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어지는 것들(시와사람 서정시선 127)
정관웅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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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작품론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은 시인의 인식체계, 즉 시적 프리즘을 통해 내뿜는 다양한 시의 색채를 보여준다.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여성과 노인이라는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거나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편들을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한켠에는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 영웅화시키지 않고 세계를 잇는, 변환을 이끈 인물로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침묵이 겸손이 아니라 발화를 통해 소통하고 응답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정관웅 시인의 시는 비교적 사물과 세계의 미세한 부분에 관한 새로운 인식태도를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티보다 자연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커피숍」 같은 경우에서는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내는, 정관웅 시인에게는 매우 낯선 도시적 감각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밝히는 견해를 통해 시론적 자기성찰, 그리고 시인에 대한 냉정한 인식 태도를 잘 형상화한 시편들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듯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세계를 보여주는 시편들을 살펴본다.
2. 검은 바닥에서 피어내는 내면의 색
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흩어진 원(圓)
가벼운 그림자 밀려난다
낮게 깔린 공기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그 잿빛 틈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 「꽃의 내면」 전문
'꽃의 내면'이라는 시제는 꽃 속의 심층이 아니라, 재 속에서 겨우 남은 색채를 향한 이름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작품이지만 검은 바닥-불꽃-잿빛-붉음-동백으로 이어지는 이미지가 밀도 있게 배치되어 있다. 설명보다는 명사 중심의 구문("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잿빛 틈새", "내면의 동백꽃")으로 화면을 찍어내듯 제시해, 시가 '생각'보다 '장면'으로 먼저 다가오게 만드는 힘이 크다.
특히 이 작품은 등장하는 시적 대상이 인물, 또는 감정이 아니라 검은 면과 흔들리는 점(點)이다. 이 점은 "흩어진 원(圓)"으로 확장된다. 원은 본래 둥근 도형이지만, 여기에서는 흩어져 형태를 잃는다.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벼운 그림자"가 밀려난다. 이 장면 위로 "낮게 깔린 공기"가 도입되고, 그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얼음처럼 식는 불꽃의 이미지는 열기의 정점보다 사라져가는 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제 장면은 "잿빛 틈새"로 옮겨간다. 불꽃이 꺼져 남은 재의 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이 드러난다.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동백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재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음이다.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이 함의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나 인정에 기대지 않은 상태이다. 불꽃의 마지막 호흡, 잿빛, 틈, 늦게 떠오르는 붉음, 내면의 동백꽃, 이러한 연쇄 속에서 한 개인의 감정은 선언이나 고백으로 나타나지 않고, 불꽃과 재와 꽃의 색채로만 제시된다.
이 작품은 검은 바닥과 잿빛 사이에서 겨우 떠오른 붉은색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한 내면의 자기 색깔을 가지기까지 지나야 했던 소멸과 식음, 밀려남과 잔존의 과정을 압축한다.
3. 병과 시선, 그리고 관음의 손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 하나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었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아린 땅의 발자국 위로
새벽빛을 속삭이며 만지고 있다
- 「초승달」 전문
이 작품은 아픔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상처에 솟은 꽃과 그 꽃을 감싸는 손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면서 고통을 둘러싼 관조와 돌봄의 자세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 질병·상처에 대한 내적 서사를 곧장 '타자의 시선'으로 확장시킨다. 초승달-홍역 상처-붉은 연꽃-관음의 손으로 이어지는 종교·신화적 코드가 무리 없이 자연스러운 이미지 흐름에 흡수되며, 도식적 상징의 시가 되지 않는 점은 시를 이끌어가는 시인의 관점이 참신하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이다. 말이 되지 못한 초승달은 고통과 연결되고, 이 초승달은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워 올린다. 몸이 앓아 겪은 상처와 그 상처에서 돋아난 감정이 붉음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하나의 장면으로 묶인다. 이어서 시선은 손으로 옮겨간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위에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한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배치된다. 한 손이 땅을 어루만지고 다른 손이 허공의 문을 만지는 이 형상은, 고통과 위안을 동시에 향하는 몸의 자세를 보여준다. 손은 땅과 하늘, 육체와 초월, 현재와 다른 차원을 동시에 더듬는다.
이 손들의 아래에서 "아린 땅의 발자국"이 새벽빛의 속삭임을 받는다. 초승달, 홍역의 상처, 붉은 연꽃, 정한수, 관음의 손, 새벽빛, 이 연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병은 통증의 사건을 넘어 땅과 몸, 눈물과 기도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이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노인·고통·가난·노동'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초승달과 관음의 손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미리 보여준다.
4. 여성의 생애와 꽃의 기억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리를 방아 찧어 밥솥에 삶아서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었다. 일은 거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김을 파래와 구별하여 놓아두는 일이 시작된다
손길은 얼음으로 동여맨 매서운 바람이다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로, 들로 발길이 멈추는 일이 없다
때로는 수많은 수면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외동딸로 태어나 결혼을 하여
시할아버지, 시부모님, 시동생 칠 남매
그리고 이어지는 세월 속에 일곱이나 되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장남 가족의 큰며느리의 역할이었다
언제나 시간이 똑똑 떨어져 밤이슬이 되어도
이랑 길에 어두운 그림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날 침상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앙상한 몸에는 잔주름으로 쌓여있다 가죽만 있는 모습은
어두운 그림자로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 간신히 덥혀 있다
누군가의 옛 추억들을 읽어가는 모습에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산소 호흡기만 소리 내어 공기를 흔들고 빛은 떨어져 가고
젊었을 때 모습은 그곳에 없다. 분명 있었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었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로제트 상태로 겨울을 견디어 내고
이듬해 무성하게 줄기를 곧게 뻗어 잎사귀 사이에서
꽃을 피웠던 꽃이 아니었다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 접시꽃은
- 「손가락 접시꽃」 전문
서사구조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어머니의 지난한 생애를 접시꽃의 생태적 특성을 빌어 노래하였다.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라는 기억으로 시작되는데 새벽 노동의 장면으로 어머니의 삶을 구체화한다. 보리를 방아에 찧어 밥솥에 삶고,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는 일, 파래와 김을 구별하는 일,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와 들을 오가는 발길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외동딸이면서도 큰며느리, 칠남매의 어머니, 노동의 연속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침상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다.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에 덮인 채 앙상한 형체,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연명하고 있는 처지이다. "젊었을 때 모습은" 사라지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다. 겨울은 견디고, 다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던 식물의 생애와 노동으로 이어진 어머니의 생애를 동일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꽃은 정원의 장식이 아니라 어머니 인생을 은유하는 시적 상관물로 나타난다.
병상의 어머니는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이 시간을 만지고 놓으려 하는 행위 속에서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삶을 천천히 내려놓는 제스처를 보인다.
이 시편은 농촌 여성의 생애사, 가족 구조, 노동과 늙음, 생명과 식물의 시간을 세밀하고 내밀하게 병치시키면서, 접시꽃이라는 이름을 깊고 무거운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5. 겨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을 밝고 가며
손끝이 시려서 하얀 입김으로 녹인 노인을 본다
지상에서 쫓겨난 몸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길이다
그에게도 한때 넓은 강폭의 청춘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내 몸안의 무지개가 사라지고
소나무 껍질 같은 거친 살결이 등고선을 그리며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보다 못한 시간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흰 머리칼이 찬 바람에 쏠리고
고요밖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이 싸락눈이라도 되어
뿌렸으면 좋겠다
올려면 소복히 쌓여서 들녘 위를 덮지
길을 가다 가끔 기침을 한다
고독이 사막처럼 넓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는다
바람은 길 위에서 가끔 짐승 소리를 내고
노인은 가다 길을 멈춘다
하늘에서 이팝나무꽃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그를 위해 눈 곡간을 푸는 것일까
노인의 눈가에 미소가 올라온다
이팝나무 꽃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겨울 아침
마침내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을 버리고
하얀 돌담길 사이로 한발 또 한발 집으로 옮기고 있다
포개고 자꾸 포개지는 입술 사이로
버려지지 않는 마음의 꽃 그리며 간다
- 「겨울의 그림」 전문
이 작품도 위에서 살펴본 「초승달」, 「손가락 접시꽃」과 더불어 시적 대상이 인물들이다. 위의 작품들은 모두 여성인데 반해 「겨울의 그림」은 '노인'이다. 「초승달」에서는 병들었거나 상처 입은 사람이고, 「손가락 접시꽃」은 여성(어머니)이다. 「겨울의 그림」에서는 '불쌍한 존재'는 아니지만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노인'으로 손수레를 끌며 곤궁하게 삶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시인의 관심과 시적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시적 화자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 "손끝이 시려서 하얀 입김으로 녹인 노인을 본다". 3인칭 시점으로 노인의 삶을 투시하는 형식의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지상에서 쫓겨난 몸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의 길을 주시하고 있다. 초라하고 누추하게 자신의 삶을 끌고 가는 노인도 "한때 넓은 강폭의 청춘이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무지개'로 상징화된 빛나는 때도 있었을 노인은 "소나무 껍질 같은 거친 살결이 등고선을 그리며" "여치보다 못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이 작품은 겨울 한복판에서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흰 머리칼이 찬바람에 쏠리고"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 "길을 가다 가끔 기침을 한다" "고독이 사막처럼 넓다" "바람은 길 위에서 가끔 짐승 소리를 내고/ 노인은 가다 길을 멈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노인이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시적 화자는 노인의 삶의 조건으로 직설적 사회비판을 하지 않고 노인이 가는 길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다.
겨울이어도 눈이 내리지 않는 전반부의 시적 정황은 노인의 버거운 삶을 형상화하였지만, 축복과 은총의 상징인 눈이 마지막 연에서 "하늘에서 이팝나무꽃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며 노인이 그려내는 겨울 그림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하늘이 그를 위해 눈 곡간을 푸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노인의 눈가에 미소가 올라온다"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팝나무 꽃이 눈을 닮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흰 쌀'을 닮았음을 시적 화자는 주목한다. 그리고 이팝나무 꽃이 봄에 피는 꽃임도 시적 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봄과 겨울이 뒤섞이며 노년과 젊음, 추위와 축복이 한 화면에 겹치는 구조를 보여준다.
"마침내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을 버리고/ 하얀 돌담길 사이로 한발 또 한발 집으로 옮기고 있다"며 노인의 길이 축복과 희망의 길임을 묘파하고 있다.
6. 바다와 별, 장보고의 빛
길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열어 절망과 죽음의 바다를 꿈틀거리는
약속의 땅으로 바꿔 놓았다
가슴으로 그 대륙의 바다 문을 열었다
파도의 말을 이해했던 그는
서릿발 사나운 세상으로 해적을 내몰았다
이별의 바다가 아니라 한판 춤으로
그려낸 희망의 불꽃이었다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바다의 물결이 남겨놓은 생명의 자국에서
해상왕이란 밝은 별 하나를 바다에 그려
바닷길 오가는 삶의 생명줄 열어
얼룩진 시간을 없게 했다
영롱한 목소리와 포옹의 높은 산 울림소리로
별, 바다의 별로
불빛이 닿아 황금의 시간을 열었다
수십 겹 덧대진 생명의 운명처럼
밝은 세계 속의 해상무역과 자유는
꽃과 열매가 지고 피고 열리듯
수없는 역사가 흘러도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
당신이 키우는 눈길 너머 불타는 바다의 마음을
머물던 그 역동적인 풍경 속 그대로
청해진은 오늘도 바다의 빛을 담은 편지로
찬란한 달빛 속에 배달되고 있다
시대의 빛나는 눈길로
혈관을 따라 두 눈 뜨고 있다
- 「바다의 빛 장보고」 전문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유일하게 역사적 인물을 다룬 작품이다. 장보고라는 걸출한 역사인물을 영웅 숭배보다는 바다와 빛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동북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인물인 장보고를 시적 화자는 "약속의 땅으로 바꿔놓았다" "가슴으로 그 대륙의 바다문을 열었다" "서릿발 사나운 세상으로 해적을 내몰았다" "희망의 불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장보고를 '해상왕' '밝은 별 하나'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길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절망과 죽음의 바다"를 "약속의 땅"으로 변환시킨 장보고의 삶을 되살린다. 그러므로 장보고를 '별'로 상징화하는 것인데, 이 별은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바다의 생명줄에서 빛나는 별이다. 장보고 시절 열었던 "밝은 세계 속의 해상무역과 자유는/ 꽃과 열매가 지고 피고 열리듯/ 수없는 역사가 흘러도/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고 한다. 장보고 시절 해상을 장악했던 역사를 오늘 우리가 재현하고 있으니 장보고의 빛나는 별과 빛을 이어받아 빛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 연에서 "청해진은 오늘도 바다의 빛을 담은 편지로/ 찬란한 달빛 속에 배달되고 있다" 청해진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편지의 발신지로 묘사된다. 편지는 시간을 넘어 전달되는 메시지이자, 빛의 통로이다.
이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시가 단지 장보고라는 특정 인물의 개인적 서정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 지역, 공동체를 상상하는 집단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이 작품은 역사와 바다라는 거시적 시야를 제공하여 작품 세계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7. 잡히지 않는 것의 자리
앵두로, 살구로 환히 열렸으면 좋으련만
말들은 언제나 몇 개의 점처럼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해 뜨는 자리의 소유권조차 쥐지 못해
아침은 늘 빈 손으로 찾아오고
나는 그 빈자리에 허기를 쑤셔 넣는다
흰 구름은 아무 말 없이 흐르며
내가 잃어버린 문장 위를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 길처럼 넘나들고
핏줄이 만든 오래된 통로 위로 날아오르다
멈춘 낱말의 종이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끝에 밟혀
종잇장보다 얇은 생의 소리를 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시란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상처 같은 것들이
잠시 형태를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남는 것은 찬란함도
거대한 의미도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머물다 간
그런 자리 하나뿐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 말들은
떠나간 뒤에도
한동안 세상에 머물러 울릴 것만 같아
나는 오늘도 하얀 백지 앞에 앉는다
- 「시인」 전문
대부분의 시인이 '시'가 무엇인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른바 메타시(Metapoetry)를 써왔다. 이는 '시에 대한 시, 시 쓰기에 대한 시', '시인의 역할'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시와 시인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시인의 시론적 자기성찰을 탐구한 시편으로 독자적으로도 읽히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시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그냥/ 그 자리")를 만들고자 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해석·주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에서 작가론적·시론적 핵심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첫 행에서 시적 화자는 "앵두로, 살구로 환히 열렸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과일은 익음과 풍요, 성공을 나타내는 시적 표지이다. 그러나 곧 "말들은 언제나 몇 개의 점처럼/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은 구체적인 문장이 아니라 냄새를 뜻한다. 점과 냄새라는 이미지는 언어가 형태를 잡기도 전에 흩어진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해 뜨는 자리의 소유권조차 쥐지 못"하고, 아침마다 빈 손으로 시간을 맞는다. 그 빈자리에 "허기를 쑤셔 넣는" 장면은, 시를 쓰는 일이 생계와 무관한 허기를 더하는 행위일 수도 있음을 말한다. "흰구름은 아무 말 없이 흐르며/ 내가 잃어버린 문장 위를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 길처럼 넘나"든다는 대목에서 구름은 문장 위를 스치되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해석한다.
4연은 "멈춘 낱말의 종이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끝에 밟혀/ 종잇장보다 얇은 생의 소리를 낸다"는 시의 종이가 갖는 물질성을 강조한다. 낱말은 종이 속에 멈춰있지만, 종이는 밟히면서도 아주 약한 소리를 낸다. 이것은 시인의 생을 나타내는 소리이다.
"시란/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상처 같은 것들이/ 잠시 형태를 만드는 일"에 이르러 시인은 시를 완전한 진술이 아니라, 잡히지 않는 것들에게 잠시 형태를 허락하는 일로 규정한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상처, 이러한 대상들은 모두 중심이 아니거나 표면이 아니거나, 원인이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가 만들어내는 것은 "찬란함도/ 거대한 의미도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머물다 간/ 그런 자리 하나뿐"이다. 이 자리는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내면의 동백과 초승달의 상처, 접시꽃과 노인과 바다의 빛이 머물렀던 자리와 겹친다.
8. 정적과 시간의 길이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빛이 먼저 흔들렸다
책을 펼치기 전
손가락에 스치던 마음이
커피 향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는 그 미세한 순간마다
입술을 닫은 채 시간을 되씹는다
마치 오래된 시계의 모습을
손끝으로 더듬는 것처럼
창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가지만
그녀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내 시간의 중심에 머문다
언젠가 우리도
구겨진 그림자처럼 늙어갈 테지만
오늘의 이 부드러운 정적만은
어디에도 흩어지지 않기를
그녀가 책갈피를 천천히 덮을 때
나는 그 손의 움직임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용히
깊어져 가는 시간을 삼키며 웃었다
- 「커피숍」 전문
정관웅의 시편들에서는 보기 드문 도시적 공간을 시적 제재로 다룬 작품이다. 도시적 정서와 시인의 미세한 감각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관계는 고백이나 사건으로 폭발하지 않고 '조용한 정적'과 '내부 독백'으로만 남는 점이 이 시집 전체에 투사된 윤리성과 호응한다.
작품의 배경인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빛이 먼저 흔들렸다"는 식으로 빛의 변화를 통해 타자의 도착을 포착하는 점이 섬세하고 예리하다. 화자는 책을 펼치기 전, 손가락 끝을 스친 마음이 "커피 향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마음'이라는 정신적 표정을 후각적 이미지인 "커피향"을 통해 지각하는 내밀한 감각으로 인식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시계의 모습을/ 손끝으로 더듬는" 시간과 겹치는 표현도 매우 감각적이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시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창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가지만"에서도 외부 사람들은 각자의 그림자를 밟고 사라진다고 서술한 것과 "그녀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내 시간의 중심에 머문다"고 한 대목이 대비를 이루는데, 타인의 그림자는 스쳐가고, 누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시적 화자의 시간을 구성하는 축으로 남는다.
후반부에서 "오늘의 이 부드러운 정적만은/ 어디에도 흩어지지 않기를"이라고 시적 화자의 소망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사랑이나 애정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대신 "부드러운 정적"이 둘 사이의 관계를 형상화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그 손의 움직임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생각한다"며, 한 번 책갈피를 덮는 손의 행동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느껴지는 경험은 시간의 객관적 길이가 아니라 감정의 밀도를 측정하는 방식이 된다.
이 작품은 도시의 일상적인 공간인 커피숍을 배경으로,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 것으로, 시인의 예리한 감각의 촉수가 빛난다.
9. 가을 풍경과 발화의 결심
이렇게 쓰고 싶었다
나뭇잎이 익어 자기 색 입던 날
가벼운 바람에도 쓸려갈 수 있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구름이 되어
침묵으로 세상을 스치고 싶었다
가을 땅은 나뭇가지 기우는 길의 붉은 그림자로
조용히 다가왔고
그림자는 한 장씩 삶을 그려냈다
바람에 빛이 된 사람들이
저마다의 그리움을 이끌고 밀려왔다
진실한 그리움이 말을 걸었다
다가서는 발걸음은 망설임이었고
한 사람의 몸을 다 채우고
그 망설임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숨기고만 있던 말들이
목 끝에서 햇빛처럼 터져 나왔다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한 평 땅조차 가지지 못한 햇빛이라도
빛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나는 일어섰다
대지 위에 누워 있던
내 속살에다
하루를 견디는 따뜻한 숨을 심었다
-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전문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드물지 않은,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침묵하지 말 것'이라는 윤리적 요청이다. 시적 화자는 단풍 드는 가을날 "가벼운 바람에도 쓸려갈 수 있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구름이 되어/ 침묵으로 세상을 스치고 싶었다"고 진술한다. 가을의 깊은 색채와 조용한 이동 속에서 말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 땅은 나뭇가지 기우는 길의 붉은 그림자로/ 조용히 다가왔고/ 그림자는 한 장씩 삶을 그려냈다"고 한다. 붉은 그림자와 삶을 그려내는 그림자의 계절과 기억이 겹치는 장면이다. 이후 "바람에 빛이 된 사람들이/ 저마다의 그리움을 이끌고 밀려왔다/ 진실한 그리움이 말을 걸"어온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망설임"이 "나를 일으켜 세"우자 "숨기고만 있던 말들이/ 목 끝에서 햇빛처럼 터져 나"오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나는 일어섰다/ 대지 위에 누워 있던/ 내 속살에다/ 하루를 견디는 따뜻한 숨을 심"는 것이다. 숨을 심는 행위는, 세계를 바꾸는 거대한 정치적 언사이기보다, 자신과 대지가 맞닿은 자리에서 하루를 겨우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결심에 가깝다. 이 작품은 가을 풍경과 개인의 내면, 타자의 그리움과 망설이는 발걸음을 한 화면에 올려놓고, 침묵과 발화의 경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10.
살펴본 여덟 편의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을 관통하면서도 시인의 시적 세계를 함축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작품마다 각각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지만, 검은 바닥의 점과 잿빛 틈의 붉음, 병든 달과 관음의 손, 커피, 접시꽃과 노동의 몸, 겨울길과 눈의 꽃, 바다와 별빛, 빈 종이와 빛의 옆구리, 커피숍과 빛의 떨림, 가을 그림자와 터져 나오는 햇빛이라는 일련의 이미지로 서로 연결된다. 정관웅 시인의 시세계에서 색채와 계절, 노동과 노년, 역사와 언어는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잡히지 않는 것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것들, 이름을 붙이기 전의 감정들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를, 가능한 한 정직하고 섬세한 언어로 마련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은 시인의 인식체계, 즉 시적 프리즘을 통해 내뿜는 다양한 시의 색채를 보여준다.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여성과 노인이라는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거나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편들을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한켠에는 역사적 위인을 등장시켜 영웅화시키지 않고 세계를 잇는, 변환을 이끈 인물로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침묵이 겸손이 아니라 발화를 통해 소통하고 응답하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정관웅 시인의 시는 비교적 사물과 세계의 미세한 부분에 관한 새로운 인식태도를 발견하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도시적 모더니티보다 자연을 통해 시적 발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커피숍」 같은 경우에서는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그려내는, 정관웅 시인에게는 매우 낯선 도시적 감각을 형상화하기도 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밝히는 견해를 통해 시론적 자기성찰, 그리고 시인에 대한 냉정한 인식 태도를 잘 형상화한 시편들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듯 이 시집을 관통하는 시세계를 보여주는 시편들을 살펴본다.
2. 검은 바닥에서 피어내는 내면의 색
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흩어진 원(圓)
가벼운 그림자 밀려난다
낮게 깔린 공기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그 잿빛 틈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 「꽃의 내면」 전문
'꽃의 내면'이라는 시제는 꽃 속의 심층이 아니라, 재 속에서 겨우 남은 색채를 향한 이름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작품이지만 검은 바닥-불꽃-잿빛-붉음-동백으로 이어지는 이미지가 밀도 있게 배치되어 있다. 설명보다는 명사 중심의 구문("검은 바닥 위/ 점 하나 흔들림", "잿빛 틈새", "내면의 동백꽃")으로 화면을 찍어내듯 제시해, 시가 '생각'보다 '장면'으로 먼저 다가오게 만드는 힘이 크다.
특히 이 작품은 등장하는 시적 대상이 인물, 또는 감정이 아니라 검은 면과 흔들리는 점(點)이다. 이 점은 "흩어진 원(圓)"으로 확장된다. 원은 본래 둥근 도형이지만, 여기에서는 흩어져 형태를 잃는다.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벼운 그림자"가 밀려난다. 이 장면 위로 "낮게 깔린 공기"가 도입되고, 그 속에서 "불꽃의 마지막 호흡"이 "얼음처럼 식어간다". 얼음처럼 식는 불꽃의 이미지는 열기의 정점보다 사라져가는 끝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제 장면은 "잿빛 틈새"로 옮겨간다. 불꽃이 꺼져 남은 재의 틈에서 "늦게 피어오르는 붉음"이 드러난다. 붉음은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 내면의 동백꽃 같다". 동백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 아니라, 재 속에서 피어오르는 붉음이다. "아무에게도 기울지 않는"이 함의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나 인정에 기대지 않은 상태이다. 불꽃의 마지막 호흡, 잿빛, 틈, 늦게 떠오르는 붉음, 내면의 동백꽃, 이러한 연쇄 속에서 한 개인의 감정은 선언이나 고백으로 나타나지 않고, 불꽃과 재와 꽃의 색채로만 제시된다.
이 작품은 검은 바닥과 잿빛 사이에서 겨우 떠오른 붉은색 하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한 내면의 자기 색깔을 가지기까지 지나야 했던 소멸과 식음, 밀려남과 잔존의 과정을 압축한다.
3. 병과 시선, 그리고 관음의 손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 하나
내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었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아린 땅의 발자국 위로
새벽빛을 속삭이며 만지고 있다
- 「초승달」 전문
이 작품은 아픔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상처에 솟은 꽃과 그 꽃을 감싸는 손의 움직임만을 보여주면서 고통을 둘러싼 관조와 돌봄의 자세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앓고 있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묻어온 시선도 있다"라는 진술에서 보듯 질병·상처에 대한 내적 서사를 곧장 '타자의 시선'으로 확장시킨다. 초승달-홍역 상처-붉은 연꽃-관음의 손으로 이어지는 종교·신화적 코드가 무리 없이 자연스러운 이미지 흐름에 흡수되며, 도식적 상징의 시가 되지 않는 점은 시를 이끌어가는 시인의 관점이 참신하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말이 되지 못한/ 한숨 같은 처녀 초승달"이다. 말이 되지 못한 초승달은 고통과 연결되고, 이 초승달은 "가슴 깊은 곳으로 지나간 흔적 속에/ 홍역의 상처로 붉은 연꽃 한 송이" 피워 올린다. 몸이 앓아 겪은 상처와 그 상처에서 돋아난 감정이 붉음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하나의 장면으로 묶인다. 이어서 시선은 손으로 옮겨간다. "정한수처럼 가느다랗게 떨며/ 달빛에 젖은 눈물로 몸을 녹이는 시간" 위에 "한 손은 땅을 쓰다듬고/ 다른 한 손은 허공의 문을 어루만지는/ 관음의 손들"이 배치된다. 한 손이 땅을 어루만지고 다른 손이 허공의 문을 만지는 이 형상은, 고통과 위안을 동시에 향하는 몸의 자세를 보여준다. 손은 땅과 하늘, 육체와 초월, 현재와 다른 차원을 동시에 더듬는다.
이 손들의 아래에서 "아린 땅의 발자국"이 새벽빛의 속삭임을 받는다. 초승달, 홍역의 상처, 붉은 연꽃, 정한수, 관음의 손, 새벽빛, 이 연속적인 이미지 속에서 병은 통증의 사건을 넘어 땅과 몸, 눈물과 기도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이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노인·고통·가난·노동'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초승달과 관음의 손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미리 보여준다.
4. 여성의 생애와 꽃의 기억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리를 방아 찧어 밥솥에 삶아서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었다. 일은 거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김을 파래와 구별하여 놓아두는 일이 시작된다
손길은 얼음으로 동여맨 매서운 바람이다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로, 들로 발길이 멈추는 일이 없다
때로는 수많은 수면이 필요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외동딸로 태어나 결혼을 하여
시할아버지, 시부모님, 시동생 칠 남매
그리고 이어지는 세월 속에 일곱이나 되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장남 가족의 큰며느리의 역할이었다
언제나 시간이 똑똑 떨어져 밤이슬이 되어도
이랑 길에 어두운 그림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날 침상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앙상한 몸에는 잔주름으로 쌓여있다 가죽만 있는 모습은
어두운 그림자로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 간신히 덥혀 있다
누군가의 옛 추억들을 읽어가는 모습에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산소 호흡기만 소리 내어 공기를 흔들고 빛은 떨어져 가고
젊었을 때 모습은 그곳에 없다. 분명 있었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었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로제트 상태로 겨울을 견디어 내고
이듬해 무성하게 줄기를 곧게 뻗어 잎사귀 사이에서
꽃을 피웠던 꽃이 아니었다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 접시꽃은
- 「손가락 접시꽃」 전문
서사구조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어머니의 지난한 생애를 접시꽃의 생태적 특성을 빌어 노래하였다. "맑은 바람결에 접시꽃이 흔들려/ 진홍빛 그 모습 그렸던 아침"이라는 기억으로 시작되는데 새벽 노동의 장면으로 어머니의 삶을 구체화한다. 보리를 방아에 찧어 밥솥에 삶고, 소쿠리에 퍼담아 걸어두는 일, 파래와 김을 구별하는 일, 아침이 오기도 전에 바다와 들을 오가는 발길 등이 그것들이다. 이렇듯 외동딸이면서도 큰며느리, 칠남매의 어머니, 노동의 연속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제 침상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다. "참새 깃털 같은 이불 하나"에 덮인 채 앙상한 형체, 산소호흡기에 매달려 연명하고 있는 처지이다. "젊었을 때 모습은" 사라지고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우던 접시꽃"은 이제 그 접시꽃이 아니다. 겨울은 견디고, 다시 줄기를 뻗어 꽃을 피우던 식물의 생애와 노동으로 이어진 어머니의 생애를 동일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꽃은 정원의 장식이 아니라 어머니 인생을 은유하는 시적 상관물로 나타난다.
병상의 어머니는 "코로 음식을 먹는, 뼈로만 그려진" 시간을 견디고 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느린 손가락으로/ 시간을 놓으려 만지고 있다." 손가락이 시간을 만지고 놓으려 하는 행위 속에서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삶을 천천히 내려놓는 제스처를 보인다.
이 시편은 농촌 여성의 생애사, 가족 구조, 노동과 늙음, 생명과 식물의 시간을 세밀하고 내밀하게 병치시키면서, 접시꽃이라는 이름을 깊고 무거운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다.
5. 겨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을 밝고 가며
손끝이 시려서 하얀 입김으로 녹인 노인을 본다
지상에서 쫓겨난 몸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길이다
그에게도 한때 넓은 강폭의 청춘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내 몸안의 무지개가 사라지고
소나무 껍질 같은 거친 살결이 등고선을 그리며
이슬을 건너가는 여치보다 못한 시간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흰 머리칼이 찬 바람에 쏠리고
고요밖에는 아무 소식도 없다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이 싸락눈이라도 되어
뿌렸으면 좋겠다
올려면 소복히 쌓여서 들녘 위를 덮지
길을 가다 가끔 기침을 한다
고독이 사막처럼 넓다
아직 눈이 내리지 않는다
바람은 길 위에서 가끔 짐승 소리를 내고
노인은 가다 길을 멈춘다
하늘에서 이팝나무꽃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그를 위해 눈 곡간을 푸는 것일까
노인의 눈가에 미소가 올라온다
이팝나무 꽃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겨울 아침
마침내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을 버리고
하얀 돌담길 사이로 한발 또 한발 집으로 옮기고 있다
포개고 자꾸 포개지는 입술 사이로
버려지지 않는 마음의 꽃 그리며 간다
- 「겨울의 그림」 전문
이 작품도 위에서 살펴본 「초승달」, 「손가락 접시꽃」과 더불어 시적 대상이 인물들이다. 위의 작품들은 모두 여성인데 반해 「겨울의 그림」은 '노인'이다. 「초승달」에서는 병들었거나 상처 입은 사람이고, 「손가락 접시꽃」은 여성(어머니)이다. 「겨울의 그림」에서는 '불쌍한 존재'는 아니지만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노인'으로 손수레를 끌며 곤궁하게 삶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시인의 관심과 시적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시적 화자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 "손끝이 시려서 하얀 입김으로 녹인 노인을 본다". 3인칭 시점으로 노인의 삶을 투시하는 형식의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지상에서 쫓겨난 몸으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의 길을 주시하고 있다. 초라하고 누추하게 자신의 삶을 끌고 가는 노인도 "한때 넓은 강폭의 청춘이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무지개'로 상징화된 빛나는 때도 있었을 노인은 "소나무 껍질 같은 거친 살결이 등고선을 그리며" "여치보다 못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이 작품은 겨울 한복판에서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흰 머리칼이 찬바람에 쏠리고" "입에서 나온 하얀 입김" "길을 가다 가끔 기침을 한다" "고독이 사막처럼 넓다" "바람은 길 위에서 가끔 짐승 소리를 내고/ 노인은 가다 길을 멈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노인이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시적 화자는 노인의 삶의 조건으로 직설적 사회비판을 하지 않고 노인이 가는 길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다.
겨울이어도 눈이 내리지 않는 전반부의 시적 정황은 노인의 버거운 삶을 형상화하였지만, 축복과 은총의 상징인 눈이 마지막 연에서 "하늘에서 이팝나무꽃 같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며 노인이 그려내는 겨울 그림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하늘이 그를 위해 눈 곡간을 푸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노인의 눈가에 미소가 올라온다"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팝나무 꽃이 눈을 닮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흰 쌀'을 닮았음을 시적 화자는 주목한다. 그리고 이팝나무 꽃이 봄에 피는 꽃임도 시적 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봄과 겨울이 뒤섞이며 노년과 젊음, 추위와 축복이 한 화면에 겹치는 구조를 보여준다.
"마침내 찬바람이 시키는 계절의 일들을 버리고/ 하얀 돌담길 사이로 한발 또 한발 집으로 옮기고 있다"며 노인의 길이 축복과 희망의 길임을 묘파하고 있다.
6. 바다와 별, 장보고의 빛
길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열어 절망과 죽음의 바다를 꿈틀거리는
약속의 땅으로 바꿔 놓았다
가슴으로 그 대륙의 바다 문을 열었다
파도의 말을 이해했던 그는
서릿발 사나운 세상으로 해적을 내몰았다
이별의 바다가 아니라 한판 춤으로
그려낸 희망의 불꽃이었다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바다의 물결이 남겨놓은 생명의 자국에서
해상왕이란 밝은 별 하나를 바다에 그려
바닷길 오가는 삶의 생명줄 열어
얼룩진 시간을 없게 했다
영롱한 목소리와 포옹의 높은 산 울림소리로
별, 바다의 별로
불빛이 닿아 황금의 시간을 열었다
수십 겹 덧대진 생명의 운명처럼
밝은 세계 속의 해상무역과 자유는
꽃과 열매가 지고 피고 열리듯
수없는 역사가 흘러도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
당신이 키우는 눈길 너머 불타는 바다의 마음을
머물던 그 역동적인 풍경 속 그대로
청해진은 오늘도 바다의 빛을 담은 편지로
찬란한 달빛 속에 배달되고 있다
시대의 빛나는 눈길로
혈관을 따라 두 눈 뜨고 있다
- 「바다의 빛 장보고」 전문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유일하게 역사적 인물을 다룬 작품이다. 장보고라는 걸출한 역사인물을 영웅 숭배보다는 바다와 빛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동북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인물인 장보고를 시적 화자는 "약속의 땅으로 바꿔놓았다" "가슴으로 그 대륙의 바다문을 열었다" "서릿발 사나운 세상으로 해적을 내몰았다" "희망의 불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장보고를 '해상왕' '밝은 별 하나'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길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절망과 죽음의 바다"를 "약속의 땅"으로 변환시킨 장보고의 삶을 되살린다. 그러므로 장보고를 '별'로 상징화하는 것인데, 이 별은 권력의 정점이 아니라, 바다의 생명줄에서 빛나는 별이다. 장보고 시절 열었던 "밝은 세계 속의 해상무역과 자유는/ 꽃과 열매가 지고 피고 열리듯/ 수없는 역사가 흘러도/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살아있다"고 한다. 장보고 시절 해상을 장악했던 역사를 오늘 우리가 재현하고 있으니 장보고의 빛나는 별과 빛을 이어받아 빛나는 역사를 재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 연에서 "청해진은 오늘도 바다의 빛을 담은 편지로/ 찬란한 달빛 속에 배달되고 있다" 청해진은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편지의 발신지로 묘사된다. 편지는 시간을 넘어 전달되는 메시지이자, 빛의 통로이다.
이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시가 단지 장보고라는 특정 인물의 개인적 서정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 지역, 공동체를 상상하는 집단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이 작품은 역사와 바다라는 거시적 시야를 제공하여 작품 세계의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7. 잡히지 않는 것의 자리
앵두로, 살구로 환히 열렸으면 좋으련만
말들은 언제나 몇 개의 점처럼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해 뜨는 자리의 소유권조차 쥐지 못해
아침은 늘 빈 손으로 찾아오고
나는 그 빈자리에 허기를 쑤셔 넣는다
흰 구름은 아무 말 없이 흐르며
내가 잃어버린 문장 위를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 길처럼 넘나들고
핏줄이 만든 오래된 통로 위로 날아오르다
멈춘 낱말의 종이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끝에 밟혀
종잇장보다 얇은 생의 소리를 낸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시란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상처 같은 것들이
잠시 형태를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여 남는 것은 찬란함도
거대한 의미도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머물다 간
그런 자리 하나뿐
그 자리에서 다시 태어난 말들은
떠나간 뒤에도
한동안 세상에 머물러 울릴 것만 같아
나는 오늘도 하얀 백지 앞에 앉는다
- 「시인」 전문
대부분의 시인이 '시'가 무엇인지,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른바 메타시(Metapoetry)를 써왔다. 이는 '시에 대한 시, 시 쓰기에 대한 시', '시인의 역할'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시와 시인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시인의 시론적 자기성찰을 탐구한 시편으로 독자적으로도 읽히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시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그냥/ 그 자리")를 만들고자 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해석·주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 시집에서 작가론적·시론적 핵심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첫 행에서 시적 화자는 "앵두로, 살구로 환히 열렸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과일은 익음과 풍요, 성공을 나타내는 시적 표지이다. 그러나 곧 "말들은 언제나 몇 개의 점처럼/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은 구체적인 문장이 아니라 냄새를 뜻한다. 점과 냄새라는 이미지는 언어가 형태를 잡기도 전에 흩어진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해 뜨는 자리의 소유권조차 쥐지 못"하고, 아침마다 빈 손으로 시간을 맞는다. 그 빈자리에 "허기를 쑤셔 넣는" 장면은, 시를 쓰는 일이 생계와 무관한 허기를 더하는 행위일 수도 있음을 말한다. "흰구름은 아무 말 없이 흐르며/ 내가 잃어버린 문장 위를 한 번도/ 걸려본 적 없는 길처럼 넘나"든다는 대목에서 구름은 문장 위를 스치되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해석한다.
4연은 "멈춘 낱말의 종이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끝에 밟혀/ 종잇장보다 얇은 생의 소리를 낸다"는 시의 종이가 갖는 물질성을 강조한다. 낱말은 종이 속에 멈춰있지만, 종이는 밟히면서도 아주 약한 소리를 낸다. 이것은 시인의 생을 나타내는 소리이다.
"시란/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상처 같은 것들이/ 잠시 형태를 만드는 일"에 이르러 시인은 시를 완전한 진술이 아니라, 잡히지 않는 것들에게 잠시 형태를 허락하는 일로 규정한다. 구름의 그림자, 빛의 옆구리, 상처, 이러한 대상들은 모두 중심이 아니거나 표면이 아니거나, 원인이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시가 만들어내는 것은 "찬란함도/ 거대한 의미도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 머물다 간/ 그런 자리 하나뿐"이다. 이 자리는 이 시집에 등장하는 내면의 동백과 초승달의 상처, 접시꽃과 노인과 바다의 빛이 머물렀던 자리와 겹친다.
8. 정적과 시간의 길이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빛이 먼저 흔들렸다
책을 펼치기 전
손가락에 스치던 마음이
커피 향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는 그 미세한 순간마다
입술을 닫은 채 시간을 되씹는다
마치 오래된 시계의 모습을
손끝으로 더듬는 것처럼
창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가지만
그녀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내 시간의 중심에 머문다
언젠가 우리도
구겨진 그림자처럼 늙어갈 테지만
오늘의 이 부드러운 정적만은
어디에도 흩어지지 않기를
그녀가 책갈피를 천천히 덮을 때
나는 그 손의 움직임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생각한다
나는 조용히
깊어져 가는 시간을 삼키며 웃었다
- 「커피숍」 전문
정관웅의 시편들에서는 보기 드문 도시적 공간을 시적 제재로 다룬 작품이다. 도시적 정서와 시인의 미세한 감각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관계는 고백이나 사건으로 폭발하지 않고 '조용한 정적'과 '내부 독백'으로만 남는 점이 이 시집 전체에 투사된 윤리성과 호응한다.
작품의 배경인 카페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빛이 먼저 흔들렸다"는 식으로 빛의 변화를 통해 타자의 도착을 포착하는 점이 섬세하고 예리하다. 화자는 책을 펼치기 전, 손가락 끝을 스친 마음이 "커피 향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마음'이라는 정신적 표정을 후각적 이미지인 "커피향"을 통해 지각하는 내밀한 감각으로 인식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시계의 모습을/ 손끝으로 더듬는" 시간과 겹치는 표현도 매우 감각적이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시계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창밖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지나가지만"에서도 외부 사람들은 각자의 그림자를 밟고 사라진다고 서술한 것과 "그녀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 내 시간의 중심에 머문다"고 한 대목이 대비를 이루는데, 타인의 그림자는 스쳐가고, 누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시적 화자의 시간을 구성하는 축으로 남는다.
후반부에서 "오늘의 이 부드러운 정적만은/ 어디에도 흩어지지 않기를"이라고 시적 화자의 소망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사랑이나 애정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대신 "부드러운 정적"이 둘 사이의 관계를 형상화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그 손의 움직임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생각한다"며, 한 번 책갈피를 덮는 손의 행동이 하루의 끝보다 더 길다고 느껴지는 경험은 시간의 객관적 길이가 아니라 감정의 밀도를 측정하는 방식이 된다.
이 작품은 도시의 일상적인 공간인 커피숍을 배경으로, 빛과 향기, 손놀림, 정적, 시간의 길이만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그려낸 것으로, 시인의 예리한 감각의 촉수가 빛난다.
9. 가을 풍경과 발화의 결심
이렇게 쓰고 싶었다
나뭇잎이 익어 자기 색 입던 날
가벼운 바람에도 쓸려갈 수 있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구름이 되어
침묵으로 세상을 스치고 싶었다
가을 땅은 나뭇가지 기우는 길의 붉은 그림자로
조용히 다가왔고
그림자는 한 장씩 삶을 그려냈다
바람에 빛이 된 사람들이
저마다의 그리움을 이끌고 밀려왔다
진실한 그리움이 말을 걸었다
다가서는 발걸음은 망설임이었고
한 사람의 몸을 다 채우고
그 망설임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숨기고만 있던 말들이
목 끝에서 햇빛처럼 터져 나왔다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한 평 땅조차 가지지 못한 햇빛이라도
빛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나는 일어섰다
대지 위에 누워 있던
내 속살에다
하루를 견디는 따뜻한 숨을 심었다
-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전문
정관웅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드물지 않은,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침묵하지 말 것'이라는 윤리적 요청이다. 시적 화자는 단풍 드는 가을날 "가벼운 바람에도 쓸려갈 수 있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구름이 되어/ 침묵으로 세상을 스치고 싶었다"고 진술한다. 가을의 깊은 색채와 조용한 이동 속에서 말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 땅은 나뭇가지 기우는 길의 붉은 그림자로/ 조용히 다가왔고/ 그림자는 한 장씩 삶을 그려냈다"고 한다. 붉은 그림자와 삶을 그려내는 그림자의 계절과 기억이 겹치는 장면이다. 이후 "바람에 빛이 된 사람들이/ 저마다의 그리움을 이끌고 밀려왔다/ 진실한 그리움이 말을 걸"어온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망설임"이 "나를 일으켜 세"우자 "숨기고만 있던 말들이/ 목 끝에서 햇빛처럼 터져 나"오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나는 일어섰다/ 대지 위에 누워 있던/ 내 속살에다/ 하루를 견디는 따뜻한 숨을 심"는 것이다. 숨을 심는 행위는, 세계를 바꾸는 거대한 정치적 언사이기보다, 자신과 대지가 맞닿은 자리에서 하루를 겨우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결심에 가깝다. 이 작품은 가을 풍경과 개인의 내면, 타자의 그리움과 망설이는 발걸음을 한 화면에 올려놓고, 침묵과 발화의 경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10.
살펴본 여덟 편의 작품은 정관웅 시인의 시집 『붉어지는 것들』을 관통하면서도 시인의 시적 세계를 함축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작품마다 각각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지만, 검은 바닥의 점과 잿빛 틈의 붉음, 병든 달과 관음의 손, 커피, 접시꽃과 노동의 몸, 겨울길과 눈의 꽃, 바다와 별빛, 빈 종이와 빛의 옆구리, 커피숍과 빛의 떨림, 가을 그림자와 터져 나오는 햇빛이라는 일련의 이미지로 서로 연결된다. 정관웅 시인의 시세계에서 색채와 계절, 노동과 노년, 역사와 언어는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잡히지 않는 것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것들, 이름을 붙이기 전의 감정들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를, 가능한 한 정직하고 섬세한 언어로 마련하고 있다.
목차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초승달
초승달
야생화
꽃의 발견
그늘
붉어지는 것들
비의 맛
손가락 접시꽃
꽃의 내면
어둠이 밀려오며 더 빛나는 바다
붉은 꽃
하얀 민들레
새우란
산문산 진달래
여운
동백꽃
노을이 주는 주소는 깊다
덜어냄으로
가만히 머무는 것들
오늘
제2부 숲의 요정
숲의 요정
접시꽃 유월
담쟁이
쏟아지는 잠
중심
시인의 자리
마침내
기억 속 미소
시인
날씨의 그리움
섬의 길
남겨둔 온도
사진 한 장
그 여름
눈 위의 시선
풀잎의 소리
빛, 한 조각
가을의 이름 속에서
가슴
입술
꽃살문
제3부 풍경
풍경
연
몽돌해변
가우도
신호등에 그리고 신호등에
새만금 수평선
몸이 깊어진 시간
같이 서 있던 언어
생명체
노란 그리움
정전기
흔적
커피숍
바다의 빛 장보고
참치 통조림
조립
덜어냄으로
일 년에 한 번
쌓아 올린 시작점
제4부 여행자의 성
여행자의 성
뱃길
나뭇가지 끝의 잎 하나
새의 소리
밤의 소리
소리를 본다
판소리
끝나지 않는 색
겨울의 그림
차창 밖의 그림
속삭이는 그림
먹을 갈다
여운
그려내는 비
흔적
하루 목적지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발자국
손끝의 표현
곁에
작품론 |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 강경호
제1부 초승달
초승달
야생화
꽃의 발견
그늘
붉어지는 것들
비의 맛
손가락 접시꽃
꽃의 내면
어둠이 밀려오며 더 빛나는 바다
붉은 꽃
하얀 민들레
새우란
산문산 진달래
여운
동백꽃
노을이 주는 주소는 깊다
덜어냄으로
가만히 머무는 것들
오늘
제2부 숲의 요정
숲의 요정
접시꽃 유월
담쟁이
쏟아지는 잠
중심
시인의 자리
마침내
기억 속 미소
시인
날씨의 그리움
섬의 길
남겨둔 온도
사진 한 장
그 여름
눈 위의 시선
풀잎의 소리
빛, 한 조각
가을의 이름 속에서
가슴
입술
꽃살문
제3부 풍경
풍경
연
몽돌해변
가우도
신호등에 그리고 신호등에
새만금 수평선
몸이 깊어진 시간
같이 서 있던 언어
생명체
노란 그리움
정전기
흔적
커피숍
바다의 빛 장보고
참치 통조림
조립
덜어냄으로
일 년에 한 번
쌓아 올린 시작점
제4부 여행자의 성
여행자의 성
뱃길
나뭇가지 끝의 잎 하나
새의 소리
밤의 소리
소리를 본다
판소리
끝나지 않는 색
겨울의 그림
차창 밖의 그림
속삭이는 그림
먹을 갈다
여운
그려내는 비
흔적
하루 목적지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발자국
손끝의 표현
곁에
작품론 | 사람의 마음이 머물다 간 자리들 / 강경호
저자
저자
정관웅
시인 정관웅은 전남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1985년 《교육자료》 천료를 시작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후에 계간 《시선》 시, 계간 《문학춘추》 문학평론 등단했다. 2021년 시집 『비의 가지에 꽃눈으로』 현구문학상, 전영택문학상, 이동주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라남도문인협회 회장이며 그 밖의 시집은 『강물이 되고 싶다』, 『희망, 너는 어느 별이 되어 숨어 있을까』, 『잔꽃풀도 흔들리고』, 『바다색이 넘실거리는 길을 따라가면』, 『그대 내 속에서 피어 밤이슬로 반짝인다』 등이 있다. 저서로는 『삶을 가꾸는 요가 산책』, 공저 『스마트폰 활용 지도사 2급』 외 2권이 있다. 강진고을신문 논설주간, 시 창작교실, 디카시 창작교실, 인문학 강사, 국전작가, 연극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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