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꽃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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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열여섯, 생활 전선으로 향하는 발걸음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내 앞에는 망망대해 같은 날들이 펼쳐졌다. 장성한 큰언니는 이미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마저 선을 보며 가족의 품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집안 살림은 올케언니가 도맡아 꾸려나갔기에 철부지였던 나와 내 위 언니는 서로 조카를 업고 놀러 다니겠다며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게 하루 일과였다. 배움의 갈증은 컸지만, 형편상 중학교 문턱은 바라볼 수도 없어 그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들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고 왔다. 임동에 있는 '전남방직'에서 대규모로 직원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회사 간부의 집에서 먼저 아이를 돌봐주다가 1~2년 있다가 입사했고, 어떤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번듯한 학력을 무기로 응시 서류를 냈다. 나는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국졸의 어린 나이였지만, 당당히 시험에 도전해 단번에 1차 합격을 거머쥐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그달부터 내 손으로 차곡차곡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내 인생의 첫 자립이자 본격적인 생활 전선으로의 도약이었다. 자립은 부모님의 사랑 온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내뿜는 나만의 입김으로 서리 낀 내일의 창문을 지우는 일이었다. 사회라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 부모님이라는 나침반이 없어도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며 길을 잃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방식이었다. 부모님의 그늘을 지우고 그늘 밖으로 나간다는 게 두려웠지만 친구들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섭씨 30도의 열기 속에서 꽃핀 리더십
처음 몇 달 동안은 공장 근처에서 낯선 자취 생활을 하며 객지살이의 쓴맛을 보았다. 그러다 간절히 바라던 회사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생활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가족의 품이라는 궤도를 이탈해 나만의 행성을 만들며 나만의 궤도를 그리며 나아갔다. 기숙사는 거대한 요새 같았다. 웅장한 식당에는 칼같이 짜인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일하다가 자칫 시간이라도 놓치는 날에는 고픈 배를 쥐어짜며 밖으로 나가 사 먹어야 했다. 방마다 엄격한 방장이 존재했고, 벽에 붙은 사물함은 저마다 열쇠로 꼭꼭 잠가 관리하는 철저한 공동체 생활이었다.
"아, 아, 사우 여러분께 알립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매일 저녁 삼엄하게 울려 퍼졌다. 밤 9시까지는 청소를 비롯한 모든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됐다. 숨이 막힐 법도 했지만, 기숙사 내부에는 넓은 목욕탕과 조용한 독서실, 세탁실까지 두루 갖춰져 있어 그 시절 시골집에 비하면 오히려 호사스럽고 편안한 보금자리였다.
방직 공장은 3교대로 쉼 없이 돌아갔다. 내가 일하던 방직과는 사계절 내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후끈거렸다. 실이 조금이라도 건조하면 툭툭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기계실은 항상 높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기계 사이를 날렵하게 돌아다녔다. 몸이 워낙 빠르고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낸 덕에, 동기들보다 눈에 띄게 빨리 진급했다.
까다롭던 조장 언니도 나를 유독 예뻐해 주었고, 기숙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이른 나이에 방장 자리에 올랐다. 방장이 되면 고된 청소 당번에서 제외되는 특권이 있었지만, 7~8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기에 어깨가 제법 무거웠다. 가장 고되었던 것은 새벽 1시부터 시작되는 심야 작업이었다. 밤과 새벽의 뼈대를 가느다란 실로 짜내기 위해 나는 꺼끌꺼끌한 눈꺼풀을 치켜뜨며 일했다. 어둠과 적막을 가로실로 밀어 넣으며 쇳소리의 박자에 맞춰 옷감을 만들었다. 때로는 창밖으로 흐르는 달빛의 궤적을 기계 베틀 위에 묶어 한 올의 낭만으로 집어넣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튕겨 나갔다. 단조로운 소음과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하품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졸음이라는 거대한 이방인에게 나의 시간을 강탈당하지는 않았다. 24시간 가동되는 육중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졸린 눈을 비벼야 하는 야근은 참으로 고단했지만, 낮 시간이 온전히 주어지는 근무 주간에는 나름의 활력을 찾으며 공장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주경야독, 동양종합학원의 추억
나는 현실의 고단함에 주저앉지 않았다. 공장 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못다 한 공부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지금의 광주역 근처에 있던 '동양종합학원'이었다. 밤낮으로 일하며 학원 책상에 앉아 영어 기초를 배우고 한문을 한 자 한 자 눈에 익혔다. 피곤에 겨워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가슴속 품은 꿈을 생각하며 펜을 꽉 쥐었다.
마침내 학원의 전 과정을 무사히 수료하던 날, 정화영 원장 선생님은 내게 빛나는 우등상을 주었다. 원장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 고된 환경에서도 꾸준히 공부했으니, 앞으로 필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칭찬 한마디에 그간의 설움과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고단한 주중이 지나고 주말이 오면 청춘의 즐거움도 만끽했다. 매달 25일, 통장에 월급이 꽂히는 날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알뜰히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시골집에 필요한 살림살이도 통 크게 사다 나르며 효도도 했다. 남은 돈은 매월 꼬박꼬박 은행에 저축하며 야무지게 미래의 결혼 자금을 모아 나갔다. 일요일이면 마음 맞는 공장 친구들과 손을 잡고 광주 근교로 기차 여행을 떠나, 푸른 바람을 맞으며 깔깔대고 웃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날이었다. 철길은 대지를 꿰매는 무채색 바늘과 같아서 나란한 두 줄을 달리는 기차가 마치 바늘에 딸린 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차와 철길이라는 저 실과 바늘은 우리의 낭만을 덧대어 박음질하고 창밖의 풍경까지 짜깁기하며 달콤한 청춘을 달아오르게 했다. 기차는 철길이라는 금속의 악보를 연주하며 덜컹덜컹거렸다. 풍경을 한 입씩 베어 먹으며 덜컹덜컹 달렸다. 기차는 새소리와 바람을 집어삼켜도 체하는 법이 없어 차창이라는 거대한 목구멍으로 지평선까지 통째로 꿀꺽 삼켰다.
스쳐 지나간 청춘의 연인들
방직공장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성실하게 보내며 제법 든든한 결혼 밑천을 마련했을 무렵, 내게도 풋풋한 연애의 바람이 불어왔다. 친구의 주선으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외모도 건장하고 성격도 호탕해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니 그는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연로하신 할머니가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딸린 동생들이 줄을 이었다. 송정리에 사는 고모가 그 소식을 듣고는 버선발로 뛰어와 나를 말렸다.
"네가 제 발로 고생 구덩이에 들어가려고 환장을 했느냐?"
고모는 완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강제로 만남을 가로막았다. 인연이 아니었는지 고모의 성화에 못 이겨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 남자는 미련이 남았는지 우리가 자주 만나던 회사 앞 빵집에 몇 번이고 찾아와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고 안쓰러웠지만, 모질게 마음을 고쳐먹고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또 다른 기억은 1960년대 청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펜팔'을 통해서 찾아왔다. 대구 청구대학교에 다닌다는 한 대학생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이다. 하얀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귀를 통해 서툴게 마음이 통하던 어느 날, 그 학생이 대구에서 내 주소가 적힌 종이만 달랑 들고 무작정 광주까지 나를 만나러 내려왔다. 펜팔은 서로의 목소리가 아닌 잉크의 얼굴로 다가갔는데 그 학생은 이미 나의 잉크에 사로잡혀 있었다. 펜팔은 힘이 막강해, 문장의 지문만 만지작거려도 상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키와 외모를 분실한 글의 행간 속에서도 설렘은 자라고 그리움은 커져갔다. 말과 말이 아닌 글과 글로도 화끈거리는 연애의 감정은 활활 타오르기에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펜팔은 서로를 향해 발사하는 가장 은밀한 큐피트의 화살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간 금남로의 한 다방.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솔직히 내 마음의 저울추는 싹 기울고 말았다. 아담해도 너무 아담한 그의 작은 키가 내 눈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방에 마주 앉아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저녁 식사를 대접한 뒤 서둘러 그를 대구로 돌려보내려 했다.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겨우 몇 시간만 있다가 그냥 가란 말입니까?"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버텼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서 버린 나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그를 달래며 대구행 버스에 태워 보냈다. 그 후로도 대구에서 애틋한 편지가 몇 통 더 날아왔지만 나는 무겁게 함구한 채 답장을 쓰지 않았다. 눈치를 챘는지 그도 서너 번 더 편지를 보내오다 끝내 단념했다.
그가 마지막 편지에 남겼던 글귀, "기다림이란 참기 어려운 수양이다"라는 그 한 문장은 이상하게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어느덧 방직공장에서 청춘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나니 내 나이도 꽉 차 있었다. 이제는 거친 기계 소리가 울리는 일터를 떠나, 조용하고 차분하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아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정들었던 전남방직 회사에 조용히 사표를 냈다. 열정이라는 한 가닥 실에 청춘을 묶어두었던 삶의 첫 막이 그렇게 내려가고 있었다.
훤칠한 사내와 춘삼월의 혼례
전남방직을 그만두고 가만히 통장을 들여다보니, 그간 청춘을 바쳐 꼬박꼬박 모아둔 저축액이 결혼 자금으로 쓰기에 꽤나 넉넉했다. 혼기가 꽉 찬 내게 중매를 통해 여섯 살 연상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방의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번듯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대구에서 온 키 작은 대학생에게 실망했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일단 그의 수려한 외모에서 내 마음은 단번에 합격점을 내렸다.
그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서울에서 외삼촌과 함께 야심차게 사업을 벌였다가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고향 집에 잠시 들렸다고 했다. 나이도 찼으니 선이나 한번 보고 가라던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온 자리라고 했다. 실패담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투박한 대화 속에서도 '이 사람은 훗날 무엇을 해도 내 밥 굶길 사람은 아니겠구나' 하는 묘한 신뢰가 생겼다.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우리는 서로의 중력에 붙잡혀 끌어당기는 두 개의 아름다운 행성처럼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나는 비로소 혼자라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줄 남자를 만난 것 같아 기뻤다. 미래라는 내 삶의 페이지에 오직 그 남자의 이름만 반복해서 적어내도 좋을 듯했다. 그는 내 몸속 어딘가에 잘못 배송된 소포처럼 도착해서 끝내 반송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내 왼쪽 심장 박동과 그의 오른쪽 발걸음이 우연히 같은 박자로 겹쳐진 순간에 왔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더니, 그 순간 내 눈에 제대로 콩깍지가 씌었던 모양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집안도 가난하고 당장 번듯한 직업도 없는 처지였는데도, 나는 그 남자의 든든한 어깨와 눈빛에 속절없이 끌렸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따뜻한 밥을 나누어 먹으며 부지런히 만남을 이어갔다. 연애가 아닌 오직 '결혼'이라는 진지한 이정표를 세우고 만났다. 양가 어른들도 물이 올랐을 때 서두르자며 혼사를 다그쳤다. 마침내 꽃잎 위로 나비가 사뿐히 날아들 듯, 음력 춘삼월의 화창한 날 우리는 백년가약을 맺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가정을 피워냈다.
군홧발 소리 요란하던 상무동
시댁은 쌀과 식료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치평동 일대는 지금의 번화한 모습과는 딴판인, 거대하고 웅장한 군사기지 '상무대'가 자리한 곳이었다. 포병학교와 기갑학교가 줄지어 서 있었고, 지금의 김대중컨벤션센터 근처 호텔 자리까지 온통 시퍼런 군부대 깃발이 나부끼던 시절이었다. 거리는 온통 군인들로 넘쳐났다. 그 많은 군인을 상대로 음식 장사부터 생필품 조달까지 온갖 장사가 성행했다.
내가 시집을 오자마자 집안에 연달아 겹경사가 터졌다. 결혼하자마자 튼실하게 잘생긴 첫아들을 낳았고, 이듬해에는 연년생으로 예쁜 딸아이까지 품에 안은 것이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큰 기쁨이자 축복이었다. 자식은 나의 피와 숨을 나누어 가진, 완벽한 우주여서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나는 기꺼이 자식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충신이 되기로 했다. 갓난아기의 조막손을 잡고 세상의 모든 벽을 허물 결심을 했다. 오직 '엄마'라는 이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식은 엉거주춤 멈춰 있는 내 삶의 지도 위에 찬란한 미지의 길을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은 높았다. 아이 아빠가 친구와 손을 잡고 '한국농어촌보'라는 출판 사업에 동업자로 뛰어들었으나, 매번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자금만 들어갈 뿐 손에 쥐어지는 수입이 없었다. 결국 미련 없이 사업을 접고 나왔지만 타격이 컸다. 이번에는 친정 쪽 사촌 오빠를 믿고 사료 사업을 시작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빚더미와 손해만 남긴 채 주저앉고 말았다. 이래저래 가난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고, 우리 네 식구의 숨통을 조여 왔다.
계모임 오야지에서 큰손으로
시부모님은 자식들의 주린 배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부모님이 운영하던 식품 가게를 우리 부부에게 통째로 물려주었다. 장사를 제대로 키워보려면 든든한 밑천이 있어야 했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전남방직 시절 다져진 배짱과 눈썰미를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동네 사람들을 모아 내가 직접 번듯한 계모임의 '오야지(계주)'가 된 것이다. 신용 하나로 모아들인 곗돈을 억척스럽게 쥐고 식품 도매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하늘이 내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도매 장사는 물꼬가 터진 듯 무서운 기세로 잘 맞아떨어졌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단 2년 만에 남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을 손에 쥐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지금의 세정아울렛 자리에 있던 120평짜리 터 넓고 으리으리한 집을 덜컥 사들였다. 그리고는 고생하신 시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다. 시부모님은 그 넓은 집에서 방세를 받아 가며 든든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번 불이 붙은 재물운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돈이 모이는 족족 땅을 사고 논을 사들였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새로운 땅문서를 받아 쥐는 '매답買沓'의 기쁨이 이어졌다. 유년 시절 겪었던 지독한 보릿고개와 가난의 한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기에, 내 사전에는 '낭비'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겹게 달린 지 약 10년 만에, 우리 가정은 마침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안정된 삶의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10년은 우리에게 대운이었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축복의 문이 삐그덕 소리도 없이 슬며시 열리는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삶의 내리막길이라 믿었던 가난의 비탈이 알고 보니 거꾸로 흐르는 은하수의 바닥이었음을 깨닫는 날들이었다. 가난에 찌들었을 때는 하늘이 우리를 잊은 줄 알았는데, 마치 오래전에 적어둔 대운의 방명록을 다시 펼쳐 들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지난 10년은 세상의 모든 시곗바늘이 일제히 우리의 두근거림과 대운만을 기록하는 듯했다.
천재 아들과 항아리의 지혜
부모가 밖으로 억척스럽게 겉돌며 일하는 동안에도, 고맙게도 큰아들과 큰딸은 단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특히 첫째 아들 재헌이는 유독 영특했다. 겨우 세 살배기라 아직 혀가 짧아 말도 제대로 떼지 못할 무렵이었다. 길을 걷다 거리에 삐뚤삐뚤 적힌 간판 글자를 몇 개 짚어가며 가르쳐주었는데, 놀랍게도 그 다음 날 그 길을 지나갈 때 간판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제 들은 글자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동네에는 벌써 "치평동 식품집에 천재가 났다"라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자식들의 영특함을 보는 것만큼 고된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피로 회복제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시동생까지 결혼을 하면서 한집에 사는 식구가 자그마치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대가족의 끼니와 거대한 살림은 오롯이 맏며느리인 내 몫이었다. 매일 산더미처럼 쌓이는 식구들의 빨래와 밥물을 대기 위해 공동 샘터로 향했다. 우리 집과 옆집 문화극장 세입자들이 함께 합동으로 쓰던, 손잡이를 아래위로 쉴 새 없이 뿜어대야 하는 펌프식 샘이었다. 철컥철컥, 무거운 무쇠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누르면 이내 땅속 깊은 곳에서 차고 깨끗한 지하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 물을 양이 넘치도록 길어다가 밥을 짓고, 문밖에 있는 샘터에서 식구들의 옷가지를 박박 빨았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이 오면 물을 사용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손끝이 시려 터질 것 같은 계절이 오면, 나는 부엌 연탄불 바로 옆자리에 커다란 항아리를 깊숙이 묻어두는 지혜를 발휘했다. 차가운 항아리의 심장은 뜨거운 연탄불의 숨결로 쿵쿵 뛰었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의 숨소리를 항아리는 하나도 빠짐없어 받아 적으며 온기를 품었다. 항아리의 둥근 벽 안쪽은 아무도 본 적 없는 방, 문 없는 방이었다. 나는 그 둥근 방에 온기 가득한 사랑을 채워 넣었다. 연탄 아궁이의 붉은 눈동자 아래에서 항아리는 추위를 벗고, 우리 가족은 온기를 입었다. 내가 차가운 샘물을 미리 퍼다가 그 항아리에 가득 채워두면, 연탄 아궁이에서 나오는 은은한 열기가 항아리 벽을 타고 내려가 온종일 물을 덥혔다. 한겨울 눈보라가 쳐도 항아리 속 물은 늘 미지근하고 따사로웠다. 그 온수로 온 식구가 따뜻하게 세수를 하고 한가득 쌓인 설거지를 깨끗이 할 수 있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만들어내던, 연탄불 옆 항아리는 바로 그 시절 우리 집을 지탱하던 나의 삶 그 자체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내 앞에는 망망대해 같은 날들이 펼쳐졌다. 장성한 큰언니는 이미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마저 선을 보며 가족의 품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집안 살림은 올케언니가 도맡아 꾸려나갔기에 철부지였던 나와 내 위 언니는 서로 조카를 업고 놀러 다니겠다며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는 게 하루 일과였다. 배움의 갈증은 컸지만, 형편상 중학교 문턱은 바라볼 수도 없어 그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들이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고 왔다. 임동에 있는 '전남방직'에서 대규모로 직원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회사 간부의 집에서 먼저 아이를 돌봐주다가 1~2년 있다가 입사했고, 어떤 친구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번듯한 학력을 무기로 응시 서류를 냈다. 나는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국졸의 어린 나이였지만, 당당히 시험에 도전해 단번에 1차 합격을 거머쥐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그달부터 내 손으로 차곡차곡 돈을 벌기 시작했으니, 내 인생의 첫 자립이자 본격적인 생활 전선으로의 도약이었다. 자립은 부모님의 사랑 온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내뿜는 나만의 입김으로 서리 낀 내일의 창문을 지우는 일이었다. 사회라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 부모님이라는 나침반이 없어도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며 길을 잃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방식이었다. 부모님의 그늘을 지우고 그늘 밖으로 나간다는 게 두려웠지만 친구들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섭씨 30도의 열기 속에서 꽃핀 리더십
처음 몇 달 동안은 공장 근처에서 낯선 자취 생활을 하며 객지살이의 쓴맛을 보았다. 그러다 간절히 바라던 회사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생활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가족의 품이라는 궤도를 이탈해 나만의 행성을 만들며 나만의 궤도를 그리며 나아갔다. 기숙사는 거대한 요새 같았다. 웅장한 식당에는 칼같이 짜인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 일하다가 자칫 시간이라도 놓치는 날에는 고픈 배를 쥐어짜며 밖으로 나가 사 먹어야 했다. 방마다 엄격한 방장이 존재했고, 벽에 붙은 사물함은 저마다 열쇠로 꼭꼭 잠가 관리하는 철저한 공동체 생활이었다.
"아, 아, 사우 여러분께 알립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매일 저녁 삼엄하게 울려 퍼졌다. 밤 9시까지는 청소를 비롯한 모든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적용됐다. 숨이 막힐 법도 했지만, 기숙사 내부에는 넓은 목욕탕과 조용한 독서실, 세탁실까지 두루 갖춰져 있어 그 시절 시골집에 비하면 오히려 호사스럽고 편안한 보금자리였다.
방직 공장은 3교대로 쉼 없이 돌아갔다. 내가 일하던 방직과는 사계절 내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후끈거렸다. 실이 조금이라도 건조하면 툭툭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기계실은 항상 높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기계 사이를 날렵하게 돌아다녔다. 몸이 워낙 빠르고 눈썰미가 좋아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낸 덕에, 동기들보다 눈에 띄게 빨리 진급했다.
까다롭던 조장 언니도 나를 유독 예뻐해 주었고, 기숙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이른 나이에 방장 자리에 올랐다. 방장이 되면 고된 청소 당번에서 제외되는 특권이 있었지만, 7~8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기에 어깨가 제법 무거웠다. 가장 고되었던 것은 새벽 1시부터 시작되는 심야 작업이었다. 밤과 새벽의 뼈대를 가느다란 실로 짜내기 위해 나는 꺼끌꺼끌한 눈꺼풀을 치켜뜨며 일했다. 어둠과 적막을 가로실로 밀어 넣으며 쇳소리의 박자에 맞춰 옷감을 만들었다. 때로는 창밖으로 흐르는 달빛의 궤적을 기계 베틀 위에 묶어 한 올의 낭만으로 집어넣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튕겨 나갔다. 단조로운 소음과 흐물흐물 흘러내리는 하품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졸음이라는 거대한 이방인에게 나의 시간을 강탈당하지는 않았다. 24시간 가동되는 육중한 기계 소리를 들으며 졸린 눈을 비벼야 하는 야근은 참으로 고단했지만, 낮 시간이 온전히 주어지는 근무 주간에는 나름의 활력을 찾으며 공장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주경야독, 동양종합학원의 추억
나는 현실의 고단함에 주저앉지 않았다. 공장 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못다 한 공부에 대한 한을 풀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갰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지금의 광주역 근처에 있던 '동양종합학원'이었다. 밤낮으로 일하며 학원 책상에 앉아 영어 기초를 배우고 한문을 한 자 한 자 눈에 익혔다. 피곤에 겨워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가슴속 품은 꿈을 생각하며 펜을 꽉 쥐었다.
마침내 학원의 전 과정을 무사히 수료하던 날, 정화영 원장 선생님은 내게 빛나는 우등상을 주었다. 원장 선생님은 내 손을 꼭 잡고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이 고된 환경에서도 꾸준히 공부했으니, 앞으로 필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와 칭찬 한마디에 그간의 설움과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고단한 주중이 지나고 주말이 오면 청춘의 즐거움도 만끽했다. 매달 25일, 통장에 월급이 꽂히는 날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알뜰히 먹고 싶은 것도 사 먹고, 시골집에 필요한 살림살이도 통 크게 사다 나르며 효도도 했다. 남은 돈은 매월 꼬박꼬박 은행에 저축하며 야무지게 미래의 결혼 자금을 모아 나갔다. 일요일이면 마음 맞는 공장 친구들과 손을 잡고 광주 근교로 기차 여행을 떠나, 푸른 바람을 맞으며 깔깔대고 웃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날이었다. 철길은 대지를 꿰매는 무채색 바늘과 같아서 나란한 두 줄을 달리는 기차가 마치 바늘에 딸린 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차와 철길이라는 저 실과 바늘은 우리의 낭만을 덧대어 박음질하고 창밖의 풍경까지 짜깁기하며 달콤한 청춘을 달아오르게 했다. 기차는 철길이라는 금속의 악보를 연주하며 덜컹덜컹거렸다. 풍경을 한 입씩 베어 먹으며 덜컹덜컹 달렸다. 기차는 새소리와 바람을 집어삼켜도 체하는 법이 없어 차창이라는 거대한 목구멍으로 지평선까지 통째로 꿀꺽 삼켰다.
스쳐 지나간 청춘의 연인들
방직공장에서 5년이라는 세월을 성실하게 보내며 제법 든든한 결혼 밑천을 마련했을 무렵, 내게도 풋풋한 연애의 바람이 불어왔다. 친구의 주선으로 정미소를 운영한다는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외모도 건장하고 성격도 호탕해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니 그는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연로하신 할머니가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딸린 동생들이 줄을 이었다. 송정리에 사는 고모가 그 소식을 듣고는 버선발로 뛰어와 나를 말렸다.
"네가 제 발로 고생 구덩이에 들어가려고 환장을 했느냐?"
고모는 완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강제로 만남을 가로막았다. 인연이 아니었는지 고모의 성화에 못 이겨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 남자는 미련이 남았는지 우리가 자주 만나던 회사 앞 빵집에 몇 번이고 찾아와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나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고 안쓰러웠지만, 모질게 마음을 고쳐먹고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또 다른 기억은 1960년대 청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펜팔'을 통해서 찾아왔다. 대구 청구대학교에 다닌다는 한 대학생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 것이다. 하얀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귀를 통해 서툴게 마음이 통하던 어느 날, 그 학생이 대구에서 내 주소가 적힌 종이만 달랑 들고 무작정 광주까지 나를 만나러 내려왔다. 펜팔은 서로의 목소리가 아닌 잉크의 얼굴로 다가갔는데 그 학생은 이미 나의 잉크에 사로잡혀 있었다. 펜팔은 힘이 막강해, 문장의 지문만 만지작거려도 상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키와 외모를 분실한 글의 행간 속에서도 설렘은 자라고 그리움은 커져갔다. 말과 말이 아닌 글과 글로도 화끈거리는 연애의 감정은 활활 타오르기에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펜팔은 서로를 향해 발사하는 가장 은밀한 큐피트의 화살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간 금남로의 한 다방.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솔직히 내 마음의 저울추는 싹 기울고 말았다. 아담해도 너무 아담한 그의 작은 키가 내 눈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방에 마주 앉아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저녁 식사를 대접한 뒤 서둘러 그를 대구로 돌려보내려 했다.
"당신을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겨우 몇 시간만 있다가 그냥 가란 말입니까?"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버텼지만, 이미 마음이 돌아서 버린 나는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로 그를 달래며 대구행 버스에 태워 보냈다. 그 후로도 대구에서 애틋한 편지가 몇 통 더 날아왔지만 나는 무겁게 함구한 채 답장을 쓰지 않았다. 눈치를 챘는지 그도 서너 번 더 편지를 보내오다 끝내 단념했다.
그가 마지막 편지에 남겼던 글귀, "기다림이란 참기 어려운 수양이다"라는 그 한 문장은 이상하게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어느덧 방직공장에서 청춘의 황금기를 다 보내고 나니 내 나이도 꽉 차 있었다. 이제는 거친 기계 소리가 울리는 일터를 떠나, 조용하고 차분하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아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정들었던 전남방직 회사에 조용히 사표를 냈다. 열정이라는 한 가닥 실에 청춘을 묶어두었던 삶의 첫 막이 그렇게 내려가고 있었다.
훤칠한 사내와 춘삼월의 혼례
전남방직을 그만두고 가만히 통장을 들여다보니, 그간 청춘을 바쳐 꼬박꼬박 모아둔 저축액이 결혼 자금으로 쓰기에 꽤나 넉넉했다. 혼기가 꽉 찬 내게 중매를 통해 여섯 살 연상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다방의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번듯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대구에서 온 키 작은 대학생에게 실망했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일단 그의 수려한 외모에서 내 마음은 단번에 합격점을 내렸다.
그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서울에서 외삼촌과 함께 야심차게 사업을 벌였다가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 고향 집에 잠시 들렸다고 했다. 나이도 찼으니 선이나 한번 보고 가라던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나온 자리라고 했다. 실패담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투박한 대화 속에서도 '이 사람은 훗날 무엇을 해도 내 밥 굶길 사람은 아니겠구나' 하는 묘한 신뢰가 생겼다. 인연이란 이런 것일까. 우리는 서로의 중력에 붙잡혀 끌어당기는 두 개의 아름다운 행성처럼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나는 비로소 혼자라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줄 남자를 만난 것 같아 기뻤다. 미래라는 내 삶의 페이지에 오직 그 남자의 이름만 반복해서 적어내도 좋을 듯했다. 그는 내 몸속 어딘가에 잘못 배송된 소포처럼 도착해서 끝내 반송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인연은 내 왼쪽 심장 박동과 그의 오른쪽 발걸음이 우연히 같은 박자로 겹쳐진 순간에 왔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더니, 그 순간 내 눈에 제대로 콩깍지가 씌었던 모양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집안도 가난하고 당장 번듯한 직업도 없는 처지였는데도, 나는 그 남자의 든든한 어깨와 눈빛에 속절없이 끌렸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따뜻한 밥을 나누어 먹으며 부지런히 만남을 이어갔다. 연애가 아닌 오직 '결혼'이라는 진지한 이정표를 세우고 만났다. 양가 어른들도 물이 올랐을 때 서두르자며 혼사를 다그쳤다. 마침내 꽃잎 위로 나비가 사뿐히 날아들 듯, 음력 춘삼월의 화창한 날 우리는 백년가약을 맺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새로운 가정을 피워냈다.
군홧발 소리 요란하던 상무동
시댁은 쌀과 식료품을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치평동 일대는 지금의 번화한 모습과는 딴판인, 거대하고 웅장한 군사기지 '상무대'가 자리한 곳이었다. 포병학교와 기갑학교가 줄지어 서 있었고, 지금의 김대중컨벤션센터 근처 호텔 자리까지 온통 시퍼런 군부대 깃발이 나부끼던 시절이었다. 거리는 온통 군인들로 넘쳐났다. 그 많은 군인을 상대로 음식 장사부터 생필품 조달까지 온갖 장사가 성행했다.
내가 시집을 오자마자 집안에 연달아 겹경사가 터졌다. 결혼하자마자 튼실하게 잘생긴 첫아들을 낳았고, 이듬해에는 연년생으로 예쁜 딸아이까지 품에 안은 것이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큰 기쁨이자 축복이었다. 자식은 나의 피와 숨을 나누어 가진, 완벽한 우주여서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나는 기꺼이 자식이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충신이 되기로 했다. 갓난아기의 조막손을 잡고 세상의 모든 벽을 허물 결심을 했다. 오직 '엄마'라는 이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식은 엉거주춤 멈춰 있는 내 삶의 지도 위에 찬란한 미지의 길을 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은 높았다. 아이 아빠가 친구와 손을 잡고 '한국농어촌보'라는 출판 사업에 동업자로 뛰어들었으나, 매번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자금만 들어갈 뿐 손에 쥐어지는 수입이 없었다. 결국 미련 없이 사업을 접고 나왔지만 타격이 컸다. 이번에는 친정 쪽 사촌 오빠를 믿고 사료 사업을 시작해 보았지만, 그마저도 빚더미와 손해만 남긴 채 주저앉고 말았다. 이래저래 가난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고, 우리 네 식구의 숨통을 조여 왔다.
계모임 오야지에서 큰손으로
시부모님은 자식들의 주린 배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시부모님이 운영하던 식품 가게를 우리 부부에게 통째로 물려주었다. 장사를 제대로 키워보려면 든든한 밑천이 있어야 했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전남방직 시절 다져진 배짱과 눈썰미를 발휘하기로 결심했다. 동네 사람들을 모아 내가 직접 번듯한 계모임의 '오야지(계주)'가 된 것이다. 신용 하나로 모아들인 곗돈을 억척스럽게 쥐고 식품 도매업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하늘이 내 노력을 알아주었는지, 도매 장사는 물꼬가 터진 듯 무서운 기세로 잘 맞아떨어졌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단 2년 만에 남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을 손에 쥐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지금의 세정아울렛 자리에 있던 120평짜리 터 넓고 으리으리한 집을 덜컥 사들였다. 그리고는 고생하신 시부모님께 선물로 드렸다. 시부모님은 그 넓은 집에서 방세를 받아 가며 든든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번 불이 붙은 재물운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돈이 모이는 족족 땅을 사고 논을 사들였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새로운 땅문서를 받아 쥐는 '매답買沓'의 기쁨이 이어졌다. 유년 시절 겪었던 지독한 보릿고개와 가난의 한이 뼛속 깊이 박혀 있었기에, 내 사전에는 '낭비'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물겹게 달린 지 약 10년 만에, 우리 가정은 마침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안정된 삶의 반석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10년은 우리에게 대운이었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축복의 문이 삐그덕 소리도 없이 슬며시 열리는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삶의 내리막길이라 믿었던 가난의 비탈이 알고 보니 거꾸로 흐르는 은하수의 바닥이었음을 깨닫는 날들이었다. 가난에 찌들었을 때는 하늘이 우리를 잊은 줄 알았는데, 마치 오래전에 적어둔 대운의 방명록을 다시 펼쳐 들고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지난 10년은 세상의 모든 시곗바늘이 일제히 우리의 두근거림과 대운만을 기록하는 듯했다.
천재 아들과 항아리의 지혜
부모가 밖으로 억척스럽게 겉돌며 일하는 동안에도, 고맙게도 큰아들과 큰딸은 단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특히 첫째 아들 재헌이는 유독 영특했다. 겨우 세 살배기라 아직 혀가 짧아 말도 제대로 떼지 못할 무렵이었다. 길을 걷다 거리에 삐뚤삐뚤 적힌 간판 글자를 몇 개 짚어가며 가르쳐주었는데, 놀랍게도 그 다음 날 그 길을 지나갈 때 간판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제 들은 글자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동네에는 벌써 "치평동 식품집에 천재가 났다"라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자식들의 영특함을 보는 것만큼 고된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피로 회복제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시동생까지 결혼을 하면서 한집에 사는 식구가 자그마치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대가족의 끼니와 거대한 살림은 오롯이 맏며느리인 내 몫이었다. 매일 산더미처럼 쌓이는 식구들의 빨래와 밥물을 대기 위해 공동 샘터로 향했다. 우리 집과 옆집 문화극장 세입자들이 함께 합동으로 쓰던, 손잡이를 아래위로 쉴 새 없이 뿜어대야 하는 펌프식 샘이었다. 철컥철컥, 무거운 무쇠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누르면 이내 땅속 깊은 곳에서 차고 깨끗한 지하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 물을 양이 넘치도록 길어다가 밥을 짓고, 문밖에 있는 샘터에서 식구들의 옷가지를 박박 빨았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이 오면 물을 사용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손끝이 시려 터질 것 같은 계절이 오면, 나는 부엌 연탄불 바로 옆자리에 커다란 항아리를 깊숙이 묻어두는 지혜를 발휘했다. 차가운 항아리의 심장은 뜨거운 연탄불의 숨결로 쿵쿵 뛰었다.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의 숨소리를 항아리는 하나도 빠짐없어 받아 적으며 온기를 품었다. 항아리의 둥근 벽 안쪽은 아무도 본 적 없는 방, 문 없는 방이었다. 나는 그 둥근 방에 온기 가득한 사랑을 채워 넣었다. 연탄 아궁이의 붉은 눈동자 아래에서 항아리는 추위를 벗고, 우리 가족은 온기를 입었다. 내가 차가운 샘물을 미리 퍼다가 그 항아리에 가득 채워두면, 연탄 아궁이에서 나오는 은은한 열기가 항아리 벽을 타고 내려가 온종일 물을 덥혔다. 한겨울 눈보라가 쳐도 항아리 속 물은 늘 미지근하고 따사로웠다. 그 온수로 온 식구가 따뜻하게 세수를 하고 한가득 쌓인 설거지를 깨끗이 할 수 있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만들어내던, 연탄불 옆 항아리는 바로 그 시절 우리 집을 지탱하던 나의 삶 그 자체였다.
목차
목차
석양의 꽃이 피다 _ 목차
서시/ 박명자 _ 자식들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노래 _ 4
저자의 말/ 박명자 _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은 지금부터 _ 5
축시/ 박덕은 _ 불멸의 향기, 박명자 _ 8
1 보릿고개의 유년과 천막 교실
7남매의 여섯째, 남자애 터를 파다 _ 20
대밭에 숨어 듣던 포성, 그리고 천막 교실 _ 21
보릿고개의 허기와 눈물의 사친회비 _ 23
만귀정의 연꽃, 그리고 흘러간 시간 _ 25
2 본격적인 생활 전선과 찬란한 생의 봄날
열여섯, 생활 전선으로 향하는 발걸음 _ 30
섭씨 30도의 열기 속에서 꽃핀 리더십 _ 31
주경야독, 동양종합학원의 추억 _ 33
스쳐 지나간 청춘의 연인들 _ 35
3 상무동의 억척 어미, 가난의 터널을 뚫다
훤칠한 사내와 춘삼월의 혼례 _ 40
군홧발 소리 요란하던 상무동 _ 41
계모임 오야지에서 큰손으로 _ 43
천재 아들과 항아리의 지혜 _ 44
4 든든하게 뻗어 나간 삶의 가지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
대가족의 톱니바퀴와 축복처럼 찾아온 늦둥이 _ 48
뇌리를 두드리는 고마운 이웃 그리고 기특한 막내딸 _ 50
5 자식이라는 이름의 훈장, 그리고 남겨진 마음의 빈자리
전국이 들썩였던 천재 아들의 발자취 _ 54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미혼 막내딸에 대한 아림 _ 57
서운함도 흐르는 세월 속에 묻으며 _ 59
6 캔버스에 피어난 불꽃, 그리고 바다를 건넌 손녀
오빠의 그늘 속에서 스스로 빛나던 아이 _ 62
세 개의 도시락과 막차 버스의 눈물 _ 63
서울을 사로잡은 촌놈 작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영예 _ 65
외손녀 지담이의 도약과 화장품에 담긴 사랑 _ 66
7 운천저수지의 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인 덕행
벼랑 끝에서 움켜쥔 삶, 운천저수지의 밤 _ 70
남문(南門)의 기적과 5·18 _ 72
쉰 살에 내려놓은 삶의 무거운 짐 _ 73
동네 반장 시절의 인정(人情) _ 75
8 조물주가 점지해 준 보물, 세계를 사로잡다
중절의 위기, 그 아찔했던 발걸음 _ 80
큰딸 은희에게 보내는 참회록이자 찬가 _ 82
9 휴일이 없던 1인 3역의 나날과 도둑
일 년에 단 하루, 설날만 쉬던 철인의 삶 _ 86
담벼락을 넘은 쇳소리 그리고 신발째 들어온 불청객 _ 88
휴일도 없이 근면함으로 쌓아 올린 기적 _ 90
10 위대한 대한민국, 그리고 내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지난 달력 한 장에 깃든 가난, 그리고 풍족한 젊은 세대 _ 94
60년 전, 온 동네를 방방 뜨게 한 라면 한 박스의 추억 _ 96
세계 10위의 잘 사는 나라, 나의 위대한 대한민국 _ 98
11 장롱 밑 일기장과 밥 굶는 장사꾼
고구마밭의 풀매기와 홧김에 적어 내린 독설 _ 102
파리채가 찾아낸 비밀 그리고 귀여운 단식 투쟁 _ 104
12 천지개벽한 치평동 그리고 막내딸과 떠난 미국 여행
치평동의 천지개벽과 32년 전 아파트의 기억 _ 108
전액 장학생 삼남매 그리고 수학과 교수의 못다 한 꿈 _ 109
큰딸의 교직 생활과 막내딸의 최연소 신화 _ 111
캘리포니아 의사 딸과 버스 안의 저기압 시 낭송 _ 113
자식 농사, 이보다 더 기가 막힐 수 있으랴 _ 116
13 건강 관리와 새마을 부녀회장
엉덩이 들기 300번, 허리의 비명을 이겨내다 _ 120
새마을 부녀회장과 사과나무 밑에 누워 흘린 땀방울 _ 121
14 훈장으로 남은 지난날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내무부 장관상과 자식들이 안겨준 장한 어머니상 _ 126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열흘의 벚꽃 잔치와 1,700만 원의 보람 _ 127
모싯잎 송편과 김치 냉장고에 담긴 마르지 않는 사랑 _ 129
15 황혼에 마주한 유럽
자식 농사를 마치고 맞이한 선물 같은 회갑 _ 134
굴뚝의 비밀과 템즈강의 우아함, 런던을 걷다 _ 135
세느강의 낭만과 모나리자의 미소, 파리에 물들다 _ 137
유화의 고향 벨기에 그리고 브뤼셀의 작은 영웅 _ 139
척박함을 기적으로 바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푸른 운하 _ 141
거장의 숨결이 흐르는 독일 그리고 뜻밖의 비보 _ 144
프라하의 봄을 지나 만난 보헤미안의 땅, 체코 _ 149
음악과 제국의 향기가 흐르는 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 _ 153
알프스의 품에 안긴 잘츠부르크와 인스브루크, 동화가 된 하루 _ 156
유럽의 지붕 스위스 융프라우, 얼음 왕국에서 겪은 아찔한 고비 _ 161
장화를 닮은 대륙의 끝, 이탈리아에서 만난 로마의 유산 _ 165
로마에서 배운 삶과 죽음의 지혜 _ 168
16 재미없는 천국으로 떠난 여정, 미대륙을 품에 안다
디트로이트 앤아버에서 만난 핏줄 _ 176
천 개의 섬이 일군 수상 공원 그리고 불어를 쓰는 퀘벡 _ 178
마천루의 시카고 그리고 재미없는 천국 _ 179
맨해튼의 67층 하늘, 그리고 유엔본부에서 마주한 자부심 _ 181
17 눈물로 건넌 사별의 강
술과 함께 흘러간 지독한 가슴앓이 _ 186
전남대병원 응급실의 통곡 _ 188
나 홀로 덩그러니 _ 189
18 치평동 성당 그리고 되찾은 시간의 자유
신앙의 힘으로 일어서다 _ 192
운전대, 내가 놓쳐버린 도전의 이름 _ 195
19 국유지 불하 사건과 등기소장의 사죄
동네 반장, 관공서와 맞짱 뜨다 _ 198
20 일흔에 움튼 푸른 꿈, 고졸 모자를 쓰던 날
배움에는 때가 없다, 금남로 학원가의 늙은 학생 _ 202
두 달 반 만의 기적 _ 204
고졸 모자를 쓰던 날, 내 인생 가장 번듯한 영광 _ 206
21 사람은 스스로 포기할 때 꿈이 끝난다
장학생이라는 달콤한 제안 그리고 아름다운 내려놓음 _ 210
무에서 유를 일군 여든 살의 사계절 _ 212
22 내 안에 숨어있던 끼
빈 둥지를 채운 신명 _ 216
가가호호 걸궁소리, 잡귀는 물러가고 만복은 들어오너라 _ 218
신명이 멈춘 자리에 피어난 문학 _ 219
23 자식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낸 푸른 선산
내 키만 한 띠풀 그리고 결단 _ 224
구청의 제재와 마음의 내려놓음 _ 226
평장으로 정돈한 선산에서 피어난 안도감 _ 227
평설
박명자 시인의 자서전 출간을 축하하며 _ 박덕은 _ 230
시간이 남긴 얼굴들 _ 251
서시/ 박명자 _ 자식들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노래 _ 4
저자의 말/ 박명자 _ 내 인생의 마지막 장은 지금부터 _ 5
축시/ 박덕은 _ 불멸의 향기, 박명자 _ 8
1 보릿고개의 유년과 천막 교실
7남매의 여섯째, 남자애 터를 파다 _ 20
대밭에 숨어 듣던 포성, 그리고 천막 교실 _ 21
보릿고개의 허기와 눈물의 사친회비 _ 23
만귀정의 연꽃, 그리고 흘러간 시간 _ 25
2 본격적인 생활 전선과 찬란한 생의 봄날
열여섯, 생활 전선으로 향하는 발걸음 _ 30
섭씨 30도의 열기 속에서 꽃핀 리더십 _ 31
주경야독, 동양종합학원의 추억 _ 33
스쳐 지나간 청춘의 연인들 _ 35
3 상무동의 억척 어미, 가난의 터널을 뚫다
훤칠한 사내와 춘삼월의 혼례 _ 40
군홧발 소리 요란하던 상무동 _ 41
계모임 오야지에서 큰손으로 _ 43
천재 아들과 항아리의 지혜 _ 44
4 든든하게 뻗어 나간 삶의 가지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
대가족의 톱니바퀴와 축복처럼 찾아온 늦둥이 _ 48
뇌리를 두드리는 고마운 이웃 그리고 기특한 막내딸 _ 50
5 자식이라는 이름의 훈장, 그리고 남겨진 마음의 빈자리
전국이 들썩였던 천재 아들의 발자취 _ 54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미혼 막내딸에 대한 아림 _ 57
서운함도 흐르는 세월 속에 묻으며 _ 59
6 캔버스에 피어난 불꽃, 그리고 바다를 건넌 손녀
오빠의 그늘 속에서 스스로 빛나던 아이 _ 62
세 개의 도시락과 막차 버스의 눈물 _ 63
서울을 사로잡은 촌놈 작가, 국립현대미술관의 영예 _ 65
외손녀 지담이의 도약과 화장품에 담긴 사랑 _ 66
7 운천저수지의 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인 덕행
벼랑 끝에서 움켜쥔 삶, 운천저수지의 밤 _ 70
남문(南門)의 기적과 5·18 _ 72
쉰 살에 내려놓은 삶의 무거운 짐 _ 73
동네 반장 시절의 인정(人情) _ 75
8 조물주가 점지해 준 보물, 세계를 사로잡다
중절의 위기, 그 아찔했던 발걸음 _ 80
큰딸 은희에게 보내는 참회록이자 찬가 _ 82
9 휴일이 없던 1인 3역의 나날과 도둑
일 년에 단 하루, 설날만 쉬던 철인의 삶 _ 86
담벼락을 넘은 쇳소리 그리고 신발째 들어온 불청객 _ 88
휴일도 없이 근면함으로 쌓아 올린 기적 _ 90
10 위대한 대한민국, 그리고 내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지난 달력 한 장에 깃든 가난, 그리고 풍족한 젊은 세대 _ 94
60년 전, 온 동네를 방방 뜨게 한 라면 한 박스의 추억 _ 96
세계 10위의 잘 사는 나라, 나의 위대한 대한민국 _ 98
11 장롱 밑 일기장과 밥 굶는 장사꾼
고구마밭의 풀매기와 홧김에 적어 내린 독설 _ 102
파리채가 찾아낸 비밀 그리고 귀여운 단식 투쟁 _ 104
12 천지개벽한 치평동 그리고 막내딸과 떠난 미국 여행
치평동의 천지개벽과 32년 전 아파트의 기억 _ 108
전액 장학생 삼남매 그리고 수학과 교수의 못다 한 꿈 _ 109
큰딸의 교직 생활과 막내딸의 최연소 신화 _ 111
캘리포니아 의사 딸과 버스 안의 저기압 시 낭송 _ 113
자식 농사, 이보다 더 기가 막힐 수 있으랴 _ 116
13 건강 관리와 새마을 부녀회장
엉덩이 들기 300번, 허리의 비명을 이겨내다 _ 120
새마을 부녀회장과 사과나무 밑에 누워 흘린 땀방울 _ 121
14 훈장으로 남은 지난날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내무부 장관상과 자식들이 안겨준 장한 어머니상 _ 126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열흘의 벚꽃 잔치와 1,700만 원의 보람 _ 127
모싯잎 송편과 김치 냉장고에 담긴 마르지 않는 사랑 _ 129
15 황혼에 마주한 유럽
자식 농사를 마치고 맞이한 선물 같은 회갑 _ 134
굴뚝의 비밀과 템즈강의 우아함, 런던을 걷다 _ 135
세느강의 낭만과 모나리자의 미소, 파리에 물들다 _ 137
유화의 고향 벨기에 그리고 브뤼셀의 작은 영웅 _ 139
척박함을 기적으로 바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푸른 운하 _ 141
거장의 숨결이 흐르는 독일 그리고 뜻밖의 비보 _ 144
프라하의 봄을 지나 만난 보헤미안의 땅, 체코 _ 149
음악과 제국의 향기가 흐르는 나라, 오스트리아 비엔나 _ 153
알프스의 품에 안긴 잘츠부르크와 인스브루크, 동화가 된 하루 _ 156
유럽의 지붕 스위스 융프라우, 얼음 왕국에서 겪은 아찔한 고비 _ 161
장화를 닮은 대륙의 끝, 이탈리아에서 만난 로마의 유산 _ 165
로마에서 배운 삶과 죽음의 지혜 _ 168
16 재미없는 천국으로 떠난 여정, 미대륙을 품에 안다
디트로이트 앤아버에서 만난 핏줄 _ 176
천 개의 섬이 일군 수상 공원 그리고 불어를 쓰는 퀘벡 _ 178
마천루의 시카고 그리고 재미없는 천국 _ 179
맨해튼의 67층 하늘, 그리고 유엔본부에서 마주한 자부심 _ 181
17 눈물로 건넌 사별의 강
술과 함께 흘러간 지독한 가슴앓이 _ 186
전남대병원 응급실의 통곡 _ 188
나 홀로 덩그러니 _ 189
18 치평동 성당 그리고 되찾은 시간의 자유
신앙의 힘으로 일어서다 _ 192
운전대, 내가 놓쳐버린 도전의 이름 _ 195
19 국유지 불하 사건과 등기소장의 사죄
동네 반장, 관공서와 맞짱 뜨다 _ 198
20 일흔에 움튼 푸른 꿈, 고졸 모자를 쓰던 날
배움에는 때가 없다, 금남로 학원가의 늙은 학생 _ 202
두 달 반 만의 기적 _ 204
고졸 모자를 쓰던 날, 내 인생 가장 번듯한 영광 _ 206
21 사람은 스스로 포기할 때 꿈이 끝난다
장학생이라는 달콤한 제안 그리고 아름다운 내려놓음 _ 210
무에서 유를 일군 여든 살의 사계절 _ 212
22 내 안에 숨어있던 끼
빈 둥지를 채운 신명 _ 216
가가호호 걸궁소리, 잡귀는 물러가고 만복은 들어오너라 _ 218
신명이 멈춘 자리에 피어난 문학 _ 219
23 자식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낸 푸른 선산
내 키만 한 띠풀 그리고 결단 _ 224
구청의 제재와 마음의 내려놓음 _ 226
평장으로 정돈한 선산에서 피어난 안도감 _ 227
평설
박명자 시인의 자서전 출간을 축하하며 _ 박덕은 _ 230
시간이 남긴 얼굴들 _ 251
저자
저자
박명자 ?출생 및 학력
ㆍ1945년 출생
ㆍ중·고등학교 졸업학력(검정고시 합격)
?활동
ㆍ광주특별시문인협회 이사
ㆍ한실문예창작 회원
ㆍ방그레문학회 회장
ㆍ적십자 회원
ㆍ새마을 부녀회 서구 부회장 역임
?상훈
ㆍ《문학공간》 시 등단
ㆍ행정안전자치부 장관상(2회)
ㆍ장한 어버이상(2회)
ㆍ광주시장상
ㆍ구청장상
ㆍ디카시문학상 금상
ㆍ구지봉 문학상 우수상
?저서
ㆍ『석양의 꽃이 피다』
ㆍ1945년 출생
ㆍ중·고등학교 졸업학력(검정고시 합격)
?활동
ㆍ광주특별시문인협회 이사
ㆍ한실문예창작 회원
ㆍ방그레문학회 회장
ㆍ적십자 회원
ㆍ새마을 부녀회 서구 부회장 역임
?상훈
ㆍ《문학공간》 시 등단
ㆍ행정안전자치부 장관상(2회)
ㆍ장한 어버이상(2회)
ㆍ광주시장상
ㆍ구청장상
ㆍ디카시문학상 금상
ㆍ구지봉 문학상 우수상
?저서
ㆍ『석양의 꽃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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