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레비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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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게 보내는 데리다의 마지막 작별인사
『아듀 레비나스』에는 두 편의 글, 1995년 12월 25일 89세로 세상을 떠난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이 실려 있다. 이 글들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앞으로의 논의에 열려 있는 가능성까지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듀 레비나스』에는 두 편의 글, 1995년 12월 25일 89세로 세상을 떠난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이 실려 있다. 이 글들에서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앞으로의 논의에 열려 있는 가능성까지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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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보낸 마지막 작별인사
아듀adieu 혹은 신에게로a-Dieu
이것은 애도의 말이 아닌 맞아들임의 말이다
1995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을 엮은 『아듀 레비나스Adieu a Emmanuel Levinas』가 출간되었다.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다른 애도의 말이 아니라 "아듀adieu"라는 말을 먼저 건네고, 레비나스가 생전에 이 말을 어떻게 사유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아듀"와 "맞아들임"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책에서 데리다는 "아듀" "환대" "맞아들임" "무한" "응답" "타자" "윤리" "여성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그의 철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듀는 우리의 삶과 생각을 무한으로,
잉여의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1964년,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을 분석한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한 이후로, 레비나스의 철학과 끊임없는 대결을 펼쳐온 데리다가 "아듀"라는 추도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다른 곳에서 "아듀"라는 말이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는 다른 서술적인 말들에 앞서 하는 인사나 축복의 말로 "안녕" "반가워" 등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헤어질 때, 혹은 영원히 헤어질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하는 인사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데리다가 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신에게로a-Dieu"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Adieu a Emmanuel Levinas"는 "레비나스를 신에게로"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아듀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 한정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간다. 즉, 레비나스를 신에게 보낸다는 것,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고 그를 맞아들이는 것, 그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함의와 발전 가능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책을 옮긴 문성원 교수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아듀"는 데리다가 이제 신에게 맡겨진, 무한한 가능성에 맡겨진, 그 가능성을 채워나갈 우리에게 맡겨진 레비나스에게 새롭게 건네는 인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오늘날의 시리아까지,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을
환대한다는 것에 대하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되짚어보고 그것을 둘러싼 20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펼쳐나간다. 먼저 세상을 떠한 위대한 철학자에게 뜨거운 존경과 우정의 말을 건네면서도, 거의 철학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며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강력한 유대적 전통의 영향 아래 사유를 전개했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내세운 윤리적 명제들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는가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대표적으로 피난처로 부각되는 예루살렘이 그러한데, 데리다의 논의 속에서 예루살렘은 특정한 지역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또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윤리, 정치 너머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개념을 통해 이 윤리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와 엮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는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피난자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며 "환대에 반하는 범죄"를 견뎌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환대에 대한 진중한 숙고가 필요함을, 레비나스의 논의를 경유하여 재차 강조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절실한 것이라 하겠다.
역자 문성원 교수가 말하듯, 독자들은 작지만 만만치 않은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건네는 물음이자 응답을,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매우 풍부하고 집요하며 잘 짜인 구조의 대화를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책속으로 추가 }
그러나 타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을 유보시키고 무한정하게 조건짓는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레비나스는 언제나 [……] 지금의 평화la paix maintenant를 선호합니다. 또 그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cosmopolitisme보다 보편성을 선호하지요. 내가 알기로, 레비나스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거나 자신이 고려할 바로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 정치주의가 순수한 환대를, 따라서 평화를, 무한정한 과정의 한 항으로 귀착시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진 이데올로기적 함축들 때문입니다. 그 함축들에 들어 있는 현대의 반유대주의가, 스토아주의나 바울의 기독교에서부터 계몽주의와 칸트에게까지 전달된 세계정치주의의 아름다운 전통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죠.(167쪽)
우리는 다만, 피난의 권리와 우리 시대의 모든 긴급함과 관련해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진 차이를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서 분명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서,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성 베르나르 성당들에서,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다른 국제적 권리를, 다른 국경의 정치를, 다른 인도적인 것의 정치를, 즉 민족-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인도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는 긴급함과 관련해서 말이지요.(189쪽)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아-듀를, "동일성의 자기 동일시"와도 "자기의식"과도 합치하지 않는 이 "무한 관념의 비상한 구조"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에게"가-이것이 그것의 역할이죠-무한을 향해 자기를 돌려놓기se tourner 때문입니다. [……] 이 a(에게)는 단지 무한에게만 유일하게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에게 말함에 열려 있죠.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의 방향으로 자기를 돌리고 자기를 보냅니다. 우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 우선 그것으로부터 응답하기 위해서요. 그것은 자신의 "에게"를 무한에게, 이 "에게"를 부르고 자신을 그것에게 보내는 무한에게 보냅니다.(192쪽)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낯선 이를 사랑하는 신"은 그래서 존재와 현상 너머의, 존재와 무 너머의 신이 아닐까요? 그 신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해도 아-듀를, 인사를, 성스러운 이별을, "낯선 자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욕망에 바치는 신이 아닐까요? 신의 "실존" 이전에 또 저편에서, 신의 있을 법한 있을 법하지 않음 바깥에서, 가장 절망적이지는 않다 해도 가장 세심한, 가장 "깨어난degrise"(레비나스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아-듀라고 말함은 환대를 의미할 겁니다.(195~196쪽)
아듀adieu 혹은 신에게로a-Dieu
이것은 애도의 말이 아닌 맞아들임의 말이다
1995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을 엮은 『아듀 레비나스Adieu a Emmanuel Levinas』가 출간되었다.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다른 애도의 말이 아니라 "아듀adieu"라는 말을 먼저 건네고, 레비나스가 생전에 이 말을 어떻게 사유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아듀"와 "맞아들임"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책에서 데리다는 "아듀" "환대" "맞아들임" "무한" "응답" "타자" "윤리" "여성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그의 철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듀는 우리의 삶과 생각을 무한으로,
잉여의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1964년,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을 분석한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한 이후로, 레비나스의 철학과 끊임없는 대결을 펼쳐온 데리다가 "아듀"라는 추도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다른 곳에서 "아듀"라는 말이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는 다른 서술적인 말들에 앞서 하는 인사나 축복의 말로 "안녕" "반가워" 등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헤어질 때, 혹은 영원히 헤어질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하는 인사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데리다가 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신에게로a-Dieu"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Adieu a Emmanuel Levinas"는 "레비나스를 신에게로"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아듀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 한정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간다. 즉, 레비나스를 신에게 보낸다는 것,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고 그를 맞아들이는 것, 그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함의와 발전 가능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책을 옮긴 문성원 교수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아듀"는 데리다가 이제 신에게 맡겨진, 무한한 가능성에 맡겨진, 그 가능성을 채워나갈 우리에게 맡겨진 레비나스에게 새롭게 건네는 인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오늘날의 시리아까지,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을
환대한다는 것에 대하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되짚어보고 그것을 둘러싼 20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펼쳐나간다. 먼저 세상을 떠한 위대한 철학자에게 뜨거운 존경과 우정의 말을 건네면서도, 거의 철학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며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강력한 유대적 전통의 영향 아래 사유를 전개했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내세운 윤리적 명제들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는가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대표적으로 피난처로 부각되는 예루살렘이 그러한데, 데리다의 논의 속에서 예루살렘은 특정한 지역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또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윤리, 정치 너머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개념을 통해 이 윤리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와 엮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는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피난자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며 "환대에 반하는 범죄"를 견뎌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환대에 대한 진중한 숙고가 필요함을, 레비나스의 논의를 경유하여 재차 강조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절실한 것이라 하겠다.
역자 문성원 교수가 말하듯, 독자들은 작지만 만만치 않은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건네는 물음이자 응답을,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매우 풍부하고 집요하며 잘 짜인 구조의 대화를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책속으로 추가 }
그러나 타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을 유보시키고 무한정하게 조건짓는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레비나스는 언제나 [……] 지금의 평화la paix maintenant를 선호합니다. 또 그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cosmopolitisme보다 보편성을 선호하지요. 내가 알기로, 레비나스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거나 자신이 고려할 바로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 정치주의가 순수한 환대를, 따라서 평화를, 무한정한 과정의 한 항으로 귀착시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진 이데올로기적 함축들 때문입니다. 그 함축들에 들어 있는 현대의 반유대주의가, 스토아주의나 바울의 기독교에서부터 계몽주의와 칸트에게까지 전달된 세계정치주의의 아름다운 전통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죠.(167쪽)
우리는 다만, 피난의 권리와 우리 시대의 모든 긴급함과 관련해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진 차이를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서 분명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서,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성 베르나르 성당들에서,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다른 국제적 권리를, 다른 국경의 정치를, 다른 인도적인 것의 정치를, 즉 민족-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인도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는 긴급함과 관련해서 말이지요.(189쪽)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아-듀를, "동일성의 자기 동일시"와도 "자기의식"과도 합치하지 않는 이 "무한 관념의 비상한 구조"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에게"가-이것이 그것의 역할이죠-무한을 향해 자기를 돌려놓기se tourner 때문입니다. [……] 이 a(에게)는 단지 무한에게만 유일하게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에게 말함에 열려 있죠.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의 방향으로 자기를 돌리고 자기를 보냅니다. 우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 우선 그것으로부터 응답하기 위해서요. 그것은 자신의 "에게"를 무한에게, 이 "에게"를 부르고 자신을 그것에게 보내는 무한에게 보냅니다.(192쪽)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낯선 이를 사랑하는 신"은 그래서 존재와 현상 너머의, 존재와 무 너머의 신이 아닐까요? 그 신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해도 아-듀를, 인사를, 성스러운 이별을, "낯선 자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욕망에 바치는 신이 아닐까요? 신의 "실존" 이전에 또 저편에서, 신의 있을 법한 있을 법하지 않음 바깥에서, 가장 절망적이지는 않다 해도 가장 세심한, 가장 "깨어난degrise"(레비나스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아-듀라고 말함은 환대를 의미할 겁니다.(195~196쪽)
목차
목차
프롤로그
아듀
맞아들임의 말
Ⅰ
Ⅱ
Ⅲ
Ⅳ
Ⅴ
Ⅵ
옮기고 나서
아듀
맞아들임의 말
Ⅰ
Ⅱ
Ⅲ
Ⅳ
Ⅴ
Ⅵ
옮기고 나서
저자
저자
자크 데리다
저자 자크 데리다는 알제리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예일 대학교와 존스홉킨스 대학교 등에서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7년 이후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연구주임으로 활동했다. 데리다의 초기 작업은 음성언어가 문자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보임으로써,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적 한계를 부각시키는 데 집중되었다. 1980년 이후에 데리다는 서양의 법적, 정치적 전통에 대한 해체 작업을 수행하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관계는, 1964년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을 분석한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글이 발표되고 나서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레바나스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고 자신의 논의를 너무 단순화했다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의 저작들을 보면 그가 데리다의 비판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한편, 데리다의 후기 작업들에서도 레비나스의 강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데리다는 1995년 12월 25일 레비나스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주요 저서로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철학의 여백』 『산종』 『입장들』 『우편엽서』 『문학의 행위』 『마르크스의 유령들』 『우정의 정치』 『법의 힘』 등이 있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관계는, 1964년 데리다가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1961)을 분석한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글이 발표되고 나서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레바나스는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고 자신의 논의를 너무 단순화했다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의 저작들을 보면 그가 데리다의 비판을 크게 의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한편, 데리다의 후기 작업들에서도 레비나스의 강한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데리다는 1995년 12월 25일 레비나스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장에서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주요 저서로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철학의 여백』 『산종』 『입장들』 『우편엽서』 『문학의 행위』 『마르크스의 유령들』 『우정의 정치』 『법의 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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