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달이 있는 저녁
이기홍 시인의 시집 『낮달이 있는 저녁』. 일상의 단어들을 속에서 건져올린 시어로 서정적 울림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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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이경철(문학평론가 ·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나는 그대 안에 집 하나 지어두고/밤이나 낮이나/비가 오나 바람 불 때/내 집이 온전하나 살펴봅니다/그대도/내 안에 집 하나 짓고/봄날 제비처럼/무너진 곳이 없나 삐뚤어진 곳이 없나/드나듭니다/비새는 마음 없나 휘 둘러보고 날아갑니다" -「제비집」 전문
지치고 다친 마음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시편들
이기홍 시인의 첫 시집 『낮달이 있는 저녁』을 쭉 감상하면서 산골짝 샘물이나 공기 마시듯 청량했다. 가슴속에서 아무런 가미 없이 솟아오른 언어들이 속을 뻥 뚫리게 했다. 그러면서 허황되고 가식적이고 난삽한 세상과 요즘 시들에 상한 속을 쓸어내리게 했다. 그런 시의 샘물 같은, 시심(詩心)의 원광석 같은 이 시인의 시편들은 동서고금 시의 덕목과 효험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다.
이 시인의 시편들은 그냥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별다른 시적 장치나 수사 없이 터져 나온 언어들이 곧바로 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소월과 이상과 백석과 서정주 등 우리 현대시를 열었던 시인들의 시혼, 에스프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동시 같은 즉물적 세계부터 고단위 추상의 허정한 세계까지 망라하고 있다.
아무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먼저 감상해 보시라. 이 글 맨 위 올린 시 「제비집」을 보시라. 제비집을 보고 '나'와 '그대'의 마음을 떠올리며 쓴 이 시에는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일상서 흔히 쓰는 생활어들이다. '마음'이라는 말만 빼고 개념어 하나 없어 구체적이면서 그대를 향한 오만가지 마음, 그리움 그 고단위 관념의 추상을 간절히 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그런 생활어, 살아있는 언어로 우리네 일상과 시국과 향수와 그리움 등을 쉽고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시인이 수십 년 간 동시대 시집은 물론 동서고금 명시집을 읽고 홀로 시를 쓰며 깨친 언어관이나 시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편들도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소통도 감동도 없는 시로 끼리끼리 추켜 주며 독자들은 나 몰라라 하는 자폐증에 빠진 작금의 우리 시단에 반성을 주는 시집으로도 읽힌다.
"너의 시는 둔탁해서/너의 시는 소란하고/너의 시는 한 줄의 곪은 상처/또한 너의 시는 포식하여 겨우 일어서는 언어로구나/사실은 너의 시는 육욕이거나/붉은 살로 비대하여/어린 날 술집거리에서 토하던 소리/너의 시는 독수리 아닌 참새/너의 시는 허위의 화살/너의 시는/세월에 진 정든 꽃잎/너의 시는 네 마음의 언어라면서도/정돈 안 된 아귀다툼이어라/네 나이의 너의 시는."(「너의 시」 전문)
언어를 너무 포식해 너무 길고 정돈이 안 돼 소란스런 시. 한 줄의 곪은 상처처럼 너무 자학적인 시. 높은 데에서 정확히 보고 단숨에 포획하는 독수리 같지 않고 입방아나 찧은 참새 같은 시. 서정시랍시고 "세월에 진 정든 꽃잎"처럼 그렇고 그런 감상 과잉의 회고조 시들만 넘쳐나는 게 작금의 시단 아닌가. 그런 시단에 일침을 가하면서 자신의 시작에 경계로 삼고 있는 시로 읽힌다.
"그놈의 친구/느닷없이 줄이란다/줄여야 산단다/줄일 게 더 없는데/뺄게 더 없는데 줄이라는 그놈의 말이/나는 참으로 어렵다"(「줄여라」 부분). 우리네 삶도 그렇고 특히 정신과 정신적 삶의 총화인 시는 더더욱 그렇다. 말 수를 줄여야 시가 깊어지고 풍성해진다. 줄인 말의 행간에 생기는 여백에서 말로 드러낼 수 없는 오묘한 것들을 말하게 하는 게 시 아니던가.
"어머니/아내/아들/딸/남동생/여동생/여동생/나/그리고 모기 한 마리" (「불면증」 전문)
말은 최대한 줄여 최대의 효과를 보는 시의 경제학을 이룬 시다. 제목이자 소재인 그 성가신 불면증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해야 좋을까 하는 결실을 단박에 이룬 시다. 수만 언어를 써서 묘사, 진술한다 해도 어떻게 이 시만큼 쉽고 선명하게 전할 수 있겠는가. 시에 대한 자잘한 설명 없어도 독자 분들도 아무리 잠들려 용을 써 봐도 잠 못 드는 그 예민한 불면증에 다 공감하시리라.
"시에는 삶의 땡볕 아래 쉬어갈/그늘이 드리워져있어요/시에는 애틋한 율동이 보여요/시에는 음악이 있고/지고한 사상이 숨어있어요/시에는 아름다움이 지펴지고/시에는 치유가 있고/시의 그늘 옆에는 휴식의 의자가 있고요/시에는 값싼 노동의 거친 환부가 보여요/몰락한 사랑과 이별이 있어요." (「시의 그늘」 부분)
시에 대해 말한 일종의 시론시(詩論詩)로 볼 수 있는 시다. 시는 땡볕 같이 치열한 삶, 혹은 화탕지옥 같은 실존의 질곡에서 나온다. 그런 삶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그늘이 안 생긴다. 말을 줄여 생긴 여백, 그 그늘에서 시는 효험을 낳는다. 산문과 달리 시에는 율동, 리듬이 있다. 그리고 사상이 배어 있다. 시의 리듬과 사상은 삶 한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우러나야 한다는 게 음악이나 철학과는 다르다.
일상서 우러나와 사실과 서정을 아우르는 시편들
"삼학년 사반 아이들이/체육수업 나가고/나는 태극기 아래 파란 칠판을 바라본다/삼십년 전 첫 수업 때도/나를 기다리던 태극기 아래 빈 칠판/그 칠판에 나는 무엇을 쓰고/무엇을 지웠던가/창밖에 진달래가 즐겁던 봄날/옥상을 두들기던 햇빛 속 여름방학 보충수업/아이들과 낙엽 쓸던 늦가을/눈보라에 질척거리던 겨울운동장/시작종에 쫓기던 출근길//지금 나는 무연히 앉아/빈 칠판을 채우고 있다" (「태극기 아래 빈 칠판」 전문)
평생 봉직하고 있는 교단을 그리고 있는 시다. 학생들은 체육 수업하러 나가고 텅 빈 교실에서 교단생활을 둘러보고 있다. 평생 쓰고 지우고 했을 칠판, 그 텅 빈 칠판에 지난 삶 자체를 채우고 있다고 하면서도 보여주지는 않아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둘러보며 쓰게 하고 있는 시다.
"출근할 때 신어야 하는 인생/퇴근할 땐 벗어야 하는 인생/한 켤레 구두를 탓하는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새 것을 사지 못하는 나를 내가 용서합니다/가을 되면 한 켤레 새로 장만할까요/그리 되지 않을 질문을 했군요/가만히 낡은 구두를 혼자 쳐다봅니다" (「구두 한 켤레」 전문)
자신의 일상과 심사의 단면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어 재밌게 읽히는 시다. 다 떨어진 구두 한 켤레 새로 장만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정 때문인가, 막상 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거개의 일상 아니던가. 그런 우리네 보편적 삶과 정을 일상의 한 단면을 드러내 씁쓸한 웃음으로 전하고 있어 좋은 시다.
"고향 친구 부고장/하나/문간에/이른 낙엽 되어/떨어져 있다//나도/오늘 같은 가을날/먼 길/떠나고 싶다" (「가을 아침」 전문)
두 연 아홉 행의 이 짧은 시, 울림은 참 크다. 앞 연에서는 가을 아침 떨어지는 낙엽처럼 전해진 친구의 부고장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뒤 연에서는 그것을 본 시인의 심사를 그대로 그리고 있고. 사실대로 묘사하고 진술하고 있는데도 그 울림은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넓고 깊다.
이렇게 말을 줄이고 솔직 담박할 때라야만 시는 극사실(極寫實)과 극서정(極抒情)을 아우를 수 있다. 친구의 부고장 하나로 우주에 만연한 가을날의 풍정(風情)을 단숨에 사실적으로 잡아내 끝 간 데 없이 감동을 주는 극서정의 모범으로 읽힐 수 있는 시다.
이렇듯 이 시인의 시편들은 일상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포착하면서도 서정적 울림을 주고 있다. 시인의 속내, 과거의 회억(回憶)과 미래의 예감이 켜켜이 쌓인 속마음으로 솔직 담박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서정을 일구게 하는 고향의 원체험
"조그만 아내가 헛간에서/어머니와 감을 깎는다/달은 반달이고/별들은 파랗다/감잎들 바람에 쓸리어/그 소리가 애잔한데/마을은 고요하다/암소 우는 소리는 사라지고/재실 앞 당산나무도/이제는 없다//고향은 떠나는 곳/고향은 그래서 돌아오는 곳/북두칠성을 보고 있는/나는 지금 어린이//검은 어둠은 우두커니/주인 떠난 빈 집에서/늙어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고향에서」 전문)
고향을 떠나 살다가 고향에 돌아와 쓴 시다. '고향', '아내', '암소 우는 소리' 등의 시어와 이미지에서 정지용 시인의 널리 알려진 시 「향수」를 떠올리게도 한다. 향수를 자아내는 시편 대부분이 회고조로 읊조리고 있으나 이 시는 고향의 현재를 단정하게, 사실적으로 보고 있다.
어릴 적 보고 들었던 당상나무는 베어져 없고 암소 우는 소리도 지금은 사라졌다. 그런 사라진 것들을 직시하면서도 삼라만상과 천진난만하게 어우러졌던 어린 시절, 그 개인적 신화세계를 다시금 간절하게 떠올리고 오늘도 그렇게 순정하게 살게 하는 것이 향수고 고향의 시공(時空) 아닐 것인가.
"비가 오던 날/학교 가던 길에/까까머리 징검다리 건너다/나는 나대로/자전거도/흐르는 냇물에 빠져/물이 가득 책가방/배가 부르네/울 엄마 회초리/내 종아리 불이 나고/저녁에도 장대비/그놈의 장맛비" (「장마」 전문)
동시로 읽어도 참 재밌고 좋을 시다. 비도 살아 있고 자전거도 책가방도 회초리도 사람들과 더불어 평등하게 살아있는 활물론적(活物論的), 애니미즘의 세계가 동심의 세계 아니던가.
고향과 향수는 우리가 최초로 만나서 선도 악도 구별 없이 굉장히 즐거운 그런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런 세계를 이 시인의 시편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생생하게 살리고 있다.
"달은 밝은데/가스네 자꾸/돌을 던진다/사랑방 할머니도 놀라겠구마는/자꾸 돌을 던진다/그냥 나를 부르지는 못하고//어머니가 사립문 닫았더니/마당에 달빛 내려와 앉는/가을밤에/가스네 자꾸 돌만 던진다//내 속도 다 타는데/어쩌자고/자꾸 돌만 던진다/귀뚜라미 놀라 숨던/가을밤에" (「소녀」 전문)
사춘기 시절 처음 이성에 눈뜰 때를 그린 시다. 그때의 상황과 설렘을 아주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아무런 치장이나 가식이 없이. 그래서 "귀뚜라미 놀라 숨던/가을밤에"란 서정적 구절마저 사실적으로 들리게 된다. 그 최초의 그리움, 설렘에 귀뚜라미나 가을 등 우주 만물이 동참하고 있으니.
이렇듯 시인에게 잊을 수 없는 원체험을 각인시켜 준 시공이 고향이며, 향수로 현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향에서의 원체험은 시 속에 서정을 확산, 심화시켜나가며 누구든 공감할 수 있게 보편화되고 있다.
"경자년 섣달 추위로 나를 나으신 어머니/자식이 아프다 우시는 마음은/하늘 끝 어디엔가에 눈물로 얼어/구름꽃 하얗게 낮달이 서럽구나" (「낮달」 전문)
한 페이지는 물론 두세 페이지까지 가는 중구난방의 긴 시편들이 행세하는 작금의 시단에서 4행으로 짧은 이 시는 극히 정제된 극서정시의 정수로 읽힌다. 어미와 자식 간의 간절한 정이 온 우주를 울리고 있어 서정주 시인의 「동천(冬天)」을 떠올리게도 하는 시다.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동천」 전문).
서정주 시인의 단 5행의 이 짧은 시가 그리움에 우주 삼라만상을 동참시키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귀신까지도 감동해서 울릴 시편을 쓰기 위해 많은 시인들이 오늘도 극서정의 전범으로 삼고 있는 시가 「동천」이다.
이 시인이 고향에서 삼라만상과 어울렸던 원체험이 「동천」에 버금가는 「낮달」같은 시를 낳게 한 것이다. 이처럼 원체험을 현재화하며 시의 깊이와 함께 서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고향과 향수의 시편들도 이번 시집엔 눈에 많이 띈다.
사랑과 그리움의 본질을 포착, 형상화하는 직관적 서정
"내 가득한 그리움/타래 머리 풀고/묵호항/난바다 바라보며/용서하리다, 그대"
아주 짧은 시 「묵호항」 전문이다. 짧아서, 역설적이어서 그리움을 더욱 더 사무치게 전하고 있다. 늘 품고는 있어 실감으로 다가오지만 막상 쓰려면 아득하기만 한 그리움이란 추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 진술하고 있는 빼어난 시다.
오징어가 먹물을 풀어놓은 듯 먹빛 호수 같은 묵호(墨湖)항으로 들어온 바다. 그 묵호항 든바다를 시인은 속 다 타들어가 검댕이만 남은 그리움이 타래를 풀고 있는 것으로 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멀리 한정 없이 푸른 난바다를 바라보며 용서를 다짐하고 있다. 그 용서의 대상은 바로 '그대', 시인의 속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일 것이다.
"너는 어디엔가 있고/언제나 있다/바람 소리 속에도/인연의 속살은 보인다/이인칭인데도 너는/꽃으로도 있고/나무로도 있는데/천둥으로 있고/벼락으로도 있다/밤일 땐 아침으로/아침일 땐 밤으로 있는/너는/있다/있음으로 슬프거나 있음으로 기쁜/와중에/생각의 샘에 낮달로 뜬다/너는" (「너」 전문)
그리움과 사랑의 허정함을 깨치고 회향(廻向)해 삼라만상을 대하면 그 대상인 '너'는 언제 어디든 편재(遍在)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월인천강(月印千江)'처럼. 달빛이 모든 강을 고루 비추듯, 부처가 몸 바꾸어 삼라만상으로 현현(顯現)하듯 사랑의 얼굴과 마음, 그리움 또한 만상에 배어 있지 않던가. 우리네 사랑도, 너와 만나서 사랑으로 하나 되고픈 그리움도 순간순간 바람 소리, 꽃, 나무, 천둥, 벼락 등 보고 듣는 대상마다에 들어 있다는 것을 사랑과 갈애에 빠졌던 사람들은 다들 애타게 체험해 익히 알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의 속살"의 인연, 인과응보가 만물을 낳고 사랑과 그리움을 낳고 있다고 보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이 우주를 낳았다고 보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가스인지 안개인지 형체도 못 갖춘 것들이 서로서로를 끓어 당겨 뭉치고 뭉치다 마침내 한 점 빛으로 폭발한 그 파장이 태양도 낳고 지구도 낳고 돌이며 꽃이며 천둥도 낳으며 우주 삼라만상의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다는 게 우주 탄생의 정설이 돼 가고 있는 대폭발, 빅뱅이론 아닌가.
원자니 입자니 하는 형체도 못 갖춘 것들이 외로워 뭔가가 되려고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나는 그 인력을 사랑과 그리움으로 보고 싶다. 그래 너와 꽃과 저 별들을 끌어당겨 다시 하나가 되고 싶은 게 그리움의 본질이고 시의 핵인 서정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서정을 '너와 나의 외로움이 만나는 순간의 포에지' 보고 있다. 위 시 「너」는 인연의 속살들을 늘어놓으며 말을 아끼지는 않았으나 그런 서정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꿰뚫고 있는 범상치 않은 시다.
"한 백 년 지나서/너와 함께한/바닷가 블루 모텔을 지날 때/파도 소리는 깊어가고/사연은/조도 낮은 불빛에 가득하리/그 어느 기억보다도 초조한/실내등이 켜지고/낯선 두 눈길은 젖어 마주치리/청춘을 지나서/실패한 사랑을 다시 도모하며/실낙원에 꽃나무를 심으면/모두가 연인이 되어/비틀거리던 선술집도 어둠에 싸이고/릴케보다는/애드가 앨런 포가 찾던/바닷가 여인의 등 뒤로/문이 닫히던 칠흑 같은 어둠/어떤 것도 남기지 않는 사랑/어떤 것도 기억하지 말자던 사랑/블루 모텔엔 추억만 있고/블루 모텔엔 망각만 있어서/청춘을 지나서/실패한 사랑을 다시 도모하며/파도 소리는 깊어만 가더라" (「블루 모텔」 전문)
시공을 뛰어넘어 편재해 있지만 아득하기만 한 그리움을 감각적, 구체적으로 잘 잡아낸 시다. "사연은/조도 낮은 불빛에 가득하리"라며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그 사연을 감각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또 "그 어느 기억보다도 초조한/실내등"이라며 그 설렘과 초조함을 실내등 불빛으로 감각화하는 부분에서는 시적 기량도 잘 드러나 있다.
사랑, 그리움이란 편재해 있어 이렇게 다시 도모하게 하는 인력이 있다. 매양 삶을 새롭게 도모하게 하며 우리네 인생을 가없이 깊고 오묘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고 그리움 아니겠는가. 그런 생의 본질을 추억의 모텔을 통해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대중적 울림을 주면서도 속이 깊은 시가 「블루 모텔」이다.
이처럼 이번 시집에는 사랑과 그리움의 시편과 시 구절들이 편재해 있다. 어릴 적 고향의 가스네로부터 비롯되어 아내와 친구와 또 다른 구체적인 대상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으로 번져가는 사랑과 그리움은 종교와 우주를 운항하는 순리인 도(道)의 경지까지 넘나들며 우리네 현실적 삶에 깊고 오묘한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렇게 이기홍 시인의 이번 시집 『낮달이 있는 저녁』은 소재의 폭도 넓고 주제도 깊이가 있다. 존재의 집이랄 수 있는 언어와 시에 대한 시부터 고향과 일상과 시국과 사랑과 그리움을 소재와 주제로 잡은 시까지. 이 폭넓고 깊은 시편들은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에서 마치 일기처럼 우러나고 있어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이번 시집의 특장이다.
불가(佛家)에 흔히 쓰는 용어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이 있다. 밥 먹고 일 하고 사랑하고 자고 하는 우리 일상에서 우러나는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이다. 범접할 수 없이 저 멀리에 추상적, 개념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게 도며 진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이리저리 혹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어디 평상심 잡기가 쉽겠는가.
그럼에도 이번 시집은 그런 일상의 평상심에서 가식 없이 우러나고 있어 신뢰가 간다. 불가에서 평상심을 수행의 궁극의 도로 여기듯 시에서도 평상심이 곧 시심이다. 그런 평상심을 곧이곧대로 펴고 있어 시심의 원광석 같은 시집으로 이번 시집을 읽은 것이다.
-이경철(문학평론가 ·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
목차
목차
13 · 의자
14 · 소녀
15 · 시의 그늘
16 · 마늘
17 · 것들
18 · 찬바람
19 · 구월이 오면
20 · 개기일식
21 · 채송화
22 · 끝물 매미 소리
23 · 처진 소나무
24 · 제비집
25 · 호박꽃
26 · 여행
27 · 아파서 외로운
28 · 낮달
29 · 11월 찬가
30 · 가을 아침
31 · 집
32 · 행복
2 부
35 · 가을 창가에서
36 · 한 사람
37 · 마음 사람
38 · 묵호항
39 · 저기 떨어진 곳에
40 · 바람
41 · 11월엔 마음이
42 · 가을에서 겨울까지
43 · 연꽃
44 · 꽃그늘
45 · 약속
46 · 참았던 눈물
47 · 귀뚜라미
48 · 눈물비
49 · 가을날
50 · 그 사람
51 · 너
52 · 겨울비
54 · 벽면 사랑
56 · 불루 모텔
저자
저자
"작금에 발표되고 있는 우리 시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비판으로 읽혀도 할 말 없게 하는 시다. 시인 자신의 오랜 시작(詩作) 체험서 구체적으로 솟구쳐 오른 시이기에 조목조목 지당한 지적이다.
언어를 너무 포식해 너무 길고 정돈이 안 돼 소란스런 시. 한 줄의 곪은 상처처럼 너무 자학적인 시. 높은 데에서 정확히 보고 단숨에 포획하는 독수리 같지 않고 입방아나 찧은 참새 같은 시. 서정시랍시고 "세월에 진 정든 꽃잎"처럼 그렇고 그런 감상 과잉의 회고조 시들만 넘쳐나는 게 작금의 시단 아닌가. 그런 시단에 일침을 가하면서 자신의 시작에 경계로 삼고 있는 시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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