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실천시선 221)
이병승 시인이 등단 이후 25여년 만에 펴낸 첫 번째 시집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저자는 지적 매몰을 거부하며 삶의 냄새를 맡고자 하는 예민함이고, 예술적 유약함이나 회피를 거부하고 삶에서 자신의 별을 쏘아 올리기 위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저자는 더더욱 이념과 현실의 대립을 역동적 삶으로 일원화시키고자 애를 썼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꾸밈없이 겸허하게 이야기한 저자의 시를 통해 저자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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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1989년『사상문예운동』으로 등단한 이병승 시인의 첫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동시집『초록 바이러스』와 청소년소설『톤즈의 약속』,『달리GO』등 아동·청소년문학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한 그는 시집을 통해 유년과 청년기를 거쳐 일상의 비루함에 찌든 어른 세계에서 예민한 관찰력으로 시적 유희와 섬세함을 선사한다. 마치 얌전한 누에고치 한 마리가 오밀조밀 짜내는 실타래처럼 시인의 작품은 때로 우윳빛처럼 고운 서정으로, 때로는 고소(苦笑)를 머금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추억과 일상의 쓰거움을 이야기한다.
"관념이 무데뽀로 현실을 끌고" 간다 해도...
등단 이후 25여년 만에 첫 시집을 펴낸 이병승 시인은 작품 속에서 "지나온 나날들을 되돌아보곤"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때문에 미처 대지를 빠져나가지 못한 안개처럼 방황하기도 하고, 해가 비추는 날에는 아지랑이를 통해 보이는 삶의 굴곡들을 특유의 시선으로 다독이기도 한다. 시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시대의 폭력성에 지치거나 삶의 아이러니에 할 말을 잃기도 한다.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법한 전개는 아닐까 하고 염려스러울 수 있으나, 시인의 마무리는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여도 주억거리며 사는 이야기를 조근조근 하는 것이다.
나의 새는 언제나 그림뿐이어서
가령, 언젠가 보았던 멋진 사진 속
광활한 하늘 한 귀퉁이에
우아하게 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여서
그 새가 어떤 새인지는 중요치 않고
쫙 펼친 날개와 부리와 꽁지의 실루엣
하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 비행의 몸짓이
마치 자신을 우겨 싸는 하늘을
외려 풍경으로 거느린 듯해서
살아있는 새보다 더 현실 같고
내게 힘을 주는 것이어서
관습적인 미사여구가 아니라 진정
오, 아름답고 멋지다 했던 것인데
대낮의 공원이나 밤늦은 유흥가 뒤뚱거리는 비둘기
그닥 아름답지 않은 살아있는 새들을 볼 때마다
어째서 관념이 더 무데뽀로 현실을 끌고 가는지
그러다 느닷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는지
내 지나온 나날들을 되돌아보곤 하는 것이다
_ 시「새」전문
살다가 한 번쯤, 아니 누군가는 여러 번 "어째서 관념이 더 무데뽀로 현실을 끌고 가는지" 하고 느낄 때가 있다. 단단히 다져 두었던 인생의 신념이 수수깡처럼 한 순간에 꺾였을 때,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려는 자와 현실과 이념의 경계를 줄다리기만 하는 자, 아니면 비 사이로 막가려는 얍삽함으로 진실을 무시하고 앞으로만 돌진하려는 자, 이밖에도 다양한 부류들이 많을 것인데 시인의 시 속에는 어떤 부류들이 떠돌고 있을까?
시인이 들려주는 유년의 추억 속에는 "어린 사과나무를 하루에 백 번씩 뛰어넘으면 그 나무가 다 자랄 때쯤 하늘도 나는 경공술을 익히게 될거라 믿었"던 소년과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총알은 나의 반항이었고//강의실 대신 삼류극장 뒷자리에서" "주윤발처럼"(「영웅본색」)죽어간 청년도 있다. 시 속 화자는 이러한 일화들을 추억이라고 말하기보다 "영웅본색이 나를 훔쳐 본"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상황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삶을 살아낼수록 알 수 없는 아이러니에 빠졌을 때 느낄 법한 애매모호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태도는 다음 시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 속에는 긴장감이 흐르는 관계와 삶의 극단에 치닫는 인물들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ㅂ이 술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 시절 자기는 안기부 프락치, 솔직히 거기까진 아니고
××경찰서 김 형사의 끄나풀이었다고
내 눈의 상처를 볼 때마다 가끔 미안하다고
혹시, 우리가 그녀를 동시에 사랑한 건 아니었냐고
자기는 그랬었나보다고
주름진 눈으로 히죽 웃었다
_ 시「레드 제플린이나 듣지」부분
모든 극단에는
숨은 미래가 있다, 생의 유혹 같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애인을 잊을 수 없었던 안나 치코바는 8톤 트럭을 몰고 교도소 담벼락을 들이박았다 벽에 구멍을 뚫고 처박힌 트럭 안에서 그녀는 즉사했다 부서진 차 안에는 와인 한 병과 담배 그리고 콘돔이 흩어져 있었다
사랑의 종신형이 이와 같다면
부서져서 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_ 시「사랑」전문
위 두 시의 상황 속에서 시적 화자는 긴장감과 극단을 치닫는 삶에 대해 평상심으로 대적한다. 그는 어설프게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위로하려고 들지 않는다. 함부로 동정의 시선으로 시속 인물들을 재단하지 않으며, 그저 서로가 민망하지 않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리감을 유지하려 한다. 은근한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짐짓 겸허한 채로 살아가려는 시 속 화자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따금 자신을 창조한 "작가에게 반항을 시작"(「나는 주인공이다」)할 때도 있다. 자신을 만든 작가에게 날 좀 봐달라며 깜찍한 제안을 하기도 하는데, 시인의 상상력이 신선한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시인의 말에서 언급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 시'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나는, 내가 어떤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말아주길, 그냥 그런 거니까
주연은 아니고 조연인데
우울증에 사변적인 글쟁이 기질을 타고난 아웃사이더로
그다지 성공적인 인생은 못되는 캐릭터다
작가는 등장인물에게 고난과 역경 난관을 많이, 세게, 가혹하게 주면 줄수록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허구한 날 내 인생엔 to be continue가 붙는 일이 많고
폼나야 할 상황에 구차하고, 비굴하고, 얻어터지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하도 피곤하고 창피해서 작가에게 항의를 했지만 늘 무시당하기 일쑤여서
얼마 전부터 나는 작심하고 작가에게 반항을 시작했다
주어진 성격을 바꾸고 고난이 와도 척척 해결하고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다른 길로 냅다 달리기도 하고,
결국 당황한 작가가 내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었다
오늘부터 내가
주인공이다!
_ 시 「나는 주인공이다」전문
까닭 없이도 끄떡 없이 사는 이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오철수는 청년 시절 이병승 시인을 '지적이기에는 너무 예민했고, 예술적이기에 너무 의지적이었다'고 정의했다. 그는 지적 매몰을 거부하며 삶의 냄새를 맡고자 하는 예민함이고, 예술적 유약함이나 회피를 거부하고 삶에서 자신의 별을 쏘아 올리기 위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더더욱 이념과 현실의 대립을 역동적 삶으로 일원화시키고자 애를 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시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는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꾸밈없이 겸허하게 이야기한다.
어제는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죽고 싶었다
까닭 없이 세상이 지겨웠고
까닭 없이 오그라들었다
긴 잠을 자고 깬 오늘은
까닭 없이 살고 싶어졌다
아무라도 안아주고 싶은
부드럽게 차오르는 마음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른 형,
지금은 싱싱한 야채 트럭 몰고 전국을 떠돌고
남편 미워 못 살겠다던 누이는 영국까지 날아가
애 크는 재미로 산다며 가족사진을 보내오고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고기반찬 없으면 삐지는 할머니
살고자 하는 것들은 대체로
까닭이 없다
_「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전문
삶이 시 속 화자에게 무심하면 무심할수록 그의 촉수는 무수하게 움직인다. 알 수 없는 생(生)의 힘이 시적 화자를 살게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까닭 없이 죽고" 싶어진다. 죽어 싶어진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인 "까닭"을 묻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것은 현시대를 예민하게 살고 있는 이라면 내심 수궁할 만한 그러한 "까닭"을 얼른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삶의 지리멸렬함이 아닐까. 하지만 화자는 결국 그 지리멸렬함으로 인해 다시 "까닭 없이 살고" 싶어진다. 무릎을 탁 칠만한 깨달음이 아닌 그 지리멸렬했던 삶의 까닭들이 새삼스레 다가온 것이다.
시인 오철수의 지적처럼 그 새삼스러움의 결정이 "까닥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의 이유가 된다. "까닭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한 영역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앞뒤가 맞지 않은 비논리적인 상황과 종종 마주한다. 이 "까닥 없다"의 예로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르고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고기반찬 없으면 삐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결국 이러한 예들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이 살고자 하는 힘은 결국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삶속에서 다시 삶을 꾸려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가장 현실적인 삶의 형태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가꿔나가며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만드는 것. 그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능력을 기르는 삶 속에서 "까닭 없음"을 인생의 양념처럼 응용하려는 의지야 말로 삶을 즐기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삶을 즐겨야 할 자들은 시 속 화자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도 현실과 이념의 줄다리기를 하는 자와 그러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들에게 광고 문구에 나올 법한 삶을 즐기라는 식의 값싼 위로보다는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라는 말이 그들의 마음에 더 꾹 닿을 지도 모른다.
추천의 글
오랫동안 유비는 연합이나 동거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 삶과 다른 삶이,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이 사물과 그 사람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일이 유비의 소임이었기 때문이다. 이병승도 유비의 시인이다. 그는 세상이 연민의 그물로 촘촘하게 짜여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시가 하나의 그물코로서 그런 연대의 일부를 이룬다고 느낀다. 그는 자주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아버지도 그랬을 테지"(「아버지의 수첩」).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유비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과 뜻을 미루어 받아들이는 유비라고 하면 될까? 그의 시는 과장 없이도 '겸손'하고, 그의 마음은 감상 없이도 '경외'로 가득하며,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수식 없이도 '경이'롭다.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른 형"이나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고기반찬 없으면 삐지는 할머니"(「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도 이 '겨'자 돌림 대가족의 구성원이다. 나도 슬그머니 그 한구석에 끼고 싶다. 이병승 시인도 그랬을 테지, 하면서.
_ 권혁웅(시인)
시인의 말
나는 언어유희와 자폐적 서정으로 가득한 우울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위의 극단으로 소통 불가를 외치는 홀로 고고한 시도 좋아하지 않는다.
밝고 건강한 시, 삶을 사랑하게 하는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시가 좋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마음이 담긴 시, 어둠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 빛을 향해 솟구치는 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끝내 희망을 잃지 않는 시, 사람을 품어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가 좋다. 나에게 시란, 시대를 관통하는 무기이자 생의를 뒤흔드는 것이었으므로.
목차
목차
지하철 환승역 | 꽃의 기원 |무비, 마이 라이프 | 야생 | 영웅본색 | 내압 | 만화영웅 | 소유 | 점조직의 숲 | 꽃, 피다 | 단 하나의 집합 | 새 | 아다라시 | 폭설 | 낙타거미 | 목련이 떨어진 이유
제2부
억새풀밭에서 | 목숨의 냄새를 맡다 | 머나먼 지구 | 한, 시간 | 바다 나무 | 숨소리 | 사원 앞의 그 여자 | 고양이 | 담쟁이넝쿨 | 어떤 소통 | 눈의 행로 | 날개 | 가을 은행나무 | 맞물림 | 그래, 가끔은 | 불독개미
제3부
아버지의 수첩 | 주먹 | 나무 약국 | 경공술 | 길거리 화분 | 내가 살던 동네에서 | 몸속의 길 | 어머니는 걷는다 | 두부소녀 길을 잃다 | 싸움의 법칙 | 세발자전거 |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 내 인생의 액셀러레이터 | 먼지와 날개 | 옆으로 자라는 나무
제4부
어느 고문기술자의 고백 | 대천 앞바다 | 레드 제플린이나 듣지 | 꿈 | 사랑 | 머구리 | 외로움은 소란하다 | 변하지 않는 풍경 | 雨化 | 법당엔 가지도 않고 | 끝끝내 알 수 없는 일 |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 나는 주인공이다 | 나비 | 다른 시를 보다
발문 오철수 | 시인의 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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