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맹자』는 중국 사서(四書) 중의 하나로 맹자의 제자들이 맹자의 언행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다. 현대에 있어서 개인은 정신적인 존엄성과 개별적인 존재가치를 박탈당하고 전체라는 거대한 힘 덩어리에 의해 도식화되어 물질화되어 간다. 이러한 사람들의 사라져가는 양심에 경종을 울리게 해주는 이 책은, 우리들의 인격에 향상을 기하고, 사회 개선을 위한 인간 회복의 한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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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의 모랄리스트였던 맹자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착한 마음과 뛰어난 능력이 있어서 인의(仁義)와 대도(大道)로써 그것들을 계발하면 요(堯)임금, 순(舜)임금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에 있어서 개인은 정신적인 존엄성과 개별적인 존재가치를 박탈당하고 전체라는 거대한 힘 덩어리에 의해 도식화되어 물질화되어 간다. 이러한 사람들의 사라져가는 양심에 경종을 울리게 해주는 이 책은, 우리들의 인격에 향상을 기하고, 사회 개선을 위한 인간 회복의 한 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스스로 기르고 잘 다스린 맹자(孟子)는 그의 나이 40세가 되어서부터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맹자는 극도로 혼란했던 시대에 태어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회악(社會惡)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것을 바로잡아보려고 열의에 찬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온 세상을 인의(仁義)의 대도(大道)에 되돌아오게 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의를 창달시키는, 국민을 위주로 한 정치를 실현하게 되기를 염원했다.
당시의 제후국군(諸侯國君)들은 저마다 권모술수를 다하여 남보다 부강(富强)해지고 나아가 천하에 군림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인의의 대도를 내세우는 맹자의 주장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에는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 어느 제후국군에게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나 맹자는 많은 경험을 쌓아 사상(思想)이 원숙해진 그의 만년에 《맹자》 7편을 저술해서 후세에 세찬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확신을 기본으로 해서,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한한 기대와 변함없는 신심(信心)을 붙이고 모든 일에 임했다. 그는 패도(覇道)를 배격하고 국민 위주의 인의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시하기를 역설하는 한편, 반성과 자책을 통해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아 선으로 복귀하기를 권면했다. 《맹자》 7편에는 이러한 티 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다방면에 걸친 방책(方策)들이 활기 있게 논의되어 있으며, 또한 그것에 따른 여러 가지 비판이 전개되어 있다.
〈맹자〉는 이천수백 년 전에 저술되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으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맹자》를 통해 인격의 향상을 기하고 사회 개선을 위한 불굴의 성의를 갖게 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가능성에 고무되어 선으로 화합된 세계의 실현을 바라게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지대한 수확을 거둔 것이라 하겠다.
이번 개정판 출판을 계기로 〈맹자〉가 더욱 많이 읽혀지게 되기를 바란다.
- 차주환(전 서울대 교수)
| 편집자의 말 |
맹모의 삼천지교와 단기훈계(斷機訓戒)의 보람이 있어 맹자는 어린 시절을 올바르게 자라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장성한 후에 수학한 것에 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사기열전》에는 "맹가는 추인으로 자사(子思)의 문인으로부터 수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사기》의 기록이 연대상으로 가장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제사》에는 "자라나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스승으로 받들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맹자가 생존한 시대와 대조해보면 맹자의 청년 시절이 도저히 자사의 만년에도 미칠 수 없으므로 연대상으로 결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한 가지 《맹자외서(孟子外書)》에 나오는 말이 있다. "자사의 아들을 자상(子上)이라고 하는데, 가가 일찍이 그에게서 배운 일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맹자가 공자의 증손인 공백(孔白=子上)을 스승으로 받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맹자외서》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설의 성립도 곤란해진다. 맹자의 사승(師承) 관계가 이렇게 분명하지 않기는 하나, 《중용》과 《맹자》의 본문을 통독해보면, 맹자가 자사 계통의 유학(儒學)을 계승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맹자》 7편에는 《시경》과 《서경》에서의 인용이 많고 《예(禮》와 《춘추(春秋)》에 관한 이해의 심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맹자가 고전(古典)을 깊이 연구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게 된다.
《맹자》를 읽어보면 맹자는 제(齊) · 양(梁) · 추(鄒) · 노(魯) · 등(?) 등 여러 나라를 유력(遊歷)했음을 알게 된다. 맹자가 이러한 많은 나라를 편력한 선후의 차서에 관해서 여러 학자들이 고증을 시도한 바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의견이 구구한 것은 맹자가 양에 간 연대와 제에 간 시기의 선후문제다. 양혜왕편 하필왈리장(梁惠王篇 何必曰利章) 첫머리 "孟子見梁惠王, 王曰?" 밑에 조기(趙岐)는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 늙어서 위나라, 즉 양에 갔다고 주기(注記)했다. 이것은 《사기열전》에 따른 견해다. 맹자는 먼저 제나라에 갔다가 후에 나이가 많아졌을 때 양으로 혜왕을 만나러 갔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주병중(周柄中)은 《맹자변정(孟子辨正)》에서 맹자가 먼저 양에 갔다가 후에 제로 갔다고 주장하고, 《사기》의 기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선제후량설(先齊後梁說)과 선량후제설(先梁後齊說)은 결국 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가 제국에 유력한 차서를 매긴 것으로는 염약거(閻若?)의 《맹자생졸연월고(孟子生卒年月考)》와 임계운(任啓運)의 《맹자고략(孟子考略)》이 있다.
염약거는 맹자가 추인으로 태어나 만년에 양에 갔다가 이어 제에 출사하여 경(卿)이 되었고, 추로 돌아갔다가 또 송에 들어갔고, 악정자(樂正子) 때문에 노에 갔다가 노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임계운은 이렇게 말했다. "맹자는 젊어서는 추에서 살았고, 추에서 송에 갔다가 송에서 추로 돌아가 등으로 갔다. 신정왕(愼?王) 2년(B.C. 319)에 양에 있다가 추로 돌아갔고, 그 후 제에 갔는데 모당(母當)이 졸하자 노에 귀장하고 다시 제로 돌아갔다. 정왕(?王) 6년(B.C. 315)에 제를 떠나 송으로 갔다가 설(薛)을 거쳐 노로 돌아갔다." 맹자는 자기의 정치이념을 실현시켜 보기 위해 많은 제후국들을 유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정치사회에서 물러나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 문인들과 함께 어록이나 회고록과 유사한 성격을 띤 이《맹자》를 저술하여 만년의 심회를 달래면서 그의 일생을 끝낸 것이다.
《맹자》7편을 읽어보면 우리는 맹자가 살던 시대 환경이 얼마나 험난했었나를 알게 된다.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자기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고 한 것은 당시 사회의 질서가 극히 문란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다"고 한 것이라든지,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고, 풍년에도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당시의 민생이 얼마나 핍박하였나를 짐작하게 한다. 〈이루하(離婁下)〉에 제인유일처일첩장(齊人有一妾一妾章)의 우언(寓言)과 더불어 그 맺는 말로 "사람들이 부귀와 영달을 찾아다니는 것을 그들의 아내와 첩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고 서로 울지 아니할 자가 극히 드물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사풍(士風)이 극도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민들은 죽음을 면하기에도 바빴으므로 예의와 염치를 차릴 겨를이 없었고, 사대부들은 탐욕을 부리고 무심하기 이를 데 없어 좋은 풍속은 모조리 파괴되어가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제후국군들은 다투어 서로 정벌을 일삼아 백성들의 생명을 초개같이 희생시키고, 제후간에 서로 배신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고, 예의 같은 것은 버려둔 채 돌아보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맹자가 생존했던 때를 전국시대라고 하는 것으로도 짐작이 가지마는, 당시의 제후국군들은 끝없는 사치와 탐욕, 그것에 따르는 수탈만을 일삼는 학정, 가실 줄 모르는 침략적 야욕과 보복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무고한 평민들은 밖으로부터는 늘 전쟁의 위협을 받아야 했고, 안에서는 부패하고 잔인무도한 정치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렇듯 극도로 혼란했고, 군웅이 할거하여 서로 항쟁했던 시대였으므로 사상을 조정시킬 만한 통제력이 거세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틈을 타서 허다한 사상가들이 가지각색의 주장을 내걸고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설득시키기에 여념이 없었고, 또 도당을 규합하여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형성해서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한편 사상가들은 자가설을 강력히 내세우면서 자가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이른바 백가가 쟁명하는 판국을 조성했다. 당시 제후들이 추구하고 있던 것은 초보적으로는 부강을 이룩하는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천하를 통일해서 절대권력을 장악하는 제왕으로 군림하는 것이었다. 제후들의 이러한 의욕에 영합하는 바 되어 영화를 누릴 기회를 얻기 위해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제후들의 사이를 동분서주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맹자도 그러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고, 여러 제후들을 만나기는 하였으나 그가 내세운 인의(仁義)의 대도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주장한 것은 결국 제후들의 현실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에는 극히 우활한 것으로 여겨졌던 관계로 마침내는 아무에게도 절실하게 받아들여지는 바 되지 못했던 것이라 하겠다.
《맹자》7편에 나오는 맹자가 비판한 사상가들만 해도 종횡가(縱橫家)로 알려진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 극단적으로 여민병경주의(與民?耕主義)를 내세우던 농가(農家)인 허행(許行)과 진상(陳相), 도가(道家)의 계통을 끄는 철저한 위아주의자(爲我主義者)인 양주(楊朱)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제창한 묵적(墨翟)의 사상을 신봉하는 도당, 그 밖에 이지(夷之), 자막(子莫), 송경(宋?), 중자(仲子) 등 그 수효가 적지 않다. 맹자는 복잡다단한 사상들을 비판 배제하면서 인의의 대도를 선양하고 그 실현을 권면하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목차
목차
맹자제사(孟子題辭) 9
◎ 제1편
1.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21
2.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下) 41
◎ 제2편
3.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上) 73
4.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하(下) 95
◎ 제3편
5. 등문공장구(?文公章句) 상(上) 121
6. 등문공장구(?文公章句) 하(下) 145
◎ 제4편
7. 이루장구(離婁章句) 상(上) 173
8. 이루장구(離婁章句) 하(下) 201
◎ 제5편
9. 만장장구(萬章章句) 상(上) 231
10. 만장장구(萬章章句) 하(下) 255
◎ 제6편
11. 고자장구(告子章句) 상(上) 279
12. 고자장구(告子章句) 하(下) 301
◎ 제7편
13. 진심장구(盡心章句) 상(上) 327
14. 진심장구(盡心章句) 하(下) 358
《맹자(孟子)》해제(解題) 387
저자
저자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이 책은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7편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그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발전시켜 왕도국가의 실현과,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는 이상의 구현을 달성하고자 인의(仁義)에 의한 도덕정치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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