '26종 39점'의 선물을 갖고 소련을 찾았다고 합니다("정용수의 평양, 평양 사람들", 중앙일보, 2024.11.21, 27쪽). 그때만 하여도 스탈린은 전쟁은 물론, 고위 정치 영역에서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6개월 후에는 모든 것이 바뀝니다. 76년이 지난 후 새삼 양국이 그 사이 잊고 있었던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물을 만들고 제막 행사를 하는 것은 특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물론 지난 세기 중반의 기억을 되살리며 불길한 생각을 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사이 북한과 소련의 후신 러시아 사이의 상대적 관계의 변화를 생각할 것입니다.
김일성과 북한에게 소련과 특히 스탈린은 엄청난 존재감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을 북한 점령 하에서 경험한 분들은 도처에 있던 김일성의 초상화와 함께 있던 엄청나게 큰 '스탈린 대원수'의 초상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소련과 특히 스탈린의 위상과 영향력은 지금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로서 전후 두 초강대국의 하나로서의 위상만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물리적인 파괴와 살상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핵무기까지 등장하여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던 모든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가치들이 파괴된 묘지에 남겨진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와 스탈린은 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마치 바티칸이나 교황이 천주교 신자들에게 갖는 것과 유사한 희망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사이 이런 것은 신기루 같이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은 오늘날 인류의 희망보다는 폭군과 폭정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소련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스스로 붕괴한 실패한 체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는 70년대 말 구소련을 방문하여 1개월여 체류하면서 그 나라 사회의 여러 면을 살펴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의 일반인 생활수준은 남한보다 훨씬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대외적으로 초강대국의 위상을 유지하는지 의문이었습니다. 후일 양국 간 관계가 정상화된 후 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야전 의료를 지원하던 전 소련 군의관 한 분을 초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개전 초기 미군의 인천 상륙 때까지 서울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가량 체류 후 그가 떠날 때 저는 그 당시에 비하여 서울이 어떤가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뜻밖에, 우유와 빵이 수량이나 종류, 질 모두가 소련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놀랍다는 것이었습니다(라종일, 「세계의 발견」,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2010, 28쪽). 현재 북한 주민은 구소련의 주민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있습니다. 북-러 관계의 새로운 동태는 어떤 것인지, 76년 전 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인이던 보편적인 이념이나 체제의 문제는 현재 어떻게 바뀌어 있는지, 앞으로 우크라이나전쟁 이후에도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매우 다른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는 어떤 양상이 출현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남북 사이 관계나 안보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100년간의 실패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76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관리하고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햇볕정책은 긍정적인 진전을 이룩하였지만 역시 기대했던 것 같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니고 가히 100년간의 실패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발 빠르게 주변의 정세에 반응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지도 나라를 지키지도 못하였고 수많은 영웅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 투쟁을 하나로 세력화된 집단으로 수행하지 못하여 자주 통일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잃고 국토가 분단되고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는 결말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도 역시 불행하였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두 정부는 모두 통일을 추구하면서 정치가 아닌 군사적인 해결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어느 쪽이거나 모두 전면전을 수행할 자체적인 능력은 없었습니다. 각기 후견인 같은 두 초강대국에 더 많은 군사원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ㆍ소 양국 모두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룰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어느 한편에서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어느 편이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반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승만은 김일성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렵게 건국을 하였지만 모든 면에서 나라를 제대로 운영할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국민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해외에서도 특히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그저 현상 유지 정도의 관심뿐이었고 오히려 이승만이 이것을 위태롭게 할까 염려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승만 정부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더욱 '북진통일'같은 전혀 가당치 않은 구호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1949년 중반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북한의 군사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북한의 위협보다 이승만의 북진에 더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1950년 봄 북한의 군사적인 위협이 점점 더 강화되자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 특별 사절단을 보냅니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대표로 국회의원 2인(라용균, 이훈구)과 국회 사무총장(이종선), 그 당시로는 비용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였습니다(조규갑, "국회 사절단 노정일기", 4283.3.18.~4283.4.15). 이들은 거의 한 달 동안을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하여 여러 요인들과 여러 곳을 방문하여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귀국 길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와도 만나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지치고 실망한 사절단이 귀국한 지 2개월여 만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그때까지 별관심도 없던 "이상한 나라(strange land)"의 "이상한 전쟁(strange war)"에 뛰어듭니다(James Brady, The Coldest War, A Memoir of Korea, Superchic Media, Inc. 1990).
돌이켜 생각해 보면 김일성이 군사적인 해결만 집착하지 않고 평화통일 정책을 기초로 남한 정부의 취약점을 공략하였더라면 자신의 목적인 '국토완정'과 사회주의 실현을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통일 정책에는 항상 두 가지 차원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는 군사적인 차원입니다. 남침으로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남한 내부에서 이른바 진보적인 세력의 역량이 성숙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큰 변혁적인 계기를 만들지만 만약 자체 역량만으로 혁명을 성취할 수 없으면 그때 북한이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국토완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두 노선을 추구하였지만 항상 군사적인 노선이 우선이었습니다. 전쟁 전의 대남노선에도 강동 정치학원에서 정치 교양과 훈련을 받은 남한 출신 비정규군 작전에 주력하였습니다.
만약 군사적인 노선보다 약체인 이승만 정부를 상대로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 등을 주제로 한 남북 협상을 제안하는 등 노선을 추구하였더라면 남한 내부나 나아가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여러 나라들의 진보적 인사들의 공감도 얻을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여지도 없고 만약 동서 대립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지킨다는 약속으로 미국을 설득하였더라면 성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도하는 공산당 주도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민족의 역사상 대참사를 야기하고도 실패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분단을 더욱 고착시킨 군사적 시도보다는 성공의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상상력을 더 확장하면 냉전 해소의 시기 현재의 대한민국보다는 여러 면에서 후진적이지만 통일된 나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남북의 평화적 공존이나 혹은 좌우가 공존하면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하여 정권이 바뀌는 나라가 될 수는 없었겠는가. 김일성이 그 당시 세계 정세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살펴볼 능력이 있었더라면 스탈린의 속셈에 그렇게 쉽게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정도의 지적 혹은 정치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이런 상상속 세계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어 지금 우리가 보고 겪는 되풀이 되는 현실에 갇혀 있습니다.
매우 특이한 전쟁
한국전쟁 특히 그 원인에 관하여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 전쟁이 당시 한반도 내의 모순에 의하여 일어난 내전이라는 주장도 한때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런 해석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내전을 치루었습니다. 그간에 축적된 내부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38선에서 그리고 후방에서도 무장 투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국 대륙 내부에서 공산 측에 의한 통일의 급격한 변화와 이 변화에 대한 스탈린다운 독특한 반응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전쟁이 얼핏 76년 전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의 새로운 전조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도 있지만 물론 현 상황은 20세기 중엽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당시 소련은 내부의 취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두 초강대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 외에 소련은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종주국 같았습니다. 지난 세기 중엽 소련은 모든 면에서 북한의 모델이었습니다. 양국 간의 관계 양상도 상전벽해 같은 엄청난 변화를 보여줍니다. 구소련의 붕괴 후 러시아는 한동안 북한과의 관계를 등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UN 상임 이사국으로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관한 제재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오늘날 북한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이어가야 하는 나라는 76년 전 당시와는 매우 다른 위상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북한이 남한과는 같은 민족도 아니고 단지 군사적인 적대적 관계일 뿐이라고 한 것은 그 사이 모든 면에서 남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미국 정보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 정부가 러시아 측에 먼저 파병을 제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러시아와 북한은 정치나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앞으로 여러 면에서 활발하게 되는 경우 지켜 볼만한 양상이 많이 노출되리라 여깁니다.
북한의 실패
북한의 가장 큰 실패는 정권을 승계하는 것을 제도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2대의 집권자 김정일은 자기 이후 권력 승계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였다고 하지만 말년에 시간에 몰리자 결국은 3대 세습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권력 승계의 제도화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에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나라는 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미국도 최근에 대선 결과 불복으로 말썽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80년대 말에 가서야 이 문제가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생 독립국가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강대국들 중에도 이 문제 때문에 국내외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북한의 경우처럼 한 가족 세습의 가장 큰 문제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르는 개혁을 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선대를 미이라로 만들고 계속 추앙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북진통일' 구호는 자신이 약체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북한의 호전적인 언사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독특한 북한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유격대 국가', '극장 국가', '가족 국가'. 그리고 최근에 '피줄 국가'라는 명칭도 나왔습니다(이형우, 「피줄 국가 북한: 구석기. 인류. 인종」, 박영사, 2024). 그 외에 '마피아 국가'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부나 국민들이 지켜야 하는 규범률이 대내적인 차원과 대외적인 차원에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에 착안한 명칭입니다. 어떻게 보아 이것은 근대국가의 공통적인 부정적 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북한은 이 정도가 특히 심하기 때문에 생긴 정의가 아닌가 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정부의 외교관들도 해외에서 위조지폐, 밀수, 마약 거래, 사이버 금융사기, 암살, 대규모 납치 등 폭력행위를 국가의 주요 시책같이 자행합니다. 이런 불법적인 행위들도 수령 혹은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내부에서 정당화 됩니다. 마피아 조직이 '오메르타' 같은 독특한 내적인 행위 규범이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많은 국가들이 실은 이런 불법적인 행위의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그 정도가 너무 크고 거의 국가적인 대외 활동에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특히 이런 명칭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모로 보아 북한은 실패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실패는 우리 자신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북한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혹은 사회적으로 대한민국 정도의 개방적이고 민주적 발전을 이룩하였다면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물론 여러 가지 방식을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가면서 평화적 통일의 전망도 누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혹 북한의 실패가 민족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적어도 평화적인 통일의 길에 장애이며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위협입니다.
만약 북한 정부가 위기에 처하여 국내에 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것은 통일에 유리한 기회가 아니라 한반도의 안정을 위협하는 큰 위기가 될 전망이 큽니다. 우선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위기입니다. 2천여만 주민의 일상적인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큰 문제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군사적인 위기입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은 인구에 비하여 큰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백만이 넘는 상비군 외에도 비정규 예비군도 수백만으로 추산됩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포함하여 화생방 분야의 무기도 개발하여 상당한 양을 비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큰 군을 통솔하는 정부가 무기력하게 되었을 때 그 부정적 여파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끝으로 국제 정치 차원의 위기도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네 나라가 있습니다. 이들이 한반도 일부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반응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단지 이들의 반응을 우리가 바라는 바에 유리하도록 조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가장 큰 우려는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양측이 모두 고성능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76년 전 같은 전쟁을 하는 것은 매우 엄중한 고려를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이미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모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개전을 현 상황의 타개책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기록
민족적인 차원에서 한국전쟁 자체도 커다란 실패였지만 그 이후 한 세기가 가까워지는 시점까지 지속적인 실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 체제의 구축은커녕 갈등과 대결의 관리에도 실패하였습니다. 때때로 전향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는 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양측이 모두 이런 기회를 전략 혹은 전술적인 계기로 활용하는 차원을 탈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저변에는 상호간에 상대방에 대한 엄청난 적대감과 불신을 버릴 수 없었고 양측의 정권은 이런 상황을 순화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강대국 간의 밀고 당기기의 지루한 과정 끝에 마침내 정전이 이룩된 후부터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주역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우리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정전 역시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남한은 줄기차게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전에 반대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전쟁을 시작한 북한은 그리고 중국도 일부, 이미 승산이 없고 피해만 늘어가는 전쟁을 끝내고 싶어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였지만 스탈린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스탈린의 사후에서야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남정옥, "휴전 협상 배경과 정전협정 체결", 라종일 외, 「정전 70년, 정전체제의 이해와 역사적 전망」, 전쟁기념사업회, 2023).
이 전쟁 아닌 전쟁에 참가하였던 외국인들은 정전과 함께 대부분 이 전쟁을 잊고 각자 자기들의 일에 몰두하였습니다(양성철, 라종일 편,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예진, 1991). 정작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주관으로 전쟁을 치르지도 못한 한국인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새로운 적의와 새로운 전의에 목이 매인 채 손에 손에 무기를 잡은 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라종일, 「끝나지 않은 전쟁」, 도서출판 전예원, 1994).
실제로 한반도에는 때때로 무장 충돌이 발생하여 젊은 생명들이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특히 북한은 무장 병력을 남한에 침투시켜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일도 있었고 대규모 무장 병력이 남한에 침입하여 이른바 '혁명 기지촌'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그외에 남한의 군에 침투하여 병사들과 중하급 장교들이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도록 하는 공작도 하였습니다. 60년대 후반에도 역시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저강도 전투가 비무장 지대를 중심으로 한동안 지속되어 미군을 포함 양측에 각기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문관현, 「임진 스카웃」, 정음서원, 2022).
특히 베트남전쟁 종결 직후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전쟁을 시작할 생각으로 중국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한의 경우에도 북한에 상당한 수의 비정규군을 침투시킨 일이 있지만 그 인원수나 활동 규모에 있어서 북한의 경우보다는 훨씬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라종일,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창비, 2013). 그리고 한반도는 여전히 혹은 이전보다 더 엄중하게 무장 충돌 내지는 전면전의 위협 하에 있습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전쟁 가능성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최근 공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누구보다 먼저 UN군 측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는 조건하에 조기 정전할 것을 호소하였다가 소련으로부터 "미국에 대해 약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정치적 불이익을 초래하였다"는 질책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남정옥, "휴전 협상 배경과 정전 협정 체결", 라종일 외, 전게서, 111~112쪽). 그 후 스탈린의 변사로 전쟁을 끝내게 된 후에는 자신들이 승리하였다는 주장을 하며 승전 기념도 합니다.
이승만의 경우에도 반성이나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전쟁을 미리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처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전황이 명백한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기고 있는 것 같은 허위 성명으로 국민을 오도하고는 자신만 서울을 탈출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시민이 적 치하에서 많은 고통과 처형 그리고 납치 등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런 면에 관하여 책임이 있는 조치나 사죄의 말은 없었습니다.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던 해에 중국의 한 매체가 어째서 한반도에는 아직도 평화가 요원한가 하는 주제의 글을 청하였을 때 저는 이 전쟁에 책임이 있는 두 지도자들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글을 기고하였습니다(J. Y. Ra, "60 Years of Paradox and Failure", The China Daily, July 26, 2013, 라종일, "유감과 동정-60년의 역설과 실패", 라종일 외, 「정전 70년, 정전체제의 이해와 역사적 전망」).
오래 전이라 확실한 기억이 없지만 역시 전쟁인가 정전인가 30주년 되던 해 6월에 어떤 신문사에서 기고 청탁을 받았는데 전사한 인민군 병사의 위령비를 세워주자는 글을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첫 해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낙동강 주변에서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던 미군들이 인민군 4사단 병사의 유해를 23구나 발견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 유해를 보존하여 북한에 보내려 하였지만 북한은 수령을 거부하였습니다. 남한 당국도 북한군의 유해를 안장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결국 미군이 스님들을 초청하여 불교 예식을 치른 후 다시 안장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기사를 보고 매우 통탄하고 한심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령비' 이야기를 한 것이었는데 이 글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후에 기고 청탁을 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사내에서 약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게재하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기회가 있을 때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해 보았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물론 작은 것 같지만 결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에 희생이 된 동족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어리석음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상대방의 잘못 그리고 그에 대한 원한만이 있었습니다. 그 후 남한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은 나아진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이나 영화 같은 문화 영역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고 이제 북한군 유해도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만 북한은 여전히 이 유해의 인수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미얀마 감옥에서 죽은 북한 테러리스트의 전기를 쓴 일이 있습니다. 이때의 경험도 우리가 아직 지나간 전쟁의 괴로운 경험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 10대 말 군에 입대하여 바로 특수 부대에 편입되어 엄청나게 고된 훈련을 겪고 마침내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미얀마에 보내어진 3인의 테러리스트 그룹 중의 1인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흉악한 테러리스트이며 그와 그의 집단이 저지른 행동은 어떤 처벌을 받아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의 현실과 함께 집권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대통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에게 남은 인생을 감옥 밖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노력들은 별 성과가 없었고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불구의 몸으로 25년간의 수형 생활 끝에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그는 25세이었고 사망 당시 나이는 50세이어서 그의 일생은 정확하게 북한과 미얀마의 감옥으로 나뉘어진 셈입니다. 그때 나는 글로라도 민족의 실패로 망가진 그의 일생을 남겨 우리가 처한 분단의 현실에 관한 경각심을 환기하려 하였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책이 영역이 되기도 전에 1면 톱으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실고 따로 3면에 저의 회견 기사를 게재하였습니다. 이어서 일본, 인도, 싱가포르, 네덜란드 등 … 여러 나라들의 매체들이 뒤를 이었고 몇 군데에서는 강연 초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몇 군데 신문이 이 책의 주지와는 결이 다른 정치적인 관점에서 논평을 한 이외에는 인터넷에 냉소적인 혹은 적대적인 반응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어리석고 슬픈 전쟁은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습니다. 전쟁을 하겠다고 졸라서 시작한 김일성은 곧 전쟁을 끝내고 싶어서 애원을 하였지만 스탈린에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큰 실패를 당한 이승만은 전쟁을 더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민족적인 차원의 비극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한을 지닌 채 남북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아픔을 지닌 채 한 세기 가깝게 살고 있는 민족은 드물 것입니다. 해방이 되고 남북이 갈리면서 월북과 월남의 인파가 이어지면서 이 아픔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이 비극을 크게 증폭시켰습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남측 인사들을 북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중에는 정치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산가족의 비극은 이어졌습니다. 납북된 후 혹은 방북 중 북한에 억류된 사람들, 탈북한 사람들이 북에 남기고 온 가족 친지 등 이산가족의 애달픈 사연들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의 한을 풀어줄 조치는 없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이런 문제는 애초에 지도자들이 관심있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점은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매우 상이한 점입니다. 그사이 4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이산가족의 문제나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남한 인사의 석방 문제는 중요 안건에 포함된 일도 없습니다. 혹 남북 관계가 반짝 좋아지는 계기에 양측의 협의와 각기 많은 사전 준비 후에 통제된 상황 하에 제한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어떤 상시적인 마련이나 우편 교환까지도 안 됩니다. 전쟁 중 헤어진 부자가 철새의 발목에 매달아 보낸 인식표로 마침내 생사를 확인하였지만 이웃나라 일본의 주선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회도 못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전쟁 때 헤어진 부부가 이웃나라 중국의 경로를 통하여 잠시 재회를 하였지만 결국 또 헤어져야 하였다는 이야기나, 해방 직후 소련 군정에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가 47년 만에 서울에서 가족과 다시 만난 이야기도 있습니다(라종일, "유감과 동정"). 이런 이야기들은 후일 세상에 전하여져서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과 한국 민족의 무정, 무능한 실패에 관한 증언으로 남을 것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상황은 얼핏 76년 전을 상기하게 합니다. 남북은 여전히 적대적인 대치 상황을 개선하고 있지 못하고 세계는 또 다시 양 진영으로 나뉘어 호시탐탐 패권을 노리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은 76년 전과는 많이 다른 유동적인 양상을 보이며 남ㆍ북 모두가 후원국에 의존하는 정도에도 그 당시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세계의 가장 강력한 네 강대국이 있고 아울러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사이의 극적인 연결 교량과 같은 지정학적인 숙명적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76년 전 우리는 가장 어리석고 슬픈 일을 저지르고 또 당하였습니다. 이제 우선 그 때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여깁니다.
목차
목차
서문 1
세기의 유전(流轉) 1|100년간의 실패 7|매우 특이한 전쟁 10|북한의 실패 12|실패의 기록 14
Ⅰ. 지정학의 역설
지정학의 역설 27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서 일어난 중요한 전쟁 27|전쟁, 매력적인 정치 수단 35|한국전쟁의 독특한 성격 40
Ⅱ. 한반도의 세계전쟁
1 불안한 여명 49
해방 공간의 빛과 어둠 50|열망과 현실의 간극 53|전승국의 신탁통치론 근거 57|성찰 없는 분열적 태도 61|오스트리아의 교훈 66|갑작스러운 분단과 비전의 문제 70|전승국이 아닌 나라 74|전승국이 된 프랑스 사례 77|세계사적 흐름과 만나다 80|역사적 산물로서의 근대 국가 82|두 초강대국 시대의 도래 83
2 반도에 드리운 그림자 86
'세계'의 관점 86|중화의 세계, 일본의 세계 87|미국의 세계, 소련의 세계 89|미국의 세계 - '자유'의 사명 94|미국의 세계 - 아시아로 확대 96|20세기 미국의 이상주의 99|소련의 세계 - 동방으로 팽창 103|소련의 세계 - 동아시아에서 대두 105|아관파천과 러일전쟁 107|20세기 또 하나의 이념 보루 111|한반도에서 대면한 두 세계 114|문제의 1945년 한반도 116
3 강대국의 장기판 119
'하나의 세계'를 거부한 스탈린 119|두 나라의 영향력 행사 방식 차이 121|새로운 패권국 미국의 안일(安逸) 122|한국전쟁 이전의 파열음 127|대리전쟁 128|남북한의 군사주의 팽배 130|스탈린의 제국과 한반도 135|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꾼 스탈린 138|스탈린이 느낀 유럽 방면의 압력 144|새로운 중국의 등장 146|복잡한 게임의 전개 148|모스크바의 마오쩌둥과 스탈린 150|스탈린의 전쟁 결정 152|김일성은 하나의 졸에 불과했는가? 157|의도와는 다른 결말 159
Ⅲ. 세계의 한국전쟁
1 소련과 중국 -전쟁의 발단과 진행- 167
한국전쟁의 기원 논쟁 167|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 문제 168|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스탈린의 복잡한 셈법 170|중일전쟁 당시의 앙금 172|미국의 개입과 소련의 대중국 정책 176|계속 바뀌는 소련의 대중국 정책 179|혁명 성공 이후 모스크바 협상 183|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187|마오쩌둥의 반격 190|미국의 움직임 194|다시 모스크바로 - 스탈린이 한반도에 주목하는 시점 196|스탈린의 한반도 개전 구상 198|개전 당시 미국과 서방의 판단 200|김일성과 스탈린의 만남 201|개전 결정에서 배제된 중국의 사정 205|중국군의 출병 207|중국의 군사적 성공 213|소련 공군의 참전 215|소련과 중국, 북한의 관계 정립 218|계속되는 중국과 북한의 갈등 220|정전 문제의 고려 223|거대한 게임판과 현실 226
2 영국과 미국 -한국전쟁과 '특별한 관계'- 229
서방 측의 주역과 조역 229|영국의 비관적 전망 231|미국의 입장 234|미국의 즉각적인 참전 결정 237|미국 참전에 대한 영국의 반응 239|전쟁 전 영국이 구상한 '특별한 관계' 241|한국전쟁과 '특별한 관계' 243|'특별한 관계'의 새로운 전개 247|영국의 대응과 기여 249|영국의 정권 교체 254|휴전 회담과 영국 255|제네바 '정치 회담' 257|한국전쟁 이후의 세계 263
Ⅳ. 세계 시민 전쟁
1 세계의 이념 지형과 한국전쟁 267
세계 전쟁과 한국인 267|시민들의 전쟁: 영국 269|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제 273|시민들의 전쟁: 프랑스 276
2 패전국의 한국전쟁 285
독일의 재무장 285|독일의 '한국 붐' 290|한국전쟁과 일본의 안보 전략 291|일본의 경제 부활 297|일본 시민들과 한국전쟁 300
3 중재자와 국외자 303
그 외의 나라들 313
맺음말 316
부록: 김철, -이 글을 읽고 나서- 327
사항색인 331
세기의 유전(流轉) 1|100년간의 실패 7|매우 특이한 전쟁 10|북한의 실패 12|실패의 기록 14
Ⅰ. 지정학의 역설
지정학의 역설 27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서 일어난 중요한 전쟁 27|전쟁, 매력적인 정치 수단 35|한국전쟁의 독특한 성격 40
Ⅱ. 한반도의 세계전쟁
1 불안한 여명 49
해방 공간의 빛과 어둠 50|열망과 현실의 간극 53|전승국의 신탁통치론 근거 57|성찰 없는 분열적 태도 61|오스트리아의 교훈 66|갑작스러운 분단과 비전의 문제 70|전승국이 아닌 나라 74|전승국이 된 프랑스 사례 77|세계사적 흐름과 만나다 80|역사적 산물로서의 근대 국가 82|두 초강대국 시대의 도래 83
2 반도에 드리운 그림자 86
'세계'의 관점 86|중화의 세계, 일본의 세계 87|미국의 세계, 소련의 세계 89|미국의 세계 - '자유'의 사명 94|미국의 세계 - 아시아로 확대 96|20세기 미국의 이상주의 99|소련의 세계 - 동방으로 팽창 103|소련의 세계 - 동아시아에서 대두 105|아관파천과 러일전쟁 107|20세기 또 하나의 이념 보루 111|한반도에서 대면한 두 세계 114|문제의 1945년 한반도 116
3 강대국의 장기판 119
'하나의 세계'를 거부한 스탈린 119|두 나라의 영향력 행사 방식 차이 121|새로운 패권국 미국의 안일(安逸) 122|한국전쟁 이전의 파열음 127|대리전쟁 128|남북한의 군사주의 팽배 130|스탈린의 제국과 한반도 135|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꾼 스탈린 138|스탈린이 느낀 유럽 방면의 압력 144|새로운 중국의 등장 146|복잡한 게임의 전개 148|모스크바의 마오쩌둥과 스탈린 150|스탈린의 전쟁 결정 152|김일성은 하나의 졸에 불과했는가? 157|의도와는 다른 결말 159
Ⅲ. 세계의 한국전쟁
1 소련과 중국 -전쟁의 발단과 진행- 167
한국전쟁의 기원 논쟁 167|중국 동북 지역의 이권 문제 168|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스탈린의 복잡한 셈법 170|중일전쟁 당시의 앙금 172|미국의 개입과 소련의 대중국 정책 176|계속 바뀌는 소련의 대중국 정책 179|혁명 성공 이후 모스크바 협상 183|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187|마오쩌둥의 반격 190|미국의 움직임 194|다시 모스크바로 - 스탈린이 한반도에 주목하는 시점 196|스탈린의 한반도 개전 구상 198|개전 당시 미국과 서방의 판단 200|김일성과 스탈린의 만남 201|개전 결정에서 배제된 중국의 사정 205|중국군의 출병 207|중국의 군사적 성공 213|소련 공군의 참전 215|소련과 중국, 북한의 관계 정립 218|계속되는 중국과 북한의 갈등 220|정전 문제의 고려 223|거대한 게임판과 현실 226
2 영국과 미국 -한국전쟁과 '특별한 관계'- 229
서방 측의 주역과 조역 229|영국의 비관적 전망 231|미국의 입장 234|미국의 즉각적인 참전 결정 237|미국 참전에 대한 영국의 반응 239|전쟁 전 영국이 구상한 '특별한 관계' 241|한국전쟁과 '특별한 관계' 243|'특별한 관계'의 새로운 전개 247|영국의 대응과 기여 249|영국의 정권 교체 254|휴전 회담과 영국 255|제네바 '정치 회담' 257|한국전쟁 이후의 세계 263
Ⅳ. 세계 시민 전쟁
1 세계의 이념 지형과 한국전쟁 267
세계 전쟁과 한국인 267|시민들의 전쟁: 영국 269|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제 273|시민들의 전쟁: 프랑스 276
2 패전국의 한국전쟁 285
독일의 재무장 285|독일의 '한국 붐' 290|한국전쟁과 일본의 안보 전략 291|일본의 경제 부활 297|일본 시민들과 한국전쟁 300
3 중재자와 국외자 303
그 외의 나라들 313
맺음말 316
부록: 김철, -이 글을 읽고 나서- 327
사항색인 331
저자
저자
라종일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ㆍ석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안기부 2차장; 국정원 1차장, 주 영국대사, 대통령실 국가안보보좌관, 주 일본대사, 우석대학교 총장을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와 경희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대표 저서로는 「현대서구정치론」,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의 발견」, 「세계의 발견」, 「낙동강」,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장성택의 길-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 「청년을 위한 정치는 없다」, 「밤드리 노니다가」 외 다수가 있으며, 「The Points of Departure」, 「Discovery of the World - A Korean Perspective」, 「Inside North Korean Theocracy」, 「Wizard of River Naktong」, 「The Rangoon Bombing Terrorist Kang Min-chol」, 「ある北朝鮮テロリストの生と死」, 「肅淸の王朝ㆍ北朝鮮」, 「美好的國家」, 「東北亞共同體的文化視角」 등 외서 저작을 집필했다.
대표 저서로는 「현대서구정치론」,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의 발견」, 「세계의 발견」, 「낙동강」,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장성택의 길-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 「청년을 위한 정치는 없다」, 「밤드리 노니다가」 외 다수가 있으며, 「The Points of Departure」, 「Discovery of the World - A Korean Perspective」, 「Inside North Korean Theocracy」, 「Wizard of River Naktong」, 「The Rangoon Bombing Terrorist Kang Min-chol」, 「ある北朝鮮テロリストの生と死」, 「肅淸の王朝ㆍ北朝鮮」, 「美好的國家」, 「東北亞共同體的文化視角」 등 외서 저작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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