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기독 묵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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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작품론
| 평설 |
'거룩한 성소'에서 언어의 살과 피를 읽다
- "허물을 벗는 육신의 소란"까지
김 종
(시인, 화가)
신경균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는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꾸린, 단순 기록을 넘어 본격 언어를 강물처럼 열어가는 작품집이라 하겠습니다. 신시인의 작품집은 처음부터 체험을 앞세운 시적 언어가 타당했었고 그 체험의 언어를 자신의 신앙적 여정으로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핵심 가치와 미덕은 언어적 발성이나 기교를 넘어 신앙의 구원 여정에 맞춘 "내면의 신념과 그 방향성"이라 할 것입니다.
잡으려 하면 어느새 날개 치고 달아나는 존재
특히나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시가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합니다. 자연, 사건, 기억 등은 성경적 장면에서 출발하고 결국은 자기 내면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수렴이 된다고 봅니다. 이들은 일관된 언어적 관심과 그 운행이며 시집 전체를 기도의 언어로 묶어주는 힘이 읽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경균의 시가 가장 깊어지는 순간은 "깨달음을 말할 때"가 아니라 "깨닫기 직전의 흔들림에 머물 때"라는 것도 눈여겨 본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집은 이미 그 같은 깨달음의 울림까지를 수렴하고 있으며 리듬을 올려 여운 있게 펼쳐내고 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이 시집은 '신앙 고백'이라는 중심 화두를 끝까지 손 놓지 않으면서 신경균이라는 개인의 신앙 체험을 시적 언어로 번역해 낸 수일한 작품군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문학적 기교를 담아내기보다는 체험에 터 잡은 신앙의 진정성과 묵상의 언어적 축적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그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특히나 자연 이미지-나비, 꽃, 물, 바람-와 성서적 상징-피, 어린양, 겟세마네, 십자가-을 병치시키면서 신앙의 추상성을 구체적 체험이나 그 감각으로 끌어나간 점이 이 시집이 독자에게 다가가는 남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몇 작품에서는 언어적 직절성으로 하여 신앙이나 시적 긴장이 늦춰진 부분도 읽을 수 있었지만 믿음을 전제한 설교와 시적 언어의 경계에서 때로는 '의미 전달'이 '이미지의 여운'을 앞서는 순간들로 발전하는데 이 점이 감안되어서인지 문학성과 그 전달력이 크게 살아나는 것 또한 살필 수 있었습니다.
신경균 시인은 1960년 이 나라 근·현대문학사에서 서정시의 최고봉인 김영랑 시인의 고향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에서 출생하여 포스코에서 37년간을 근무하다 정년 퇴임했으며 2001년 4월에 기독교로 회심하여 《한맥문학》에서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습니다. 이후 신실한 믿음을 바탕에 깔고 선교를 겸한 기독신앙시 중심의 작품활동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신경균 시인의 시집을 독서하는 필자가 가장 인상에 들었던 것은 시집 속의 작품들이 단순 신앙시가 아닌 '복음이 삶에 어떻게 체화體化되고 성숙하는가'를 다양한 비유로 풀어낸 영성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 일상, 성경, 계절, 곤충, 아이와 손주들까지 그 모두를 설교가 아닌 시적 상징으로 전환해 내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신경균 시인의 시집에서 살핀 시적 성과이기도 합니다.
나비를 찾았습니다
손끝에 닿을 듯 다가서면
화려한 날갯짓은
저만치 멀어집니다
더 높은 언덕과 들판을 헤맸지만
욕망의 그물 안에 남은 것은
빈손과 거친 숨소리뿐
지친 걸음이 비로소 멈춰 섭니다
맡겨진 밭을 일구어
사랑을 심고 순종의 물을 주니
자라나 꽃이 피고
나비들이 찾아옵니다
아, 이제야 행복을 깨닫습니다
쫓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 부르는 것을
당신의 정원에서 삶을 꽃피울 때
소리 없이 내려앉는 은혜인 것을
- 「나비와 정원」
위의 작품 「나비와 정원」은 첫 연에서 시인은 나비를 통해 인간의 "행복"이나 "은혜"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비는 잡으려 하면 어느새 날개를 치고 달아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현실적 욕망과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행복도 성공도 사랑도 잡으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두 번째 연은 그 같은 차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의 그물 안에 남은 것은 빈손과 거친 숨소리뿐이며 이 자리에서 '그물'은 한마디로 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인데 정작 그 안에 남은 것은 공허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욕망은 항상 '더'를 붙여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은 피로감만 남기는 빈손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위의 시작품이 아주 짧게 압축해 낸 신앙의 여정을 은유의 형식으로 노래했다 하겠습니다. 세 번째 연에 와서 이 시는 완전히 그 방향성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밭을 일구면서 읽히는 시 정신의 핵심은 '찾는다'에서 '가꾼다'로 바뀐 것이 그것입니다. 행복을 찾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같은 방향에서 추구하거나 가꾸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사랑을 심고' '순종의 물을 준다'는 표현들은 신앙인의 삶 자체를 농사에 비유하여 발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에 와서 우리는 쫓는 것은 향기를 부르는 것으로 시 전체의 흐름을 바꾸어 읽었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나비는 저절로 날아들게 마련입니다. 절대자에게 받은 은혜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쫓는 사람보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 열매의 역할을 맡기시는 분입니다.
이 작품은 사실상 시집 전체의 주제를 선언적으로 담아냈다는 데에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특히나 '행복의 방식'에 대한 전환의 부분에서는 그것들을 논리로 말하지 않고 거리감을 통한 감각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나비는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존재"로 읽힙니다. 이 같은 '나비'에게 부여한 물리적 거리감은 욕망의 본질을 그 같은 차원에서 치환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비'의 화려함이 아니라 "잡히지 않음"에 의한 그 의도성입니다. 독자는 시인이 날린 나비를 따라가면서 이미 실패의 구조 안으로 진입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시는 이내 그 방향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동하던 존재가 멈추면서 외부를 향하던 시선이 '맡겨진 밭'이라는 내부의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여기서부터 시의 호흡은 쫓던 리듬을 가꾸는 리듬으로 전환합니다. 마지막 연의 "향기로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 훈육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존재 방식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로 도래하는 것으로 발언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가/숨바꼭질을 하잔다//
방 어딘가에 숨으면/'다 숨었니?? 묻기도 전에/'다 숨었어요, 할아버지!?/들키고 싶은 비밀처럼/웃음이 먼저 새어 나오고//
나는 모르는 척/이불 틈을 뒤적이다/웅크린 보물을 찾은 양/금방 찾아낸다//
이번에는 손주가 술래/'할아버지 다 숨었어요?'/……/나는 들킬까 봐/대답하지 않는다//
세월의 주름 속 어딘가로/순수함이 숨어버렸을까/동심童心이 숨던 자리에/노심老心이 숨을 죽이고 있다//
짧은 만남이 지나가면/나는 몇 달 동안/다시 대답 없는 술래가 된다//
그날/대답하지 않았던 나의 침묵이/그리움이라는 사랑을/더 깊이 숨겨 둔 것은 아닐까//
오늘도/'내가 여기 있다'/그분의 응답만을 찾는/술래로 서 있다
- 「숨바꼭질」
위의 시 「숨바꼭질」은 겉으로는 손주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기도와 하나님의 침묵을 동시에 발언하고 있습니다. 첫 부분부터 그 표현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손주는 할아버지를 향해 '다 숨었어요!'라고 외칩니다. 숨는 목적이 들키지 않으려는 것에 있는데 손주에게는 '찾아 달라'는 하소연으로 바뀌고 맙니다. 아이들의 숨바꼭질은 '찾아주는 놀이' 그 자체라 할 것인데 이 작품의 후반부는 그 같은 흐름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들킬까 봐 대답을 하지 않는 '노심老心'의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장면은 단순히 손주와 할아버지와의 역할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화자는 노년에 이르면 아이처럼 "여기 있어요!"를 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고 그리움을 숨기고 외로움도 숨겨야 하는 놀이. 그래서 동심이 공공연하게 숨어들던 자리에 노심은 숨을 죽이고 모른 채 한다는 표현은 곱씹을수록 여운이 큽니다.
'동심'과 '노심'의 대비는 단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순수했던 영혼이 세월의 흐름에서 얼마나 다르게 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그런 의미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오늘도 "내가 여기 있다"라든지 그분의 응답만을 찾는 술래로 서 있다든지 등에서 손주를 찾던 할아버지가 이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를 위해 올리는 기도를 숨바꼭질로 되돌려 줍니다. 이 시는 시간의 층위를 아주 섬세하게 다루면서 겉으로는 손주와 할아버지의 놀이로 펼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나(숨던 아이)와 현재의 나(숨지 못하는 노인)로 이원화하고 거기에다 하나님 앞의 나(찾는 자) 등 세 개의 층이 동시에 겹쳐져 있습니다. 특히나 "노심이 숨을 죽이고 있다"는 구절은 단순 대비가 아닌 동심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리는가를 정확히 짚어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혜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침묵이고 마지막에서 '대답하지 않음'이 '그리움'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이 시는 놀이를 넘어 기도의 구조에 나아가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이 시집 전체를 통할하는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신앙적인 깊이를 동시에 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스치지 마라
길섶이라도
하찮게 피는
꽃은 없다
한 방울 이슬까지
꼬오옥 보듬어 안고
든든히 뿌리를 내렸다
이름 없는 들꽃일 망정
밟히고 또 밟혀
온몸으로 삶을 드러내며
새 생명의 씨앗을 품으려
기어이 피워 낸 섭리
- 「길꽃」
위의 시 「길꽃」은 길이는 짧지만 시인의 신앙정신을 강물처럼 흘리고 있습니다. 길섶이라도 하찮게 피는 꽃은 없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고 새삼 아무도 보지 않는 '길꽃'에의 존재를 인식하게 합니다.
인생을 돌아본 뒤에야 새삼 이해가 되는 사랑
그러나 하나님은 꽃도 이슬도 씨앗도 하나의 선상에서 기억하고 사랑으로 받아서 키우시는 분입니다. 특히 이슬 한 방울까지도 보듬어 안는 자리에 '꼬오옥'이라는 의성어를 보태어 어린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꼭'이라는 작은 단어의 제시가 이처럼 시의 울림과 온도를 높이는가를 생각하면 그 자체로도 이채롭기만 합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와서 섭리와 진리의 언어는 '기어이'를 앞세워 감 좋게 다가옵니다. 생명에의 존엄은 쉽게 피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 밟히면서도 결국엔 피어나고야 마는 최후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시의 행간에서 읽은 존재론적인 발화와 그 밀도는 무한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읽은 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밟힌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온몸으로 삶을 드러낸다"는 구절에 오면 삶이란 결국은 설명이 아니라 노출이라는 점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시는 모든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존재는 이미 의미다."라는 철학적 경구로 남게 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짧지만 밀도가 높은 섭리에 터 잡은 시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울리는 생명의 북소리/열정은 쉼 없이/믿음의 교향곡을 연주하네/심장의 노래가 멈출 때까지//
생기의 숨결이여/들숨, 날숨의 바람결로/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르며/말씀의 리듬에 사랑의 춤을 추네/생명의 선율이 다하기까지//
솟는 샘물 같은 영혼이여/새겨주신 당신의 형상/함께 부르는 사랑의 하모니로/소망의 심포니를 울리리라/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모든 피조물의 지휘자여/믿음, 소망, 사랑의 은혜로/그날, 가면을 벗은 생명들이 만나/천상의 화음으로 향연을 펼치리라/영원한 세계에서 영원까지
- 「생명의 교향곡」
이 작품은 음악을 통해 창조 세계를 설명하는 노래입니다. 첫 연이 의미하는 것은 '심장'입니다. 생명의 북소리가 쉼 없는 열정으로 울려 퍼지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생기의 바람결로 들숨 날숨을 리듬에 올린 '호흡'입니다. 셋째는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소망의 심포니를 울리며 사랑의 하모니로 함께한 '영혼'입니다. 넷째는 천상의 화음으로 믿음 소망 사랑의 은혜가 뭇 생명들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적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말인즉 심장→호흡→영혼→하나님으로 그 언어적 의미역이 점층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하모니는 혼자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창조주와 함께하는 모두의 음악이라는 것이 이 시가 요량한 핵심 의도일 것입니다. 이 시는 개인의 신앙을 음악적 구조로 확장 치환하면서 점차 우주적 의미로 그 범위를 넓혀갑니다. 초반은 '심장'과 '숨'이라는 신체상의 리듬으로 시작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지휘자와 합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요컨대 이 시는 개인→ 공동체→ 창조주의 세계로 확장되는 구조를 가진 작품이며 이 같은 의미적 확장이 언어의 매끄러움에 이어져 얼마간의 긴장과 완화마저 동반한다 하겠습니다.
이 시는 감동 위에 울림을 예비하고 시 이전에 사랑의 포용에 이르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구성은 오롯이 '음악'적 은유를 통한 신앙시의 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아니고
'늙거든?이라 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날 향한 약속
지금이 그때라
오래 참으셨겠다
가장 좋은 때에
오시려고
- 「그 사랑」
본 시집에서 길이는 짧지만 그럼에도 의미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은 시가 「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첫 연에서 읽은 "늙거든"이라는 단어가 한 사람의 일생을 품고 있는 웅숭깊은 어휘라고 생각됩니다. 젊을 때는 몰랐던 은혜, 강물 같은 흐름으로 지나온 인생을 돌아본 뒤에야 새삼 이해가 되는 사랑,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며 현재가 영원이 되는 순환성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때에 오시려는 아브라함, 모세, 욥, 다윗…등 성경이 담아낸 신앙 위인들의 기다림과도 연결되면서 이 시는 시간의 역설을 통해 신앙의 시적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읽은 "늙거든"이라는 말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나중'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시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현재'를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깨달음 자체라기보다 "이미 오래 기다렸던 순간"이라는 감각적 해석이 설득력을 키웁니다. 이 시는 짧지만 그 같은 시간의 압축에서 얻은 후회, 그리고 그다음에 찾아온 은혜의 역전 등이 두루 함유된, 매우 절제된 시라고 할 것입니다.
맛을 비워낸 물이
만물을 적시고
향을 지워낸 바람이
생명을 숨 쉬게 하며
색을 버려낸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춥니다
자신을 비워냈기에
당신은 사랑으로
세상을 온통 채우셨나요?
내 안에 가득한 쓴맛
고약한 냄새와
자아에 물든 본색을
당신의 사랑으로 씻어 내
그 사랑의 한 조각이게 하소서
- 「물바람 햇살처럼」
위의 작품 「물바람 햇살처럼」은 "비움의 신학"에서 비롯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자연에서 물은 맛이 없습니다. 바람 또한 냄새가 없습니다. 햇살은 물과 바람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색깔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본질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생명의 맥박을 부여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비유컨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닮았다는 해석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색을 버리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을 언어로 말하고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비움'을 단순 윤리가 아닌 존재의 조건으로 제시한 작품입니다. 물, 바람, 햇살 등은 모두가 "자기 성질을 숨김으로써 역할과 기능이 주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언어적 대비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과잉된 존재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시의 핵심 의도는 신앙을 전제한 질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워졌기에 채울 수 있는가?"란 화두는 그래서 독자를 향한 그 어떤 신앙적 고백보다 깊은 울림에 닿아있습니다.
그리 보면 이 작품은 비움의 신학을 자연에 투영하여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물(맛 없음), 바람(향 없음), 햇살(색 없음)→ 등 위의 작품은 사물의 자기 비움을 인간세계의 '맛, 냄새, 자아'와 대비되는 구조로 치환한 설득력이 명쾌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읽은 기도 형식 또한 보다 친숙한 표현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허기진 하루를 서너 번씩 갉아먹습니다/반복되는 일상은 기다림의 시간/당신이 따서 덮어준 푸른 뽕잎은/살과 피로 바뀔 거룩한 성찬입니다//
때론 세상 탐욕의 입을 닫고/고요히 고개를 들고 멈추어/잠처럼 보이는 금식의 기도를 올리고/낡은 자아의 허물을 벗으려/육신의 소란을 잠재우며/오직 당신의 세미한 음성만을 기다리는/치열한 침묵을 드립니다//
내 속 깊은 곳에 다 익어 토해낸/한올 한올 순백의 실크로/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집을 짓습니다/스스로 가둔 침묵의 어두운 골방에서/당신의 형상으로 은밀하게 다시 빚어진 날//
마침내/새하얀 나의 성소를 헐어/길러주던 당신의 몸을 휘감게 하소서//
주름진 육신의 무거움을 벗고/기어다니던 기억들 다 지우고/찬란한 날개를 꿈꾸기보다/나의 내일을 대신 내어드림으로/당신이 비상하는 날개를 얻는다면/스러짐이 나의 구원입니다
-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 필자가 대표작이라고 생각한 작품이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인데 이는 누에의 생애를 통해 성도의 성적聖跡을 그린 다음 '구원'의 자리에 펼친 작품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읽은 '애벌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뚜벅뚜벅, 차곡차곡, 꼬박꼬박…
이들 언어의 반복 사용
뽕잎은 벌레에게 살과 피가 되는 성찬의 필요충분적 품목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 보면 고치는 기도의 골방이라 할 수도 있고 실크는 '거룩'함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나아가 고치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무덤으로 설정된 상징성이 큰 사물입니다. 그리고 나비는 드디어 부활에 도달한 사물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비상하는 날개 위의 '스러짐'에서 희생의 고귀함을 암시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비상하는 날개를 얻는다면 이 부분의 감동이 그 무엇보다 앞 선다 할 것이고 나를 향한 구원보다도 주님을 위한 영광된 삶에 그 결론이 두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변형과 죽음, 거기에다 재탄생을 다루는 완성도 높은 상징적 구조 위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누에는 단순 생물이 아니라 먹고→ 멈추고→ 갇히고→ 풀리고→ 사라지는 등의 행위로 엮어지는 존재의 단계적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그대로 신앙의 여정과 겹치는 것을 볼 수가 있고 특히나 이 시가 지닌 뛰어난 점은 대부분의 변형 서사가 '날개를 얻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 시는 "나는 날개를 원하지 않았다"는 역설적 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 대신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당신이 날개를 얻는 것"이 특별히 주목됩니다. 작품의 진행에서 이 같은 구조적 역전은 신앙시에서는 이채로운 표현을 만드는 장치로서 충분하며 자기 비움의 언어적 성찰과 이를 밑 받친 결과를 낳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것만으로도 이 시집이 목표한 문학적 밀도가 높은 작품성은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가 담보하고 있음을 독서한 것입니다.
뚜벅 뚜벅
내가 내디딘 한걸음 위에
인도해 주시는 다음 한걸음
쉬지 않는 믿음의 걸음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차곡 차곡
내가 쌓아올린 작은 믿음 위에
경험으로 더해주시는 믿음
은혜의 조각들이 쌓인 믿음의 성벽입니다
꼬박 꼬박
내 마음에 새긴 말씀의 구절마다
손과 발로 이어주시는 묵상의 의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한 손길입니다
오롯이 오롯이
바쳐진 온전한 마음속에
머무르시는 주님의 임재
갈급한 빈 잔에 채우시는 생수입니다
- 「또바기 신앙」
'또바기'는 '언제나 한결같이'라는 의미의 순우리말입니다. 그러니까 「또바기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신앙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시인은 이 한 단어를 축으로 신앙의 자기 성장을 사방의 네 단계로 펼쳐 보입니다. '뚜벅뚜벅'은 순종의 묵직한 실천이며 '차곡차곡'은 경험 위에 쌓인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꼬박꼬박'은 말씀의 내면화를 통한 꼼꼼함 내지는 치밀함이고 '오롯이'는 그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믿음의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적 운용은 언어사용의 단조로운 반복을 넘어 꾸준한 신앙생활을 한결같은 믿음의 리듬 위에 실천하고 있음을 형상화한, 믿음의 다면적 진실을 만나게 합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특별한 사건보다 일상에서는 하찮은 것이라도 성실함이 바로 믿음을 밑받친다는 신실함의 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 시는 특이한 언어적 반복을 통해 신앙의 시간을 자별하면서도 재미나게 그리면서 진심 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만난 시적 효과로 의성어나 의태어의 차용이 압권이며 문학은 그 자체로 리듬이라는 메시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뚜벅뚜벅, 차곡차곡, 꼬박꼬박… 이들 언어의 반복 사용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단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언어의 추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시의 언어는 원래는 리듬이 시작품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훈육의 내용을 리듬에 얹어서 문학이 재미와 가르침의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이 시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이미 체질로서 그 같다는 사실을 감 잡게 하고 여기에 언어적 장치가 신앙이라는 믿음을 생활화한 매우 효과적인 일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리듬을 살려서 더 큰 진리를 지시하는 신경균 시인의 시적 언어와 그 행보가 한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작은 벌레도 귀를 세우고/고요 속 소리에 기울일 때/때가 찬 보름달은/사랑의 빛을 토해/영글은 올리브 열매 안에서/깊은 숨을 들이키며/두 무릎을 겟세마네 동산에 얹는다//
부서지고 으깨어져/흘러나온 영혼의 기름은/겟세마네를 불태우는데/죄의 무게에 짓눌린 통곡은/죽음의 잔에 담긴 핏빛 고통을/기꺼이 홀로 마시고/섭리 앞에 생명을 내려놓는다//
사랑이 끊어지는 아픔 곁에/승리의 잔을 들고/낄낄대며 조롱하는 어둠//
죄를 얹고 아들을 바라보며/찢어진 가슴으로 돌아서는 사랑/애타는 부르짖음을 마친 순종은/이미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생명줄을 끊은 나의 죄악이/아버지를 가린 허물이라면/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는가/그 자취를 이제야 깨닫나이다./참회의 눈물, 뜨거운 바다로 흐르니/골고다 언덕을 기꺼이 오르리라/구원의 동산에 이르기까지
- 「겟세마네 동산」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을 지닌 기구 내지는 장소의 이름인데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 하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로 위쪽인 감람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감람산의 일부로서 감람기름을 짜는 틀을 '겟세마네'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평소에도 이곳을 자주 찾아 여호와께 기도하며 대화하신 곳으로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가롯 유다의 밀고로 로마 군병과 유대인 무리에게 체포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공생애公生涯의 마지막 순간까지 찾고 기도하신 이 장소는 오늘날도 수 많은 성도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다 그 의미를 살려서 예수님의 기도를 '올리브가 으깨어져 기름이 되는 과정'과 겹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서지고 으깨어져 흘러나온 영혼의 기름은 성령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순종의 대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합니다.
요컨대 감상이 회개로 전환되는 구조가 이 작품의 핵심일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고통의 밀도가 높은 작품이며 이미지들 또한 겹겹이 쌓여서 믿음의 눈으로는 다다르기 어려운 거의 압도적인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육체의 병보다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잃은 심령
다만 때로는 그 밀도가 너무 높아서 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가 숨을 고를 여백이 부족하다는 표현이 나올 법도 합니다. 이 시의 핵심은 그만큼 고통이 아니라 "순종의 방향"잡기이며 여기서의 고통은 작품의 밀도와 방향을 증명하는 재료로도 기능한다고 하겠습니다. 신경균 시인은 성경의 서사를 시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미지의 밀도를 최대한 높였었고 비유와 감정이 겹치는 부분을 만들면서 특히 중반부에서의 압축을 훨씬 강렬한 것으로 읽어내게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깨우면
더 좋은 내일이 기지개를 켠다
번데기는 죽은 듯 숨은 생명 한 톨
진정한 쉼을 얻은 변화 속에
고치를 뚫고 무엇으로 깨어날까
어두운 밤, 이 빛 저 빛 쫓다
불로 뛰어드는 나방이 아니라
참빛 비추는 꽃 위에 머물러
진리의 꿀을 빨고 생명가루 전해주는
그런 꿈을 품은 나비이고 싶다
서로 다른 빛깔의 어울림이여
앞 날개 진리와 바람이 되고
뒷 날개 사귐과 전달의 날개짓 되어
나도 젓고 너도 저어 위로 위로 오르면
온 세상에 사랑의 바람이 일리라
어느 날, 나팔소리 들릴 때
아직 배부른 애벌레가 아니기를
밤 하늘을 떠도는 나방이 아니기를
공중으로 함께 올라 주를 만나는
생명을 품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다
- 「자유로운 영혼」
이 시는 '번데기-나비'의 생태적 변화를 통해 종말론적 소망을 상징성 높은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나비와 나방을 대비한 구성은 탁월하다는 평가가 마땅하고 이 작품에 크나큰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나방은 빛을 오인하여 무작정 불에 뛰어드는 존재지만 나비는 꽃을 찾아 꿀을 빨고 그로 하여 자신의 생명 세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화려한 빛과 참빛으로 인간들을 구분하여 찾으신 그리스도를 대비하는 상징으로 그 효과 또한 직절하게 읽힙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읽은 "나팔소리"는 종말의 부르심을 암시하면서 시 전체가 깨어 있는 신앙에의 기도 소리로 나아가 여울지게 합니다. 이 시는 우선 그 방향성이 신앙에 맞추어진 작품임은 물론이고 이 시가 담은 나방과 나비의 대비는 "어디에 머무르는가"를 핵심 질문으로 제시합니다. 이 시는 결국 신앙 앞에서 우리가 취할 선택이란 어떤 것이며 이에서 파생된 빛의 종류를 어떻게 분별할까도 지시하고 가르치는 시입니다. 나비와 나방의 대비는 일견 가까운듯하면서도 한자리에 세우기가 그닥 용이하지 않은 사물인데 그럼에도 시인은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빛과 유혹의 빛"은 그 구도의 차이가 명확함에도 현실에서 이를 구분하고 바르게 취하기는 그 인식이 매우 비좁거나 난해하다는 것이고 이를 구조적으로 안정하면서도 그 주제 또한 비교적 친숙한 범주에 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성문 밖에 문둥이 넷
문드러진 살점 위에
서러운 외면들이 내려앉고
움켜쥔 주린 배에
떨어져 나간 열 손마디를 얹는다
안이나 밖이나
문둥이건 아니건
굶어 죽긴 매한가지
차라리 항복의 걸음을 뗀다
천형天刑을 안고 사는 자
뭉개진 입술에 선한 미소 담아
생명을 전하건만
천형天刑을 면한 자
잔치에 홀로 배부른 채
죽어가는 성읍 바라보며
어찌 눈이 메말랐는가
이 감각 없는 침묵의 심장이
진정 고침받아야 할 형벌刑罰
영혼의 문둥병
- 「뭉개진 입술의 외침」
작품 「뭉개진 입술의 외침」은 이 시집에 담긴 시작품 중 가장 예언적이고 사회성 또한 강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列王記下 7장에 나오는 문둥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서 시인의 관심은 이를 살핀 기적보다 보고도 깨우치지 못한 인간의 무지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천형을 면한 자가 잔치마당에 와서 홀로 배부른 채 복음을 먼저 들은 사람을 향해 책임을 묻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읽은 "영혼의 문둥병"은 육체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잃은 심령이라는 역설로 이어갑니다. 참고로 이 자리에 열왕기서를 옮기자면 다윗 왕의 죽음에서부터 왕국 분열을 거쳐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20년간의 역사를 그린 '열왕기上'과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통치에서부터 남북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까지의 300여 년 역사를 그린 '열왕기下'로 구분이 됩니다. 열왕기서書는 비록 선민이면서 하나님을 저버린 통치자와 나라의 연약함과 허약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선민의 역사 가운데서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을 여과 없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위의 시는 시집 전체에서 가장 외부를 향한 시선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고통받는 자보다 이를 알아채지 못한 무감각한 자를 향해 더 강한 질책성의 발언을 이어갑니다. 이 같은 구조는 한편으로는 독자를 이 작품이 의도한 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매신저로 제시하면서 이 시의 진짜 주제는 병이 아니라 "감각의 상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메시지가 어떻게 읽히는지를 보이는 시이기도 합니다.
연약한 흙집 가운데/주인으로 오셨으니/항상 내 모든 삶 속에/임마누엘로 임하셔서/내게 보이신 그 거룩함을/늘 닮아가게 하소서//
어렵고 힘들어 막막할 때에도/갈 길을 능히 비춰 주시니/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에도/바른길을 묻게 하셔서/범사에 당신을 인정토록/늘 기도하게 하소서//
어그러지고 저는 발로/당신을 앞서가지 않고/어리석은 내 생각이/당신 위에 서지 않게 하셔서/겸손 가운데 임하시는//
당신의 은혜를 늘 받게 하소서//
주님 바라보는 곳/나도 바라보고/주님 계신 곳에/나도 영원히 거하도록/그 앞에 설 소망만으로/늘 기뻐하게 하소서
- 「임마누엘」
작품 「임마누엘」은 시라기보다는 '기도의 시편'에 가깝게 창작된 노래입니다. 작품의 전개에서 각 연에 장치한 어미는 "…하게 하소서"라는 간구의 언어로 끝을 맺으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에도 바른길을 묻게 하셔서"라는 고백은 큰 시험보다 일상의 선택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려는 신앙의 실천과 그 정신의 성숙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문 형식으로 창작된 이 시에서 진정성은 분명하지만 확장된 표현을 통한 더 높은 신앙에의 '간구'를 일상적 어투로 수용하게 합니다.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의 고백
이 시는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기도의 형태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실천하려는 신앙에의 간절함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에 닿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파생된 '임마누엘 운동'도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인간의 영적·정서적인 문제를 기존 교회가 일반 사회의 의학인 심리적 개념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하나를 궁구한 사회운동이며 신앙적 차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저마다의 삶을 정하고 '임마누엘'로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용하면서도 은밀하게 바라보는 신경균 시인의 작품이 「임마누엘」이었음을 돌이키면서 문학적 실험보다는 신앙의 안정미가 더한층 시적 언어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 시가 요량한 시적 진리란 결국은 하나님을 닮은 삶이었음을 되새기게 합니다.
온몸에 맞은 채찍/그 피 내 몸으로 흘러/죄의 병 나음 얻어 죄의 흔적 가리고/그 채찍이 인도하는 막대기가 되었네//
옆구리에 찔린 창/그 피 내 가슴에 흘러/쏟으신 물과 피로 새 생명 주셔서/그 창이 의지하는 지팡이가 되었네//
손과 발에 박힌 그 못/그 피 내 손발에 흘러/그 못 위에 선한 일을 걸어 두고/복음의 신을 신고 전하게 하셨네//
머리에 쓰신 가시관/그 피 내 머리로 흘러/내 생각 버리고 주의 뜻 알게 하여/그 가시관이 면류관이 되겠네//
당신을 치던 망치 소리/내 영혼의 떨림이 되어/거저 사랑 먼저 사랑 끝없는 그 사랑/그 은혜 더 깊이 박히도록 늘 나를 치소서
- 「사랑의 피」
위의 작품 「사랑의 피」는 십자가에 담긴 다섯 개의 상징-채찍, 창, 못, 가시관, 망치-등을 차례로 묵상하면서 그 같은 고난이 화자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궁구하게 합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고 거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 몸으로 흘러' 죄의 병도 낫고 흔적 또한 가리우면서 '그 채찍'이 "인도하는 막대기가 되었"다는 대목에서 새삼 "쏟으신 물과 피로 새 생명을 주신" 예수의 그 엄청난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은 믿음에의 고난은 단순 사건이라기보다는 '막대기', '지팡이', '복음의 신', '면류관'처럼 확장된 사물적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축복이고 은혜의 도구가 되는 복음에의 역설은 그래서 구조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이 작품은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는 신체와 신학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상관하여 연결 짓고 있습니다. 고통이 추상이 아니라 몸의 구체성으로 내려오면서 이 시는 구조적으로는 명확하지만 그만큼 여백은 줄어든다는 점도 읽힙니다. "내 생각 버리고 주의 뜻 알게 하여"에서 우리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비좁고 부족한가를 살피게 하고 이에서 주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게 하였고 '당신을 치던 망치 소리'가 "거저 사랑 먼저 사람 끝없는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찌 위치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하게 지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십자가에의 진리'는 몸과 채찍, 가슴과 창, 손발과 못, 머리와 가시면류관 등 각 요소를 신체 부위와 연결하여 설명보다 명료한 표현을 시적 구조에 담아냈다 하겠습니다.
안개가 자욱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해가 떠올라
따뜻한 빛을 비추니
하늘이 열리고
숲이 드러나고
한 포기 풀이 보이고
다른 세상이 보인다
닫혀 있던 마음 눈이 열려
주님이 보이고
그 앞에 내가 보인다
이제야 보이는 십자가
빈 무덤
- 「죄 용서」
위의 시 「죄 용서」는 안개가 걷히는 자연 현상을 통해 주님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현실 세계의 미몽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모시는 일을 체험의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안개가 짙을 때는 시야에 그 어떤 것도 가려져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햇살이 비쳐 들면 주변의 모든 풍경이 제 모습대로 드러나듯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현실에서 깨닫게 되는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십자가 빈 무덤'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회심의 절정을 담은 압축된 이미지가 읽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긴 설명 대신 이들 상징으로 보여 주지만 이것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시는 '보임'에 대한 사물적 현상을 깨우침의 형식으로 표현하였고 이럴 때 안개는 단순 시야의 장애가 아니라 존재의 미몽을 덮고 있는 사물이라 할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세상이 바뀌는 것은 보는 내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이 시는 일견 단순하지만 그런 만큼 지시하는 바는 더더욱 명확합니다. 다시금 음미하지만 안개가 자욱할 때는 지척이 가려서 오도 가도 못하던 것을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가 떠서 밝은 빛을 투사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하늘도 열리고 숲도 드러나고 심지어는 바람에 나풀대는 풀 한 포기까지… 세상의 오만가지 사물들이 제 형체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되면 닫혀 있던 마음에도 눈이 열리고 그제서야 침침하던 눈에도 '주님이 보이고' 비로소 십자가 빈 무덤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컨대 「죄 용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시적 표현이나 장치는 간결하지만 그에서 의미하는 바는 영적 전개에 이어져 있고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주가 나의 목자가 되시다니요/자기 길로 흩어져 헤매던/냄새나고 더러운 양을 위해/마구간 구유까지 찾아오셨네/풍족함이 모두의 소망이라지만/모든 필요가 당신 안에 있기에/목자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선한 목자가 날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요/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둔 눈/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고/돌아갈 방향마저 잃은 채/속절없는 죽음뿐이었지만/오직 내 이름 부르는 음성이/생명의 소리 되어 새 삶을 얻었습니다//
연약한 어린양을 돌보시다니요/원수를 이기도록 양식을 베푸시고/의로운 길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한 지팡이와 인자한 막대기로 위로받아/성경이 푸른 초장이요/이끄신 교회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엄마 품에 젖 뗀 아이처럼 잠드나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다니요/발 씻을 물 한 방울 드린 적 없건만/상상 못 할 은혜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영원하신 이름 위에/지쳐 쓰러진 나를 어깨에 올리시니/사망의 골짜기가 생명 길이 되어/당신의 품에서 부르는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 「어린 양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는 이 시집의 종결부에 놓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독서 또한 여기에 맞추었고 이처럼 뒷자리에 위치시켰습니다. 앞선 작품들이 이전의 단계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는 '도착한 영혼에의 찬양'에 그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결국 목자의 품 안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자리에서 "목자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시집 전체에 담아내고자 한 신앙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비를 쫓던 사람, 숨은 이를 찾던 사람, 길꽃을 바라보던 사람, 누에처럼 자신을 비워 가던 사람 등에서 마침내는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적 고백에 이르는 과정이 여러 파장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시편적 호흡을 가진 찬양시로 발군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점점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구원의 노래이기에 특별히 눈여겨 살핀 것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부족함은 해결이 아니라 충분함의 발견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시편적 구조를 지닌 찬양시이면서 특징적으로 반복과 확장이 읽히는 상당한 길이에서 일부 긴장감마저 접하게 되었고 이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작품은 없을 듯합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을 자연스럽게 녹여서 신앙의 안식으로 마무리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그 의미를 더한다 하겠습니다.
신경균 시인의 신앙시를 일괄 독서하면서 우리는 이들 시작품에서 신앙 체험상의 진정성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든지 자연과 신앙의 연결 능력이 뛰어나다든지 상징적 구조-나비, 꽃, 피, 길 등-가 반복 읽히면서 통일성의 형성으로 문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완성도를 보이는 등 여러 면면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집'인가 하면 '묵상집'이고 묵상집인가 하면!
통상적으로 단일 주제라 하기에 안성맞춤인 신앙시는 그래서 편편이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경균 시인이 펼쳐낸 신앙시의 문학적 오지랖은 '설명하는 문장'을 넘어서 '보여주는 이미지'로 치환되었고 최대한 추상어의 사용을 줄이면서 감각적 표현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일부 장편 시의 압축까지 편편의 작품을 주제적 전개에 따른 저마다의 내용 또한 마땅하다
| 평설 |
'거룩한 성소'에서 언어의 살과 피를 읽다
- "허물을 벗는 육신의 소란"까지
김 종
(시인, 화가)
신경균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는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꾸린, 단순 기록을 넘어 본격 언어를 강물처럼 열어가는 작품집이라 하겠습니다. 신시인의 작품집은 처음부터 체험을 앞세운 시적 언어가 타당했었고 그 체험의 언어를 자신의 신앙적 여정으로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의 핵심 가치와 미덕은 언어적 발성이나 기교를 넘어 신앙의 구원 여정에 맞춘 "내면의 신념과 그 방향성"이라 할 것입니다.
잡으려 하면 어느새 날개 치고 달아나는 존재
특히나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시가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합니다. 자연, 사건, 기억 등은 성경적 장면에서 출발하고 결국은 자기 내면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수렴이 된다고 봅니다. 이들은 일관된 언어적 관심과 그 운행이며 시집 전체를 기도의 언어로 묶어주는 힘이 읽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신경균의 시가 가장 깊어지는 순간은 "깨달음을 말할 때"가 아니라 "깨닫기 직전의 흔들림에 머물 때"라는 것도 눈여겨 본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시집은 이미 그 같은 깨달음의 울림까지를 수렴하고 있으며 리듬을 올려 여운 있게 펼쳐내고 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이 시집은 '신앙 고백'이라는 중심 화두를 끝까지 손 놓지 않으면서 신경균이라는 개인의 신앙 체험을 시적 언어로 번역해 낸 수일한 작품군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문학적 기교를 담아내기보다는 체험에 터 잡은 신앙의 진정성과 묵상의 언어적 축적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그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특히나 자연 이미지-나비, 꽃, 물, 바람-와 성서적 상징-피, 어린양, 겟세마네, 십자가-을 병치시키면서 신앙의 추상성을 구체적 체험이나 그 감각으로 끌어나간 점이 이 시집이 독자에게 다가가는 남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몇 작품에서는 언어적 직절성으로 하여 신앙이나 시적 긴장이 늦춰진 부분도 읽을 수 있었지만 믿음을 전제한 설교와 시적 언어의 경계에서 때로는 '의미 전달'이 '이미지의 여운'을 앞서는 순간들로 발전하는데 이 점이 감안되어서인지 문학성과 그 전달력이 크게 살아나는 것 또한 살필 수 있었습니다.
신경균 시인은 1960년 이 나라 근·현대문학사에서 서정시의 최고봉인 김영랑 시인의 고향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에서 출생하여 포스코에서 37년간을 근무하다 정년 퇴임했으며 2001년 4월에 기독교로 회심하여 《한맥문학》에서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나왔습니다. 이후 신실한 믿음을 바탕에 깔고 선교를 겸한 기독신앙시 중심의 작품활동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신경균 시인의 시집을 독서하는 필자가 가장 인상에 들었던 것은 시집 속의 작품들이 단순 신앙시가 아닌 '복음이 삶에 어떻게 체화體化되고 성숙하는가'를 다양한 비유로 풀어낸 영성의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 일상, 성경, 계절, 곤충, 아이와 손주들까지 그 모두를 설교가 아닌 시적 상징으로 전환해 내고 있다는 점이 우리가 신경균 시인의 시집에서 살핀 시적 성과이기도 합니다.
나비를 찾았습니다
손끝에 닿을 듯 다가서면
화려한 날갯짓은
저만치 멀어집니다
더 높은 언덕과 들판을 헤맸지만
욕망의 그물 안에 남은 것은
빈손과 거친 숨소리뿐
지친 걸음이 비로소 멈춰 섭니다
맡겨진 밭을 일구어
사랑을 심고 순종의 물을 주니
자라나 꽃이 피고
나비들이 찾아옵니다
아, 이제야 행복을 깨닫습니다
쫓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 부르는 것을
당신의 정원에서 삶을 꽃피울 때
소리 없이 내려앉는 은혜인 것을
- 「나비와 정원」
위의 작품 「나비와 정원」은 첫 연에서 시인은 나비를 통해 인간의 "행복"이나 "은혜"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비는 잡으려 하면 어느새 날개를 치고 달아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현실적 욕망과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행복도 성공도 사랑도 잡으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두 번째 연은 그 같은 차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의 그물 안에 남은 것은 빈손과 거친 숨소리뿐이며 이 자리에서 '그물'은 한마디로 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인데 정작 그 안에 남은 것은 공허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욕망은 항상 '더'를 붙여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은 피로감만 남기는 빈손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위의 시작품이 아주 짧게 압축해 낸 신앙의 여정을 은유의 형식으로 노래했다 하겠습니다. 세 번째 연에 와서 이 시는 완전히 그 방향성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맡겨진 밭을 일구면서 읽히는 시 정신의 핵심은 '찾는다'에서 '가꾼다'로 바뀐 것이 그것입니다. 행복을 찾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같은 방향에서 추구하거나 가꾸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사랑을 심고' '순종의 물을 준다'는 표현들은 신앙인의 삶 자체를 농사에 비유하여 발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에 와서 우리는 쫓는 것은 향기를 부르는 것으로 시 전체의 흐름을 바꾸어 읽었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나비는 저절로 날아들게 마련입니다. 절대자에게 받은 은혜도 그와 같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쫓는 사람보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 열매의 역할을 맡기시는 분입니다.
이 작품은 사실상 시집 전체의 주제를 선언적으로 담아냈다는 데에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특히나 '행복의 방식'에 대한 전환의 부분에서는 그것들을 논리로 말하지 않고 거리감을 통한 감각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에서 나비는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존재"로 읽힙니다. 이 같은 '나비'에게 부여한 물리적 거리감은 욕망의 본질을 그 같은 차원에서 치환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비'의 화려함이 아니라 "잡히지 않음"에 의한 그 의도성입니다. 독자는 시인이 날린 나비를 따라가면서 이미 실패의 구조 안으로 진입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시는 이내 그 방향성을 바꾸게 됩니다. 이동하던 존재가 멈추면서 외부를 향하던 시선이 '맡겨진 밭'이라는 내부의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여기서부터 시의 호흡은 쫓던 리듬을 가꾸는 리듬으로 전환합니다. 마지막 연의 "향기로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 훈육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존재 방식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이 시에서 행복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로 도래하는 것으로 발언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주가/숨바꼭질을 하잔다//
방 어딘가에 숨으면/'다 숨었니?? 묻기도 전에/'다 숨었어요, 할아버지!?/들키고 싶은 비밀처럼/웃음이 먼저 새어 나오고//
나는 모르는 척/이불 틈을 뒤적이다/웅크린 보물을 찾은 양/금방 찾아낸다//
이번에는 손주가 술래/'할아버지 다 숨었어요?'/……/나는 들킬까 봐/대답하지 않는다//
세월의 주름 속 어딘가로/순수함이 숨어버렸을까/동심童心이 숨던 자리에/노심老心이 숨을 죽이고 있다//
짧은 만남이 지나가면/나는 몇 달 동안/다시 대답 없는 술래가 된다//
그날/대답하지 않았던 나의 침묵이/그리움이라는 사랑을/더 깊이 숨겨 둔 것은 아닐까//
오늘도/'내가 여기 있다'/그분의 응답만을 찾는/술래로 서 있다
- 「숨바꼭질」
위의 시 「숨바꼭질」은 겉으로는 손주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기도와 하나님의 침묵을 동시에 발언하고 있습니다. 첫 부분부터 그 표현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손주는 할아버지를 향해 '다 숨었어요!'라고 외칩니다. 숨는 목적이 들키지 않으려는 것에 있는데 손주에게는 '찾아 달라'는 하소연으로 바뀌고 맙니다. 아이들의 숨바꼭질은 '찾아주는 놀이' 그 자체라 할 것인데 이 작품의 후반부는 그 같은 흐름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들킬까 봐 대답을 하지 않는 '노심老心'의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장면은 단순히 손주와 할아버지와의 역할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화자는 노년에 이르면 아이처럼 "여기 있어요!"를 외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고 그리움을 숨기고 외로움도 숨겨야 하는 놀이. 그래서 동심이 공공연하게 숨어들던 자리에 노심은 숨을 죽이고 모른 채 한다는 표현은 곱씹을수록 여운이 큽니다.
'동심'과 '노심'의 대비는 단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순수했던 영혼이 세월의 흐름에서 얼마나 다르게 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그런 의미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오늘도 "내가 여기 있다"라든지 그분의 응답만을 찾는 술래로 서 있다든지 등에서 손주를 찾던 할아버지가 이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바뀌고 그를 위해 올리는 기도를 숨바꼭질로 되돌려 줍니다. 이 시는 시간의 층위를 아주 섬세하게 다루면서 겉으로는 손주와 할아버지의 놀이로 펼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나(숨던 아이)와 현재의 나(숨지 못하는 노인)로 이원화하고 거기에다 하나님 앞의 나(찾는 자) 등 세 개의 층이 동시에 겹쳐져 있습니다. 특히나 "노심이 숨을 죽이고 있다"는 구절은 단순 대비가 아닌 동심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리는가를 정확히 짚어내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혜의 차원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침묵이고 마지막에서 '대답하지 않음'이 '그리움'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이 시는 놀이를 넘어 기도의 구조에 나아가게 됩니다. 이 작품은 이 시집 전체를 통할하는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신앙적인 깊이를 동시에 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스치지 마라
길섶이라도
하찮게 피는
꽃은 없다
한 방울 이슬까지
꼬오옥 보듬어 안고
든든히 뿌리를 내렸다
이름 없는 들꽃일 망정
밟히고 또 밟혀
온몸으로 삶을 드러내며
새 생명의 씨앗을 품으려
기어이 피워 낸 섭리
- 「길꽃」
위의 시 「길꽃」은 길이는 짧지만 시인의 신앙정신을 강물처럼 흘리고 있습니다. 길섶이라도 하찮게 피는 꽃은 없다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고 새삼 아무도 보지 않는 '길꽃'에의 존재를 인식하게 합니다.
인생을 돌아본 뒤에야 새삼 이해가 되는 사랑
그러나 하나님은 꽃도 이슬도 씨앗도 하나의 선상에서 기억하고 사랑으로 받아서 키우시는 분입니다. 특히 이슬 한 방울까지도 보듬어 안는 자리에 '꼬오옥'이라는 의성어를 보태어 어린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꼭'이라는 작은 단어의 제시가 이처럼 시의 울림과 온도를 높이는가를 생각하면 그 자체로도 이채롭기만 합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와서 섭리와 진리의 언어는 '기어이'를 앞세워 감 좋게 다가옵니다. 생명에의 존엄은 쉽게 피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 밟히면서도 결국엔 피어나고야 마는 최후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시의 행간에서 읽은 존재론적인 발화와 그 밀도는 무한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읽은 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밟힌다'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온몸으로 삶을 드러낸다"는 구절에 오면 삶이란 결국은 설명이 아니라 노출이라는 점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시는 모든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존재는 이미 의미다."라는 철학적 경구로 남게 됩니다. 그만큼 이 시는 짧지만 밀도가 높은 섭리에 터 잡은 시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울리는 생명의 북소리/열정은 쉼 없이/믿음의 교향곡을 연주하네/심장의 노래가 멈출 때까지//
생기의 숨결이여/들숨, 날숨의 바람결로/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르며/말씀의 리듬에 사랑의 춤을 추네/생명의 선율이 다하기까지//
솟는 샘물 같은 영혼이여/새겨주신 당신의 형상/함께 부르는 사랑의 하모니로/소망의 심포니를 울리리라/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모든 피조물의 지휘자여/믿음, 소망, 사랑의 은혜로/그날, 가면을 벗은 생명들이 만나/천상의 화음으로 향연을 펼치리라/영원한 세계에서 영원까지
- 「생명의 교향곡」
이 작품은 음악을 통해 창조 세계를 설명하는 노래입니다. 첫 연이 의미하는 것은 '심장'입니다. 생명의 북소리가 쉼 없는 열정으로 울려 퍼지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생기의 바람결로 들숨 날숨을 리듬에 올린 '호흡'입니다. 셋째는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소망의 심포니를 울리며 사랑의 하모니로 함께한 '영혼'입니다. 넷째는 천상의 화음으로 믿음 소망 사랑의 은혜가 뭇 생명들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적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말인즉 심장→호흡→영혼→하나님으로 그 언어적 의미역이 점층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하모니는 혼자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창조주와 함께하는 모두의 음악이라는 것이 이 시가 요량한 핵심 의도일 것입니다. 이 시는 개인의 신앙을 음악적 구조로 확장 치환하면서 점차 우주적 의미로 그 범위를 넓혀갑니다. 초반은 '심장'과 '숨'이라는 신체상의 리듬으로 시작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지휘자와 합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요컨대 이 시는 개인→ 공동체→ 창조주의 세계로 확장되는 구조를 가진 작품이며 이 같은 의미적 확장이 언어의 매끄러움에 이어져 얼마간의 긴장과 완화마저 동반한다 하겠습니다.
이 시는 감동 위에 울림을 예비하고 시 이전에 사랑의 포용에 이르는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의 구성은 오롯이 '음악'적 은유를 통한 신앙시의 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아니고
'늙거든?이라 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날 향한 약속
지금이 그때라
오래 참으셨겠다
가장 좋은 때에
오시려고
- 「그 사랑」
본 시집에서 길이는 짧지만 그럼에도 의미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은 시가 「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첫 연에서 읽은 "늙거든"이라는 단어가 한 사람의 일생을 품고 있는 웅숭깊은 어휘라고 생각됩니다. 젊을 때는 몰랐던 은혜, 강물 같은 흐름으로 지나온 인생을 돌아본 뒤에야 새삼 이해가 되는 사랑,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며 현재가 영원이 되는 순환성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때에 오시려는 아브라함, 모세, 욥, 다윗…등 성경이 담아낸 신앙 위인들의 기다림과도 연결되면서 이 시는 시간의 역설을 통해 신앙의 시적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읽은 "늙거든"이라는 말은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나중'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이 시에서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현재'를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깨달음 자체라기보다 "이미 오래 기다렸던 순간"이라는 감각적 해석이 설득력을 키웁니다. 이 시는 짧지만 그 같은 시간의 압축에서 얻은 후회, 그리고 그다음에 찾아온 은혜의 역전 등이 두루 함유된, 매우 절제된 시라고 할 것입니다.
맛을 비워낸 물이
만물을 적시고
향을 지워낸 바람이
생명을 숨 쉬게 하며
색을 버려낸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춥니다
자신을 비워냈기에
당신은 사랑으로
세상을 온통 채우셨나요?
내 안에 가득한 쓴맛
고약한 냄새와
자아에 물든 본색을
당신의 사랑으로 씻어 내
그 사랑의 한 조각이게 하소서
- 「물바람 햇살처럼」
위의 작품 「물바람 햇살처럼」은 "비움의 신학"에서 비롯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자연에서 물은 맛이 없습니다. 바람 또한 냄새가 없습니다. 햇살은 물과 바람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색깔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본질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생명의 맥박을 부여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비유컨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닮았다는 해석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색을 버리는 사람이 세상을 아름답게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을 언어로 말하고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비움'을 단순 윤리가 아닌 존재의 조건으로 제시한 작품입니다. 물, 바람, 햇살 등은 모두가 "자기 성질을 숨김으로써 역할과 기능이 주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언어적 대비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과잉된 존재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시의 핵심 의도는 신앙을 전제한 질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워졌기에 채울 수 있는가?"란 화두는 그래서 독자를 향한 그 어떤 신앙적 고백보다 깊은 울림에 닿아있습니다.
그리 보면 이 작품은 비움의 신학을 자연에 투영하여 표현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물(맛 없음), 바람(향 없음), 햇살(색 없음)→ 등 위의 작품은 사물의 자기 비움을 인간세계의 '맛, 냄새, 자아'와 대비되는 구조로 치환한 설득력이 명쾌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읽은 기도 형식 또한 보다 친숙한 표현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허기진 하루를 서너 번씩 갉아먹습니다/반복되는 일상은 기다림의 시간/당신이 따서 덮어준 푸른 뽕잎은/살과 피로 바뀔 거룩한 성찬입니다//
때론 세상 탐욕의 입을 닫고/고요히 고개를 들고 멈추어/잠처럼 보이는 금식의 기도를 올리고/낡은 자아의 허물을 벗으려/육신의 소란을 잠재우며/오직 당신의 세미한 음성만을 기다리는/치열한 침묵을 드립니다//
내 속 깊은 곳에 다 익어 토해낸/한올 한올 순백의 실크로/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집을 짓습니다/스스로 가둔 침묵의 어두운 골방에서/당신의 형상으로 은밀하게 다시 빚어진 날//
마침내/새하얀 나의 성소를 헐어/길러주던 당신의 몸을 휘감게 하소서//
주름진 육신의 무거움을 벗고/기어다니던 기억들 다 지우고/찬란한 날개를 꿈꾸기보다/나의 내일을 대신 내어드림으로/당신이 비상하는 날개를 얻는다면/스러짐이 나의 구원입니다
-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이 시집에서 필자가 대표작이라고 생각한 작품이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인데 이는 누에의 생애를 통해 성도의 성적聖跡을 그린 다음 '구원'의 자리에 펼친 작품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읽은 '애벌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뚜벅뚜벅, 차곡차곡, 꼬박꼬박…
이들 언어의 반복 사용
뽕잎은 벌레에게 살과 피가 되는 성찬의 필요충분적 품목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 보면 고치는 기도의 골방이라 할 수도 있고 실크는 '거룩'함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나아가 고치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무덤으로 설정된 상징성이 큰 사물입니다. 그리고 나비는 드디어 부활에 도달한 사물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비상하는 날개 위의 '스러짐'에서 희생의 고귀함을 암시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비상하는 날개를 얻는다면 이 부분의 감동이 그 무엇보다 앞 선다 할 것이고 나를 향한 구원보다도 주님을 위한 영광된 삶에 그 결론이 두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변형과 죽음, 거기에다 재탄생을 다루는 완성도 높은 상징적 구조 위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누에는 단순 생물이 아니라 먹고→ 멈추고→ 갇히고→ 풀리고→ 사라지는 등의 행위로 엮어지는 존재의 단계적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그대로 신앙의 여정과 겹치는 것을 볼 수가 있고 특히나 이 시가 지닌 뛰어난 점은 대부분의 변형 서사가 '날개를 얻는 것'에 집중한다면 이 시는 "나는 날개를 원하지 않았다"는 역설적 표현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 대신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은 "당신이 날개를 얻는 것"이 특별히 주목됩니다. 작품의 진행에서 이 같은 구조적 역전은 신앙시에서는 이채로운 표현을 만드는 장치로서 충분하며 자기 비움의 언어적 성찰과 이를 밑 받친 결과를 낳았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것만으로도 이 시집이 목표한 문학적 밀도가 높은 작품성은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가 담보하고 있음을 독서한 것입니다.
뚜벅 뚜벅
내가 내디딘 한걸음 위에
인도해 주시는 다음 한걸음
쉬지 않는 믿음의 걸음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차곡 차곡
내가 쌓아올린 작은 믿음 위에
경험으로 더해주시는 믿음
은혜의 조각들이 쌓인 믿음의 성벽입니다
꼬박 꼬박
내 마음에 새긴 말씀의 구절마다
손과 발로 이어주시는 묵상의 의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한 손길입니다
오롯이 오롯이
바쳐진 온전한 마음속에
머무르시는 주님의 임재
갈급한 빈 잔에 채우시는 생수입니다
- 「또바기 신앙」
'또바기'는 '언제나 한결같이'라는 의미의 순우리말입니다. 그러니까 「또바기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신앙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시인은 이 한 단어를 축으로 신앙의 자기 성장을 사방의 네 단계로 펼쳐 보입니다. '뚜벅뚜벅'은 순종의 묵직한 실천이며 '차곡차곡'은 경험 위에 쌓인 믿음이라는 것, 그리고 '꼬박꼬박'은 말씀의 내면화를 통한 꼼꼼함 내지는 치밀함이고 '오롯이'는 그대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믿음의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적 운용은 언어사용의 단조로운 반복을 넘어 꾸준한 신앙생활을 한결같은 믿음의 리듬 위에 실천하고 있음을 형상화한, 믿음의 다면적 진실을 만나게 합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특별한 사건보다 일상에서는 하찮은 것이라도 성실함이 바로 믿음을 밑받친다는 신실함의 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 시는 특이한 언어적 반복을 통해 신앙의 시간을 자별하면서도 재미나게 그리면서 진심 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만난 시적 효과로 의성어나 의태어의 차용이 압권이며 문학은 그 자체로 리듬이라는 메시지에 다다를 수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뚜벅뚜벅, 차곡차곡, 꼬박꼬박… 이들 언어의 반복 사용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단순 감정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언어의 추진력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시의 언어는 원래는 리듬이 시작품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훈육의 내용을 리듬에 얹어서 문학이 재미와 가르침의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켰던 것입니다. 이 시는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이미 체질로서 그 같다는 사실을 감 잡게 하고 여기에 언어적 장치가 신앙이라는 믿음을 생활화한 매우 효과적인 일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리듬을 살려서 더 큰 진리를 지시하는 신경균 시인의 시적 언어와 그 행보가 한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작은 벌레도 귀를 세우고/고요 속 소리에 기울일 때/때가 찬 보름달은/사랑의 빛을 토해/영글은 올리브 열매 안에서/깊은 숨을 들이키며/두 무릎을 겟세마네 동산에 얹는다//
부서지고 으깨어져/흘러나온 영혼의 기름은/겟세마네를 불태우는데/죄의 무게에 짓눌린 통곡은/죽음의 잔에 담긴 핏빛 고통을/기꺼이 홀로 마시고/섭리 앞에 생명을 내려놓는다//
사랑이 끊어지는 아픔 곁에/승리의 잔을 들고/낄낄대며 조롱하는 어둠//
죄를 얹고 아들을 바라보며/찢어진 가슴으로 돌아서는 사랑/애타는 부르짖음을 마친 순종은/이미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생명줄을 끊은 나의 죄악이/아버지를 가린 허물이라면/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는가/그 자취를 이제야 깨닫나이다./참회의 눈물, 뜨거운 바다로 흐르니/골고다 언덕을 기꺼이 오르리라/구원의 동산에 이르기까지
- 「겟세마네 동산」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을 지닌 기구 내지는 장소의 이름인데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 하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도로 위쪽인 감람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감람산의 일부로서 감람기름을 짜는 틀을 '겟세마네'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평소에도 이곳을 자주 찾아 여호와께 기도하며 대화하신 곳으로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가롯 유다의 밀고로 로마 군병과 유대인 무리에게 체포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공생애公生涯의 마지막 순간까지 찾고 기도하신 이 장소는 오늘날도 수 많은 성도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다 그 의미를 살려서 예수님의 기도를 '올리브가 으깨어져 기름이 되는 과정'과 겹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서지고 으깨어져 흘러나온 영혼의 기름은 성령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순종의 대가라는 표현이 타당할 것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합니다.
요컨대 감상이 회개로 전환되는 구조가 이 작품의 핵심일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고통의 밀도가 높은 작품이며 이미지들 또한 겹겹이 쌓여서 믿음의 눈으로는 다다르기 어려운 거의 압도적인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육체의 병보다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잃은 심령
다만 때로는 그 밀도가 너무 높아서 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가 숨을 고를 여백이 부족하다는 표현이 나올 법도 합니다. 이 시의 핵심은 그만큼 고통이 아니라 "순종의 방향"잡기이며 여기서의 고통은 작품의 밀도와 방향을 증명하는 재료로도 기능한다고 하겠습니다. 신경균 시인은 성경의 서사를 시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이미지의 밀도를 최대한 높였었고 비유와 감정이 겹치는 부분을 만들면서 특히 중반부에서의 압축을 훨씬 강렬한 것으로 읽어내게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깨우면
더 좋은 내일이 기지개를 켠다
번데기는 죽은 듯 숨은 생명 한 톨
진정한 쉼을 얻은 변화 속에
고치를 뚫고 무엇으로 깨어날까
어두운 밤, 이 빛 저 빛 쫓다
불로 뛰어드는 나방이 아니라
참빛 비추는 꽃 위에 머물러
진리의 꿀을 빨고 생명가루 전해주는
그런 꿈을 품은 나비이고 싶다
서로 다른 빛깔의 어울림이여
앞 날개 진리와 바람이 되고
뒷 날개 사귐과 전달의 날개짓 되어
나도 젓고 너도 저어 위로 위로 오르면
온 세상에 사랑의 바람이 일리라
어느 날, 나팔소리 들릴 때
아직 배부른 애벌레가 아니기를
밤 하늘을 떠도는 나방이 아니기를
공중으로 함께 올라 주를 만나는
생명을 품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다
- 「자유로운 영혼」
이 시는 '번데기-나비'의 생태적 변화를 통해 종말론적 소망을 상징성 높은 언어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나비와 나방을 대비한 구성은 탁월하다는 평가가 마땅하고 이 작품에 크나큰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나방은 빛을 오인하여 무작정 불에 뛰어드는 존재지만 나비는 꽃을 찾아 꿀을 빨고 그로 하여 자신의 생명 세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화려한 빛과 참빛으로 인간들을 구분하여 찾으신 그리스도를 대비하는 상징으로 그 효과 또한 직절하게 읽힙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읽은 "나팔소리"는 종말의 부르심을 암시하면서 시 전체가 깨어 있는 신앙에의 기도 소리로 나아가 여울지게 합니다. 이 시는 우선 그 방향성이 신앙에 맞추어진 작품임은 물론이고 이 시가 담은 나방과 나비의 대비는 "어디에 머무르는가"를 핵심 질문으로 제시합니다. 이 시는 결국 신앙 앞에서 우리가 취할 선택이란 어떤 것이며 이에서 파생된 빛의 종류를 어떻게 분별할까도 지시하고 가르치는 시입니다. 나비와 나방의 대비는 일견 가까운듯하면서도 한자리에 세우기가 그닥 용이하지 않은 사물인데 그럼에도 시인은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참빛과 유혹의 빛"은 그 구도의 차이가 명확함에도 현실에서 이를 구분하고 바르게 취하기는 그 인식이 매우 비좁거나 난해하다는 것이고 이를 구조적으로 안정하면서도 그 주제 또한 비교적 친숙한 범주에 담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닫힌 성문 밖에 문둥이 넷
문드러진 살점 위에
서러운 외면들이 내려앉고
움켜쥔 주린 배에
떨어져 나간 열 손마디를 얹는다
안이나 밖이나
문둥이건 아니건
굶어 죽긴 매한가지
차라리 항복의 걸음을 뗀다
천형天刑을 안고 사는 자
뭉개진 입술에 선한 미소 담아
생명을 전하건만
천형天刑을 면한 자
잔치에 홀로 배부른 채
죽어가는 성읍 바라보며
어찌 눈이 메말랐는가
이 감각 없는 침묵의 심장이
진정 고침받아야 할 형벌刑罰
영혼의 문둥병
- 「뭉개진 입술의 외침」
작품 「뭉개진 입술의 외침」은 이 시집에 담긴 시작품 중 가장 예언적이고 사회성 또한 강한 작품이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列王記下 7장에 나오는 문둥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서 시인의 관심은 이를 살핀 기적보다 보고도 깨우치지 못한 인간의 무지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천형을 면한 자가 잔치마당에 와서 홀로 배부른 채 복음을 먼저 들은 사람을 향해 책임을 묻는 대목이 그것입니다.
마지막 연에서 읽은 "영혼의 문둥병"은 육체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을 잃은 심령이라는 역설로 이어갑니다. 참고로 이 자리에 열왕기서를 옮기자면 다윗 왕의 죽음에서부터 왕국 분열을 거쳐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20년간의 역사를 그린 '열왕기上'과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통치에서부터 남북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까지의 300여 년 역사를 그린 '열왕기下'로 구분이 됩니다. 열왕기서書는 비록 선민이면서 하나님을 저버린 통치자와 나라의 연약함과 허약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선민의 역사 가운데서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을 여과 없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위의 시는 시집 전체에서 가장 외부를 향한 시선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고통받는 자보다 이를 알아채지 못한 무감각한 자를 향해 더 강한 질책성의 발언을 이어갑니다. 이 같은 구조는 한편으로는 독자를 이 작품이 의도한 바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매신저로 제시하면서 이 시의 진짜 주제는 병이 아니라 "감각의 상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메시지가 어떻게 읽히는지를 보이는 시이기도 합니다.
연약한 흙집 가운데/주인으로 오셨으니/항상 내 모든 삶 속에/임마누엘로 임하셔서/내게 보이신 그 거룩함을/늘 닮아가게 하소서//
어렵고 힘들어 막막할 때에도/갈 길을 능히 비춰 주시니/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에도/바른길을 묻게 하셔서/범사에 당신을 인정토록/늘 기도하게 하소서//
어그러지고 저는 발로/당신을 앞서가지 않고/어리석은 내 생각이/당신 위에 서지 않게 하셔서/겸손 가운데 임하시는//
당신의 은혜를 늘 받게 하소서//
주님 바라보는 곳/나도 바라보고/주님 계신 곳에/나도 영원히 거하도록/그 앞에 설 소망만으로/늘 기뻐하게 하소서
- 「임마누엘」
작품 「임마누엘」은 시라기보다는 '기도의 시편'에 가깝게 창작된 노래입니다. 작품의 전개에서 각 연에 장치한 어미는 "…하게 하소서"라는 간구의 언어로 끝을 맺으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에도 바른길을 묻게 하셔서"라는 고백은 큰 시험보다 일상의 선택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려는 신앙의 실천과 그 정신의 성숙을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도문 형식으로 창작된 이 시에서 진정성은 분명하지만 확장된 표현을 통한 더 높은 신앙에의 '간구'를 일상적 어투로 수용하게 합니다.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의 고백
이 시는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한 기도의 형태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삶이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실천하려는 신앙에의 간절함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헤브라이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에 닿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에서 파생된 '임마누엘 운동'도 기독교 신학 안에서 인간의 영적·정서적인 문제를 기존 교회가 일반 사회의 의학인 심리적 개념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연결하나를 궁구한 사회운동이며 신앙적 차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 저마다의 삶을 정하고 '임마누엘'로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조용하면서도 은밀하게 바라보는 신경균 시인의 작품이 「임마누엘」이었음을 돌이키면서 문학적 실험보다는 신앙의 안정미가 더한층 시적 언어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이 시가 요량한 시적 진리란 결국은 하나님을 닮은 삶이었음을 되새기게 합니다.
온몸에 맞은 채찍/그 피 내 몸으로 흘러/죄의 병 나음 얻어 죄의 흔적 가리고/그 채찍이 인도하는 막대기가 되었네//
옆구리에 찔린 창/그 피 내 가슴에 흘러/쏟으신 물과 피로 새 생명 주셔서/그 창이 의지하는 지팡이가 되었네//
손과 발에 박힌 그 못/그 피 내 손발에 흘러/그 못 위에 선한 일을 걸어 두고/복음의 신을 신고 전하게 하셨네//
머리에 쓰신 가시관/그 피 내 머리로 흘러/내 생각 버리고 주의 뜻 알게 하여/그 가시관이 면류관이 되겠네//
당신을 치던 망치 소리/내 영혼의 떨림이 되어/거저 사랑 먼저 사랑 끝없는 그 사랑/그 은혜 더 깊이 박히도록 늘 나를 치소서
- 「사랑의 피」
위의 작품 「사랑의 피」는 십자가에 담긴 다섯 개의 상징-채찍, 창, 못, 가시관, 망치-등을 차례로 묵상하면서 그 같은 고난이 화자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궁구하게 합니다. 온몸에 채찍을 맞고 거기에서 흘러내린 피가 '내 몸으로 흘러' 죄의 병도 낫고 흔적 또한 가리우면서 '그 채찍'이 "인도하는 막대기가 되었"다는 대목에서 새삼 "쏟으신 물과 피로 새 생명을 주신" 예수의 그 엄청난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은 믿음에의 고난은 단순 사건이라기보다는 '막대기', '지팡이', '복음의 신', '면류관'처럼 확장된 사물적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축복이고 은혜의 도구가 되는 복음에의 역설은 그래서 구조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이 작품은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는 신체와 신학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상관하여 연결 짓고 있습니다. 고통이 추상이 아니라 몸의 구체성으로 내려오면서 이 시는 구조적으로는 명확하지만 그만큼 여백은 줄어든다는 점도 읽힙니다. "내 생각 버리고 주의 뜻 알게 하여"에서 우리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비좁고 부족한가를 살피게 하고 이에서 주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게 하였고 '당신을 치던 망치 소리'가 "거저 사랑 먼저 사람 끝없는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찌 위치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하게 지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십자가에의 진리'는 몸과 채찍, 가슴과 창, 손발과 못, 머리와 가시면류관 등 각 요소를 신체 부위와 연결하여 설명보다 명료한 표현을 시적 구조에 담아냈다 하겠습니다.
안개가 자욱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해가 떠올라
따뜻한 빛을 비추니
하늘이 열리고
숲이 드러나고
한 포기 풀이 보이고
다른 세상이 보인다
닫혀 있던 마음 눈이 열려
주님이 보이고
그 앞에 내가 보인다
이제야 보이는 십자가
빈 무덤
- 「죄 용서」
위의 시 「죄 용서」는 안개가 걷히는 자연 현상을 통해 주님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현실 세계의 미몽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모시는 일을 체험의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안개가 짙을 때는 시야에 그 어떤 것도 가려져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햇살이 비쳐 들면 주변의 모든 풍경이 제 모습대로 드러나듯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현실에서 깨닫게 되는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십자가 빈 무덤'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회심의 절정을 담은 압축된 이미지가 읽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긴 설명 대신 이들 상징으로 보여 주지만 이것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시는 '보임'에 대한 사물적 현상을 깨우침의 형식으로 표현하였고 이럴 때 안개는 단순 시야의 장애가 아니라 존재의 미몽을 덮고 있는 사물이라 할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세상이 바뀌는 것은 보는 내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말합니다. 이 시는 일견 단순하지만 그런 만큼 지시하는 바는 더더욱 명확합니다. 다시금 음미하지만 안개가 자욱할 때는 지척이 가려서 오도 가도 못하던 것을 일상에서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가 떠서 밝은 빛을 투사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하늘도 열리고 숲도 드러나고 심지어는 바람에 나풀대는 풀 한 포기까지… 세상의 오만가지 사물들이 제 형체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되면 닫혀 있던 마음에도 눈이 열리고 그제서야 침침하던 눈에도 '주님이 보이고' 비로소 십자가 빈 무덤이 원래대로 회복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컨대 「죄 용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시적 표현이나 장치는 간결하지만 그에서 의미하는 바는 영적 전개에 이어져 있고 그만큼 효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조주가 나의 목자가 되시다니요/자기 길로 흩어져 헤매던/냄새나고 더러운 양을 위해/마구간 구유까지 찾아오셨네/풍족함이 모두의 소망이라지만/모든 필요가 당신 안에 있기에/목자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선한 목자가 날 위해 목숨을 버리다니요/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둔 눈/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고/돌아갈 방향마저 잃은 채/속절없는 죽음뿐이었지만/오직 내 이름 부르는 음성이/생명의 소리 되어 새 삶을 얻었습니다//
연약한 어린양을 돌보시다니요/원수를 이기도록 양식을 베푸시고/의로운 길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한 지팡이와 인자한 막대기로 위로받아/성경이 푸른 초장이요/이끄신 교회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엄마 품에 젖 뗀 아이처럼 잠드나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다니요/발 씻을 물 한 방울 드린 적 없건만/상상 못 할 은혜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영원하신 이름 위에/지쳐 쓰러진 나를 어깨에 올리시니/사망의 골짜기가 생명 길이 되어/당신의 품에서 부르는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 「어린 양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는 이 시집의 종결부에 놓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독서 또한 여기에 맞추었고 이처럼 뒷자리에 위치시켰습니다. 앞선 작품들이 이전의 단계로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는 '도착한 영혼에의 찬양'에 그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결국 목자의 품 안으로 돌아와 안식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자리에서 "목자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시집 전체에 담아내고자 한 신앙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비를 쫓던 사람, 숨은 이를 찾던 사람, 길꽃을 바라보던 사람, 누에처럼 자신을 비워 가던 사람 등에서 마침내는 "당신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적 고백에 이르는 과정이 여러 파장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시편적 호흡을 가진 찬양시로 발군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반복과 확장을 통해 점점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구원의 노래이기에 특별히 눈여겨 살핀 것입니다. 이 시의 핵심은 부족함은 해결이 아니라 충분함의 발견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시편적 구조를 지닌 찬양시이면서 특징적으로 반복과 확장이 읽히는 상당한 길이에서 일부 긴장감마저 접하게 되었고 이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작품은 없을 듯합니다.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을 자연스럽게 녹여서 신앙의 안식으로 마무리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그 의미를 더한다 하겠습니다.
신경균 시인의 신앙시를 일괄 독서하면서 우리는 이들 시작품에서 신앙 체험상의 진정성이 일관되게 유지된다든지 자연과 신앙의 연결 능력이 뛰어나다든지 상징적 구조-나비, 꽃, 피, 길 등-가 반복 읽히면서 통일성의 형성으로 문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완성도를 보이는 등 여러 면면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집'인가 하면 '묵상집'이고 묵상집인가 하면!
통상적으로 단일 주제라 하기에 안성맞춤인 신앙시는 그래서 편편이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경균 시인이 펼쳐낸 신앙시의 문학적 오지랖은 '설명하는 문장'을 넘어서 '보여주는 이미지'로 치환되었고 최대한 추상어의 사용을 줄이면서 감각적 표현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일부 장편 시의 압축까지 편편의 작품을 주제적 전개에 따른 저마다의 내용 또한 마땅하다
목차
목차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 차례
□시인의 말
□추천의 글 / 정순영
제1부사랑
물 바람 햇살처럼
그 사랑
사랑의 마음
아가페
괜찮아
용서
비교
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숨바꼭질
공감
빚진 자
산새의 노래
형제섬
기회
제2부 생명
영혼의 동산
하늘 정원
주 안에 피는 꽃
사랑이 빚은 날개
처음자리
숨
기록되었으되
사마리아의 생수
하늘 씨앗
나 만나기
물 위의 노래
생명 가게
작은 여우
욕망의 꽃
빛이 있으라
사람을 낚는 어부
어찌할꼬
오늘도 바쁘지?
밀알의 노래
달팽이의 외침
제3부 구원
주님의 살과 피
임마누엘
붉은 사랑
길
사랑의 피
붉은 줄
회개
인생의 항해
마음의 소리
에덴으로 돌아가자
에클레시아
무덤
유기견
죄 용서
약초 동산
제4부 믿음
물로 된 포도주
어린양의 노래
산 소망
또바기 신앙
나는 바보입니다
무엇을 버렸는가
에덴동산
기쁨을 나르는 수레
하루 이야기
기다림
하루의 의미
심부름
집이 있다
삶의 자서전
나 하나
하나님은 정비사
메멘토 모리
영적 홍역
인생 여행
꽃길
나비와 정원
길 꽃
뻐꾸기의 노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5부 고난
거기까지
광야가 은혜라
리모델링
고난 중에
광야의 열매
겟세마네 동산
광야의 길, 사막의 강
제6부 부활
생명의 부활
꿈꾸는 비상
자유로운 영혼
엠마오의 길에서
봄꽃
봄날의 향연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깨어짐의 축복
제7부 섭리와 자연
하늘 수채화
생명의 교향곡
요셉의 옷
내게 작정하신 것
시계꽃
생명의 숲
사계四季
창조
에덴의 축복
모임Fellowship
벚꽃
삶의 연주
평설
'거룩한 성소'에서 언어의 살과 피를 읽다 / 김종
□시인의 말
□추천의 글 / 정순영
제1부사랑
물 바람 햇살처럼
그 사랑
사랑의 마음
아가페
괜찮아
용서
비교
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숨바꼭질
공감
빚진 자
산새의 노래
형제섬
기회
제2부 생명
영혼의 동산
하늘 정원
주 안에 피는 꽃
사랑이 빚은 날개
처음자리
숨
기록되었으되
사마리아의 생수
하늘 씨앗
나 만나기
물 위의 노래
생명 가게
작은 여우
욕망의 꽃
빛이 있으라
사람을 낚는 어부
어찌할꼬
오늘도 바쁘지?
밀알의 노래
달팽이의 외침
제3부 구원
주님의 살과 피
임마누엘
붉은 사랑
길
사랑의 피
붉은 줄
회개
인생의 항해
마음의 소리
에덴으로 돌아가자
에클레시아
무덤
유기견
죄 용서
약초 동산
제4부 믿음
물로 된 포도주
어린양의 노래
산 소망
또바기 신앙
나는 바보입니다
무엇을 버렸는가
에덴동산
기쁨을 나르는 수레
하루 이야기
기다림
하루의 의미
심부름
집이 있다
삶의 자서전
나 하나
하나님은 정비사
메멘토 모리
영적 홍역
인생 여행
꽃길
나비와 정원
길 꽃
뻐꾸기의 노래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제5부 고난
거기까지
광야가 은혜라
리모델링
고난 중에
광야의 열매
겟세마네 동산
광야의 길, 사막의 강
제6부 부활
생명의 부활
꿈꾸는 비상
자유로운 영혼
엠마오의 길에서
봄꽃
봄날의 향연
나는 날개를 구하지 않았다
깨어짐의 축복
제7부 섭리와 자연
하늘 수채화
생명의 교향곡
요셉의 옷
내게 작정하신 것
시계꽃
생명의 숲
사계四季
창조
에덴의 축복
모임Fellowship
벚꽃
삶의 연주
평설
'거룩한 성소'에서 언어의 살과 피를 읽다 / 김종
저자
저자
신경균 시인 신경균
ㆍ1960년 전남 강진 출생
ㆍ2001년 4월 기독교 신앙 회심
ㆍ2016년 《한맥문학》 신인상 (시부문)으로 등단
ㆍ포스코 정년퇴임, 현 한국안전관리협회 기술이사
ㆍ커뮤니케이션, 안전문화 강사 활동 중
ㆍ창작 방향 또는 활동 내용
신앙 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내면을 시적으로 연결하는 작품을 써오고 있으며, 거듭남과 신앙의 회복, 믿음의 성장을 주제로 한 묵상시를 주로 집필한다.
현재 교육 강사로 활동하며, 산업 현장의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전하는 동시에 신앙과 삶을 잇는 시를 창작하고 있다.
ㆍ1960년 전남 강진 출생
ㆍ2001년 4월 기독교 신앙 회심
ㆍ2016년 《한맥문학》 신인상 (시부문)으로 등단
ㆍ포스코 정년퇴임, 현 한국안전관리협회 기술이사
ㆍ커뮤니케이션, 안전문화 강사 활동 중
ㆍ창작 방향 또는 활동 내용
신앙 시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내면을 시적으로 연결하는 작품을 써오고 있으며, 거듭남과 신앙의 회복, 믿음의 성장을 주제로 한 묵상시를 주로 집필한다.
현재 교육 강사로 활동하며, 산업 현장의 안전과 생명의 가치를 전하는 동시에 신앙과 삶을 잇는 시를 창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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