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하나(오늘의 시와사람 172)
황애라 제3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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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 작품론
황애라 시인의 제2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박덕은(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황애라 시인은 문예창작반인 한실문예창작에 와서 2011년 6월 14일 첫 시 「향수」를 발표했다. 이후 필자가 지도 교수로 있는 부드런 문학회에 매주 한 편씩 성실히 꾸준하게 시 창작품을 발표했다.
황애라 시인은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상(2015년 3월)을 비롯하여, 비바비 문학상(2015년 6월), 하동국제문화제 문학상(2015년 9월), 한양대 ERICA 문학상 우수상(2015년 10월), 한민족 통일 문예제전 문학상(2015년 10월),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문학상(2015년 10월), 충주문학관 문학상 왕중왕전 우수상(2015년 12월), 빛창 문학상(2016년 2월), 안양 창작시 문학상(2016년 5월),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 시 부문(2016년 6월), 나주예술문화상(2016년 10월), 용아 박용철 백일장 시 부문(2017년 6월), 한민족통일문예대전 문학상(2017년 9월), 가락시장 공모전 문학상(2018년 3월), 예술문화상 문학상(2018년 11월), 서울 지하철 문학상(2019년 8월), 박덕은 전국 백일장 문학상(2019년 11월), 동서 문학상 맥심상(2020년 10월), 삼행시 문학상 동상(2021년 4월), 부천시 문학상 우수상(2021년 5월), 대덕 백일장 장려상(2021년 6월), 인성의 향 디카시 문학상 장려상(2021년 11월), 독도 문예대전 특선(2021년 11월), 노계 문학상 특별상(2021년 12월), 남명문화제 시화문학상 산해정인성문화진흥회상(2022년 6월), 제1회 김해예총 시화전 문학상 문예상(2022년 6월), 제6회 경남고성 국제한글디카시 장려상(2023년 5월), 치유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2023년 8월), 디카시 문학상(2023년 12월), 평택사랑 전국 백일장 차하(2025년 6월) 등을 연달아 수상했다.
황애라 시인의 첫 시집은 제1부 목사골 오일장, 제2부 책갈피 단풍, 제3부 너도바람꽃, 제4부 어쩌면, 제5부 당신의 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시집에 이어, 도전하는 두 번째 시집, 과연 그 세계는 어떻게 펼쳐질까.
그리고, 황애라 시인의 시 표현 기법은 어떠할까.
자, 지금부터 그녀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행복한 탐구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노인의 마당에는 모판의 모가 가득하다
물이 부족해 논으로 갈 수 없는 모는
작은 모판에서 주인의 마음만 애타게 한다
작약꽃 시드는데 붉은 장미 더욱 흐드러지고
모도 그새 많이 자랐다
바람의 밀린 잠이 나른하게 달라붙는 오후
봄날과 초록은 슬금슬금 제 키를 높이며
푸른 연대기 쓰기 위해
마르지 않는 햇살 끌어당겨
맑고 환한 등 타고 오른다
비가 오지 않아 논에 댈 물이 없다며
속이 타들어 가는 노인은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쓰러진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무심한 기다림만 타들어 가고
여름 창문 힘겹게 열고 나온 한숨이 걷고 있다
비 올 바람이 한두 번 불었지만
비를 데려오지는 못했다
바닥까지 쩍쩍 갈라진
물의 빈방들 때문에
후두둑 후두둑 과하게 흘러내리는
물의 고집스런 발목이
방향을 탐색하듯 귀에서 자란다
녹음은 짙어지고
아내가 좋아한 꽃들은 한창 피어대는데
이 꽃들 지기 전에
대문으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다
착잡한 얼굴 되어 푸념 섞인 말만 되풀이한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난날을 말하곤 하지만
되돌이표처럼 날아오르다 허공에 튕길 뿐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어스름에 멱살 잡혀
무너지는 그믐 같은 마음
말갛게 씻으려고 보름 달빛 찾는데
늙어 고집스런 밤은 어찌된 일인지
슬하에 어둠만 데리고 있다
홀로 밥을 먹고 아침을 맞고
다시 밤을 맞이한다
함께한 흔적 희미해지고
혼자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때 올지도 모른다
애증의 순간들 점점이 떠다니다
밤그늘에 잠긴다.
- 「흔적의 그늘」 전문
제1회 치유문학상 전국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노인의 삶과 고독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한 농촌의 상황과 병든 아내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주요 정서로 다루고 있다. 시는 아픔과 슬픔의 지층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무늬들을 담아야 한다. 날것의 느낌을 시적인 질감과 색채로 풀어내며 시적인 운율을 입혀야 한다. 그리하여 무음無音의 활자 속에서 소리가 들리고 맛(느낌)이 느껴져야 한다. 그러려면 시적 대상을 조명하는 시인의 렌즈가 남과 달라야 한다. 평면의 그림을 단순한 사각의 프레임으로만 읽지 말고 입체감을 덧칠해 새롭게 탄생시킬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독특한 시야에서 상황도 사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일련의 노력들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시적 화자는 논으로 옮기지 못한 모판의 모를 바라보고 있다. "물이 부족해 논으로 갈 수 없는 모"가 마당에 놓여 있다. "작은 모판에서 주인의 마음만 애타게" 하고 있다. 발랄한 봄날을 열어야 하는데 모판은 아직까지 마당에 있다. "노인은/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쓰러진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무심한 기다림만 타들어 가고" 있는데 "아내가 좋아한 꽃들은 한창 피어대는데/ 이 꽃들 지기 전에/ 대문으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은데 반가운 소식 한 점 없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봄날에 논으로 옮기지 못한 모판의 모와 쓰러진 아내의 모습이 병치되어 있어 애틋함이 고조된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비의는 감당하기 버겁다. 시는 감당하기 힘든 그 벅참 속으로 들어가 비의를 탐색하며 삶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하여 비의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 시적 화자는 아내와 "함께한 흔적 희미해지고/ 혼자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때 올지도" 모른다며 밤을 맞이하고 있다. 어둠에 잠기는 노인과 애증의 순간들이 점점이 흩어져 안쓰럽다. 노인은 마당에 가득한 모를 보며 애타는 마음을 달래고,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아내의 부재 사이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시적 화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외로움이 교차하는 쓸쓸하고 착잡한 심정을 자연물의 변화와 비유를 통해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땅끝과 바다는
늘 접점에서 실랑이한다
파도가 그렇다
시작과 끝은 서로 모호해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
결국은 서로 껴안게 된다
길잡이가 필요한 시간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기로 한다
하루도 쉼 없이 보내는 서로의 신호
닿을 수 있을 때까지
긴긴 기다림이 된다
아침이면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어둠 내리면 안식할 곳 찾는
그 접점의 끝에
오늘도 간절히 서 있다.
- 「간절곶」 전문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간절곶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맞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찾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이곳은 포항 호미곶보다 1분, 강릉 정동진보다 5분 정도 일찍 해가 떠오른다. 간절곶(艮絶串)의 곶(串)은 육지에서 바다를 향하여 돌출된 경우 붙여지는 이름이다.
'울주 이바구 시 수필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간절곶을 배경으로 땅끝과 바다의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땅끝과 바다는/ 늘 접점에서 실랑이"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접점에서 늘 실랑이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실랑이하는 그 상황을 파도에 대비시킨다. 파도를 통해 실랑이하는 상황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파도의 "시작과 끝은 서로 모호해/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파도의 시작과 끝은 "서로 껴안게 된다"며 결론을 맺는다. 화자는 다시 접점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 땅끝과 바다로 돌아가서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기로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해 우왕좌왕할 때가 있다. 꼭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내면의 갈등으로 길잡이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인생의 정답은 없기에 각자 자신에게 맞는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우리도 화자처럼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가야 한다. 그 지점에서 "쉼 없이 보내는 서로의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호가 가슴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 긴긴 기다림"을 인내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고받는 서로의 신호를 해석하면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정해 답을 찾아야 한다. 시의 끝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아침이면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어둠 내리면 안식할 곳 찾"는다. 이 지점에서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우리의 아침이 보이고 집으로 귀가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 시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며 닿기를 바라는 '긴긴 기다림'이 주요 정서로 다뤄지고 있다. 특히, 파도가 상징하는 시작과 끝의 모호함과 결국 서로를 포용하게 되는 접점의 역설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안식할 곳을 찾는 간절한 지점에서 현재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태양은 작열하여
구월의 허리 지나고도
정수리와 얼굴 불같이 쪼아댄다
상사화 활활 타오른다
바닥 벌겋게 물들이고도
한창 피어내고 있다
새순의 옹알이 끝나고
그 잎 푸른 강물 이루더니
길목마다 열병 앓듯 온통 붉다
이리 뜨겁게 말하려고 가슴밭에 묻어 두었나
목젖 다 넘기지 못한 말
들불처럼 번져오는데
그 곁 지나칠 때면 덩달아 늪에 빠져든다
하늘 아래 신열 앓듯
다시
묵혀둔 침묵 쏟아낸다
화려함에 취해
한철 건넌 후
흔적 없이 잎 다문다 해도
또다시
꽃대 세우며
이 꽃길 걷는다.
- 「불갑산 가는 길」 전문
영광 불갑산상사화축제 공모전(영광21신문사)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9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불갑산에 활짝 핀 상사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꽃무릇은 수선화과 Lycoris속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상사화랑 한 집안 식물이다. 그래서 통상 상사화라 불리지만 상사화와는 다르다. 가을이면 붉은 융단처럼 산야를 물들이는 꽃무릇이 있고 여름 끝자락 은은한 분홍으로 피어나는 상사화가 있다. 꽃무릇은 붉은빛을 띠고 상사화는 분홍색 등의 계열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또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뒤 10월부터 잎이 나는데, 상사화는 잎이 먼저 돋고 여름 초에 잎이 시들면 8월부터 꽃이 핀다. 잎과 꽃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달리 돋는 구조 때문에 두 식물 모두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징으로 상사화라 불린다. 영광 불갑사 일원에서 매년 상사화 축제를 열고 있는데, 꽃무릇은 사찰과 인연이 깊다. 불교적 의미로 꽃무릇은 피안화라 불리는데 망자의 영혼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인도한다고 한다. 또 꽃무릇 구근에서 얻은 녹말은 불경 제본, 탱화 제작 등에 쓰인다.
시적 화자는 불갑산으로 가는 길에 상사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본다. "바닥 벌겋게 물들이고도/ 한창 피어내고 있"는 상사화. 한낮의 태양은 "구월의 허리 지나고도/ 정수리와 얼굴 불같이 쪼아"대고 있어 더운데 상사화는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정경이 "길목마다 열병 앓듯 온통 붉다"고 한다. 마치 상사화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이리 뜨겁게 말하려고 가슴밭에 묻어 두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워하는 님을 만나고 싶다는 울부짖음일까, 아니면 떠난 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도 소리일까. "목젖 다 넘기지 못한 말/ 들불처럼 번져오"고 있다. 시적 화자는 지상을 붉게 물들이는 상사화를 보며, 마치 열병을 앓듯 뜨겁게 피어나는 꽃의 강렬한 생명력에 압도되고 있다. 상사화의 붉은 모습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이나 묵혀둔 침묵이 들불처럼 번져 나오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또 이 꽃길을 걷는 사람 역시 그 화려함에 깊이 매료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꽃이 진 후에도 다시 꽃대를 세우며 돌아올 상사화의 순환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철 물들이다가
알알이 맺혀 휘어지다가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만
채우고 채워
슬며시 터뜨리는
붉디붉은 열망.
- 「석류」 전문
제10회 시(市,詩) 활짝 공모전(부천시) 우수상 수상작인 이 시는 석류를 붉디붉은 열망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유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은유와 상징으로 가는 길이며 패러독스에 다가가는 길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더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들어보며 느껴야 한다. 이 시는 그런 시작(詩作)을 위한 걸음들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열렬히 바란다는 의미의 열망을 눈에 보이게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열망을 눈에 보이는 다른 것에 빗대어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적합할까, 시인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며 생각에 생각을 덧입혔을 것이다. 열렬히 바라는 마음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낮과 밤이 수없이 꽃피었다가 이울고 "한철 물들이다가/ 알알이 맺혀 휘어지"면서 그 열망은 차오른다. 빛과 어둠을 오가며 버무린 간절함들이 아름다운 간격으로 차곡차곡 쌓여야 열망은 차오른다. 그 차오른 열망이 슬며시 터질 때까지 멈추면 안 된다. 멈추면 몽상이 되는 것이다. 몽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말하는데 그 헛된 생각을 실현 가능하게 하도록 열렬히 소망하며 바라면 열망이 된다. 화자는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만/ 채우고 채워" 열망이 꽉 차오르도록 기다리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슬며시 터뜨리는/ 붉디붉은 열망"을 만난다. 그 열망이 석류라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시적 대상을 보고 자신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다가가 첫 이름을 지어주며 새로운 정의를 내려줘야 한다. 시 쓰기는 언어의 빈 가지에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푸른 잎처럼 매다는 일이다. 상상의 처소를 시인의 내부로 끌어들여 빈 가지에 무엇을 꽃피울지 고심하며 시적 대상을 물색해야 한다.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석류가 익어 가는 과정을 '물들이다가', '맺혀 휘어지다가'와 같은 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의 감정, 즉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이 결국 '붉디붉은 열망'으로 '슬며시 터뜨려지는' 모습을 석류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찬란한 계절이 뒷걸음질 치자
탱자나무 울타리에도
낙엽 비가 내린다
빈자리마다
숭숭 뚫린 허기가 흘러내리고
마음 귀퉁이에선 앙상한 소리 낸다
여름 한철
향기 가득한 울타리
무성한 잎 떨군 채
하늘하늘 휘젓는
탱자 몇 알 그 마지막 향기가
허공에 비틀거린다
만추에도 까칠한 상념이고
흔들리는 것이
여전히 있다
울타리였던 아버지는
향기의 발화점이 되었지만
나는 늘 가시의 그늘이었다
아니,
울타리 밖으로 피어난
가시의 흔적이었다
아버지는
만만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
울타리 안에 있어도
서로 기대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무른 가시 되어
울타리 밖 서성이는 날
고여 있는 침묵 깨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향기
목젖까지 올라오는 미안함
꾹꾹 삼키는 이런 날은
슬쩍 울타리에 기대고 싶다.
- 「아버지의 그늘」 전문
제4회 노계문학 전국백일장 특별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계절이 변하여 탱자나무 울타리에 낙엽이 지는 만추의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탱자나무에 깃든 가을을 "빈자리마다/ 숭숭 뚫린 허기가 흘러내리고/ 마음 귀퉁이에선 앙상한 소리 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풍요로운 가을의 이미지와는 달리 외롭고 허기진 가을의 이미지로 다가가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어 "하늘하늘 휘젓는/ 탱자 몇 알 그 마지막 향기가/ 허공에 비틀거린다"며 어떤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 기억은 "만추에도 까칠한 상념"이라며 탱자나무와 화자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탱자 열매는 소화불량을 개선해 주고 피부를 진정시키며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다. 가을에 노랗게 익은 탱자 열매는 향이 강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실내 또는 자동차 속에 비치해 곰팡이 같은 좋지 않은 냄새를 제거하는 방향제로 사용한다. 그런 좋은 효능을 가진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겹친다. 아버지는 시적 화자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며 보살펴주었던 그 시절을 "울타리였던 아버지는/ 향기의 발화점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덕분에 화자는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는 늘 가시의 그늘이었다// 아니,/ 울타리 밖으로 피어난/ 가시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와 시적 화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탱자나무는 향만큼이나 과장된 몸짓의 가시를 드러낸다. 탱자나무에 가까이 가고 싶지만 그 가시에 찔릴까 봐 가까이 가지 못한다. 탱자나무는 낮과 밤을 노랗게 익히며 향기로워지지만 가시는 더 날카로워진다. 시적 화자는 날카롭게 입을 여는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나 아팠던 날이 많았을 것이다. 주렁주렁 열린 가시의 말들 때문에 시적 화자는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아버지를 한때 향기가 가득했던 울타리에 비유하지만, 자신은 그 울타리 밖에 핀 가시의 흔적이었음을 고백하며 복잡한 부녀 관계를 성찰하고 있다. 만만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와 서로 기대지 못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제야 아버지의 향기 앞에서 미안함을 느끼고 울타리에 기대고 싶어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오후 햇살 등지고
수레 한 대가 느리게 역주행 중이다
폐지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는
늘 불안정한 층을 이룬다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허술한 건물 한 채 흔들린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침묵 끌고
한 짐 될 수 있겠으나
달래듯 미끄러져 간다
도로 수놓는 달팽이처럼
고요한 성자처럼
폐지는 누군가의 손이 닿아도 상관없다는 듯
포개져 말이 없다
수레바퀴에
도로는 납작 엎드리고
바퀴가 휘청하는 사이
쌓인 폐지의 층이 삐그덕거린다
위태로움 밀 듯
엉성한 바람이 지나간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고
석양도 먼 산 아래로
미끄러져 간다
달팽이는 흔적 남긴 채 자취 감추고
수레도 그림자 지우며 방향 튼다
늘 그랬듯이 익숙한 길로.
- 「어느 성자의 길」 전문
평택사랑 백일장 전국 공모전 차하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오후 햇살 아래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가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성자의 첫 번째 뜻은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며, 두 번째 뜻은 모든 번뇌를 버리고 정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성자는 두 번째 뜻에 더 가깝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침묵 끌고" 느릿느릿 걸으며 "한 짐 될 수 있겠으나/ 달래듯 미끄러져"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런 느낌들로 다가온다. 그런데 "오후 햇살 등지고/ 수레 한 대가 느리게 역주행 중이"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왜 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 그 세상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번뇌를 버리는 의미로 역주행 중이라고 설정한 것일까. 아슬아슬한 도로에서 역주행을 하면서도 깨달음에 이른 듯 노인은 침묵을 끌고 가고 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뜨거운 분노를 쏟아내거나 거친 말들을 내뱉지 않고 침묵을 끌고 가고 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고개가 숙여진다. "폐지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는/ 늘 불안정한 층을" 이루고 있는데 "쌓인 폐지의 층이 삐그덕거"리는데 노인은 침묵의 옷을 입고 침묵의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로 수놓는 달팽이처럼/ 고요한 성자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허나 그런 노인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 "위태로움 밀 듯/ 엉성한 바람이 지나간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며 노인을 위협하고 있다. 노인은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는 듯 노인의 "수레도 그림자 지우며 방향" 틀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며 올곧게 사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이 시는 불안정하게 쌓인 폐지 더미와 느리게 역주행하는 수레를 통해 노인의 고단하고 위태로운 삶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 수레를 침묵을 끄는 한 짐이자, 도로를 수놓은 달팽이 또는 고요한 성자와 같이 묘사하며, 그 행위에 깃든 숭고함을 비추고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시적 대상을 찾고 그 대상에게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는 시라서 더욱 눈길을 끈다.
섬으로 가는 길은
두근대는 설렘이 있다
동해의 작은 등불
고요하고 평화로운 터전
순리의 길 몸소 알아가며
서로 다독이는 곳
섬에서는 모든 게
겸허히 하나된다
저마다의 지경
침범하지 않고 산다
불어오는 외로움도
가슴 깊이 품는다
고깃배는 바닷길 알고
새들은 부리 내릴 곳 안다
섬에서는
가장 먼저 해가 뜨고
가장 늦게
바람이 잠든다
벼랑 틈 작은 식물까지도
옹기종기 모여 푸른 고독을 털어낸다
섬은
외로운 곳이 아니라 기다리는 곳이다
풍화되고 삭아지는 만큼
삼키고 품으며.
- 「독도-작지만 큰 섬」 전문
제11회 독도문예대전 특선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독도로 향하는 길의 설렘과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2025년 8월에 국립수산과학원은 국제학술지 BMC Biology(Springer) 온라인판에 독도에 서식했던 바다사자(강치)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1970년 이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치는 인간의 무분별한 남획 때문이었음을 보여준 내용이었다. 1905년 일본은 불법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 후, 독도에서 강치를 마구잡이로 포획한 뒤, 강치 가죽으로는 가방을 만들고 새끼강치들은 서커스용으로 팔아넘겼다. 독도 근해에는 우리나라가 30년간 쓸 수 있는 고체형 가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묻혀 있다. 그리고 독도 주변 해역은 휘모리장단처럼 소용돌이치는 급물살 덕분에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래서일까, 일본은 독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런 아픔 많은 독도로 시적 화자는 떠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독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밝고 희망적으로 그리며 "섬으로 가는 길은/ 두근대는 설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도를 대하는 자세가 긍정적이다. 그런 긍정의 자세로 독도를 찾고 독도를 지키자며 말하고 있는 듯하다. 독도는 "동해의 작은 등불/ 고요하고 평화로운 터전"이며 "순리의 길 몸소 알아가며/ 서로 다독이는 곳"이고 "섬은/ 외로운 곳이 아니라 기다리는 곳"이라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이렇듯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다가가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힘을 실어주며 나아가야 시의 에너지는 발생한다. 시적 화자는 독도를 동해의 작은 등불이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라고 말하며 일본의 야욕을 일거에 차단하고 있다. 이 시는 독도에서 자연과 생명들이 겸허히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관찰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순리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독도를 외로운 곳이 아닌 기다리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또 모든 것을 품는 섬의 포용력 있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피부처럼 달라붙어
강변 따라 단단히 뭉쳐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단단한 벽처럼 빼곡하게 뿌리 내리며
강을 파수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처소 보호하기 위해
오래오래 서걱이는 머리카락 쓸어 넘기다가
정갈하게 참빗질하다가
부서지는 물소리 주워 담는데
찰랑찰랑 이가 시린 가을이 나란하다
누런빛 잠재된 생각들로 흔들리는 계절
빛나는 불빛이 달린 트리 장식 앞에서
강물처럼 지나간 날들이 깜박거린다
익숙한 흔들림은 오랜 습성으로 말하고
바람길 내며 서걱이는 소리 지른다
계절이 교차할 때마다 뻣뻣하고 푸석한 자리에
또 다른 푸른 싹이 돋아나듯
야생의 기질 버리지 못해 다시 꿈꾼다
해 질 녘이 덮치고
어스름의 안색이 꼬여도
멀고 먼 아침이 입안에서 맴돌기에
몽유의 밤 빠져나와
내일의 체질로 바꿔야 한다
바람의 뒤안길에서 흔들림과 고요 사이 헤매다가
착각의 날개 꺾인다 해도
내면의 파도 높아올수록 돌아오는 파장은 길었다
향수 찾아 힘껏 날아가는 철새의 꽁무니 바라보며
억세게 뿌리 내리는 마른 항변을 본다
자신의 존재는 버리지 못하듯
끈끈하게 말라붙은 상념의 깃 마구 흔든다
저 멀리 한계 건너오는 날갯짓은
풀씨의 기억 품고 한껏 날아오른다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군무를 춘다
춤추는 길목마다
수많은 적극의 방식 같은 손동작들
맹목의 발자국들은 서걱서걱 포개지고
나태한 어제의 표정은 흘러가고 없어
지켜야 할 강의 방향에 맞춰 눈빛까지 바꾼다
약해서가 아니라 순응하는 중이라고
억척스럽게 몸 흔들어 말한다.
- 「억새」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억새를 의인화하여 강변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끈질긴 생명력과 순응의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생의 마지막 처소 보호하기 위해/ 오래오래 서걱이는 머리카락 쓸어 넘기다가/ 정갈하게 참빗질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억새가 뿌리 내린 곳을 "생의 마지막 처소"로 해석하며 그곳을 보호하기 위해 참빗질을 하고 있다. 신선한 해석이다. 억새는 강변에서 "부서지는 물소리 주워 담는데/ 찰랑찰랑 이가 시린 가을이 나란하"다. 날씨가 추워져 늦가을로 접어드는 시간적 배경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다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익숙한 흔들림은 오랜 습성으로 말하고/ 바람길 내며 서걱이는 소리 지"르고 있다. 흔들림은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한 갈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건 단지 두 발로 걸음을 걷듯 오랜 습성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억새는 사람들의 걸음마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흔들렸다. 흔들리는 방식으로 하루를 살고 흔들리는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억새는 어떤 다짐을 한다. "멀고 먼 아침이 입안에서 맴돌기에/ 몽유의 밤 빠져나와/ 내일의 체질로 바꿔야 한"다며 마음을 먹는다. 무엇을 위해 그런 다짐을 하려는 걸까. "푸른 싹이 돋아나듯/ 야생의 기질 버리지 못해 다시 꿈"을 꾸고 싶어서다. 시적 화자는 억새를 통해서 어제도 그제도 흔들리는 방식으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다시 꿈을 꾸며 내일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저 멀리 한계 건너오는 날갯짓은/ 풀씨의 기억 품고 한껏 날아"오르고 있으니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군무를" 함께 추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허공의 춤추는 길목마다 "수많은 적극의 방식 같은 손동작들/ 맹목의 발자국들은 서걱서걱 포개지고" 있어 "나태한 어제의 표정은 흘러가고 없"다. 시 전체를 관통하며 흔들림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내리는 있다. 이 시에서 억새는 마치 몸의 피부처럼 강변에 단단히 붙어 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하며, 부서지는 물소리를 담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특히, 억새는 익숙한 흔들림 속에서도 야생의 기질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며, 어둠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바람에 꺾이지 않는 군무를 추며 적극적으로 환경에 순응하는 존재의 강인함을 역설하고 있다.
감자 심은 텃밭에
한 움큼씩 풀이 자랐다
잠시만 내버려 두면
여기저기 발 디딜 틈 없이
온통 풀밭이 된다
충혈된 몸짓으로
과장된 자아에 도취되어
매일매일 자라는 자신의 방향
꿋꿋하게 지지하며
초록의 영토 확장해 간다
풀도 관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일까
억세게 버티며 양보하지 않는다
풀과 식물의 거리는
한 몸인 듯 동상이몽
잡초이다 못해
주인공 행세까지 하려 한다
의기양양 한철 버티는
풀의 족속
당찬 야생의 기질 때문에
당해 낼 재간이 없다
텃밭은
풀의 뒷배경이면서 중심
마찰음도 없는 잡초의 태도로
두둑과 고랑 지나가도
편견이 없는 허공은 말이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
주객이 전도된 모습 보게 된다
누군가 돌보지 않은 공간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잡풀이라는 시간에 잠식 당해
순간순간 허비해 버린 적 있다
때로는 스스로 잡풀이 된 적도 있다
서둘러 핀 비틀거림은 한사코
아침에서 저녁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어둑하고 왜곡된 몸 야금야금 섞으며
함부로 내던져져 깨지고 찢겨진 한때
맘대로 자라다가
풀썩 말라가는
마음의 풀밭 가진 적 있다
뒤돌아본 자리
보이지 않지만
벌거숭이로 서 있는 모습
바라본 적 있다.
- 「풀의 각성」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텃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풀의 생명력과 속성을 관찰하고 있다. 풀을 "충혈된 몸짓으로/ 과장된 자아에 도취되어/ 매일매일 자라는 자신의 방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표현이다. "충혈된 몸짓"과 "과장된 자아"에서 시적 화자의 어떤 의도가 엿보인다. 우리도 가끔 자신의 분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른 적이 있다. 분노에 잠식당해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까지 온통 분노의 색깔을 띄며 빠져 있었다. 그 이미지를 풀과 잘 연결지어 형상화했다.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시적 화자는 "풀도 관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일까/ 억세게 버티며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게 연결지어 표현하고 있다. 양보하지 않는 풀의 성향을 "의기양양 한철 버티는/ 풀의 족속/ 당찬 야생의 기질 때문"이라고 한다. 무거운 주제를 유머스럽게 잘 풀어가고 있다. 우리도 분노나 절망 그리고 막무가내로 감정과 생각을 쏟아내는 그 모든 상황들을 잘 다루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시 속에서 슬쩍슬쩍 엿보인다. 시적 화자는 급기야 이런 고백을 한다. "잡풀이라는 시간에 잠식 당해/ 순간순간 허비해 버린 적 있"었다고 "때로는 스스로 잡풀이 된 적도 있"었다고. 부끄럽지만 진실된 그 고백에 우리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스럽게 독자의 가슴을 열게 해 시가 스며들게 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 화자는 부끄러웠던 그 시절을 "서둘러 핀 비틀거림은 한사코/ 아침에서 저녁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어둑하고 왜곡된 몸 야금야금 섞으며/ 함부로 내던져져 깨지고 찢겨진 한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 역시 낯설게 하기의 진수이면서도 쉬운 말들로 가슴에 와닿는 표현들이다. 이 시는 풀이 충혈된 몸짓으로 자신의 영토를 꿋꿋이 확장하며, 마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당찬 야생의 기질에서 시작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풀이 자라나는 모습을 통해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을 인식하며, 돌보지 않은 공간이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궁극적으로 시적 화자는 잡초에 잠식당했던 한때의 기억과 스스로 잡풀이 되었던 내면의 경험까지 성찰하고 있다.
삼복더위 끝자락
고독의 긴 시간 뚫고
어느 순례자의 목 터져라 우는 소리가 있다
막바지 더위 한창인데
더욱 요란히 허공 가르는 소리
둘렀던 허물 힘겹게 벗고
쉼 없이 귀청 때리는 저 소리
어쩌면
일생이 걸린
소리인지도 모른다
자지러지는 소리 계속되는데
나무 아래엔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뒹군다
세상의 슬픔도 저리 뒹굴다가
순간순간 이리 흔적이라도 남기는 걸까
사람도 속울음 울 때가 있다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주머니 달고
소리 삼킨 슬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때가 있다.
- 「매미 울음」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매미의 울음을 고독한 순례자의 처절한 외침에 비유하여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시에는 의식 저편에 있는 슬픔을 응시하는 눈이 있다. 보편적인 인식을 깨뜨리는 눈으로 매미 울음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어떤 슬픔을 보았을 것이다. 어둠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슬픔을 언어의 거름망에 올려놓아 슬픔이 걸러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매미 울음과 슬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결국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것을 알아채고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주머니 달"고 속울음 우는 사람의 슬픔까지 알아채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변별성(辨別性)을 갖기 위해 시적 대상에 대해 고심하며 지루한 기다림을 묵묵히 참아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미 울음이 "어느 순례자의 목 터져라 우는 소리"로 들린다. 그 울음소리는 "어쩌면/ 일생이 걸린/ 소리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순례자는 성지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순례자는 어떤 고해 성사라도 한 것일까. 순례자가 걸어왔던 어제와 그 전의 어제가 부끄러워 목이 터져라 울었던 것일까. 매미가 울었던 "나무 아래엔/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뒹"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세상의 슬픔도 저리 뒹굴다가/ 순간순간 이리 흔적이라도 남기는" 거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시적 화자는 삼복더위의 끝자락에 매미가 허물을 벗고 목놓아 우는 소리를 통해, 그 행위가 일생이 걸린 절박한 노력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온 힘 다해 울고 난 후 나무 아래 뒹구는 매미의 흔적을 보며, 세상의 슬픔 역시 이처럼 순간의 흔적으로 남겨질 수 있다며 사색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에게도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슬픔 주머니가 있어, 소리를 삼킨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울음을 울 때가 있음을 밝히며 정서를 확장해 놓고 있다.
황애라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상상력 속으로 끌어당겨 육화시켜 놓은 시적 형상화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더욱이 시어들 또한 정교한 디코럼 위에 배치해 놓고 있어, 시적 표현이 진부하지 않고 안정감을 준다. 그녀의 제2시집에서는 노년의 외로움과 가뭄, 존재의 경계와 갈망, 상사화의 강렬한 생명력, 그리고 내면의 억눌린 열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쓸쓸한 풍경, 고단한 삶의 숭고함을 담은 노인의 수레, 그리고 독도의 조화와 포옹력 등도 노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시적 화자는 자연물과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과 삶의 태도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는 다양한 문학상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표현기법과 이미지 구현, 낯설게 하기, 즉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여기에 인생의 맛을 일구는 감동의 전율까지 보태져, 시의 특질을 고루 보유하고 있어, 작품의 완성도가 아주 높다. 작품의 깊이와 작품성이 조화를 이뤄, 독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시집으로 이렇게 향긋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앞으로 제3, 제4의 시집도 엮어내어,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 한결같은 찬사를 받아내기를 빈다. 여생 동안 시 창작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 선선하고 청명한 날씨 아래 시 낭송하는 아름다운 정경을 넋잃고 바라보면서
한실문예창작(12개 문학회)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국어국문학과장 역임, 대한시문학협회 회장, 박덕은 미술관 관장, 광주시민사회단체(523개)총연합회 대표회장, 노벨재단 이사장,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새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광주문학상(제1회), 전라남도문화상, 김현승 문학상, 빛고을 문학상 수상, 저서 [현대시창작법], [현대소설의 이론], [문체론] 등 132권 발간)
황애라 시인의 제2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박덕은(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황애라 시인은 문예창작반인 한실문예창작에 와서 2011년 6월 14일 첫 시 「향수」를 발표했다. 이후 필자가 지도 교수로 있는 부드런 문학회에 매주 한 편씩 성실히 꾸준하게 시 창작품을 발표했다.
황애라 시인은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상(2015년 3월)을 비롯하여, 비바비 문학상(2015년 6월), 하동국제문화제 문학상(2015년 9월), 한양대 ERICA 문학상 우수상(2015년 10월), 한민족 통일 문예제전 문학상(2015년 10월),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문학상(2015년 10월), 충주문학관 문학상 왕중왕전 우수상(2015년 12월), 빛창 문학상(2016년 2월), 안양 창작시 문학상(2016년 5월),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 시 부문(2016년 6월), 나주예술문화상(2016년 10월), 용아 박용철 백일장 시 부문(2017년 6월), 한민족통일문예대전 문학상(2017년 9월), 가락시장 공모전 문학상(2018년 3월), 예술문화상 문학상(2018년 11월), 서울 지하철 문학상(2019년 8월), 박덕은 전국 백일장 문학상(2019년 11월), 동서 문학상 맥심상(2020년 10월), 삼행시 문학상 동상(2021년 4월), 부천시 문학상 우수상(2021년 5월), 대덕 백일장 장려상(2021년 6월), 인성의 향 디카시 문학상 장려상(2021년 11월), 독도 문예대전 특선(2021년 11월), 노계 문학상 특별상(2021년 12월), 남명문화제 시화문학상 산해정인성문화진흥회상(2022년 6월), 제1회 김해예총 시화전 문학상 문예상(2022년 6월), 제6회 경남고성 국제한글디카시 장려상(2023년 5월), 치유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2023년 8월), 디카시 문학상(2023년 12월), 평택사랑 전국 백일장 차하(2025년 6월) 등을 연달아 수상했다.
황애라 시인의 첫 시집은 제1부 목사골 오일장, 제2부 책갈피 단풍, 제3부 너도바람꽃, 제4부 어쩌면, 제5부 당신의 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시집에 이어, 도전하는 두 번째 시집, 과연 그 세계는 어떻게 펼쳐질까.
그리고, 황애라 시인의 시 표현 기법은 어떠할까.
자, 지금부터 그녀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행복한 탐구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노인의 마당에는 모판의 모가 가득하다
물이 부족해 논으로 갈 수 없는 모는
작은 모판에서 주인의 마음만 애타게 한다
작약꽃 시드는데 붉은 장미 더욱 흐드러지고
모도 그새 많이 자랐다
바람의 밀린 잠이 나른하게 달라붙는 오후
봄날과 초록은 슬금슬금 제 키를 높이며
푸른 연대기 쓰기 위해
마르지 않는 햇살 끌어당겨
맑고 환한 등 타고 오른다
비가 오지 않아 논에 댈 물이 없다며
속이 타들어 가는 노인은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쓰러진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무심한 기다림만 타들어 가고
여름 창문 힘겹게 열고 나온 한숨이 걷고 있다
비 올 바람이 한두 번 불었지만
비를 데려오지는 못했다
바닥까지 쩍쩍 갈라진
물의 빈방들 때문에
후두둑 후두둑 과하게 흘러내리는
물의 고집스런 발목이
방향을 탐색하듯 귀에서 자란다
녹음은 짙어지고
아내가 좋아한 꽃들은 한창 피어대는데
이 꽃들 지기 전에
대문으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다
착잡한 얼굴 되어 푸념 섞인 말만 되풀이한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난날을 말하곤 하지만
되돌이표처럼 날아오르다 허공에 튕길 뿐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어스름에 멱살 잡혀
무너지는 그믐 같은 마음
말갛게 씻으려고 보름 달빛 찾는데
늙어 고집스런 밤은 어찌된 일인지
슬하에 어둠만 데리고 있다
홀로 밥을 먹고 아침을 맞고
다시 밤을 맞이한다
함께한 흔적 희미해지고
혼자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때 올지도 모른다
애증의 순간들 점점이 떠다니다
밤그늘에 잠긴다.
- 「흔적의 그늘」 전문
제1회 치유문학상 전국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노인의 삶과 고독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특히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한 농촌의 상황과 병든 아내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주요 정서로 다루고 있다. 시는 아픔과 슬픔의 지층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무늬들을 담아야 한다. 날것의 느낌을 시적인 질감과 색채로 풀어내며 시적인 운율을 입혀야 한다. 그리하여 무음無音의 활자 속에서 소리가 들리고 맛(느낌)이 느껴져야 한다. 그러려면 시적 대상을 조명하는 시인의 렌즈가 남과 달라야 한다. 평면의 그림을 단순한 사각의 프레임으로만 읽지 말고 입체감을 덧칠해 새롭게 탄생시킬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독특한 시야에서 상황도 사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일련의 노력들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시적 화자는 논으로 옮기지 못한 모판의 모를 바라보고 있다. "물이 부족해 논으로 갈 수 없는 모"가 마당에 놓여 있다. "작은 모판에서 주인의 마음만 애타게" 하고 있다. 발랄한 봄날을 열어야 하는데 모판은 아직까지 마당에 있다. "노인은/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쓰러진 아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무심한 기다림만 타들어 가고" 있는데 "아내가 좋아한 꽃들은 한창 피어대는데/ 이 꽃들 지기 전에/ 대문으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은데 반가운 소식 한 점 없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봄날에 논으로 옮기지 못한 모판의 모와 쓰러진 아내의 모습이 병치되어 있어 애틋함이 고조된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비의는 감당하기 버겁다. 시는 감당하기 힘든 그 벅참 속으로 들어가 비의를 탐색하며 삶의 본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하여 비의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 시적 화자는 아내와 "함께한 흔적 희미해지고/ 혼자인 모습이 어쩌면 당연한 때 올지도" 모른다며 밤을 맞이하고 있다. 어둠에 잠기는 노인과 애증의 순간들이 점점이 흩어져 안쓰럽다. 노인은 마당에 가득한 모를 보며 애타는 마음을 달래고, 비가 오지 않는 하늘과 아내의 부재 사이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시적 화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외로움이 교차하는 쓸쓸하고 착잡한 심정을 자연물의 변화와 비유를 통해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땅끝과 바다는
늘 접점에서 실랑이한다
파도가 그렇다
시작과 끝은 서로 모호해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
결국은 서로 껴안게 된다
길잡이가 필요한 시간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기로 한다
하루도 쉼 없이 보내는 서로의 신호
닿을 수 있을 때까지
긴긴 기다림이 된다
아침이면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어둠 내리면 안식할 곳 찾는
그 접점의 끝에
오늘도 간절히 서 있다.
- 「간절곶」 전문
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간절곶은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맞이를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찾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이곳은 포항 호미곶보다 1분, 강릉 정동진보다 5분 정도 일찍 해가 떠오른다. 간절곶(艮絶串)의 곶(串)은 육지에서 바다를 향하여 돌출된 경우 붙여지는 이름이다.
'울주 이바구 시 수필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간절곶을 배경으로 땅끝과 바다의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땅끝과 바다는/ 늘 접점에서 실랑이"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접점에서 늘 실랑이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실랑이하는 그 상황을 파도에 대비시킨다. 파도를 통해 실랑이하는 상황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파도의 "시작과 끝은 서로 모호해/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끝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파도의 시작과 끝은 "서로 껴안게 된다"며 결론을 맺는다. 화자는 다시 접점에서 실랑이를 하고 있는 땅끝과 바다로 돌아가서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기로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문제가 발생해 우왕좌왕할 때가 있다. 꼭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내면의 갈등으로 길잡이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인생의 정답은 없기에 각자 자신에게 맞는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우리도 화자처럼 "뭉클한 지점까지 다시 건너"가야 한다. 그 지점에서 "쉼 없이 보내는 서로의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호가 가슴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 긴긴 기다림"을 인내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고받는 서로의 신호를 해석하면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정해 답을 찾아야 한다. 시의 끝부분에서 시적 화자는 "아침이면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어둠 내리면 안식할 곳 찾"는다. 이 지점에서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우리의 아침이 보이고 집으로 귀가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 시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며 닿기를 바라는 '긴긴 기다림'이 주요 정서로 다뤄지고 있다. 특히, 파도가 상징하는 시작과 끝의 모호함과 결국 서로를 포용하게 되는 접점의 역설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수평선을 그리워하고 안식할 곳을 찾는 간절한 지점에서 현재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태양은 작열하여
구월의 허리 지나고도
정수리와 얼굴 불같이 쪼아댄다
상사화 활활 타오른다
바닥 벌겋게 물들이고도
한창 피어내고 있다
새순의 옹알이 끝나고
그 잎 푸른 강물 이루더니
길목마다 열병 앓듯 온통 붉다
이리 뜨겁게 말하려고 가슴밭에 묻어 두었나
목젖 다 넘기지 못한 말
들불처럼 번져오는데
그 곁 지나칠 때면 덩달아 늪에 빠져든다
하늘 아래 신열 앓듯
다시
묵혀둔 침묵 쏟아낸다
화려함에 취해
한철 건넌 후
흔적 없이 잎 다문다 해도
또다시
꽃대 세우며
이 꽃길 걷는다.
- 「불갑산 가는 길」 전문
영광 불갑산상사화축제 공모전(영광21신문사)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9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불갑산에 활짝 핀 상사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꽃무릇은 수선화과 Lycoris속에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상사화랑 한 집안 식물이다. 그래서 통상 상사화라 불리지만 상사화와는 다르다. 가을이면 붉은 융단처럼 산야를 물들이는 꽃무릇이 있고 여름 끝자락 은은한 분홍으로 피어나는 상사화가 있다. 꽃무릇은 붉은빛을 띠고 상사화는 분홍색 등의 계열로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또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진 뒤 10월부터 잎이 나는데, 상사화는 잎이 먼저 돋고 여름 초에 잎이 시들면 8월부터 꽃이 핀다. 잎과 꽃이 시차를 두고 각기 달리 돋는 구조 때문에 두 식물 모두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상징으로 상사화라 불린다. 영광 불갑사 일원에서 매년 상사화 축제를 열고 있는데, 꽃무릇은 사찰과 인연이 깊다. 불교적 의미로 꽃무릇은 피안화라 불리는데 망자의 영혼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인도한다고 한다. 또 꽃무릇 구근에서 얻은 녹말은 불경 제본, 탱화 제작 등에 쓰인다.
시적 화자는 불갑산으로 가는 길에 상사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본다. "바닥 벌겋게 물들이고도/ 한창 피어내고 있"는 상사화. 한낮의 태양은 "구월의 허리 지나고도/ 정수리와 얼굴 불같이 쪼아"대고 있어 더운데 상사화는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정경이 "길목마다 열병 앓듯 온통 붉다"고 한다. 마치 상사화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이리 뜨겁게 말하려고 가슴밭에 묻어 두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워하는 님을 만나고 싶다는 울부짖음일까, 아니면 떠난 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도 소리일까. "목젖 다 넘기지 못한 말/ 들불처럼 번져오"고 있다. 시적 화자는 지상을 붉게 물들이는 상사화를 보며, 마치 열병을 앓듯 뜨겁게 피어나는 꽃의 강렬한 생명력에 압도되고 있다. 상사화의 붉은 모습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이나 묵혀둔 침묵이 들불처럼 번져 나오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또 이 꽃길을 걷는 사람 역시 그 화려함에 깊이 매료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꽃이 진 후에도 다시 꽃대를 세우며 돌아올 상사화의 순환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한철 물들이다가
알알이 맺혀 휘어지다가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만
채우고 채워
슬며시 터뜨리는
붉디붉은 열망.
- 「석류」 전문
제10회 시(市,詩) 활짝 공모전(부천시) 우수상 수상작인 이 시는 석류를 붉디붉은 열망으로 해석하고 있다. 시는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유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은유와 상징으로 가는 길이며 패러독스에 다가가는 길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더불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까지 손으로 만져보고 귀로 들어보며 느껴야 한다. 이 시는 그런 시작(詩作)을 위한 걸음들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열렬히 바란다는 의미의 열망을 눈에 보이게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열망을 눈에 보이는 다른 것에 빗대어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적합할까, 시인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며 생각에 생각을 덧입혔을 것이다. 열렬히 바라는 마음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낮과 밤이 수없이 꽃피었다가 이울고 "한철 물들이다가/ 알알이 맺혀 휘어지"면서 그 열망은 차오른다. 빛과 어둠을 오가며 버무린 간절함들이 아름다운 간격으로 차곡차곡 쌓여야 열망은 차오른다. 그 차오른 열망이 슬며시 터질 때까지 멈추면 안 된다. 멈추면 몽상이 되는 것이다. 몽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말하는데 그 헛된 생각을 실현 가능하게 하도록 열렬히 소망하며 바라면 열망이 된다. 화자는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만/ 채우고 채워" 열망이 꽉 차오르도록 기다리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슬며시 터뜨리는/ 붉디붉은 열망"을 만난다. 그 열망이 석류라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시적 대상을 보고 자신만의 섬세한 감각으로 다가가 첫 이름을 지어주며 새로운 정의를 내려줘야 한다. 시 쓰기는 언어의 빈 가지에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푸른 잎처럼 매다는 일이다. 상상의 처소를 시인의 내부로 끌어들여 빈 가지에 무엇을 꽃피울지 고심하며 시적 대상을 물색해야 한다.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석류가 익어 가는 과정을 '물들이다가', '맺혀 휘어지다가'와 같은 동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내면의 감정, 즉 '다 품고도 보일 수 없는 마음'이 결국 '붉디붉은 열망'으로 '슬며시 터뜨려지는' 모습을 석류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찬란한 계절이 뒷걸음질 치자
탱자나무 울타리에도
낙엽 비가 내린다
빈자리마다
숭숭 뚫린 허기가 흘러내리고
마음 귀퉁이에선 앙상한 소리 낸다
여름 한철
향기 가득한 울타리
무성한 잎 떨군 채
하늘하늘 휘젓는
탱자 몇 알 그 마지막 향기가
허공에 비틀거린다
만추에도 까칠한 상념이고
흔들리는 것이
여전히 있다
울타리였던 아버지는
향기의 발화점이 되었지만
나는 늘 가시의 그늘이었다
아니,
울타리 밖으로 피어난
가시의 흔적이었다
아버지는
만만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
울타리 안에 있어도
서로 기대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무른 가시 되어
울타리 밖 서성이는 날
고여 있는 침묵 깨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향기
목젖까지 올라오는 미안함
꾹꾹 삼키는 이런 날은
슬쩍 울타리에 기대고 싶다.
- 「아버지의 그늘」 전문
제4회 노계문학 전국백일장 특별상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계절이 변하여 탱자나무 울타리에 낙엽이 지는 만추의 쓸쓸한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탱자나무에 깃든 가을을 "빈자리마다/ 숭숭 뚫린 허기가 흘러내리고/ 마음 귀퉁이에선 앙상한 소리 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풍요로운 가을의 이미지와는 달리 외롭고 허기진 가을의 이미지로 다가가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어 "하늘하늘 휘젓는/ 탱자 몇 알 그 마지막 향기가/ 허공에 비틀거린다"며 어떤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 기억은 "만추에도 까칠한 상념"이라며 탱자나무와 화자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탱자 열매는 소화불량을 개선해 주고 피부를 진정시키며 혈액순환에 도움을 준다. 가을에 노랗게 익은 탱자 열매는 향이 강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실내 또는 자동차 속에 비치해 곰팡이 같은 좋지 않은 냄새를 제거하는 방향제로 사용한다. 그런 좋은 효능을 가진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겹친다. 아버지는 시적 화자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며 보살펴주었던 그 시절을 "울타리였던 아버지는/ 향기의 발화점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덕분에 화자는 친구들과 우정을 쌓으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시적 화자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는 늘 가시의 그늘이었다// 아니,/ 울타리 밖으로 피어난/ 가시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와 시적 화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탱자나무는 향만큼이나 과장된 몸짓의 가시를 드러낸다. 탱자나무에 가까이 가고 싶지만 그 가시에 찔릴까 봐 가까이 가지 못한다. 탱자나무는 낮과 밤을 노랗게 익히며 향기로워지지만 가시는 더 날카로워진다. 시적 화자는 날카롭게 입을 여는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나 아팠던 날이 많았을 것이다. 주렁주렁 열린 가시의 말들 때문에 시적 화자는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아버지를 한때 향기가 가득했던 울타리에 비유하지만, 자신은 그 울타리 밖에 핀 가시의 흔적이었음을 고백하며 복잡한 부녀 관계를 성찰하고 있다. 만만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와 서로 기대지 못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이제야 아버지의 향기 앞에서 미안함을 느끼고 울타리에 기대고 싶어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오후 햇살 등지고
수레 한 대가 느리게 역주행 중이다
폐지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는
늘 불안정한 층을 이룬다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허술한 건물 한 채 흔들린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침묵 끌고
한 짐 될 수 있겠으나
달래듯 미끄러져 간다
도로 수놓는 달팽이처럼
고요한 성자처럼
폐지는 누군가의 손이 닿아도 상관없다는 듯
포개져 말이 없다
수레바퀴에
도로는 납작 엎드리고
바퀴가 휘청하는 사이
쌓인 폐지의 층이 삐그덕거린다
위태로움 밀 듯
엉성한 바람이 지나간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고
석양도 먼 산 아래로
미끄러져 간다
달팽이는 흔적 남긴 채 자취 감추고
수레도 그림자 지우며 방향 튼다
늘 그랬듯이 익숙한 길로.
- 「어느 성자의 길」 전문
평택사랑 백일장 전국 공모전 차하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오후 햇살 아래 폐지를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가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성자의 첫 번째 뜻은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며, 두 번째 뜻은 모든 번뇌를 버리고 정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 성자는 두 번째 뜻에 더 가깝다. "한 장 한 장 쌓아올린/ 침묵 끌고" 느릿느릿 걸으며 "한 짐 될 수 있겠으나/ 달래듯 미끄러져"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런 느낌들로 다가온다. 그런데 "오후 햇살 등지고/ 수레 한 대가 느리게 역주행 중이"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왜 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일까. 시적 화자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 그 세상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번뇌를 버리는 의미로 역주행 중이라고 설정한 것일까. 아슬아슬한 도로에서 역주행을 하면서도 깨달음에 이른 듯 노인은 침묵을 끌고 가고 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뜨거운 분노를 쏟아내거나 거친 말들을 내뱉지 않고 침묵을 끌고 가고 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고개가 숙여진다. "폐지 가득 실은 노인의 수레는/ 늘 불안정한 층을" 이루고 있는데 "쌓인 폐지의 층이 삐그덕거"리는데 노인은 침묵의 옷을 입고 침묵의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도로 수놓는 달팽이처럼/ 고요한 성자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허나 그런 노인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 "위태로움 밀 듯/ 엉성한 바람이 지나간다/ 차들은 경적 없이 지나쳐가"며 노인을 위협하고 있다. 노인은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는 듯 노인의 "수레도 그림자 지우며 방향" 틀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며 올곧게 사는 모습이 숭고하게 다가온다. 이 시는 불안정하게 쌓인 폐지 더미와 느리게 역주행하는 수레를 통해 노인의 고단하고 위태로운 삶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 수레를 침묵을 끄는 한 짐이자, 도로를 수놓은 달팽이 또는 고요한 성자와 같이 묘사하며, 그 행위에 깃든 숭고함을 비추고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시적 대상을 찾고 그 대상에게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는 시라서 더욱 눈길을 끈다.
섬으로 가는 길은
두근대는 설렘이 있다
동해의 작은 등불
고요하고 평화로운 터전
순리의 길 몸소 알아가며
서로 다독이는 곳
섬에서는 모든 게
겸허히 하나된다
저마다의 지경
침범하지 않고 산다
불어오는 외로움도
가슴 깊이 품는다
고깃배는 바닷길 알고
새들은 부리 내릴 곳 안다
섬에서는
가장 먼저 해가 뜨고
가장 늦게
바람이 잠든다
벼랑 틈 작은 식물까지도
옹기종기 모여 푸른 고독을 털어낸다
섬은
외로운 곳이 아니라 기다리는 곳이다
풍화되고 삭아지는 만큼
삼키고 품으며.
- 「독도-작지만 큰 섬」 전문
제11회 독도문예대전 특선 수상작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독도로 향하는 길의 설렘과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2025년 8월에 국립수산과학원은 국제학술지 BMC Biology(Springer) 온라인판에 독도에 서식했던 바다사자(강치)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1970년 이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강치는 인간의 무분별한 남획 때문이었음을 보여준 내용이었다. 1905년 일본은 불법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 후, 독도에서 강치를 마구잡이로 포획한 뒤, 강치 가죽으로는 가방을 만들고 새끼강치들은 서커스용으로 팔아넘겼다. 독도 근해에는 우리나라가 30년간 쓸 수 있는 고체형 가스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묻혀 있다. 그리고 독도 주변 해역은 휘모리장단처럼 소용돌이치는 급물살 덕분에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래서일까, 일본은 독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런 아픔 많은 독도로 시적 화자는 떠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독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밝고 희망적으로 그리며 "섬으로 가는 길은/ 두근대는 설렘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도를 대하는 자세가 긍정적이다. 그런 긍정의 자세로 독도를 찾고 독도를 지키자며 말하고 있는 듯하다. 독도는 "동해의 작은 등불/ 고요하고 평화로운 터전"이며 "순리의 길 몸소 알아가며/ 서로 다독이는 곳"이고 "섬은/ 외로운 곳이 아니라 기다리는 곳"이라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시인은 이렇듯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다가가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에 스스로 힘을 실어주며 나아가야 시의 에너지는 발생한다. 시적 화자는 독도를 동해의 작은 등불이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라고 말하며 일본의 야욕을 일거에 차단하고 있다. 이 시는 독도에서 자연과 생명들이 겸허히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관찰하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살아가는 순리를 노래하고 있다. 특히, 독도를 외로운 곳이 아닌 기다리는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또 모든 것을 품는 섬의 포용력 있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몸의 피부처럼 달라붙어
강변 따라 단단히 뭉쳐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단단한 벽처럼 빼곡하게 뿌리 내리며
강을 파수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처소 보호하기 위해
오래오래 서걱이는 머리카락 쓸어 넘기다가
정갈하게 참빗질하다가
부서지는 물소리 주워 담는데
찰랑찰랑 이가 시린 가을이 나란하다
누런빛 잠재된 생각들로 흔들리는 계절
빛나는 불빛이 달린 트리 장식 앞에서
강물처럼 지나간 날들이 깜박거린다
익숙한 흔들림은 오랜 습성으로 말하고
바람길 내며 서걱이는 소리 지른다
계절이 교차할 때마다 뻣뻣하고 푸석한 자리에
또 다른 푸른 싹이 돋아나듯
야생의 기질 버리지 못해 다시 꿈꾼다
해 질 녘이 덮치고
어스름의 안색이 꼬여도
멀고 먼 아침이 입안에서 맴돌기에
몽유의 밤 빠져나와
내일의 체질로 바꿔야 한다
바람의 뒤안길에서 흔들림과 고요 사이 헤매다가
착각의 날개 꺾인다 해도
내면의 파도 높아올수록 돌아오는 파장은 길었다
향수 찾아 힘껏 날아가는 철새의 꽁무니 바라보며
억세게 뿌리 내리는 마른 항변을 본다
자신의 존재는 버리지 못하듯
끈끈하게 말라붙은 상념의 깃 마구 흔든다
저 멀리 한계 건너오는 날갯짓은
풀씨의 기억 품고 한껏 날아오른다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군무를 춘다
춤추는 길목마다
수많은 적극의 방식 같은 손동작들
맹목의 발자국들은 서걱서걱 포개지고
나태한 어제의 표정은 흘러가고 없어
지켜야 할 강의 방향에 맞춰 눈빛까지 바꾼다
약해서가 아니라 순응하는 중이라고
억척스럽게 몸 흔들어 말한다.
- 「억새」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억새를 의인화하여 강변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끈질긴 생명력과 순응의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생의 마지막 처소 보호하기 위해/ 오래오래 서걱이는 머리카락 쓸어 넘기다가/ 정갈하게 참빗질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억새가 뿌리 내린 곳을 "생의 마지막 처소"로 해석하며 그곳을 보호하기 위해 참빗질을 하고 있다. 신선한 해석이다. 억새는 강변에서 "부서지는 물소리 주워 담는데/ 찰랑찰랑 이가 시린 가을이 나란하"다. 날씨가 추워져 늦가을로 접어드는 시간적 배경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다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익숙한 흔들림은 오랜 습성으로 말하고/ 바람길 내며 서걱이는 소리 지"르고 있다. 흔들림은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한 갈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건 단지 두 발로 걸음을 걷듯 오랜 습성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억새는 사람들의 걸음마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흔들렸다. 흔들리는 방식으로 하루를 살고 흔들리는 방식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억새는 어떤 다짐을 한다. "멀고 먼 아침이 입안에서 맴돌기에/ 몽유의 밤 빠져나와/ 내일의 체질로 바꿔야 한"다며 마음을 먹는다. 무엇을 위해 그런 다짐을 하려는 걸까. "푸른 싹이 돋아나듯/ 야생의 기질 버리지 못해 다시 꿈"을 꾸고 싶어서다. 시적 화자는 억새를 통해서 어제도 그제도 흔들리는 방식으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다시 꿈을 꾸며 내일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저 멀리 한계 건너오는 날갯짓은/ 풀씨의 기억 품고 한껏 날아"오르고 있으니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군무를" 함께 추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허공의 춤추는 길목마다 "수많은 적극의 방식 같은 손동작들/ 맹목의 발자국들은 서걱서걱 포개지고" 있어 "나태한 어제의 표정은 흘러가고 없"다. 시 전체를 관통하며 흔들림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내리는 있다. 이 시에서 억새는 마치 몸의 피부처럼 강변에 단단히 붙어 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하며, 부서지는 물소리를 담고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특히, 억새는 익숙한 흔들림 속에서도 야생의 기질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며, 어둠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바람에 꺾이지 않는 군무를 추며 적극적으로 환경에 순응하는 존재의 강인함을 역설하고 있다.
감자 심은 텃밭에
한 움큼씩 풀이 자랐다
잠시만 내버려 두면
여기저기 발 디딜 틈 없이
온통 풀밭이 된다
충혈된 몸짓으로
과장된 자아에 도취되어
매일매일 자라는 자신의 방향
꿋꿋하게 지지하며
초록의 영토 확장해 간다
풀도 관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일까
억세게 버티며 양보하지 않는다
풀과 식물의 거리는
한 몸인 듯 동상이몽
잡초이다 못해
주인공 행세까지 하려 한다
의기양양 한철 버티는
풀의 족속
당찬 야생의 기질 때문에
당해 낼 재간이 없다
텃밭은
풀의 뒷배경이면서 중심
마찰음도 없는 잡초의 태도로
두둑과 고랑 지나가도
편견이 없는 허공은 말이 없다
여름이 끝날 무렵
주객이 전도된 모습 보게 된다
누군가 돌보지 않은 공간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잡풀이라는 시간에 잠식 당해
순간순간 허비해 버린 적 있다
때로는 스스로 잡풀이 된 적도 있다
서둘러 핀 비틀거림은 한사코
아침에서 저녁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어둑하고 왜곡된 몸 야금야금 섞으며
함부로 내던져져 깨지고 찢겨진 한때
맘대로 자라다가
풀썩 말라가는
마음의 풀밭 가진 적 있다
뒤돌아본 자리
보이지 않지만
벌거숭이로 서 있는 모습
바라본 적 있다.
- 「풀의 각성」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텃밭에 무성하게 자라는 풀의 생명력과 속성을 관찰하고 있다. 풀을 "충혈된 몸짓으로/ 과장된 자아에 도취되어/ 매일매일 자라는 자신의 방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 표현이다. "충혈된 몸짓"과 "과장된 자아"에서 시적 화자의 어떤 의도가 엿보인다. 우리도 가끔 자신의 분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른 적이 있다. 분노에 잠식당해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까지 온통 분노의 색깔을 띄며 빠져 있었다. 그 이미지를 풀과 잘 연결지어 형상화했다.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시적 화자는 "풀도 관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일까/ 억세게 버티며 양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게 연결지어 표현하고 있다. 양보하지 않는 풀의 성향을 "의기양양 한철 버티는/ 풀의 족속/ 당찬 야생의 기질 때문"이라고 한다. 무거운 주제를 유머스럽게 잘 풀어가고 있다. 우리도 분노나 절망 그리고 막무가내로 감정과 생각을 쏟아내는 그 모든 상황들을 잘 다루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가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시 속에서 슬쩍슬쩍 엿보인다. 시적 화자는 급기야 이런 고백을 한다. "잡풀이라는 시간에 잠식 당해/ 순간순간 허비해 버린 적 있"었다고 "때로는 스스로 잡풀이 된 적도 있"었다고. 부끄럽지만 진실된 그 고백에 우리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스럽게 독자의 가슴을 열게 해 시가 스며들게 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 화자는 부끄러웠던 그 시절을 "서둘러 핀 비틀거림은 한사코/ 아침에서 저녁으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어둑하고 왜곡된 몸 야금야금 섞으며/ 함부로 내던져져 깨지고 찢겨진 한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 표현 역시 낯설게 하기의 진수이면서도 쉬운 말들로 가슴에 와닿는 표현들이다. 이 시는 풀이 충혈된 몸짓으로 자신의 영토를 꿋꿋이 확장하며, 마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당찬 야생의 기질에서 시작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풀이 자라나는 모습을 통해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황을 인식하며, 돌보지 않은 공간이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궁극적으로 시적 화자는 잡초에 잠식당했던 한때의 기억과 스스로 잡풀이 되었던 내면의 경험까지 성찰하고 있다.
삼복더위 끝자락
고독의 긴 시간 뚫고
어느 순례자의 목 터져라 우는 소리가 있다
막바지 더위 한창인데
더욱 요란히 허공 가르는 소리
둘렀던 허물 힘겹게 벗고
쉼 없이 귀청 때리는 저 소리
어쩌면
일생이 걸린
소리인지도 모른다
자지러지는 소리 계속되는데
나무 아래엔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뒹군다
세상의 슬픔도 저리 뒹굴다가
순간순간 이리 흔적이라도 남기는 걸까
사람도 속울음 울 때가 있다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주머니 달고
소리 삼킨 슬픔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때가 있다.
- 「매미 울음」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매미의 울음을 고독한 순례자의 처절한 외침에 비유하여 깊은 사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시에는 의식 저편에 있는 슬픔을 응시하는 눈이 있다. 보편적인 인식을 깨뜨리는 눈으로 매미 울음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어떤 슬픔을 보았을 것이다. 어둠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슬픔을 언어의 거름망에 올려놓아 슬픔이 걸러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매미 울음과 슬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결국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것을 알아채고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주머니 달"고 속울음 우는 사람의 슬픔까지 알아채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변별성(辨別性)을 갖기 위해 시적 대상에 대해 고심하며 지루한 기다림을 묵묵히 참아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미 울음이 "어느 순례자의 목 터져라 우는 소리"로 들린다. 그 울음소리는 "어쩌면/ 일생이 걸린/ 소리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순례자는 성지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순례자는 어떤 고해 성사라도 한 것일까. 순례자가 걸어왔던 어제와 그 전의 어제가 부끄러워 목이 터져라 울었던 것일까. 매미가 울었던 "나무 아래엔/ 온 힘 다해 울던 흔적이 뒹"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세상의 슬픔도 저리 뒹굴다가/ 순간순간 이리 흔적이라도 남기는" 거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시적 화자는 삼복더위의 끝자락에 매미가 허물을 벗고 목놓아 우는 소리를 통해, 그 행위가 일생이 걸린 절박한 노력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온 힘 다해 울고 난 후 나무 아래 뒹구는 매미의 흔적을 보며, 세상의 슬픔 역시 이처럼 순간의 흔적으로 남겨질 수 있다며 사색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에게도 매미의 울음주머니보다 더 큰 슬픔 주머니가 있어, 소리를 삼킨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속울음을 울 때가 있음을 밝히며 정서를 확장해 놓고 있다.
황애라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상상력 속으로 끌어당겨 육화시켜 놓은 시적 형상화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더욱이 시어들 또한 정교한 디코럼 위에 배치해 놓고 있어, 시적 표현이 진부하지 않고 안정감을 준다. 그녀의 제2시집에서는 노년의 외로움과 가뭄, 존재의 경계와 갈망, 상사화의 강렬한 생명력, 그리고 내면의 억눌린 열망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를 성찰하는 쓸쓸한 풍경, 고단한 삶의 숭고함을 담은 노인의 수레, 그리고 독도의 조화와 포옹력 등도 노래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시적 화자는 자연물과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과 삶의 태도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시는 다양한 문학상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표현기법과 이미지 구현, 낯설게 하기, 즉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여기에 인생의 맛을 일구는 감동의 전율까지 보태져, 시의 특질을 고루 보유하고 있어, 작품의 완성도가 아주 높다. 작품의 깊이와 작품성이 조화를 이뤄, 독자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시집으로 이렇게 향긋한 열매를 맺게 되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앞으로 제3, 제4의 시집도 엮어내어,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 한결같은 찬사를 받아내기를 빈다. 여생 동안 시 창작의 아름다운 오솔길을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 선선하고 청명한 날씨 아래 시 낭송하는 아름다운 정경을 넋잃고 바라보면서
한실문예창작(12개 문학회)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국어국문학과장 역임, 대한시문학협회 회장, 박덕은 미술관 관장, 광주시민사회단체(523개)총연합회 대표회장, 노벨재단 이사장, 시인, 소설가, 동화작가,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새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광주문학상(제1회), 전라남도문화상, 김현승 문학상, 빛고을 문학상 수상, 저서 [현대시창작법], [현대소설의 이론], [문체론] 등 132권 발간)
목차
목차
□시인의 말·6
제1부 마음 그릇
마음 그릇
억새
낙타등
날마다 그랬으면
매미 울음
송호리 해변
명자꽃
쑥
하늘 벽지 안을 나는 동안
씨줄과 날줄
벽
상족암
호미곶 등대
그림자
대둔산
강변에서
제2부 민들레 노래
민들레 노래
봄까치꽃
알람 시계
반쪽인 채로
석류
이별
누군가는
다시, 봄
이른 아침
계절이 몇 번의 옷을 바꿔 입을 무렵
늦가을
기다리는 동안
무등산
독도 -작지만 큰 섬
가을비 오는 날
제3부 깨달음 하나
깨달음 하나
살면서
온도
풀의 각성
계절 끝에서
옷장 정리
노부부
치잣꽃
자연인
어느 성자의 길
유빙流氷
빈 둥지
흔적의 그늘
유리벽
입하 앞두고
달빛 흐르는 동안
제4부 청보리 필 때면
청보리 필 때면
간절곶
정읍사 오솔길
입동
시나브로
조문
불갑산 가는 길
구절초 노래
아직은
겨울꽃
저녁 거리
아버지의 그늘
그리움
사과밭
수제비
작품론
황애라 시인의 제2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박덕은
제1부 마음 그릇
마음 그릇
억새
낙타등
날마다 그랬으면
매미 울음
송호리 해변
명자꽃
쑥
하늘 벽지 안을 나는 동안
씨줄과 날줄
벽
상족암
호미곶 등대
그림자
대둔산
강변에서
제2부 민들레 노래
민들레 노래
봄까치꽃
알람 시계
반쪽인 채로
석류
이별
누군가는
다시, 봄
이른 아침
계절이 몇 번의 옷을 바꿔 입을 무렵
늦가을
기다리는 동안
무등산
독도 -작지만 큰 섬
가을비 오는 날
제3부 깨달음 하나
깨달음 하나
살면서
온도
풀의 각성
계절 끝에서
옷장 정리
노부부
치잣꽃
자연인
어느 성자의 길
유빙流氷
빈 둥지
흔적의 그늘
유리벽
입하 앞두고
달빛 흐르는 동안
제4부 청보리 필 때면
청보리 필 때면
간절곶
정읍사 오솔길
입동
시나브로
조문
불갑산 가는 길
구절초 노래
아직은
겨울꽃
저녁 거리
아버지의 그늘
그리움
사과밭
수제비
작품론
황애라 시인의 제2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 박덕은
저자
저자
황애라
ㆍ《문학공간》 시 등단 (2013)
ㆍ시집 『눈이 집 짓는 연못』(2017)
ㆍ디카시집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2022)
ㆍ시집 『깨달음 하나』(2025)
ㆍ국민일보 신춘문예회 공동기획시집
ㆍ『빛에 궁굴려진 계명』(2018),
ㆍ『너에게로 건너가는 시간』(2021),
ㆍ『초록을 읽다』(2023)
ㆍ경북일보 문학대전 수상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상 등 다수
ㆍ2017, 2022, 2025 전남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ㆍ미목문학회 시 창작 강사(재능기부)
ㆍ시집 『눈이 집 짓는 연못』(2017)
ㆍ디카시집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2022)
ㆍ시집 『깨달음 하나』(2025)
ㆍ국민일보 신춘문예회 공동기획시집
ㆍ『빛에 궁굴려진 계명』(2018),
ㆍ『너에게로 건너가는 시간』(2021),
ㆍ『초록을 읽다』(2023)
ㆍ경북일보 문학대전 수상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상 등 다수
ㆍ2017, 2022, 2025 전남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ㆍ미목문학회 시 창작 강사(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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