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주의자이다
정치망명자 김덕홍의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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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망명자 김덕홍의 회고록
1996년 2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김정일 54회 생일기념 주체사상국제토론회 당시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김정일에게 직보되었고 그 시각부터 그를 대하는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황장엽비서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었던 김덕홍과 함께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
1997년 2월 12일 황장엽비서와 김덕홍 부실장은 중국 베이징주재 한국영사관으로 정치망명을 해 필리핀을 거쳐 1997년 4월 20일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는 정치망명자 김덕홍의 회고록이다. 김덕홍부실장이 어떻게 돼서 황장엽비서를 설득하고 동행해서 남으로 정치망명하게 되었는지, 황장엽형님과 북에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넘어와 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는지, 대한민국에서 어떤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기록했다.
1996년 2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김정일 54회 생일기념 주체사상국제토론회 당시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김정일에게 직보되었고 그 시각부터 그를 대하는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황장엽비서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었던 김덕홍과 함께 정치적 망명을 시도했다.
1997년 2월 12일 황장엽비서와 김덕홍 부실장은 중국 베이징주재 한국영사관으로 정치망명을 해 필리핀을 거쳐 1997년 4월 20일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는 정치망명자 김덕홍의 회고록이다. 김덕홍부실장이 어떻게 돼서 황장엽비서를 설득하고 동행해서 남으로 정치망명하게 되었는지, 황장엽형님과 북에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넘어와 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는지, 대한민국에서 어떤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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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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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망명자 김덕홍의 회고록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인간의 탈을 쓴 공산주의 야수다
"아무래도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아. 그러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김정일에게 욕보기 전에 자살이라도 할 수 있게 독약을 구해 달라."
1996년 2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김정일 54회 생일기념 주체사상국제토론회 당시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김정일에게 직보되어 그 시각부터 그를 대하는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고 이 때문에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황장엽비서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었던 김덕홍에게 이 말을 했다. 황장엽 대한민국 정치망명 프로젝트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김덕홍과 그의 노동당 내 지기들은 "황장엽을 김정일의 손에 죽게 방치할 수 없다.", "주체사상으로 설계된 김일성공산왕조를 붕괴시키려면 황장엽 정치망명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황장엽 대한민국 정치망명을 도모했고, 황장엽이 "김덕홍이 같이 가지 않으면 남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겠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김덕홍동생이 같이 가야만 남조선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대한민국 주도의 북한자유화와 한반도통일 실현'을 명분으로 김덕홍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1997년 2월 12일 황장엽비서와 김덕홍부실장은 중국 베이징주재 한국영사관으로 정치망명을 해 필리핀을 거쳐 1997년 4월 20일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김영삼대통령 때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흘렸다. 같이 북에서 망명한 황장엽비서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고 그러고도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저자는 이제는 말해야 할게 적지 않다는 생각에 이 회고록을 집필했다고 한다.
김덕홍부실장이 어떻게 돼서 황장엽비서를 설득하고 동행해서 남으로 정치망명하게 되었는지, 황장엽형님과 북에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넘어와 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는지, 대한민국에서 어떤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하는 것들을 눈을 감기 전에 글로 남겨 북녘에 있는 동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는 또한 북한관련 연구책자, 회고록, 체험기 등이 넘쳐나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서 김일성족속,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 관련 비공개자료들을 많이 넣는 방향으로 회고록을 집필해서 '한 방울의 물에도 우주가 비낀다'는 격언 그대로 이 글을 접하는 이들이 북한의 공산세습왕조가 어떤 야망과 국가비전에 의해 수립되었고 그 3대의 전도는 어떠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고찰 예측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의도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고, 자라나는 옹근 한 세대가 기아와 영양실조로 인해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기형세대가 되고, 살아남기 위해 탈북한 수많은 여성들이 타국에서 노예로 팔려 다니는 나라.
그 인간생지옥에 군림해서 "앞으로 1천만 명이 더 굶어 죽는다 해도 당과 군대만 있으면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고 거침없이 뇌까리던 독재자 김정일.
이것이 황장엽비서와 저자가 대한민국으로 정치망명할 당시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만은 시간도 흐름을 멈추었는지 지금도 그 땅은 18년 전의 참혹한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저자는 또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불가피하게 벌려야 했던 4년간의 여권발급소송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서술했다. 참여정부를 상대로 한 4년간 법정소송에서 종당에는 대법원까지 가서야 승소하게 된 사연, 그 과정에서 기가 차고 복장이 터지는 일을 하도 수시로 당해서 참여정부 말기에 청력을 급격히 잃은 사연, 그토록 소중한 여권을 발급받자마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종래 미국방문을 하지 못한 사연 등…… 이런 사연들에 대한 심경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원래 나는 김일성족속이 '수령을 배반하고 적국으로 달아나더니, 거기서도 버림받았다.'고 야유하며 좋아하는 꼴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정치망명자인 내게 감행한 온갖 모욕, 직무유기, 부당한 압력 행위들에 대항해서 4년간이나 법적소송을 벌린 일에 대해서는 북한 정권이 붕괴되는 날까지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내가 국가를 상대로 벌린 법적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사실 역시, '권력이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참모습을 북한을 포함한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정치망명자인 내게는 미국방문을 하지 못한 그 기막힌 사연이 언젠가는 북녘의 지기들과 동지들에게 꼭 알려져야 할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에 4년간 법정소송 이야기를 이 글에 담기로 했다. 설령 이 몸이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하게 되더라도, 내가 대한민국에서 행한 자랑스러운 일들만은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안고서……."
저자는 이 회고록에서 2014년 9월 참여정부로부터 박탈당했던 명예를 회복하게 된 이야기도 감사의 마음을 안고 소상히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바램을 서술했다.
"나는 앞으로 북한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회복시켜준 명예만은 가슴 깊이 안고 갈려고 한다. 그리고 그 명예를 안고 황장엽형님을 찾아갈 생각이다. 대한민국 정치망명 후 국가권력 차원의 이간, 분리 책동으로 어쩔 수 없이 결별했지만 그곳에서는 절대로 형님의 손을 놓치 않고 그분을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 내 간절한 마음이다."
* 책속으로 추가
"조국해방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던 1953년 5월경,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밑천도 없고 해서 시급히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했는데, 미국 놈들이 계속 시간을 끌면서 정전담판장에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회의를 열고 그 문제를 토론하다가 '적들에게 크게 한방을 먹여야 회담장에 나올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내가 모택동과 주덕 앞으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카츄샤 포 20문이 필요하니 지원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거기에 나(김일성)와 최용건이 공동서명을 한 뒤, 최용건이 그것을 들고 중국을 극비 방문했다.
중국은 7월 초순에야 우리가 요청한 20문 중 10문만 내보내줬다. 우리는 그것들을 야밤에만 은밀하게 이동시켜서 7월 26일 새벽까지 개성부근 ○○○야산(지명은 기억이 안 남)에 가져다놨다. 그리고 7월 27일 새벽에 그 카츄샤 포 10문으로 있는 포탄을 몽땅 남쪽에 쏴버렸다.
그러자 미국 놈들이 그날로 담판장에 나와서 '정전협정 조인서'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그때 카츄샤 포 10문의 위력을 깊이 실감했다. 그래서 60년대에 군수공업을 일으켜 세울 때, 카츄샤 포 생산기지부터 갖추도록 조치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4p
1996년 8월, 중국출장을 마치고 평양으로 들어간 나는 그 독약을 몸에 품고 황장엽비서를 찾아갔다. 그때 그 만남에서 사회주의철학자로서의 두뇌마저도 김일성족속에게 바쳐가며 헌신한 황장엽비서에게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에로의 정치망명을 권고해야 했던 내 마음은 그 중압감으로 인해 참으로 천근만근 무거웠고 한편 너무나 슬펐다.
수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는 김정일의 싸늘하고 고압적인 압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고민할 대로 고민한 황장엽비서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날 나는 황장엽비서를 만나자마자 그의 눈을 엄숙하게 직시하며 "오늘 이 시각부터 비서동지를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무겁게 서두를 뗀 뒤, 내 마음도 굳게굳게 다듬질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291p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대한민국 정치망명 후에 기록한 일기들을 들추다가 1999년 11월 8일 황장엽형님이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 임원들 앞에서 한 다음의 말씀을 찾아냈다.
"만일 나와 김덕홍이 대한민국에 정치망명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사람들이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에는 악당들만 있었다.'고 말을 할 거야. 그러나 우리가 여기 왔기 때문에, 우리의 망명을 지지해줬던 노동당 내의 동지들이 그런 말은 듣지 않게 되었어.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족해."
형님은 우리의 정치망명 의의를 이 한마디에 여백 없이 진솔하게 담았다. 되새길수록 김일성족속과 북한체제에 관해서만은 언제나 급한 마음으로 야박하게만 살아온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306p
황장엽형님이 1997년 7월에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독약을 구해 달라. 여차하면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겠다."고 내게 심중을 밝힌 때로부터 그의 정치망명을 준비하는 전 과정에서의 나와 동지들의 확고한 결심은 "황장엽비서의 정치망명을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길만이 주체사상으로 설계된 김일성공산왕조체제라는 해적선을 가장 빨리 폐선(廢船)시키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했었다. -309p
그런 마음으로 되돌아보면 황장엽형님에게는, 76세에 노동당중앙위원회 사상 및 외교 담당비서라는 현직을 버리고 대한민국에 정치망명한 것 자체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김일성족속반대투쟁이었고 사상전향이였다. 그리고 끝까지 김정일을 증오하고 반대한 것만으로도 형님은 북한 최고위층에서 망명한 노정객으로서의 소명을 다 하셨다. 그 외의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명백한 이치를 형님이 정치망명할 당시의 나이 대에 들어서서야 알게 되었으니…….
2014년 9월 대한민국 정부 관계기관으로부터 명예회복을 통지받던 날 새벽에 나는 꿈속에서 황장엽형님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분명 "너는 그 급한 성격이 문제야. 성질을 죽여야 병도 나을 수 있어……" 하는 형님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창문을 열고 밝아오는 창천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힘껏 소리쳤다.
"형님, 진심으로 미안하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황장엽형님의 빈자리를 무겁게 느끼며 오열했다. -338p
"내가 신청한 여권발급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당시 나는 여권을 신청한 지 반년 이상이나 지났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내 물음을 들은 그는 다짜고짜 귀찮다는 표정으로 돌변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건 알아서 뭐해! 보류야 보류!"
나는,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사람이 권력을 등에 업고 반말을 탕탕 해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호되게 꾸짖었다.
"당신은 아무 사람에게나 범죄자 대하듯이 반말을 하는가? 당신의 현 직책이 어머니 배 속에서 타고난 건 줄 아는가?"
그의 작태를 통해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고 자처하는 참여정부 권력피조물들의 도덕적 자질을 거듭 실감하면서 암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353p
나는 2003년 7월부터 거의 5년간이나 미국방문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이하 국회, 국가정보원, 경찰청, 외교통상부, 국가인권위원회, 법조계 인사들에게 수백 통의 서신과 진정서를 보냈었다. 그 서신과 진정서들에서 나는, 수년째 여권발급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정부 관계기관의 불법, 비인도적 행위들을 바로 잡아줄 것을 간곡히 청원했었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한다는 그들 대다수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의 진정에 답변을 보내준 대상도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참여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민원내용을 검토하여 대통령비서실 관련이 아닌 경우, 해당부처에 이첩하여 처리하게 됩니다."
기가 막혔다. 참여정부의 해당부처가 관련문제를 해결해줬더라면 내가 왜 대통령에게까지 진정서를 보냈겠는가. -363p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인간의 탈을 쓴 공산주의 야수다
"아무래도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아. 그러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김정일에게 욕보기 전에 자살이라도 할 수 있게 독약을 구해 달라."
1996년 2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김정일 54회 생일기념 주체사상국제토론회 당시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특강을 하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김정일에게 직보되어 그 시각부터 그를 대하는 김정일의 태도가 돌변했고 이 때문에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황장엽비서는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었던 김덕홍에게 이 말을 했다. 황장엽 대한민국 정치망명 프로젝트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김덕홍과 그의 노동당 내 지기들은 "황장엽을 김정일의 손에 죽게 방치할 수 없다.", "주체사상으로 설계된 김일성공산왕조를 붕괴시키려면 황장엽 정치망명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황장엽 대한민국 정치망명을 도모했고, 황장엽이 "김덕홍이 같이 가지 않으면 남조선으로 망명하지 않겠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김덕홍동생이 같이 가야만 남조선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대한민국 주도의 북한자유화와 한반도통일 실현'을 명분으로 김덕홍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1997년 2월 12일 황장엽비서와 김덕홍부실장은 중국 베이징주재 한국영사관으로 정치망명을 해 필리핀을 거쳐 1997년 4월 20일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김영삼대통령 때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흘렸다. 같이 북에서 망명한 황장엽비서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고 그러고도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저자는 이제는 말해야 할게 적지 않다는 생각에 이 회고록을 집필했다고 한다.
김덕홍부실장이 어떻게 돼서 황장엽비서를 설득하고 동행해서 남으로 정치망명하게 되었는지, 황장엽형님과 북에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넘어와 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는지, 대한민국에서 어떤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하는 것들을 눈을 감기 전에 글로 남겨 북녘에 있는 동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는 또한 북한관련 연구책자, 회고록, 체험기 등이 넘쳐나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서 김일성족속, 특히 김일성과 김정일 관련 비공개자료들을 많이 넣는 방향으로 회고록을 집필해서 '한 방울의 물에도 우주가 비낀다'는 격언 그대로 이 글을 접하는 이들이 북한의 공산세습왕조가 어떤 야망과 국가비전에 의해 수립되었고 그 3대의 전도는 어떠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고찰 예측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의도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고, 자라나는 옹근 한 세대가 기아와 영양실조로 인해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기형세대가 되고, 살아남기 위해 탈북한 수많은 여성들이 타국에서 노예로 팔려 다니는 나라.
그 인간생지옥에 군림해서 "앞으로 1천만 명이 더 굶어 죽는다 해도 당과 군대만 있으면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고 거침없이 뇌까리던 독재자 김정일.
이것이 황장엽비서와 저자가 대한민국으로 정치망명할 당시 북한의 비참한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만은 시간도 흐름을 멈추었는지 지금도 그 땅은 18년 전의 참혹한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저자는 또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불가피하게 벌려야 했던 4년간의 여권발급소송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서술했다. 참여정부를 상대로 한 4년간 법정소송에서 종당에는 대법원까지 가서야 승소하게 된 사연, 그 과정에서 기가 차고 복장이 터지는 일을 하도 수시로 당해서 참여정부 말기에 청력을 급격히 잃은 사연, 그토록 소중한 여권을 발급받자마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종래 미국방문을 하지 못한 사연 등…… 이런 사연들에 대한 심경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원래 나는 김일성족속이 '수령을 배반하고 적국으로 달아나더니, 거기서도 버림받았다.'고 야유하며 좋아하는 꼴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서 대한민국 정부가 정치망명자인 내게 감행한 온갖 모욕, 직무유기, 부당한 압력 행위들에 대항해서 4년간이나 법적소송을 벌린 일에 대해서는 북한 정권이 붕괴되는 날까지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내가 국가를 상대로 벌린 법적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사실 역시, '권력이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자유민주주의 법치국가 대한민국의 참모습을 북한을 포함한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정치망명자인 내게는 미국방문을 하지 못한 그 기막힌 사연이 언젠가는 북녘의 지기들과 동지들에게 꼭 알려져야 할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에 4년간 법정소송 이야기를 이 글에 담기로 했다. 설령 이 몸이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하게 되더라도, 내가 대한민국에서 행한 자랑스러운 일들만은 전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안고서……."
저자는 이 회고록에서 2014년 9월 참여정부로부터 박탈당했던 명예를 회복하게 된 이야기도 감사의 마음을 안고 소상히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바램을 서술했다.
"나는 앞으로 북한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회복시켜준 명예만은 가슴 깊이 안고 갈려고 한다. 그리고 그 명예를 안고 황장엽형님을 찾아갈 생각이다. 대한민국 정치망명 후 국가권력 차원의 이간, 분리 책동으로 어쩔 수 없이 결별했지만 그곳에서는 절대로 형님의 손을 놓치 않고 그분을 지켜드리고 싶은 것이 내 간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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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던 1953년 5월경,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밑천도 없고 해서 시급히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했는데, 미국 놈들이 계속 시간을 끌면서 정전담판장에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회의를 열고 그 문제를 토론하다가 '적들에게 크게 한방을 먹여야 회담장에 나올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내가 모택동과 주덕 앞으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카츄샤 포 20문이 필요하니 지원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거기에 나(김일성)와 최용건이 공동서명을 한 뒤, 최용건이 그것을 들고 중국을 극비 방문했다.
중국은 7월 초순에야 우리가 요청한 20문 중 10문만 내보내줬다. 우리는 그것들을 야밤에만 은밀하게 이동시켜서 7월 26일 새벽까지 개성부근 ○○○야산(지명은 기억이 안 남)에 가져다놨다. 그리고 7월 27일 새벽에 그 카츄샤 포 10문으로 있는 포탄을 몽땅 남쪽에 쏴버렸다.
그러자 미국 놈들이 그날로 담판장에 나와서 '정전협정 조인서'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그때 카츄샤 포 10문의 위력을 깊이 실감했다. 그래서 60년대에 군수공업을 일으켜 세울 때, 카츄샤 포 생산기지부터 갖추도록 조치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4p
1996년 8월, 중국출장을 마치고 평양으로 들어간 나는 그 독약을 몸에 품고 황장엽비서를 찾아갔다. 그때 그 만남에서 사회주의철학자로서의 두뇌마저도 김일성족속에게 바쳐가며 헌신한 황장엽비서에게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에로의 정치망명을 권고해야 했던 내 마음은 그 중압감으로 인해 참으로 천근만근 무거웠고 한편 너무나 슬펐다.
수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는 김정일의 싸늘하고 고압적인 압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고민할 대로 고민한 황장엽비서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날 나는 황장엽비서를 만나자마자 그의 눈을 엄숙하게 직시하며 "오늘 이 시각부터 비서동지를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무겁게 서두를 뗀 뒤, 내 마음도 굳게굳게 다듬질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291p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대한민국 정치망명 후에 기록한 일기들을 들추다가 1999년 11월 8일 황장엽형님이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 임원들 앞에서 한 다음의 말씀을 찾아냈다.
"만일 나와 김덕홍이 대한민국에 정치망명하지 않았더라면 훗날 사람들이 '북한 노동당중앙위원회에는 악당들만 있었다.'고 말을 할 거야. 그러나 우리가 여기 왔기 때문에, 우리의 망명을 지지해줬던 노동당 내의 동지들이 그런 말은 듣지 않게 되었어.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족해."
형님은 우리의 정치망명 의의를 이 한마디에 여백 없이 진솔하게 담았다. 되새길수록 김일성족속과 북한체제에 관해서만은 언제나 급한 마음으로 야박하게만 살아온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306p
황장엽형님이 1997년 7월에 "김정일이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독약을 구해 달라. 여차하면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겠다."고 내게 심중을 밝힌 때로부터 그의 정치망명을 준비하는 전 과정에서의 나와 동지들의 확고한 결심은 "황장엽비서의 정치망명을 반드시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길만이 주체사상으로 설계된 김일성공산왕조체제라는 해적선을 가장 빨리 폐선(廢船)시키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했었다. -309p
그런 마음으로 되돌아보면 황장엽형님에게는, 76세에 노동당중앙위원회 사상 및 외교 담당비서라는 현직을 버리고 대한민국에 정치망명한 것 자체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김일성족속반대투쟁이었고 사상전향이였다. 그리고 끝까지 김정일을 증오하고 반대한 것만으로도 형님은 북한 최고위층에서 망명한 노정객으로서의 소명을 다 하셨다. 그 외의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명백한 이치를 형님이 정치망명할 당시의 나이 대에 들어서서야 알게 되었으니…….
2014년 9월 대한민국 정부 관계기관으로부터 명예회복을 통지받던 날 새벽에 나는 꿈속에서 황장엽형님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분명 "너는 그 급한 성격이 문제야. 성질을 죽여야 병도 나을 수 있어……" 하는 형님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창문을 열고 밝아오는 창천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힘껏 소리쳤다.
"형님, 진심으로 미안하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황장엽형님의 빈자리를 무겁게 느끼며 오열했다. -338p
"내가 신청한 여권발급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당시 나는 여권을 신청한 지 반년 이상이나 지났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내 물음을 들은 그는 다짜고짜 귀찮다는 표정으로 돌변하면서 호통을 쳤다.
"그건 알아서 뭐해! 보류야 보류!"
나는,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사람이 권력을 등에 업고 반말을 탕탕 해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호되게 꾸짖었다.
"당신은 아무 사람에게나 범죄자 대하듯이 반말을 하는가? 당신의 현 직책이 어머니 배 속에서 타고난 건 줄 아는가?"
그의 작태를 통해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고 자처하는 참여정부 권력피조물들의 도덕적 자질을 거듭 실감하면서 암담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353p
나는 2003년 7월부터 거의 5년간이나 미국방문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이하 국회, 국가정보원, 경찰청, 외교통상부, 국가인권위원회, 법조계 인사들에게 수백 통의 서신과 진정서를 보냈었다. 그 서신과 진정서들에서 나는, 수년째 여권발급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정부 관계기관의 불법, 비인도적 행위들을 바로 잡아줄 것을 간곡히 청원했었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한다는 그들 대다수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그나마 나의 진정에 답변을 보내준 대상도 몇 군데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참여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민원내용을 검토하여 대통령비서실 관련이 아닌 경우, 해당부처에 이첩하여 처리하게 됩니다."
기가 막혔다. 참여정부의 해당부처가 관련문제를 해결해줬더라면 내가 왜 대통령에게까지 진정서를 보냈겠는가. -363p
목차
목차
머리말
1장 가족이야기
아버지의 가훈
어릴 적 포부
어머니의 뒷모습
어머니의 신통한 명언들
아내 박봉실
2장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출신성분의 장벽
김일성공산정권의 부조리를 깨쳐준 군복무
당 역사연구소의 신의주학생사건 파일 중에서
3장 20년간 몸담았던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대학교무부 보조부원
북한의 대학입학생 선발 및 대학졸업생 배치 시스템
김일성의 첫 표상, 김정일의 첫 인상
1974년 이전과 이후의 종합대학 풍경
1976년 김일성종합대학 대열정비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북한대학생들의 6개월 현역 군사복무
김일성의 자식, 조카들
4장 김일성족속 신격화에 얽힌 비공개이야기
홍명희와 김일성의 뱃전담소 사진의 진실
사람 하나 지도자로 만드는 거, 일도 아니더라
5장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최고권력기구 노동당중앙위원회에 들어가다.
북한 당중앙위원회의 조직체계와 각 부서의 직능
김일성왕조실록의 보고(寶庫) 노동당 당 역사연구소
1973~1993년 김일성
평생 김정일을 얽어맨 세습지도자 콤플렉스
김정일의 비상식, 비정상적 인성
김일성족속이 수립한 거대한 공산차별국가
북한의 3계층 64부류 주민성분제도 분류도
6장 김일성족속이 망친 북한경제
개탄스런 김일성의 무지와 오기
인민경제를 파산지경에 몰아넣은 김정일 문서정치
70년대에 이미 인민경제를 포기한 김일성족속
승용차와 김정일
견본경제로 김일성을 지독하게 기망한 김정일
대외경제무역 관련 일화들
7장 대남적화야망에 얽힌 김일성족속의 한
김일성이 회고한 성시백
김일성과 이선실
최용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김일(박덕산)은 서울에서 골동품 수집만 하다가 후퇴했다
탱크 수십 대에 서린 김일성의 한
아식보총 10만정에 서린 김일성의 탄식
카츄샤 포 10문으로 정전협정을 마무리하다
박정희한테 속았다는 김일성
전두환에게 넘어갔다는 김정일
김정일의 김일성 참회교시 삭제 지시
일본인 납치도 남조선혁명 때문에 했다는 김정일
남편이 빨리 죽기를 기도하는 평양의 대남가족들
8장 김일성족속의 범죄야망의 산물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노동당이 평화통일 목소리를 높일수록 전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
"나쁜 놈들, 밥만 축내고 간다"
내 평생소원이 풀리는 날
"연막전술, 저팔개 외교로 핵도 사수하고 실리도 챙겨라"
일본을 사정권에 넣으면 '금(金) 방석'에 앉혀주겠다
남조선부품과 적개심
중거리로켓과 금(金)방석
"이것만 개발하면 우리 국방과학자들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반미 국가와 단체, 분쟁지역에 다 뚫고 들어가 팔아야 한다"
9장 김일성의 말년 스토리 몇 가지
무정은 종파가 아니다
현무광은 일제 때 평천리 병기수리소 기술자였다
전병호는 나와 김정숙이 키운 사람
군수공장이 다 멎어도 탄(彈) 공장만은 돌려야 한다.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본 인민의 모습
10장 김일성 급사 후 약 1년간의 김정일
김일성의 금고이야기
내게서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말라
슬픔을 혁명적 낙관으로 바꿔라
김명화는 말년에 김일성께 심려만 끼쳤다
"농업대회? 그거 걷어치워라!"
"누가 그 여자 오빠야!"
11장 정치망명의 길에 오르다
정치망명을 결심하다
1997년 2월 12일 정치망명전야에
북녘에 두고 온 염원
동지들 생각
12장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조선(造船)한 사람이 폐선(廢船)해야 한다!
정치망명 초기의 논쟁
음산한 해의 음산한 순간들
형님에 대한 평가는 오직 북한인민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개인이 아니다
스승 김종성선생의 충고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13장 여권발급을 위한 법정소송 4년
북한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방문을 허용할 수 없다
권력의 피조물들
국가정보원의 사악한 '개인 신변안전보장각서' 요구
국가정보원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공모결탁
나는 끝까지 기다렸다
14장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이다
소중한 만남들
헬렌 루이스 헌터 여사와의 인연
스티븐 솔라즈 전 미하원 의원과의 인연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 일행과의 만남
민주주의면 됐지, 꼭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명예회복
15장 비운의 세습지도자 김정은
신격화될 수 없는 김정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김정은
주민통제시스템을 회복할 길이 없는 김정은
경제를 회생시킬 길이 없는 김정은
핵, 미사일 때문에 종당에는 붕괴위기에 직면하게 될 김정은
로드먼이 첫 해외파트너, 외국의 벗이 된 김정은
김일성환생 이미지로 북한을 이끌어야 하는 불우한 김정은
1장 가족이야기
아버지의 가훈
어릴 적 포부
어머니의 뒷모습
어머니의 신통한 명언들
아내 박봉실
2장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출신성분의 장벽
김일성공산정권의 부조리를 깨쳐준 군복무
당 역사연구소의 신의주학생사건 파일 중에서
3장 20년간 몸담았던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대학교무부 보조부원
북한의 대학입학생 선발 및 대학졸업생 배치 시스템
김일성의 첫 표상, 김정일의 첫 인상
1974년 이전과 이후의 종합대학 풍경
1976년 김일성종합대학 대열정비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북한대학생들의 6개월 현역 군사복무
김일성의 자식, 조카들
4장 김일성족속 신격화에 얽힌 비공개이야기
홍명희와 김일성의 뱃전담소 사진의 진실
사람 하나 지도자로 만드는 거, 일도 아니더라
5장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최고권력기구 노동당중앙위원회에 들어가다.
북한 당중앙위원회의 조직체계와 각 부서의 직능
김일성왕조실록의 보고(寶庫) 노동당 당 역사연구소
1973~1993년 김일성
평생 김정일을 얽어맨 세습지도자 콤플렉스
김정일의 비상식, 비정상적 인성
김일성족속이 수립한 거대한 공산차별국가
북한의 3계층 64부류 주민성분제도 분류도
6장 김일성족속이 망친 북한경제
개탄스런 김일성의 무지와 오기
인민경제를 파산지경에 몰아넣은 김정일 문서정치
70년대에 이미 인민경제를 포기한 김일성족속
승용차와 김정일
견본경제로 김일성을 지독하게 기망한 김정일
대외경제무역 관련 일화들
7장 대남적화야망에 얽힌 김일성족속의 한
김일성이 회고한 성시백
김일성과 이선실
최용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김일(박덕산)은 서울에서 골동품 수집만 하다가 후퇴했다
탱크 수십 대에 서린 김일성의 한
아식보총 10만정에 서린 김일성의 탄식
카츄샤 포 10문으로 정전협정을 마무리하다
박정희한테 속았다는 김일성
전두환에게 넘어갔다는 김정일
김정일의 김일성 참회교시 삭제 지시
일본인 납치도 남조선혁명 때문에 했다는 김정일
남편이 빨리 죽기를 기도하는 평양의 대남가족들
8장 김일성족속의 범죄야망의 산물들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습니다"
"노동당이 평화통일 목소리를 높일수록 전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
"나쁜 놈들, 밥만 축내고 간다"
내 평생소원이 풀리는 날
"연막전술, 저팔개 외교로 핵도 사수하고 실리도 챙겨라"
일본을 사정권에 넣으면 '금(金) 방석'에 앉혀주겠다
남조선부품과 적개심
중거리로켓과 금(金)방석
"이것만 개발하면 우리 국방과학자들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반미 국가와 단체, 분쟁지역에 다 뚫고 들어가 팔아야 한다"
9장 김일성의 말년 스토리 몇 가지
무정은 종파가 아니다
현무광은 일제 때 평천리 병기수리소 기술자였다
전병호는 나와 김정숙이 키운 사람
군수공장이 다 멎어도 탄(彈) 공장만은 돌려야 한다.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본 인민의 모습
10장 김일성 급사 후 약 1년간의 김정일
김일성의 금고이야기
내게서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말라
슬픔을 혁명적 낙관으로 바꿔라
김명화는 말년에 김일성께 심려만 끼쳤다
"농업대회? 그거 걷어치워라!"
"누가 그 여자 오빠야!"
11장 정치망명의 길에 오르다
정치망명을 결심하다
1997년 2월 12일 정치망명전야에
북녘에 두고 온 염원
동지들 생각
12장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조선(造船)한 사람이 폐선(廢船)해야 한다!
정치망명 초기의 논쟁
음산한 해의 음산한 순간들
형님에 대한 평가는 오직 북한인민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개인이 아니다
스승 김종성선생의 충고
지금에야 이해되는 황장엽, 그리고 그리움
13장 여권발급을 위한 법정소송 4년
북한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방문을 허용할 수 없다
권력의 피조물들
국가정보원의 사악한 '개인 신변안전보장각서' 요구
국가정보원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공모결탁
나는 끝까지 기다렸다
14장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이다
소중한 만남들
헬렌 루이스 헌터 여사와의 인연
스티븐 솔라즈 전 미하원 의원과의 인연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국대사 일행과의 만남
민주주의면 됐지, 꼭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명예회복
15장 비운의 세습지도자 김정은
신격화될 수 없는 김정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김정은
주민통제시스템을 회복할 길이 없는 김정은
경제를 회생시킬 길이 없는 김정은
핵, 미사일 때문에 종당에는 붕괴위기에 직면하게 될 김정은
로드먼이 첫 해외파트너, 외국의 벗이 된 김정은
김일성환생 이미지로 북한을 이끌어야 하는 불우한 김정은
저자
저자
김덕홍
저자 김덕홍은
1939년 1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출생
경력
1958.9~1961.8. 조선인민경비대 복무
1961.9~1965.8.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
1965.9~1981.9. 김일성종합대학 교무부 지도원 및 책임지도교원
1981.10~1994.3. 노동당중앙위원회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서기(당중앙위원회
부과장급)
1994.4~1997.2.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
1997년 2월 12일, 대한민국 정치망명
1998~2003.8.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 회장
2014. 9.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비상근 고문
1939년 1월 22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출생
경력
1958.9~1961.8. 조선인민경비대 복무
1961.9~1965.8.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
1965.9~1981.9. 김일성종합대학 교무부 지도원 및 책임지도교원
1981.10~1994.3. 노동당중앙위원회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서기(당중앙위원회
부과장급)
1994.4~1997.2. 노동당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
1997년 2월 12일, 대한민국 정치망명
1998~2003.8.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 상임고문
사단법인 탈북자동지회 회장
2014. 9. 국가안보전략연구소 비상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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