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위빠사나(시와사람 서정시선 95)
박지선 시집
Regular price
$11.24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박지선의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에 수록된 예순 아홉 시편은 그녀가 지나온 길의 흔적을 낱낱이 보여준다. 길이란 선점하거나 선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주어진 삶의 노정을 묵묵히 밟아 여기까지 왔다. 낯선 풍경을 바라볼 때면 낯익은 풍경을 겹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직이 나직이 노래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흐르는 동안 저절로 깨끗해지”는 물의 이력을 살아온 그녀는 ‘자정自淨’ 작용의 순리를 안다. 은색 파이프 같은 두 다리를 번갈아 내디디며 앙금이 섞인 물을 거르고 또 걸러낸다.
시인 박지선은 시를 통해 삶과 진실과 생명에 대해 말한다. 끝끝내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침표’의 궤적에 대해 말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진실은 외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낯설게 들리는 것은 박지선의 시어가 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서다.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기까지 시인의 입술은 얼마나 발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이 시의 편수인 예순 아홉은 ‘일흔’이라는 수에서 한 숟가락 덜어낸 만큼의 숫자다. 완전하지 않기에 시가 되어지는 숫자다. - 〈작품론〉 중에서
시인 박지선은 시를 통해 삶과 진실과 생명에 대해 말한다. 끝끝내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침표’의 궤적에 대해 말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진실은 외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낯설게 들리는 것은 박지선의 시어가 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서다.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기까지 시인의 입술은 얼마나 발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이 시의 편수인 예순 아홉은 ‘일흔’이라는 수에서 한 숟가락 덜어낸 만큼의 숫자다. 완전하지 않기에 시가 되어지는 숫자다. - 〈작품론〉 중에서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고래의 붉은 젖을 빠는 세이렌의 노래
최 세 라
(시인)
박지선의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에 수록된 예순 아홉 시편은 그녀가 지나온 길의 흔적을 낱낱이 보여준다. 길이란 선점하거나 선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주어진 삶의 노정을 묵묵히 밟아 여기까지 왔다. 낯선 풍경을 바라볼 때면 낯익은 풍경을 겹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직이 나직이 노래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흐르는 동안 저절로 깨끗해지"는 물의 이력을 살아온 그녀는 '자정自淨' 작용의 순리를 안다. 은색 파이프 같은 두 다리를 번갈아 내디디며 앙금이 섞인 물을 거르고 또 걸러낸다.
그러나 그녀의 길이 묵묵함으로만 일관하는 여정은 아니다. 단 하나라고 믿었던 길이 수많은 갈림길로 무화되는 곳에 이르면 와락, '붉음'을 발화한다. 붉음은 색色이 공空을 만나는 눈꺼풀 안쪽의 빛깔이고, 몸속의 갈림길을 끝없이 도는 피톨의 빛이며, 오장육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웅얼거림을 선별해 언어로 빚어내는 혀의 색이다. 박지선은 언어의 속성이 붉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핏기 없는 언어는 시어가 되지 못하고 사멸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물,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무채색의 고래, 창백하게 이어지는 끝없는 길을 몸으로 겪으며 살지만, 그녀가 발화하는 언어는 핏기를 띤다. 여기, 물 위에 "당신이 피워놓은" 꽃잎이 떠 있다. 시인이 발화하는 붉음은 매혹적이다. 다시, 매혹적인 것은 스스로 정화되어지는 붉음이다.
꽃, 이라고 부르면 꽃의 시선으로
박지선은 시인이 언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녀의 시편을 따라가다 보면 지휘봉을 들고 언어를 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 극진한 마음과 사랑으로 언어와 동행해 왔음을, 그러한 현장을 발견할 뿐이다. 시인의 그런 태도에 힘입은 언어는 생기를 얻어 저절로 흐르고 제 경계를 넓혀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 붉은 꽃들의 세계다. 꽃이 피는, 꽃이 지는. 충만하고 결핍되었고 울었고 웃어야 하는.
쫑포*부두에서부터
차는 밀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길을 나선 싸락눈처럼
고향
이 잃은 여자는 아니다
배고픈 손에 말아 쥔,
지전 한 닢의 무게에 떨던 여자
꽃이어서 다행이다
꺾일 수 있는 꽃은 한 조각의 빵
회색 벽에 걸린 편견의 틀에서 빠져 나온 여자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관통하는 아침 햇살
바다를 건너가는 일몰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넘어가고 있다.
- 「산다화」 전문
'산다화'가 애기동백이라는 설명은 이 시를 읽는 데 중요하지 않다. 그저 '붉음'이 좋을 뿐이다. '붉음'이 느껴질 뿐이다. 엉거주춤 합장한 것 같은 꽃잎의 생김새가 떠올라 눈 가장자리에 일몰의 색을 띤다면 그뿐이다. 여기 '여자'가 있다. 아마도 사창가에서 "지전 한 닢의 무게에 떨"었을 '여자'는 겨울의 빈한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봄이 와도 여름과 가을이 와도 '여자'의 계절은 그대로다. 마침 눈이 내린다. '싸락눈'은 눈의 결정들이 풍성하게 엉겨 붙은 함박눈과 달리 환영받지 못한다. 내리는 품도 보잘 것 없고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세 바스라진다.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 용도도 못되고 마음을 새하얗게 만들어 주는 심미적 유용성도 갖지 못한다. '무작정' 내린다. 무목적적으로 그것은 내린다. '여자'가 '싸락눈'을 맞으며 서 있는 장소는 차가 밀리는 살풍경한 도로다. 자동차 안의 사람들은 열선이 설치된 의자에 앉아 히터 바람을 쐬며 차창 밖 '여자'를 본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커피가 있을 것이다. 송풍기에 설치된 방향제가 인간의 육신에서 풍기기 마련인 체취를 감미로운 향기로 바꾸고 있을 것이다. 길이 막혀서 차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볼 만한 풍경은 '싸락눈'에 가려져 있다. 썬팅된 차량 안의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밖을 본다. 창밖의 '여자'는 그들에게 오래오래 노출된다. '다행'한 것은 '여자'가 '꽃'이라는 점이다.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이 시의 화자다. 꽃의 시선으로 보는 화자가 있어서 '여자'는 '산다화'가 된다. 싸락눈을 머리에 이고도 얼거나 시들지 않는 꽃이 된다. 화자는 '편견' 없이 분별심 없이 '여자'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꽃의 시선이다. '사량思量'은 '생각하여 헤아린'다는 일차적 뜻이 있지만 오염된 마음으로 타인을 잰다는 이차적 뜻으로도 쓰인다. 사량하는 마음은 "회색 벽에 걸린 편견의 틀"만큼 딱딱하고 거칠고 고집이 세다. 꽃을 뭉개버릴 수 있을 만큼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꽃의 관점으로 꽃의 시선으로 사람을 본다면 일체의 '회색 벽'은 그리고 '편견의 틀'은 무력해지고 만다. '아침 햇살'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은 우주적 인드라망의 장엄함을 내비친다. 관계망 속의 존재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끌어안는 모습. 그러한 자리에 '여자'는 서 있다. 한 송이 산다화로, 붉은 심장을 가진 인격으로.
당신과 나의 조상은 한 덩어리 흙
당신의 작은 방,
약속된 향기의 질량이 말라가요
밖은
오월의 눈부신 햇살
아침마다 내가 뿌리는 레드향이 지천으로 피었어요.
가위를 든 당신이 가여워요
난 아직 살아 있거든요
금속성 가위가
당신을 겨냥하게 될지도 몰라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
당신이 자르지 못한 향기가 환하지 않나요
- 「꽃꽂이」 전문
사람의 몸이 '흙'에서 나왔다는 진술로부터 이 시는 시작된다. 흙은 일반적으로 모성과 풍요를 상징하지만 사실 그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다. 어떤 흙은 지난 늦가을의 낙엽을 품은 채 자신이 피워낼 충만한 생명들에 미리 감동한다. 어떤 흙은 두더지의 시체를 조금씩 자신의 품으로 되돌리며 애도하는 중이고 또 어떤 흙은 돌탑을 쌓기에 맞춤한 자갈들을 잔뜩 품고 있다. 흙은 '품'는다. 그렇지만 매번 뭔가 다른 것들과 섞여 있다. 그것이 흙의 본질이다. 화산 분화구에서 떠온 흙과 고구마 밭에서 가져온 흙은 다르다. '다름'은 경계가 되고 퍼렇게 벼려진 날이 되고 모서리가 되고 '극極'이 된다. 반대편 자리에서 '당신'은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것이다. 온몸이 광물인 것처럼, "아침마다 내가 뿌리는 레드향"을 무화시키겠다는 것처럼. 불화는 관계에서 비롯될 때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흙 안에서 단단히 뭉쳐진 금속성 원소가 적의로 드러난 결과일 때도 있다. '당신'의 적의를 누그러뜨리려는 '나'의 태도는 진지하고 반복적이다. 고체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속을 기체에 불과한 '향기'로 무력화하려 한다. '나'가 우려하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공격받을 수도 있을 자신의 몸이 아니다. "금속성 가위"의 방향을 근심하는 것이다. 오행의 '상생상극설相生相剋設'에 의하면 흙은 금속을 생한다土生金. 이에 금속은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것을 얻은 자는 빈손인 자를 압도하고 모든 부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맹렬한 화나 상념에 사로잡혀 안목을 잃은 사람이 휘두른다면 스스로가 멸할 따름이다. '나'에게는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금金도 금金을 녹일 화火도 없다. 다만 명료한 정신은 "금속성 가위가/ 당신을 겨냥하게 될지도 몰"라 안타까워한다. '나'는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레드향'의 생명력으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곡진하고 마음을 다해 행하는 발화發話이며 발화發花다. 내게 대적하는 '당신'을 향한 '나'의 언어는 온화하고 귤향이 풍겨난다. 화극금火剋金이 아닌 향극금香剋金의 장면, 나아가 향생금香生金의 장면을 본다는 것은 박지선 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드물고 귀중한 경험이다.
박지선의 시편에는 색의 삼원색 중 가장 밝은 색인 '노랑' 꽃들도 등장한다. 노랑은 빛의 삼원광三元光 중 빨강과 초록이 겹칠 때 태어난다. 주지하다시피 빨강과 초록은 색상환에서 반대편에 놓이는 색깔이다. 극과 극이 섞일 때 태어나는 색이라니! 노랑의 비밀은 또 있다. 섞을수록 밝아지는 빛과는 달리 물감, 크레파스 등의 색은 섞을수록 어두워지는데 노랑은 예외다. 노랑은 상대 색을 밝고 화사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노랑은 색 보다는 빛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개나리와 병아리와 유치원의 색깔이 노랑인 것은 휘발되기 쉬운 유년기의 빛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선천적으로 미스터리한 색상인 노랑은 박지선 시 중 「복수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여자
홀연히
귀띔도 없이
끓는 성질로 와서 흉터를 헤집었다
나는 간이역 의자에 앉아
기차를 타고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발걸음 앞에 노란꽃잎이 피어올랐다
- 「복수초」 전문
눈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 '복수초'는 오해 받는 식물이다. 이름이 '앙갚음'을 의미하는 '복수復讐'를 연상하게 해서인데, 사실 이 꽃의 한자어는 '복수福壽'이다. 사전적 의미는 '복이 많고 오래 삶'이지만, '복福'의 뜻을 동사로 풀면 '오래도록 잘 살아가기를 축복함'이다. 본문 속의 정황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이 나온다. '그 여자'는 거침없다.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등장하고, 크나큰 상처를 주고, 떠나 버린다. '그 여자'가 하는 행동의 바탕엔 "끓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복수심復讐心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기심이나 적개심일 수도 있다. 그 '성질'의 근본은 지옥처럼 잔혹하다. 자신의 성질에 지배당한 그녀는 '나'라는 사람을 보고 있지 않다. 나의 '흉터'를 보고 있다. 흉터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고 인격도 없다. 다만 "헤집"을 대상일 뿐이다. 그녀에 비해 '나'의 행동반경은 작다. '나'와 연관된 동사는 '앉다'와 '바라보다'와 '돌아오다'이다. '나'는 발길을 멈추기 위해 앉는다. 무엇을 기어코 보겠다는 마음 없이 그저 눈에 맺힌 상을 감각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가 '그 여자'를 만났던 것은 무슨 뜻이나 계획,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교통사고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여자'가 떠나가는 자리에 멈춘다. 그리고 '본'다. '나'의 '바라봄'에는 미움이나 비판, 격정, 울분 같은 것이 없다. 이 순간 무아無我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심과 집착이 '그 여자'와 함께 떠나간다. '나'는 그녀가 탄 기차에 '나我'를 함께 태워 보냈기에 무아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 복수초가 핀다. "노란꽃잎"은 나에게 복수復讐하듯 다가온 '그 여자'가 오래도록 잘 살아가기를 축복한다. 이러한 '나'의 마음은 지상에 살되 천상에 적籍을 둔다.
시가 될 때까지 발화하는 세이렌의 언어
근원을 찾는 일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힘겨운 본능이다.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서 시작됐다는 설을 따를 때 사람의 상체를 가진 인어가 뱃길에서 노래한다는 이야기는 상상의 소산만은 아니다. 거친 바다에서 노래하며 뱃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전설은 전세계에 걸쳐 구전되는 설화이다. 박지선의 시에서도 바다와 근원과 사람에 대한 감각적 사유가 발견된다.
고래에게 가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고 고향바다를 빨고 싶다
고래는 엄마의 삶 엄마의 일생 엄마의 죽음
어느덧 내 젖꼭지가 붉어져있다
- 「붉은 부끄러움」 전문
'부끄러움'은 왜 붉은가. '젖꼭지'가 붉기 때문이고 젖을 먹는 생명의 행위가 붉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고래는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해 영영 그곳에서 살기로 한 거대 생물이다. 그것의 이동 방향은 다른 동물과 반대다. 바다에서 탄생한 생명들이 죽을힘을 다해 육지로 나아간 것과 달리 고래는 바다에 몸을 묻고 물의 질서에 따라 살아 왔다. '나'는 고래처럼 꼬리지느러미를 위아래로 저으며 깊은 물속, 고향으로 향한다. 삶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지만 동시에 죽음 같은 자맥질이다. '고래'는 "엄마의 삶" "엄마의 일생" "엄마의 죽음"이다. 파도에 휩싸여 있기에 한눈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바다 생물은 세이렌처럼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나'에게 자장가 같은 것이다. 삶에의 끝없는 도전, 심해에 잠겨 살아간 일생, 그리고 심해로 가라앉았을 죽음까지 모두가 '엄마'의 노래 같은 것이다. 대양에 속한 휘파람 같은 것이다. 위험하고 매혹적이고 무엇보다 삶의 의지로 충만했을 '엄마'의 삶은 '나'가 무시로 지향하는 근원의 세계다. '나'는 "고래의 젖을 물"고 "고향바다를 빨"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면 비릿하고 따스한 바닷물을 삼킬 수 있다는 상상에 이른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젖꼭지가 붉"어진다. 다른 생명에게 젖을 물려 살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다. 그렇게 '나'는 시가 될 때까지 노래함으로써 세이렌의 자장가를 부를 줄 알게 된다. 뭇생명을 먹여 살릴 어미가 된다.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탐구는 정신적 반향으로 이어진다. '나'를 넘어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대양에 속한 고래와는 다르게 인간의 풍속은 "무엇인가 되기를 원하"는 일에 기울어 있다.
나의 이름은 꽃이죠
인간은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죠
만들고 허물고 지우고 덧칠하고
모호한 관계를 필사하죠
우리는 뻐끔거리며 간을 보고
입술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손뼉을 치며 한 곳으로 기울어져 색맹이 되죠.
누가 누구를 닮아 가는지도 모를 때
페리소나를 중얼거리며
엘로우피쉬를 복제 하죠
어항에 새겨지는 꽃물결
흙 속으로 날아간 금붕어의 날개
화분과 어항은 필수일까요
어항은
가라앉지 않는 깊이 꼭 그만큼의 안부를 묻죠
- 「옐로우피쉬」 부분
시인이 바라보는 어항은 안부의 창窓이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 보고 싶다는 전언. 그러한 진심이 투명하게 통하는, 유리로 만들어진 물체. 물론 어항에는 바닥이 있다. 그래서 "가라앉지 않는 깊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중을 부유하는 생명들은 바닥에 닿는 순간의 아픔을 잘 안다. 유리 어항이라 해도 바닥만큼은 매끄럽지 않다. 돌과 모래가 있고 플라스틱 물풀이 흐느적거리며 서 있고 물곰팡이가 끼어 있고 도무지 친연해지지 않는 버석거림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뻐끔거리며 간을 보고/ 입술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손뼉을 치며 한 곳으로 기울어져 색맹이 되"어 간다. 자신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불안감과 열패감이 '우리'를 지배한다. 진심 없는 곳에서의 친교는 "페르소나를 중얼거리"게 하고 "옐로우피쉬를 복제 하"게 한다. 어항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면의 바닥도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만나는 일은 슬프고 덧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만들고 허물고 지우고 덧칠하고/ 모호한 관계를 필사하"는 일의 연속이다. '나'는 '색맹'이 되어가고 있기에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색상을 알아볼 수 없으며 타인에게 이해받는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그렇게 붉음과 푸름은 겹쳐지지 않고, 가장 밝고 따뜻한 색깔인 노랑은 태어날 수 없다.
노랑이 만들어지지 않는 세계를 대면하는 일에 대해
빛과 빛은 색맹의 스펙트럼 안에서 왜곡된다. 노랑은 태어나지 못하고 온 세상이 어둠에 드는 시간이 이어진다. 어둠은 나날의 사이사이에 검은 막을 드리운다. 그 막이 걷히면 연극 같은 하루가 열린다. 이곳에선 스치는 사람마다 본심을 숨긴다.
경극 같은 막이 오르는 하루
자꾸만 스쳐가는 얼굴엔 얼굴이 없죠
이목구비의 뒤통수를 생각하다
미뤄두었던 대답을 살며시 꺼내들어요
… 중략 …
무대의 막은 언제나 왜 검정색이죠? 라는 질문은 늘 구겨져요
쉿, 여기까지만!
쓸만한 것들에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죠
듣고 싶은 말만 채집 하는 귀를 달았죠
아침을 배웅하기로 하였는데 저녁이었죠
- 「가면극」 부분
"자꾸만 스쳐가는 얼굴엔 얼굴이 없"다는 발견은 이 시의 맨 마지막 행인 "아침을 배웅하기로 하였는데 저녁이었죠"에 닿는다. 이 발견은 또한 "구겨진 질문"에 대한 힌트가 된다. "무대의 막은 언제나 왜 검정색"인가. 그것은 이 우주의 질서가 빛보다는 어둠에 의해 유지되고, 사람의 얼굴엔 진실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시의 질서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에 기반하지 않는다. 경극의 가면처럼 꾸며진 얼굴이 의도된 대사를 뱉으며 불쑥불쑥 출몰한다. 멋진 가면을 쓰고 과장된 몸짓을 할 줄 알아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아침'을 보려 한다. '아침'이 점심으로 넘어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한때를 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아침이 사라진 자리에 저녁이 남는 뜻밖의 현실에 부딪힌다. 저녁의 어스름 속에서는 빛의 찬란한 분광을 경험할 수 없다. 색이 태어나지도 않고 세상 만물이 가진 본연의 형태를 파악할 수도 없다. 시인은 탄식한다. "쓸만한 것들에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죠/ 듣고 싶은 말만 채집 하는 귀를 달았죠". 존재와 존재 사이엔 연극의 막처럼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다. 그 막은 검다. 왜 검으냐는 질문은 금지된다. '귀'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눈 역시 보고 싶은 것만 '채집'하기를 원할 것이다. 거짓된 얼굴, 왜곡된 상, 진실 없는 소리들이 도시의 풍경을 뒤덮는다. 이 같은 풍경은 다음의 작품 속에서도 목격된다.
회전의자에 앉아서들으나 서서들으나
어차피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인데
서로 사랑하라는 구절은
잊으면 안 되는 계명 같은 것이어서
구관조가 넘기는 몇 장 몇 절
누가 누굴 사랑하는지 도무지 알 수없는
쥐불놀이 깡통 속 온기 사라진 불티는
허공에 그리는 동그라미 쳇바퀴 돌아 나왔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랑이 어떤 색깔 입니까?
사랑은 어떤 맛이지요?
가라사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아멘
난 아멘은 몰라도
거미가 똥구멍에서 뽑아 지은 성근 집에
내 아버지가 산다는 것은 안다
허공에 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죄는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공중에 비는
상표도 없는 표백제의 골목에서
보증서도 없는 전매특허가 난장판을 이루었는데
오늘도 창궐하는 아비 없는 난전에
키 재기 놀음을 하는 우리들은
시장 좌판 위에 끌려온 생선의 죽은 눈 속에
아직 푸르른 눈의 내세를 바라보아야 한다.
- 「난장판」 전문
시인은 "아비 없는 난전"인 이 세상을 바라본다. 아비는 '허공'에 있다. '우리들'은 "키 재기 놀음"에 빠져 있다. 자신의 진짜 얼굴은 보여주지 않은 채 허황된 놀음에 골몰한다. 이곳에선 진면목을 드러내는 자가 패자다. '우리들'은 "죄는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공중에 비"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한 일은 시인이 보기에 인스턴트식이다. 죄로 얼룩진 옷을 삶고 두들기고 얼룩이 사라질 때까지 비벼대기는커녕 '표백제'만 붓고서 자신이 지은 죄를 방관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죄」라는 시에서 "죄는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음을 간파한 바 있다. 죄는 표백제로 없앨 수 있는 얼룩이 아니다. 죄는 자신을 지은 자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끝끝내 어둠으로 끌어내린다. 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시인의 눈에 이 세상은 난장판이다. 자신의 물건만 최고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곳, '상표'나 '보증서'도 없이 돈을 벌려는 눈먼 욕심의 현장. 그렇다면 난장판의 세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다음의 시에서 시인은 '위빠사나'의 지혜를 보여준다.
무임승차로 떠나보는 하늘이 펼쳐졌다 네 개의 기둥에 묶인 나를 실은 기차는 후진 없는 레일을 따라 갔다
붉게 녹슨 레일의 끝이 잠시 쉬었다 가는 간이역이었음 좋겠다
레일 밖의 예수나 부처나 마호메트가 폭설을 맞으며 설원에 남긴 발자국
그 속에 담겨진 환희는 스스로가 설산이길 믿기 때문이었으리라
허공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다시 태어나는 마침표 하나 내 자신이 가리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렇게 어두워진다.
- 「어느 날의 위빠사나」 전문
우주의 주인을 만나 값을 치르고 시작한 게 아니므로 삶은 '무임승차'이다. '나'는 '묶'여 있기에 움직임이 없다. 그저 눈과 귀를 열고서 세계를 진실된 모습 그대로 지각할 뿐이다. 운명의 '레일'은 '후진'이 없다. '나'는 제자리에 붙박인 승객이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는 내 인생의 레일 '밖'의 존재일 뿐 '나'를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알아볼 혜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설산"이라기보다는 "설산이길 믿"기에 최고의 봉우리들이 되었다. 설원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어두워진'다. 삶이란 '마침표'의 회귀여서 시작 없이 종결되는 미지의 어떤 것과 같다. 이 '무임승차' 여행의 주인은 예수도 부처도 마호메트도 아니다. '나'만이 '마침표'의 방향을 정해줄 수 있다. '마침표'는 화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두워지'는 '나'는 끝까지 마침표 하나를 붙들고 그것의 궤적을 좇는다.
소쇄원에 가시거든
푸른 소나무에 걸린 달만 보지마세요
개울물에 비치는 머리 깨진 달이 있고요
죽창에 찔려 피 흘리는 달도 있어요
시궁창에 흘러든 달도 있고요
우물에 숨어 출산하는 슬픈 달도 있어요
주인처럼 높은 정각에 올라앉은 달도 있고요
서까래 그늘에 가려진 반쪽 달도 있어요.
이즈러진 천개 만개의 달의 무늬도 있어요
소쇄원에 가시거든
눈을 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세요.
발밑에 깨어지는 달의 울음이 고여 있어요.
- 「소쇄원의 달」 전문
소쇄원에 뜬 달은 '나'가 화두로 붙들고 궁구하는 노란색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이 시는 '만약 ~ 한다면'의 가정법으로 시작된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별서 정원으로 전라남도 담양에 있다. 시인은 소쇄원에 가도 소쇄원이 아름다움만 관광하고 오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곳에 보이는 달은 둥글고 꽉 찬 만월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달은 깨어지거나 피 흘리거나 시궁창에 있거나 슬프거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절반을 잃어버리거나 무늬로 흩어지는 천태만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어딘가 부족하고 불행한 모습처럼 달의 세계도 그러하다. 시인은 '달'이라는 내 안의 가공된 이미지로써 지금 '소쇄원'에 뜬 진짜 달을 왜곡해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복수초」에서 내 상처를 헤집고 간 '그 여자'를 보는 '나'처럼 잠시 멈춰야 한다. 움직일 때 움직이더라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난장판이 된 세상의 시계에 속도를 맞추지 말고 우주의 호흡을 따라가야 한다.
시인 박지선은 예순 아홉 편의 시를 통해 삶과 진실과 생명에 대해 말한다. 끝끝내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침표'의 궤적에 대해 말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진실은 외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낯설게 들리는 것은 박지선의 시어가 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서다.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기까지 시인의 입술은 얼마나 발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이 시의 편수인 예순 아홉은 '일흔'이라는 수에서 한 숟가락 덜어낸 만큼의 숫자다. 완전하지 않기에 시가 되어지는 숫자다.
최 세 라
(시인)
박지선의 시집 『어느 날의 위빠사나』에 수록된 예순 아홉 시편은 그녀가 지나온 길의 흔적을 낱낱이 보여준다. 길이란 선점하거나 선정할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주어진 삶의 노정을 묵묵히 밟아 여기까지 왔다. 낯선 풍경을 바라볼 때면 낯익은 풍경을 겹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나직이 나직이 노래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인의 말'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흐르는 동안 저절로 깨끗해지"는 물의 이력을 살아온 그녀는 '자정自淨' 작용의 순리를 안다. 은색 파이프 같은 두 다리를 번갈아 내디디며 앙금이 섞인 물을 거르고 또 걸러낸다.
그러나 그녀의 길이 묵묵함으로만 일관하는 여정은 아니다. 단 하나라고 믿었던 길이 수많은 갈림길로 무화되는 곳에 이르면 와락, '붉음'을 발화한다. 붉음은 색色이 공空을 만나는 눈꺼풀 안쪽의 빛깔이고, 몸속의 갈림길을 끝없이 도는 피톨의 빛이며, 오장육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웅얼거림을 선별해 언어로 빚어내는 혀의 색이다. 박지선은 언어의 속성이 붉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핏기 없는 언어는 시어가 되지 못하고 사멸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검은 물,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무채색의 고래, 창백하게 이어지는 끝없는 길을 몸으로 겪으며 살지만, 그녀가 발화하는 언어는 핏기를 띤다. 여기, 물 위에 "당신이 피워놓은" 꽃잎이 떠 있다. 시인이 발화하는 붉음은 매혹적이다. 다시, 매혹적인 것은 스스로 정화되어지는 붉음이다.
꽃, 이라고 부르면 꽃의 시선으로
박지선은 시인이 언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녀의 시편을 따라가다 보면 지휘봉을 들고 언어를 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연인을 대하듯 극진한 마음과 사랑으로 언어와 동행해 왔음을, 그러한 현장을 발견할 뿐이다. 시인의 그런 태도에 힘입은 언어는 생기를 얻어 저절로 흐르고 제 경계를 넓혀 시적 세계를 형성한다. 붉은 꽃들의 세계다. 꽃이 피는, 꽃이 지는. 충만하고 결핍되었고 울었고 웃어야 하는.
쫑포*부두에서부터
차는 밀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길을 나선 싸락눈처럼
고향
이 잃은 여자는 아니다
배고픈 손에 말아 쥔,
지전 한 닢의 무게에 떨던 여자
꽃이어서 다행이다
꺾일 수 있는 꽃은 한 조각의 빵
회색 벽에 걸린 편견의 틀에서 빠져 나온 여자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을
관통하는 아침 햇살
바다를 건너가는 일몰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넘어가고 있다.
- 「산다화」 전문
'산다화'가 애기동백이라는 설명은 이 시를 읽는 데 중요하지 않다. 그저 '붉음'이 좋을 뿐이다. '붉음'이 느껴질 뿐이다. 엉거주춤 합장한 것 같은 꽃잎의 생김새가 떠올라 눈 가장자리에 일몰의 색을 띤다면 그뿐이다. 여기 '여자'가 있다. 아마도 사창가에서 "지전 한 닢의 무게에 떨"었을 '여자'는 겨울의 빈한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봄이 와도 여름과 가을이 와도 '여자'의 계절은 그대로다. 마침 눈이 내린다. '싸락눈'은 눈의 결정들이 풍성하게 엉겨 붙은 함박눈과 달리 환영받지 못한다. 내리는 품도 보잘 것 없고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세 바스라진다.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 용도도 못되고 마음을 새하얗게 만들어 주는 심미적 유용성도 갖지 못한다. '무작정' 내린다. 무목적적으로 그것은 내린다. '여자'가 '싸락눈'을 맞으며 서 있는 장소는 차가 밀리는 살풍경한 도로다. 자동차 안의 사람들은 열선이 설치된 의자에 앉아 히터 바람을 쐬며 차창 밖 '여자'를 본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커피가 있을 것이다. 송풍기에 설치된 방향제가 인간의 육신에서 풍기기 마련인 체취를 감미로운 향기로 바꾸고 있을 것이다. 길이 막혀서 차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볼 만한 풍경은 '싸락눈'에 가려져 있다. 썬팅된 차량 안의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밖을 본다. 창밖의 '여자'는 그들에게 오래오래 노출된다. '다행'한 것은 '여자'가 '꽃'이라는 점이다.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이 시의 화자다. 꽃의 시선으로 보는 화자가 있어서 '여자'는 '산다화'가 된다. 싸락눈을 머리에 이고도 얼거나 시들지 않는 꽃이 된다. 화자는 '편견' 없이 분별심 없이 '여자'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꽃의 시선이다. '사량思量'은 '생각하여 헤아린'다는 일차적 뜻이 있지만 오염된 마음으로 타인을 잰다는 이차적 뜻으로도 쓰인다. 사량하는 마음은 "회색 벽에 걸린 편견의 틀"만큼 딱딱하고 거칠고 고집이 세다. 꽃을 뭉개버릴 수 있을 만큼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꽃의 관점으로 꽃의 시선으로 사람을 본다면 일체의 '회색 벽'은 그리고 '편견의 틀'은 무력해지고 만다. '아침 햇살'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방울"은 우주적 인드라망의 장엄함을 내비친다. 관계망 속의 존재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끌어안는 모습. 그러한 자리에 '여자'는 서 있다. 한 송이 산다화로, 붉은 심장을 가진 인격으로.
당신과 나의 조상은 한 덩어리 흙
당신의 작은 방,
약속된 향기의 질량이 말라가요
밖은
오월의 눈부신 햇살
아침마다 내가 뿌리는 레드향이 지천으로 피었어요.
가위를 든 당신이 가여워요
난 아직 살아 있거든요
금속성 가위가
당신을 겨냥하게 될지도 몰라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
당신이 자르지 못한 향기가 환하지 않나요
- 「꽃꽂이」 전문
사람의 몸이 '흙'에서 나왔다는 진술로부터 이 시는 시작된다. 흙은 일반적으로 모성과 풍요를 상징하지만 사실 그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다. 어떤 흙은 지난 늦가을의 낙엽을 품은 채 자신이 피워낼 충만한 생명들에 미리 감동한다. 어떤 흙은 두더지의 시체를 조금씩 자신의 품으로 되돌리며 애도하는 중이고 또 어떤 흙은 돌탑을 쌓기에 맞춤한 자갈들을 잔뜩 품고 있다. 흙은 '품'는다. 그렇지만 매번 뭔가 다른 것들과 섞여 있다. 그것이 흙의 본질이다. 화산 분화구에서 떠온 흙과 고구마 밭에서 가져온 흙은 다르다. '다름'은 경계가 되고 퍼렇게 벼려진 날이 되고 모서리가 되고 '극極'이 된다. 반대편 자리에서 '당신'은 눈을 번뜩이고 있을 것이다. 온몸이 광물인 것처럼, "아침마다 내가 뿌리는 레드향"을 무화시키겠다는 것처럼. 불화는 관계에서 비롯될 때도 있지만, 사람이라는 흙 안에서 단단히 뭉쳐진 금속성 원소가 적의로 드러난 결과일 때도 있다. '당신'의 적의를 누그러뜨리려는 '나'의 태도는 진지하고 반복적이다. 고체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속을 기체에 불과한 '향기'로 무력화하려 한다. '나'가 우려하는 것은 '당신'으로부터 공격받을 수도 있을 자신의 몸이 아니다. "금속성 가위"의 방향을 근심하는 것이다. 오행의 '상생상극설相生相剋設'에 의하면 흙은 금속을 생한다土生金. 이에 금속은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것을 얻은 자는 빈손인 자를 압도하고 모든 부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하지만 맹렬한 화나 상념에 사로잡혀 안목을 잃은 사람이 휘두른다면 스스로가 멸할 따름이다. '나'에게는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금金도 금金을 녹일 화火도 없다. 다만 명료한 정신은 "금속성 가위가/ 당신을 겨냥하게 될지도 몰"라 안타까워한다. '나'는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레드향'의 생명력으로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곡진하고 마음을 다해 행하는 발화發話이며 발화發花다. 내게 대적하는 '당신'을 향한 '나'의 언어는 온화하고 귤향이 풍겨난다. 화극금火剋金이 아닌 향극금香剋金의 장면, 나아가 향생금香生金의 장면을 본다는 것은 박지선 시에서만 누릴 수 있는 드물고 귀중한 경험이다.
박지선의 시편에는 색의 삼원색 중 가장 밝은 색인 '노랑' 꽃들도 등장한다. 노랑은 빛의 삼원광三元光 중 빨강과 초록이 겹칠 때 태어난다. 주지하다시피 빨강과 초록은 색상환에서 반대편에 놓이는 색깔이다. 극과 극이 섞일 때 태어나는 색이라니! 노랑의 비밀은 또 있다. 섞을수록 밝아지는 빛과는 달리 물감, 크레파스 등의 색은 섞을수록 어두워지는데 노랑은 예외다. 노랑은 상대 색을 밝고 화사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노랑은 색 보다는 빛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개나리와 병아리와 유치원의 색깔이 노랑인 것은 휘발되기 쉬운 유년기의 빛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선천적으로 미스터리한 색상인 노랑은 박지선 시 중 「복수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여자
홀연히
귀띔도 없이
끓는 성질로 와서 흉터를 헤집었다
나는 간이역 의자에 앉아
기차를 타고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발걸음 앞에 노란꽃잎이 피어올랐다
- 「복수초」 전문
눈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 '복수초'는 오해 받는 식물이다. 이름이 '앙갚음'을 의미하는 '복수復讐'를 연상하게 해서인데, 사실 이 꽃의 한자어는 '복수福壽'이다. 사전적 의미는 '복이 많고 오래 삶'이지만, '복福'의 뜻을 동사로 풀면 '오래도록 잘 살아가기를 축복함'이다. 본문 속의 정황으로 들어가면 두 사람이 나온다. '그 여자'는 거침없다. 상대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등장하고, 크나큰 상처를 주고, 떠나 버린다. '그 여자'가 하는 행동의 바탕엔 "끓는 성질"이 있다. 그것은 복수심復讐心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기심이나 적개심일 수도 있다. 그 '성질'의 근본은 지옥처럼 잔혹하다. 자신의 성질에 지배당한 그녀는 '나'라는 사람을 보고 있지 않다. 나의 '흉터'를 보고 있다. 흉터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고 인격도 없다. 다만 "헤집"을 대상일 뿐이다. 그녀에 비해 '나'의 행동반경은 작다. '나'와 연관된 동사는 '앉다'와 '바라보다'와 '돌아오다'이다. '나'는 발길을 멈추기 위해 앉는다. 무엇을 기어코 보겠다는 마음 없이 그저 눈에 맺힌 상을 감각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가 '그 여자'를 만났던 것은 무슨 뜻이나 계획,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교통사고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여자'가 떠나가는 자리에 멈춘다. 그리고 '본'다. '나'의 '바라봄'에는 미움이나 비판, 격정, 울분 같은 것이 없다. 이 순간 무아無我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심과 집착이 '그 여자'와 함께 떠나간다. '나'는 그녀가 탄 기차에 '나我'를 함께 태워 보냈기에 무아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 복수초가 핀다. "노란꽃잎"은 나에게 복수復讐하듯 다가온 '그 여자'가 오래도록 잘 살아가기를 축복한다. 이러한 '나'의 마음은 지상에 살되 천상에 적籍을 둔다.
시가 될 때까지 발화하는 세이렌의 언어
근원을 찾는 일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힘겨운 본능이다. 생명의 기원이 바다에서 시작됐다는 설을 따를 때 사람의 상체를 가진 인어가 뱃길에서 노래한다는 이야기는 상상의 소산만은 아니다. 거친 바다에서 노래하며 뱃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전설은 전세계에 걸쳐 구전되는 설화이다. 박지선의 시에서도 바다와 근원과 사람에 대한 감각적 사유가 발견된다.
고래에게 가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고 고향바다를 빨고 싶다
고래는 엄마의 삶 엄마의 일생 엄마의 죽음
어느덧 내 젖꼭지가 붉어져있다
- 「붉은 부끄러움」 전문
'부끄러움'은 왜 붉은가. '젖꼭지'가 붉기 때문이고 젖을 먹는 생명의 행위가 붉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고래는 육지에서 바다로 이동해 영영 그곳에서 살기로 한 거대 생물이다. 그것의 이동 방향은 다른 동물과 반대다. 바다에서 탄생한 생명들이 죽을힘을 다해 육지로 나아간 것과 달리 고래는 바다에 몸을 묻고 물의 질서에 따라 살아 왔다. '나'는 고래처럼 꼬리지느러미를 위아래로 저으며 깊은 물속, 고향으로 향한다. 삶의 근원을 찾는 여정이지만 동시에 죽음 같은 자맥질이다. '고래'는 "엄마의 삶" "엄마의 일생" "엄마의 죽음"이다. 파도에 휩싸여 있기에 한눈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바다 생물은 세이렌처럼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나'에게 자장가 같은 것이다. 삶에의 끝없는 도전, 심해에 잠겨 살아간 일생, 그리고 심해로 가라앉았을 죽음까지 모두가 '엄마'의 노래 같은 것이다. 대양에 속한 휘파람 같은 것이다. 위험하고 매혹적이고 무엇보다 삶의 의지로 충만했을 '엄마'의 삶은 '나'가 무시로 지향하는 근원의 세계다. '나'는 "고래의 젖을 물"고 "고향바다를 빨"고 싶다. 고래의 젖을 물면 비릿하고 따스한 바닷물을 삼킬 수 있다는 상상에 이른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젖꼭지가 붉"어진다. 다른 생명에게 젖을 물려 살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다. 그렇게 '나'는 시가 될 때까지 노래함으로써 세이렌의 자장가를 부를 줄 알게 된다. 뭇생명을 먹여 살릴 어미가 된다.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시인의 탐구는 정신적 반향으로 이어진다. '나'를 넘어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대양에 속한 고래와는 다르게 인간의 풍속은 "무엇인가 되기를 원하"는 일에 기울어 있다.
나의 이름은 꽃이죠
인간은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죠
만들고 허물고 지우고 덧칠하고
모호한 관계를 필사하죠
우리는 뻐끔거리며 간을 보고
입술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손뼉을 치며 한 곳으로 기울어져 색맹이 되죠.
누가 누구를 닮아 가는지도 모를 때
페리소나를 중얼거리며
엘로우피쉬를 복제 하죠
어항에 새겨지는 꽃물결
흙 속으로 날아간 금붕어의 날개
화분과 어항은 필수일까요
어항은
가라앉지 않는 깊이 꼭 그만큼의 안부를 묻죠
- 「옐로우피쉬」 부분
시인이 바라보는 어항은 안부의 창窓이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 보고 싶다는 전언. 그러한 진심이 투명하게 통하는, 유리로 만들어진 물체. 물론 어항에는 바닥이 있다. 그래서 "가라앉지 않는 깊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중을 부유하는 생명들은 바닥에 닿는 순간의 아픔을 잘 안다. 유리 어항이라 해도 바닥만큼은 매끄럽지 않다. 돌과 모래가 있고 플라스틱 물풀이 흐느적거리며 서 있고 물곰팡이가 끼어 있고 도무지 친연해지지 않는 버석거림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뻐끔거리며 간을 보고/ 입술을 부딪치며 건배를 하고/ 손뼉을 치며 한 곳으로 기울어져 색맹이 되"어 간다. 자신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불안감과 열패감이 '우리'를 지배한다. 진심 없는 곳에서의 친교는 "페르소나를 중얼거리"게 하고 "옐로우피쉬를 복제 하"게 한다. 어항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면의 바닥도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만나는 일은 슬프고 덧없다. '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가 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만들고 허물고 지우고 덧칠하고/ 모호한 관계를 필사하"는 일의 연속이다. '나'는 '색맹'이 되어가고 있기에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색상을 알아볼 수 없으며 타인에게 이해받는 존재가 되지도 못한다. 그렇게 붉음과 푸름은 겹쳐지지 않고, 가장 밝고 따뜻한 색깔인 노랑은 태어날 수 없다.
노랑이 만들어지지 않는 세계를 대면하는 일에 대해
빛과 빛은 색맹의 스펙트럼 안에서 왜곡된다. 노랑은 태어나지 못하고 온 세상이 어둠에 드는 시간이 이어진다. 어둠은 나날의 사이사이에 검은 막을 드리운다. 그 막이 걷히면 연극 같은 하루가 열린다. 이곳에선 스치는 사람마다 본심을 숨긴다.
경극 같은 막이 오르는 하루
자꾸만 스쳐가는 얼굴엔 얼굴이 없죠
이목구비의 뒤통수를 생각하다
미뤄두었던 대답을 살며시 꺼내들어요
… 중략 …
무대의 막은 언제나 왜 검정색이죠? 라는 질문은 늘 구겨져요
쉿, 여기까지만!
쓸만한 것들에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죠
듣고 싶은 말만 채집 하는 귀를 달았죠
아침을 배웅하기로 하였는데 저녁이었죠
- 「가면극」 부분
"자꾸만 스쳐가는 얼굴엔 얼굴이 없"다는 발견은 이 시의 맨 마지막 행인 "아침을 배웅하기로 하였는데 저녁이었죠"에 닿는다. 이 발견은 또한 "구겨진 질문"에 대한 힌트가 된다. "무대의 막은 언제나 왜 검정색"인가. 그것은 이 우주의 질서가 빛보다는 어둠에 의해 유지되고, 사람의 얼굴엔 진실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도시의 질서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에 기반하지 않는다. 경극의 가면처럼 꾸며진 얼굴이 의도된 대사를 뱉으며 불쑥불쑥 출몰한다. 멋진 가면을 쓰고 과장된 몸짓을 할 줄 알아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아침'을 보려 한다. '아침'이 점심으로 넘어가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한때를 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아침이 사라진 자리에 저녁이 남는 뜻밖의 현실에 부딪힌다. 저녁의 어스름 속에서는 빛의 찬란한 분광을 경험할 수 없다. 색이 태어나지도 않고 세상 만물이 가진 본연의 형태를 파악할 수도 없다. 시인은 탄식한다. "쓸만한 것들에겐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죠/ 듣고 싶은 말만 채집 하는 귀를 달았죠". 존재와 존재 사이엔 연극의 막처럼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다. 그 막은 검다. 왜 검으냐는 질문은 금지된다. '귀'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눈 역시 보고 싶은 것만 '채집'하기를 원할 것이다. 거짓된 얼굴, 왜곡된 상, 진실 없는 소리들이 도시의 풍경을 뒤덮는다. 이 같은 풍경은 다음의 작품 속에서도 목격된다.
회전의자에 앉아서들으나 서서들으나
어차피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인데
서로 사랑하라는 구절은
잊으면 안 되는 계명 같은 것이어서
구관조가 넘기는 몇 장 몇 절
누가 누굴 사랑하는지 도무지 알 수없는
쥐불놀이 깡통 속 온기 사라진 불티는
허공에 그리는 동그라미 쳇바퀴 돌아 나왔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사랑이 어떤 색깔 입니까?
사랑은 어떤 맛이지요?
가라사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아멘
난 아멘은 몰라도
거미가 똥구멍에서 뽑아 지은 성근 집에
내 아버지가 산다는 것은 안다
허공에 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죄는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공중에 비는
상표도 없는 표백제의 골목에서
보증서도 없는 전매특허가 난장판을 이루었는데
오늘도 창궐하는 아비 없는 난전에
키 재기 놀음을 하는 우리들은
시장 좌판 위에 끌려온 생선의 죽은 눈 속에
아직 푸르른 눈의 내세를 바라보아야 한다.
- 「난장판」 전문
시인은 "아비 없는 난전"인 이 세상을 바라본다. 아비는 '허공'에 있다. '우리들'은 "키 재기 놀음"에 빠져 있다. 자신의 진짜 얼굴은 보여주지 않은 채 허황된 놀음에 골몰한다. 이곳에선 진면목을 드러내는 자가 패자다. '우리들'은 "죄는 사람에게 짓고/ 용서는 공중에 비"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한 일은 시인이 보기에 인스턴트식이다. 죄로 얼룩진 옷을 삶고 두들기고 얼룩이 사라질 때까지 비벼대기는커녕 '표백제'만 붓고서 자신이 지은 죄를 방관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죄」라는 시에서 "죄는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음을 간파한 바 있다. 죄는 표백제로 없앨 수 있는 얼룩이 아니다. 죄는 자신을 지은 자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끝끝내 어둠으로 끌어내린다. 죄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시인의 눈에 이 세상은 난장판이다. 자신의 물건만 최고라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곳, '상표'나 '보증서'도 없이 돈을 벌려는 눈먼 욕심의 현장. 그렇다면 난장판의 세상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다음의 시에서 시인은 '위빠사나'의 지혜를 보여준다.
무임승차로 떠나보는 하늘이 펼쳐졌다 네 개의 기둥에 묶인 나를 실은 기차는 후진 없는 레일을 따라 갔다
붉게 녹슨 레일의 끝이 잠시 쉬었다 가는 간이역이었음 좋겠다
레일 밖의 예수나 부처나 마호메트가 폭설을 맞으며 설원에 남긴 발자국
그 속에 담겨진 환희는 스스로가 설산이길 믿기 때문이었으리라
허공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다시 태어나는 마침표 하나 내 자신이 가리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렇게 어두워진다.
- 「어느 날의 위빠사나」 전문
우주의 주인을 만나 값을 치르고 시작한 게 아니므로 삶은 '무임승차'이다. '나'는 '묶'여 있기에 움직임이 없다. 그저 눈과 귀를 열고서 세계를 진실된 모습 그대로 지각할 뿐이다. 운명의 '레일'은 '후진'이 없다. '나'는 제자리에 붙박인 승객이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는 내 인생의 레일 '밖'의 존재일 뿐 '나'를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알아볼 혜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가 설산"이라기보다는 "설산이길 믿"기에 최고의 봉우리들이 되었다. 설원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어두워진'다. 삶이란 '마침표'의 회귀여서 시작 없이 종결되는 미지의 어떤 것과 같다. 이 '무임승차' 여행의 주인은 예수도 부처도 마호메트도 아니다. '나'만이 '마침표'의 방향을 정해줄 수 있다. '마침표'는 화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두워지'는 '나'는 끝까지 마침표 하나를 붙들고 그것의 궤적을 좇는다.
소쇄원에 가시거든
푸른 소나무에 걸린 달만 보지마세요
개울물에 비치는 머리 깨진 달이 있고요
죽창에 찔려 피 흘리는 달도 있어요
시궁창에 흘러든 달도 있고요
우물에 숨어 출산하는 슬픈 달도 있어요
주인처럼 높은 정각에 올라앉은 달도 있고요
서까래 그늘에 가려진 반쪽 달도 있어요.
이즈러진 천개 만개의 달의 무늬도 있어요
소쇄원에 가시거든
눈을 감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세요.
발밑에 깨어지는 달의 울음이 고여 있어요.
- 「소쇄원의 달」 전문
소쇄원에 뜬 달은 '나'가 화두로 붙들고 궁구하는 노란색 마침표처럼 느껴진다. 이 시는 '만약 ~ 한다면'의 가정법으로 시작된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에 지어진 별서 정원으로 전라남도 담양에 있다. 시인은 소쇄원에 가도 소쇄원이 아름다움만 관광하고 오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곳에 보이는 달은 둥글고 꽉 찬 만월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달은 깨어지거나 피 흘리거나 시궁창에 있거나 슬프거나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절반을 잃어버리거나 무늬로 흩어지는 천태만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어딘가 부족하고 불행한 모습처럼 달의 세계도 그러하다. 시인은 '달'이라는 내 안의 가공된 이미지로써 지금 '소쇄원'에 뜬 진짜 달을 왜곡해 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복수초」에서 내 상처를 헤집고 간 '그 여자'를 보는 '나'처럼 잠시 멈춰야 한다. 움직일 때 움직이더라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난장판이 된 세상의 시계에 속도를 맞추지 말고 우주의 호흡을 따라가야 한다.
시인 박지선은 예순 아홉 편의 시를 통해 삶과 진실과 생명에 대해 말한다. 끝끝내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침표'의 궤적에 대해 말한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진실은 외면되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낯설게 들리는 것은 박지선의 시어가 시의 본질에 닿아 있어서다. 일상의 언어가 시가 되기까지 시인의 입술은 얼마나 발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이 시의 편수인 예순 아홉은 '일흔'이라는 수에서 한 숟가락 덜어낸 만큼의 숫자다. 완전하지 않기에 시가 되어지는 숫자다.
목차
목차
어느 날의 위빠사나/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붉은 부끄러움
죄
붉은 부끄러움
향어를 읽다
몽유
소쇄원의 달
네게로 가는 길
바람 부는 날
내게로 오시는
어둡던 목소리
지독한 농담
당신이 피워놓은 꽃
공갈빵
어느 날의 위빠사나
서툰 사랑
그냥 그래
vip의 신드롬
제2부 숲에는 소리가 산다
사랑아
붉은 말의 갈기
인터넷 비번
산다화
목련 1
목련 2
능소화
복수초
장다리꽃
숲에는 소리가 산다
바람 든 무처럼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웠던 날들
그믐밤
풍경 소리
무명초를 위하여
고독
연못
봄은 새를 맞는다
제3부 지금은 통화중
봄날의 뒷면
건축학 개론
나이테
종이그림자
포기
꽃꽂이
가로수의 수사
하늘 연못
소금
가야에서
녹물 薄娑
에틸렌가스
양파梁派
아내
옐로우피쉬
보성여관
지금은 통화 중
백련사 동백 꽃
제4부 모서리에 무늬가 있었다
모서리에 무늬가 있었다
현충원에서
가면극
빈집 1
빈집 2
난장판
뒷모습
반상회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는
꼰대는 붉다
생 보리도 받습니까?
부재 또는 존재
어느 닭장 속의 이야기
정전과 충전사이
팔등신
설익은 서리태 여자
숟가락 성자
작품론
고래의 붉은 젖을 빠는 세이렌의 노래 / 최세라
시인의 말
제1부 붉은 부끄러움
죄
붉은 부끄러움
향어를 읽다
몽유
소쇄원의 달
네게로 가는 길
바람 부는 날
내게로 오시는
어둡던 목소리
지독한 농담
당신이 피워놓은 꽃
공갈빵
어느 날의 위빠사나
서툰 사랑
그냥 그래
vip의 신드롬
제2부 숲에는 소리가 산다
사랑아
붉은 말의 갈기
인터넷 비번
산다화
목련 1
목련 2
능소화
복수초
장다리꽃
숲에는 소리가 산다
바람 든 무처럼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웠던 날들
그믐밤
풍경 소리
무명초를 위하여
고독
연못
봄은 새를 맞는다
제3부 지금은 통화중
봄날의 뒷면
건축학 개론
나이테
종이그림자
포기
꽃꽂이
가로수의 수사
하늘 연못
소금
가야에서
녹물 薄娑
에틸렌가스
양파梁派
아내
옐로우피쉬
보성여관
지금은 통화 중
백련사 동백 꽃
제4부 모서리에 무늬가 있었다
모서리에 무늬가 있었다
현충원에서
가면극
빈집 1
빈집 2
난장판
뒷모습
반상회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는
꼰대는 붉다
생 보리도 받습니까?
부재 또는 존재
어느 닭장 속의 이야기
정전과 충전사이
팔등신
설익은 서리태 여자
숟가락 성자
작품론
고래의 붉은 젖을 빠는 세이렌의 노래 / 최세라
저자
저자
박지선
ㆍ1954년 여천 출생
ㆍ2003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ㆍ2004년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
ㆍ2008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ㆍ2010년 《수필계》 신인상
ㆍ2019년 시집 『그 흰빛』, 『어느 날의 위빠사나』
ㆍ2020년~ 2021년 한국문인협회 지부장 역임
ㆍ그림동화 『엄마 찾은 구렁이』, 『섬진강 또랑이 뚜랑이』, 『옹기마을 옹기장』
ㆍ2003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ㆍ2004년 동서문학 맥심상 수상
ㆍ2008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ㆍ2010년 《수필계》 신인상
ㆍ2019년 시집 『그 흰빛』, 『어느 날의 위빠사나』
ㆍ2020년~ 2021년 한국문인협회 지부장 역임
ㆍ그림동화 『엄마 찾은 구렁이』, 『섬진강 또랑이 뚜랑이』, 『옹기마을 옹기장』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