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백제의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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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문자 자료로는 고구려에서는 357년의 안악3호분 묵서명, 408년의 덕흥리 벽화 고분의 묵서명, 414년의 광개토왕릉 전명, 5세기 중엽의 모두루총 묘지명 등이 있고, 백제에서는 525년의 무령왕릉 묘지명, 567년의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명문, 577년의 왕흥사 목탑지 청동합 명문, 579년의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의 명문 등이 있다. 이에 비해 신라에서는 451년의 서봉총 은합 명문, 458년의 금관총 환두대도 검초 단금구 명문, 475년의 호우총 호우 명문, 595년의 순흥 어숙지술간묘 石扉 명문, 599년의 순흥 벽화 고분 묵서명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에서 명문이 새겨진 금관총의 ?斯智王은 정말로 세기의 발견으로 4~8세기 신라 고분을 30년 정도 소급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斯智王은 훈독과 반절로 넛지왕이 되고, 이는 마립간 시대 왕들 가운데 訥祗麻立干과 음상사이라서 금관총이 눌지왕릉이 되고, 458년이란 절대 연대를 얻게 된다. 그래서 고신라 시대의 왕릉이 확실한 태종무열왕을 제외하고, 왕릉이 확실한 두 번째 왕릉이 된다. 적석목곽묘, 횡혈식석실분, 신라토기, 단각고배, 인화문토기, ?斗 등 고고학의 편년을 30년가량 소급해야 된다.
?斯智王명과 같은 명문은 우리 생애에 다시는 못 볼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가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다. 앞으로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토기를 공반하는 절대 연대를 나타내주는 문자 자료가 금속기, 비석, 목간, 고문서, 묵서명 등에서 출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斯智王명과 같은 명문은 우리 생애에 다시는 못 볼 자료이다. 이러한 자료가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다. 앞으로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토기를 공반하는 절대 연대를 나타내주는 문자 자료가 금속기, 비석, 목간, 고문서, 묵서명 등에서 출토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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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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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금석문은 신라 금석문에 비해 어렵다. 신라의 금석문은 고식 이두로 되어 있는데 대해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은 한문으로 되어있다. 고구려 금석문은 한국 금석문의 최고봉인 광개토태왕비가 있고, 충주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도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그 글자 수가 1,775자나 된다. 아직까지 백제 금석문에서는 국가차원의 금석문이 없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금석문에서 모두 나오는 太王이 나오지 않아서 太王制도 실시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백제 금석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4·6변려체로 된 사택지적비이다. 삼국시대 금석문 가운데 4·6변려체로 된 유일한 예이다.
백제 금석문에서는 인명 표기 자료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와 익산 미륵사지 금속기 명문과 목간에서 그 숫자가 늘고 있다. 아직까지 직명+부명+관등명+인명으로 된 자료는 1례밖에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상조상기가 7례가 있으나 부명이 나온 예는 1가지뿐이고, 관등명이 나온 예는 단 1례도 없다. 혹자는 그 이유를 서민이 만들어 사용했다고 보기도 하나 아무래도 휴대용 소형불상을 관등을 가진 귀족의 소유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민이 비싼 금동불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문화가 발달된 고구려에서조차 4세기 금석문이 없다. 3세기에 고구려는『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主簿, 優台, 丞, 使者, ?衣, 仙人의 관등이 있어서 앞으로의 자료 증가를 기대한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목간이 백제와 신라에서는 출토되나 고구려에서는 단 1점도 나온 바가 없다. 고구려 국가 차원의 금석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이다. 물론 357년에 작성된 안악3호분의 묵서명과 408년에 작성된 덕흥리 벽화 고분의 묘지명이 있으나 그 중요성이나 글자 수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백제 금석문은 시호제가 채택되었을 것이나, 휘호가 나오는 예가 백제창왕명사리감의 昌王, 무령왕릉 묘지명의 斯麻王 등이 있다. 이에 대비되는 자료로 집안고구려비의 明治好太聖王이 있다. 신라에서는 휘호를 사용한 예가 535년 울주 천전리서석 을묘년명에 法興太王, 진흥왕순수비의 眞興太王 등이 있다. 신라 눌지마립간과 법흥왕은 이름이 4가지나 되나 고구려와 백제의 왕명에서는 사마왕과 무령왕의 두 가지가 고작이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신라 금관총의 ?斯智王처럼 단편적인 자료가 중요한 예로는 무령왕릉 525년 절대 연대를 가진 묘지석이 있으나 무령왕릉에서는 백제토기가 단 1점도 출토되지 않고, 용봉문환두대도 때문에 칼의 시대인 6세기 일본 고분 편년이 도움을 주고 말았다. 명문이 새겨진 금관총의 3루환두대도 검초 단금구는 세기의 발견으로 ?斯智王이 훈독과 반절로 읽을 때, 넛지왕이 되고, 이는 눌지왕과 음상사이라서 금관총이 눌지왕릉이 되고, 458년이란 절대 연대를 얻게 된다. ?斯智王명과 같은 명문은 우리 생애에 다시는 못 볼 자료이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광개토태왕비나 칠지도 명문은 연구사만 해도 100년을 넘는다. 그래서 나올 만한 학설은 거의 다 나왔다. 지금도 가끔씩 광개토태왕비와 칠지도에 대한 논문이 나오고 있다. 통설에서 얼마나 달리 해석하는지가 관건이다.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에 있어서 지금까지 연구된 것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할 자료는 모두 다루었다. 아직도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의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다. 백제 목간이 사비성 시대에 많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금석문도 최근에 나온 집안고구려비는 대단한 수확이다. 그 내용도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집안의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확정하고, 평양성에 있던 한왕묘를 문자왕릉으로 볼 수 있던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 명문의 辛卯年/好太王/敎造鈴/九十六을 '451년 好太王(광개토태왕)을 위해 (장수왕이) 敎로 만든 96번째 청동방울이다.'로 해석하고, 태왕릉 출토 전에 願太王陵山如山固如岳이란 명문의 태왕을 광개토태왕으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서봉총 출토 은합 명문의 太王도 광개토태왕으로 보아서 서봉총의 은합 명문을 고구려에서 작성된 451년의 명문으로 보게 되었다.
왕흥사 목탑 사리공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합 명문에 丁酉年이란 연간지가 나와 577년이란 절대 연대를 갖게 되었다. 왕흥사 목탑은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 5에 무왕 즉위1년(600년)∼무왕 35년(634년) 사이에 건립된 것이 되어 있어서 문헌을 믿을 수 없게 한다. 이 점은 중요한 것으로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한계를 밝혀주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와 문헌의 차이는 일찍이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도 법흥왕의 사망이 540년이 아닌 539년임을 알려주는 자료가 울주 천전리서석 추명에 나온다.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인명 표기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 충주고구려비를 들 수가 있다. 백제에서는 1개의 금석문 자료로 인명 표기가 복원되는 국가 차원의 금석문이 단 1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백제 관등제가 3국 가운데 제일 발달하고, 율령 공포도 그 시기가 고구려나 신라에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제를 실시하지 않고, 연호의 사용도 칠지도의 예밖에 없다.
백제 고고학 자료에 있어서 중요한 예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자를 들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백자는 절대 연대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물론 중국 남조의 수입품이다. 이렇게 무령왕릉에서는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유물이 많다. 金松으로 만든 관은 일본 九州에서 수입되어 사치품이 많았음을 말해 준다. 무령왕릉이 세기의 발견이 되지 못한 것은 무덤에서 백제토기가 단 1점도 나오지 않아서 고고학적으로 그 중요성을 반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치와 방종을 말하는 것으로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隸書體로 쓴 경우로 광개토태왕비를 들 수 있다. 414년 당시 중국에서는 楷書體가 유행하였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비의 글씨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다. 광개토태왕비 서체에는 城자가 많이 나오는데 한자도 같은 글씨체가 없어서 秋史體처럼 집자가 되지 않는 서체로 유명하다. 중국의 한자 글씨체를 빌려다가 고구려식으로 소화해 쓴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많은 중국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을 지킨 예로 판단된다.
백제 금석문에 있어서 국가 차원의 금석문이 나오지 않아서 백제사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백제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己亥年을 639년으로 보고 있으나 공반된 은제관식의 편년이나『삼국유사』,무왕조의 사료 비판에 따를 때, 579년으로 보인다. 금석문의 가장 큰 장점은 문헌의 사료 비판의 잣대가 되는 점이다. 639년으로 보는 것은 왕흥사 목탑지 출토 청동사리합의 명문이 주는 교훈을 잃어버린 듯하다.
고구려에서는 一光三尊佛 형식은 금석문 자료를 포함하여 21예가 있다. 그래서 이 형식의 불상은 대개 고구려나 그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보고 있다. 중국 山東에서도 출토되어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백제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鄭智遠銘金銅三尊佛立像은 1광3존이나 백제 불상으로 보고 있다. 鄭智遠과 함께 趙思敬도 나오는 바, 이들을 낙랑계로 보아 왔으나 근대에 와서 진짜 불상에 글씨를 새겨서 값을 올리려는 의도로 만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백제 금석문에서는 인명 표기 자료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 들어와 익산 미륵사지 금속기 명문과 목간에서 그 숫자가 늘고 있다. 아직까지 직명+부명+관등명+인명으로 된 자료는 1례밖에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상조상기가 7례가 있으나 부명이 나온 예는 1가지뿐이고, 관등명이 나온 예는 단 1례도 없다. 혹자는 그 이유를 서민이 만들어 사용했다고 보기도 하나 아무래도 휴대용 소형불상을 관등을 가진 귀족의 소유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서민이 비싼 금동불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문화가 발달된 고구려에서조차 4세기 금석문이 없다. 3세기에 고구려는『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主簿, 優台, 丞, 使者, ?衣, 仙人의 관등이 있어서 앞으로의 자료 증가를 기대한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목간이 백제와 신라에서는 출토되나 고구려에서는 단 1점도 나온 바가 없다. 고구려 국가 차원의 금석문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이다. 물론 357년에 작성된 안악3호분의 묵서명과 408년에 작성된 덕흥리 벽화 고분의 묘지명이 있으나 그 중요성이나 글자 수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백제 금석문은 시호제가 채택되었을 것이나, 휘호가 나오는 예가 백제창왕명사리감의 昌王, 무령왕릉 묘지명의 斯麻王 등이 있다. 이에 대비되는 자료로 집안고구려비의 明治好太聖王이 있다. 신라에서는 휘호를 사용한 예가 535년 울주 천전리서석 을묘년명에 法興太王, 진흥왕순수비의 眞興太王 등이 있다. 신라 눌지마립간과 법흥왕은 이름이 4가지나 되나 고구려와 백제의 왕명에서는 사마왕과 무령왕의 두 가지가 고작이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신라 금관총의 ?斯智王처럼 단편적인 자료가 중요한 예로는 무령왕릉 525년 절대 연대를 가진 묘지석이 있으나 무령왕릉에서는 백제토기가 단 1점도 출토되지 않고, 용봉문환두대도 때문에 칼의 시대인 6세기 일본 고분 편년이 도움을 주고 말았다. 명문이 새겨진 금관총의 3루환두대도 검초 단금구는 세기의 발견으로 ?斯智王이 훈독과 반절로 읽을 때, 넛지왕이 되고, 이는 눌지왕과 음상사이라서 금관총이 눌지왕릉이 되고, 458년이란 절대 연대를 얻게 된다. ?斯智王명과 같은 명문은 우리 생애에 다시는 못 볼 자료이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광개토태왕비나 칠지도 명문은 연구사만 해도 100년을 넘는다. 그래서 나올 만한 학설은 거의 다 나왔다. 지금도 가끔씩 광개토태왕비와 칠지도에 대한 논문이 나오고 있다. 통설에서 얼마나 달리 해석하는지가 관건이다.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에 있어서 지금까지 연구된 것을 중심으로 다루어야 할 자료는 모두 다루었다. 아직도 고구려와 백제 금석문의 연구가 끝난 것은 아니다. 백제 목간이 사비성 시대에 많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 금석문도 최근에 나온 집안고구려비는 대단한 수확이다. 그 내용도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집안의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확정하고, 평양성에 있던 한왕묘를 문자왕릉으로 볼 수 있던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 명문의 辛卯年/好太王/敎造鈴/九十六을 '451년 好太王(광개토태왕)을 위해 (장수왕이) 敎로 만든 96번째 청동방울이다.'로 해석하고, 태왕릉 출토 전에 願太王陵山如山固如岳이란 명문의 태왕을 광개토태왕으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서봉총 출토 은합 명문의 太王도 광개토태왕으로 보아서 서봉총의 은합 명문을 고구려에서 작성된 451년의 명문으로 보게 되었다.
왕흥사 목탑 사리공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합 명문에 丁酉年이란 연간지가 나와 577년이란 절대 연대를 갖게 되었다. 왕흥사 목탑은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 5에 무왕 즉위1년(600년)∼무왕 35년(634년) 사이에 건립된 것이 되어 있어서 문헌을 믿을 수 없게 한다. 이 점은 중요한 것으로 문헌을 중심으로 한 연구의 한계를 밝혀주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와 문헌의 차이는 일찍이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도 법흥왕의 사망이 540년이 아닌 539년임을 알려주는 자료가 울주 천전리서석 추명에 나온다.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인명 표기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 충주고구려비를 들 수가 있다. 백제에서는 1개의 금석문 자료로 인명 표기가 복원되는 국가 차원의 금석문이 단 1개도 나오지 않고 있다. 백제 관등제가 3국 가운데 제일 발달하고, 율령 공포도 그 시기가 고구려나 신라에 앞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제를 실시하지 않고, 연호의 사용도 칠지도의 예밖에 없다.
백제 고고학 자료에 있어서 중요한 예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자를 들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백자는 절대 연대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물론 중국 남조의 수입품이다. 이렇게 무령왕릉에서는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유물이 많다. 金松으로 만든 관은 일본 九州에서 수입되어 사치품이 많았음을 말해 준다. 무령왕릉이 세기의 발견이 되지 못한 것은 무덤에서 백제토기가 단 1점도 나오지 않아서 고고학적으로 그 중요성을 반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치와 방종을 말하는 것으로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고구려 금석문에서는 隸書體로 쓴 경우로 광개토태왕비를 들 수 있다. 414년 당시 중국에서는 楷書體가 유행하였다. 그래서 광개토태왕비의 글씨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다. 광개토태왕비 서체에는 城자가 많이 나오는데 한자도 같은 글씨체가 없어서 秋史體처럼 집자가 되지 않는 서체로 유명하다. 중국의 한자 글씨체를 빌려다가 고구려식으로 소화해 쓴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많은 중국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을 지킨 예로 판단된다.
백제 금석문에 있어서 국가 차원의 금석문이 나오지 않아서 백제사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래서 백제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己亥年을 639년으로 보고 있으나 공반된 은제관식의 편년이나『삼국유사』,무왕조의 사료 비판에 따를 때, 579년으로 보인다. 금석문의 가장 큰 장점은 문헌의 사료 비판의 잣대가 되는 점이다. 639년으로 보는 것은 왕흥사 목탑지 출토 청동사리합의 명문이 주는 교훈을 잃어버린 듯하다.
고구려에서는 一光三尊佛 형식은 금석문 자료를 포함하여 21예가 있다. 그래서 이 형식의 불상은 대개 고구려나 그 영향을 받은 불상으로 보고 있다. 중국 山東에서도 출토되어 고구려 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백제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鄭智遠銘金銅三尊佛立像은 1광3존이나 백제 불상으로 보고 있다. 鄭智遠과 함께 趙思敬도 나오는 바, 이들을 낙랑계로 보아 왔으나 근대에 와서 진짜 불상에 글씨를 새겨서 값을 올리려는 의도로 만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목차
목차
책머리에
제1장 고구려의 금석문
제1절 안악3호분의 묘주 문제
제2절 고구려 국내성의 무덤 출토 와전 명문
제3절 광개토태왕비의 몇 가지 문제
제4절 고구려 태왕릉의 주인공
제5절 서봉총 은합 명문
제6절 모두루총 묘지명의 작성 시기
제7절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연대
제8절 집안고구려비에 대하여
제9절 고구려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10절 호우총의 호우 명문
제11절 갑인명석가상 광배 명문을 새긴 시기
제2장 백제의 금석문
제1절 백제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2절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제3절 금산 금령산성 출토 문자 자료
제4절 익산 미륵사지 출토 景辰명기와
제5절 부여 궁남지 출토 315호 목간
제3장 신라 금석문과 무덤
제1절 월성해자 신1호 목간의 신검토
제2절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제작 시기
제3절 금석문 자료에 나타난 訥祗王
제4절 경주 서악동 4왕릉의 주인공 비정
제5절 고신라 금석문 자료로 본 지방관제
제6절 儀鳳四年皆土명기와의 皆土 해석
제7절 경주 신라 횡혈식석실분 기와 출토 묘주의 골품
제8절 경주 성건동 677-156번지 출토 토기 명문
책을 마무리하며
제1장 고구려의 금석문
제1절 안악3호분의 묘주 문제
제2절 고구려 국내성의 무덤 출토 와전 명문
제3절 광개토태왕비의 몇 가지 문제
제4절 고구려 태왕릉의 주인공
제5절 서봉총 은합 명문
제6절 모두루총 묘지명의 작성 시기
제7절 충주고구려비의 건립연대
제8절 집안고구려비에 대하여
제9절 고구려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10절 호우총의 호우 명문
제11절 갑인명석가상 광배 명문을 새긴 시기
제2장 백제의 금석문
제1절 백제 금석문의 인명 표기
제2절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제3절 금산 금령산성 출토 문자 자료
제4절 익산 미륵사지 출토 景辰명기와
제5절 부여 궁남지 출토 315호 목간
제3장 신라 금석문과 무덤
제1절 월성해자 신1호 목간의 신검토
제2절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제작 시기
제3절 금석문 자료에 나타난 訥祗王
제4절 경주 서악동 4왕릉의 주인공 비정
제5절 고신라 금석문 자료로 본 지방관제
제6절 儀鳳四年皆土명기와의 皆土 해석
제7절 경주 신라 횡혈식석실분 기와 출토 묘주의 골품
제8절 경주 성건동 677-156번지 출토 토기 명문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
저자
김창호
1950년 10월 27일 경북 구미 출생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 문학박사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주요 저서
고신라 금석문 연구, 삼국시대 금석문 연구, 한국 고대 불교고고학의 연구, 고신라 금석문과 목간, 한국 고대 목간, 신라 금석문 외 논문 다수.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 문학박사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주요 저서
고신라 금석문 연구, 삼국시대 금석문 연구, 한국 고대 불교고고학의 연구, 고신라 금석문과 목간, 한국 고대 목간, 신라 금석문 외 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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