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일지(실천문학 시인선 27)
옥빈 시집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1993년 계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옥빈 시인의 시집 『업무일지』가 출간됐다. 1부「출근」, 2부「점심시간」, 3부「출장」, 4부「퇴근」의 각 冒頭 시를 포함하여 출근하여 업무현장에서 공구와 기계들과 함께하고 퇴근하는 ‘업무일지’ 형식의 총 6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덕하 시인은 해설에서 ‘도구와 기계의 원리와 시인의 감정과 마음의 이치가 잘 결합된 시가 일리 있는 삶을 증언한다. 노동 현장의 애환, 노동의 가치와 의미, 공구와 기계와 오래 사귄 이야기가 서정적으로 전개되는 그의 시집은 일과 명상이 함께하는 품격을 지닌다.’고 평하고 있다. 시인 또한 시인의 말에서 ‘이번 시집 『업무일지』는 그동안 써왔던 노동현장의 공구나 장비들, 노동자들에 대한 몇몇 서정을 묶었다.’고 밝히고 있다. 독자들은 이 시집의 표면에서는 면장갑-안전화-작업복-전기모터-베어링-커넥팅로드-수나사암나사-망치-줄자-파이프렌치-드라이버-수평자-가위-공기압축기-스패너 등의 작업 공구나 연장을, 오버홀-도비공-도장(塗裝)-머시닝센터 같은 작업공정(工程)을 만날 것이고 내면에서는 시인의 삶과 공구와 업무가 서로 하나로 연결되고 소통되는 숨결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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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시인은 오랫동안 사물과 사귀면서 소통한 결과 사물의 말을 자기 식으로 알아듣고 받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사물도 다른 존재자들처럼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시인은 이런 사물의 표현에 주목하여 그 표현의 의미를 알아채고 자신의 삶을 연결한다. 시는 이렇게 사물과 시인이 만나서 이루는 상호 표현적 관계의 결실이다.
손잡이가 달린 철 막대가 전부다
참 보잘것없고 소박하다
십자나 일자 더하거나 빼는 일
이미 정해진 길이지만
늘 무언가에 쫓기며 살아온 것처럼
일의 끝머리에서
마지막 부품을 조이거나 커버를 덮으며
다시는 나사 풀리는 날이 오지 않기를
흔들리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필요한 곳에서 나는
큰 힘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
큰일을 해내고 싶은 것이다
각기 다른 부품이나 기능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그곳에 동참을 하고 싶은 것이다
기계문명의 기초였던 나는
지금도 소리 없이 일하고 있다
격렬하거나 창조적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풀고 조이던 날들
어느새 멋진 가계家計를 만들어 놓았다
(「드라이버」, 전문)
"필요한 곳에서 나는/큰 힘을 내려는 것이 아니라/큰일을 해내고 싶은 것이다"라고 시인은 드라이버의 존재를 밝힌다. 비록 드라이버가 '보잘것없고 소박'하고 '큰 힘'을 내지는 않지만, 적재적소에서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여 나사를 제대로 조일 때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는 시적 진술에 공감하며 도구의 존재감과 힘과 아름다움을 새삼 느낀다.
문이 열리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고향은 늘 아득하다
먼 길을 흘러오는 동안 그는 골목길과 대로 사이에서 방황했다
청춘은 돌아갈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 과거는 추억으로 흐르고, 때가 되면 그리움으로 물결친다
선택된 길이란 살아갈 날들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 바람의 방향과 물줄기를 꼭 그려야 한다
물과 공기의 사용량만큼 그가 화첩 속에 빛의 방향을 남기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출발선을 그리고 있다
(「체크밸브」, 전문)
시인은 시 '체크밸브'를 통해 삶의 이치를 말한다.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체크밸브(check valve)는 "유체의 흐름이 역방향으로 일어날 때 닫혀 역류를 막는 밸브. 유체가 한쪽으로만 흐르도록 만든 장치"다. 이러한 장치는 우리의 삶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역류를 막는 체크밸브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적 존재의 삶을 체현한다. 시간으로 구성된 우리가 매 순간을 살면서 지나간 순간을 물리적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실존의 현실을 시는 표현하고 있다.
축의 중심을 잡는 일이나
안아주고 지탱해주는 하우징처럼
사랑의 시작은 뭉클하다
틈새가 벌어지는 일
둥글게 부대끼며 사는 동안
닳아진 볼처럼
사랑도 나이를 먹는다
속이 거북해진 날들이 더해가며
토해내었던 각혈처럼
사랑도 아플 때가 있다
축에 베어링을 맞추고
하우징을 조립한다
이 몸살 같은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베어링을 갈며」, 전문)
시인이 기계 부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 삶의 원리와 연결하여 맥락을 설정한다. 우리는 사실을 해석하고 우리가 사실에 부여한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미를 수용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발견한 의미를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기계 부품을 삶을 은유하고 환유하는 존재자로 여길 때, 곧 기계와 일을 할 때 자신과 일을 분리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 협력하는 존재자와 하나가 되는 일은 의미의 원천인 인간의 정신적 현실을 물질적으로 체험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저기서 여기까지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힘들었던 삶의 추억이 자꾸 나를 울렸다
공고를 졸업할 무렵 미래는 잴 수 없는 불안이었다
그렇게 팽개쳐진 날들은 독서처럼 조용했고, 내가 방관했던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흘렀다
여기까지 기록할 역사가 너무 빈약하다
빼앗긴 자유와 희망의 눈금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여기서 저기까지
알맞은 자리 저만치 안개의 강이 흐른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강둑을 따라 내 인생의 그래프는 자주 반복 주기를 갖는다
미래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내가 풀어놓았던 저기까지의 일들을 방관할 수 없다 꼼꼼하게 눈금을 읽어야 한다
하루가 너무 빠르다
저기까지 기록할 이력은 짧지만 나는 전문가다
아름다운 추억의 거리를 재야겠다
(「줄자」, 전문)
시인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숱한 일들이 이어져 '저기서 여기'에 이른 개인사적 현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구체적인 개인이 겪은 단 한 번뿐인 순간의 현실을 서사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우선 '줄자'를 써서 재봐야 할 추억으로 여긴다. "저기에서 여기까지"를 되새기면서 여기에 이른 내력을 되짚어 보고, 비록 "빼앗긴 자유와 희망의 눈금이 보이질" 않지만 자신을 다독이며 "꼼꼼하게 눈금을" 읽고 "다시 시작하자"는 시인의 마음가짐이 가슴을 울린다. "힘들었던 삶의 추억이 자꾸 나를 울렸"던 삶의 여백과 시의 행간에는 삶에 대한 책임감이 짙게 배어있다.
옥빈의 시를 읽을 때 일과 직결된 시는 아름답고, 시와 직결된 일은 참되다는 것을 새삼 공감한다. 공구를 쓰고 장비를 다루고 여럿이 함께 일하며 느끼는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며 뜻을 불리는 일에 부지런한 시인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 잇달아 이어져 여기에 이르는 정황을 몸으로 기억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공구와 기계장비를 다루고 도면을 보고 설비를 살피고 부품을 교환하는 일을 통해 삶의 기술과 원리를 그는 터득한다. 일하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땀방울처럼 맺힐 때 일에 깃든 의미를 시인은 되새긴다. 일을 통해 시인은 세계를 깊이 체험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달성한 결과를 확인할 때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체험한 바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몸에 깃든다는 것을 안다. 생생한 체험이 남긴 인상적인 기억들이 언어화되고 뜻을 불릴 때 삶의 원리와 의미를 체험하고 공감하는 일이 생기며 그런 정동과 의미의 맥락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그렇게 일터에서 체득한 의미와 가치의 맥락에서 형성된 경험이 무의식과 연결되어 새로운 맥락을 창출하고 삶에 만족감을 높인다는 것을 이 시집은 증명하고 있다.
목차
목차
출근
문서파쇄기통을 비우며
아침회의
생산성 향상에 대하여
견적서를 보내며
폭염주의보
기계점검
공空친 날
사무실 어항에는
배관공사
소나기
오버홀
눈사람 발주사양서
노하우
도장塗裝
제2부
점심시간
면장갑
체크밸브
윤활유
철
전기모터
베어링을 갈며
커넥팅로드
도비공
수나사 암나사
안전화
작업복
전화기
카달로그
밥집
제3부
출장
저울
사다리
망치
줄자
파이프렌치
드라이버
수평자
연장
가위
머시닝센터
공구함
공기압축기
트럭
스패너
졸음쉼터에서
제4부
퇴근
못의 말들
용접 아다리
고철장
가계부
해장
늦은 저녁
은행
문자 메시지
감기몸살
야유회
월급
호미
지게차의 기도
해설
시인의 말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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