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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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평설
상실과 견딤의 시학
- "무릎 닳은 타이어가 구르는 저녁에"
김 종
(시인, 화가)
언어는 습관적으로 숨을 쉬는가 하면 미만한 언어의 채도 위에 다양한 빛깔로 산란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의 그 모든 것은 하나도, 둘도, 셋도 언어에 달린 문제이다. 이처럼 문학이 언어에 기댄다는 말은 언어가 문학의 형성에 거의 절대적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간이역이 젖는 이유, 비 때문일까
언어에는 그 언어가 갖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볼거리를 만나거나 어울리게 되고 그들 볼거리와 어울리는 자리에는 그 자리에 맞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언어가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는 서사를 전제한 정신 작업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에 따른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시 쓰기 또한 그에 따른 표정과 생각을 통한 독자적인 작업이며 그것들의 세계를 인간의 일상으로 짚어나가는 작업이 문학임은 물론이다.
서정시의 주된 표정은 언어적 순수성에서 비롯되고 이를 중심에 둔 삶의 이야기들이 한가득 강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서정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이야기의 기착지로 조타하는 시적 특질로서의 작업이 시문학이라고 할 때 이를 의미화의 차원에서 관심 갖는 것이 문학을 살피고 이야기하는 평설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걷는 길에는 언제나 그 길에 따른 수많은 풍경과 이야기가 있다. 풍경은 대자연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십상이고 여기에 인간을 개입시키면 구성을 갖춘 저마다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원래 서정시는 시인이 전광석화와 같은 찰나적인 정감을 이야기의 개입 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점점 장형화 내지는 구조적인 길에 들어서면서 찰나적인 정감만을 표현하던 서정시가 길이와 구조를 갖춘 이야기로 몸 바꾼 것이며 그리고는 인간으로부터 흘러든 강물 같은 모습으로 읽히곤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작품에서 만나는 풍경과 이야기로 언어적 표정과 그 의미를 읽어가기 위해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책갈피를 넘겨 가며 문학에 담아낸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문학을 읽는 일은 시든, 소설이든, 시조든, 수필이든, 희곡이든 그들 작품 속에 담긴 저마다의 시적 서정성과 그 이야기를 읽는 일에 다름아니다.
겨드랑이에 찬바람이 파고든다
무릎이 닳았다
털 빠진 기관지처럼 추억을 걸러내지 못한다
플렛폼의 발자국이 성기고
몇몇 젊은 손이 다리를 놓고 망치를 챙겨 가지만
내려간 차단기에는 아이나 노인의 그림자가 듬성듬성 보일 뿐
간이역은 처마에 걸린 무다발처럼 바람을 말린다
고속 열차가 멈춤도 없이 벼락 칠 때
내 이마를 긋고 가는 온몸의 진동
마중 나온 달은 감나무 가지에 놀란 얼굴을 숨긴다
바람은 늘 기대를 몰고 와서
종횡으로 이어지고
철길 쫓다 속도에 기함하는 풀이파리
무명 옷 입던 사람들
바구니 아낙이 깊다
이웃은 연꽃 씨방처럼 비워둔 채
팔각정에 모인 낡은 지팡이들
보따리 헐거운 과거를 색칠하며
00댁 00양반 손짓할 것 같은
회억은 뇌리에 교차로마저 지울 수 없어
침목을 두드리며 간다
건널목에 꽂힌 깃발은 옛 파시를 부르고
창문에 퇴색된 프랑카드
객쩍은 인삿말이 쓸쓸하게 펄럭인다
영산강 변 배꽃 환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철길에 서면 공연히 눈물을 불러오는 것은
그리움 신경줄로 철길을 만들었기 때문 아닐까
햇노을을 들어 올리는 통근 열차에
산비둘기 늙은 새댁이 가슴 두근거리는 몽탄역
여물 꺼낸 워낭 소 마냥
시간 되새긴다
-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린 시인의 작품은 그의 종횡무진한 언어 구사에 대해 따로 언급할 자리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의 언어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적 다양성으로 출발하여 독자가 당황할 수도 있을 만큼의 솜씨를 매우 굳건하고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일차적으로 시인에게 언어가 풍부하다는 것은 그 언어를 따라 생각이나 이야기가 그만큼 자유분방하게 풀린다는 말에 다름 아니고 이 같은 현상은 흔히 젊은이들의 기질적 문제와 관련짓는 경우가 많았었다.
허나 임린 시인에게도 그가 구사한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활달한가는 그의 작품을 독서한 이는 저마다의 느낌 또한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에서도 그 같은 모습은 예외 없이 나타나고 그로 하여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의외의 생각까지도 들여다볼 만큼의 호기심을 갖는다.
작품은 '겨드랑이에 찬바람이 파고'드는 것에서 시작하고 무릎이 닮았다거나 '털 빠진 기관지처럼 추억을 걸러내지 못'했었다는 등 앞뒤 전후가 상당히 의외적인 상황을 견인하면서 '플랫폼의 발자국이 성기고/몇몇 젊은 손이 다리를 놓고 망치를 챙겨 가지만'에 와서 우리는 비로소 보이는 것 이상의 상황을 시적 의외성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언어적 표정에서 '내려간 차단기'를 만났다거나 동시에 '아이나 노인의 그림자가 듬성듬성'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간이역은 '처마에 걸린 무다발처럼 바람을 말'리거나 멈춤도 없이 벼락을 치는 고속열차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내 이마를 긋고 가는 온몸의 진동'이나 감나무 가지에 마중 나온 달이 '놀란 얼굴'을 숨긴다든지 등의 구절에서도 시적 의외성은 커지고 있다. 늘상 기개를 몰고 와서 종횡으로 이어지는 '바람'은 철길을 쫓다가 그 속도에 기함하는 풀 이파리나 바구니 깊이 무명옷 입던 사람들로 "이웃은 연꽃 씨방처럼 비워둔" 상태가 되고 보따리가 헐거운 과거를 색칠하면서 팔각정에 모여든 '낡은 지팡이들'까지 "회억은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퇴색된 채로 창문에 꽂힌 깃발을 앞세워 복잡한 컴퓨터 회로를 유유히 건너다니는 시인의 언어여행은 비록 간이역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래서인가 인사말도 객 쩍은 것이 되어 쓸쓸하게 펄럭이는 다음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상상만으로도 비가 내리는 분위기에 '철길에 서면 공연히 눈물을 불러오는 것'이면서 '영산강 변 배꽃 환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그리움의 신경줄은 그것으로 철길을 만들어 햇노을을 들어 올리는 통근열차에까지 '산비둘기 늙은 새댁'의 몽탄역 땜에 가슴 두근거리는 장면은 어쩌면 "여물 꺼낸 워낭 소마냥" 시간을 되새기는 것으로 작품은 대미大尾를 감는다. 어찌 이쯤에 와서 임린 시인이 요량한 젖어있는 간이역의 이유에 대하여 독자들 또한 궁금하지 않을 것인가. 제목부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간이역이 젖는 이유가 무엇일까'에서 시인은 역 자체를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의인화하고 있다.
쉽게 생각하여도 간이역이 젖는 이유는 단순히 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오랜 세월을 넘어 사람들이 흘리고 간 눈물이나 떠난 뒤에 돌아오지 않는 발걸음 혹은 시간의 축적까지가 빗물처럼 스며들어 있다. 시 속에서 간이역은 단순한 교통의 장소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리움과 상실의 기억이 집결한 심리적 공간임을 인지할 수 있다. 열차가 드나들어도 남은 것은 철길과 신호등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변 풍경들뿐이다.
시인은 이 같은 장면을 통해 "그리움의 신경줄"이라는 표현으로 더 큰 실감을 끌어올리고 철길은 물리적으로는 기찻길이지만 시적 세계에서는 내면을 물 흐르는 감정의 전류와 동일 의미는 아니었을까. 이 작품이 독자를 향한 쇠락한 간이역의 눈빛이 인간의 기억과 감정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며 지금은 방치된 쓸쓸한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이별과 만남이 교차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시인은 그 시절의 정서를 기차역의 '젖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우리로 하여금 간이역의 외로운 풍경 속에 자기 자신만의 추억을 투사하고 있다.
이 시는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적 삶의 파편들을 여과없이 피워올린 기록성이 강한 시이면서 시적 화자와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낸 발군의 작품이라 하겠다.
바람이 가을을 색칠 한다
퇴락한 공원
먼 길 돌아온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고
목책 뒤에서 잠투정하며
물푸레 가지를 흔든다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이
노파의 소식을 밟고 갔는지
시나브로 오가는 청설모는 눈이 짓물었다
가망 없다는 말 아랑곳없이
불안하게 견뎌온 시간
고치기엔 삭아버린 회색 그늘에서
몸 부리고 싶은 날 있다
눈비 바람
거절하지 않고 내어 준 잔등
풀려가는 몸이 뿌리로 내려가
지심을 따라가는 것 같다
모이를 놓고 가는 노파
앞발을 비비며 합장하는 청솔모
지나온 기억을 떠안고
지상의 기록이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리에 남은 잔상
잠 못 드는 의자
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
- 「낡은 의자에 대하여」
'잠 못 드는 의자'가 '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는 표현을 보면 시인이 새삼 생각하는 '낡은 의자'에 대해 독자들 또한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게 되리라. 작품의 시작은 퇴락한 공원을 '바람'이 '가을'을 색칠한다는 것이며 '먼 길 돌아온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놓'거나 '목책 뒤에서 잠투정하며/물푸레 가지를 흔든다'는 광경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작품이 말하는 계절이 '가을'이고 여기에 '퇴락한 공원'이라든지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고 잠투정한다"든지 "이빨 사이가 성긴 햇빛이 노파의 소식을 밟고 갔"다든지 "시나브로 오가는 청솔모는 눈이 짓물었다"는 표현 등에서 여러 현상과 풍경을 여실히 마주하게 된다.
잠 못 드는 의자가 앉은뱅이 꽃으로
우리가 작품에서 읽은 '가망 없다는 말 아랑곳없이' 불안하게 시간을 견뎌왔다든지 등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 조락을 건너고 견뎌야 하는 계절의 뒷모습을 그리 표현한 것이겠다. 생기生氣와 성장의 시간은 가고 지난날의 절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삭아버린 회색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화자 또한 '눈비 바람/거절하지 않고 내어준 잔등/풀려가는 몸이 뿌리로 내려가' 지심을 따라 '모이를 놓고'가는 '노파'를 응시하게 한다.
이때 앞발을 비비며 합장하는 청솔모를 겨냥하여 지나온 기억을 떠안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에 퇴색된 '잔상'처럼 지상의 기록으로 각인된 것을 독서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마주친 대목이 지상을 떠올린 '낡은 의자'이고 절정의 계절을 넘어서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은 퇴색한 지난날을 돌이키는 청솔모가 가망 없는 또 하나의 시간을 바라보며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을 불안하게 견뎌온 '노파'의 잔상들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는 자못 쓸쓸한 계절의 뒷모습이 지나온 기억 위에 오버랩되고 낡은 의자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임린 시인의 모습 또한 환청처럼 떠오르는 것은 우연 이상일 것이다.
「낡은 의자에 대하여」는 "가을 바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시작하여 "노파"와 "청설모", "낡은 의자"로 이어지면서 생의 쇠락과 자연의 순응을 그린 동시에 퇴락한 공원이 죽음마저도 자연스러운 순환 현상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 길 돌아온 바람"이 시간의 흐름 속으로 돌아오고 기억의 환기가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로 이동하면서 노쇠함과 공허함을 시각적 표현으로 접하게 된다.
거듭되지만 "청설모는 눈이 짓물었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작은 생명에게도 시간의 상처는 남는 법이고 "불안하게 견뎌온 시간"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자연의 또 다른 면을 노래한다고 생각한다. "지상의 기록이 퇴색되고" 기억과 존재의 소멸을 암시하는 자리에 "잠 못 드는 의자/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 등의 표현은 낡은 의자가 다시금 생명의 세계로 환생하는 매우 아름다운 설정이라 하겠고 소멸에서도 생의 잔향을 담아내면서 이에 퇴락과 노쇠 등의 단어들이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는 구절로 읽히고 절망이 아닌 포용과 변환이 소생의 미학으로 바뀌는 것을 대할 수 있었다.
노적가리에 쌓이는 비애
가슴에서 머리로 걷는 기억
멍청하지 않는 것 있다면
5·18의 모습
분신의 환영
발바닥에 피의 문양
성인으로 다 키운 애 둘
연잎 같은 첫 차에 매달려
금남로 총부리 속으로 사라진 후
기독병원 시체로 만난 자식
흰천을 들추니 죽어있었다
골수에 담고 갈 내 아이들
바구니 이고 손 잡혀
행상으로 키운 아들
오늘은 장날
오일장 역사
그을린 소금 주렴 뺨을 판다
오월이 맞다면
앞 세워보라 너희 애를
잊을 수 없는
내 눈 감겨도
참된 오열 거짓된 오월이 아니라면
아카시 향촉 터트리며 낮달 시위 '칼레'를 보아라.
- 「노점 어머니」
「노점 어머니」는 사회사적 증언시의 성격까지도 담보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단순히 한 어머니의 삶을 그린 것에 그치지 않는 이 작품은 그 어머니의 존재 위에 5·18의 역사적 상처를 겹치듯이 노래하고 있다. 시 속에서 어머니는 노점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소시민인데 그녀의 손길이나 젖은 작업화, 녹슨 철 같은 이미지들은 동시에 오랜 노동의 흔적과 빈곤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 삶의 고단함으로 이어지고 이를 넘어 '멍든 오월'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아픈 5·18의 집단적 기억과 만나게 된다.
"노적가리에 쌓이는 비애"로 시작하는 「노점 어머니」는 5·18의 다양한 장면들을 불러내면서 우리의 현대사를 가르는 분수령적 의미를 지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터에 무감각하지 않다면 "가슴에서 머리로 걷는 기억"을 어찌 지우고 살았을까 싶게 5·18의 세월은 심하게 말하면 원죄적(?)인가 싶을 만큼 가파르기만 했었고 그 틈세에서 시인들의 언어 또한 평탄할 수 없었다.
5·18을 떠올리면 우선하여 '분신의 환영'이 떠오르고 발 디딘 자리마다 '피의 문양'들이 새겨지는 것 같은 아픔을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광주'라 한다면 지나친 설정이라 할 것인가. 기독병원에서 만난 자식이 흰 천을 들춰보니 '죽어있었다'는 이야기는 먼 나라가 아닌 우리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호흡을 가파르게 한다. 화자는 바구니를 이고 손 잡혀 키운, '골수에 담고 갈' 자식을 주검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삶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적 고통이 확대 확산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시의 가장 강렬한 부분이 바로 개인적 체험과 집단적 행위의 교차점 위에 어머니의 삶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노점을 차리고 자신의 아픔을 삼켜 왔지만 그가 흘린 눈물은 한 가정의 눈물이 아니라 곧바로 민주화 운동의 희생과도 연결되는 눈물인 것이다. 시인은 이 같은 장치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가족이라는 단순 기억에 가두지 않고 사회 전체가 기억해야 할 증언의 광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머니를 하나의 타입으로 형상화한 시로 읽을 만하다. 노동이나 빈곤 나아가서는 역사적 폭력이 교차하는 지점에까지 한 개인이 흘린 눈물은 민족적 눈물로 확대되면서 그 눈물을 기록하고 증언하려는 시인의 윤리적 정신적 존재가 잘 노래된 작품이라 하겠다.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고 있다
뱃머리가 선착장에 들어설 때
배의 옆구리가 맞대일 때
낡은 자신의 몸을 던져
충돌을 막아내는 건 몇 켤레의 둥근 고무신이다
몸에 부딪힐 때마다 움찔 움찔 쏟아낸
통증의 눈물이 바다를 적실 것 같은
그때마다 바닷새도 놀라서 날개를 비껴 갔을
항구는 늘 기쁜 것과 힘든 것
아픈 것과 슬픈 것이 한데 엉켜 짠물이 되었다
목메 있는 건 뱃사람들의 억센 소리 뿐만 아니라
주인 잃은 아낙과 떨어진 신발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착장은 들고 나는 물때와
크고 작은 배들로 퍼렇게 출렁거렸다
퇴직한 타이어가 경호를 서고
조금 때엔 울컥이는 바다 마을
등대처럼 부풀어 쓸쓸해 보이는 저녁
간기 머금은 그을린 얼굴로
어쩌지 못한 말은 꺼지는 거품으로 날리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
항구 밖 뱃길을 보고 있다
항아가 굽는
타이어의 그림자
둥글었다 길쭉해졌다가 맨발로 달을 따라 나선다
- 「달에게로 간 타이어」
시작품의 품새로 보아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작품 시작부터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예견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고 있다"는 상황인식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음을 울만큼의 상황에 선착장에 뱃머리가 들어서는 것은 미구에 있을 어떤 일과의 암시 또한 의미한다고 하겠다.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박이 선착장에 들어서는 것은 접안과 맞물린 문제이고 늘상 충동이라는 상황 또한 가늠할 수 있다. 작품에서는 배의 옆구리가 맞대일 때 '낡은 자신의 몸을 던져' 충돌을 막아내는 건 몇 켤레의 '둥근 고무신'이라는 설정 자체가 더 큰 실감의 자리를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치나 운명의 밧줄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뱃사람들이 저당 잡힌 운명을 묶는 동안 그들이 내지르는 '억센 소리'가 이를 상징이라도 하듯 '주인 잃은 아낙과 떨어진 신발', 그리고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창은 들고나는 물때와 '크고 작은 배들로 퍼렇게 출렁거렸'고 그러다가 이 같은 상황은 이내 여느 풍경과 다를 바 없는 평온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리에 갈아 끼워서 폐기된 타이어가 '퇴직한 타이어'로 등장하고 그 타이어가 경호를 선다고 한 대목에서 선박 간의 간격이 어찌 유지되는가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선창을 채운 물길이 갯펄 저 멀리로 물러간 때를 조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밋밋하게 펼쳐진 갯펄을 보고 있노라면 '바다 마을'은 "등대처럼 부풀어"오르고 그마저 쓸쓸해 보이는 저녁 시간이 되면 '간기 머금은 그을린 얼굴'로 귀가하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멈칫거리는 말들을 '꺼지는 거품'처럼 날려버리고 고깃배를 기다리던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 '항구 밖 뱃길을 보고 있다'고 하였으니 삶의 현장이 이리도 아련하고 쓸쓸한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타이어의 그림자'를 굽는 '항아'는 산천경개를 비추는 아름다운 보름달을 상상 중에 그려보게 된다. 그것을 따라가기라도 하듯 "둥글었다 길쭉해졌다가 맨발로 달을 따라 나"서는 '타이어'는 하루의 어로를 마치고 귀가하는 한 사람의 어부가 아니겠는가. 우선 이처럼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가 읽히는 -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굴러가던 타이어가 버려지면서부터 바다, 더 멀리는 달로 향한다는 상상에 이르고 이는 언뜻 엉뚱한 듯 보이는 시적 언술이 사실상 인간 존재의 무의미한 부유를 그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타이어의 기능 자체는 더도 덜도 아닌 이동을 위한 운송의 도구이나 이 작품에서의 타이어는 제 역할을 상실한 채 해변에 버려져 떠도는 존재로 드러난다. 바람에 굴러가고 파도에 휩쓸리다가 도달한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닌 '달'이라는 초월적 공간이었다.
시인이 여기에서 굳이 '달'을 끌어온 이유는 도달할 수는 없지만 끝없는 동경을 표현한 상상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이어는 시인 자신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상으로 읽히고 사물의 본래성에 비추어 타이어는 제 기능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하는 존재로 어디론가 지향하고자 한 인간적 욕망은 항용 남아 있는 존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끝은 현실의 항구가 아닌 어쩌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달이라는 지점이며 그래서 이에서 촉발한 씁쓸한 허무를 실감을 더하여 읽어가게 한다.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선창 이야기가 아름다운 우리네 이웃들이고 이들의 이야기를 벼랑 끝에서 실감나게 담아낸 이 작품은 친근한 선창 풍경을 보여주면서 고깃배 기다리던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서 항구 밖 뱃길을 바라본다는 선창 풍경을 갯펄을 묻혀가면서 음미하게한 기억할만한 수작이라 하겠다.
죽 먹던 시절
알 수 없는 실웃음 젖 물리면 그쳐
가난을 내색 않고
파리한 울음소리로 애기 경전 읽어 냈다는 어머니
옹이진 손으로 바느질 삯 받아 등록금 내주시고
합격 소식에 대견해하시던 깡치 박힌 손
술로 가신 아버지에 발작하며
참던 어머니
달그림자 수굿한 어머니도
물끼 젖은 아내, 고만한 손자 둘 남기고
산딸나무 곁 아버지 곁에 가셨다
돌아보면 쓸쓸한 별이 흐리다
애써 커가는 아이들과 애옥살이 아내를 두고
직장을 그만 둘 수 없는 처지
수척한 달 그림자 같은 아내의 주름
얼굴을 쓰다 듬으면
아내의 부어있는 눈가가 젖곤 했다
- 「달과 같이」
시적 리얼리즘은 다가가서 음미하면 할수록 더 큰 실감을 동반하고 그들 속에 스민 핍진한 이야기를 한가득 누리도록 노래한 임린 시인이야말로 시의 진수를 무언중에 독서하게 한 시인임을 무언중에 인지하고 싶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사는 일이 어렵고 하루 세끼 해결하기조차 가파른 절벽이라 여기면서 도리없이 밥 대신 죽을 먹었다. 작품에서는 소상하지 않게 '죽 먹던 시절'이라 하였지만 먹는 것이 부실하다 보니 젖꼭지도 비어서 젖 빨던 아이는 노상 울면서 보채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왠지 이에서 등장한 "알 수 없는 실웃음"도 젖 물리면 그쳤다고 했다.
비록 공갈젖꼭지일 망정 물리는 것이 차라리 아이를 진정시키는 데 보탬이 되고 아이의 허기를 해결하는 일이 되었다는 얘기일까. 작품을 읽는 일만으로도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집안의 그림이 대충 그려지고 있다. 젖꼭지를 물리고 나서 거기에서 듣던 아기의 울음소리를 '애기 경전'으로 읽어냈다는 어머니는 바로 우리들 가장 가까이서 우리들에게 가슴을 열어 젖을 물리던 우리들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의 하루는 자식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옹이진 손으로' 삯바느질을 하셨었고 돈 몇 푼이라도 손에 잡히면 우선적으로 등록금 밑천에 넣으시던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일상적 전설이었다. 돈댈 일은 뒷전에 두고 합격 소식에만 그저 기뻐하시던 모습은 차라리 '성자'라는 말이 합당할 판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 뒤에는 하나의 공식처럼 술로 가신 아버지가 위치하고 이것들을 이겨내느라 인내하는 어머니에게 기다리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자식들 뒷바라지였다.
그 뒷감당이 어찌 평범한 여느 이야기에 비기겠는가. '달그림자 수긋한 어머니'라는 표현 뒤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삯바느질 하시는 어머니가 상상 중에 그려진다. 그러던 어머니도 '고만한 손자 둘 남기고' 각다분한 현실의 여러 일들을 뒤로 한 채 '산딸나무'가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이상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는 자주 등장하는 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작품을 읽는 우리가 물리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진실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화자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회억에 잠긴다.
'애써 커가는 아이들과 애옥살이 아내를 두고'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는 가장은 수척한 달그림자 같은 아내의 주름을 보면서 얼굴을 쓰다듬었고 그럴 때면 부어있는 아내의 눈가가 젖곤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면 부부가 공유한 인간적인 이심전심의 연민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손잡고 살아온 한 생의 물길이 가감 없이 뒤돌아 보이고 인간의 표정과 광경들이 실감나게 읽히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진실 때문이다.
이 시에서 달이라는 사물은 이전의 그 어떤 작품보다 훨씬 더 인격적이고 함유된 애도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여기서 달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단순 발광체가 아니라 지상을 떠나고서도 한없이 비추고 있는 어머니의 환영을 그리 표현한 것이리라. 그처럼 어머니는 달빛처럼 사라진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는 항상성으로 읽히고 달은 한 번도 지상에 내려오거나 머문 적이 없었지만 어두운 길을 한결같이 밝혀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세월을 가감없이 읽는다.
고국'이라는 화롯불로 가슴 뜨거워지는 사람들
어머니는 이제 지상에서는 부재이지만 자식의 마음에는 살아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존재 또한 꺼지지 않는 빛처럼 영원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달에 빗대면서 모성의 영속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시인만의 또 다른 의도로 달은 차고 기우는 순환의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죽음은 사라짐의 다른 말이지만 달빛처럼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는 사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래서 어머니의 상실 이후에도 여전히 빛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고 인간으로서 어머니의 손길은 지금은 사라졌으나 달빛처럼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 남아 영혼과 정신을 밝히고 인도하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떠나가고 상실된 존재를 향한 슬픔의 기록이자 부재중에도 이어지는 사랑과 그 힘의 정신을 그리 표현하고 증거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충만의 기억이 멀다
영혼에도 결핍 있다 보름달만 야망이 아니다
절망이 바닥을 치고 살 붙이려면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
거미줄도 동아줄로 얽힌 날 있다
상생의 경계로 다가서는 불안한 한 끼
간절한 틈새에서 영글지만
때때로 매지구름 막아서 유목이 어렵다
공단을 매개로 뭉쳐 고려인이
이루어 가는 신기루의 고비 사막
먼 길 외로움
군상을 이루어 낙타 고삐를 팽팽히 당긴다
고국에 두고 온 너의 별 나의 별 중에
작아도 밝은 길 내며 간다
모래 밥이 씹힐 때 밥은 달았다
시린 간극 바람벽에 웅크리고
한뎃잠에도 가슴 덥던
그들에게 궂은일 생생한 사투요 힘든 노역이다
기저 산업,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
노동의 빈 화덕에 가로등 환해진다.
별 헤며 신산한 시간을 다지고 있다
- 「고려인」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정체성을 확인하는 '고려인'이라는 자존심 높은 단어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갈래로 의미 짓기는 했어도 우리네 교포이면서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독립국가 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를 통틀어 그리 이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의미로야 918년에 왕건이 개성에 세운 나라의 백성들을 이르던 말이었는데 이 말이 주로는 "옛 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겨레"를 두루 통칭하던 말로 바뀌면서 조국에 대한 강한 향수가 깃든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고려인 당사자들은 '고려사람'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일부 현지 고려인 학자들과 한국에서는 '고려인'이라는 용어를 병용하는 실정이다. 대뜸 '고려인'이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이 역사적 형성 과정의 차이로 하여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자리 잡고 있다.
고려인들 대부분은 현지의 고국에 거주는 하지만 일부는 고향에 해당하는 구소련권을 벗어나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한국에까지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1920년대에 그 기원을 둔다고 하지만 이는 하나의 추정일뿐 정확한 발생과정은 미확인 상태이다. 1930년대에 소련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고려인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 나타났는데 그 때에 악명 높던 스탈린의 정치 탄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및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조치가 실행되던 때였다.
고려인들은 '군상을 이루어 낙타 고삐를 팽팽히 당기'면서 공단을 매개로 뭉치고 신기루 같은 머나먼 길을 고비 사막의 '외로움'을 앞세워 가고 또 갔다. 그런가 하면 '매지구름을 막아서' 간절한 틈새처럼 영글어 가던 '상생'의 경계를 '불안한 한 끼'처럼 챙기던 생존에의 높은 장벽은 끝날 줄 모르는 외로움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충만'을 떠올리고 '야망'을 느끼면서 그 기억마저 가물거릴 정도로 머나먼 유랑 위에 크나큰 영혼의 결핍처럼 떠오르는 보름달로 "바닥을 치고 살 붙이려면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의 절망을 넘어 거미줄을 동아줄처럼 벼리는 고려인들의 '고국'은 '두고 온 너의 별 중에 별'이었고 "작아도 밝은 길 내며" 가는 등대 같은 희망 하나를 기둥 세우는 일이었다.
'시린 간극 바람벽에 웅크리며' '한뎃잠에도 가슴'은 더웠었고 "고국에 두고 온 너의 별 나의 별 중에" '작아도 밝아도 길 내며' 가는 이는 다름 아닌 '궂은 일 힘든 노역'도 '생생한 사투'로 맞서는 우리의 고려인인 것을 절절한 목소리로 웅변하는 위의 시는 임린 시인이 동포애 위에 피워올린 거대한 봉홧불이었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시작되면서 멀다고 전제한 충만에의 기억은 모래 밥이 씹힐 때도 '밥은 달다'고 했었고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처럼 가슴과 가슴을 잇는 길이 놓이고 '노동의 빈 화덕'에 '가로등'처럼 환해지는 세상은 비록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노동도 놓치고 별을 헤며 귀가하는 길은 '신산한 시간'에의 길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가슴을 덥게 채운, 만져볼수록 따뜻한 고려인이라는 가슴으로 가고 가고 또 가는 인고와 자부심의 길이었을 것이다. 작품은 도도한 강물을 밀고 가듯 '고려인'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에 두고 영혼에도 결핍이 있고 보름달마저 야망으로 읽을 수 없었던 그래서 절망이 바닥을 치는 땅을 살붙이다가 떠나야 하는 '고려인'은 분명 눈물의 시간을 유랑하는 현실보다도 더욱 가열찬 '고국'이라는 화롯불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들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고려인이라는 이방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낯선 땅임에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우리네 동포들의 삶을 초상肖像하듯 그려내고 있다.
이 시는 또한 그들이 감내했을 애환과 뒤섞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고국을 잃은 사람들의 집단적 고향상실을 증거한 용어이며 여전히 하나의 피와 문화적 습속을 간직하면서 낯선 땅의 고단한 삶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뿌리 없이 부유하는 인간군상들의 삶에서 이들이 감내하는 쓸쓸함을 그리면서 우리네의 삶과 연결시켜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인간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늘상 떠도는 존재들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는 지역이나 종족의 문제를 넘어 보편적 디아스포라의 시학을 보여준 괄목할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발걸음이 저녁처럼 뜸하다
일당 팔만 원을 받고 파했다
예약이 없는 귀가에
진눈깨비 내린다
작업화가 젖은 발을 말린다
벨이 조용하다.
상처엔 좌판 주고 가신
어머니가 발라준 침이 명약이었다
가끔 거친 손으로 된장을 내밀었는데
싫어 집 나간
아들 찾아 사방으로 헤맸던 어머니
돌아가신 눈꽃이 내린다
성인 되어 차린 속이
헤아릴 수 없는 눈 속으로
걸어 들어 간 뒤에
분간할 수 없는
소리 들렸다 사라진다
구급차 소리 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함박눈이 푹푹 내린다
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놓친 후회도 소용 없었다
세상은 다시 조용하다
- 「무직」
대단한 리얼리즘이 체험 속에 녹아든 또 하나의 작품이 「무직」이다. 임린의 언어는 늘상 숨길 수 없는 현실에의 직절함에 나아가 있고 그 간극을 채우는 떨쳐낼 수 없는 감동이 풀잎처럼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머니가 명약이라며 침을 발라주던 시절의 이야기에는 가끔씩 거친 손으로 '된장'이 대신하기도 하였었다.
작업화에 젖은 발이 마르는 시간은
그런데 그것이 싫어 아들은 집을 나갔었고 그런 자식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나섰던 어머니는 지금은 타계하셨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는 꽃잎처럼 '눈꽃'이 내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쓸쓸함이 속절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눈발 속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지난날을 후회하며 속을 차린 한 사나이가 찾아 들어간 곳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는 '구급차 소리 울리'는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밝힌 일당 근로자의 팔만 원은 진눈깨비가 내리고 생기 없는 귀갓길은 더욱 어둡고 춥지만 작업화에 젖은 발이 마르는 시간은 어머니 생각이 사무치게 간절한 그리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시고는 오지 않는 어머니는 돌이킨다고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제 몸 하나' '붙박아' 두기 어려운 '중년의 가장'은 들렸다가 사라지는 소리처럼 다시는 보이지도 않는 그리고 놓친 후회도 소용이 없는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조용해지는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무력한 '아버지'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존재의 상실을 직시하는 위의 작품은 제목이 지시하듯 단순한 직업적 문제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시 작품은 내용으로 보아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가 그 자체로 무가치하게까지 취급되는 현실에다 아버지는 '죽음에 무직의 이름표를 단' 존재로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직업을 손 놓고 살았던 한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노동의 존엄이 무너지고 이들에 따라 사회적 지위마저 그같이 평가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발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삶의 근본 조건이자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의미로 직업이란 것을 잃는 순간부터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게 되고 그래서 작품 속의 아버지는 그 구조적 폭력에 짓눌려 소멸하는 존재로 읽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가 지닌 문학적 설득력은 아버지라는 개인의 상실을 넘어 시대적 초상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읽힌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화로 수많은 아버지들이 일자리를 잃고 그로 하여 존엄 또한 잃어가는 것을 빈번하게 목도하면서 "무직"이라는 말은 그 어떤 온기도 스밀 수 없는 차갑고 관료적인 말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인간의 삶 전체를 제한하거나 규정해 버리는 잔혹함을 낙인찍듯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 이면에 사람의 가치를 가름하는 '노동'과 이를 재화로만 평가하는 사회적 구조와 폭력성을 숨김없이 증거하는 '고발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을
이 빠진 해오라기 걷게 되면서 비 맞고 섰다
우장 입은 죽지에 휘어진 등
퇴화된 깃털 비옷이 말려 내는지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린다
모질게 끌던 폐지 카트를 멈추고
허리를 곧게 세워 보지만
강대나무 꺾이는 소리에 되감기는 삭신
바닥의 결핍을 안을 것처럼 지하로 접히는 데
돌 틈 물 불 개의치 않고 민들레 꽃씨
길을 내고 날린다
목관 치수에 몸피 맞추어
능소화 담벼락에 닳고 허물어진다
한세상 견디다가 하늘 새로 돌아간다면
수리의 몸 둘레에서 완판될 것 같은
마른 입술 가만한 울림
말을 짓기 전에 소리로
흩어 잡을 수 없는 말
이 세상 다가가서 최후를 말하라면
선몽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 「벼랑 새」
「벼랑 새」는 우선 어휘적으로 감이 오지를 않아 여러 곳을 뒤지게 되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골짜기를 이른다는 것이었고 '밤골'은 '벼랑새'로도 불리는 바 '벼랑 사이'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제목 상의 의미를 헤아리는 일이 답답한 독해 중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하람새'로도 불리는 '벼랑 새'는 골짜기가 벼랑으로 이루어져서 붙인 이름이라는 것. 이는 중세국어에 '벽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골짜기가 벽과 같은 벼랑 사이에 있다는 것에서 붙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읽은 '벼랑 새'는 굳이 어학적 의미에 갇힐 것이 아니며 작품을 읽어서 그 의미와 흐름을 살피고 만들어가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는 것이고 벼랑처럼 아슬아슬한 현실을 "모질게 끌던 폐지 카트를 멈추고/허리를 곧게 세워 보"려고 애쓰는,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리'는 광경을 작품을 통해 마주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경前景으로 '이 빠진 해오라기' 한 마리를 보여주면서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었고 풍경처럼 비 맞고 서 있는 광경이 처연하게 펼쳐진다. 우장 입은 죽지에 퇴화된 깃털, 휘어진 등이 두루 골판지 같은 노인의 휘청거리는 등허리와 오버랩되면서 시적 실감은 커지고 있다. 그런 계제에 "돌 틈 물 불 개의치 않고 민들레 꽃씨/길을 내고 날"리는 광경은 강퍅한 시간을 자애롭게 어루만지는 실루엣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몸피 맞춘 '목관 치수'라든지 담벼락에서 닳고 허물어지는 능소화 따위도 효과가 동일하기는 마찬가지다.
'티벳 벼랑'을 나는 새의 후손에게 치르는 육식 현장에서 그 자체로는 희생물이고 그 다음으로는 승천이 될 차례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비좁고 힘든 세상에서 살았지만 죽어서는 드넓은 하늘 새로 돌아간다면 수리의 몸 둘레에서 완판으로 생을 마친들 그의 승천은 입술은 말랐어도 '말을 짓기 전에 소리로' 흩어져서 잡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만한 울림'을 최후처럼 다가가서 사후의 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벼랑 새」는 노년과 죽음, 그리고 존재의 마지막 흔적을 "새"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고 쇠락 속에서도 존재를 지켜보는 시선 또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벼랑"이라는 단어가 추락 직전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곳에 "새"가 있었다는 것은 죽음과 생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넘으려는 존재의 의지적 상황을 그리 상징한 것이다. 작품이 말하는 이 벼랑 새는 실제의 조류이자 인간의 영혼을 그리 표현한 것으로 보이고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을/이 빠진 해오라기"를 빗속에 서 있는 상처 입은 인간으로 그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빠진 해오라기'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무너진 존엄이나 노쇠한 육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우장 입은 죽지에 휘어진 등/퇴화된 깃털 비옷이 말려" 한때는 날던 새가 이제는 땅에 머물며 비에 젖은 등을 노인의 등줄기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린다"는 구절은 하나의 비유로도 탁월하지만 얇고 약한 그러나 여전히 버티고 서 있는 생명체에의 질감이 "민들레 꽃씨/길을 내고 날린다" 등을 효과적으로 밑받쳐 주면서 그 끝자리에서 여전히 확산과 번식을 멈추지 않는 "벼랑"은 그냥 절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이 출발하는 장소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자연의 움직임과 인간 존재의 운신 여부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목관 치수에 몸피 맞추어/능소화 담벼락에 닳고 허물어진다"는 인간의 삶이 "악기의 음관"처럼 하나의 공명체가 되어 자연의 소리에 섞이게 되고 "닳고 허물어진다"는 표현에 나아가 사라짐이 아닌 소리로의 귀의를 새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결말에서 "이 세상 다가가서 최후를 말하라면/선몽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를 읽게 되는데 이는 표현상으로는 애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탁월하다.
벼랑 끝의 새는 침묵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날으며 자신의 마지막 소리를 내는 존재로 남는다는 사실에서 소멸의 문턱에서 인간은 여전히 생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과 퇴락과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변주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며 하나의 소리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촉각적·청각적 이미지가 병치 된 "비옷", "골판지", "목관", "마른 입술의 울림" 등의 감각적 언어가 서로서로 어울리면서 시의 밀도는 높아지고 노년-새-소리-자연이라는 연쇄적 상징 구조가 언어 이전의 생명성을 '말을 짓기 전의 소리로' 탐색하는 구절들이어서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줄 풀린 강아지가 흠흠거린다
향내를 맡는가 했더니 용변인가 보다
사료를 먹기까지 인변으로 키우던 개
사육하다가 사육되어버린 먹이의 변화
똘똘아 하고 불러보지만
외면하다가
뒤돌아보는 순간 줄에 묶이어
똥오줌도 맘대로 못하는 세상
끌려가며 뚝뚝 군산 열도처럼 떨어뜨린다
더러운 세상 흰 소리 낑낑거린다
사람은 교육하지만 개 돼지는 사육된다는 말에
다스리기 보다 지켜달라는 저 눈
감정을 꼬리에 싣고
소리나 행동으로 의사소통할 뿐
정작 말 못하는 동물
짖으면 시끄럽다고 성대를 따버리는
주인의 당근과 회초리가 무서워
주인에게 삶과 죽음을 온전히 맡기고
쫓겨나면 갈 곳 없는 종
상실과 견딤의 시학
- "무릎 닳은 타이어가 구르는 저녁에"
김 종
(시인, 화가)
언어는 습관적으로 숨을 쉬는가 하면 미만한 언어의 채도 위에 다양한 빛깔로 산란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에의 그 모든 것은 하나도, 둘도, 셋도 언어에 달린 문제이다. 이처럼 문학이 언어에 기댄다는 말은 언어가 문학의 형성에 거의 절대적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간이역이 젖는 이유, 비 때문일까
언어에는 그 언어가 갖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면 다양한 볼거리를 만나거나 어울리게 되고 그들 볼거리와 어울리는 자리에는 그 자리에 맞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언어가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는 서사를 전제한 정신 작업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에 따른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시 쓰기 또한 그에 따른 표정과 생각을 통한 독자적인 작업이며 그것들의 세계를 인간의 일상으로 짚어나가는 작업이 문학임은 물론이다.
서정시의 주된 표정은 언어적 순수성에서 비롯되고 이를 중심에 둔 삶의 이야기들이 한가득 강물을 이루어 흘러간다. 서정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이야기의 기착지로 조타하는 시적 특질로서의 작업이 시문학이라고 할 때 이를 의미화의 차원에서 관심 갖는 것이 문학을 살피고 이야기하는 평설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걷는 길에는 언제나 그 길에 따른 수많은 풍경과 이야기가 있다. 풍경은 대자연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십상이고 여기에 인간을 개입시키면 구성을 갖춘 저마다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원래 서정시는 시인이 전광석화와 같은 찰나적인 정감을 이야기의 개입 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점점 장형화 내지는 구조적인 길에 들어서면서 찰나적인 정감만을 표현하던 서정시가 길이와 구조를 갖춘 이야기로 몸 바꾼 것이며 그리고는 인간으로부터 흘러든 강물 같은 모습으로 읽히곤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작품에서 만나는 풍경과 이야기로 언어적 표정과 그 의미를 읽어가기 위해 침을 묻힌 손가락으로 책갈피를 넘겨 가며 문학에 담아낸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문학을 읽는 일은 시든, 소설이든, 시조든, 수필이든, 희곡이든 그들 작품 속에 담긴 저마다의 시적 서정성과 그 이야기를 읽는 일에 다름아니다.
겨드랑이에 찬바람이 파고든다
무릎이 닳았다
털 빠진 기관지처럼 추억을 걸러내지 못한다
플렛폼의 발자국이 성기고
몇몇 젊은 손이 다리를 놓고 망치를 챙겨 가지만
내려간 차단기에는 아이나 노인의 그림자가 듬성듬성 보일 뿐
간이역은 처마에 걸린 무다발처럼 바람을 말린다
고속 열차가 멈춤도 없이 벼락 칠 때
내 이마를 긋고 가는 온몸의 진동
마중 나온 달은 감나무 가지에 놀란 얼굴을 숨긴다
바람은 늘 기대를 몰고 와서
종횡으로 이어지고
철길 쫓다 속도에 기함하는 풀이파리
무명 옷 입던 사람들
바구니 아낙이 깊다
이웃은 연꽃 씨방처럼 비워둔 채
팔각정에 모인 낡은 지팡이들
보따리 헐거운 과거를 색칠하며
00댁 00양반 손짓할 것 같은
회억은 뇌리에 교차로마저 지울 수 없어
침목을 두드리며 간다
건널목에 꽂힌 깃발은 옛 파시를 부르고
창문에 퇴색된 프랑카드
객쩍은 인삿말이 쓸쓸하게 펄럭인다
영산강 변 배꽃 환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철길에 서면 공연히 눈물을 불러오는 것은
그리움 신경줄로 철길을 만들었기 때문 아닐까
햇노을을 들어 올리는 통근 열차에
산비둘기 늙은 새댁이 가슴 두근거리는 몽탄역
여물 꺼낸 워낭 소 마냥
시간 되새긴다
-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린 시인의 작품은 그의 종횡무진한 언어 구사에 대해 따로 언급할 자리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의 언어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적 다양성으로 출발하여 독자가 당황할 수도 있을 만큼의 솜씨를 매우 굳건하고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일차적으로 시인에게 언어가 풍부하다는 것은 그 언어를 따라 생각이나 이야기가 그만큼 자유분방하게 풀린다는 말에 다름 아니고 이 같은 현상은 흔히 젊은이들의 기질적 문제와 관련짓는 경우가 많았었다.
허나 임린 시인에게도 그가 구사한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고 활달한가는 그의 작품을 독서한 이는 저마다의 느낌 또한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에서도 그 같은 모습은 예외 없이 나타나고 그로 하여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의외의 생각까지도 들여다볼 만큼의 호기심을 갖는다.
작품은 '겨드랑이에 찬바람이 파고'드는 것에서 시작하고 무릎이 닮았다거나 '털 빠진 기관지처럼 추억을 걸러내지 못'했었다는 등 앞뒤 전후가 상당히 의외적인 상황을 견인하면서 '플랫폼의 발자국이 성기고/몇몇 젊은 손이 다리를 놓고 망치를 챙겨 가지만'에 와서 우리는 비로소 보이는 것 이상의 상황을 시적 의외성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달라지는 언어적 표정에서 '내려간 차단기'를 만났다거나 동시에 '아이나 노인의 그림자가 듬성듬성' 보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 간이역은 '처마에 걸린 무다발처럼 바람을 말'리거나 멈춤도 없이 벼락을 치는 고속열차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내 이마를 긋고 가는 온몸의 진동'이나 감나무 가지에 마중 나온 달이 '놀란 얼굴'을 숨긴다든지 등의 구절에서도 시적 의외성은 커지고 있다. 늘상 기개를 몰고 와서 종횡으로 이어지는 '바람'은 철길을 쫓다가 그 속도에 기함하는 풀 이파리나 바구니 깊이 무명옷 입던 사람들로 "이웃은 연꽃 씨방처럼 비워둔" 상태가 되고 보따리가 헐거운 과거를 색칠하면서 팔각정에 모여든 '낡은 지팡이들'까지 "회억은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퇴색된 채로 창문에 꽂힌 깃발을 앞세워 복잡한 컴퓨터 회로를 유유히 건너다니는 시인의 언어여행은 비록 간이역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래서인가 인사말도 객 쩍은 것이 되어 쓸쓸하게 펄럭이는 다음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상상만으로도 비가 내리는 분위기에 '철길에 서면 공연히 눈물을 불러오는 것'이면서 '영산강 변 배꽃 환한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그리움의 신경줄은 그것으로 철길을 만들어 햇노을을 들어 올리는 통근열차에까지 '산비둘기 늙은 새댁'의 몽탄역 땜에 가슴 두근거리는 장면은 어쩌면 "여물 꺼낸 워낭 소마냥" 시간을 되새기는 것으로 작품은 대미大尾를 감는다. 어찌 이쯤에 와서 임린 시인이 요량한 젖어있는 간이역의 이유에 대하여 독자들 또한 궁금하지 않을 것인가. 제목부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간이역이 젖는 이유가 무엇일까'에서 시인은 역 자체를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의인화하고 있다.
쉽게 생각하여도 간이역이 젖는 이유는 단순히 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오랜 세월을 넘어 사람들이 흘리고 간 눈물이나 떠난 뒤에 돌아오지 않는 발걸음 혹은 시간의 축적까지가 빗물처럼 스며들어 있다. 시 속에서 간이역은 단순한 교통의 장소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리움과 상실의 기억이 집결한 심리적 공간임을 인지할 수 있다. 열차가 드나들어도 남은 것은 철길과 신호등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변 풍경들뿐이다.
시인은 이 같은 장면을 통해 "그리움의 신경줄"이라는 표현으로 더 큰 실감을 끌어올리고 철길은 물리적으로는 기찻길이지만 시적 세계에서는 내면을 물 흐르는 감정의 전류와 동일 의미는 아니었을까. 이 작품이 독자를 향한 쇠락한 간이역의 눈빛이 인간의 기억과 감정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며 지금은 방치된 쓸쓸한 공간이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이별과 만남이 교차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시인은 그 시절의 정서를 기차역의 '젖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변환하여 우리로 하여금 간이역의 외로운 풍경 속에 자기 자신만의 추억을 투사하고 있다.
이 시는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적 삶의 파편들을 여과없이 피워올린 기록성이 강한 시이면서 시적 화자와 독자와의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낸 발군의 작품이라 하겠다.
바람이 가을을 색칠 한다
퇴락한 공원
먼 길 돌아온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고
목책 뒤에서 잠투정하며
물푸레 가지를 흔든다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이
노파의 소식을 밟고 갔는지
시나브로 오가는 청설모는 눈이 짓물었다
가망 없다는 말 아랑곳없이
불안하게 견뎌온 시간
고치기엔 삭아버린 회색 그늘에서
몸 부리고 싶은 날 있다
눈비 바람
거절하지 않고 내어 준 잔등
풀려가는 몸이 뿌리로 내려가
지심을 따라가는 것 같다
모이를 놓고 가는 노파
앞발을 비비며 합장하는 청솔모
지나온 기억을 떠안고
지상의 기록이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리에 남은 잔상
잠 못 드는 의자
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
- 「낡은 의자에 대하여」
'잠 못 드는 의자'가 '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는 표현을 보면 시인이 새삼 생각하는 '낡은 의자'에 대해 독자들 또한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게 되리라. 작품의 시작은 퇴락한 공원을 '바람'이 '가을'을 색칠한다는 것이며 '먼 길 돌아온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놓'거나 '목책 뒤에서 잠투정하며/물푸레 가지를 흔든다'는 광경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작품이 말하는 계절이 '가을'이고 여기에 '퇴락한 공원'이라든지 "바람이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고 잠투정한다"든지 "이빨 사이가 성긴 햇빛이 노파의 소식을 밟고 갔"다든지 "시나브로 오가는 청솔모는 눈이 짓물었다"는 표현 등에서 여러 현상과 풍경을 여실히 마주하게 된다.
잠 못 드는 의자가 앉은뱅이 꽃으로
우리가 작품에서 읽은 '가망 없다는 말 아랑곳없이' 불안하게 시간을 견뎌왔다든지 등은 이미 절정을 넘어서 조락을 건너고 견뎌야 하는 계절의 뒷모습을 그리 표현한 것이겠다. 생기生氣와 성장의 시간은 가고 지난날의 절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삭아버린 회색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화자 또한 '눈비 바람/거절하지 않고 내어준 잔등/풀려가는 몸이 뿌리로 내려가' 지심을 따라 '모이를 놓고'가는 '노파'를 응시하게 한다.
이때 앞발을 비비며 합장하는 청솔모를 겨냥하여 지나온 기억을 떠안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에 퇴색된 '잔상'처럼 지상의 기록으로 각인된 것을 독서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마주친 대목이 지상을 떠올린 '낡은 의자'이고 절정의 계절을 넘어서 먼지와 낙엽 몇 장 얹어 놓은 퇴색한 지난날을 돌이키는 청솔모가 가망 없는 또 하나의 시간을 바라보며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을 불안하게 견뎌온 '노파'의 잔상들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는 자못 쓸쓸한 계절의 뒷모습이 지나온 기억 위에 오버랩되고 낡은 의자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임린 시인의 모습 또한 환청처럼 떠오르는 것은 우연 이상일 것이다.
「낡은 의자에 대하여」는 "가을 바람"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로 시작하여 "노파"와 "청설모", "낡은 의자"로 이어지면서 생의 쇠락과 자연의 순응을 그린 동시에 퇴락한 공원이 죽음마저도 자연스러운 순환 현상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 길 돌아온 바람"이 시간의 흐름 속으로 돌아오고 기억의 환기가 "이빨 사이가 성긴 햇살"로 이동하면서 노쇠함과 공허함을 시각적 표현으로 접하게 된다.
거듭되지만 "청설모는 눈이 짓물었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작은 생명에게도 시간의 상처는 남는 법이고 "불안하게 견뎌온 시간"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안과 자연의 또 다른 면을 노래한다고 생각한다. "지상의 기록이 퇴색되고" 기억과 존재의 소멸을 암시하는 자리에 "잠 못 드는 의자/주저앉아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 등의 표현은 낡은 의자가 다시금 생명의 세계로 환생하는 매우 아름다운 설정이라 하겠고 소멸에서도 생의 잔향을 담아내면서 이에 퇴락과 노쇠 등의 단어들이 "앉은뱅이 꽃으로 핀다"는 구절로 읽히고 절망이 아닌 포용과 변환이 소생의 미학으로 바뀌는 것을 대할 수 있었다.
노적가리에 쌓이는 비애
가슴에서 머리로 걷는 기억
멍청하지 않는 것 있다면
5·18의 모습
분신의 환영
발바닥에 피의 문양
성인으로 다 키운 애 둘
연잎 같은 첫 차에 매달려
금남로 총부리 속으로 사라진 후
기독병원 시체로 만난 자식
흰천을 들추니 죽어있었다
골수에 담고 갈 내 아이들
바구니 이고 손 잡혀
행상으로 키운 아들
오늘은 장날
오일장 역사
그을린 소금 주렴 뺨을 판다
오월이 맞다면
앞 세워보라 너희 애를
잊을 수 없는
내 눈 감겨도
참된 오열 거짓된 오월이 아니라면
아카시 향촉 터트리며 낮달 시위 '칼레'를 보아라.
- 「노점 어머니」
「노점 어머니」는 사회사적 증언시의 성격까지도 담보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단순히 한 어머니의 삶을 그린 것에 그치지 않는 이 작품은 그 어머니의 존재 위에 5·18의 역사적 상처를 겹치듯이 노래하고 있다. 시 속에서 어머니는 노점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소시민인데 그녀의 손길이나 젖은 작업화, 녹슨 철 같은 이미지들은 동시에 오랜 노동의 흔적과 빈곤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 삶의 고단함으로 이어지고 이를 넘어 '멍든 오월'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아픈 5·18의 집단적 기억과 만나게 된다.
"노적가리에 쌓이는 비애"로 시작하는 「노점 어머니」는 5·18의 다양한 장면들을 불러내면서 우리의 현대사를 가르는 분수령적 의미를 지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터에 무감각하지 않다면 "가슴에서 머리로 걷는 기억"을 어찌 지우고 살았을까 싶게 5·18의 세월은 심하게 말하면 원죄적(?)인가 싶을 만큼 가파르기만 했었고 그 틈세에서 시인들의 언어 또한 평탄할 수 없었다.
5·18을 떠올리면 우선하여 '분신의 환영'이 떠오르고 발 디딘 자리마다 '피의 문양'들이 새겨지는 것 같은 아픔을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어머니이고 '광주'라 한다면 지나친 설정이라 할 것인가. 기독병원에서 만난 자식이 흰 천을 들춰보니 '죽어있었다'는 이야기는 먼 나라가 아닌 우리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호흡을 가파르게 한다. 화자는 바구니를 이고 손 잡혀 키운, '골수에 담고 갈' 자식을 주검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노점상으로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삶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적 고통이 확대 확산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시의 가장 강렬한 부분이 바로 개인적 체험과 집단적 행위의 교차점 위에 어머니의 삶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노점을 차리고 자신의 아픔을 삼켜 왔지만 그가 흘린 눈물은 한 가정의 눈물이 아니라 곧바로 민주화 운동의 희생과도 연결되는 눈물인 것이다. 시인은 이 같은 장치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가족이라는 단순 기억에 가두지 않고 사회 전체가 기억해야 할 증언의 광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어머니를 하나의 타입으로 형상화한 시로 읽을 만하다. 노동이나 빈곤 나아가서는 역사적 폭력이 교차하는 지점에까지 한 개인이 흘린 눈물은 민족적 눈물로 확대되면서 그 눈물을 기록하고 증언하려는 시인의 윤리적 정신적 존재가 잘 노래된 작품이라 하겠다.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고 있다
뱃머리가 선착장에 들어설 때
배의 옆구리가 맞대일 때
낡은 자신의 몸을 던져
충돌을 막아내는 건 몇 켤레의 둥근 고무신이다
몸에 부딪힐 때마다 움찔 움찔 쏟아낸
통증의 눈물이 바다를 적실 것 같은
그때마다 바닷새도 놀라서 날개를 비껴 갔을
항구는 늘 기쁜 것과 힘든 것
아픈 것과 슬픈 것이 한데 엉켜 짠물이 되었다
목메 있는 건 뱃사람들의 억센 소리 뿐만 아니라
주인 잃은 아낙과 떨어진 신발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착장은 들고 나는 물때와
크고 작은 배들로 퍼렇게 출렁거렸다
퇴직한 타이어가 경호를 서고
조금 때엔 울컥이는 바다 마을
등대처럼 부풀어 쓸쓸해 보이는 저녁
간기 머금은 그을린 얼굴로
어쩌지 못한 말은 꺼지는 거품으로 날리고
고깃배를 기다리는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
항구 밖 뱃길을 보고 있다
항아가 굽는
타이어의 그림자
둥글었다 길쭉해졌다가 맨발로 달을 따라 나선다
- 「달에게로 간 타이어」
시작품의 품새로 보아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작품 시작부터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예견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고 있다"는 상황인식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선창이 벼랑 끝에서 울음을 울만큼의 상황에 선착장에 뱃머리가 들어서는 것은 미구에 있을 어떤 일과의 암시 또한 의미한다고 하겠다.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박이 선착장에 들어서는 것은 접안과 맞물린 문제이고 늘상 충동이라는 상황 또한 가늠할 수 있다. 작품에서는 배의 옆구리가 맞대일 때 '낡은 자신의 몸을 던져' 충돌을 막아내는 건 몇 켤레의 '둥근 고무신'이라는 설정 자체가 더 큰 실감의 자리를 발언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치나 운명의 밧줄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듯 뱃사람들이 저당 잡힌 운명을 묶는 동안 그들이 내지르는 '억센 소리'가 이를 상징이라도 하듯 '주인 잃은 아낙과 떨어진 신발', 그리고 '몇 켤레의 눈물이 갯메꽃으로 피어' 선창은 들고나는 물때와 '크고 작은 배들로 퍼렇게 출렁거렸'고 그러다가 이 같은 상황은 이내 여느 풍경과 다를 바 없는 평온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리에 갈아 끼워서 폐기된 타이어가 '퇴직한 타이어'로 등장하고 그 타이어가 경호를 선다고 한 대목에서 선박 간의 간격이 어찌 유지되는가가 선연하게 드러난다.
선창을 채운 물길이 갯펄 저 멀리로 물러간 때를 조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밋밋하게 펼쳐진 갯펄을 보고 있노라면 '바다 마을'은 "등대처럼 부풀어"오르고 그마저 쓸쓸해 보이는 저녁 시간이 되면 '간기 머금은 그을린 얼굴'로 귀가하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멈칫거리는 말들을 '꺼지는 거품'처럼 날려버리고 고깃배를 기다리던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 '항구 밖 뱃길을 보고 있다'고 하였으니 삶의 현장이 이리도 아련하고 쓸쓸한가를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타이어의 그림자'를 굽는 '항아'는 산천경개를 비추는 아름다운 보름달을 상상 중에 그려보게 된다. 그것을 따라가기라도 하듯 "둥글었다 길쭉해졌다가 맨발로 달을 따라 나"서는 '타이어'는 하루의 어로를 마치고 귀가하는 한 사람의 어부가 아니겠는가. 우선 이처럼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가 읽히는 -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굴러가던 타이어가 버려지면서부터 바다, 더 멀리는 달로 향한다는 상상에 이르고 이는 언뜻 엉뚱한 듯 보이는 시적 언술이 사실상 인간 존재의 무의미한 부유를 그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타이어의 기능 자체는 더도 덜도 아닌 이동을 위한 운송의 도구이나 이 작품에서의 타이어는 제 역할을 상실한 채 해변에 버려져 떠도는 존재로 드러난다. 바람에 굴러가고 파도에 휩쓸리다가 도달한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닌 '달'이라는 초월적 공간이었다.
시인이 여기에서 굳이 '달'을 끌어온 이유는 도달할 수는 없지만 끝없는 동경을 표현한 상상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이어는 시인 자신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은유적 표상으로 읽히고 사물의 본래성에 비추어 타이어는 제 기능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하는 존재로 어디론가 지향하고자 한 인간적 욕망은 항용 남아 있는 존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끝은 현실의 항구가 아닌 어쩌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달이라는 지점이며 그래서 이에서 촉발한 씁쓸한 허무를 실감을 더하여 읽어가게 한다.
'달에게로 간 타이어'는 선창 이야기가 아름다운 우리네 이웃들이고 이들의 이야기를 벼랑 끝에서 실감나게 담아낸 이 작품은 친근한 선창 풍경을 보여주면서 고깃배 기다리던 갈매기도 바위 끝에 앉아서 항구 밖 뱃길을 바라본다는 선창 풍경을 갯펄을 묻혀가면서 음미하게한 기억할만한 수작이라 하겠다.
죽 먹던 시절
알 수 없는 실웃음 젖 물리면 그쳐
가난을 내색 않고
파리한 울음소리로 애기 경전 읽어 냈다는 어머니
옹이진 손으로 바느질 삯 받아 등록금 내주시고
합격 소식에 대견해하시던 깡치 박힌 손
술로 가신 아버지에 발작하며
참던 어머니
달그림자 수굿한 어머니도
물끼 젖은 아내, 고만한 손자 둘 남기고
산딸나무 곁 아버지 곁에 가셨다
돌아보면 쓸쓸한 별이 흐리다
애써 커가는 아이들과 애옥살이 아내를 두고
직장을 그만 둘 수 없는 처지
수척한 달 그림자 같은 아내의 주름
얼굴을 쓰다 듬으면
아내의 부어있는 눈가가 젖곤 했다
- 「달과 같이」
시적 리얼리즘은 다가가서 음미하면 할수록 더 큰 실감을 동반하고 그들 속에 스민 핍진한 이야기를 한가득 누리도록 노래한 임린 시인이야말로 시의 진수를 무언중에 독서하게 한 시인임을 무언중에 인지하고 싶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이 사는 일이 어렵고 하루 세끼 해결하기조차 가파른 절벽이라 여기면서 도리없이 밥 대신 죽을 먹었다. 작품에서는 소상하지 않게 '죽 먹던 시절'이라 하였지만 먹는 것이 부실하다 보니 젖꼭지도 비어서 젖 빨던 아이는 노상 울면서 보채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왠지 이에서 등장한 "알 수 없는 실웃음"도 젖 물리면 그쳤다고 했다.
비록 공갈젖꼭지일 망정 물리는 것이 차라리 아이를 진정시키는 데 보탬이 되고 아이의 허기를 해결하는 일이 되었다는 얘기일까. 작품을 읽는 일만으로도 화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집안의 그림이 대충 그려지고 있다. 젖꼭지를 물리고 나서 거기에서 듣던 아기의 울음소리를 '애기 경전'으로 읽어냈다는 어머니는 바로 우리들 가장 가까이서 우리들에게 가슴을 열어 젖을 물리던 우리들의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의 하루는 자식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옹이진 손으로' 삯바느질을 하셨었고 돈 몇 푼이라도 손에 잡히면 우선적으로 등록금 밑천에 넣으시던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일상적 전설이었다. 돈댈 일은 뒷전에 두고 합격 소식에만 그저 기뻐하시던 모습은 차라리 '성자'라는 말이 합당할 판이었다. 이 같은 이야기 뒤에는 하나의 공식처럼 술로 가신 아버지가 위치하고 이것들을 이겨내느라 인내하는 어머니에게 기다리는 것은 끝도 갓도 없는 자식들 뒷바라지였다.
그 뒷감당이 어찌 평범한 여느 이야기에 비기겠는가. '달그림자 수긋한 어머니'라는 표현 뒤에는 밤늦은 시간까지 삯바느질 하시는 어머니가 상상 중에 그려진다. 그러던 어머니도 '고만한 손자 둘 남기고' 각다분한 현실의 여러 일들을 뒤로 한 채 '산딸나무'가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이상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는 자주 등장하는 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작품을 읽는 우리가 물리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진실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화자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는 회억에 잠긴다.
'애써 커가는 아이들과 애옥살이 아내를 두고'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는 가장은 수척한 달그림자 같은 아내의 주름을 보면서 얼굴을 쓰다듬었고 그럴 때면 부어있는 아내의 눈가가 젖곤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면 부부가 공유한 인간적인 이심전심의 연민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손잡고 살아온 한 생의 물길이 가감 없이 뒤돌아 보이고 인간의 표정과 광경들이 실감나게 읽히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닌 언어적 진실 때문이다.
이 시에서 달이라는 사물은 이전의 그 어떤 작품보다 훨씬 더 인격적이고 함유된 애도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여기서 달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단순 발광체가 아니라 지상을 떠나고서도 한없이 비추고 있는 어머니의 환영을 그리 표현한 것이리라. 그처럼 어머니는 달빛처럼 사라진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비추는 항상성으로 읽히고 달은 한 번도 지상에 내려오거나 머문 적이 없었지만 어두운 길을 한결같이 밝혀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세월을 가감없이 읽는다.
고국'이라는 화롯불로 가슴 뜨거워지는 사람들
어머니는 이제 지상에서는 부재이지만 자식의 마음에는 살아 있으며, 그래서 인간의 존재 또한 꺼지지 않는 빛처럼 영원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달에 빗대면서 모성의 영속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고 시인만의 또 다른 의도로 달은 차고 기우는 순환의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죽음은 사라짐의 다른 말이지만 달빛처럼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는 사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래서 어머니의 상실 이후에도 여전히 빛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고 인간으로서 어머니의 손길은 지금은 사라졌으나 달빛처럼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 남아 영혼과 정신을 밝히고 인도하는 존재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떠나가고 상실된 존재를 향한 슬픔의 기록이자 부재중에도 이어지는 사랑과 그 힘의 정신을 그리 표현하고 증거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충만의 기억이 멀다
영혼에도 결핍 있다 보름달만 야망이 아니다
절망이 바닥을 치고 살 붙이려면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
거미줄도 동아줄로 얽힌 날 있다
상생의 경계로 다가서는 불안한 한 끼
간절한 틈새에서 영글지만
때때로 매지구름 막아서 유목이 어렵다
공단을 매개로 뭉쳐 고려인이
이루어 가는 신기루의 고비 사막
먼 길 외로움
군상을 이루어 낙타 고삐를 팽팽히 당긴다
고국에 두고 온 너의 별 나의 별 중에
작아도 밝은 길 내며 간다
모래 밥이 씹힐 때 밥은 달았다
시린 간극 바람벽에 웅크리고
한뎃잠에도 가슴 덥던
그들에게 궂은일 생생한 사투요 힘든 노역이다
기저 산업,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
노동의 빈 화덕에 가로등 환해진다.
별 헤며 신산한 시간을 다지고 있다
- 「고려인」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정체성을 확인하는 '고려인'이라는 자존심 높은 단어가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갈래로 의미 짓기는 했어도 우리네 교포이면서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독립국가 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를 통틀어 그리 이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의미로야 918년에 왕건이 개성에 세운 나라의 백성들을 이르던 말이었는데 이 말이 주로는 "옛 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겨레"를 두루 통칭하던 말로 바뀌면서 조국에 대한 강한 향수가 깃든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고려인 당사자들은 '고려사람'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일부 현지 고려인 학자들과 한국에서는 '고려인'이라는 용어를 병용하는 실정이다. 대뜸 '고려인'이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한인들이 역사적 형성 과정의 차이로 하여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자리 잡고 있다.
고려인들 대부분은 현지의 고국에 거주는 하지만 일부는 고향에 해당하는 구소련권을 벗어나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한국에까지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1920년대에 그 기원을 둔다고 하지만 이는 하나의 추정일뿐 정확한 발생과정은 미확인 상태이다. 1930년대에 소련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고려인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 나타났는데 그 때에 악명 높던 스탈린의 정치 탄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및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조치가 실행되던 때였다.
고려인들은 '군상을 이루어 낙타 고삐를 팽팽히 당기'면서 공단을 매개로 뭉치고 신기루 같은 머나먼 길을 고비 사막의 '외로움'을 앞세워 가고 또 갔다. 그런가 하면 '매지구름을 막아서' 간절한 틈새처럼 영글어 가던 '상생'의 경계를 '불안한 한 끼'처럼 챙기던 생존에의 높은 장벽은 끝날 줄 모르는 외로움과 맞닿아 있기도 했다. '충만'을 떠올리고 '야망'을 느끼면서 그 기억마저 가물거릴 정도로 머나먼 유랑 위에 크나큰 영혼의 결핍처럼 떠오르는 보름달로 "바닥을 치고 살 붙이려면 떠나야 하는 이방인들"의 절망을 넘어 거미줄을 동아줄처럼 벼리는 고려인들의 '고국'은 '두고 온 너의 별 중에 별'이었고 "작아도 밝은 길 내며" 가는 등대 같은 희망 하나를 기둥 세우는 일이었다.
'시린 간극 바람벽에 웅크리며' '한뎃잠에도 가슴'은 더웠었고 "고국에 두고 온 너의 별 나의 별 중에" '작아도 밝아도 길 내며' 가는 이는 다름 아닌 '궂은 일 힘든 노역'도 '생생한 사투'로 맞서는 우리의 고려인인 것을 절절한 목소리로 웅변하는 위의 시는 임린 시인이 동포애 위에 피워올린 거대한 봉홧불이었을지도 모른다. 작품이 시작되면서 멀다고 전제한 충만에의 기억은 모래 밥이 씹힐 때도 '밥은 달다'고 했었고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처럼 가슴과 가슴을 잇는 길이 놓이고 '노동의 빈 화덕'에 '가로등'처럼 환해지는 세상은 비록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노동도 놓치고 별을 헤며 귀가하는 길은 '신산한 시간'에의 길이었으리라.
그러면서도 가슴을 덥게 채운, 만져볼수록 따뜻한 고려인이라는 가슴으로 가고 가고 또 가는 인고와 자부심의 길이었을 것이다. 작품은 도도한 강물을 밀고 가듯 '고려인'이라는 주제어를 중심에 두고 영혼에도 결핍이 있고 보름달마저 야망으로 읽을 수 없었던 그래서 절망이 바닥을 치는 땅을 살붙이다가 떠나야 하는 '고려인'은 분명 눈물의 시간을 유랑하는 현실보다도 더욱 가열찬 '고국'이라는 화롯불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들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고려인이라는 이방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낯선 땅임에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우리네 동포들의 삶을 초상肖像하듯 그려내고 있다.
이 시는 또한 그들이 감내했을 애환과 뒤섞인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은 단순 호칭이 아니라 고국을 잃은 사람들의 집단적 고향상실을 증거한 용어이며 여전히 하나의 피와 문화적 습속을 간직하면서 낯선 땅의 고단한 삶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뿌리 없이 부유하는 인간군상들의 삶에서 이들이 감내하는 쓸쓸함을 그리면서 우리네의 삶과 연결시켜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인간은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은 늘상 떠도는 존재들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시는 지역이나 종족의 문제를 넘어 보편적 디아스포라의 시학을 보여준 괄목할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발걸음이 저녁처럼 뜸하다
일당 팔만 원을 받고 파했다
예약이 없는 귀가에
진눈깨비 내린다
작업화가 젖은 발을 말린다
벨이 조용하다.
상처엔 좌판 주고 가신
어머니가 발라준 침이 명약이었다
가끔 거친 손으로 된장을 내밀었는데
싫어 집 나간
아들 찾아 사방으로 헤맸던 어머니
돌아가신 눈꽃이 내린다
성인 되어 차린 속이
헤아릴 수 없는 눈 속으로
걸어 들어 간 뒤에
분간할 수 없는
소리 들렸다 사라진다
구급차 소리 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함박눈이 푹푹 내린다
제 몸 하나 붙박아 둘 중력의 직장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놓친 후회도 소용 없었다
세상은 다시 조용하다
- 「무직」
대단한 리얼리즘이 체험 속에 녹아든 또 하나의 작품이 「무직」이다. 임린의 언어는 늘상 숨길 수 없는 현실에의 직절함에 나아가 있고 그 간극을 채우는 떨쳐낼 수 없는 감동이 풀잎처럼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머니가 명약이라며 침을 발라주던 시절의 이야기에는 가끔씩 거친 손으로 '된장'이 대신하기도 하였었다.
작업화에 젖은 발이 마르는 시간은
그런데 그것이 싫어 아들은 집을 나갔었고 그런 자식을 사방팔방으로 찾아 나섰던 어머니는 지금은 타계하셨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밖에서는 꽃잎처럼 '눈꽃'이 내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쓸쓸함이 속절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눈발 속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지난날을 후회하며 속을 차린 한 사나이가 찾아 들어간 곳은 분간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는 '구급차 소리 울리'는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밝힌 일당 근로자의 팔만 원은 진눈깨비가 내리고 생기 없는 귀갓길은 더욱 어둡고 춥지만 작업화에 젖은 발이 마르는 시간은 어머니 생각이 사무치게 간절한 그리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시고는 오지 않는 어머니는 돌이킨다고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제 몸 하나' '붙박아' 두기 어려운 '중년의 가장'은 들렸다가 사라지는 소리처럼 다시는 보이지도 않는 그리고 놓친 후회도 소용이 없는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조용해지는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무력한 '아버지'를 중심에 두고 사회적 존재의 상실을 직시하는 위의 작품은 제목이 지시하듯 단순한 직업적 문제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시 작품은 내용으로 보아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가 그 자체로 무가치하게까지 취급되는 현실에다 아버지는 '죽음에 무직의 이름표를 단' 존재로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직업을 손 놓고 살았던 한 개인의 초상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노동의 존엄이 무너지고 이들에 따라 사회적 지위마저 그같이 평가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발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삶의 근본 조건이자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의미로 직업이란 것을 잃는 순간부터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게 되고 그래서 작품 속의 아버지는 그 구조적 폭력에 짓눌려 소멸하는 존재로 읽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가 지닌 문학적 설득력은 아버지라는 개인의 상실을 넘어 시대적 초상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읽힌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업화로 수많은 아버지들이 일자리를 잃고 그로 하여 존엄 또한 잃어가는 것을 빈번하게 목도하면서 "무직"이라는 말은 그 어떤 온기도 스밀 수 없는 차갑고 관료적인 말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인간의 삶 전체를 제한하거나 규정해 버리는 잔혹함을 낙인찍듯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 이면에 사람의 가치를 가름하는 '노동'과 이를 재화로만 평가하는 사회적 구조와 폭력성을 숨김없이 증거하는 '고발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을
이 빠진 해오라기 걷게 되면서 비 맞고 섰다
우장 입은 죽지에 휘어진 등
퇴화된 깃털 비옷이 말려 내는지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린다
모질게 끌던 폐지 카트를 멈추고
허리를 곧게 세워 보지만
강대나무 꺾이는 소리에 되감기는 삭신
바닥의 결핍을 안을 것처럼 지하로 접히는 데
돌 틈 물 불 개의치 않고 민들레 꽃씨
길을 내고 날린다
목관 치수에 몸피 맞추어
능소화 담벼락에 닳고 허물어진다
한세상 견디다가 하늘 새로 돌아간다면
수리의 몸 둘레에서 완판될 것 같은
마른 입술 가만한 울림
말을 짓기 전에 소리로
흩어 잡을 수 없는 말
이 세상 다가가서 최후를 말하라면
선몽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 「벼랑 새」
「벼랑 새」는 우선 어휘적으로 감이 오지를 않아 여러 곳을 뒤지게 되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골짜기를 이른다는 것이었고 '밤골'은 '벼랑새'로도 불리는 바 '벼랑 사이'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제목 상의 의미를 헤아리는 일이 답답한 독해 중의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하람새'로도 불리는 '벼랑 새'는 골짜기가 벼랑으로 이루어져서 붙인 이름이라는 것. 이는 중세국어에 '벽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골짜기가 벽과 같은 벼랑 사이에 있다는 것에서 붙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읽은 '벼랑 새'는 굳이 어학적 의미에 갇힐 것이 아니며 작품을 읽어서 그 의미와 흐름을 살피고 만들어가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는 것이고 벼랑처럼 아슬아슬한 현실을 "모질게 끌던 폐지 카트를 멈추고/허리를 곧게 세워 보"려고 애쓰는,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리'는 광경을 작품을 통해 마주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경前景으로 '이 빠진 해오라기' 한 마리를 보여주면서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었고 풍경처럼 비 맞고 서 있는 광경이 처연하게 펼쳐진다. 우장 입은 죽지에 퇴화된 깃털, 휘어진 등이 두루 골판지 같은 노인의 휘청거리는 등허리와 오버랩되면서 시적 실감은 커지고 있다. 그런 계제에 "돌 틈 물 불 개의치 않고 민들레 꽃씨/길을 내고 날"리는 광경은 강퍅한 시간을 자애롭게 어루만지는 실루엣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몸피 맞춘 '목관 치수'라든지 담벼락에서 닳고 허물어지는 능소화 따위도 효과가 동일하기는 마찬가지다.
'티벳 벼랑'을 나는 새의 후손에게 치르는 육식 현장에서 그 자체로는 희생물이고 그 다음으로는 승천이 될 차례인 것이다. 현실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비좁고 힘든 세상에서 살았지만 죽어서는 드넓은 하늘 새로 돌아간다면 수리의 몸 둘레에서 완판으로 생을 마친들 그의 승천은 입술은 말랐어도 '말을 짓기 전에 소리로' 흩어져서 잡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만한 울림'을 최후처럼 다가가서 사후의 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면 「벼랑 새」는 노년과 죽음, 그리고 존재의 마지막 흔적을 "새"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고 쇠락 속에서도 존재를 지켜보는 시선 또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벼랑"이라는 단어가 추락 직전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곳에 "새"가 있었다는 것은 죽음과 생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넘으려는 존재의 의지적 상황을 그리 상징한 것이다. 작품이 말하는 이 벼랑 새는 실제의 조류이자 인간의 영혼을 그리 표현한 것으로 보이고 "소낙비에 구겨지기도 했을/이 빠진 해오라기"를 빗속에 서 있는 상처 입은 인간으로 그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빠진 해오라기'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무너진 존엄이나 노쇠한 육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우장 입은 죽지에 휘어진 등/퇴화된 깃털 비옷이 말려" 한때는 날던 새가 이제는 땅에 머물며 비에 젖은 등을 노인의 등줄기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골판지 같은 노인의 몸이 휘청거린다"는 구절은 하나의 비유로도 탁월하지만 얇고 약한 그러나 여전히 버티고 서 있는 생명체에의 질감이 "민들레 꽃씨/길을 내고 날린다" 등을 효과적으로 밑받쳐 주면서 그 끝자리에서 여전히 확산과 번식을 멈추지 않는 "벼랑"은 그냥 절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이 출발하는 장소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자연의 움직임과 인간 존재의 운신 여부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목관 치수에 몸피 맞추어/능소화 담벼락에 닳고 허물어진다"는 인간의 삶이 "악기의 음관"처럼 하나의 공명체가 되어 자연의 소리에 섞이게 되고 "닳고 허물어진다"는 표현에 나아가 사라짐이 아닌 소리로의 귀의를 새삼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결말에서 "이 세상 다가가서 최후를 말하라면/선몽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를 읽게 되는데 이는 표현상으로는 애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탁월하다.
벼랑 끝의 새는 침묵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날으며 자신의 마지막 소리를 내는 존재로 남는다는 사실에서 소멸의 문턱에서 인간은 여전히 생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과 퇴락과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변주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 속으로 돌아가며 하나의 소리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촉각적·청각적 이미지가 병치 된 "비옷", "골판지", "목관", "마른 입술의 울림" 등의 감각적 언어가 서로서로 어울리면서 시의 밀도는 높아지고 노년-새-소리-자연이라는 연쇄적 상징 구조가 언어 이전의 생명성을 '말을 짓기 전의 소리로' 탐색하는 구절들이어서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줄 풀린 강아지가 흠흠거린다
향내를 맡는가 했더니 용변인가 보다
사료를 먹기까지 인변으로 키우던 개
사육하다가 사육되어버린 먹이의 변화
똘똘아 하고 불러보지만
외면하다가
뒤돌아보는 순간 줄에 묶이어
똥오줌도 맘대로 못하는 세상
끌려가며 뚝뚝 군산 열도처럼 떨어뜨린다
더러운 세상 흰 소리 낑낑거린다
사람은 교육하지만 개 돼지는 사육된다는 말에
다스리기 보다 지켜달라는 저 눈
감정을 꼬리에 싣고
소리나 행동으로 의사소통할 뿐
정작 말 못하는 동물
짖으면 시끄럽다고 성대를 따버리는
주인의 당근과 회초리가 무서워
주인에게 삶과 죽음을 온전히 맡기고
쫓겨나면 갈 곳 없는 종
목차
목차
아픈 손가락 / 차례
제1부 밥보다 좋았던 밥
밥 보다 좋았던 밥
달과 같이
부재
무직
빗물
수염 풀
어린 징 소리
쉬 소리는 시 같아
어머니의 눈물
달을 세貰로 얻을 수 있다면
신화와 목마
유전의 의미
사라진 지문
빈 마음에
산동네의 겨울
플라타너스
가벼운 초승달
노점 어머니
제2부 불편한 사육
불편한 사육
봄밤이 익는다
비밀의 날개
수국
신가리 낚시터
신발에 대하여
매화
업는다는 것
연꽃밭 서호에서
벚꽃 트럭
섬
팬터마임
한철이네요
한 집에 둘
기이한 평화 운주사
풀잎
양동사람들
제3부 낡은 의자에 대하여
낡은 의자에 대하여
바람바위를 걷는다
백련지 얼룩거미
서창나루는 강의 아이 뒤채며 영산강으로 흐른다
빈 깡통을 들고 유통기한을 보는 습관이 있다, 나를 보는 것처럼
시간을 만지다
어느 탐험가의 죽음
새벽 바다
웰다잉
바람이 한 쪽으로 분다
바람은 기다림이 아니다
벼랑 새
쇄루우灑?雨
박의 함수函數
달에게로 간 타이어
염소 등에 앉은 점모시나비
할미꽃
즈드랏둬티
제4부 씁쓸하고 씁쓸한 것
쓸쓸하고 씁쓸한 것
아웃사이더
가시 장미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멍 난 돌이 무슨 말할까
통증의 귀
고려인
마로니에 프렌즈
각도가 없는 나무
지하 주차장
풀이 꺾이면
알레르기 빗방울
어제의 다리가 되어
오동도
잠 속의 잠
위험危險한 손
우편함
투명한 것이 부른 산새
서린아
효린아
평설
상실과 견딤의 시학/ 김종
제1부 밥보다 좋았던 밥
밥 보다 좋았던 밥
달과 같이
부재
무직
빗물
수염 풀
어린 징 소리
쉬 소리는 시 같아
어머니의 눈물
달을 세貰로 얻을 수 있다면
신화와 목마
유전의 의미
사라진 지문
빈 마음에
산동네의 겨울
플라타너스
가벼운 초승달
노점 어머니
제2부 불편한 사육
불편한 사육
봄밤이 익는다
비밀의 날개
수국
신가리 낚시터
신발에 대하여
매화
업는다는 것
연꽃밭 서호에서
벚꽃 트럭
섬
팬터마임
한철이네요
한 집에 둘
기이한 평화 운주사
풀잎
양동사람들
제3부 낡은 의자에 대하여
낡은 의자에 대하여
바람바위를 걷는다
백련지 얼룩거미
서창나루는 강의 아이 뒤채며 영산강으로 흐른다
빈 깡통을 들고 유통기한을 보는 습관이 있다, 나를 보는 것처럼
시간을 만지다
어느 탐험가의 죽음
새벽 바다
웰다잉
바람이 한 쪽으로 분다
바람은 기다림이 아니다
벼랑 새
쇄루우灑?雨
박의 함수函數
달에게로 간 타이어
염소 등에 앉은 점모시나비
할미꽃
즈드랏둬티
제4부 씁쓸하고 씁쓸한 것
쓸쓸하고 씁쓸한 것
아웃사이더
가시 장미
간이역 젖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멍 난 돌이 무슨 말할까
통증의 귀
고려인
마로니에 프렌즈
각도가 없는 나무
지하 주차장
풀이 꺾이면
알레르기 빗방울
어제의 다리가 되어
오동도
잠 속의 잠
위험危險한 손
우편함
투명한 것이 부른 산새
서린아
효린아
평설
상실과 견딤의 시학/ 김종
저자
저자
임린
시인 임 린(본명 임인택)
· 광주 출생
· 2018년 《시와사람》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광주문인협회 올해의 작품상 수상
· 시와사람 시학상 수상
· 시집 『시時와 시詩』 『아픈 손가락』
· 광주 출생
· 2018년 《시와사람》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광주문인협회 올해의 작품상 수상
· 시와사람 시학상 수상
· 시집 『시時와 시詩』 『아픈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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