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닦다(실천시집선 307)
201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명왕성 유일 전파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시 부문 대상, 황순원 디카 시 대상, 이병주 탄생 100주년 팬픽에서 금상, 호미문학상, 최충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한 김향숙 시인이 첫 시집 『질문을 닦다』를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시집의 제목 『질문을 닦다』처럼 사물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형상화한 4부 49편의 미려하면서도 진지한 시어로 가득한 시들이 실려 있다. 이 시집의 해설자가 ‘최근 필자가 본 시들 가운데 이 시인의 시들처럼 관찰다운 관찰을 보여준 사례를 본 적이 없었다.’는 상찬의 글과 김향숙의 시는 ‘삶의 본질을 관(觀)하면서 통(通)하고 뭉개면서 일으켜 세운다.’거나 ‘사물을 드러내되 그것이 보여주는 일회적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조금씩 미끄러져 그 궁극의 가치에 도달해 가는 릴케 식 사물시(事物詩, Dinggedicht)에 조응한다’는 두 추천사의 글을 통해서도 시인이 얼마나 놀랍고 특출한 질문자이자 관찰자로서의 눈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시인의 특출한 질문에 대한 정답은 정해진 뻔한 답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독자들의 제각각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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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1.
김향숙 시인의 시집은 관찰자적 시선의 놀라운 힘을 보여 준다. 시라는 것이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본질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를 위해서는 먼저 관찰, 대상에 시선을 고정해 본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필자가 본 시들 가운데 이 시인의 시들처럼 관찰다운 관찰을 보여준 사례를 본 적이 없었다. 다음의 시 「방울이라는 바퀴」를 가지고 이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빗방울'을 응시한 '결과'를 언어로 옮긴 것이다.
빗방울이란 이름
그건,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만 얻게 된다
아주 짧은 순간을 일컫는
일그러지고 부서져야 얻게 되는
바람과 허공이 하얗게 부푼 민들레 속씨 뭉치처럼
빗방울도 날아다니는 항목들이다
바다에서 날아올라
구름 꽃으로 피었다가
당신에게 내려앉는다
오랜 시간 빗줄기로 내려오면서
동그랗게 뭉쳐지는, 짧은 순간 이름을 얻어
깨어지는 바퀴가 되어 흘러간다
순간은 빗방울처럼 위태롭다
그것들은 미끄럽다
창문에 동그랗게 붙어서
무수한 눈동자로 들여다보고 있다
방울들이 떨어져야 하는 곳이 있다면
그건, 바닥에서 얻게 된
이름들이다
동그랗게 뭉쳐져서
아직 깨지지 않은 것 몇 개를
눈동자로 쓰고 있다
-「방울이라는 바퀴」, 전문
시인은 "빗방울"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만 얻게 된다"는 첫 문장으로부터 이 시를 시작한다. 생각해 보면 과연 그렇다. 우리는 빗방울을 그것이 공중에 머무는 순간에는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나 손등이나 풀잎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순간에만 "빗방울"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한 명료한 형태를 그려내며, 바로 그 "아주 짧은 순간"에, "빗방울"은, 그 이름에 걸맞은 형태를 그려내는 바로 그 순간에, 바로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만다. "빗방울"은 바로 그 순간의 이름이며 완성되는 찰나에 바스러지고 마는 이름이다.
어떻게 시인은 이 "빗방울"의 찰나를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놀라운 관찰력, 그보다도 직관적 투시의 힘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에 관해 논했다는 D. H. 로렌스의 언설을 떠올린다. 작가 로렌스는 독특한 의미에서의 리얼리스트여서 관념적, 사회적 리얼리즘이 포착하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나상에의 발견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여러 번 그렸는데, 그가 그린 것은 해바라기의 무엇인가를 로렌스는 물었다. 화가들이 무엇인가를 그릴 때 그들은 무엇을 그리는가?
어떤 꽃을, 인물을 그린다면 그는 무엇을 그리는 것인가? 그 꽃이나 인물의 외관인가? 그 겉모습에의 인상인가? 고흐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해바라기인 것, 해바라기가 해바라기로서 나
타나는 그 순간을 그렸다고, 로렌스는 말했다고, 어떤 비평가는 논의했다.
바로 그렇게 김향숙 시인은 "빗방울"이 "빗방울"로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절묘한 찰나를 통하여 "빗방울"의 '존재 그 자체'를 잡아채는 놀라운 포착력을 보여준다. 그 순간이 아니면 누구도 "빗방울"이 "빗방울"이 되고 있음을, 그와 동시에 "빗방울" 아닌 것이 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2
삼라만상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은, 시인의 관심이 생활 속에서 흔히 보는 물상들을 향할 때 더욱 큰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번에는 시인의 투시력이 자연 현상을 향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투시는 현상을 뚫고 본질로 직입해야 하는데, 여기서 시인이 즐겨 구사하는 방법은 비유법이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라면 안이하거나 한가한 비유를 허용하지 않는 긴장력을 발휘한다. 비평을 하는 한편으로 시를 쓰기도 하는 필자이지만, 이 시인이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의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수단들을 접하고 나면 놀라운 감각이란 바로 이런 것이겠다,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시인에게 '밤'은 어떻게 이해되던가?
밤은 완벽한 모직
세상이 모두 어둠이라면
행사와 모임 때마다 갖춰야 하는
드레스코드는 없었을 것이다
목소리와 온갖 소리로 장식을 달고
모직이나 실크, 리넨이나
디자인도 계절에 맞는 패션으로 유행을 만들겠지
달이 뜨지 않는 옷
어둠은 영원한 옷감이었겠지
감촉도 화려함도 재료도 재단도 필요 없는
어둠을 걸어둘 장롱이 없어
밤 한 벌 껴입고
외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은 평면이니까
어떤 굴곡도 없는 무형의 세계
가위도 없이 저 먼 곳에 불빛 몇 개 달면
아득한 이곳이 된다
기형의 몸들이
밤의 뒷면에서 드러내는 무형의 옷
누구나 투명하고 영구적인 그 한 벌을 얻으려
껴입었던 낮을 벗는다
-「밤이라는 옷」, 전문
요컨대, 이 시는 그 첫 줄의 시구 "밤은 완벽한 모직"이라는 하나의 비유법으로 모든 승리를 거머쥐고 만다. 이렇게 '밤=모직'이라는 비유의 충격에 한 번 노출되고 나면 독자들은 나머지 행연들은 전기에 감전된 쥐의 얼어붙은 몸으로 다만 그 훑어내림을 감지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이 이 시선의 힘을 달빛 쪽으로 돌렸을 때 결과는 더욱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시 「달빛 성분 검사서」는 그 살아있는 사례다.
달빛 한 조각 책상에 올려두었다
재물대 위 광학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핀셋으로 한 자락 얇게 벗겨낸다
세포마다 애간장 타는 냄새와
백일홍의 젖은 숨소리가 묻어 있다
울음을 어루만지던 서늘한 달빛
가을 오동잎에 내려앉은
마지막 달빛이 야위었다
꽃잎에 묻은 지문과 뒤뜰을 지나간 발자국
뜨락을 쓸고 간 치맛자락의 무늬도 보인다
달을 마중 나오던 하얀 박꽃과 달맞이꽃
분꽃의 숨소리도 들어 있다
달빛이 모과나무 가지에 앉아 있을 때
나지막이 깔리던 밤바람
먼바다를 건너온 돛의 거친 펄럭임과
달의 맨손에 묻은 기도의 성분을 살피는 중이다
만월로 몸을 부풀린 신음과 문양을 관찰한다
낭떠러지를 걷어 달라는
순도 백 퍼센트 염원도 내포되어 있다
달의 그늘진 뒷면엔 기도 한 줌과
당신의 빈손도 들어 있다
분석된 달빛을 기록해 놓는 밤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는 달빛은 맑고 따뜻하다
-「달빛 성분 검사서」, 전문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창작방법론을 명료하게 제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광학 현미경"으로 사물 '들여다보기'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마치 중학교 생물 시간에 현미경으로 식물 세포를 관찰하려는 학생처럼 "핀셋으로" 달빛 "한 자락 얇게 벗겨낸다."
달빛을 감상하는 행위를 이와 같은 광학적 상상력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사례는 일찍이 없었으며, 그 충격은 가히 저 옛날 시인 이백이 달과 제 그림자와 더불어 술을 희롱하던 「月下獨
酌」의 그것에 근사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이렇게 재물대 위의 현미경으로 달빛을 얇게 벗겨내서 그 내부를 투시해 봄으로써 그 긴 사람살이의 긴 궤적 속에서 사람들이 달빛에 부쳐온 기막히게 아름다운 감정의 사연들이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으므로 아무리 미세한 감정의 애환이라도 시인, 곧 화자는 너끈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삶의 경건함에 새삼 눈뜬 사람의 허허로운 심정을 시적으로 축조해 놓은 작품이 바로 「자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 천장天葬 터
실려 온 관棺은 고작
웅크린 자루 하나
체면만 겨우 가린 자루
오토바이 뒷자리에 짐짝처럼 실려
구름 중턱까지 왔다
잘 풀리지 않는 매듭을
한참이나 푸는 천장사
꼬이고 꼬인 저승의 길
이승의 방식으로 풀기에는
매듭이 너무 질기다
구름을 벗긴 오전이
태양을 슬그머니 꺼내놓는다
웅크린 시신을 꺼낸 빈 자루
유족에게 돌려준다
생전의 망자는 저 자루에 칭커를 담고
소금을 사서 머리에 이었다
올해는 흉년이라 자신의 일생을 담았다
불룩한 부피의 생애였다고 여겼지만
자루를 여밀 만큼은 남겨 놓았다
물과 칭커 가루를 개어
주린 속을 달래는 천장사
비루鄙陋와 해탈解脫이
한 가지 맛이다
-「자루 이야기」 전문
여기 나오는 "천장"은 티베트 사람들의 고유한 장례 의식으로 독수리에게 육신을 떼어주고 떠나는 장례 의식이다. 이 천장(天葬)이 조장(鳥葬)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인지, 뭔가
다른 점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여기서 문제는 그런 것은 아닐 테다.
한 사람의 삶이 그가 보리("칭커")를 담아 놓던 "자루" 하나에 오롯이 담겨 끝막음에 다다르는 이 광경은 우리네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하고, 욕심과 망상에서 놓여날 것을 주문하고 남음이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이 광경에 대한 서경적 묘사로써 "문장"과 "경전"의 무게를 충당하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삶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고자 하는 시와 같고, 그 "문장"으로 빚어 놓은 "경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삶의 일상적 허상을 꿰뚫는 투시적 시선으로 그 본질에 직입하고자 하는, 놀라운 비유법을 구사하는 언어의 승부사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가 이 일상을 얼마나 날카롭게 해부하고 그 속을 백일하에 뒤집어 보이는지, 또 그러면서도 일상을 얼마나 치열한 수행의 도장으로 만드는지 이 시집은 알 수 있게 한다. 이 화려한 비유법의 시집 속에는 한 사람의 은밀한 수행자가 살고 있어 세상의 진실을 두 쪽 내어 보일 언어의 칼을 벼리고 있다.
목차
목차
연필의 국경 11
방울이라는 바퀴 12
밤이라는 옷 14
달빛 성분 검사서 16
달의 계곡 18
마리오네트의 저녁 20
그녀는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22
단추의 어원 24
나사 26
라그랑주점 28
휴일의 뉘앙스 30
질문을 닦다 32
제2부
광어 37
명작 38
빨래 경전 40
유치의 시절 42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44
우리도 쥐라고 46
싸리나무 48
당신을 미리 다녀왔습니다 50
타이르는 타일들 52
삼강 주막 54
구석에는 굳은살 56
제3부
시드는 혹은 시 드는 61
비누의 예의 62
길 잃은 문장 위를 걷다 64
이후, 라는 문장 66
이응이 굴러간다 68
곰보꽃게거미 70
숫자의 엉뚱한 휴일 72
책의 유령들 74
봄의 유목 76
봄바람 78
파랑의 3중주 80
바람 무늬 82
매듭 84
제4부
사파리 공식 87
명왕성 유일 전파사 88
타래난초 90
소나기와 손아귀 92
북극곰 94
실금 96
화석 98
지리산 100
파문을 건지다 102
구름의 순장 104
열람용 봄 106
자루 이야기 108
단 하나의 방 110
해설 방민호 115
시인의 말 140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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