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통의교주 5(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170)(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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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통의교주』 제5권. 이 책은 청나라 중기의 학자 장학성이 지은 <문사통의>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내편 5권과 외편 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세계관과 역사관, 문학관이 고스란히 내포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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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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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성은 '경학이 사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고증학적 경학의 한 획을 그었다"
이 책은 『문사통의』를 교정하고 주석을 단 『문사통의교주』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장학성과 『문사통의』는 19세기 끄트머리 정치운동의 격화와 함께 '뿌리 찾기'가 진행되면서 주목받았다. 장학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신문화운동을 거치면서 고유문화의 가치를 재검토하자는 국고정리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호적, 고힐강, 황간 등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에 주목했다. 특히 나카 미치요가 재발견한 최술과 나이토 토라지로가 재발견한 장학성이 주목받았다.
『문사통의교주』는 교육자이자 학자인 섭영(葉瑛, 1896~1950)이 『문사통의』를 교정하고 주석하여 1948년에 완성한 책이다. 섭영은 『문사통의교주』를 완성한 뒤, 복건성 민후현 출신의 섭장청이 1935년 출판한 『문사통의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섭장청의 주석 가운데 잘된 것을 추가했고 『문사통의교주』는 대량본을 저본으로 삼아 아홉 가지 판본으로 교정되었다.
『문사통의교주』는 장학성의 또 다른 저작 『교수통의』 3권의 교주도 싣고 있다. 『교수통의』는 『문사통의』의 자매편이자 문학과 사학의 새로운 구성을 문헌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학성은 문헌학자들이 금과옥조로 받들던 세 사람인, 명나라 때의 초횡, 송나라 때의 정초, 문헌학의 시조인 반고를 차례로 비판한다. 그리고 출처 문제 때문에 기피하던 유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문사통의교주』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집할 수 있었던 『문사통의』의 가능한 한 많은 판본을 비교하여 의미가 통하도록 만든 판본이다. 섭영은 교정 작업에서 판본 대조를 통해 저본인 대량본의 잘못된 글자를 바로 잡고 보다 이해하기 좋은 글자를 확정했다. 둘째, 섭영은 장학성이 인용한 경전과 역사서의 원문을 찾고 필요한 단락을 추려서 잘라 붙이고 의미를 풀기 위해 섭영 자신의 의견을 붙인 주석을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사전과 자료의 습득이 쉽지 않은 때, 전쟁을 겪으면서 이처럼 많은 자료를 찾아내서 주를 단 섭영의 노력은 놀라운 일이다.
『문사통의교주』에 실린 『문사통의』는 대량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내편 5권과 외편 3권의 체제로 되어 있다. 권1에 실린 11편은 모두 유가 경전에 관한 글들이며 이는 장학성이 자신의 시대가 경학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 편집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장학성은 권1에서 사학을 궁극적인 귀결점으로 한다는 점을 경학의 해석을 통해 밝히고 있다. 권1이 장학성이 동시대에 바친 글이라면 권2에 실린 12편은 유교가 국가 종교인 시대, 특히 철학적 성격이 강한 송학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기 이론을 강화하고 있는 글이다. 권3에 실린 15편은 자신의 이론을 밝히는 연작 논문들이며 주로 사학과 문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권4에 실린 12편은 주로 역대의 잘못된 경향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관한 글들이다. 권5에 실린 11편도 비판과 대안 제시가 위주이기는 하지만 청나라 당시의 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권4와 구분되는 점이다.
내편 5권에 이은 외편 3권은 주로 지방지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 실행 방안을 수록하고 있다. 권6에 실린 19편 가운데 처음 세 편은 지방지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실린 16편은 장학성이 일찍이 『화주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지은 글들이다. 권7에 실린 21편은 각각 『영청현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15편과 『박주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6에 실린 『화주지』에 대한 여러 글에 비해 간결해지고 그만큼 주장이 확고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권8에 실린 16편은 논쟁적인 글들이다. 처음 4편은 서신 형식을 취하여 지방지 편집의 일반 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천문현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3편이 이어진다. 그리고 논쟁적인 글들이 이어지는데 그중 백미는「기여대동원논수지」이다. 마치 현장 상황을 중계하는 듯한 이 글은 경학 위주의 고증학에 대한 장학성 사학의 독립선언서이다. 뒤쪽의 '서후'라는 제목을 가진 6편의 비평은 이전의 지방지 비평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지방지 편집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몇 마디 말로 장학성의 학술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문사통의』 원문을 읽는다면 장학성이라는 사람과 그의 학술, 이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학성은 청나라 중기, 고증학적 경학의 극성기에 살면서 경학의 본질을 고민한 사람이다. 수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장학성은 '경학이 사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고증학적 경학의 한 획을 그었다. 장학성 이후, 경학은 사학의 후광을 얻었고 새로운 힘을 얻은 청나라 학술은 새로운 시대로 나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장학성은 고증학적 경학의 진정한 종결자이다.
고증학적 경학의 한 획을 그었다"
이 책은 『문사통의』를 교정하고 주석을 단 『문사통의교주』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장학성과 『문사통의』는 19세기 끄트머리 정치운동의 격화와 함께 '뿌리 찾기'가 진행되면서 주목받았다. 장학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신문화운동을 거치면서 고유문화의 가치를 재검토하자는 국고정리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호적, 고힐강, 황간 등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에 주목했다. 특히 나카 미치요가 재발견한 최술과 나이토 토라지로가 재발견한 장학성이 주목받았다.
『문사통의교주』는 교육자이자 학자인 섭영(葉瑛, 1896~1950)이 『문사통의』를 교정하고 주석하여 1948년에 완성한 책이다. 섭영은 『문사통의교주』를 완성한 뒤, 복건성 민후현 출신의 섭장청이 1935년 출판한 『문사통의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섭장청의 주석 가운데 잘된 것을 추가했고 『문사통의교주』는 대량본을 저본으로 삼아 아홉 가지 판본으로 교정되었다.
『문사통의교주』는 장학성의 또 다른 저작 『교수통의』 3권의 교주도 싣고 있다. 『교수통의』는 『문사통의』의 자매편이자 문학과 사학의 새로운 구성을 문헌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학성은 문헌학자들이 금과옥조로 받들던 세 사람인, 명나라 때의 초횡, 송나라 때의 정초, 문헌학의 시조인 반고를 차례로 비판한다. 그리고 출처 문제 때문에 기피하던 유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문사통의교주』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집할 수 있었던 『문사통의』의 가능한 한 많은 판본을 비교하여 의미가 통하도록 만든 판본이다. 섭영은 교정 작업에서 판본 대조를 통해 저본인 대량본의 잘못된 글자를 바로 잡고 보다 이해하기 좋은 글자를 확정했다. 둘째, 섭영은 장학성이 인용한 경전과 역사서의 원문을 찾고 필요한 단락을 추려서 잘라 붙이고 의미를 풀기 위해 섭영 자신의 의견을 붙인 주석을 만들었다. 오늘날처럼 사전과 자료의 습득이 쉽지 않은 때, 전쟁을 겪으면서 이처럼 많은 자료를 찾아내서 주를 단 섭영의 노력은 놀라운 일이다.
『문사통의교주』에 실린 『문사통의』는 대량본을 저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내편 5권과 외편 3권의 체제로 되어 있다. 권1에 실린 11편은 모두 유가 경전에 관한 글들이며 이는 장학성이 자신의 시대가 경학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 편집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장학성은 권1에서 사학을 궁극적인 귀결점으로 한다는 점을 경학의 해석을 통해 밝히고 있다. 권1이 장학성이 동시대에 바친 글이라면 권2에 실린 12편은 유교가 국가 종교인 시대, 특히 철학적 성격이 강한 송학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기 이론을 강화하고 있는 글이다. 권3에 실린 15편은 자신의 이론을 밝히는 연작 논문들이며 주로 사학과 문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권4에 실린 12편은 주로 역대의 잘못된 경향들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에 관한 글들이다. 권5에 실린 11편도 비판과 대안 제시가 위주이기는 하지만 청나라 당시의 유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권4와 구분되는 점이다.
내편 5권에 이은 외편 3권은 주로 지방지에 관한 이론과 구체적 실행 방안을 수록하고 있다. 권6에 실린 19편 가운데 처음 세 편은 지방지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실린 16편은 장학성이 일찍이 『화주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지은 글들이다. 권7에 실린 21편은 각각 『영청현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15편과 『박주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6에 실린 『화주지』에 대한 여러 글에 비해 간결해지고 그만큼 주장이 확고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권8에 실린 16편은 논쟁적인 글들이다. 처음 4편은 서신 형식을 취하여 지방지 편집의 일반 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천문현지』를 편집하면서 지은 3편이 이어진다. 그리고 논쟁적인 글들이 이어지는데 그중 백미는「기여대동원논수지」이다. 마치 현장 상황을 중계하는 듯한 이 글은 경학 위주의 고증학에 대한 장학성 사학의 독립선언서이다. 뒤쪽의 '서후'라는 제목을 가진 6편의 비평은 이전의 지방지 비평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지방지 편집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몇 마디 말로 장학성의 학술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문사통의』 원문을 읽는다면 장학성이라는 사람과 그의 학술, 이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학성은 청나라 중기, 고증학적 경학의 극성기에 살면서 경학의 본질을 고민한 사람이다. 수많은 고민과 연구 끝에 장학성은 '경학이 사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고증학적 경학의 한 획을 그었다. 장학성 이후, 경학은 사학의 후광을 얻었고 새로운 힘을 얻은 청나라 학술은 새로운 시대로 나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장학성은 고증학적 경학의 진정한 종결자이다.
목차
목차
교수통의(校?通義) 권1
서(敍)
첫 번째 원도(原道)
두 번째 종류(宗劉)
세 번째 호저(互著)
네 번째 별재(別裁)
다섯 번째 변혐명(辨嫌名)
여섯 번째 보정(補鄭)
일곱 번째 교수조리(校讐條理)
여덟 번째 저록잔일(著錄殘逸)
아홉 번째 장서(藏書)
교수통의(校?通義) 권2
열 번째 보교한예문지(補校漢藝文志)
열한 번째 정초오교한지(鄭樵誤校漢志)
열두 번째 초횡오교한지(焦?誤校漢志)
교수통의(校?通義) 권3
열세 번째 한지육예(漢志六藝)
열네 번째 한지제자(漢志諸子)
열다섯 번째 한지시부(漢志詩賦)
열여섯 번째 한지병서(漢志兵書)
열일곱 번째 한지술수(漢志術數)
열여덟 번째 한지방기(漢志方技)
서(敍)
첫 번째 원도(原道)
두 번째 종류(宗劉)
세 번째 호저(互著)
네 번째 별재(別裁)
다섯 번째 변혐명(辨嫌名)
여섯 번째 보정(補鄭)
일곱 번째 교수조리(校讐條理)
여덟 번째 저록잔일(著錄殘逸)
아홉 번째 장서(藏書)
교수통의(校?通義) 권2
열 번째 보교한예문지(補校漢藝文志)
열한 번째 정초오교한지(鄭樵誤校漢志)
열두 번째 초횡오교한지(焦?誤校漢志)
교수통의(校?通義) 권3
열세 번째 한지육예(漢志六藝)
열네 번째 한지제자(漢志諸子)
열다섯 번째 한지시부(漢志詩賦)
열여섯 번째 한지병서(漢志兵書)
열일곱 번째 한지술수(漢志術數)
열여덟 번째 한지방기(漢志方技)
저자
저자
장학성
저자 장학성(章學誠, 1738~1801)
중국 청나라 때 학자이며 원래 이름이 문효(文斅), 자가 실재(實齋), 호가 소암(少岩)이다. 절강성 회계(오늘날 소흥)에서 살림이 넉넉지 않은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병치레가 잦아 공부가 지지부진했던 그는 열다섯 살부터 역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스물다섯 살부터 주균을 스승으로 모시고 고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에 안휘 학정으로 부임한 주균을 따라 갔으며 본격적으로 『문사통의』를 쓰기 시작했다. 병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았으니 평생의 공력이 『문사통의』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1773년 서른여섯 살 되던 해 화주의 행정 책임자 유장성을 위해 『화주지』를 편집했다. 『화주지』를 편집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지방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1777년 마흔한 살에 진사에 급제해 국자감 전적 벼슬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막빈 생활을 하면서 전국의 서원에서 강의도 하고 지방지도 편찬해 주며 생계를 이었다. 1794년 쉰일곱 살의 그는 고향 회계에 정착하고 평생 쓴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1800년 예순세 살에 노환이 심해진 그는 실명 상태에 빠졌지만 사람을 불러 구술하면서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해에 그는 학문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절동학술」을 썼고 이듬해 1801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역자 임형석(林亨錫, Lim Hengseok)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1992년 부산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1997년 중국 북경의 청화대학 사상문화연구소에서 사상사 석사 학위를, 2001년 북경대학 철학계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부산과 인근의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 및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부산 경성대학교 중국대학 중어중문학과 초빙외래교수이다.
중국 청나라 때 학자이며 원래 이름이 문효(文斅), 자가 실재(實齋), 호가 소암(少岩)이다. 절강성 회계(오늘날 소흥)에서 살림이 넉넉지 않은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병치레가 잦아 공부가 지지부진했던 그는 열다섯 살부터 역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스물다섯 살부터 주균을 스승으로 모시고 고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에 안휘 학정으로 부임한 주균을 따라 갔으며 본격적으로 『문사통의』를 쓰기 시작했다. 병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았으니 평생의 공력이 『문사통의』에 고스란히 모여 있다. 1773년 서른여섯 살 되던 해 화주의 행정 책임자 유장성을 위해 『화주지』를 편집했다. 『화주지』를 편집하면서 당시 지식인들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지방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1777년 마흔한 살에 진사에 급제해 국자감 전적 벼슬을 받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막빈 생활을 하면서 전국의 서원에서 강의도 하고 지방지도 편찬해 주며 생계를 이었다. 1794년 쉰일곱 살의 그는 고향 회계에 정착하고 평생 쓴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1800년 예순세 살에 노환이 심해진 그는 실명 상태에 빠졌지만 사람을 불러 구술하면서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 해에 그는 학문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절동학술」을 썼고 이듬해 1801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역자 임형석(林亨錫, Lim Hengseok)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1992년 부산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1997년 중국 북경의 청화대학 사상문화연구소에서 사상사 석사 학위를, 2001년 북경대학 철학계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부산과 인근의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 및 연구원으로 일했고, 현재 부산 경성대학교 중국대학 중어중문학과 초빙외래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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