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계집 5(한국 고전번역원 한국문집번역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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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계집》 번역의 의의
창계는 17세기 후반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야(朝野)의 청의(淸議)를 대표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성리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27권 14책의 많은 논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반 학자들의 문집에 비하여 양적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집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구도자로서 경전(經典)의 연구와 심신 수양에 관해서 진지한 본의탐구와 엄숙한 자기성찰로 일관하였고 나아가 우국(憂國)의 충정에서 탁월하고도 간독(懇篤)한 경세적(經世的)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창계의 정신 유산이 오늘날 세상에 보급되지 못하고 오직 몇몇 사람들의 보장(寶藏)으로만 이어져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창계집》을 고전번역총서의 하나로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연구자와 일반인들에게 창계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창계는 17세기 후반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야(朝野)의 청의(淸議)를 대표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성리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27권 14책의 많은 논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반 학자들의 문집에 비하여 양적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집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구도자로서 경전(經典)의 연구와 심신 수양에 관해서 진지한 본의탐구와 엄숙한 자기성찰로 일관하였고 나아가 우국(憂國)의 충정에서 탁월하고도 간독(懇篤)한 경세적(經世的)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창계의 정신 유산이 오늘날 세상에 보급되지 못하고 오직 몇몇 사람들의 보장(寶藏)으로만 이어져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창계집》을 고전번역총서의 하나로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연구자와 일반인들에게 창계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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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도자(求道者)로서의 삶을 추구한 창계의 생애
창계(滄溪) 임영(林泳)은 1649년(인조27) 서울 외가에서 태어나 1696년(숙종22)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15, 6세에 이미 문사(文辭)가 성취되어 유창한 한문 문장을 자유로이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장지학(詞章之學)에 만족하지 않고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철리(哲理)를 체득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17세에 부친의 친구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서울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학문의 방향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관재의 권유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 부친을 따라 함흥(咸興) 관아에 가 있으면서, 당시 감사로 있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과 치열하게 경사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창계는 학문 면에서나 정사 면에서 박세채·남구만과 평생 남다른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창계는 18세 때인 1666년(현종7)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23세엔 문과에 합격하였지만, 그의 뜻은 부귀영달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대립하는 알력으로 중앙 정계가 매우 불안정하였는데,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서인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인의 가계에 속한 창계는 자연 출사할 여건이 좋지 못하여 31세까지 강원도 통천(通川),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우거하면서 경(經)을 연마하고 도(道)를 체득하며 세월을 보냈다.
32세인 1680년(숙종6)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창계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병조?간원?홍문관 등의 자리에 계속 발령이 난 것이다. 창계는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여러 차례 학문의 도와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그러나 35세에서 38세에 이르는 동안 연이어 부모상을 당한 후에는 벼슬길에 더욱 뜻이 없어, 여러 직임의 교지가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세에 고향인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정착하였다.
서인 당국자들은 창계를 계속 조정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이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등을 제수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일시 물러나자 창계는 전원에서의 생활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1694년 '갑술경화(甲戌更化)'로 조정이 재차 번복되어, 다시 여러 직임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창계는 오랜 지병으로 관직에 나갈 형편이 못 되었다. 창계는 숙종의 각별한 총애와 조정 동료들의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결국 자기의 힘으로 국사를 바로잡아 볼 수 없었고, 병은 날로 깊어져 마침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창계에 대해 "사화(詞華)를 싫어하고 정학(正學)에 뜻을 두어, 경전을 크게 궁구하였고, 경연에서의 강설(講說)이 정박(精博)하여 왕의 학문적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우리 조선의 선배 명류들이 대체로 문을 통해 도에 들어갔는데, 그 타고난 성품의 순후함이나 지취(志趣)의 심원함이나 학식의 평실(平實)함이나 언의(言議)의 공정함에 있어서 임영은 실로 일인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창계(滄溪) 임영(林泳)은 1649년(인조27) 서울 외가에서 태어나 1696년(숙종22)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15, 6세에 이미 문사(文辭)가 성취되어 유창한 한문 문장을 자유로이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장지학(詞章之學)에 만족하지 않고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철리(哲理)를 체득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17세에 부친의 친구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서울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학문의 방향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관재의 권유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 부친을 따라 함흥(咸興) 관아에 가 있으면서, 당시 감사로 있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과 치열하게 경사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창계는 학문 면에서나 정사 면에서 박세채·남구만과 평생 남다른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창계는 18세 때인 1666년(현종7)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23세엔 문과에 합격하였지만, 그의 뜻은 부귀영달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대립하는 알력으로 중앙 정계가 매우 불안정하였는데,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서인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인의 가계에 속한 창계는 자연 출사할 여건이 좋지 못하여 31세까지 강원도 통천(通川),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우거하면서 경(經)을 연마하고 도(道)를 체득하며 세월을 보냈다.
32세인 1680년(숙종6)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창계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병조?간원?홍문관 등의 자리에 계속 발령이 난 것이다. 창계는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여러 차례 학문의 도와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그러나 35세에서 38세에 이르는 동안 연이어 부모상을 당한 후에는 벼슬길에 더욱 뜻이 없어, 여러 직임의 교지가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세에 고향인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정착하였다.
서인 당국자들은 창계를 계속 조정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이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등을 제수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일시 물러나자 창계는 전원에서의 생활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1694년 '갑술경화(甲戌更化)'로 조정이 재차 번복되어, 다시 여러 직임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창계는 오랜 지병으로 관직에 나갈 형편이 못 되었다. 창계는 숙종의 각별한 총애와 조정 동료들의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결국 자기의 힘으로 국사를 바로잡아 볼 수 없었고, 병은 날로 깊어져 마침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창계에 대해 "사화(詞華)를 싫어하고 정학(正學)에 뜻을 두어, 경전을 크게 궁구하였고, 경연에서의 강설(講說)이 정박(精博)하여 왕의 학문적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우리 조선의 선배 명류들이 대체로 문을 통해 도에 들어갔는데, 그 타고난 성품의 순후함이나 지취(志趣)의 심원함이나 학식의 평실(平實)함이나 언의(言議)의 공정함에 있어서 임영은 실로 일인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목차
목차
일러두기ㆍ4
창계집 제15권
서書
조장경 형기 에게 답함 答趙長卿 亨期ㆍ13
조장경에게 드림 與趙長卿ㆍ17
조자직 상우 에게 드림 정묘년 與趙子直 相愚 丁卯ㆍ18
조 양양 종저 에게 답함 答趙襄陽 宗著ㆍ20
이 감사 세화 에게 드림 與李監司 世華ㆍ22
조상보 의징 에게 답함 答趙祥甫 儀徵ㆍ24
조상보에게 답함 答趙祥甫ㆍ29
조상보에게 답함 答趙祥甫ㆍ30
외숙 김중혜 성적 에게 답함 병인년 答金叔仲惠 盛迪 丙寅ㆍ32
이중심 행 에게 줌 기유년 與李仲深 ㆍ 己酉ㆍ34
박사원 태보 에게 답함 계축년 答朴士元 泰輔 癸丑ㆍ36
박사원에게 답함 答朴士元ㆍ39
이수옹 세귀 에게 답함 경신년 答李壽翁 世龜 庚申ㆍ42
이수옹에게 드림 與李壽翁ㆍ46
유도숙 신일 에게 줌 경오년 與兪道叔 信一 庚午ㆍ48
박군서 태초 에게 드림 與朴君瑞 泰初ㆍ53
박군서에게 답함 答朴君瑞ㆍ55
유집중 성운 에게 답함 答柳集仲 成運ㆍ57
유집중에게 답함 答柳集仲ㆍ59
이성망 사상 에게 답함 을축년 答李聖望 師尙 乙丑ㆍ61
박조능 태은 에게 답함 答朴祖能 泰殷ㆍ64
김숙함 재해 에게 답함 答金叔涵 載海ㆍ66
김숙함에게 드림 與金叔涵ㆍ68
김숙함에게 답함 答金叔涵ㆍ69
김숙함에게 드림 與金叔涵ㆍ71
김숙함에게 답함 答金叔涵ㆍ74
김계내 여옥 에게 답함 갑인년 答金啓乃 汝沃 甲寅ㆍ75
김계내에게 답함 答金啓乃ㆍ77
김계내에게 답함 答金啓乃ㆍ80
이경장 한좌 에게 답함 答李景張 漢佐ㆍ82
이경장에게 줌 與李景張ㆍ84
재종제 사가 수 에게 줌 기미년 與再從弟士佳 ㆍ 己未ㆍ85
조화중 정례 에게 드림 기사년 與趙和仲 正禮 己巳ㆍ86
외숙 김덕장 홍광 에게 답함 答金叔德章 弘光ㆍ89
김미회 지광 에게 답함 答金美晦 知光ㆍ90
김미회에게 답함 答金美晦ㆍ92
박삼로 태구 에게 답함 答朴三老 台ㆍㆍ93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95
박삼로에게 드림 與朴三老ㆍ97
박삼로에게 드림 與朴三老ㆍ98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0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1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3
족제 득지 세양 에게 줌 與族弟得之 世讓ㆍ104
조성임 형보 에게 답함 答趙聖任 衡輔ㆍ106
어떤 이에게 답함 答或人ㆍ109
어떤 이에게 답함 答或人ㆍ112
벗 김군의 문목에 답함 答金友問目ㆍ115
창계집 제16권
교서敎書
영남 관찰사 윤지완에게 내리는 교서 敎嶺南觀察使尹趾完書ㆍ125
전箋
중전의 책봉을 하례하는 전 中殿冊封賀箋ㆍ132
대전에 정월 초하루에 백관이 하례하는 전 大殿正朝百官賀箋ㆍ134
왕세자가 국학에 들어가는 것을 하례하는 전 王世子入學賀箋ㆍ136
제문祭文
토역한 일을 종묘에 고하는 제문 討逆告廟祭文ㆍ137
문정공 박상충에 대하여 증시하고 치제하는 글
文正公朴尙衷贈諡致祭文ㆍ141
이산 노강서원의 사액 제문 尼山魯岡書院賜額祭文ㆍ147
동강 이 선생 단상 에 대한 제문 祭東岡李先生 端相 文 ㆍ157
회곡 조공 한영 에 대한 제문 祭晦谷曺公 漢英 文 ㆍ161
졸수재 조공 성기 에 대한 제문 祭拙修齋趙公 聖期 文ㆍ170
기記
백운봉 등유기 白雲峯登遊記ㆍ180
의승기 갑진년 義勝記 甲辰ㆍ189
서序
일기서 日記序ㆍ198
김숙함에게 주는 서문 贈金叔涵序ㆍ200
정관재 이공의 행장과 연보의 뒤에 붙인 서문 靜觀齋李公狀譜後序ㆍ202
발跋
《회곡집》 발문 晦谷集跋ㆍ209
《정관재집》 발문 靜觀齋集跋ㆍ214
잡저雜著
책문 5수 策問 五首ㆍ216
〈용문상설도부〉의 뒤에 쓰다 書龍門賞雪圖賦後ㆍ236
박이중의 책고 뒤에 쓰다 書朴ㆍ仲策稿後ㆍ240
한나라 서역도호 감연수 등이 질지를 격파한 노포를 의작(擬作)하다
擬漢西域都護甘延壽等破ㆍ支露布ㆍ241
상량문上樑文
통천 용연의 새집 상량문 通川龍淵新居上樑文ㆍ254
부여 암서재 상량문 夫餘巖棲齋上樑文ㆍ261
창계집 제17권
묘문墓文
고 가선대부 예조 참판 하흥군 조공 묘지명 병서
故嘉善大夫禮曹參判夏興君曺公墓誌銘 幷序ㆍ267
학생 홍군 묘지명 병서 學生洪君墓誌銘 幷序ㆍ284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집현전 부제학으로 치사한 조공의 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致仕曺公墓碣銘 幷序ㆍ286
외조부 근수헌 조공 묘표음기 外王考近水軒趙公墓表陰記ㆍ293
유명조선국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평녕군 행 통훈대부 양성 현감 신공 묘표음기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平寧君行通訓大夫陽城縣監申公墓表陰記ㆍ300
행장行狀
고 가선대부 이조 참판 이공 행장 故嘉善大夫吏曹參判李公行狀ㆍ304
숙조 사헌부 지평 동리 임공의 행장 叔祖司憲府持平東里林公行狀ㆍ323
죽은 아내 안인 조씨에 대한 행장 亡室安人曺氏行狀ㆍ334
창계집 제18권
경연록經筵錄ㆍ345
창계집 제15권
서書
조장경 형기 에게 답함 答趙長卿 亨期ㆍ13
조장경에게 드림 與趙長卿ㆍ17
조자직 상우 에게 드림 정묘년 與趙子直 相愚 丁卯ㆍ18
조 양양 종저 에게 답함 答趙襄陽 宗著ㆍ20
이 감사 세화 에게 드림 與李監司 世華ㆍ22
조상보 의징 에게 답함 答趙祥甫 儀徵ㆍ24
조상보에게 답함 答趙祥甫ㆍ29
조상보에게 답함 答趙祥甫ㆍ30
외숙 김중혜 성적 에게 답함 병인년 答金叔仲惠 盛迪 丙寅ㆍ32
이중심 행 에게 줌 기유년 與李仲深 ㆍ 己酉ㆍ34
박사원 태보 에게 답함 계축년 答朴士元 泰輔 癸丑ㆍ36
박사원에게 답함 答朴士元ㆍ39
이수옹 세귀 에게 답함 경신년 答李壽翁 世龜 庚申ㆍ42
이수옹에게 드림 與李壽翁ㆍ46
유도숙 신일 에게 줌 경오년 與兪道叔 信一 庚午ㆍ48
박군서 태초 에게 드림 與朴君瑞 泰初ㆍ53
박군서에게 답함 答朴君瑞ㆍ55
유집중 성운 에게 답함 答柳集仲 成運ㆍ57
유집중에게 답함 答柳集仲ㆍ59
이성망 사상 에게 답함 을축년 答李聖望 師尙 乙丑ㆍ61
박조능 태은 에게 답함 答朴祖能 泰殷ㆍ64
김숙함 재해 에게 답함 答金叔涵 載海ㆍ66
김숙함에게 드림 與金叔涵ㆍ68
김숙함에게 답함 答金叔涵ㆍ69
김숙함에게 드림 與金叔涵ㆍ71
김숙함에게 답함 答金叔涵ㆍ74
김계내 여옥 에게 답함 갑인년 答金啓乃 汝沃 甲寅ㆍ75
김계내에게 답함 答金啓乃ㆍ77
김계내에게 답함 答金啓乃ㆍ80
이경장 한좌 에게 답함 答李景張 漢佐ㆍ82
이경장에게 줌 與李景張ㆍ84
재종제 사가 수 에게 줌 기미년 與再從弟士佳 ㆍ 己未ㆍ85
조화중 정례 에게 드림 기사년 與趙和仲 正禮 己巳ㆍ86
외숙 김덕장 홍광 에게 답함 答金叔德章 弘光ㆍ89
김미회 지광 에게 답함 答金美晦 知光ㆍ90
김미회에게 답함 答金美晦ㆍ92
박삼로 태구 에게 답함 答朴三老 台ㆍㆍ93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95
박삼로에게 드림 與朴三老ㆍ97
박삼로에게 드림 與朴三老ㆍ98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0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1
박삼로에게 답함 答朴三老ㆍ103
족제 득지 세양 에게 줌 與族弟得之 世讓ㆍ104
조성임 형보 에게 답함 答趙聖任 衡輔ㆍ106
어떤 이에게 답함 答或人ㆍ109
어떤 이에게 답함 答或人ㆍ112
벗 김군의 문목에 답함 答金友問目ㆍ115
창계집 제16권
교서敎書
영남 관찰사 윤지완에게 내리는 교서 敎嶺南觀察使尹趾完書ㆍ125
전箋
중전의 책봉을 하례하는 전 中殿冊封賀箋ㆍ132
대전에 정월 초하루에 백관이 하례하는 전 大殿正朝百官賀箋ㆍ134
왕세자가 국학에 들어가는 것을 하례하는 전 王世子入學賀箋ㆍ136
제문祭文
토역한 일을 종묘에 고하는 제문 討逆告廟祭文ㆍ137
문정공 박상충에 대하여 증시하고 치제하는 글
文正公朴尙衷贈諡致祭文ㆍ141
이산 노강서원의 사액 제문 尼山魯岡書院賜額祭文ㆍ147
동강 이 선생 단상 에 대한 제문 祭東岡李先生 端相 文 ㆍ157
회곡 조공 한영 에 대한 제문 祭晦谷曺公 漢英 文 ㆍ161
졸수재 조공 성기 에 대한 제문 祭拙修齋趙公 聖期 文ㆍ170
기記
백운봉 등유기 白雲峯登遊記ㆍ180
의승기 갑진년 義勝記 甲辰ㆍ189
서序
일기서 日記序ㆍ198
김숙함에게 주는 서문 贈金叔涵序ㆍ200
정관재 이공의 행장과 연보의 뒤에 붙인 서문 靜觀齋李公狀譜後序ㆍ202
발跋
《회곡집》 발문 晦谷集跋ㆍ209
《정관재집》 발문 靜觀齋集跋ㆍ214
잡저雜著
책문 5수 策問 五首ㆍ216
〈용문상설도부〉의 뒤에 쓰다 書龍門賞雪圖賦後ㆍ236
박이중의 책고 뒤에 쓰다 書朴ㆍ仲策稿後ㆍ240
한나라 서역도호 감연수 등이 질지를 격파한 노포를 의작(擬作)하다
擬漢西域都護甘延壽等破ㆍ支露布ㆍ241
상량문上樑文
통천 용연의 새집 상량문 通川龍淵新居上樑文ㆍ254
부여 암서재 상량문 夫餘巖棲齋上樑文ㆍ261
창계집 제17권
묘문墓文
고 가선대부 예조 참판 하흥군 조공 묘지명 병서
故嘉善大夫禮曹參判夏興君曺公墓誌銘 幷序ㆍ267
학생 홍군 묘지명 병서 學生洪君墓誌銘 幷序ㆍ284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집현전 부제학으로 치사한 조공의 묘갈명 병서
有明朝鮮國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致仕曺公墓碣銘 幷序ㆍ286
외조부 근수헌 조공 묘표음기 外王考近水軒趙公墓表陰記ㆍ293
유명조선국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평녕군 행 통훈대부 양성 현감 신공 묘표음기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平寧君行通訓大夫陽城縣監申公墓表陰記ㆍ300
행장行狀
고 가선대부 이조 참판 이공 행장 故嘉善大夫吏曹參判李公行狀ㆍ304
숙조 사헌부 지평 동리 임공의 행장 叔祖司憲府持平東里林公行狀ㆍ323
죽은 아내 안인 조씨에 대한 행장 亡室安人曺氏行狀ㆍ334
창계집 제18권
경연록經筵錄ㆍ345
저자
저자
임영
1649년(인조27)∼1696년(숙종2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이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기호학파의 일원이지만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전개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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