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편(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1)(양장본 HardCover)
신화로 읽는 고구려의 건국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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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영웅, 역사로 구현한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에 관한 본격적인 번역과 주석 및 해설로서 국내 첫 선
이규보의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은 건국 영웅을 노래하는 구전 서사시의 전통을 잇는, 우리나라에서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서사시이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1권으로 나온 이번 책에서는 동아시아의 신화와 서사시에 밝은 조현설 교수가 국내 처음으로 본격적인 번역과 주석, 해설을 원문과 함께 실었다. 특히 역해자는 이규보가 「동명왕본기」를 시구의 근거로 인용하면서 『삼국사기』가 지운 신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복원시킨 점에 주목한다. 책의 부록에 동명왕 신화가 평양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관련 부분을 번역 및 해설함으로써 동명왕편의 이해를 돕는다.
-동명왕편에 관한 본격적인 번역과 주석 및 해설로서 국내 첫 선
이규보의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은 건국 영웅을 노래하는 구전 서사시의 전통을 잇는, 우리나라에서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서사시이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1권으로 나온 이번 책에서는 동아시아의 신화와 서사시에 밝은 조현설 교수가 국내 처음으로 본격적인 번역과 주석, 해설을 원문과 함께 실었다. 특히 역해자는 이규보가 「동명왕본기」를 시구의 근거로 인용하면서 『삼국사기』가 지운 신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복원시킨 점에 주목한다. 책의 부록에 동명왕 신화가 평양을 중심으로 여전히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관련 부분을 번역 및 해설함으로써 동명왕편의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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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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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왜?
고구려 건국 영웅의 이야기, 동명왕 신화에는 신이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논어의 금과옥조를 따르자면 거들떠볼 이야기가 아니다. 이규보는 두세 번 읽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는다. 신성한 이야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공자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기에 서사시 첫머리를 요임금이나 신농씨 이야기 등 공자의 나라에 이미 존재하는 건국의 신성한 이야기로 장식하고 동명왕의 신령함을 드러냄으로써 고구려가 성인의 나라임을 찬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해자에 따르면 이규보의 실질적인 서사시 집필 동기는 달리 찾을 수 있다. 즉 아버지를 여의고 정치적 학문적 후원자마저 사망하여 정치적으로 기댈 언덕을 잃은 상황에서 첫딸까지 태어나 구직의 길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그렇다. 동명왕편은 이렇게 생활인 이규보가 구관시(求官詩)의 하나로 지은 작품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고주몽의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역해자는 동명왕편에 '소중화의 나라'이자 '문물과 예악이 있는 나라'라는 고려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과 시대정신이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동명왕편의 구성과 이규보의 서사 전략
이규보는 1193년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읽은 뒤 동명왕편을 썼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본기」와 서사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규보가 어떻게 동명왕을 형상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이규보는 282구의 오언고체시 형식으로 동명왕을 노래함으로써 당대 한시의 주류로 인식되어 있던 근체시의 규범을 벗어나 자유롭게 필치를 펼치려고 했다. 또한 서사-본사-결사의 형식으로 시편을 구성하여 서사에는 공자를 받들어 신화를 도외시하는 문인지식인들을 향해 창작의 정당성을 공표한다. 중국의 역사서에도 신화가 역사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동명왕의 위대한 사적을 읊는 데 문제가 없다는 취지이다. 서사의 이러한 구성은 결사에서 반복되지만 결사에서 끌어들인 중국의 사례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한고조 유방과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 유수에 얽힌, 역사시대의 것으로 바꿔놓아 주몽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한편 본사에서는 『구삼국사』와 「동명왕본기」를 인용 형식으로 활용하여 시와 이야기가 상보적으로 작용하도록 구성함으로써 동명왕편이 구전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했다. 또한 역사서를 시의 근거로 제시하여 시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고양시켰다.
역해자는 이규보가 동명왕 서사를 시로 형상화하면서 「본기」가 표현할 수 없는 효과를 창출한다는 데 주목한다. 즉 「본기」의 건조한 산문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감정의 토로를 통한 정서의 환기 효과다. 예컨대 해모수가 유화를 만나는 대목에서 「본기」에서는 "비로 삼으면 후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좌우에 말했다"고 노래한 반면 시에서는 "곱고 화려한 것 좋아함이 아니라/ 참으로 뒤 이을 아들이 급하였네"라고 노래한다. 사관이 사실의 서술에 집중하고 있다면 시인은 해모수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 해모수가 되는 것이다.
동명왕편의 문학사 및 사학사, 신화사적 평가
동명왕편은 구관(求官)이라는 사적 동기에서 비롯된 작품이지만 한국 고전문학사와 사학사에 일획을 긋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동명왕편은 문자로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에 창작된 본격적인 서사시이자 영사시(詠史詩)이기 때문이다. 사학사적으로는 동명왕편이 무신란 이후의 혼란상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무신란의 원인이 된 문신귀족들의 부패나 정치문화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고 고려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힘을 찾으려는 의식이 배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구비문학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신화·서사시를 주로 연구한 역해자는 동명왕편의 신화사적 의의 역시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규보가 시를 통해 새로 덧붙인 신화소는 없지만 『삼국사기』가 지운 신화소들을 풍부하게 복원시켰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해모수의 천강(天降)과 유화와의 결혼, 결혼을 둘러싼 하백과의 변신 경쟁, 용궁에서의 음주와 승천, 영아 주몽의 활쏘기, 사냥대회의 승리와 나무 뽑기, 유화의 준마 고르기와 주몽의 양마(養馬), 비둘기 편에 보낸 유화의 오곡종자, 비류국 송양왕과의 대결, 주몽의 승천 등이 대표적인 신화소들이다.
고구려 건국 영웅의 이야기, 동명왕 신화에는 신이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공자는 '괴력난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논어의 금과옥조를 따르자면 거들떠볼 이야기가 아니다. 이규보는 두세 번 읽고 나서야 마음을 고쳐먹는다. 신성한 이야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공자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기에 서사시 첫머리를 요임금이나 신농씨 이야기 등 공자의 나라에 이미 존재하는 건국의 신성한 이야기로 장식하고 동명왕의 신령함을 드러냄으로써 고구려가 성인의 나라임을 찬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해자에 따르면 이규보의 실질적인 서사시 집필 동기는 달리 찾을 수 있다. 즉 아버지를 여의고 정치적 학문적 후원자마저 사망하여 정치적으로 기댈 언덕을 잃은 상황에서 첫딸까지 태어나 구직의 길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그렇다. 동명왕편은 이렇게 생활인 이규보가 구관시(求官詩)의 하나로 지은 작품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사회에서, 무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고주몽의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역해자는 동명왕편에 '소중화의 나라'이자 '문물과 예악이 있는 나라'라는 고려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과 시대정신이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동명왕편의 구성과 이규보의 서사 전략
이규보는 1193년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읽은 뒤 동명왕편을 썼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본기」와 서사시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규보가 어떻게 동명왕을 형상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이규보는 282구의 오언고체시 형식으로 동명왕을 노래함으로써 당대 한시의 주류로 인식되어 있던 근체시의 규범을 벗어나 자유롭게 필치를 펼치려고 했다. 또한 서사-본사-결사의 형식으로 시편을 구성하여 서사에는 공자를 받들어 신화를 도외시하는 문인지식인들을 향해 창작의 정당성을 공표한다. 중국의 역사서에도 신화가 역사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동명왕의 위대한 사적을 읊는 데 문제가 없다는 취지이다. 서사의 이러한 구성은 결사에서 반복되지만 결사에서 끌어들인 중국의 사례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한고조 유방과 후한의 창업자 광무제 유수에 얽힌, 역사시대의 것으로 바꿔놓아 주몽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한편 본사에서는 『구삼국사』와 「동명왕본기」를 인용 형식으로 활용하여 시와 이야기가 상보적으로 작용하도록 구성함으로써 동명왕편이 구전 서사시의 전통을 계승하도록 했다. 또한 역사서를 시의 근거로 제시하여 시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고양시켰다.
역해자는 이규보가 동명왕 서사를 시로 형상화하면서 「본기」가 표현할 수 없는 효과를 창출한다는 데 주목한다. 즉 「본기」의 건조한 산문에서는 얻을 수 없는, 감정의 토로를 통한 정서의 환기 효과다. 예컨대 해모수가 유화를 만나는 대목에서 「본기」에서는 "비로 삼으면 후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좌우에 말했다"고 노래한 반면 시에서는 "곱고 화려한 것 좋아함이 아니라/ 참으로 뒤 이을 아들이 급하였네"라고 노래한다. 사관이 사실의 서술에 집중하고 있다면 시인은 해모수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 해모수가 되는 것이다.
동명왕편의 문학사 및 사학사, 신화사적 평가
동명왕편은 구관(求官)이라는 사적 동기에서 비롯된 작품이지만 한국 고전문학사와 사학사에 일획을 긋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동명왕편은 문자로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에 창작된 본격적인 서사시이자 영사시(詠史詩)이기 때문이다. 사학사적으로는 동명왕편이 무신란 이후의 혼란상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무신란의 원인이 된 문신귀족들의 부패나 정치문화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고 고려의 국제적 지위가 약화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힘을 찾으려는 의식이 배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구비문학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신화·서사시를 주로 연구한 역해자는 동명왕편의 신화사적 의의 역시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규보가 시를 통해 새로 덧붙인 신화소는 없지만 『삼국사기』가 지운 신화소들을 풍부하게 복원시켰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해모수의 천강(天降)과 유화와의 결혼, 결혼을 둘러싼 하백과의 변신 경쟁, 용궁에서의 음주와 승천, 영아 주몽의 활쏘기, 사냥대회의 승리와 나무 뽑기, 유화의 준마 고르기와 주몽의 양마(養馬), 비둘기 편에 보낸 유화의 오곡종자, 비류국 송양왕과의 대결, 주몽의 승천 등이 대표적인 신화소들이다.
목차
목차
해제 고려 사회의 시대정신을 담은 주몽의 건국 드라마
동명왕편 병서 25
동명왕편 45
부록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 평양부) 163
주석 181
참고문헌 199
찾아보기 205
동명왕편 병서 25
동명왕편 45
부록 『세종실록지리지』(평안도, 평양부) 163
주석 181
참고문헌 199
찾아보기 205
저자
저자
이규보
(李奎報, 1168~1241)
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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