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개정증보판)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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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한미방호상호조약과 ‘반공 선민주의’,
중임 제한 폐지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민국당 자유민주파가 만든 민주당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중임 제한 폐지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민국당 자유민주파가 만든 민주당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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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5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인은 아직도 6·25 전쟁 시절을 살 듯이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 전쟁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은 개화기에서부터 개발독재 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층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모든 공적(公的) 체제 자체에 불신을 갖게끔 만든 건 물론이고 생존을 위해 사적(私的)인 연고와 정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시절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고 사적인 '줄'과 '빽'을 신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보다 투자 수익성이 높고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게 있겠는가? 이런 이치를 모르면 한국의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생존 투쟁'이요 '계급 투쟁'이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6·25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낳은 소용돌이는 많은 지식인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6·25 전쟁은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낳은 그 전쟁이 영원히 악마의 저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악마의 저주란 말인가? 그런데 6·25 전쟁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 마땅한 일이었는가 하는 의문과 관련된 것이다. 기록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는 6·25 전쟁 중 특별히 전쟁의 고통이라고 할 만한 걸 겪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마을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6ㆍ25 전쟁에서 4ㆍ19 혁명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50~1952년, 제2권은 1953~1955년, 제3권은 1956~195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6·25 전쟁은 '이원(二元) 전쟁'이었다. 군인들끼리 싸운 전쟁이 그 하나라면 또 하나의 전쟁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저질러졌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근·현대사의 역사적 모순과 질곡의 표현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램지 클라크는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며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일 뿐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1999년 9월 AP통신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후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있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는 것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6·25 전쟁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행되어왔다. 북진통일 궐기대회가 판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오직 빨갱이에 의해 죽었을 때에만 그 진상규명이 허용되고 장려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진상규명은 반역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신문사를 습격하건, 법원에 난입하건, 공공집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건, 정치인을 백주에 테러하건, '반공용사'들이 했다고 하면 붙잡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건 '나는 반공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4·19 직후, 6·25 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유족들의 신고를 바탕으로 114만 명이 국군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야 했다. 이후 이들은 입을 닫아야 했고,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의 반공, 친미, 기복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반공의 보증수표'가 부도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반공의 전선에 앞장섰다. 예컨대,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월 26일 서울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단체인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고 7월 3일 대전에서 목사 한경직이 앞장서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남한 지역 30개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방부·사회부와 협력해 선무와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 반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남한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기독교 의용대'라는 단기 군사훈련을 거쳐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단순한 참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하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그 논리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특히 한경직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대한기독교구국회 회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참여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반공은 곧 친미를 의미하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6·25 전쟁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기복은 이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었겠지만, 죽을 염려는 피한 전후의 잿더미에서는 좀더 현실적인, 즉 물질적인 복을 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여의치 않았다. 기복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되어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 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한국일보』 창간과 기독교방송 개국
1954년 6월 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한 『한국일보』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호 사설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상업신문의 길을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사주는 은행가 출신으로서 2년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장기영이었다. 그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 그가 『조선일보』를 맡은 후 1년 동안 발행 부수는 350%가 늘어났고, 지대 수입은 640%, 광고 수입은 518%가 늘어났지만, 그의 개성이 강한 운영 방식과 독자적인 영향력 구축이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고 중도 퇴임했다. 장기영은 『조선일보』를 그만둔 지 2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태양일보』를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장기영은 국내 최초로 1954년 8월 1일 기자 제1기 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
1954년 12월 15일에 첫 전파를 발사한 기독교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이 되었다. 원래 기독교방송은 1949년에 정식으로 방송국 설립 승인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설립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설립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의 국장은 미국인 선교사 감의도였다. 기독교방송의 탄생은 감의도가 미국 선교 본부에서 5킬로와트 송신기와 부속 일체를 발주 받고 방송국의 운영에 소요되었던 모든 자금은 미국 뉴욕에 있는 기독교단체 '라디오, 시각 교육 및 대중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순일은 "기독교방송이 청취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우선 그 깨끗한 음질이었다. 국영 KBS가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는 구할 수 없던 LP판을 미국에서 기증 받아와서 틀어제끼니 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1957년 10월 말 현재 55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쟁 미망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미망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가 시사하듯이 그들의 타락 가능성만을 염려하는 사회적 담론이 무성하게 일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도 이른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충량은 월간 『여성계』 1955년 9월호에 쓴 글에서 "동족 사이의 난륜은 더 큰 사회 범죄의 온상"이며 "정욕을 참지 못하려면 차라리 개가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고 명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전쟁 미망인의 위험한 성을 재혼을 통해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정충량은 성공 사례를 거론하면서 자녀가 있더라도 전쟁 미망인의 재혼이 가능함을 역설했다.
1955년 12월 10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미망인이 거센 세파를 헤치고 살아간다는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미망인이 수절하며 거센 세파를 헤쳐나가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가 장덕조는 월간 『여원』 1956년 3월호에 쓴 글에서 '자녀를 가지지 않은 미망인'은 연애를 하거나 재혼을 할 것을 인정하거나 권장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자녀가 있는 미망인'은 연애나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모성의 보호와 모권 확립의 문제, 즉 자녀가 받게 될 심리적 충격과 가정교육 등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사회가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고 외쳐대는 선전·선동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강한 어머니'의 탄생이었다.
한국인은 아직도 6·25 전쟁 시절을 살 듯이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 전쟁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 있다. 그것은 개화기에서부터 개발독재 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배층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모든 공적(公的) 체제 자체에 불신을 갖게끔 만든 건 물론이고 생존을 위해 사적(私的)인 연고와 정실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었던 시절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고 사적인 '줄'과 '빽'을 신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적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보다 투자 수익성이 높고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게 있겠는가? 이런 이치를 모르면 한국의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생존 투쟁'이요 '계급 투쟁'이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6·25 전쟁을 겪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이 낳은 소용돌이는 많은 지식인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6·25 전쟁은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된, 말과 글로 다할 수 없는 끔찍한 비극을 낳은 그 전쟁이 영원히 악마의 저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악마의 저주란 말인가? 그런데 6·25 전쟁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 마땅한 일이었는가 하는 의문과 관련된 것이다. 기록으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역과 사람에 따라서는 6·25 전쟁 중 특별히 전쟁의 고통이라고 할 만한 걸 겪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마을에 들어온 북한 인민군 병사들이 친절하기까지 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6ㆍ25 전쟁에서 4ㆍ19 혁명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50~1952년, 제2권은 1953~1955년, 제3권은 1956~195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6·25 전쟁은 '이원(二元) 전쟁'이었다. 군인들끼리 싸운 전쟁이 그 하나라면 또 하나의 전쟁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군과 경찰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저질러졌기 때문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근·현대사의 역사적 모순과 질곡의 표현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램지 클라크는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잃어버린 전쟁'으로 불린다"며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0%가 넘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전쟁을 국제사회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일 뿐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이기도 하다. 1999년 9월 AP통신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후 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있었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밝히는 것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6·25 전쟁 이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수행되어왔다. 북진통일 궐기대회가 판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오직 빨갱이에 의해 죽었을 때에만 그 진상규명이 허용되고 장려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진상규명은 반역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신문사를 습격하건, 법원에 난입하건, 공공집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건, 정치인을 백주에 테러하건, '반공용사'들이 했다고 하면 붙잡지 않았"고,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건 '나는 반공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 하면 그것에 저항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4·19 직후, 6·25 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진상규명에 나선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유족들의 신고를 바탕으로 114만 명이 국군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보고서를 냈는데,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야 했다. 이후 이들은 입을 닫아야 했고, 4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독교의 반공, 친미, 기복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이라는 '반공의 보증수표'가 부도날 염려가 없을 정도로 반공의 전선에 앞장섰다. 예컨대, 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인 6월 26일 서울에서는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단체인 '대한기독교구제회'가 조직되었고 7월 3일 대전에서 목사 한경직이 앞장서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남한 지역 30개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국방부·사회부와 협력해 선무와 구호, 방송, 의용대 모집 등 반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선무공작대'를 조직해 남한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기독교 의용대'라는 단기 군사훈련을 거쳐 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 기독교 지도자와 신자들은 단순한 참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하며 정당성을 부여했다. 물론 그 논리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특히 한경직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대한기독교구국회 회장으로서 군복을 입고 참여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반공은 곧 친미를 의미하고 친미는 곧 친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6·25 전쟁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기복은 이에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전쟁 중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복이었겠지만, 죽을 염려는 피한 전후의 잿더미에서는 좀더 현실적인, 즉 물질적인 복을 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여의치 않았다. 기복 신앙은 전후의 잿더미와 비교되어 엄청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을 닮고 자본주의 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동경과 숭배, 물질에 대한 한의 종교적 표현이 바로 기복 신앙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기복 신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한국의 기복 신앙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었다.
『한국일보』 창간과 기독교방송 개국
1954년 6월 9일 공식적으로 상업주의를 표방한 『한국일보』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호 사설에서 "'리얼리즘'에 입각한 상업신문의 길을 개척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일보』의 사주는 은행가 출신으로서 2년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던 장기영이었다. 그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 그가 『조선일보』를 맡은 후 1년 동안 발행 부수는 350%가 늘어났고, 지대 수입은 640%, 광고 수입은 518%가 늘어났지만, 그의 개성이 강한 운영 방식과 독자적인 영향력 구축이 방씨 일가와 갈등을 빚어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고 중도 퇴임했다. 장기영은 『조선일보』를 그만둔 지 2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태양일보』를 인수해 『한국일보』를 창간했다. 장기영은 국내 최초로 1954년 8월 1일 기자 제1기 6명을 공채한 이후 정기적으로 기자를 공개 채용해 다른 신문사에 이러한 관행을 퍼뜨렸다.
1954년 12월 15일에 첫 전파를 발사한 기독교방송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이 되었다. 원래 기독교방송은 1949년에 정식으로 방송국 설립 승인을 받았으나 전쟁으로 설립이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설립 허가를 받아 개국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방송의 국장은 미국인 선교사 감의도였다. 기독교방송의 탄생은 감의도가 미국 선교 본부에서 5킬로와트 송신기와 부속 일체를 발주 받고 방송국의 운영에 소요되었던 모든 자금은 미국 뉴욕에 있는 기독교단체 '라디오, 시각 교육 및 대중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순일은 "기독교방송이 청취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우선 그 깨끗한 음질이었다. 국영 KBS가 쥐꼬리만 한 예산으로는 구할 수 없던 LP판을 미국에서 기증 받아와서 틀어제끼니 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1957년 10월 말 현재 55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전쟁 미망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였지만, '미망인'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가 시사하듯이 그들의 타락 가능성만을 염려하는 사회적 담론이 무성하게 일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도 이른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충량은 월간 『여성계』 1955년 9월호에 쓴 글에서 "동족 사이의 난륜은 더 큰 사회 범죄의 온상"이며 "정욕을 참지 못하려면 차라리 개가하는 편이 훨씬 떳떳하고 명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전쟁 미망인의 위험한 성을 재혼을 통해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정충량은 성공 사례를 거론하면서 자녀가 있더라도 전쟁 미망인의 재혼이 가능함을 역설했다.
1955년 12월 10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미망인이 거센 세파를 헤치고 살아간다는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미망인이 수절하며 거센 세파를 헤쳐나가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가 장덕조는 월간 『여원』 1956년 3월호에 쓴 글에서 '자녀를 가지지 않은 미망인'은 연애를 하거나 재혼을 할 것을 인정하거나 권장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자녀가 있는 미망인'은 연애나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모성의 보호와 모권 확립의 문제, 즉 자녀가 받게 될 심리적 충격과 가정교육 등을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사회가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고 외쳐대는 선전·선동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결국 '강한 어머니'의 탄생이었다.
목차
목차
제1부 1953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제1장 : 보릿고개와 인플레이션
초근목피의 고통 · 19 절량농가의 입도선매 · 20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개혁 · 21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소용돌이' · 24
제2장 : '스탈린 사망'에서 '북진궐기대회'까지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체결 · 27 핵무기 사용 검토, 관개용 댐 폭격 · 29 선교사의 폭격 아이디어 제공 · 31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 · 32 "통일 없는 휴전은 3천만의 죽음" · 34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36
제3장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에버레디 작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 40 세계를 경악시킨 반공포로 석방 · 42 휴전을 원한 북한과 중국 · 44 38선 근처의 '땅따먹기 싸움' · 46 조병옥이 당한 '기괴한 일' · 47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 49
제4장 : 휴전: '반공이 아닌, 반한을 위한 전쟁'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 51 전 인구의 10분의 1을 죽인 전쟁 · 53 미국의 놀라운 풍요가 낳은 재앙 · 55 "지금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가 아니다" · 57 미국과 세계 경제를 구원한 전쟁 · 59 일본엔 축복이 된 전쟁 · 62
역사 산책 1 왜 육사 필수과목에서 6·25 전쟁사가 빠졌는가? · 65
제5장 : 민간인 학살: 끝나지 않은 전쟁
골로 간 사람들 · 68 "어느 쪽으로 갈지 가르쳐주십시오" · 70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유골 · 72 "'100만 명 학살' 진상 왜 밝히지 않나" · 74
제6장 : 포로 송환: '광장'과 '밀실'의 와중에서
포로 송환 이후의 갈등과 진통 · 78 인도행 배를 탄 '76인의 포로들' · 80 최인훈의 「광장」 · 82 이명준의 남북한 비판 · 83 조창호와 전용일 · 85
제7장 : 김일성의 남로당파 숙청
남북한에 구축된 강력한 국가 · 86 북한의 '자기 정당화' 게임 · 87 스탈린식 정치 재판극 · 88
제8장 :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반공 선민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 92 리처드 닉슨의 방한 · 94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 95 이승만은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 · 96
제9장 : 유엔 마담·꿀꿀이죽·비로도
상이군인·고아·미망인 · 98 '양공주'는 '독버섯'이었는가? · 100 미군부대 쓰레기장을 뒤지던 안정효의 추억 · 102 손창섭의 '자기 모독적 소설' · 104 '비로도'에 얽힌 박완서의 추억 · 106 매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 108 '사랑방'에서 '다방'으로 · 111 〈굳세어라 금순아〉 · 113 전쟁 기간 중의 축구 · 115
제10장 : 샌프란시스코: 동경과 숭배 대상으로서 미국
이승만은 숭미주의의 선봉 · 118 '샌프란시스코'는 마력적인 상징 · 120 'PX 경제' 체제하의 삶 · 122 초콜릿·껌·우유가루 · 125 교회는 '샌프란시스코'의 관문 · 126
제11장 : 기독교: 반공·친미·기복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 128 기독교는 '반공의 보증수표' · 131 공산주의자는 사탄·마귀·악마 · 132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앙 · 134
제12장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전쟁이 삶의 철학과 처세술에 미친 영향 · 137 물질에 의한 과잉 보상 의지 · 139 신분제와 도덕 체계의 해체 · 141 파벌 사회에 중간은 없다 · 143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 145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 · 147
제13장 : 월남과 월북: 두 개의 생존방식
월남자들의 월남 동기 · 150 자기 입증을 위한 전투적 반공 · 152 월북자 가족들의 '숨죽이기' · 155 "세월이 원망스럽다" · 157 이문구와 이문열의 각기 다른 삶 · 158
제2부 1954년: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제1장 :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
족청계의 자유당 장악 · 163 이기붕 체제로 개편된 자유당 · 165 '일민주의'를 외친 안호상의 시련 · 167 김성주 살해 사건 · 169
제2장 : 제3대 총선: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위하여 · 173 조봉암과 신익희의 시련 · 174 조병옥·김두한·김영삼의 당선 · 176 목포 무소속 후보 김대중의 낙선 · 178
제3장 : 이승만의 방미: 불행한 방문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회의 · 180 이승만,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다 · 183 "미국은 한국을 공산 침략자에게 팔지 말라!"· 185 '반공=도의' 교육 강화 · 187
제4장 : 중임 제한 폐지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국민 78.8%가 반대한 초대 대통령 연임 · 189 '뉴델리 밀담설' 매카시즘 바람 · 190 서울대 교수들이 제공한 '사사오입' 논리 · 193 민국당에 희망은 없었다 · 194 '불온문서 투입 사건' 공작 · 196
제5장 : '자유부인'과 '허벅다리 부인'
'자유부인' 사건 · 199 "불순 세력의 공작비를 받고 쓴 게 아닌가?" · 202 '자유부인' 사건의 진실 · 204 열녀·효부·절부 표창 운동 · 206
제6장 : 이승만이 일으킨 한글 간소화 파동
지당·낙루·병신 장관 · 208 북한의 한글 전용에 대한 반동 · 210 이승만은 1904년에 미국으로 갔다 · 211 '전문적인 과학자'와 '국가 권력자' 간의 싸움 · 213
제7장 : 『한국일보』 창간, 기독교방송 개국
신문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권력기관 · 215 불발로 끝난 신문 정비론 · 217 상업주의를 표방한 신문의 창간 · 219 영원히 사라질 뻔한 '조선일보'라는 제호 · 221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 탄생 · 223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신 · 226
제8장 : 문학: 예술원·펜클럽·실존주의
관제 예술원 창립 · 229 정치판 못지않은 '문단 정치' · 231 지식계를 휩쓴 실존주의 바람 · 233 청계천은 '한국의 쎄느강' · 235
제9장 : 군복 강도·졸업식·카투사·월드컵
군복 착용 강도의 횡행 · 237 졸업식 꽃다발 유행 · 240 카투사는 '6·25 전쟁이 낳은 기형아'? · 242 꿀벌 150만 마리 보내온 '노아의 방주' · 245 스위스 월드컵의 감격과 충격 · 246
제3부 1955년: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
제1장 : 이승만은 '예수나 석가와 같은 성자'
3월 26일은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 · 251 이승만은 '세기의 태양' · 252 이승만은 '현대의 성자' · 254 이승만은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 255 자유당은 '내시 정당' · 257
제2장 : 반둥회의: 평화공존은 친공인가?
평화공존·비동맹·반식민주의·민족자결주의 · 260 비동맹은 "남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 · 262 이승만의 반둥회의 비난 · 263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사건 · 265
제3장 : 반일운동과 반공운동의 결합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 · 267 미국이 주선한 한일회담 개최· 269 5·20 총선을 앞둔 반일주의 · 271 북진통일 궐기대회 · 273 일본과 북한의 연대 남침 음모? · 275 반일과 반공의 상충 · 277
제4장 : "학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체코·폴란드 물러가라" 시위 운동 · 279 대구 매일신문사 테러 사건 · 282 『매일신문』이 1만 부를 돌파한 이유 · 283
제5장 : 민국당 자유민주파가 만든 민주당
쟁점으로 불거진 조봉암 참여 문제 · 286 조병옥·장면·김준연의 반대 · 288 민주당 창당과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 구성 · 289
제6장 : '괴뢰 이승만' 사건과 『사상계』의 활약
『동아일보』의 '오식 사건' · 292 '大統領'을 '犬統領'으로 오식한 '견통령' 사건 · 294 청소년 대상 잡지 『학원』의 인기 · 295 '자유'와 '민권'을 내세운 장준하의 『사상계』 · 297 장준하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과 옹호 · 299
제7장 : 군: 부정부패의 창궐
리영희가 느꼈던 울분 · 301 사바사바·후생사업·송충이 · 302 1955년은 '군내 부정의 대표적인 해' · 305 정치자금 조달용 부정부패 · 307 상급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폐습 · 309
제8장 : 불교: 정화인가, 법난인가?
대처승 대 비구승 · 312 이승만, "대처승은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 · 313 단식·시위·법원 난입·유혈난투극·할복자살 · 315 불교계의 정치적 예속성 심화 · 317 종교의 정치적 도구화 · 320
제9장 : 박인수 사건: '숫처녀 논쟁'
"70여 명 중 처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322 2002년의 '박인수 재판 논쟁' · 324 "왜 여성의 정조만을 문제삼는가" · 326 "서울의 숫처녀는 불과 60%도 못 된다" · 327
제10장 :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전쟁 미망인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 · 331 영화 〈미망인〉과 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 · 333 '미망인, 너 죽어라'? · 334 사회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대응 · 337 강한 어머니, 약한 여성 · 338 '자궁 가족'이란 무엇인가? · 340
제11장 : 〈피아골〉·〈아리조나 카우보이〉·국민 명랑화 운동
〈춘향전〉과 〈피아골〉 · 343 대중가요의 미국 지향성 · 345 "명랑한 도시를 만들게끔 노력하겠다" · 347 "향락에 탐닉하는 크리스마스" 비판 · 348
제12장 : 박태선·문선명·나운몽, 신흥종교 번성
민중의 이상향 갈구 · 352 권력과 유착된 기독교 · 353 신흥종교의 성장 · 354 전도관 신도의 89%가 개신교인 · 357
제13장 : 도시화·베이비붐·결혼식장·박인환·노동귀족
도시화와 서울 집중 · 359 '씨받이 면회'와 '베이비붐' · 361 깡통을 매달고 달린 결혼식 카퍼레이드 · 363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365 '노동귀족' 비판 · 368
주 · 370
제1장 : 보릿고개와 인플레이션
초근목피의 고통 · 19 절량농가의 입도선매 · 20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개혁 · 21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소용돌이' · 24
제2장 : '스탈린 사망'에서 '북진궐기대회'까지
'포로교환에 관한 협정' 체결 · 27 핵무기 사용 검토, 관개용 댐 폭격 · 29 선교사의 폭격 아이디어 제공 · 31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 · 32 "통일 없는 휴전은 3천만의 죽음" · 34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36
제3장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에버레디 작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 40 세계를 경악시킨 반공포로 석방 · 42 휴전을 원한 북한과 중국 · 44 38선 근처의 '땅따먹기 싸움' · 46 조병옥이 당한 '기괴한 일' · 47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 49
제4장 : 휴전: '반공이 아닌, 반한을 위한 전쟁'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 · 51 전 인구의 10분의 1을 죽인 전쟁 · 53 미국의 놀라운 풍요가 낳은 재앙 · 55 "지금은 한국인으로 태어날 때가 아니다" · 57 미국과 세계 경제를 구원한 전쟁 · 59 일본엔 축복이 된 전쟁 · 62
역사 산책 1 왜 육사 필수과목에서 6·25 전쟁사가 빠졌는가? · 65
제5장 : 민간인 학살: 끝나지 않은 전쟁
골로 간 사람들 · 68 "어느 쪽으로 갈지 가르쳐주십시오" · 70 유족이 나타나지 않는 유골 · 72 "'100만 명 학살' 진상 왜 밝히지 않나" · 74
제6장 : 포로 송환: '광장'과 '밀실'의 와중에서
포로 송환 이후의 갈등과 진통 · 78 인도행 배를 탄 '76인의 포로들' · 80 최인훈의 「광장」 · 82 이명준의 남북한 비판 · 83 조창호와 전용일 · 85
제7장 : 김일성의 남로당파 숙청
남북한에 구축된 강력한 국가 · 86 북한의 '자기 정당화' 게임 · 87 스탈린식 정치 재판극 · 88
제8장 :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반공 선민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 92 리처드 닉슨의 방한 · 94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 · 95 이승만은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 · 96
제9장 : 유엔 마담·꿀꿀이죽·비로도
상이군인·고아·미망인 · 98 '양공주'는 '독버섯'이었는가? · 100 미군부대 쓰레기장을 뒤지던 안정효의 추억 · 102 손창섭의 '자기 모독적 소설' · 104 '비로도'에 얽힌 박완서의 추억 · 106 매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 · 108 '사랑방'에서 '다방'으로 · 111 〈굳세어라 금순아〉 · 113 전쟁 기간 중의 축구 · 115
제10장 : 샌프란시스코: 동경과 숭배 대상으로서 미국
이승만은 숭미주의의 선봉 · 118 '샌프란시스코'는 마력적인 상징 · 120 'PX 경제' 체제하의 삶 · 122 초콜릿·껌·우유가루 · 125 교회는 '샌프란시스코'의 관문 · 126
제11장 : 기독교: 반공·친미·기복
기독교를 지키기 위한 전쟁 · 128 기독교는 '반공의 보증수표' · 131 공산주의자는 사탄·마귀·악마 · 132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신앙 · 134
제12장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전쟁이 삶의 철학과 처세술에 미친 영향 · 137 물질에 의한 과잉 보상 의지 · 139 신분제와 도덕 체계의 해체 · 141 파벌 사회에 중간은 없다 · 143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 145 "위험을 무릅쓰는 문화" · 147
제13장 : 월남과 월북: 두 개의 생존방식
월남자들의 월남 동기 · 150 자기 입증을 위한 전투적 반공 · 152 월북자 가족들의 '숨죽이기' · 155 "세월이 원망스럽다" · 157 이문구와 이문열의 각기 다른 삶 · 158
제2부 1954년: 자유당 독재체제의 구축
제1장 :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
족청계의 자유당 장악 · 163 이기붕 체제로 개편된 자유당 · 165 '일민주의'를 외친 안호상의 시련 · 167 김성주 살해 사건 · 169
제2장 : 제3대 총선: "개헌 조건부로 입후보케 하라"
대통령 중임 제한 철폐를 위하여 · 173 조봉암과 신익희의 시련 · 174 조병옥·김두한·김영삼의 당선 · 176 목포 무소속 후보 김대중의 낙선 · 178
제3장 : 이승만의 방미: 불행한 방문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회의 · 180 이승만, 제3차 세계대전을 촉구하다 · 183 "미국은 한국을 공산 침략자에게 팔지 말라!"· 185 '반공=도의' 교육 강화 · 187
제4장 : 중임 제한 폐지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
국민 78.8%가 반대한 초대 대통령 연임 · 189 '뉴델리 밀담설' 매카시즘 바람 · 190 서울대 교수들이 제공한 '사사오입' 논리 · 193 민국당에 희망은 없었다 · 194 '불온문서 투입 사건' 공작 · 196
제5장 : '자유부인'과 '허벅다리 부인'
'자유부인' 사건 · 199 "불순 세력의 공작비를 받고 쓴 게 아닌가?" · 202 '자유부인' 사건의 진실 · 204 열녀·효부·절부 표창 운동 · 206
제6장 : 이승만이 일으킨 한글 간소화 파동
지당·낙루·병신 장관 · 208 북한의 한글 전용에 대한 반동 · 210 이승만은 1904년에 미국으로 갔다 · 211 '전문적인 과학자'와 '국가 권력자' 간의 싸움 · 213
제7장 : 『한국일보』 창간, 기독교방송 개국
신문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권력기관 · 215 불발로 끝난 신문 정비론 · 217 상업주의를 표방한 신문의 창간 · 219 영원히 사라질 뻔한 '조선일보'라는 제호 · 221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 탄생 · 223 한국 영화 최초의 키스신 · 226
제8장 : 문학: 예술원·펜클럽·실존주의
관제 예술원 창립 · 229 정치판 못지않은 '문단 정치' · 231 지식계를 휩쓴 실존주의 바람 · 233 청계천은 '한국의 쎄느강' · 235
제9장 : 군복 강도·졸업식·카투사·월드컵
군복 착용 강도의 횡행 · 237 졸업식 꽃다발 유행 · 240 카투사는 '6·25 전쟁이 낳은 기형아'? · 242 꿀벌 150만 마리 보내온 '노아의 방주' · 245 스위스 월드컵의 감격과 충격 · 246
제3부 1955년: '우상 정치'와 '동원 정치'
제1장 : 이승만은 '예수나 석가와 같은 성자'
3월 26일은 '어용곡필배들의 잔칫날' · 251 이승만은 '세기의 태양' · 252 이승만은 '현대의 성자' · 254 이승만은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 255 자유당은 '내시 정당' · 257
제2장 : 반둥회의: 평화공존은 친공인가?
평화공존·비동맹·반식민주의·민족자결주의 · 260 비동맹은 "남들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 · 262 이승만의 반둥회의 비난 · 263 나세르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사건 · 265
제3장 : 반일운동과 반공운동의 결합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 · 267 미국이 주선한 한일회담 개최· 269 5·20 총선을 앞둔 반일주의 · 271 북진통일 궐기대회 · 273 일본과 북한의 연대 남침 음모? · 275 반일과 반공의 상충 · 277
제4장 : "학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체코·폴란드 물러가라" 시위 운동 · 279 대구 매일신문사 테러 사건 · 282 『매일신문』이 1만 부를 돌파한 이유 · 283
제5장 : 민국당 자유민주파가 만든 민주당
쟁점으로 불거진 조봉암 참여 문제 · 286 조병옥·장면·김준연의 반대 · 288 민주당 창당과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 구성 · 289
제6장 : '괴뢰 이승만' 사건과 『사상계』의 활약
『동아일보』의 '오식 사건' · 292 '大統領'을 '犬統領'으로 오식한 '견통령' 사건 · 294 청소년 대상 잡지 『학원』의 인기 · 295 '자유'와 '민권'을 내세운 장준하의 『사상계』 · 297 장준하의 지식인에 대한 비판과 옹호 · 299
제7장 : 군: 부정부패의 창궐
리영희가 느꼈던 울분 · 301 사바사바·후생사업·송충이 · 302 1955년은 '군내 부정의 대표적인 해' · 305 정치자금 조달용 부정부패 · 307 상급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폐습 · 309
제8장 : 불교: 정화인가, 법난인가?
대처승 대 비구승 · 312 이승만, "대처승은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 · 313 단식·시위·법원 난입·유혈난투극·할복자살 · 315 불교계의 정치적 예속성 심화 · 317 종교의 정치적 도구화 · 320
제9장 : 박인수 사건: '숫처녀 논쟁'
"70여 명 중 처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 322 2002년의 '박인수 재판 논쟁' · 324 "왜 여성의 정조만을 문제삼는가" · 326 "서울의 숫처녀는 불과 60%도 못 된다" · 327
제10장 :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전쟁 미망인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 · 331 영화 〈미망인〉과 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 · 333 '미망인, 너 죽어라'? · 334 사회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대응 · 337 강한 어머니, 약한 여성 · 338 '자궁 가족'이란 무엇인가? · 340
제11장 : 〈피아골〉·〈아리조나 카우보이〉·국민 명랑화 운동
〈춘향전〉과 〈피아골〉 · 343 대중가요의 미국 지향성 · 345 "명랑한 도시를 만들게끔 노력하겠다" · 347 "향락에 탐닉하는 크리스마스" 비판 · 348
제12장 : 박태선·문선명·나운몽, 신흥종교 번성
민중의 이상향 갈구 · 352 권력과 유착된 기독교 · 353 신흥종교의 성장 · 354 전도관 신도의 89%가 개신교인 · 357
제13장 : 도시화·베이비붐·결혼식장·박인환·노동귀족
도시화와 서울 집중 · 359 '씨받이 면회'와 '베이비붐' · 361 깡통을 매달고 달린 결혼식 카퍼레이드 · 363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365 '노동귀족' 비판 · 368
주 · 370
저자
저자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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