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계집 7(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번역총서)(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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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도자(求道者)로서의 삶을 추구한 창계의 생애
창계(滄溪) 임영(林泳)은 1649년(인조27) 서울 외가에서 태어나 1696년(숙종22)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15, 6세에 이미 문사(文辭)가 성취되어 유창한 한문 문장을 자유로이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장지학(詞章之學)에 만족하지 않고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철리(哲理)를 체득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17세에 부친의 친구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서울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학문의 방향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관재의 권유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 부친을 따라 함흥(咸興) 관아에 가 있으면서, 당시 감사로 있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과 치열하게 경사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창계는 학문 면에서나 정사 면에서 박세채·남구만과 평생 남다른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창계는 18세 때인 1666년(현종7)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23세엔 문과에 합격하였지만, 그의 뜻은 부귀영달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대립하는 알력으로 중앙 정계가 매우 불안정하였는데,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서인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인의 가계에 속한 창계는 자연 출사할 여건이 좋지 못하여 31세까지 강원도 통천(通川),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우거하면서 경(經)을 연마하고 도(道)를 체득하며 세월을 보냈다.
32세인 1680년(숙종6)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창계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병조ㆍ간원ㆍ홍문관 등의 자리에 계속 발령이 난 것이다. 창계는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여러 차례 학문의 도와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그러나 35세에서 38세에 이르는 동안 연이어 부모상을 당한 후에는 벼슬길에 더욱 뜻이 없어, 여러 직임의 교지가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세에 고향인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정착하였다.
서인 당국자들은 창계를 계속 조정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이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등을 제수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일시 물러나자 창계는 전원에서의 생활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1694년 ‘갑술경화(甲戌更化)’로 조정이 재차 번복되어, 다시 여러 직임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창계는 오랜 지병으로 관직에 나갈 형편이 못 되었다. 창계는 숙종의 각별한 총애와 조정 동료들의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결국 자기의 힘으로 국사를 바로잡아 볼 수 없었고, 병은 날로 깊어져 마침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창계에 대해 “사화(詞華)를 싫어하고 정학(正學)에 뜻을 두어, 경전을 크게 궁구하였고, 경연에서의 강설(講說)이 정박(精博)하여 왕의 학문적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우리 조선의 선배 명류들이 대체로 문을 통해 도에 들어갔는데, 그 타고난 성품의 순후함이나 지취(志趣)의 심원함이나 학식의 평실(平實)함이나 언의(言議)의 공정함에 있어서 임영은 실로 일인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창계(滄溪) 임영(林泳)은 1649년(인조27) 서울 외가에서 태어나 1696년(숙종22)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15, 6세에 이미 문사(文辭)가 성취되어 유창한 한문 문장을 자유로이 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장지학(詞章之學)에 만족하지 않고 경학(經學)을 바탕으로 철리(哲理)를 체득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17세에 부친의 친구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을 서울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학문의 방향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관재의 권유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 부친을 따라 함흥(咸興) 관아에 가 있으면서, 당시 감사로 있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과 치열하게 경사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창계는 학문 면에서나 정사 면에서 박세채·남구만과 평생 남다른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창계는 18세 때인 1666년(현종7) 생원시에서 장원하였고 23세엔 문과에 합격하였지만, 그의 뜻은 부귀영달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이 대립하는 알력으로 중앙 정계가 매우 불안정하였는데,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서인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인의 가계에 속한 창계는 자연 출사할 여건이 좋지 못하여 31세까지 강원도 통천(通川),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우거하면서 경(經)을 연마하고 도(道)를 체득하며 세월을 보냈다.
32세인 1680년(숙종6)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창계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병조ㆍ간원ㆍ홍문관 등의 자리에 계속 발령이 난 것이다. 창계는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여러 차례 학문의 도와 시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그러나 35세에서 38세에 이르는 동안 연이어 부모상을 당한 후에는 벼슬길에 더욱 뜻이 없어, 여러 직임의 교지가 내렸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40세에 고향인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정착하였다.
서인 당국자들은 창계를 계속 조정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이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등을 제수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일시 물러나자 창계는 전원에서의 생활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1694년 ‘갑술경화(甲戌更化)’로 조정이 재차 번복되어, 다시 여러 직임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창계는 오랜 지병으로 관직에 나갈 형편이 못 되었다. 창계는 숙종의 각별한 총애와 조정 동료들의 융숭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결국 자기의 힘으로 국사를 바로잡아 볼 수 없었고, 병은 날로 깊어져 마침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에는 창계에 대해 “사화(詞華)를 싫어하고 정학(正學)에 뜻을 두어, 경전을 크게 궁구하였고, 경연에서의 강설(講說)이 정박(精博)하여 왕의 학문적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우리 조선의 선배 명류들이 대체로 문을 통해 도에 들어갔는데, 그 타고난 성품의 순후함이나 지취(志趣)의 심원함이나 학식의 평실(平實)함이나 언의(言議)의 공정함에 있어서 임영은 실로 일인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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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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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계집》 번역의 의의
창계는 17세기 후반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야(朝野)의 청의(淸議)를 대표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성리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27권 14책의 많은 논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반 학자들의 문집에 비하여 양적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집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구도자로서 경전(經典)의 연구와 심신 수양에 관해서 진지한 본의탐구와 엄숙한 자기성찰로 일관하였고 나아가 우국(憂國)의 충정에서 탁월하고도 간독(懇篤)한 경세적(經世的)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창계의 정신 유산이 오늘날 세상에 보급되지 못하고 오직 몇몇 사람들의 보장(寶藏)으로만 이어져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창계집》을 고전번역총서의 하나로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연구자와 일반인들에게 창계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창계는 17세기 후반 우리나라 명현(名賢)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야(朝野)의 청의(淸議)를 대표하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은 성리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는 27권 14책의 많은 논저를 남겼다. 이 시기 일반 학자들의 문집에 비하여 양적으로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문집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구도자로서 경전(經典)의 연구와 심신 수양에 관해서 진지한 본의탐구와 엄숙한 자기성찰로 일관하였고 나아가 우국(憂國)의 충정에서 탁월하고도 간독(懇篤)한 경세적(經世的)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러한 창계의 정신 유산이 오늘날 세상에 보급되지 못하고 오직 몇몇 사람들의 보장(寶藏)으로만 이어져 전해 오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번에 《창계집》을 고전번역총서의 하나로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연구자와 일반인들에게 창계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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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창계집 제23권
독서차록讀書箚錄
《성리대전》 性理大全
《근사록》 近思錄
《이정전서》 二程全書
《예기》 禮記
《의례》 儀禮
《가례》 家禮
창계집 제24권
독서차록讀書箚錄
《율곡별집》의의 栗谷別集疑義
제1권 〈태극문답〉 太極問答
제2권
제3권
제4권 〈습유잡록 상〉 拾遺雜錄上
제5권 〈습유잡록 중〉 拾遺雜錄中
《구가해》 九歌解
〈동황〉 東皇
〈운중군〉 雲中君
〈상군〉 湘君
〈상부인〉 湘夫人
〈대사명〉 大司命
〈소사명〉 小司命
〈동군〉 東君
〈하백〉 河伯
〈산귀〉 山鬼
창계집 제25권
일록日錄
병오년 丙午
정미년 丁未
임자년 壬子
계축년 癸丑
갑인년 甲寅
을묘년 乙卯
정사년 丁巳
무오년 戊午
기미년 己未
을축년 乙丑
병인년 丙寅
창계집 제26권
일록日錄
정묘년 丁卯
기사년 己巳
경오년 庚午
신미년 辛未
계유년 癸酉
산록 散錄
창계집 제23권
독서차록讀書箚錄
《성리대전》 性理大全
《근사록》 近思錄
《이정전서》 二程全書
《예기》 禮記
《의례》 儀禮
《가례》 家禮
창계집 제24권
독서차록讀書箚錄
《율곡별집》의의 栗谷別集疑義
제1권 〈태극문답〉 太極問答
제2권
제3권
제4권 〈습유잡록 상〉 拾遺雜錄上
제5권 〈습유잡록 중〉 拾遺雜錄中
《구가해》 九歌解
〈동황〉 東皇
〈운중군〉 雲中君
〈상군〉 湘君
〈상부인〉 湘夫人
〈대사명〉 大司命
〈소사명〉 小司命
〈동군〉 東君
〈하백〉 河伯
〈산귀〉 山鬼
창계집 제25권
일록日錄
병오년 丙午
정미년 丁未
임자년 壬子
계축년 癸丑
갑인년 甲寅
을묘년 乙卯
정사년 丁巳
무오년 戊午
기미년 己未
을축년 乙丑
병인년 丙寅
창계집 제26권
일록日錄
정묘년 丁卯
기사년 己巳
경오년 庚午
신미년 辛未
계유년 癸酉
산록 散錄
저자
저자
임영
(林泳)
1649년(인조27)∼1696년(숙종2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이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기호학파의 일원이지만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전개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제향되었다.
1649년(인조27)∼1696년(숙종2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이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167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홍문관 부제학, 사헌부 대사헌, 전라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천인성명설(天人性命說)을 깊이 연구하였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기호학파의 일원이지만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을 전개하였다. 나주의 창계서원(滄溪書院), 함평의 수산사(水山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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