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헨나(현대시 기획선 14)
안민 시집
안민 시집 [게헨나]. 《당신을 향해 달리는 당신》, 《사춘기에서 그 다음 절기까지》, 《안개보다 더 흐린 새벽의 레퀴엠》, 《최초의 정의》, 《사이클에 관한 견해》등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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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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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추가]
몰락하지 않고 그럭저럭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에 나는 또 얼굴이 붉어지고 그대의 공간엔 새들이 추락하고
― 6
객차의 문을 몇 개 통과하면 하얀 병실 칸이 있었다 그곳에서 첫사랑 K와 이십 대 초반 S와 이십 대 중반의 O를 보았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닿는 M도 보았다 여전히 혼란했고 여전히 슬프도록 황홀했다 그녀들은 시차를 두고 기차를 구매했을 것이다 보기에 그럴듯할 만큼 길고 탄성 또한 적당했을 것이었다 그녀들은 떠나면서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내 사춘기와 청춘은 시차 없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녀들은 왜 모두 그곳에 머물고 있었던 걸까?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의사는 아무 말 없이 내 머리칼을 잘라주었다 몇 줌의 기억이 싹둑싹둑 검정 빛깔로 바닥에 떨어졌다 눈물이 그렁그렁 피어났지만 나는 다시 나의 객차로 회귀해야만 했다」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아무리 느껴도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십 분에 열 개비의 담배를 피운다 풀들의 영혼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간다 나는 나에게서 멀어지는 영혼을 바라보며 탄식한다 큰 새의 날개를 잡고 허공을 날아본 경험이 있다면 나의 표정에 동참할 것이다 삼백육십오 그리고 또다시 삼백육십오의 두 번이면 우울증이 10g이라도 치료될 수 있을까?
2053년 그리고 12월이 오면 기차는 기차가 아닐 거란 생각에 나는 어제를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기차가 북회귀선을 통과해 기억의 좌측을 달리고 있다 나는 윤리를 증오한다고 외쳤지만, 비겁하게 윤리와 타협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윤리는 기차의 속도만큼 퇴화하고 내 몸뚱이는 박물관을 닮아간다 내가 누군가를 경외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윤리와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상사와 비서, 매혹적인 앵커와 위대한 학자 그리고 몇몇 시인과 방랑자는 철저히 윤리적이었다 최소한 낮에는 그랬다
― 7
나는 레일 주위를 방황하며 목적지를 분석하고 조정하는 이가 분명 신일 거로 여겼다 나도 그대도 목적지를 모른다 레일이 교차하는 지점 혹은 변곡점 어느 구간에서 숱한 기차가 의도하지 않은 생경한 곳으로 향한다 이 기차도 내 의지나 그대의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물론 기차의 목적대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차만의 착각이다 오류는 그러한 지점에서 발화한다 저녁이 내리는 구간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광폭해지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도 그대의 잘못도 아니다
폭설이 쏟아진다 그대가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기차 안은 밖보다 시리다 영하의 겨울에 컨테이너 내부를 경험하였다면 망한다는 거에 동의할 것이다 온몸이 서서히 망해간다 나는 내 식대로 망해야 한다 산산이 부서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니까 눈꽃은 부서져 다시 눈으로 돌아간다 날개가 산산이 부서질 때 나비는 눈 부신 햇살로 돌아간다 밖에서의 날들이 그리워질 때면 독주를 마신다 빙산의 일부처럼 꽝꽝 얼어붙은 독주를 녹이기 위해선 고혹적인 여배우를 떠올리며 지퍼를 내린다
지퍼는 궁색하거나 초라하다 성에가 뜨겁게 끼고
끝도 없이 펼쳐진 지퍼를 닫으며 기차는 달린다 나는 열려 하고 기차는 계속 닫으려 한다 이 또한 코미디일 것이며 그대와 나는 이러한 관성에 속해 있고 그것은 영원히 풀 수 없는 함수 같은 거다 여하튼 나는 결빙되는 중이다
― 8
500년 전 즈음이면서 500년 후 즈음이면 좋을 것 같은 밤, 나는 끊임없이 적는다 나에 대하여 그리고 그대의 여행에 대하여
나는 왜 그대의 여행에 포위됐을까 그건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절망의 문제였다 다시 강조한다면 몰락과 우울과 기차의 문제였으며 또한 January 31.999…의 문제였다 겨울이 한 페이지씩 파란 얼굴을 넘기며 지나간다 생경한 얼굴이 나를 관찰하며 예언한다 「당신의 동공에 유언처럼 낙엽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토론한 적 있는 기차가 스쳐 지나간다 그 속엔 누구도 탑승하지 않았다 파란 음표와 녹색 휘파람 그리고 오래전 유년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아, 그것은 기차가 아니라 하모니카와 플루트였다 인도와 페르시아 대륙을 거쳐 북해로 향하는…
― 9
철로는 제 몸보다 수천 배 무거운 몸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내가 무겁다
「중독은 무겁다」
중독된 이들이 적막을 풀어내며 흘러 다녔다 중독된 이들이 철로 변을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철로를 건너 공장엘 갔고 어둑해지면 철로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발은 기찻길 목침 위에서 언제나 무거워지곤 했다 어머니는 애초에 기차를 믿지 않았다 아니 기차를 저주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기차를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 기차가 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 10
기차는 마구 흔들리며 달리지만 나는 달팽이보다 느리다 지구별이 빛의 속도로 달리지만 그대가 나에게 닿는 건 유계처럼 멀듯
젖은 음악이 지나간다 음악이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 흐르는 나의 소문은 누구에게나 다 방영된다 나는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곤 했다 거짓말을 두 번째 들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내 영역에서 지워지곤 했다 그러한 사실에 모든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거짓말을 증오한다」라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
나는 거짓으로 왔고 정말이지 진실로 살았고 거짓을 덮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더는 미사곡이 나를 편곡할 수 없다 더는 고해가 나를 취급할 수 없다 까닭에 나는 냉담 중이다
나는 기차를 속였다, 고 고백하고 싶다 하지만 그대와 나는 기차의 내부에 속해 있다
「죄송합니다 속여서」
「나의 뺨을 휘갈겨 주십시오」
기차 안, 기차 안, 기차 안, 기차를 속인 게, 정말이지 기가 찬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다 발버둥을 쳐도 기차 안, 기차 안, 기차 안이고 오늘은 40년 혹은 50년 후 같은 마지막 12월
밤이다 이 밤 난
부재를 염원한다
몰락을 염원한다
더불어
그날을 염원한다
「그날은… 그대가 나의 세계입니다 아무 내용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염원은 끝없이 계속되겠지만
그날, 나는 존재하기라도 할 것인지…
아무튼 기차는 위험하게 달리고 나는 거짓으로 왔고 진실로 살았고 거짓을 덮고 떠나게 될 것이다 심장엔 어떤 영혼도 없이
목차
목차
나와 나의 분인分人과 겨울에 갇히던 ─ 12
사건지평선까지의 거리 ─ 14
피아노 ─ 16
비어秘語 혹은 비어悲語 ─ 19
어둠론 ─ 34
큐브 ─ 36
당신을 향해 달리는 당신 ─ 38
제2부
사춘기에서 그 다음 절기까지 ─ 42
계단 ─ 45
도로적道路的 강박관념 ─ 48
속화俗畵의 발 ─ 51
바라나시 겅가 ─ 54
뼈의 기원 ─ 56
사막의 풍경 ─ 60
제례의 구간 ─ 62
제3부
모래시계 ─ 70
스노우 볼 ─ 72
게헨나 ─ 74
유리 고양이 ─ 76
다음에서 머리카락을 바르게 설명한 것을
전부 고르시오 ─ 78
실조 ─ 81
안개보다 더 흐린 새벽의 레퀴엠 ─ 84
어제 ─ 86
천칭좌―Zubenelgenubi ─ 87
제4부
최초의 정의 ─ 96
그림자극 ─ 98
눈 없는 얼굴 ─ 101
낯선 유전자 Pool로 ─ 103
한 마리 사막 ─ 105
사이클에 관한 견해 ─ 107
시안 ─ 110
▨ 안민의 시세계 | 황치복 ─ 129
[ 시인의 말 ]
기억 앓는 곳마다 흐르는 잿빛 입자들,
그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나의 얼굴이
나를 보고 울고 있었다.
[ 대표시 ]
저자
저자
본명 안병호. 경남 김해 출생하였다.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었다. 2018년 부산문화재단 지역문화특성화지원 사업과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하였다. 현재 부산작가회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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