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말은 정신, 글은 생명(인문교양총서 22)(양장본 Hardcover)
조선어학회 33인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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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말과 글이 풍전등화처럼 일제의 굴레에서 말살의 위기를 겪는 동안,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희망의 땅을 일군 조선어학회 33인이 살아 왔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광화문 거리에는 조선어학회 33인 기념탑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정부(문화재청)에서는 ‘광화문’ 한글 현판을 떼어 내고 ‘光化門’이라는 한자 현판을 달았다. 그 앞에 세종대왕 좌상이 있다.
이미 대한민국은 ‘한글 공동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 33인의 약전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미 대한민국은 ‘한글 공동체’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 33인의 약전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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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언어는 풍화되며 탈골되어 부서지고 또 뒤섞이며 새롭게 만들어져 인간 지식과 정보의 생명력을 창조하면서 사용자들 간에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언어 변화의 생태적 환경을 가장 격심하게 깨뜨리는 인위적 요인은 우리가 경험했던 식민 지배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 곧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바로 그 실례이며, 지난 시대에 우리는 그러한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조선 500년의 왕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빚어진 통치 권위의 몰락과 서방의 제국주의 팽창과 근대화의 물결과 맞물려 조선 왕조 체재는 일제 식민 지배로 휩쓸려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의 부산물로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내부적인 계급적 분열이 결국 분단이라는 허망한 역사의 중간 귀착지에 이른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분단 조국으로 이어지는 그 틈새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인과적인 사건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특히 일제의 조선 지배 초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주류들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식은 일본어의 보급과 상용, 곧 '국어(일본어)'의 확장이라는 근대적 제국지배 방식을 이념화하는 데 전력을 쏟아 붓는다. 일본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언어가 곧 순혈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의 방식과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조선어는 일본어에 비해 열등한 변두리 언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은 지배와 차별이라는 항등식의 이념이 일본 제국의 문명화론의 핵심이다.
일제 식민 기간 동안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던 조선학회의 구성원들은 좌우 혹은 중도적 성향을 띤 다양한 인사들로 결속하였으며 주권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조선어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하면서 내외에 밝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 조선어학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 선생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느슨해져 있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전환하고 곧 바로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재계 인사를 망라한 당대의 지성 인력을 집결시켰다. 이극로 선생은 "말은 곧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어문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탈식민 한글 운동의 거족적인 햇불을 당긴 것이다. 가장 험난했던 일제 식민 기간을 통해 우리 말과 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문 규범화의 정립과 조선어사전 사업을 민간단체의 힘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늘날 한글 시대의 문을 연 단초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탈식민 저항운동으로 그 빛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탈바꿈하면서 학교 교육을 위한 교과서 제작, 교원양성, 어문 용어의 통일 등의 난제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들 구성원은 좌우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 전용파와 한자 혼용파로 갈라져 지금까지 그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의 활동 성과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피상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이들을 바라보는 박제화된 우리들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국권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었던 어문학자들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왜 다시 분열이라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을까? 조선어학회의 학술적 성과나 조선 정신의 구심으로서의 조선어학회가 이루어낸 역할에 대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은 아직 봉인된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한 민간학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근대 계몽적 관점에서 한글 연구와 교육 및 보급을 모색하였으나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사망과 함께 역동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극로 선생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권회복 운동의 하나로 민족의 말과 글을 통일하고 또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기 위해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최현배, 이병기 등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로 개편하면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조선의 자아를 찾는 학술 단체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다. 한글을 통해 식민화된 조선의 민족공동체를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내란죄)의 명목으로 일제히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급운동은 한글 민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천 운동으로서 한편으로는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선인의 자주적 자아 발견의 지향점이 되었다. 특히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인 민세의 「농촌문화앙양론」은 한글 보급운동의 의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민족의 근원이 고향 농촌이며, 공업과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 근원 농촌의 자연 속에 흰 옷 펄럭이며, 일하면서 우리말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민세가 1938년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문화(지방)부장이었던 장지영 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연계하여 대대적인 농촌 계몽과 더불어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해 농민들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임을 깨닫고 하기 방학을 활용하여 한글보급, 기초 산수 등의 교양 강좌를 전국 단위로 확산시킨 민중 문화운동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한글문자보급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세의 「귀향학생 문자보급반」에 실린 글에서 민중의 교양 증진을 위한 지름길이 한글보급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 강습소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방학기간 귀향하는 학생들을 통한 농민 한글보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불과 3년 만에 문맹률을 20%나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글 계몽운동의 실천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이어받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김민수 선생의 「현대어문정책론」에 실린 당시 〈조선일보〉 동료였던 최은희(1904~ 1984) 기자도 "1928년 5월 조선일보 4차 정간 중에 장지영 선생은 지원자들에게 매일 오후 4시 편집실에서 철자법을 가르쳤으며, 나도 배운 그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특히 장지영 선생이 1929년 여름 조선일보 지방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자보급반'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1931년 2월 문화부장을 맡으며 '브로나로드' 운동의 불을 당긴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당시 문자보급반 교재로 사용되었던 「한글원본」과 1935년에 간행된 「문자보급교재」 간행에 장지영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당시 조선어학회와 함께 언론사가 추진했던 한글보급운동은 가장 강도 높은 탈식민 저항 운동의 하나였으며, 조선의 정신을 하나의 한글공동체로 묶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진석(1997)의 「문자보급을 통한언어는 풍화되며 탈골되어 부서지고 또 뒤섞이며 새롭게 만들어져 인간 지식과 정보의 생명력을 창조하면서 사용자들 간에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언어 변화의 생태적 환경을 가장 격심하게 깨뜨리는 인위적 요인은 우리가 경험했던 식민 지배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 곧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바로 그 실례이며, 지난 시대에 우리는 그러한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조선 500년의 왕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빚어진 통치 권위의 몰락과 서방의 제국주의 팽창과 근대화의 물결과 맞물려 조선 왕조 체재는 일제 식민 지배로 휩쓸려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의 부산물로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내부적인 계급적 분열이 결국 분단이라는 허망한 역사의 중간 귀착지에 이른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분단 조국으로 이어지는 그 틈새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인과적인 사건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특히 일제의 조선 지배 초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주류들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식은 일본어의 보급과 상용, 곧 '국어(일본어)'의 확장이라는 근대적 제국지배 방식을 이념화하는 데 전력을 쏟아 붓는다. 일본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언어가 곧 순혈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의 방식과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조선어는 일본어에 비해 열등한 변두리 언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은 지배와 차별이라는 항등식의 이념이 일본 제국의 문명화론의 핵심이다.
일제 식민 기간 동안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던 조선학회의 구성원들은 좌우 혹은 중도적 성향을 띤 다양한 인사들로 결속하였으며 주권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조선어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하면서 내외에 밝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 조선어학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 선생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느슨해져 있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전환하고 곧 바로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재계 인사를 망라한 당대의 지성 인력을 집결시켰다. 이극로 선생은 "말은 곧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어문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탈식민 한글 운동의 거족적인 햇불을 당긴 것이다. 가장 험난했던 일제 식민 기간을 통해 우리 말과 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문 규범화의 정립과 조선어사전 사업을 민간단체의 힘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늘날 한글 시대의 문을 연 단초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탈식민 저항운동으로 그 빛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탈바꿈하면서 학교 교육을 위한 교과서 제작, 교원양성, 어문 용어의 통일 등의 난제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들 구성원은 좌우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 전용파와 한자 혼용파로 갈라져 지금까지 그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의 활동 성과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피상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이들을 바라보는 박제화된 우리들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국권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었던 어문학자들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왜 다시 분열이라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을까? 조선어학회의 학술적 성과나 조선 정신의 구심으로서의 조선어학회가 이루어낸 역할에 대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은 아직 봉인된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한 민간학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근대 계몽적 관점에서 한글 연구와 교육 및 보급을 모색하였으나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사망과 함께 역동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극로 선생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권회복 운동의 하나로 민족의 말과 글을 통일하고 또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기 위해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최현배, 이병기 등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로 개편하면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조선의 자아를 찾는 학술 단체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다. 한글을 통해 식민화된 조선의 민족공동체를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내란죄)의 명목으로 일제히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급운동은 한글 민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천 운동으로서 한편으로는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선인의 자주적 자아 발견의 지향점이 되었다. 특히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인 민세의 「농촌문화앙양론」은 한글 보급운동의 의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민족의 근원이 고향 농촌이며, 공업과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 근원 농촌의 자연 속에 흰 옷 펄럭이며, 일하면서 우리말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민세가 1938년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문화(지방)부장이었던 장지영 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연계하여 대대적인 농촌 계몽과 더불어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해 농민들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임을 깨닫고 하기 방학을 활용하여 한글보급, 기초 산수 등의 교양 강좌를 전국 단위로 확산시킨 민중 문화운동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한글문자보급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세의 「귀향학생 문자보급반」에 실린 글에서 민중의 교양 증진을 위한 지름길이 한글보급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 강습소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방학기간 귀향하는 학생들을 통한 농민 한글보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불과 3년 만에 문맹률을 20%나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글 계몽운동의 실천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이어받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김민수 선생의 「현대어문정책론」에 실린 당시 〈조선일보〉 동료였던 최은희(1904~ 1984) 기자도 "1928년 5월 조선일보 4차 정간 중에 장지영 선생은 지원자들에게 매일 오후 4시 편집실에서 철자법을 가르쳤으며, 나도 배운 그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특히 장지영 선생이 1929년 여름 조선일보 지방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자보급반'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1931년 2월 문화부장을 맡으며 '브로나로드' 운동의 불을 당긴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당시 문자보급반 교재로 사용되었던 「한글원본」과 1935년에 간행된 「문자보급교재」 간행에 장지영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당시 조선어학회와 함께 언론사가 추진했던 한글보급운동은 가장 강도 높은 탈식민 저항 운동의 하나였으며, 조선의 정신을 하나의 한글공동체로 묶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진석(1997)의 「문자보급을 통한 농촌계몽과 민족운동」에 따르면 1929년에는 409명의 대학생들이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하였고, 1930년에는 참여 대학생이 9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해에 조선일보에서 무료로 배포한 「한글원본」이 9만 부나 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는 1928년 4월 1일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종의 문맹퇴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31년 7월 15일부터 '브나로드운동'이라고 불렀다. 제1회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 7월 15일 학생계몽대 조직을 위한 광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와는 달리 '조선문 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을 추가하여 식민 민중을 교화, 계몽하는 내용으로 진전되었다. 당시 심훈이 쓴 「상록수」라는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가 시골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은 영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후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는 최은희가 맡아 열연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단체 관람을 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추억이 새롭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가자의 숫자나 활동지역을 보면 거의 전국을 망라한 총체적 문화운동으로서 문맹률을 감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하나의 한글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위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한글은 위대한 주인을 되찾아 주류와 비주류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소통의 통로를 되찾는 한글의 시대를 열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사료 조사가 너무나 불충분하다. 역사가들의 접근 방식과 어문학자들의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통합적 평가 또한 매우 미진한 편이다. 예를 들면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실린 조선어학회 관련자에 대한 공로조서의 정보조차도 매우 부실하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에 따라 흩어지고 다시 한자와 한글 사용 대립으로 분산되어야 했던 조선어학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글 문화 운동으로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문학계에서조차 이들에 대한 저술 등 각종 사료에 대한 정밀한 분석 조사가 아직은 매우 미진하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의 성격에 대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의 학문 연구의 성과와 당대의 활동 상황에 대한 정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자못 위험한 일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첫째,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한글을 매개로 하여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주체적 민족 재흥 운동, 둘째, 문자의 과학화(어문규범 제정과 큰사전 편찬 등)와 자주화(한글보급운동)를 통한 근대성의 확립, 셋째,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탈식민 저항으로서 민족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어문 통일이라는 관점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다양성을 유지 발전하는 데에는 다소 실패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대한 사상적 논쟁에 휩쓸려 조선어학회의 국어발전사에 기여한 부분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농촌계몽과 민족운동」에 따르면 1929년에는 409명의 대학생들이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하였고, 1930년에는 참여 대학생이 9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해에 조선일보에서 무료로 배포한 「한글원본」이 9만 부나 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는 1928년 4월 1일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종의 문맹퇴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31년 7월 15일부터 '브나로드운동'이라고 불렀다. 제1회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 7월 15일 학생계몽대 조직을 위한 광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와는 달리 '조선문 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을 추가하여 식민 민중을 교화, 계몽하는 내용으로 진전되었다. 당시 심훈이 쓴 「상록수」라는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가 시골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은 영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후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는 최은희가 맡아 열연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단체 관람을 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추억이 새롭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가자의 숫자나 활동지역을 보면 거의 전국을 망라한 총체적 문화운동으로서 문맹률을 감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하나의 한글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위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한글은 위대한 주인을 되찾아 주류와 비주류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소통의 통로를 되찾는 한글의 시대를 열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사료 조사가 너무나 불충분하다. 역사가들의 접근 방식과 어문학자들의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통합적 평가 또한 매우 미진한 편이다. 예를 들면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실린 조선어학회 관련자에 대한 공로조서의 정보조차도 매우 부실하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에 따라 흩어지고 다시 한자와 한글 사용 대립으로 분산되어야 했던 조선어학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글 문화 운동으로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문학계에서조차 이들에 대한 저술 등 각종 사료에 대한 정밀한 분석 조사가 아직은 매우 미진하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의 성격에 대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의 학문 연구의 성과와 당대의 활동 상황에 대한 정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자못 위험한 일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첫째,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한글을 매개로 하여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주체적 민족 재흥 운동, 둘째, 문자의 과학화(어문규범 제정과 큰사전 편찬 등)와 자주화(한글보급운동)를 통한 근대성의 확립, 셋째,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탈식민 저항으로서 민족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어문 통일이라는 관점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다양성을 유지 발전하는 데에는 다소 실패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대한 사상적 논쟁에 휩쓸려 조선어학회의 국어발전사에 기여한 부분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조선 500년의 왕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빚어진 통치 권위의 몰락과 서방의 제국주의 팽창과 근대화의 물결과 맞물려 조선 왕조 체재는 일제 식민 지배로 휩쓸려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의 부산물로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내부적인 계급적 분열이 결국 분단이라는 허망한 역사의 중간 귀착지에 이른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분단 조국으로 이어지는 그 틈새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인과적인 사건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특히 일제의 조선 지배 초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주류들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식은 일본어의 보급과 상용, 곧 '국어(일본어)'의 확장이라는 근대적 제국지배 방식을 이념화하는 데 전력을 쏟아 붓는다. 일본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언어가 곧 순혈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의 방식과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조선어는 일본어에 비해 열등한 변두리 언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은 지배와 차별이라는 항등식의 이념이 일본 제국의 문명화론의 핵심이다.
일제 식민 기간 동안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던 조선학회의 구성원들은 좌우 혹은 중도적 성향을 띤 다양한 인사들로 결속하였으며 주권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조선어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하면서 내외에 밝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 조선어학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 선생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느슨해져 있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전환하고 곧 바로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재계 인사를 망라한 당대의 지성 인력을 집결시켰다. 이극로 선생은 "말은 곧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어문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탈식민 한글 운동의 거족적인 햇불을 당긴 것이다. 가장 험난했던 일제 식민 기간을 통해 우리 말과 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문 규범화의 정립과 조선어사전 사업을 민간단체의 힘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늘날 한글 시대의 문을 연 단초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탈식민 저항운동으로 그 빛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탈바꿈하면서 학교 교육을 위한 교과서 제작, 교원양성, 어문 용어의 통일 등의 난제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들 구성원은 좌우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 전용파와 한자 혼용파로 갈라져 지금까지 그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의 활동 성과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피상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이들을 바라보는 박제화된 우리들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국권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었던 어문학자들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왜 다시 분열이라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을까? 조선어학회의 학술적 성과나 조선 정신의 구심으로서의 조선어학회가 이루어낸 역할에 대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은 아직 봉인된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한 민간학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근대 계몽적 관점에서 한글 연구와 교육 및 보급을 모색하였으나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사망과 함께 역동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극로 선생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권회복 운동의 하나로 민족의 말과 글을 통일하고 또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기 위해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최현배, 이병기 등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로 개편하면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조선의 자아를 찾는 학술 단체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다. 한글을 통해 식민화된 조선의 민족공동체를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내란죄)의 명목으로 일제히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급운동은 한글 민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천 운동으로서 한편으로는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선인의 자주적 자아 발견의 지향점이 되었다. 특히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인 민세의 「농촌문화앙양론」은 한글 보급운동의 의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민족의 근원이 고향 농촌이며, 공업과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 근원 농촌의 자연 속에 흰 옷 펄럭이며, 일하면서 우리말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민세가 1938년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문화(지방)부장이었던 장지영 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연계하여 대대적인 농촌 계몽과 더불어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해 농민들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임을 깨닫고 하기 방학을 활용하여 한글보급, 기초 산수 등의 교양 강좌를 전국 단위로 확산시킨 민중 문화운동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한글문자보급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세의 「귀향학생 문자보급반」에 실린 글에서 민중의 교양 증진을 위한 지름길이 한글보급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 강습소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방학기간 귀향하는 학생들을 통한 농민 한글보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불과 3년 만에 문맹률을 20%나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글 계몽운동의 실천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이어받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김민수 선생의 「현대어문정책론」에 실린 당시 〈조선일보〉 동료였던 최은희(1904~ 1984) 기자도 "1928년 5월 조선일보 4차 정간 중에 장지영 선생은 지원자들에게 매일 오후 4시 편집실에서 철자법을 가르쳤으며, 나도 배운 그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특히 장지영 선생이 1929년 여름 조선일보 지방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자보급반'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1931년 2월 문화부장을 맡으며 '브로나로드' 운동의 불을 당긴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당시 문자보급반 교재로 사용되었던 「한글원본」과 1935년에 간행된 「문자보급교재」 간행에 장지영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당시 조선어학회와 함께 언론사가 추진했던 한글보급운동은 가장 강도 높은 탈식민 저항 운동의 하나였으며, 조선의 정신을 하나의 한글공동체로 묶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진석(1997)의 「문자보급을 통한언어는 풍화되며 탈골되어 부서지고 또 뒤섞이며 새롭게 만들어져 인간 지식과 정보의 생명력을 창조하면서 사용자들 간에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언어 변화의 생태적 환경을 가장 격심하게 깨뜨리는 인위적 요인은 우리가 경험했던 식민 지배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어 말살 정책, 곧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바로 그 실례이며, 지난 시대에 우리는 그러한 처절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했다.
조선 500년의 왕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빚어진 통치 권위의 몰락과 서방의 제국주의 팽창과 근대화의 물결과 맞물려 조선 왕조 체재는 일제 식민 지배로 휩쓸려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의 부산물로 광복을 맞이한 우리나라는 내부적인 계급적 분열이 결국 분단이라는 허망한 역사의 중간 귀착지에 이른 것이다. 대한제국에서 분단 조국으로 이어지는 그 틈새는 너무나 복잡다단한 인과적인 사건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특히 일제의 조선 지배 초기부터 천황을 중심으로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주류들로부터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식은 일본어의 보급과 상용, 곧 '국어(일본어)'의 확장이라는 근대적 제국지배 방식을 이념화하는 데 전력을 쏟아 붓는다. 일본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언어가 곧 순혈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의 방식과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조선어는 일본어에 비해 열등한 변두리 언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어 말살 정책은 지배와 차별이라는 항등식의 이념이 일본 제국의 문명화론의 핵심이다.
일제 식민 기간 동안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던 조선학회의 구성원들은 좌우 혹은 중도적 성향을 띤 다양한 인사들로 결속하였으며 주권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29년 조선어학회의 핵심 사업인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하면서 내외에 밝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에 조선어학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 선생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느슨해져 있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전환하고 곧 바로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재계 인사를 망라한 당대의 지성 인력을 집결시켰다. 이극로 선생은 "말은 곧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어문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탈식민 한글 운동의 거족적인 햇불을 당긴 것이다. 가장 험난했던 일제 식민 기간을 통해 우리 말과 글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문 규범화의 정립과 조선어사전 사업을 민간단체의 힘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늘날 한글 시대의 문을 연 단초가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탈식민 저항운동으로 그 빛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탈바꿈하면서 학교 교육을 위한 교과서 제작, 교원양성, 어문 용어의 통일 등의 난제들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들 구성원은 좌우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흩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 전용파와 한자 혼용파로 갈라져 지금까지 그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의 활동 성과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피상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이들을 바라보는 박제화된 우리들의 시선은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국권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었던 어문학자들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왜 다시 분열이라는 과정을 밟아야만 했을까? 조선어학회의 학술적 성과나 조선 정신의 구심으로서의 조선어학회가 이루어낸 역할에 대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은 아직 봉인된 상태로 남아있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 선생의 문하생들이 주축이 되어 1921년 12월 3일,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한 민간학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근대 계몽적 관점에서 한글 연구와 교육 및 보급을 모색하였으나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사망과 함께 역동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이극로 선생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국권회복 운동의 하나로 민족의 말과 글을 통일하고 또 조선어사전 편찬을 추진하기 위해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최현배, 이병기 등 회원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로 개편하면서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조선의 자아를 찾는 학술 단체로 자리를 매김하게 되었다. 한글을 통해 식민화된 조선의 민족공동체를 자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내란죄)의 명목으로 일제히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보급운동은 한글 민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실천 운동으로서 한편으로는 농촌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함으로써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인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선인의 자주적 자아 발견의 지향점이 되었다. 특히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한 분인 민세의 「농촌문화앙양론」은 한글 보급운동의 의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민족의 근원이 고향 농촌이며, 공업과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 근원 농촌의 자연 속에 흰 옷 펄럭이며, 일하면서 우리말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민세가 1938년 조선일보 사장 시절에 문화(지방)부장이었던 장지영 선생은 조선어학회와 연계하여 대대적인 농촌 계몽과 더불어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해 농민들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임을 깨닫고 하기 방학을 활용하여 한글보급, 기초 산수 등의 교양 강좌를 전국 단위로 확산시킨 민중 문화운동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다. 한글문자보급운동의 도화선이 된 민세의 「귀향학생 문자보급반」에 실린 글에서 민중의 교양 증진을 위한 지름길이 한글보급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 강습소 교육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방학기간 귀향하는 학생들을 통한 농민 한글보급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불과 3년 만에 문맹률을 20%나 줄이는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이다.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글 계몽운동의 실천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이어받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김민수 선생의 「현대어문정책론」에 실린 당시 〈조선일보〉 동료였던 최은희(1904~ 1984) 기자도 "1928년 5월 조선일보 4차 정간 중에 장지영 선생은 지원자들에게 매일 오후 4시 편집실에서 철자법을 가르쳤으며, 나도 배운 그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특히 장지영 선생이 1929년 여름 조선일보 지방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문자보급반'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1931년 2월 문화부장을 맡으며 '브로나로드' 운동의 불을 당긴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당시 문자보급반 교재로 사용되었던 「한글원본」과 1935년에 간행된 「문자보급교재」 간행에 장지영 선생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당시 조선어학회와 함께 언론사가 추진했던 한글보급운동은 가장 강도 높은 탈식민 저항 운동의 하나였으며, 조선의 정신을 하나의 한글공동체로 묶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진석(1997)의 「문자보급을 통한 농촌계몽과 민족운동」에 따르면 1929년에는 409명의 대학생들이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하였고, 1930년에는 참여 대학생이 9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해에 조선일보에서 무료로 배포한 「한글원본」이 9만 부나 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는 1928년 4월 1일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종의 문맹퇴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31년 7월 15일부터 '브나로드운동'이라고 불렀다. 제1회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 7월 15일 학생계몽대 조직을 위한 광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와는 달리 '조선문 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을 추가하여 식민 민중을 교화, 계몽하는 내용으로 진전되었다. 당시 심훈이 쓴 「상록수」라는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가 시골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은 영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후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는 최은희가 맡아 열연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단체 관람을 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추억이 새롭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가자의 숫자나 활동지역을 보면 거의 전국을 망라한 총체적 문화운동으로서 문맹률을 감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하나의 한글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위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한글은 위대한 주인을 되찾아 주류와 비주류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소통의 통로를 되찾는 한글의 시대를 열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사료 조사가 너무나 불충분하다. 역사가들의 접근 방식과 어문학자들의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통합적 평가 또한 매우 미진한 편이다. 예를 들면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실린 조선어학회 관련자에 대한 공로조서의 정보조차도 매우 부실하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에 따라 흩어지고 다시 한자와 한글 사용 대립으로 분산되어야 했던 조선어학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글 문화 운동으로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문학계에서조차 이들에 대한 저술 등 각종 사료에 대한 정밀한 분석 조사가 아직은 매우 미진하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의 성격에 대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의 학문 연구의 성과와 당대의 활동 상황에 대한 정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자못 위험한 일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첫째,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한글을 매개로 하여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주체적 민족 재흥 운동, 둘째, 문자의 과학화(어문규범 제정과 큰사전 편찬 등)와 자주화(한글보급운동)를 통한 근대성의 확립, 셋째,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탈식민 저항으로서 민족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어문 통일이라는 관점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다양성을 유지 발전하는 데에는 다소 실패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대한 사상적 논쟁에 휩쓸려 조선어학회의 국어발전사에 기여한 부분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농촌계몽과 민족운동」에 따르면 1929년에는 409명의 대학생들이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하였고, 1930년에는 참여 대학생이 9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당해에 조선일보에서 무료로 배포한 「한글원본」이 9만 부나 되었다. 한편 동아일보에서는 1928년 4월 1일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종의 문맹퇴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31년 7월 15일부터 '브나로드운동'이라고 불렀다. 제1회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 7월 15일 학생계몽대 조직을 위한 광고에 따르면 조선일보와는 달리 '조선문 강습' 외에도 '위생강연', '학술강연' 등을 추가하여 식민 민중을 교화, 계몽하는 내용으로 진전되었다. 당시 심훈이 쓴 「상록수」라는 소설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그리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가 시골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모습은 영상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후에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의 여주인공 영채는 최은희가 맡아 열연했는데 초등학교 시절 단체 관람을 하며 대부분의 아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추억이 새롭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가자의 숫자나 활동지역을 보면 거의 전국을 망라한 총체적 문화운동으로서 문맹률을 감소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통해 하나의 한글 공동체로 뭉칠 수 있는 위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한글은 위대한 주인을 되찾아 주류와 비주류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소통의 통로를 되찾는 한글의 시대를 열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아직 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사료 조사가 너무나 불충분하다. 역사가들의 접근 방식과 어문학자들의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통합적 평가 또한 매우 미진한 편이다. 예를 들면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실린 조선어학회 관련자에 대한 공로조서의 정보조차도 매우 부실하다. 광복 이후 좌우 이념에 따라 흩어지고 다시 한자와 한글 사용 대립으로 분산되어야 했던 조선어학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한글 문화 운동으로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문학계에서조차 이들에 대한 저술 등 각종 사료에 대한 정밀한 분석 조사가 아직은 매우 미진하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의 성격에 대해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의 학문 연구의 성과와 당대의 활동 상황에 대한 정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자못 위험한 일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첫째, 민족 공동체의 정체성을 한글을 매개로 하여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주체적 민족 재흥 운동, 둘째, 문자의 과학화(어문규범 제정과 큰사전 편찬 등)와 자주화(한글보급운동)를 통한 근대성의 확립, 셋째,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탈식민 저항으로서 민족주의적 문화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어문 통일이라는 관점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다양성을 유지 발전하는 데에는 다소 실패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 대한 사상적 논쟁에 휩쓸려 조선어학회의 국어발전사에 기여한 부분이 축소되기도 하였다.
목차
목차
서문-조선어학회 사건을 되돌아보며
제1장 민족 언어의 통일과 큰사전
1. 환산 이윤재■"나랏말의 표준화를 꿈꾸다"
2. 효창 한 징■"옥중에서 산화한 한글운동가"
3. 고루 이극로■"조선 해방과 언어 민족주의"
4. 외솔 최현배■"한글의 과학적 연구 기반 마련"
5. 일석 이희승■"딸깍발이 고고한 선비"
6. 한결 김윤경■"한글 문자사의 결을 열다"
7. 건재 정인승■"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하다"
8. 무돌 김선기■"서구언어 이론과 민족 언어관의 접목"
9. 백수 정열모■"고등문법의 체계 수립"
10. 열운 장지영■"문자보급운동, 언론계로 확산"
11. 추정 이강래■"고등교육의 현장을 지킨 한글운동가"
12. 석인 정태진■"방언 연구의 선구자"
13. 또나 이석린■"조선어사전 전문용어"
14. 권승욱■"큰사전 실무를 맡다"
제2장 민족 문학과 역사, 교육
15. 애류 권덕규■"우리말 민족사학의 연원"
16. 야자 이만규■"조선교육사의 기초를 다진 독립운동가"
17. 동운 이중화■"기억에서 사라진 독립운동가"
18. 가람 이병기■"국어학의 경계를 넘어서"
19. 노산 이은상■"민족의 얼, 말, 글"
20. 눈솔 정인섭■"노래로 한글을 보급하다"
제3장 탈식민의 저항과 지원
21. 민세 안재홍■"고난의 민족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22. 애산 이 인■"말, 글, 얼을 지켜야 한다"
23. 남저 이우식■"인재 육성이 구국의 길"
24. 상산 김도연■"정치인으로서 민족독립 운동"
25. 해관 신윤국■"조선어학회 후원자"
26. 약영 김양수■"언론인으로서 국어운동 후원"
27. 범산 김법린■"종교지도자로서 국어 사랑"
28. 일농 장현식■"민족독립의 후견인"
29. 한뫼 안호상■"민족 사상운동가"
30. 월파 서민호■"정치운동가로서 국어운동"
31. 연아 서승효■"언론인으로 민족운동 지원"
32. 창남 윤병호■"애국 계몽운동가"
33. 김종철■"독립운동 후원"
참고문헌
제1장 민족 언어의 통일과 큰사전
1. 환산 이윤재■"나랏말의 표준화를 꿈꾸다"
2. 효창 한 징■"옥중에서 산화한 한글운동가"
3. 고루 이극로■"조선 해방과 언어 민족주의"
4. 외솔 최현배■"한글의 과학적 연구 기반 마련"
5. 일석 이희승■"딸깍발이 고고한 선비"
6. 한결 김윤경■"한글 문자사의 결을 열다"
7. 건재 정인승■"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하다"
8. 무돌 김선기■"서구언어 이론과 민족 언어관의 접목"
9. 백수 정열모■"고등문법의 체계 수립"
10. 열운 장지영■"문자보급운동, 언론계로 확산"
11. 추정 이강래■"고등교육의 현장을 지킨 한글운동가"
12. 석인 정태진■"방언 연구의 선구자"
13. 또나 이석린■"조선어사전 전문용어"
14. 권승욱■"큰사전 실무를 맡다"
제2장 민족 문학과 역사, 교육
15. 애류 권덕규■"우리말 민족사학의 연원"
16. 야자 이만규■"조선교육사의 기초를 다진 독립운동가"
17. 동운 이중화■"기억에서 사라진 독립운동가"
18. 가람 이병기■"국어학의 경계를 넘어서"
19. 노산 이은상■"민족의 얼, 말, 글"
20. 눈솔 정인섭■"노래로 한글을 보급하다"
제3장 탈식민의 저항과 지원
21. 민세 안재홍■"고난의 민족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22. 애산 이 인■"말, 글, 얼을 지켜야 한다"
23. 남저 이우식■"인재 육성이 구국의 길"
24. 상산 김도연■"정치인으로서 민족독립 운동"
25. 해관 신윤국■"조선어학회 후원자"
26. 약영 김양수■"언론인으로서 국어운동 후원"
27. 범산 김법린■"종교지도자로서 국어 사랑"
28. 일농 장현식■"민족독립의 후견인"
29. 한뫼 안호상■"민족 사상운동가"
30. 월파 서민호■"정치운동가로서 국어운동"
31. 연아 서승효■"언론인으로 민족운동 지원"
32. 창남 윤병호■"애국 계몽운동가"
33. 김종철■"독립운동 후원"
참고문헌
저자
저자
이상규
지은이 이상규(1953~ )는 경북 영천 출생으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언조사연구원 및 울산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도쿄대학교 대학원 객원 연구교수, 중국해양대학교 고문교수와 국립국어원장과 남북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 및 동 이사를 역임했다. 현 한국문학언어학회 회장, 국어정책학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 방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어방언학」, 「경북방언사전」(학술원우수도서), 「둥지 밖의 언어」, 「방언의 미학」, 「언어지도의 미래」(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한글고문서연구」(학술원우수도서) 등과 논문 「「훈민정음」 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 「어문학」 제100호. 한국어문학회. 2009, 「디지털 시대에 한글의 미래」, 「우리말연구」 제25집. 우리말연구학회. 2009. 「잔본 상주본 「훈민정음」, 「한글」 제298집. 한글학회. 2012., 「Hangeul, The Greatest Letters」, 「Koreana」 Vol. 21 No. 3. 2007, 「Gyeoremalkeunsajeon:An Alternative to Inter-Korean Communication」, 「ASIA」 Vol, 2-3. 등이 있다.
일석학술장려상(1986), 외솔학술상(2011), 봉운학술상(2012), 대통령표창(2004)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어방언학」, 「경북방언사전」(학술원우수도서), 「둥지 밖의 언어」, 「방언의 미학」, 「언어지도의 미래」(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 「한글고문서연구」(학술원우수도서) 등과 논문 「「훈민정음」 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 「어문학」 제100호. 한국어문학회. 2009, 「디지털 시대에 한글의 미래」, 「우리말연구」 제25집. 우리말연구학회. 2009. 「잔본 상주본 「훈민정음」, 「한글」 제298집. 한글학회. 2012., 「Hangeul, The Greatest Letters」, 「Koreana」 Vol. 21 No. 3. 2007, 「Gyeoremalkeunsajeon:An Alternative to Inter-Korean Communication」, 「ASIA」 Vol, 2-3. 등이 있다.
일석학술장려상(1986), 외솔학술상(2011), 봉운학술상(2012), 대통령표창(2004)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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