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오늘의 시와사람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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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억과 그리움의 미학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명제는 그만큼 문학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미학임을 말해준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지향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문학이라는 형식과 내용이 작가마다 변별력을 갖는다.
김능자 시인의 시는 자신이 경험한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특히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유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수많은 경험이 다양하게 소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축적된 시간 위에 시인 특유의 정서와 사유가 덧입혀지며 시적 메시지로 형상화된다.
이번 시집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최근 김능자 시인의 축적된 경험들이 여러 가지 시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애는 단연 그의 가장 큰 관심이다. 전통적으로 어머니는 그리움과 사랑, 희생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김능자 시인의 시에서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준 존재이자, 연민과 애도의 시선으로 다시 불려오는 존재로 자리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주된 시적 소재는 '고향'이라는 장소성이다. 그가 고향에 대해 깊이 천착하는 것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고향이 그리움을 유발시키는 까닭이며 많은 서사를 간직한 장소성을 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유년의 고향은 물론 현재에 만나는 고향에 대한 친연성과 정감을 드러낸다.
제3부에 집약된 계절의 순환을 형상화시킨 시편들에서는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큰 관심을 보여준다. 생명을 상징하는 봄은 자연을 주요한 배경으로 원초적인 생명성을 노래하고, 가을은 자연을 통해 시인의 내면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는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세계에서 연유한다.
이외에 김능자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현한 작품들이다. 2014년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세월호 사건'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특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처지에서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이처럼 김능자 시인의 시는 삶의 경험을 미학적으로 서정화하며,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개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의 시적 미덕은, 오늘날 점점 난해해지고 있는 우리 시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여성'과 '어머니'는 구분되어 말해진다. 같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자식을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인간은 물론 동물을 포함한 모든 어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생명체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헌신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는 이러한 본능 위에 문화적·윤리적 역할이 덧씌워지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깊은 그리움과 애도의 대상으로 남게 되며, 사모의 정은 더욱 각별해진다.
김능자 시인의 시편에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뜨거운 마음이 유독 많이 표출된 것은 유년기에서부터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까지 베풀어준 인정이 특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갈밭에서」는 생전에 밭을 일구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척박한 자갈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으시던
어머니 생각
어스름한 새벽녘 쪽빛 차맛자락
바람결에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시던
그 모습이 사무치게 보고 싶네
어정어정 칠월이 가고
보름달이 둥둥 떠오르는 팔월
가을의 문턱에서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내 눈시울은 붉어지고
푸른 잎사귀들이 나래를 접고
밤새 내려앉은 풀물 든 이슬방울이
메뚜기들의 속날개에 젖어들면
자갈밭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며
삐딱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들
새들도 부러운 듯 비켜가곤 했네.
- 「자갈밭에서」 전문
세상 떠난 어머니를 향한 시적 화자의 윤리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척박한 자갈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으시던/ 어머니 생각"에 젖어 있다. 농부가 봄날 전답에 씨앗을 뿌리는 일은 당연하지만, 이 작품의 기표 이면에서는 자식과 가족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읽힌다. '척박한 자갈밭'이 암시하듯 결코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기에 어머니의 '씨뿌리기'는 매우 고통스럽고 헌신적이다. "어스름한 새벽녘"이면 이른 시간이어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자갈밭에 씨를 뿌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유년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시던/ 그 모습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이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팔월"이 지나 척박한 밭에 나가 일하시던 어머니는 "가을의 문턱에서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때까지 노동의 수고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어린 마음이어도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다. 가족사 중 특히 어머니의 삶은 가족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자갈밭'으로 상징화된 곤궁한 집안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은 주로 돌아가신 이후의 심사가 많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에서는 "마지막 흙 한삽 뿌려얹고" 집에 돌아와 함께 지냈던 "아랫목에 흘린 세월 쓸어 안고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린다. 여기에서 '아랫목'은 방안에서 제일 따스한 공간으로 늘 자식들을 위해 마련한 어머니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지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저녁 무렵 서녘하늘이 붉게 물들면 "지석강 가 자갈밭에" 서곤 하는데, "해설피 강물살 징검징검/ 오시던 빈 그림자"와 "손사래만 아련히 스러지"곤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저녁놀 붉게 물든' 서방정토에 계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과 가슴에 사무쳐오는 슬픔이 아프게 다가온다.
김능자 시인에게 어머니는 생전에 그랬듯이 세상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시인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마음을 둘 데 없을 땐 꽃 한번 만져보고
서러움이 밀물지면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억울하고 분할 땐 어머니를 부릅니다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서면
뒤돌아보고 벼랑을 내려다보고
어쩔까, 되돌아갈까, 강폭에 뛰어들까
그때마다
저만치서 부르는 귀에 익은 소리
아련히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한사코 어머니 목소리를 붙잡고 갑니다.
- 「낯익은 목소리」 전문
인간은 누구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경험한다. 이러한 정서에 젖을 때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른 형태이다. 감각은 정신을 나타내는 표정으로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정서'는 정제된 감정으로 서정시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시를 '정서'와 '사상'을 담아내는 문학형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마음을 둘 데 없을 때" "서러움이 밀물지면", 그리고 "억울하고 분할 때"를 경험하면서 "꽃 한 번 만져보고",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부"른다고 진술한다. 시적 화자의 감정은 마음이 편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서정시로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정서화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은유화된 출구가 막힌 아득한 상황에 처할 때 "뒤돌아보고 벼랑을 내려다" 보기도 한다. 지난날을 생각하기도 하고, '벼랑'이라는 위기에 처한 처지에 대해 절망하는 화자는 "어쩔까, 되돌아갈까, 강폭에 뛰어들까" 수많은 생각을 하며 고뇌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강폭에 뛰어들까"가 말해주듯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저만치서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이다.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때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마음이 여려지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생의 의지를 다시 회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한사코 어머니 목소리를 붙잡고 갑니다"라고 말하며, 생의 의지를 다진다. 비록 어머니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생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일은 어머니가 계셨던 시인의 유년에서도 작용하곤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잠잘 땐" "양손 살포시/ 가슴에 올려놓아라", "발은 항상 따뜻해야 하니/ 이불 속에 묻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새봄이 오나봐요」에서는 노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 새봄이 오고 있지만, "겨울인지 봄인지 잘 모르겠네요", "예전 같지 않게 말들이 잘 안 떠올라요"에서 보듯 육신의 노화와 함께 분별력이 희미해지는 최근의 일상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한다. 그리고 "밖에서 못다 한 것들 다시 해보자 하지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이승에 없는 어머니에게 길을 묻는다.
3.
서정시는 불화에서 화해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며, 유년이나 고향에서 간직했던 순수한 마음이 세상살이를 거치는 동안 훼손되었을 때, 그 마음을 헹구고자 하는 정화 기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머니나 아버지와 함께했던 때를 상기하며 그러한 시간과 공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서정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토피아적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뒤 끊임없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지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성을 지닌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 칼 융의 사유와도 다르지 않다.
김능자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손상되지 않은 원초적 대상으로 '고향'이 설정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이 이미 타락한 모순과 결핍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유토피아적 공간인 '고향'을 상기시키며, 그곳으로 회귀를 시도한다. 그러나 현재의 공간은 수십 년 전의 공간이 아니다. 이미 변해버린 고향이다. 시인의 고향은 오직 마음속에만 남아 있어, 그곳을 더욱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감각은 결과적으로, 옛 고향을 통해 유년의 순수를 회복하고자 하는 데로 나아가며, 이것이 바로 김능자 시인의 고향 시편들이 지닌 핵심 정조라 할 수 있다.
동구 밖 도랑에선 송사리 떼 노닐고
뽕나무 사이 길섶 양지녘 언덕바지
새하얀 찔레꽃이 꽃구름 피워내면
한아름 따다 아낙들이 떡을 빚던 곳
사월이 성큼 지나 칠월이 다가오면
누에는 섶에 올라 새하얀 집을 지었는데
새콤한 오디를 따먹던 아이들
어디에서 무엇 하며 살까
실 끝에 매달린 번데기 지금도 생각하는지
뽕잎이 꽃비단 되기 위해
봄가을 짙푸르게 피워내던
내 어린 꿈이 서린 곳
오월 단옷날엔 그네가 하늘을 날고
가을엔 쑥부쟁이 들국화 흐드러진 곳
청솔 다람쥐 상수리 가지를 타고 있을까.
- 「꿈이 서린 고향」 전문
"동구 밖 도랑에선 송사리 떼 노닐고/ 뽕나무 사이 길섶 양지녘 언덕바지/ 새하얀 찔레꽃 꽃구름 피워내"는 곳이 시적 화자의 고향이었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찔레꽃을 따다가 아낙들은 떡을 빚고, 여름이면 누에가 새하얀 집을 짓는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오디를 따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 아이들이 어디에서 사는지 모른다. 자신의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떡을 빚던 동네 아낙들'과 '오디를 따먹던 아이들'은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서 인정과 때묻지 않은 동심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옛 고향 사람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을 떠올리는 일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한편,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교차한다. 특히 뽕나무잎이 짙푸르고, 단오날 하늘을 날던 고향은 장소성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장소성이란 이야기를 간직한 곳으로 시적 화자에게 추억과 더불어 생을 지탱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이 작품 속 장소성은 고향을 기억하게 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더욱 가치있는 것은 "내 어린 꿈이 서린 곳"이라고 하여, 시인을 키운 터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김능자 시인에게 '고향'은 추억뿐만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킨 곳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는 특별한 곳이다.
옛날
고향집 밤하늘에
반짝이던 길잡이 별
밤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유년의 꿈을 키워주던 나의 별
지금도
고향 동산위에 떠있을까
밤마다
내 모습 지켜보며
가만가만 들려주던 꿈같은 옛이야기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들을 수가 있을까.
- 「샛별」 전문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별이 '샛별'이다. '금성金星' 또는 '계명성?明星'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이 별은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많은 시와 노래를 통해 호명되어왔다. 김능자 시인에게도 샛별은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한 별이다. "옛날/ 고향집 밤하늘에/ 반짝이던 길잡이 별", 즉 샛별이다. 시적 화자에게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별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밤마다 누군가가 밤하늘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실제로 어두운 하늘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리 만무하지만, 화자는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화자의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길잡이별'이기도 한 밝게 반짝이는 모습에서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년의 꿈을 키워주던 나의 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고향 동산 위에 떠 있을까"라고 묻는다. 유년에서 멀어진 화자의 삶에서 '샛별'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더욱 고향 동산 위에 떠오르곤 했던 샛별을 잊지 못하고 호명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샛별은 "밤마다/ 내 모습 지켜보며/ 가만가만"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들을 수가 있을까."하고 고향에서처럼 다감하게 느껴졌던 샛별을 볼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살펴보았듯이 김능자 시인에게 '샛별'은 밤하늘의 흔한 별 중의 하나가 아니라 '길잡이 별', '이름을 불러주던 별', '꿈을 키워주던 별', '옛이야기 들려주던 별'로 특별한 관계를 짓는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잊었던 별이 고향에 가면 여전히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유년'이라는 공간에서 빛났던 희망적인 존재와 재회함으로서 꿈을 키우던 시적 화자 자신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이밖에 고향을 노래한 「고향 생각」에서 지금의 도곡 온천지역 부근에 고향집이 있었던 김능자 시인이 도랑물에서 나물을 씻으면 나물이 데쳐졌던 온천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는 온천이 개발되어 온천장에서 노곤한 몸과 마음을 녹인다고 한다.
또한 「고향에서」는 한가위에 찾아간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의 다정하고 인정 어린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장독대와 쓸쓸하게 피어난 봉숭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사는, 회억에 잠긴 정서를 애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4.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절에 따라 풍경은 물론 삶의 양식, 그리고 그때마다의 정서적 감각 또한 다양하게 인지할 수 있다.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에서도 펼치는 시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시집에서는 '봄'과 '가을'을 노래한 작품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시인이 사계절 중 봄과 가을에서 정서적 감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봄은 만물이 깨어나는 생명의 계절로 시인의 내면에 깃든 생명성과 더불어 봄날의 심사를 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가을 시편들에서는 가을의 풍정을 그림 그리듯이 주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역시 시인의 삶을 대입시켜 여러 가지 감정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듯 김능자 시인이 계절을 시적 제재로 삼은 작품들은 '풍정', '생명성',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한 것들로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해맑은 날에도
선율이 어여쁜 밤이어도,
빗물이 수런수런 내려도
때늦은 눈발이 시나브로 날리어도
생각 속에 머문 풀피리 소리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오솔길을 걷노라면
아련히 밀물지는 그리움
제비 찾아와 집을 짓고
봄볕에 배추잠자리
바지랑대에 앉은 적요의 시간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 하나.
- 「봄 언저리」 전문
봄에 내리는 비는 생명성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빗물이 수런수런 내"린다고 한다. '수런수런'은 본래 부사이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수선스럽게 자꾸 떠들어대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의성어와 의태어적인 속성을 가진다.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수런수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생동감 있게 내리는 비라는 것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제비 찾아와 집을 짓고/ 봄볕에 배추잠자리/ 바지랑대에 앉은 적요의 시간"이라고 봄날의 서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봄이 생명의 계절이면서도 한가롭고 평화로운 계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시제가 암시하듯 '봄 언저리'에서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풍정과 더불어 생명의 환희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아직 이른 봄이어서 가끔 "때늦은 눈발이 시나브로 날리"우는 무렵이다. 이때쯤 화자는 "오솔길을 걷"기도 하는데, 그리움이 밀물진다고 한다. 더불어 봄을 맞는 화자의 심사가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는 봄날의 서정과 관련된 시적 화자의 경험 속에 있는 특별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을 노래한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은 모두가 단상斷想 형식이다. 그것은 짧은 형식으로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단호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봄향기」는 9행 형식으로 "향기 품은 춘삼월", "움츠리는 석양 햇살", "풀잎 적시는 이슬" 등에서 보듯 봄날의 서정을 간명하지만 분명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용이하다. 특히 어미를 명사화시켜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봄 소식」도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다락방 창 너머" "꾀꼬리 한 마리"라고 한 짧은 시행만으로도 봄을 맞는 화자의 심사가 잘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가을'의 서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높아만 가는 하늘
어설픈 가장자리에 뜬
한 가닥 구름은
내 그리움 같은 것
깊은 산자락 골짜기
단풍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에
물그림자 드리울 때
살포시 비추이다 사라진 얼굴
누군가의 얼굴이네
높새바람 허위허위
가슴 뚫고 지나간 뒤에
나는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였네
석양녘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
일생을 함께해온
쓸쓸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네.
- 「어느 가을」 전문
이 작품은 앞에서 살펴본 봄을 그린 작품들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봄 시편들에서는 봄날 일어나는 자연의 모습과 이로 인한 화자의 내면을 노래한 바 그 무게가 주로 풍정 쪽으로 기울었다면, 가을 시편들에서는 가을이라는 공간 속에서 느끼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중심 시어인 '그리움', '누군가의 얼굴', '나그네'가 말해주듯 가을날 자연의 모습인 '구름'에서 그리움을 잉태하고, 실개천 물그림자에서 언뜻 비추다 사라지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높새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로 화자를 그리고 자연의 이면에 드리운 심상을 비춰주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석양녘/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 일생을 함께해온/ 쓸쓸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네."라고 가을 석양 무렵을 맞는 화자의 내면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가 자신과 일생을 함께해온 '낯익은 얼굴'이라고 함으로서 이 작품이 단순하게 가을의 서정을 노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쩌면 오래 마음속에서 간직해온 누군가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지일 수도 있어,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가을을 형상화한 시편 중에서 「시월의 저물녘」은 '서늘한 갈바람', '청량한 풀벌레 소리', '코스모스', '단풍' 등 가을을 나타내는 시어들을 통해 '시월의 저녁'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파랑새 한 마리 살포시 날아오려나"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파랑새'로 은유화된 '사랑', '꿈', '희망'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담아내고 있어 이 작품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가을은 쇠락의 계절이어서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가을 길섶에서」는 "머물 줄 모르는 세월은/ 잠시도 쉴 틈이 없는데/ 계절을 그냥 가라 이르렀다"에서 보듯 '시간'의 연속상에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붙잡지 않고 그냥 가라고 말하는 화자의 시간관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는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5.
문학을 윤리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는 명제는 우리 사회의 제문제들에 문학이 외면하지 않고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시인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여러 사건과 제문제를 시를 통해 발언함으로서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여 사회적 문제를 함께 공유하는 일이 서정시의 또다른 효용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우리 사회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하지 않고 음풍농월을 노래하거나 자신의 삶에만 천착한다면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유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능자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시편들은 특히 우리 사회에 크나큰 문제의식을 노출한 이른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유족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화함으로서 시인도 동참하고자 한다.
바닷가에 펄럭이는 하많은 리본
얼마나 더 채워야 돌아오려는가
노란 리본으로 다리를 놓고
강울을 쌓았어도
만리장성이라도 쌓아 올려야 돌아올 셈이냐
이제 그만! 흔적이라도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려무나
가슴팍이 까맣게 타 재가 되어
강물에 흩뿌려야 할까보냐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치면
그곳에서 어미를 기다릴 셈이냐
야속하고 무심한 사랑하는 아가야
노란 리본도 부질없고, 이 세상도 덧없어
아가야, 어미 가슴속에서
길이길이 오순도순 지내자꾸나.
-「노란 리본」 전문
'노란 리본'은 '무사귀환·안전을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2014년 세월호 실종자와 희생자를 위해 "무사귀환을 기원한다"는 문구와 함께 팽목항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매달아졌다. 이후 재난 상황에서 이러한 의미로 보편화되어 노란 리본을 사용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닷가에 갔는가 싶다. 그곳 "바닷가에 펄럭이는 하많은 리본"을 바라보며 마음이 슬프다. "얼마나 더 채워야 돌아오려는가"라며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란 리본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노란 리본으로 다리를 놓고" "만리장성이라도 쌓아올려야 돌아올 셈이냐"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 사건은 날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인양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가 재난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게 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였다.
시적 화자는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인 팽목항에 달려가 근심과 슬픔의 감정으로 죽은 자들을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이제 그만! 흔적이라도/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려무나"에서 보듯 시신도 못 찾은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린다. "그곳에서 어미를 기다릴 셈이냐/ 야속하고 무심한 사랑하는 아가야"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처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란 리본도 부질없고, 이 세상도 덧없"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원망과 슬픔이 극대화되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김능자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묘파한 시편들은 주로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로 집중된다. 하나의 사건을 슬픔과 비탄의 정조로 노래한 시편들은 한결같이 절망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단벌 뿐인 목숨인데」에서는 "목숨도 여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가능한 일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기에, 「노란 리본」에서처럼 "누군가 아무리 위로해도/ 귓가에 닿지 않"는다고 할 뿐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도 여전히 비탄과 절망의 언어가 울부짖는다. "노란 리본 펄럭이는/ 팽목항 바닷가에서 주저앉아" 돌아오지 않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부모의 절규만 메아리도 없이 바닷가로 흩어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아직입니까」는 수학여행을 떠난 자식이 금방 "엄마" 하고 달려올 듯한 생각으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배어있다.
학교에선 책상들이 기다리고
집에서는 눈물짓는 밥그릇이
온 세상 사람들 다같이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어서 와라 어서 와라 어서 오거라
오늘은 오고 있나
지금 저기 거친 물길 밟고 달려오는가
엄마, 하고 품안에 안겨들려나
돌아와라 돌아와 돌아와야지
눈앞에 다가선 듯 아른거리는
내 딸 내 아들, 내 새끼들
눈에 들어올 듯 손에 잡힐 듯
나날은 지고 새고, 새고 지고
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고 마는가.
- 「아직도 아직입니까」 전문
설레고 부푼 마음으로 떠났던 수학여행 중에 맹골수도에서 화를 당한 안산고등학교 "학교에선 책상들이 기다리고" 졸지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집에서는 눈물 짓는 밥그릇이"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는 아이들을 "어서 와라 어서 와라 어서 오거라"라고 애타게 염원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현실에서 "지금 저기 거친 물길 밟고 달려오는" 것처럼, 그래서 "엄마, 하고 품 안에 안겨들" 것 같은 착시와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꼭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픈 심정은 날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와야지"라고 소리칠 때면, "눈 앞에 다가선 듯 아른거"린다. 그러므로 "내 딸 내 아들, 내 새끼들/ 눈에 들어올 듯 손에 잡힐 듯"하지만 "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고 마는가."라는 절망의 언어밖에 새길 수 없는 시적 화자의 고통스러움이 투사되어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를 피를 토하듯,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없는 시편들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시인의 언어가 갖는 한계가 어떠한지를 잘 말해준다. 「기다리는 마음」은 어린 학생들의 죽음 앞에서 "하늘은 노랗고 바다는 까맣"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절망이 배어있다. "왜인지 누구 탓인지 알 길조차 묘연"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도 시인의 심정이다.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날이 새고 저무는 것에 시인은 절망한다. "무심한 바람은 바다 물살을 철썩이고" 밤 별들은 깜박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달 또한 동녘에서 떠올라 서산으로 기우는 현실을 그대로 시로 형상화시킴으로서 슬픔을 배가시킨다.
강 경 호
(한국문인협회 평론분과 회장)
1.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명제는 그만큼 문학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미학임을 말해준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지향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문학이라는 형식과 내용이 작가마다 변별력을 갖는다.
김능자 시인의 시는 자신이 경험한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특히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유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수많은 경험이 다양하게 소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축적된 시간 위에 시인 특유의 정서와 사유가 덧입혀지며 시적 메시지로 형상화된다.
이번 시집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최근 김능자 시인의 축적된 경험들이 여러 가지 시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애는 단연 그의 가장 큰 관심이다. 전통적으로 어머니는 그리움과 사랑, 희생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김능자 시인의 시에서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준 존재이자, 연민과 애도의 시선으로 다시 불려오는 존재로 자리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주된 시적 소재는 '고향'이라는 장소성이다. 그가 고향에 대해 깊이 천착하는 것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고향이 그리움을 유발시키는 까닭이며 많은 서사를 간직한 장소성을 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유년의 고향은 물론 현재에 만나는 고향에 대한 친연성과 정감을 드러낸다.
제3부에 집약된 계절의 순환을 형상화시킨 시편들에서는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큰 관심을 보여준다. 생명을 상징하는 봄은 자연을 주요한 배경으로 원초적인 생명성을 노래하고, 가을은 자연을 통해 시인의 내면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이는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세계에서 연유한다.
이외에 김능자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현한 작품들이다. 2014년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세월호 사건'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며 특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처지에서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이처럼 김능자 시인의 시는 삶의 경험을 미학적으로 서정화하며,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개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의 시적 미덕은, 오늘날 점점 난해해지고 있는 우리 시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어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여성'과 '어머니'는 구분되어 말해진다. 같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자식을 잉태하고 낳아 기르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인간은 물론 동물을 포함한 모든 어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생명체를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헌신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는 이러한 본능 위에 문화적·윤리적 역할이 덧씌워지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깊은 그리움과 애도의 대상으로 남게 되며, 사모의 정은 더욱 각별해진다.
김능자 시인의 시편에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뜨거운 마음이 유독 많이 표출된 것은 유년기에서부터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까지 베풀어준 인정이 특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갈밭에서」는 생전에 밭을 일구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척박한 자갈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으시던
어머니 생각
어스름한 새벽녘 쪽빛 차맛자락
바람결에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시던
그 모습이 사무치게 보고 싶네
어정어정 칠월이 가고
보름달이 둥둥 떠오르는 팔월
가을의 문턱에서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내 눈시울은 붉어지고
푸른 잎사귀들이 나래를 접고
밤새 내려앉은 풀물 든 이슬방울이
메뚜기들의 속날개에 젖어들면
자갈밭을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며
삐딱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들
새들도 부러운 듯 비켜가곤 했네.
- 「자갈밭에서」 전문
세상 떠난 어머니를 향한 시적 화자의 윤리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척박한 자갈밭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으시던/ 어머니 생각"에 젖어 있다. 농부가 봄날 전답에 씨앗을 뿌리는 일은 당연하지만, 이 작품의 기표 이면에서는 자식과 가족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읽힌다. '척박한 자갈밭'이 암시하듯 결코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기에 어머니의 '씨뿌리기'는 매우 고통스럽고 헌신적이다. "어스름한 새벽녘"이면 이른 시간이어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자갈밭에 씨를 뿌리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유년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속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시던/ 그 모습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이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팔월"이 지나 척박한 밭에 나가 일하시던 어머니는 "가을의 문턱에서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때까지 노동의 수고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시적 화자는 어린 마음이어도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다. 가족사 중 특히 어머니의 삶은 가족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자갈밭'으로 상징화된 곤궁한 집안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은 주로 돌아가신 이후의 심사가 많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에서는 "마지막 흙 한삽 뿌려얹고" 집에 돌아와 함께 지냈던 "아랫목에 흘린 세월 쓸어 안고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린다. 여기에서 '아랫목'은 방안에서 제일 따스한 공간으로 늘 자식들을 위해 마련한 어머니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지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저녁 무렵 서녘하늘이 붉게 물들면 "지석강 가 자갈밭에" 서곤 하는데, "해설피 강물살 징검징검/ 오시던 빈 그림자"와 "손사래만 아련히 스러지"곤 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저녁놀 붉게 물든' 서방정토에 계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안타까운 마음과 가슴에 사무쳐오는 슬픔이 아프게 다가온다.
김능자 시인에게 어머니는 생전에 그랬듯이 세상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시인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마음을 둘 데 없을 땐 꽃 한번 만져보고
서러움이 밀물지면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억울하고 분할 땐 어머니를 부릅니다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서면
뒤돌아보고 벼랑을 내려다보고
어쩔까, 되돌아갈까, 강폭에 뛰어들까
그때마다
저만치서 부르는 귀에 익은 소리
아련히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한사코 어머니 목소리를 붙잡고 갑니다.
- 「낯익은 목소리」 전문
인간은 누구나 희로애락의 감정을 경험한다. 이러한 정서에 젖을 때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른 형태이다. 감각은 정신을 나타내는 표정으로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정서'는 정제된 감정으로 서정시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시를 '정서'와 '사상'을 담아내는 문학형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마음을 둘 데 없을 때" "서러움이 밀물지면", 그리고 "억울하고 분할 때"를 경험하면서 "꽃 한 번 만져보고", "깊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부"른다고 진술한다. 시적 화자의 감정은 마음이 편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서정시로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감정을 정서화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은유화된 출구가 막힌 아득한 상황에 처할 때 "뒤돌아보고 벼랑을 내려다" 보기도 한다. 지난날을 생각하기도 하고, '벼랑'이라는 위기에 처한 처지에 대해 절망하는 화자는 "어쩔까, 되돌아갈까, 강폭에 뛰어들까" 수많은 생각을 하며 고뇌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강폭에 뛰어들까"가 말해주듯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저만치서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이다. 살아가는 일이 버거워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때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마음이 여려지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생의 의지를 다시 회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한사코 어머니 목소리를 붙잡고 갑니다"라고 말하며, 생의 의지를 다진다. 비록 어머니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생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일은 어머니가 계셨던 시인의 유년에서도 작용하곤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잠잘 땐" "양손 살포시/ 가슴에 올려놓아라", "발은 항상 따뜻해야 하니/ 이불 속에 묻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새봄이 오나봐요」에서는 노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 새봄이 오고 있지만, "겨울인지 봄인지 잘 모르겠네요", "예전 같지 않게 말들이 잘 안 떠올라요"에서 보듯 육신의 노화와 함께 분별력이 희미해지는 최근의 일상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한다. 그리고 "밖에서 못다 한 것들 다시 해보자 하지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이승에 없는 어머니에게 길을 묻는다.
3.
서정시는 불화에서 화해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며, 유년이나 고향에서 간직했던 순수한 마음이 세상살이를 거치는 동안 훼손되었을 때, 그 마음을 헹구고자 하는 정화 기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머니나 아버지와 함께했던 때를 상기하며 그러한 시간과 공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서정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아담과 하와가 유토피아적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뒤 끊임없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는, 훼손되지 않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지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성을 지닌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 칼 융의 사유와도 다르지 않다.
김능자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손상되지 않은 원초적 대상으로 '고향'이 설정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시인이 현재 살고 있는 공간이 이미 타락한 모순과 결핍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유토피아적 공간인 '고향'을 상기시키며, 그곳으로 회귀를 시도한다. 그러나 현재의 공간은 수십 년 전의 공간이 아니다. 이미 변해버린 고향이다. 시인의 고향은 오직 마음속에만 남아 있어, 그곳을 더욱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감각은 결과적으로, 옛 고향을 통해 유년의 순수를 회복하고자 하는 데로 나아가며, 이것이 바로 김능자 시인의 고향 시편들이 지닌 핵심 정조라 할 수 있다.
동구 밖 도랑에선 송사리 떼 노닐고
뽕나무 사이 길섶 양지녘 언덕바지
새하얀 찔레꽃이 꽃구름 피워내면
한아름 따다 아낙들이 떡을 빚던 곳
사월이 성큼 지나 칠월이 다가오면
누에는 섶에 올라 새하얀 집을 지었는데
새콤한 오디를 따먹던 아이들
어디에서 무엇 하며 살까
실 끝에 매달린 번데기 지금도 생각하는지
뽕잎이 꽃비단 되기 위해
봄가을 짙푸르게 피워내던
내 어린 꿈이 서린 곳
오월 단옷날엔 그네가 하늘을 날고
가을엔 쑥부쟁이 들국화 흐드러진 곳
청솔 다람쥐 상수리 가지를 타고 있을까.
- 「꿈이 서린 고향」 전문
"동구 밖 도랑에선 송사리 떼 노닐고/ 뽕나무 사이 길섶 양지녘 언덕바지/ 새하얀 찔레꽃 꽃구름 피워내"는 곳이 시적 화자의 고향이었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찔레꽃을 따다가 아낙들은 떡을 빚고, 여름이면 누에가 새하얀 집을 짓는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오디를 따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그 아이들이 어디에서 사는지 모른다. 자신의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떡을 빚던 동네 아낙들'과 '오디를 따먹던 아이들'은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서 인정과 때묻지 않은 동심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옛 고향 사람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을 떠올리는 일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한편,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교차한다. 특히 뽕나무잎이 짙푸르고, 단오날 하늘을 날던 고향은 장소성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장소성이란 이야기를 간직한 곳으로 시적 화자에게 추억과 더불어 생을 지탱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이 작품 속 장소성은 고향을 기억하게 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더욱 가치있는 것은 "내 어린 꿈이 서린 곳"이라고 하여, 시인을 키운 터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김능자 시인에게 '고향'은 추억뿐만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킨 곳이기도 하지만,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는 특별한 곳이다.
옛날
고향집 밤하늘에
반짝이던 길잡이 별
밤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유년의 꿈을 키워주던 나의 별
지금도
고향 동산위에 떠있을까
밤마다
내 모습 지켜보며
가만가만 들려주던 꿈같은 옛이야기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들을 수가 있을까.
- 「샛별」 전문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별이 '샛별'이다. '금성金星' 또는 '계명성?明星'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이 별은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많은 시와 노래를 통해 호명되어왔다. 김능자 시인에게도 샛별은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한 별이다. "옛날/ 고향집 밤하늘에/ 반짝이던 길잡이 별", 즉 샛별이다. 시적 화자에게 아직 어두운 새벽길을 안내하는 길잡이 별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밤마다 누군가가 밤하늘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실제로 어두운 하늘에서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리 만무하지만, 화자는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화자의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길잡이별'이기도 한 밝게 반짝이는 모습에서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년의 꿈을 키워주던 나의 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고향 동산 위에 떠 있을까"라고 묻는다. 유년에서 멀어진 화자의 삶에서 '샛별'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더욱 고향 동산 위에 떠오르곤 했던 샛별을 잊지 못하고 호명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샛별은 "밤마다/ 내 모습 지켜보며/ 가만가만"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들을 수가 있을까."하고 고향에서처럼 다감하게 느껴졌던 샛별을 볼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살펴보았듯이 김능자 시인에게 '샛별'은 밤하늘의 흔한 별 중의 하나가 아니라 '길잡이 별', '이름을 불러주던 별', '꿈을 키워주던 별', '옛이야기 들려주던 별'로 특별한 관계를 짓는다. 그런데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잊었던 별이 고향에 가면 여전히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유년'이라는 공간에서 빛났던 희망적인 존재와 재회함으로서 꿈을 키우던 시적 화자 자신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이밖에 고향을 노래한 「고향 생각」에서 지금의 도곡 온천지역 부근에 고향집이 있었던 김능자 시인이 도랑물에서 나물을 씻으면 나물이 데쳐졌던 온천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제는 온천이 개발되어 온천장에서 노곤한 몸과 마음을 녹인다고 한다.
또한 「고향에서」는 한가위에 찾아간 고향집에서 어린 시절의 다정하고 인정 어린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을 드러낸다. 어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장독대와 쓸쓸하게 피어난 봉숭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사는, 회억에 잠긴 정서를 애잔하게 드러내고 있다.
4.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절에 따라 풍경은 물론 삶의 양식, 그리고 그때마다의 정서적 감각 또한 다양하게 인지할 수 있다.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에서도 펼치는 시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시집에서는 '봄'과 '가을'을 노래한 작품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그것은 시인이 사계절 중 봄과 가을에서 정서적 감응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봄은 만물이 깨어나는 생명의 계절로 시인의 내면에 깃든 생명성과 더불어 봄날의 심사를 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가을 시편들에서는 가을의 풍정을 그림 그리듯이 주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역시 시인의 삶을 대입시켜 여러 가지 감정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듯 김능자 시인이 계절을 시적 제재로 삼은 작품들은 '풍정', '생명성',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한 것들로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해맑은 날에도
선율이 어여쁜 밤이어도,
빗물이 수런수런 내려도
때늦은 눈발이 시나브로 날리어도
생각 속에 머문 풀피리 소리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오솔길을 걷노라면
아련히 밀물지는 그리움
제비 찾아와 집을 짓고
봄볕에 배추잠자리
바지랑대에 앉은 적요의 시간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 하나.
- 「봄 언저리」 전문
봄에 내리는 비는 생명성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빗물이 수런수런 내"린다고 한다. '수런수런'은 본래 부사이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수선스럽게 자꾸 떠들어대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의성어와 의태어적인 속성을 가진다.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수런수런'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생동감 있게 내리는 비라는 것을 잘 나타낸다. 그리고 "제비 찾아와 집을 짓고/ 봄볕에 배추잠자리/ 바지랑대에 앉은 적요의 시간"이라고 봄날의 서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봄이 생명의 계절이면서도 한가롭고 평화로운 계절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시제가 암시하듯 '봄 언저리'에서 시적 화자가 바라보는 풍정과 더불어 생명의 환희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아직 이른 봄이어서 가끔 "때늦은 눈발이 시나브로 날리"우는 무렵이다. 이때쯤 화자는 "오솔길을 걷"기도 하는데, 그리움이 밀물진다고 한다. 더불어 봄을 맞는 화자의 심사가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 하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생각 속에 잠겨드는 그림자"는 봄날의 서정과 관련된 시적 화자의 경험 속에 있는 특별한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봄을 노래한 김능자 시인의 시편들은 모두가 단상斷想 형식이다. 그것은 짧은 형식으로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단호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봄향기」는 9행 형식으로 "향기 품은 춘삼월", "움츠리는 석양 햇살", "풀잎 적시는 이슬" 등에서 보듯 봄날의 서정을 간명하지만 분명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용이하다. 특히 어미를 명사화시켜 이러한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봄 소식」도 이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다락방 창 너머" "꾀꼬리 한 마리"라고 한 짧은 시행만으로도 봄을 맞는 화자의 심사가 잘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가을'의 서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높아만 가는 하늘
어설픈 가장자리에 뜬
한 가닥 구름은
내 그리움 같은 것
깊은 산자락 골짜기
단풍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실개천에
물그림자 드리울 때
살포시 비추이다 사라진 얼굴
누군가의 얼굴이네
높새바람 허위허위
가슴 뚫고 지나간 뒤에
나는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였네
석양녘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
일생을 함께해온
쓸쓸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네.
- 「어느 가을」 전문
이 작품은 앞에서 살펴본 봄을 그린 작품들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봄 시편들에서는 봄날 일어나는 자연의 모습과 이로 인한 화자의 내면을 노래한 바 그 무게가 주로 풍정 쪽으로 기울었다면, 가을 시편들에서는 가을이라는 공간 속에서 느끼는 시적 화자의 내면 풍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중심 시어인 '그리움', '누군가의 얼굴', '나그네'가 말해주듯 가을날 자연의 모습인 '구름'에서 그리움을 잉태하고, 실개천 물그림자에서 언뜻 비추다 사라지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높새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혼자 걸어가는 나그네"로 화자를 그리고 자연의 이면에 드리운 심상을 비춰주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석양녘/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 일생을 함께해온/ 쓸쓸한, 낯익은 얼굴이 있었네."라고 가을 석양 무렵을 맞는 화자의 내면을 형상화시켰다. 그런데 "산그림자 드리울 때/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이"가 자신과 일생을 함께해온 '낯익은 얼굴'이라고 함으로서 이 작품이 단순하게 가을의 서정을 노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쩌면 오래 마음속에서 간직해온 누군가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지일 수도 있어,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가을을 형상화한 시편 중에서 「시월의 저물녘」은 '서늘한 갈바람', '청량한 풀벌레 소리', '코스모스', '단풍' 등 가을을 나타내는 시어들을 통해 '시월의 저녁'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파랑새 한 마리 살포시 날아오려나"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파랑새'로 은유화된 '사랑', '꿈', '희망'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을 담아내고 있어 이 작품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가을은 쇠락의 계절이어서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가을 길섶에서」는 "머물 줄 모르는 세월은/ 잠시도 쉴 틈이 없는데/ 계절을 그냥 가라 이르렀다"에서 보듯 '시간'의 연속상에 있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붙잡지 않고 그냥 가라고 말하는 화자의 시간관과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는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5.
문학을 윤리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는 명제는 우리 사회의 제문제들에 문학이 외면하지 않고 참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시인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여러 사건과 제문제를 시를 통해 발언함으로서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여 사회적 문제를 함께 공유하는 일이 서정시의 또다른 효용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우리 사회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하지 않고 음풍농월을 노래하거나 자신의 삶에만 천착한다면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유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능자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시편들은 특히 우리 사회에 크나큰 문제의식을 노출한 이른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유족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화함으로서 시인도 동참하고자 한다.
바닷가에 펄럭이는 하많은 리본
얼마나 더 채워야 돌아오려는가
노란 리본으로 다리를 놓고
강울을 쌓았어도
만리장성이라도 쌓아 올려야 돌아올 셈이냐
이제 그만! 흔적이라도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려무나
가슴팍이 까맣게 타 재가 되어
강물에 흩뿌려야 할까보냐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치면
그곳에서 어미를 기다릴 셈이냐
야속하고 무심한 사랑하는 아가야
노란 리본도 부질없고, 이 세상도 덧없어
아가야, 어미 가슴속에서
길이길이 오순도순 지내자꾸나.
-「노란 리본」 전문
'노란 리본'은 '무사귀환·안전을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2014년 세월호 실종자와 희생자를 위해 "무사귀환을 기원한다"는 문구와 함께 팽목항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매달아졌다. 이후 재난 상황에서 이러한 의미로 보편화되어 노란 리본을 사용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닷가에 갔는가 싶다. 그곳 "바닷가에 펄럭이는 하많은 리본"을 바라보며 마음이 슬프다. "얼마나 더 채워야 돌아오려는가"라며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란 리본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노란 리본으로 다리를 놓고" "만리장성이라도 쌓아올려야 돌아올 셈이냐"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이 사건은 날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인양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가 재난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게 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였다.
시적 화자는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인 팽목항에 달려가 근심과 슬픔의 감정으로 죽은 자들을 애도하며 유족들을 위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이제 그만! 흔적이라도/ 어미의 품으로 돌아오려무나"에서 보듯 시신도 못 찾은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린다. "그곳에서 어미를 기다릴 셈이냐/ 야속하고 무심한 사랑하는 아가야"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처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란 리본도 부질없고, 이 세상도 덧없"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원망과 슬픔이 극대화되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김능자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묘파한 시편들은 주로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로 집중된다. 하나의 사건을 슬픔과 비탄의 정조로 노래한 시편들은 한결같이 절망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단벌 뿐인 목숨인데」에서는 "목숨도 여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불가능한 일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기에, 「노란 리본」에서처럼 "누군가 아무리 위로해도/ 귓가에 닿지 않"는다고 할 뿐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도 여전히 비탄과 절망의 언어가 울부짖는다. "노란 리본 펄럭이는/ 팽목항 바닷가에서 주저앉아" 돌아오지 않는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부모의 절규만 메아리도 없이 바닷가로 흩어지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아직입니까」는 수학여행을 떠난 자식이 금방 "엄마" 하고 달려올 듯한 생각으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간절함이 배어있다.
학교에선 책상들이 기다리고
집에서는 눈물짓는 밥그릇이
온 세상 사람들 다같이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어서 와라 어서 와라 어서 오거라
오늘은 오고 있나
지금 저기 거친 물길 밟고 달려오는가
엄마, 하고 품안에 안겨들려나
돌아와라 돌아와 돌아와야지
눈앞에 다가선 듯 아른거리는
내 딸 내 아들, 내 새끼들
눈에 들어올 듯 손에 잡힐 듯
나날은 지고 새고, 새고 지고
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고 마는가.
- 「아직도 아직입니까」 전문
설레고 부푼 마음으로 떠났던 수학여행 중에 맹골수도에서 화를 당한 안산고등학교 "학교에선 책상들이 기다리고" 졸지에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집에서는 눈물 짓는 밥그릇이"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는 아이들을 "어서 와라 어서 와라 어서 오거라"라고 애타게 염원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현실에서 "지금 저기 거친 물길 밟고 달려오는" 것처럼, 그래서 "엄마, 하고 품 안에 안겨들" 것 같은 착시와 환청에 시달리기도 한다. 꼭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픈 심정은 날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와야지"라고 소리칠 때면, "눈 앞에 다가선 듯 아른거"린다. 그러므로 "내 딸 내 아들, 내 새끼들/ 눈에 들어올 듯 손에 잡힐 듯"하지만 "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고 마는가."라는 절망의 언어밖에 새길 수 없는 시적 화자의 고통스러움이 투사되어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를 피를 토하듯, 동어반복을 할 수밖에 없는 시편들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시인의 언어가 갖는 한계가 어떠한지를 잘 말해준다. 「기다리는 마음」은 어린 학생들의 죽음 앞에서 "하늘은 노랗고 바다는 까맣"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절망이 배어있다. "왜인지 누구 탓인지 알 길조차 묘연"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것도 시인의 심정이다.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날이 새고 저무는 것에 시인은 절망한다. "무심한 바람은 바다 물살을 철썩이고" 밤 별들은 깜박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달 또한 동녘에서 떠올라 서산으로 기우는 현실을 그대로 시로 형상화시킴으로서 슬픔을 배가시킨다.
목차
목차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까치놀
까치놀
자갈밭에서
사모곡
낯익은 목소리
이제 그만
어머니의 말씀
돌강변에서
새봄이 오나 봐요
오월 단옷날
빈 도시락
산에 잠든 외할머니
뽕밭 사잇길
일요일엔 삼남매 내외와 함께
양귀비 일곱 송이
어버이날 생각
일기예보
우리 할머님
지난밤 꿈결에
해 질 녘
마중물 1
마중물 2
제2부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고향 생각
고향에서
꿈이 서린 고향
고향 들녘
모시상보
샛별
어떤 연가
화순 도곡온천
우리나라 꽃
탱자꽃
담장에 피는 꽃
국화빛 그리움
방긋 웃고 있다
꽃은 사철 피어나
동그란 송이에
천금채千金菜
춘란
어떤 초상
송덕비
제3부 봄비 내리는 날
봄비 내리는 날
봄 언저리
봄 향기
봄소식
봄이 오면
춘분春分
봄날에
하지夏至
입추 언저리
가을 길섶에서
가을 문턱에서
가을 언저리
시월의 저물녘
신문 한 조각
어느 가을
폭풍우 지나간 후
삶의 향기
초승달
장마
밤 피리 소리
제4부 노란 리본
노란 리본
단벌뿐인 목숨인데
세상에 이런 일이
아직도 아직입니까
기다리는 마음
슬픈 고양이들
김향자 추모 시
어느 날
할미꽃
거기 가보니
그 사랑 아시리
보성읍 용문길
아기 손톱
6.25를 맞아
그리움
그리운 마음
사랑의 전설
일상에서
바늘허리는 매 쓸 수 없어
세상사 별거던가
| 작품론 |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억과 그리움의 미학 / 강경호
□시인의 말
제1부 까치놀
까치놀
자갈밭에서
사모곡
낯익은 목소리
이제 그만
어머니의 말씀
돌강변에서
새봄이 오나 봐요
오월 단옷날
빈 도시락
산에 잠든 외할머니
뽕밭 사잇길
일요일엔 삼남매 내외와 함께
양귀비 일곱 송이
어버이날 생각
일기예보
우리 할머님
지난밤 꿈결에
해 질 녘
마중물 1
마중물 2
제2부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면
고향 생각
고향에서
꿈이 서린 고향
고향 들녘
모시상보
샛별
어떤 연가
화순 도곡온천
우리나라 꽃
탱자꽃
담장에 피는 꽃
국화빛 그리움
방긋 웃고 있다
꽃은 사철 피어나
동그란 송이에
천금채千金菜
춘란
어떤 초상
송덕비
제3부 봄비 내리는 날
봄비 내리는 날
봄 언저리
봄 향기
봄소식
봄이 오면
춘분春分
봄날에
하지夏至
입추 언저리
가을 길섶에서
가을 문턱에서
가을 언저리
시월의 저물녘
신문 한 조각
어느 가을
폭풍우 지나간 후
삶의 향기
초승달
장마
밤 피리 소리
제4부 노란 리본
노란 리본
단벌뿐인 목숨인데
세상에 이런 일이
아직도 아직입니까
기다리는 마음
슬픈 고양이들
김향자 추모 시
어느 날
할미꽃
거기 가보니
그 사랑 아시리
보성읍 용문길
아기 손톱
6.25를 맞아
그리움
그리운 마음
사랑의 전설
일상에서
바늘허리는 매 쓸 수 없어
세상사 별거던가
| 작품론 |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억과 그리움의 미학 / 강경호
저자
저자
김능자
ㆍ1994년 《문학춘추》 시 신인상
ㆍ1994년 《수필과 비평》 수필 신인상
ㆍ1999년 《아동문예》 문학상 수상
ㆍ광주시인협회 이사
ㆍ금초문학 회장 역임
ㆍ문학춘추 부회장 역임
ㆍ전라수필 회장 역임
ㆍ시집 『하얀 민들레』
ㆍ동시집 『청새알』
ㆍ수필집 『세월의 숲』
ㆍ1994년 《수필과 비평》 수필 신인상
ㆍ1999년 《아동문예》 문학상 수상
ㆍ광주시인협회 이사
ㆍ금초문학 회장 역임
ㆍ문학춘추 부회장 역임
ㆍ전라수필 회장 역임
ㆍ시집 『하얀 민들레』
ㆍ동시집 『청새알』
ㆍ수필집 『세월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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