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경산수
『소설 진경산수』는 조선 숙종 영조때 천재적인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탄생과정과, 겸재가 창시하고 완성한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화법 그리고 그 경지를 담아낸 역사소설이다. 여러 가지 화법, 그림 그리는 데 필요불가결한 종이제조의 기술과 제조과정, 그 시대 엘리트들의 이념과 사상을 주도하던 학문인 성리학과 주역에 대한 높은 식견, 소론과 노론의 당파싸움으로 대표되는 정치현황과 서민들의 삶 그 풍속도를 담아냈으며, 그것들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과 서사를 윤기 있고 풍성하게 가꾸는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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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찾아 섭렵했고 공부한 자취가 도처에 자국으로 찍혀 있다. 예를 들면 여러 가지 화법, 그림 그리는 데 필요불가결한 종이제조의 기술과 제조과정, 그 시대 엘리트들의 이념과 사상을 주도하던 학문인 성리학과 주역에 대한 높은 식견, 소론과 노론의 당파싸움으로 대표되는 정치현황과 서민들의 삶 그 풍속도……그것들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과 서사를 윤기 있고 풍성하게 가꾸는 아름다운 자연묘사…….
《소설 진경산수》는 역사의 이면에 흥미를 가진 독자에게는 격조 있는 역사소설로서, 역사소설의 방법을 빌린 순수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품위를 갖춘 순수소설로서, 역사와 소설에서 지식과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청소년 학생들에게 좋은 교양소설로서 두루 적합한 소설이다.
겸재는 그의 호가 가리키듯 「군자가 겸손하면 끝이 있으리라」 한 것처럼 평생 겸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겸재는 29세 때 금강산을 처음 보고 풍악화첩 13면을 그려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겸재가 살아온 발자취를 따라서 그의 그림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수 속에서 호흡하게 된다. 겸재 정선이 우리나라 40여 곳이 넘는 여행지를 다니면서 그린 그림을 상고하면서 200여 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시조 한 구절이 무색하다. 지금은 인걸도 산천도 변화무쌍하다.
소설로 형상화한 겸재 정선의 생애와 예술 : 유재용(소설가)
1.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 즉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소설을 역사소설이라고 할 때 <소설 진경산수>도 역사소설의 테두리 안에 넣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 숙종, 선조 연대를 배경으로 활약했던 화가 겸재 정선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소설 독자들 중 상당수는 역사소설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정관념을 지녀왔다.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고정관념이란, 첫째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재미있게 꾸며놓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에 있어서의 주主는 역사적 사실이고 작가의 역할, 즉 소설 형상화의 몫은 부수적인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역사적 사실과 소설내용을 미분화상태로 받아들이고 동일시하는 태도 때문이다.
역사소설과 일반소설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일반소설의 경우 작가가 상상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 비해 역사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소설은 작품의 배경과 등장인물과 사건을 작가 임의로 정하고 전개할 수 있으되 역사소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역사상의 어떤 시대를 선택했다면 그런대로, 또 역사상의 어떤 인물을 선택했다면 그런대로, 그 역사적 사실을 엄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지 작가의 상상력으로 다르게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상상력의 충동질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작가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자질이며 부여받은 권리인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받는 것은 아쉬움이기는 하지만 역사소설의 경우에는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역사소설 닮은 일반소설의 길이 모색된다고 할 수 있겠다.
2. <소설 진경산수>는 어떠한가.
역사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일정 부분 제한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문학성에 있어서도 일반소설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역사소설에서는 높은 수준의 문학성보다는 소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타의 가치를 기대하는 경향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시피 하다. 옛날이야기 같은 재미, 제도·풍습·언어를 통한 그 시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해 가던 모습에서 얻는 지식,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개인, 사회,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얻는 교훈 등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진경산수>는 어떠한가. 의도하는 것이 그런 '여타의 가치'일까. 내가 보기에 <소설 진경산수>는 그런 여타의 가치를 충분히 지녔으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성과도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 단언하는 근거는 겸재 정선이라는 출중한 화가와 그가 창시하고 완성한 진경산수를 겉이야기로 내세워 조선의 숙종·영조 연대에 벌어진 당파싸움의 실상 등 사건과 사회상을 엮어내려는 것이 소설의 의도가 아니라, 겸재 정선이라는 한 천재적 화가가 탄생하는 과정과 그가 창시하고 완성한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화법畵法과 그 경지를 담아내려는 것이 소설의 의도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순수소설은 개인의 삶을 추적하고 묘사하는 것이 주主다. 어떤 시대·어떤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개인, 그리하여 그 시대·그 사회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개인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시대·그 사회는 등장인물인 개인(또는 개개인)의 삶을 형상화하기 위한 배경이고 장치일 뿐 그 소설의 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소설에서는 시대가, 그 시대 속의 사회가 소설의 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소설 속 등장인물은 역사 속의 한 시대와 그 시대 속의 어떤 사회를 특징짓기 위한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하다. 적어도 역사소설의 등장인물은 순수소설의 등장인물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고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역사적 시대상황 자체를 주로 다루는 소설이 있고, 그런 조건 아래서도 역사의 강물 속에 부침하는 개인의 삶에 좀더 중점을 두는 소설이 있다. 더 나아가 역사적 배경과 사건을 소설의 무대로 차용해 온 순수소설도 있다.
<소설 진경산수>의 문학성을 그 어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겸재 정선은 실재했던 인물이고, 그의 생애에서 관계 맺었던 중요 인물들, 부모 형제 친척 그리고 동지적 교류관계를 맺은 주요등장인물들이 실재했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이 살았던 숙종·영조 때에 일어난 중요 사건들과 그 시대 그 사회의 정신적 지배계층인 선비들이 추구하고 몰두하고 숭상하던 이념·사상·학문 등이 사실 그대로다. 언뜻, 겸재 정선이 살아 활동하던 역사의 한 시대를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소설 진경산수>는 전형적 역사소설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진경산수>는 그 문제를 극복해 문학성을 획득해 내는 성과를 이루어놓았다.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중점을 두지 않고, 겸재 정선이라는 한 천재 화가, 또는 그 인간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의문을 표시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그 차이야말로 상식적인 역사소설과 순수소설을 구별하는 것이며 나아가 도식성과 창의성을 구별해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진경산수>는 역사소설의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도식적인 역사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성과 문학의 격을 갖춘 문학작품이다. 적어도 역사소설적 소재와 방식을 통해 품위와 격을 갖추고 있는 문학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겸재 정선은 <소설 진경산수> 속에서 다시 태어나 평생의 과정을 재현해 보여준다. 정선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선은 본관 광주光州,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 난곡蘭谷으로 1676년(숙종 2년) 1월 3일 아버지 시익(時翊, 1638~1689)과 어머니 밀양박씨(1644~1735)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정선은 비록 출중한 가문은 아니더라도 사대부 가정에서 성장했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웃에 살던 노론老論의 거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金昌集 형제의 천거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인 회사繪史가 되고, 그 뒤 현감에 이르렀다.
정선은 당대의 유명 문사들과도 긴밀한 교유관계를 맺었는데 그 교유는 그의 회화세계를 확대시키고 심화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전통적인 북종화법과 새로이 유입된 남종화법을 결합시켜 이윽고 자기만의 독특한 필법을 창안해 내었다. 뾰족한 암봉은 수직준법으로,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은 미점米點준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런 그의 화풍은 산에 바위가 많고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우리나라 산야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화법은 한국적 자연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 냈으며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한 획을 긋는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안정된 현실적 토대 위에서 겸재는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후대 화가들에게 훌륭한 한 전형이 되었으며, 당대 어떤 화가보다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이의가 없지만, 다른 한편 그 누구도 그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겸재는 1733년(영조 9년)에 청하현감이 되었고, 1740년(영조 16년)에는 양천현령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지의 빼어난 산수를 찾아다니며 산수를 화폭에 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79세(1754)에는 사도시(궁중의 미곡과 장을 공급하는 기관)의 종4품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이때 천한 재주(賤技당시에는 화가와 그림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음)로 이름을 얻어 승급함은 부당하다는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영조는 다음해(1755)에 겸재를 정3품 첨지중추부사로 영전시켰으며, 또 다음해인 겸재 나이 81세(1756)에는 그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직시켰다. 영조의 각별한 배려였다.
이처럼 인생 후반기에 순조롭고 평탄하게 벼슬길을 걸을 수 있었던 점이 그가 동시대의 어떤 화가보다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고, 많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되었다.
겸재는 이처럼 평생 큰 부담 없이 작품제작에 몰두하다가 1759년(영조 35년) 3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위와 같은 겸재 정선의 생애가 <소설 진경산수>의 바탕이 되었지만 읽어 들어가노라면 채정운이라는 중진작가가 소설에 쏟아부은 공력을 상당한 중량감으로 느끼게 된다. 겸재의 생애가 비교적 순탄한 것처럼 전해지고 있지만, 그의 소년시절을 압박하던 불우한 환경과 가난이 상당한 비중으로 진지하게 서술되어 있다. 한 천재화가가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작가의 계산이었을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찾아 섭렵했고 공부한 자취가 도처에 자국으로 찍혀 있다. 예를 들면 여러 가지 화법, 그림 그리는 데 필요불가결한 종이제조의 기술과 제조과정, 그 시대 엘리트들의 이념과 사상을 주도하던 학문인 성리학과 주역에 대한 높은 식견, 소론과 노론의 당파싸움으로 대표되는 정치현황과 서민들의 삶 그 풍속도……그것들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과 서사를 윤기 있고 풍성하게 가꾸는 아름다운 자연묘사…….
<소설 진경산수>는 역사의 이면에 흥미를 가진 독자에게는 격조 있는 역사소설로서, 역사소설의 방법을 빌린 순수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품위를 갖춘 순수소설로서, 역사와 소설에서 지식과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 청소년 학생들에게 좋은 교양소설로서 두루 적합한 소설이다.
[작가의 말]
아! 진경산수. 나는 80년대 초부터 간송미술관에서 봄가을로 여는 전시를 빼놓지 않고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도록을 사서 모았다. 도록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옛 그림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며 조선시대의 위대한 화성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처음 성낙원을 찾았을 때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찾아보고 싶은 산수화 두 점이 있었는데 혹시나 그곳에서 그와 비슷한 그림이라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화선지 한 장 크기만한 산수화는 강기슭에 쪽배를 매어놓고 큰 소나무 밑에서 두 노인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그림이다. 나뭇짐을 언덕 위에 버팅겨 놓고 그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은 하얀 수염이 긴 노인과 뱃사공이 발치에 엎드리듯 앉아서 노인을 우러러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그런 그림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의 중심점은 수염이 긴 노인이 눈가에 누비주름을 잔뜩 접으면서 파안하는 얼굴과 지게 상부에 매달린 물고기 꾸러미였다.
두 노인의 평화스러운 얼굴과 물고기의 은빛 비늘의 생동감이 화면 밖으로 툭 튀어나올 듯한 그런 그림이었다. 또 작은 것은 강물 위에 쪽배가 떠 있는 산수화였다.
이 그림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큰사랑방 아랫목 벽에 걸려있던 것이다. 그저 유명한 사람의 그림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어느 눈 밝은 고물장수가 아버지를 졸라 돈 서푼을 내놓고 그림을 떼어갔다. 옛것은 고물단지라고 천대했던 소치였다.
옛것에 관해 눈뜨면서 나는 그 그림의 행방이 무척 궁금했다. 나는 그와 비슷한 그림이라도 찾아보고 어느 시대 누구의 그림이었다는 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나는 옛 그림과 이와 같은 사연으로 가까워졌다.
아! 진경산수. 진경산수란 산수를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게 그리는 것이다. 자유로운 시선으로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다음 화가의 마음에 와닿는 것을 임의대로 선택해서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다. 겸재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 속의 실경을 직접 보고 나서야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했다.
나는 거슬러서 겸재의 도록 속의 그림을 보고 실경을 찾아서 옛 서울의 모습을 더듬었다. 그 중에서도 겸재가 만년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그의 대표작이며 진경산수의 완성된 작품이다.
평생지기면서 시화쌍벽으로 동시대를 살아온 사천 이병연이 세상을 떠난 그해 여름에 <인왕제색도>를 그렸다. 친구를 잃은 슬픔을 투영시킨 이 그림은 바로 겸재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죽음과 삶의 구획을 흑백의 대조로 유감없이 표현한 걸작이었다.
겸재는 어떤 비 개인 후, 여름날의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인왕산의 특색을 용감하게 뽑아내어서 화폭 속에 살려놓았다. 겸재는 백운동에 살면서 낙산에서 떠오른 해가 남산 위에 있다가 인왕산 너머로 지는 모습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았다. 그리고 겸재는 인왕산 골짜기를 계절 따라 발로 누비며 계곡 구석구석을 사생했다.
겸재는 그가 살아오면서 평생 동안 부분으로만 표현하였던 것들을 <인왕제색도>에 뭉뚱그려 그의 마음까지 더하여 극대화시켜 놓았다.
겸재가 76세 때다. '겸재준, 겸재송'은 그가 29세 때 처음으로 금강산을 보았을 때 터져나온 진경산수화법이다.
같은 화면 속에서 중국의 남북화법의 장점을 다투어 우리 것으로 이루어내었다. 화강암의 굳센 암석기를 대비로 싹싹 쓸어내리듯 죽죽 그려내려 일만이천봉을 평행집선준平行集線?으로 처리했으며 토산을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으로 부드럽게 그려 음양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다. 겸재는 성리학과 주역에도 능통했다.
나는 겸재가 화성으로 대성하기까지 성인군자의 도에서 어긋난 적이 없었고 오로지 투철한 예술혼 속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필을 놓지 않은 삶의 궤적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의 대작은 거의 대부분이 만년에 그린 작품이다. 철학적 기반이 확고한 바탕위에서 필세가 무르익었을 때 가능했다는 것을 겸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 그가 화성으로 성공하기까지는 시대적·사회적 환경이 겸재의 천재성과 아우러져서 예술혼이 활짝 꽃을 피웠다는 것도 터득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겸재는 어린시절 가난해서 사대부로 태어났어도 정치에 입문하지 못하고 화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정승판서가 되었다해도 오늘날 독보적인 이름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겸재는 그의 호가 가리키듯 '군자가 겸손하면 끝이 있으리라' 한 것처럼 평생 겸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겸재는 29세 때 금강산을 처음보고 풍악화첩 13면을 그려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겸재가 살아온 발자취를 따라서 그의 그림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산수 속에서 호흡하게 된다.
겸재 정선이 우리나라 40여 곳이 넘는 여행지를 다니면서 그린 그림을 상고하면서 200여 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시조 한 구절이 무색하다. 지금은 인걸도 산천도 변화무쌍하다.
지난 5월 <회화 四十一 대겸재>전에서 나는 드디어 내가 궁금해 했던 그림의 화제를 찾았다.
<어초문답(낚시꾼과 나무꾼이 묻고 대답한다)>.
북송의 강절 선생 소옹(1011~1077)은 <어초문답>이라는 책을 지어 어부와 초부가 문답하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학설을 피력하였다. 이와 같은 낭만적인 소재는 성리학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화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다.
간송예술관 소장으로 이명옥과 홍득구(1653~?)의 <어초문답>이 있다고 한다. 희미한 옛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겸재의 <어초문답>은 지게에 얹은 나뭇짐의 필선만 같다. 통일이 되면 단발령 정상에 올라서서 금강산을 바라보고 싶다. 금성의 피금정 냇버들이 우람찬 뚝길도 거닐고 싶다. 취미대는 그림을 보면 청와대 동쪽 일대의 북악산 기슭이 넓은 들판으로 호수처럼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초록빛 경전전(국왕이 농정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직접 농사짓던 논과 밭) 너른 들판은 지금 주택들이 촘촘하게 들어서서 희뿌연 스모그 속에 있다.
겸재의 예술혼을 얼마만큼 천착했는지 자신이 없다. 내 집안에 걸려 있던 옛 그림을 지니지 못한 죄책감이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푹 빠지게 했다. 어쨌거나 <소설 진경산수>가 독자들의 심금을 흔들어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듯하다.
목차
목차
작가의 말-아! 진경산수 13
1. 뜻이 있는 곳에 21
2. 길이 있었다 40
3. 지두화指頭畵 61
4. 아랫대 사람 78
5. 갑술환국 97
6. 산수훈山水訓 118
7. 송암복호松巖伏虎 137
8. 오르막길 159
9. 아! 진경산수 180
10. 청나라 마유병馬維屛이 겸재를 알아보다 203
11. 수레바퀴 224
12. 인왕별곡 245
참고문집 및 자료집 269
저자
저자
졸업했다. 신성고등학교, 원곡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1979년 현대문학에 소설 《風雨》로 추천완료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문원리의 봄》, 《춤추는 천사》, 《부엉이》, 장편소설 《해녀콩》,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등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이화문학상, 녹원문학상을 수상하고, 율목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만우 박영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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