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오늘의 시와사람 143)
박덕은 시선집
박덕은 시문학은 초기에는 시인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실존 탐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시편에서는 신앙고백의 성격,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다양한 포즈가 주된 시적 세계였다. 이후 그의 시적 경향은 단독자 인간으로서의 외로움과 거기에서 파생된 그리움의 감정이 시적 대상에 대한 사랑을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 이렇듯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시편을 수천 편을 쓰고도 목말라 하는 박덕은 시인의 노래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시적 대상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만, 가장 순수하고 절대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박덕은 시인의 세레나데는 고독한 그의 내면에서 울부짖는 하울링으로 이토록 간절한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 강경호(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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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 박덕은 시선집 『부치지 못한 편지』
강 경 호
(시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회장)
박덕은 생과 예술의 원천은 문학이다. 197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경수의 하늘나라 여행」 당선을 시작으로 1983년 《아동문예》 신인상 소년소설 「기다림 연주」 당선,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삶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 당선, 1986년 《시문학》에 시 「연가」 당선, 1987년 《아동문학평론》에 동시 「뒷동산의 꿈」, 「구름아 구름아」, 「뒷곁의 편지」 당선, 1992년 《문학섹 희곡 당선, 소설과 장편소년소설, 수필 등 문학의 전 장르에 등단하여 전천후 만능 문학인이 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 문학사에서는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작품집과 교양서를 포함하여 130여 권이 넘는 창작집을 펴내어 문학인으로서 박덕은은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와 부지런함으로 창작의욕을 불태워왔다. 그 중에서도 그의 문학세계를 대표적으로 발현된 장르는 단연 시(詩)이다. 시선집까지 포함하여 27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리고 '그리움'을 주제로 한 시편을 3,000여 편이나 창작하였지만 시집으로 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박덕은이 추구한 문학세계를 시집을 통해 투사시켰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때까치 울음 같은 바람이 되었다 / 피가 잉잉거리는 질퍽한 길을 따라 / 줄무늬져 오는 석양빛을 뿌리치며 갔다 / 동산의 축축한 時間을 털어내자마자 / 깃털처럼 부서져 내린 醉氣 / 계속 바람은 달렸다 / 흙구덩이에 잠긴 深呼吸을 딛고 / 얼기설기 털 돋친 삶의 音階를 / 한 꺼풀 한 꺼풀 벗기면 / 포도시 속살 벗는 山脈, 그 등성이를 털어낸다 / 점점 소슬한 진펄에 밀리는 / 肉身의 몸부림 몇 점, / 우적우적 깨물어 먹고 질근질근 깨물어 먹고 / 노자 한 푼 없이 한사코 가라, 바람개비같이 돌며 가라 / 숭숭 구멍 뚫린 갈림길로 / 머슴살이 손때도 쌍심지 돋은 자존심으로 씻으며 / 달음박질로 가라, 기지개 켜며 치달려가라, 얄미운 바람 / 자박자박 바람을 지쳐 달렸다 / 둔탁한 발걸음 소리 질질 끌어 데불고 / 변두리 샛길로 접어 들면, / 쑥대머리 동네 아이들의 헛웃음소리, 히히, 헤헤 / 그 사이를 비집고 기어코 끼어 드는 / 아내의 육자배기 가락 몇 올, / 파닥이며 돌아 눕는 죽은 아이의 부르튼 울음소리, / 갈앉아 조상의 山脈을 더듬어 헤매는 / 老母의 녹쉰 염불소리, / 와르르 쏟아져 내려 별빛같이 / 개구리 울음밭에 뿌려졌다 / 바람도 숨을 멈춘 채 / 벼포기들 사이로 / 시름시름 자맥질을 하면서 / 바람은 시간을 털어 낸다.
- 「바람은 시간을 털어낸다」 전문
박덕은 시집 『바람은 시간을 털어낸다』(전남대 출판부, 1986)에 대해 김상태 문학평론가는 "평범한 소재를 새롭게 보려는 시정신의 돋보임이다. 그것은 러시아 포말리스트 중에서 쉬클롬스키로 대표되는 시학자들이 '비친숙화' 관점을 잘 실천한 듯이 보인다. 더욱이 이 시인의 시들에서는 남도에서 흔히 쓰는 방언의 새로운 얼굴을 얻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중동의 테크닉이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목소리는 착 갈앉음이다. 도무지 부박하다든지 객기를 부린다든지 하는 대목이 한 곳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따분함이라든지 지루함을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매 시편마다 시험하고 있는 다양한 리듬과 시적 퍼스펙티브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하도 차분하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가령 「누이야 누이야」는 「거시기 1·2」와는 다른 음색을 내고 있는가? 「사랑 1·2·3」은 「타령 1·2」 혹은 「깨달음 1·2·3화」와, 혹은 「맥」 연작시와 얼마나 다른 변이를 추구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도무지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의 차분한 음성 때문이다.
김상태 문학평론가는 박덕은의 시의 차분한 목소리에 대해 주로 주목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박덕은의 시를 살펴보면 「바람은 시간을 털어낸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이미지인 촉감각으로만 지각할 수 있는 '바람'에 대해 "축축한 시간을 털어" "산맥의 등성이를 털어낸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더불어 "파닥이며 돌아눕는 죽은 아이의 부르튼 울음소리" "때까치 울음같은" 슬픔을 재내한 애조를 띤 존재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인간의 실존에서 만나는 온갖 슬픔의 서사현장에서 그것들과 마주하며 그 아픈 시간을 털어내는 존재로 현현하는 존재이다.
「안개」에서는 만질 수도 없는 시각적 이미지인 '안개'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며, "갓 태어난 향수의 날갯짓"이라고 형상화한다. 안개의 속성인 시야를 은폐시키는 성질을 통해 "한꺼번에 피어오는 정" "맘 놓고 피어오르는 넋" "아내의 눈빛 같이 / 희뿌연 햇살"로 형상화시킴으로서 보다 내밀한 인간의 정신영역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누이야 누이야」는 1980년대 우리 시단을 한바탕 유행처럼 지나간 민중시, 또는 현실참여적인 성격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집을 떠난 누이를 향해 보내는 연민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갈한 마음 깃을 세우고 서서 / 살아있는 눈빛으로 살아가는 누이야" "아침 햇살처럼 늘 그렇게 / 살아있는 누이"로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모습에서 80년대 민중시와는 사뭇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타령·2」에서는 후렴구 "어허야 어허 내 사랑아"를 반복하는 형식과 주로 3행 3음보 음악성을 잘 살리고 있다. 그리고 '타령'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우리 민족의 내면에 녹아있는 노래 형식으로 가난한 기층민의 애환을 그려내고 있다.
갈수록 시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은 시적 상징을 대상에게 부여하여 이른바 계산되었지만 자연스럽게 시적 짜임새를 갖춘다.
「행운목」에서 '행운목'은 말 그대로 행운을 가져오는 어떤 대상을 통해 대상이 지닌 기표 이면의 기의에 그 대상이 지닌 의미를 깊이 투사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행운목' 같은 존재로 인식되는데, "아버지는 / 일 년 계약직 접시물에서 / 일"하는 사람이다. 주지하다시피 '접시물'은 깊지 않아 생물이 살기 힘들지만 행운목은 잘 산다. 아버지는 '접시물'로 형상화시킨 '계약직'이다. 계약직은 임시직이므로 계약기간만 일할 수 있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내집 마련 같은" 소소한 꿈을 피우기 위해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 혼자 야근한다." 약속을 실행한다는 행운목의 꽃말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삶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수목장」에서는 수목장의 현장을 '자연친화적인 여관'으로 의미화시킨다. 그러므로 '벽지' '숙박계' '입실' '장판' 등의 시언어의 등장이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나무 밑' '장지' '울음' '꽃' '흙이불' 등 묘를 떠올릴 수 있는 언어들을 배치하여 죽은 사람의 장례를 연상시킨다. 비문 같은 글을 '숙박계'에 쓰게 되고 "썰렁했던 그의 방은 차츰 온기가 든다."고 말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굽은 등 감춘 어머니는 / 모든 것을 마주보며 말한다 // 고기잡이배 집어등의 밝음도 / 차갑고 드센 암초도 / 정박해 있는 순한 눈빛들도 / 휘감기는 한파도 / 모두 그녀의 앞에 있다 // 옷소매 걷어붙인 탄탄하고 억센 팔뚝으로 / 그녀는 언제나 정면을 응시하며 / 세상을 다독인다 / 앞면을 확장해 가는 그 뜨거운 가슴으로 // 어머니의 힘은 사실, / 뒷면에 숨겨져 있다 // 비상식량이 비축된 / 낙타의 혹처럼 / 그녀의 굽은 등은 상흔의 저장고 // 난파된 어선의 슬픔, 어부들의 고뇌, / 발 묶인 두려움의 나날들, / 회한으로 출렁이는 항구, / 속절없이 저무는 바다까지 / 모두 그녀의 뒷면에서 꿈틀거린다 / 그것들의 응축된 힘이 / 그녀를 단단히 다져간다 // 폭풍우 휘몰아치는 / 이른 새벽 / 용솟음치는 기도 // 정한수 떠놓고 험한 물결 잦아들 때까지 / 거친 파도 헤치며 허리 굽혀 애타하다 / 급격히 커지는 그녀의 간절함이 / 바람의 들머리 바꿔 뱃길을 연다 // 그제서야 / 사나운 풍랑 한복판에서 / 잔잔하고도 붉게 물들어 가는 고요가 / 먼 데서 생동하는 아침을 끌어올린다.
- 「여수항」 전문
「여수항」은 '어머니'라는 대상을 노래한 작품이다. 박덕은은 어린 시절 마음속으로 어머니와의 단절을 마음먹었지만 자신이 자식을 낳고 어머니의 처지가 되어 어머니의 삶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그의 문학작품 속에 어머니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 작품은 보편적인 어머니에 대한 관념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동안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어느 정도 이 작품속에 스며든 것이 아닐까. "굽은 등 감춘 어머니는 / 모든 것을 마주보며 말한다" 그러나 사실 어머니의 힘은 뒷면에 숨겨져 있다. 낙타의 혹처럼 굽은 등은 상흔의 저장고이다. 난파된 어선의 슬픔, 어부들의 고뇌, 발 묶인 나날들, 그리고 속절없이 저무는 바다까지 어머니의 뒷면에서 꿈틀거린다. 이렇듯 고난신난한 삶의 고초를 견디어 온 어머니이기에 오히려 그것들의 응축된 힘이 어머니를 단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어머니를 시련에서 견디게 한 힘의 온천은 이른 새벽 정한수 떠 놓고 용솟음치는 기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간절함이 "사나운 풍랑 한복판에서 / 잔잔하고 붉게 물들어 가는 고요가 / 먼 데서 생동하는 아침을 끌어올린다."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할머니를 노래한 시편은 버거운 삶을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할머니의 풍등」이라는 작품을 읽는다.
'할머니의 풍등'은 '할머니의 소원'을 상징화시킨 은유이다. "백발처럼 성성한 슬픔"은 할머니의 지나온 지난한 삶을 의미한다. "감당하지 못할 恨 숨긴 채" 살아온 생이였기 때문이다. 때는 "동안거 끝낸" 봄날 감자를 심기 위해 할머니는 밭으로 간다. "묻힐 수 없는 날들 / 적막 속으로 잠기자 / 우우우 허공 떠도는 소리 / 그 서러운 날들 / 조금씩 밀어 올려 푸른 줄기 세운다" 서러운 삶 속에서도 감자의 푸른 줄기를 세우듯 할머니의 한과 슬픔으로 얼룩진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아침내 "찬란한 내일을 어룽어룽 엮"기에 이른다. 이 작품에서 작품에 활기와 힘을 주는 것은 "울음은 웃음보다 환하다"는 역설과 감자의 푸른 멍이 생명성을 나타내듯 '상처'의 다른 말인 '멍'을 "하얗게 멍이 든 세상을 눈뜨게 한다"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사방 천지 별처럼 반짝이는 풍등이 / 밭이랑 마다 무더기무더기 떠 있다"며 감자꽃으로 짐작되는 것들이 별처럼, 또는 풍등처럼 밭이랑마다 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할머니의 꿈알들이 토실토실하다."며 할머니의 소원이기도 한 감자알이 토실토실 잘 여물었다고 하기에 이르른다.
「폐차장」은 자동차의 일생을 통해 마침내 폐차장에 오게 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을 노래하면서 성찰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알다시피 자동차는 질주하는 것이 본능이며 역할이다. 그러나 "가파른 기억의 고삐 내려놓고 / 가부좌 튼다" 한때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 취기 오른 속도"의 무모함과 객기는 시인의 삶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달릴수록 치기 어린 배경이 / 떨어진 문짝처럼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폐차장에 이르러 "한 방향만 고집한 미련 많은 백미러는 / 금이 간 오후의 고뇌를 붙들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인간의 삶도 이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름 한 점 없는데 / 소나기 한 줄기 후드득 쏟아"지는 것은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 등짝 후려치는" 죽비 같은 것이리라.
이밖에도 박덕은 초기 시편들에서 기층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치 월식 때 사방이 캄캄해진 것처럼 "태생부터 / 쓰리고 아릴수록 단단해지는 눈물이 / 새 길을 만든다"는 "달의 심장을 옥죄는 망나니들" "아직 끝나지 않은 봉기가 / 동진강으로 모여들어 / 혁명 같은 달가루를 풀어놓느라 / 강 물결이 희디 희다 / "고 노래한 「월식」, 부둣가에서 노점상 하는 사람의 "가압류 딱지"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지난한 삶을 그린 「부둣가 노점상」, 음식점 전단지를 골목마다 붙이고 다니는 여자의 삶을 살피는 「전단지」 어린 자식들을 위해 풍랑에 쫓기면서도 "재갈 같은 생과 맞서는" 아버지의 한숨을 노래한 「말뚝」 등의 작품들이 있다.
박덕은의 초기 시편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그린 작품이 그의 또다른 시적 경향을 차지한다. 기독신앙을 노래한 시편에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신앙고백적인 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특히 「케노시스」 연작시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데, 문덕수는 " '당신'(임)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 당신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여 그의 상상력, 그의 영혼의 전체를 집중함으로써 그의 시의(그리고 삶의) 중심을 확고하게 잡은 것이다. 절대자인 당신과 나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 구조는 앞으로 얼마간은 그의 시의 기분구조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형이상학의 인식」, 『자유인·사랑인』 도서출판 한실, 1989)고 하였다. 이 연작시들은 박덕은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진하게 드러낸다. 결국 박덕은이 그의 시적 여정에서 탐색한 성과들의 결집과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귀결로써 나타난다. 이 작품들에서 신앙고백은 절대자 '당신'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추종이 아니라 인간적인 번뇌와 갈등과 회의가 담겨있다. 그러므로 '케노시스'는 절대자에게 바쳐지는 헌시이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케노시스(Kenosis)'는 성육신으로 자기를 비운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헬라어이다. 자신의 신성을 비우는 것도, 신성을 인간성으로 바꾸는 것도 아닌 자기 포기, 즉 예수님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립보서 2:11)에서 보듯 자신의 권위를 비운 것을 말한다.
「케노시스·9」 『당신을 확실히 얻기 위해』에서 "당신과의 이별을 슬퍼하지 아니합니다"라고 고백한다. "당신과의 이별은 / 당신과 저의 새로운 영합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대자와의 이별은 "당신의 이름이 제 생명에 조각되기까지 / 수많은 밤을 지새워야 하고" "수많은 입덧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즉 당신을 얻기 위해, "당신과 저의 영원한 만남을 위해"서 "이렇게 당신을 떠나보"내겠다고 한다. 보았듯이 세상적인 욕망을 얻기 위한 이별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남으로써 참다운 만남을 하겠다는 다짐을 보여준다.
홀로 / 당신의 창문을 열어 젖히면 / 발가벗은 영혼을 만나게 되요 // 순간, / 몰려오는 당신의 향기, / 에워싸며 쓰다듬는 당신의 체취 // 그렇군요 / 당신의 창틀에 / 나의 기도가 끼워 있고, / 그렇군요 / 당신의 테두리에 / 나의 인생이 갇혀 있군요 // 오늘, 살펴본 / 당신의 방은 / 그렇군요 / 나의 영혼의 영원한 자취방이군요.
- 「케노시스·29」 전문
「케노시스·29」 『당신의 방』에서 '당신의 방'은 "발가벗은 영혼을 만나게 되"는 공간이다. 이 시공간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성숙한 영혼이 머무는 형이상학적인 지점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쉽게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수많은 기도가 있어야 하고, 참된 삶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화자는 "당신의 테두리에 / 나의 인생이 갇혀있군요"라는 고백에 이르는 것이다. 갇힘, 즉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에서처럼 '진리'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를 절제하는 구속일 수 있다. 그러나 구속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역설이, 이 작품에서도 갇힘이 때묻지 않은 '발가벗은 영혼'이 되게 함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의 방"을 "나의 영원한 자취방이군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케노시스·47」 『얼마나 좋겠어요』에서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당신과 걸어갈 수 있다면 /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소망을 말한다. "가슴이 미어지게 부푼 날" "당신과 함께 달려갈 수 있다면 /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묻는다. "온 몸이 은혜롭게 들뜬 날" "당신과 함께 뒹굴어 내려갈 수 있다면 /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묻는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청아하게 펄럭이는 날 / 저 하늘과 함께 두둥실 올라갈 수 있다면 / 얼마나 좋겠어요"라고도 묻는다. 화자가 이렇듯 '당신'이라고 호칭되는 절대자에게 자꾸 자신의 소원을 갈구하는 것은 아직 화자가 당신이 바라는, 즉 자신이 소망하는 그런 지경에 이르지 못한 결핍을 드러낸 것으로 언젠가는 이루고 말 소망이라 욕망인 완성된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통해 보다 성숙한 신앙에의 길에 이르고자 한다.
박덕은이 욕망하는 신앙의 완성을 위한 바람은 '길트기' 연작시에서도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임명진은 「길트기」 연작시에 대해 " 「길트기」 전편에서 '당신'을 부르고 이 시인의 변화무쌍한 목소리-설레임, 부끄럼, 겸허함, 초조함 등-와 다양한 포즈-능동적인 적극성, 수동적인 관조성 등-는 참으로 여러 선율의 변곡점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아무래도 '길트기'로 의미화된 '올바른 사람'이 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는 시인이 공포와 부끄러움과 초조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으로 외치는 고뇌를 잘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성숙한 사람' '완성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박덕은의 인간적인 목소리가 「길트기」 연작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 당신의 하얀 종이 한 장 / 구겨지지 않기를 / 아프게 소망하여 애타게 기도하며 / 어느 역에서나 아낌없이 내릴 채비를 하며 / 청정한 몸으로 절절히 시를 써요 / 휘청이는 목숨을 훈훈히 부추기며 / 당신의 붓글씨 받으러 / 예까지 총총 걸어왔어요 // 나는 당신만의 얇은 종이 한 장 / 때가 묻지 않기를 / 향긋이 소원하며 살포시 빌어 보며 / 어느 때에라도 기쁨 담아드릴 채비를 하며 / 청아한 맘으로 당신을 기다려요 / 눈물겨운 가슴을 소중히 간직하며 / 당신의 사랑을 받으러 / 예까지 급히 달려왔어요 // 나는 / 당신의 종이 / 부끄럼 타는 한 장의 빈 종이.
- 「빈 종이, - 길트기·2」 전문
「빈 종이, - 길트기·2」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절대자의 "하얀 종이 한 장 / 구겨지지 않기를 / 아프게 소망하며 기도"한다고 고백한다. "당신의 하얀 종이"는 때묻지 않은, 그러므로 순결과 신성한 절대적인 가치이다.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피조물인 화자가 타락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몸으로 절절히 시를" 쓴다고 한다. "당신의 붓글씨 받으러 / 예까지 총총 걸어왔"다고 고백한다. '절절히 쓴 시'와 '당신의 붓글씨'는 순결하고 신성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순결함과 신성함을 간직하겠다는 화자의 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 당신의 하얀 종이 한 장"이니 아무렇게나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 하얀 종이에 "기쁨 담아 드"리고자 하고, "청아한 맘으로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박덕은의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신앙고백은 계속 이어진다. 「살아있는 기쁨」에서 "당신은 오랜만에 찾아와 주셨"다고 한다. "이미 안개 속에 묻혀 죽어있을 / 버려진 저"에게 당신이 찾아와 주셨으니 참으로 기쁜 일일 것이다. 그 동안 "당신의 이름은 잊었지만 / 당신의 사랑을 못내 못 잊어 하"였으니, 실은 화자가 당신을 잊은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화자는 마음을 닫아두었는데 당신이 웃게 하여 마음의 문을 열게 됐다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기쁨이며, 당신으로 인해 저는 만족한다고 한다. '당신'이라는 절대자가 어떤 존재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는 작품이다.
박덕은의 기독교적 상상력을 발현하는 시편들에서 「당신」 연작시는 그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 있다. 흔히 '당신'은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의 호칭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애틋한 감정이 투사되어 있고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적 존재에 대한 경건성이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
할머니가 걸어와요 / 세월의 발끝만 내려다보며 / 천천히 걸어와요 / 옆도 보지 않고 / 그냥 지나쳐 가요 // 두 손은 뒤로 한 채 / 90도 가까이 허리 구부린 채 / 지나가고 있어요 //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 아기소나무 한 그루, / 잘 익은 복숭아 두 개, / 막 피려는 백합 한 송이 / 들어 있군요 // 서서히 골목 안으로 사라져 가는 /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당신을 읽어요 / 당신의 향기도 읽어요 / 당신의 눈물도 읽어요 / 꿈에도 그리던 당신의 사랑도 읽어요.
- 「당신·2」 전문
박덕은의 '연작' 「당신」에서 신적 존재는 높은 데 있는 특별한 분이 아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쉽게 현현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렇듯 「당신·2」에서 "세월의 발끝만 내려다보며 / 천천히 걸어"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90도 가까이 허리 구부린 채"이다. 할머니의 "손에 든 비닐봉지에는 / 아기소나무 한 그루, / 잘 익은 복숭아 두 개, / 막 피려는 백합 한 송이"가 들어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할머니의 손에 든 것들은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것들 속에 내재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당신·22」에서 박덕은이 추구하는 정신적 지향성이 깃들어 있다. "원하는 거 없어요 / 호화로운 삶도 관심 없고 / 높아지는 명예도 관심 밖이에요"라는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가 지향하는 삶은 "오로지 함께 하는 삶 / 그대와 단둘이서 / 눈물 거두고 한숨 말아 / 평안한 기분 깔고 사는 삶"이다.
이밖에도 박덕은의 「당신」 연작시에서 일상의 삶에서 만나는 수많은 정서적 사건에서 '당신'은 나약함과 결핍 투성이인 인간이 도저히 이르를 수 없기 때문에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박덕은 시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적 경향은 '그리움', '외로움'과 함께 이러한 정서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사랑'의 감정들이 있다. '그리움'의 정서는 박덕은 시문학에서 초기에서부터 끊임없이 작품 속에 투사되었던 정서로 초기시 이후 현재까지 그가 천착하는 시적 주제이다.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지내오면서 생래적으로 내면에서 들끓는 인간 박덕은 삶의 에너지이자 욕망의 형상화이다. 그것은 삶에서 솟구치는 외로움의 소산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표현이며 어쩌면 박덕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유년기에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실감과 기존의 관념에 대한 반항, 또는 저항의 기표라고도 할 수 있다. 때로는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해석할 수 있고, 근원적인 외로움, 또는 슬픔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것들이다.
「둥지 높은 그리움·2」는 박덕은에게는 매우 의외의 짧은 시형식이지만 그의 내면에 가득찬 그리움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혼자 있는 겨울밤 "서슬져 있는 그리움이 / 이 한밤 나를 깨어있게" 한다고 고백한다. 모두가 잠든 밤 홀로 깨어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화자가 살아온 수많은 날들 겪은 정서적 사건들에 대한 사색에서 연유한다. 겨울밤이라서 몸을 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또렷하게 정신을 맑히우기 때문인데, 화자는 이를 두고 "이 싸늘한 시간들을 어이합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쉽게 말해 복잡한 감정들로 인해 정신이 오롯해지는 상황이다.
박덕은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편들은 시적 비의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큰 텍스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읽을 때는 시인이 어떤 의도로 시를 쓸 것인지 독자들은 알 필요가 없다. 오직 텍스트만을 통해 해석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어서 앞에서 살펴보았던 절대자에 대한 신앙고백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 이른바 다의성을 지닌 작품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박덕은 시의 미덕은 시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특성을 지녔다.
신으로서 / 할 말이 있습니까? // 한 번이라도 / 단 한 번만이라도 / 운명의 짐으로 몸부림치는 / 우리의 눈물을 씻어준 일 있습니까? / 손수건이 / 없어서입니까? / 게을러서입니까? / 왜?
- 「둥지 높은 그리움·4」 전문
「둥지 높은 그리움·4」는 얼핏 보기에는 신적 존재와 동등한 수평적 관계에서 따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반적으로 신적 존재인 절대자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흔히 인식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신으로서 /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신에게 묻는다. 이러한 질문에 전제되는 것은 피조물이 "운명의 짐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의 눈물을 씻어준 일"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재차 "손수건이 / 없어서입니까? / 게을러서입니까?"라고 물으며, "왜?"라고 강하게 마치 다그치듯이 질문한다. 화자는 삶이 "운명의 짐으로부터 몸부림치"다가 그러한 삶이 너무 가혹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신에게 그저 되묻고 싶은 것만이 아니다. 시제 「둥지 높은 그리움」이 이를 암시하고 있다. 신적 존재는 높은 곳에 계시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화자가 가혹한 운명을 견디다 못해 그저 하소연하는 것일 뿐이다. 둥지 높은 곳에 계시는 그분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성숙은 언제나 신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박덕은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박덕은 시의 특징은 다의성(多義性)이다. 특히 연시풍(戀詩風)의 작품에서 보다 의미를 확장해 읽어내기 알맞다. 「대화」 또한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이상합니다 / 피부가 입을 열고 / 솜털이 말을 합니다 / 온몸이 느낌으로 / 대화를 나눕니다 // 당신입니까 // 한 모금의 술로도 / 곁에 다가와 / 언제나처럼 감싸주는 / 따스함 // 당신입니까 // 이대로 / 잠들고 싶습니다 / 꿈길에서 만난 / 안타까운 시간을 껴안고 / 그만 쉬고 싶습니다.
- 「대화」 전문
언어는 문자와 음성언어, 즉 시각과 청각만이 언어라는 기호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五感) 모두가 언어의 기호가 된다. 이 작품에서 촉각이미지인 "피부가 입을 열고 / 솜털이 말을" 한다고 한다. "온 몸이 느낌으로 /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그리고 미각이미지인 "한 모금의 술"로도 "곁에 다가와 / 언제나처럼 감싸주는 따스함"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당신입니까"라고 묻는다. 어쩌면 시적 화자는 삶에 지친 자일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대상인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피부'와 '솜털', 그리고 '온 몸'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에 "잠들고 싶"다고 한다. "한 모금의 술"도 '당신'이 시도하는 대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화자는 '당신'의 따스한 손길의 대화를 통해 "안타까운 시간을 껴안고 / 그만 쉬고 싶"다고 말한다. 이 작품 또한 사랑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형상화시킨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미치도록 / 詩를 쓰는 건 // 발끝으로 슬며시 들어와 / 폐부까지 찌르르 찌르는 // 그놈의 /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야 // 미치도록 / 詩에 매달리는 건 // 누워 있으면 / 방바닥에서 솔솔 올라오는 // 그놈의 / 냉기 섞인 추억 때문이야 // 미치도록 / 詩를 깨물어 먹는 건 //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 그놈의 / 불화살 같은 열정 때문이야.
- 「사랑아·18」 전문
「사랑아」 연작시에도 위에서 밝힌 정서들을 다시금 곱씹고 있다. 「사랑아·18」을 읽는다. 박덕은은 시를 쓰게 된 배경을 공무원 시절 시장 골목으로 가려고 차를 멈추고 있을 때 대형트럭이 뒤에서 빵빵대고 있어서 화가 치밀어 분노를 터뜨려 트럭 앞에서 급정거하는 작은 사건을 경험한다. 그리고 여전히 빵빵대는 트럭에게 항의하기 위해 자동차에서 내려 욕 한바가지를 쏟아 퍼부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화를 쉽게 주체 못하는 아버지의 버럭증이 흐르고 있음을 절감하며 자신에게 실망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울적해 이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 속에 나의 감성과 분노와 홧병을 하나하나 풀어 녹여냈다. 하고픈 말, 쌓여둔 응어리, 말 못할 내면 등을 시 속에 담아 한 올 한 올 끄집어냈다.
그러는 동안, 차츰 내면이 정화되어갔다. 분노의 물줄기도, 홧김에 저질렀던 막말도, 조급한 울렁증도 점차 해소되어 갔다." (「분노관리 이야기」, 서영, 2001)
인용된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는 일종의 견인시 성격이 강하다. 시가 그에게는 정화기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작품에서는 그가 미치도록 시를 쓰는 것은 "그놈의 /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야"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놈의 / 냉기 섞인 추억 때문"이며, "아무리 누르고 눌러도 /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그놈의 불화살 같은 열정 때문"이라고 한다. 이쯤에 이르면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을 극복하고 시인 내면에 오랫동안 깃든 '외로움'이라거나 "냉기 섞인 추억"으로 시적 발화 지점의 결이 조금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비 오는 옥상에서 추억의 / 가장 향그런 순간을 만났지요 // 지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 푸른 보리밭이 철철철 보이고 //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도 / 끊길 듯 아스라이 보이고 // 유채꽃밭을 휘어도는 / 시냇물 소리도 굽이굽이 보이고 // 손매듭 굵고 까칠한 주름손에 / 잡혀 끌려가는 울음보도 보이고 // 서산마루 당산나무에 걸린 / 애틋한 첫사랑의 서성거림도 보이고 // 서낭당으로 향해 엉거주춤 / 매달려 가던 상여 끝 실연도 보이고.
- 「사랑아·117」 전문
그런데 초로에 든 박덕은의 시는 지나간 날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도 얼비친다. 「사랑아·117」에서 화자는 "비 오는 옥상에서 추억의 / 가장 향그런 순간을 만"난다. 물리적으로 옥상에서 보일 리 만무하지만 그의 그리움은 왠지 슬픔의 정조가 흐른다. "푸른 보리밭이 철철철 보이고"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도" 보이고, "유채꽃밭을 휘어도는 / 시냇물 소리도 굽이굽이 보"인다. 그리고 유년의 할머니 쯤으로 보이는 "손매듭 굵고 까칠한 주름손"에 "잡혀 끌려가는 울음보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서산마루 당산나무에 걸린 / 애틋한 첫사랑의 서성거림"과 "서낭당으로 향해 엉거주춤 / 매달려 가던 상여 끝 실연도 보"인다. 지난 시절의 애틋하지만, 슬프기조차 한 아름다운 날들을 회억하는 화자의 심사가 그것도 "비 오는 옥상에서 추억의 / 가장 향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었을까. 비 오는 날은 왠지 청승떨고 싶은 감정이 일어나기 좋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에서 유년과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박덕은이 이러한 정서의 뿌리에 깃든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설사 슬픈 추억일지라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사랑아」 연작시는 무려 600여 편에 이른다. 편편 마다 사랑의 표정이 다른 것에서 박덕은의 깊은 외로움과 그리움의 감정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느낄 수 있다. "교만도 싫다 / 계산도 싫다 / / 다만 / 낭만 하나만 / 옆구리에 끼고서 / 가자" 「사랑아」의 서시격인 「사랑아·1」에서 그의 사랑에 대한 표정과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시가 어떤 정치성이나 이념을 모두 배제한 순수한 감정과 정신으로 시를 쓰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사랑'을 중심 주제로 하여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낸 작품들을 앞에서 밝혔듯이 신적 존재에 대한 간절함으로도 읽을 수 있고,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애틋한 마음 등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인 작품 경향을 보여 왔다. 이에 비해 세월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인간 내면에 깃든 깊은 외로움과 그리움의 감정을 더욱 현현하는 느낌을 준다. 이는 보다 인간적인 감정에 충실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단독자 인간으로서의 근원적인 슬픔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산자락이 / 하루에 한두 번씩 / 마을을 찾는 것처럼 // 그리움은 / 하루에 몇 번씩 / 당신을 찾아간답니다 // 비록 / 문 밖에서만 / 서성이다가 돌아오곤 하지만 / 하루도 빼지 않고 / 다녀오지요 // 귀찮게 할 생각도 / 괴롭힐 어떤 생각도 없으니 / 안심하세요 // 다만 / 미치도록 애타하는 / 느낌들의 반란을 / 잠시라도 잠재우기 위해서일 뿐 // 오늘도 / 찾아가는 쓸쓸한 길 / 오늘도 / 되돌아오는 외로운 길.
- 「사랑 고백·1」 전문
「사랑 고백·1」에서 화자는 "하루에 한 번씩 / 당신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문 밖에서만 / 서성이다가 돌아오곤" 하는 사랑이다. 미치도록 애타는 사랑의 감정을 안고 있지만 차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사랑은 스토커의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귀찮게 할 생각도 / 괴롭힐 어떤 생각도 없으니 / 안심하세요"라는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화자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미치도록 애타하는 / 느낌들의 반란을 / 잠시라도 잠재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 찾아가는 쓸쓸한 길 / 오늘도 / 되돌아오는 외로운 길."이 아닐 수 없다. 순수하고 순결한 혼자만의 순애보적인 사랑인 것이다. 박덕은의 「사랑 고백」 연작은 실제의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보다 표백하려는 정신적 의지의 발로에서 펼쳐지는 사랑이라는 생각이 깊다. 그의 수많은 「사랑 고백」 연작을 읽게 되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고백·99」에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연인들의 사랑의 과정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랑하다가 오해가 생기는 일은 일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오해로 인해 "가슴 끓이며 / 누워 있"기 일쑤이다. 그럴 경우 이를 지켜보는 사람이 "너른 바다를 떠올려요 / 수많은 물결 안고 살아가는 / 저 늠름한 바다를 떠올"리라고 한다. "수많은 물결" 안은 바다는 서로 엉기고 있지만 '바다'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우뚝 솟은 산을 쳐다봐요" "힘들어 지칠지라도 / 인생 다 산 것처럼 / 시르죽한 표정 짓지 말아요"라고도 한다. 산은 "거대한 운무를 걸친 채"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고, 들판은 "생동감 넘치는" 것에서 생동거리는 에너지를 잃지 말라는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준다.
박덕은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감정은 「나를 사랑하나요?」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대상에게 묻기도 한다. "나를 사랑하나요?"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그러면서 "날 자유롭게 해줘요" "무슨 짓을 하든 / 간섭하지 말아요"라고 묻는 것은 "난 / 날개 달린 철새"이기 때문이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의 행태에 대해 말한다. 단 "난 / 날개 달린 철새"라는 단서를 달아 사랑의 자유로움을 노래한다. 사랑의 모습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 "나의 본능을 / 짓누르지 마세요" "숨 쉬는 어떤 순간에도 / 날 껴안아 주세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랑의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난 / 열정에 약한 초콜릿"이라고 한다. '초콜릿'은 열기에 약하므로 뜨거운 사랑에 녹아버린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이처럼 박덕은의 '사랑'의 관념은 감정, 즉 본능에 충실하다.
어떤 손길도 / 닿지 않은 숲 / 푸르름이 / 깔깔거리고 / 원시적 낭만이 / 꿈틀대는 곳 // 스스럼없이 / 원시족이 된 우리 / 가벼운 산책으로 / 시작한 데이트 / 삼림욕은 온 피부에 / 애정의 향기를 발라주었다 // 간혹 주고받은 키스가 / 솔바람까지 멈추게 하고 / 숨 멈출 듯한 설렘은 / 산새울음소리조차 / 풀숲 깊이 가라앉혀 버렸다.
- 「온전한 사랑·13」 전문
그렇다면 박덕은의 사랑시편에서 '온전한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온전한 사랑」 연작시를 살펴본다. 「온전한 사랑·13」에서 '우리'로 지칭되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손길도 / 닿지 않은 숲"으로 간다. 어떠한 손길도 닿지 않은 공간은 실제의 숲일 수도 있지만 둘만이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시적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 깊은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푸르름이 / 깔깔거리고 / 원시적 낭만이 / 꿈틀대는" 생명성이 넘치는 때묻지 않은, 세속의 공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우리'는 "스스럼없이 / 원시족"이 될 수 있다. 그야말로 지성소이며 누구의 간섭도 없는 이곳에서 키스를 나눌 수 있고 "숨 멈출 듯한 설렘은 / 산새울음소리조차 / 풀숲 깊이 가라앉"힌다. 성경에서 만나는 에덴동산 같은 원시의 공간이며, 순수하고 순결한 그런 곳이다. 주지하다시피 현대문명에서는 이러한 유토피아 같은 공간을 쉽게 만나지 못한다. 산새들도 소리를 죽이는, 오직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함께 할 수 있고, 세상의 어떤 불화와 불안이 존재하지 않는 지성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장소를 시인은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덕은 시인의 심연 깊숙이 깃든 결핍을 욕망하는 것이다.
생래적으로 박덕은의 내면에 깃든 욕망은 그가 갈구하는 어떤 지극한 그리움을 향한 힘으로 작용하는데, 「부치지 못한 편지」 연작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저 빗줄기 좀 봐요 / 마치 발을 / 세워 쳐놓은 듯 / 굵게도 내리네요 // 피아노 건반을 / 요란히 치듯 / 아침 내내 내리네요 // 비어 있는 벤취엔 / 하얀 눈부심이 / 반짝이는데도 // 뜨락 한 켠에 / 피어난 능소화가 / 소란을 떨고 있는데도 // 잔디 위로 튀어오른 / 회한들이 / 종종걸음으로 /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도 // 빗줄기는 좀처럼 / 수그러들지 않은 채 / 주룩주룩 내리네요 // 내 영혼 위로 내리는 / 폭포수처럼 /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 내리꽂는 / 내 안의 그리움처럼.
- 「부치지 못한 편지·48」 전문
「부치지 못한 편지·48」에서도 시적배경이 비오는 날이다. 아침 내내 내리는 굵은 빗줄기가 시인의 마음을 어떤 감정으로 휘말리게 한 것일까. 그의 시편에서 자주 비 오는 날에 감정의 동요가 나타나는 까닭이다. 비가 내리면 "비어 있는 벤취엔 / 하얀 눈부심이 / 반짝이"고, "능소화가 / 소란을 떨고", "잔디 위로 튀어오른 / 회한들이 / 종종걸음으로 /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럼에도 "빗줄기는 좀처럼 / 수그러들지 않은 채 /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비가 내려 만물이 생기발양하여 생명성을 드러내는데, 화자의 내면에서는 그것들과는 상관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여기에서 온갖 만물에게 생명처럼 내리는 비는 실제로 일어나는 기상현상이라고 하면, 그 비를 바라보는 비는 화자의 마음 속에 내리는 비는 영혼에 내리는 비이다. 실제의 비와 화자의 가슴 속을 적시는 비의 간극에 박덕은의 깊은 고뇌와 그 고뇌를 유발한 결핍이 있다. 결핍은 한정없이 허전한 화자의 그리움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내 영혼 위로 내리는 / 폭포수처럼 / 눈물 콧물 가리지 않고 / 내리꽂는 / 내 안의 그리움"이라고 토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박덕은이 시제를 「부치지 못한 편지」라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심연 가득히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홀로 내리는 비를 통해 뜨겁고, 허전한 영혼에 주룩주룩 비를 맞는 경건한 의식을 치룬다, 박덕은의 시편에서 '그리움'의 정서를 형상화시킨 작품은 아마 수천 편이 될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그
목차
목차
작가의 말
희년송/ 최승범
축하마당
1 바람은 시간을 털어낸다
안개
바람은 시간을 털어낸다
누이야 누이야
外出
거시기·1
타령·2
脈·1
脈·2
脈·3
脈·4
어떤 산술법
回想
행운목
수목장
금오도
여수항
어머니
사각기와무늬
할머니의 풍등
월식
한양도성
폐차장
우화羽化
단풍
을숙도
부둣가 노점상
전단지
말뚝
슬픔이 아문 자리
당신만은
2 케노시스
당신을 확실히 얻기 위해
당신의 방
하늘과 산바람
얼마나 좋겠어요
빈 종이
진실
사랑과 홍역
사랑과 문학
사랑과 정신
사랑과 마음
사랑과 영혼
살아 있는 기쁨
갇힘의 비밀
당신의 뜻
걸어 걸어 찾아온 성지
향수
지하철의 차창을 보며
길트기·1
길트기·2
이별의 길목에서
맡김의 노래
사실은
나는 매일 밤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어떤 정경
당신·1
당신·2
당신·4
당신·22
당신·49
당신·51
당신·65
당신·66
당신의 사랑 앞에서
둥지 높은 그리움·2
둥지 높은 그리움·4
3 바닥의 힘
사랑의 힘
빈 자리
대화
나와 당신과 봄
당신의 하늘
바닥의 힘
개나리길
다림질
수건
욕망
걸음의 방식
사랑아·1
사랑아·18
사랑아·117
사랑아·260
사랑아·321
사랑 고백·1
사랑 고백·99
낙엽처럼
나를 사랑하나요
열정·34
열정·44
열정·54
온전한 사랑·13
온전한 사랑·29
온전한 사랑·66
환자
4 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1
부치지 못한 편지·48
부치지 못한 편지·56
부치지 못한 편지·91
짝사랑·5
짝사랑·10
짝사랑·16
짝사랑·45
짝사랑·85
강·1
강·7
강·25
강·36
그리움아·4
그리움아·11
그리움아·16
그리움아·21
그리움아·24
그리움아·31
그리움아·34
그리움아·38
그리움아·41
그리움아·74
둑과 강물과 자유
봄비 오는 날
꽃의 기다림
솟구쳐, 솟구쳐, 솟구쳐
봄과 여름 사이
○해설
실존탐구와 기독교적 세계관, 그리움의 노래 /강경호
박덕은 프로필
박덕은 작품 연보 및 저서 발간 현황
저자
저자
전)전남대학교 교수
현)한실문예창작 지도교수
전남매일신문 오피니언 〈에세이〉 연재
광주매일신문 〈문학 마당〉 평설 연재
전국 박덕은 백일장 개최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새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현승 문학상 수상
항공 문학상 수상
여수 해양문학상 수상
계몽사 아동문학상 수상
대한시협 문학상 대상 수상
시인마을 문학상 대상 수상
타고르 문학상 대상 수상
모산 문학상 대상 수상
국제종합예술대전 대상 수상
국제현대미술우수작가전 대상 수상
한국창작문화예술대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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