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연대기, 193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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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 우리, 일하는 여자들의 한 세기 ?
?강주룡-김진숙을 연결하는 페미니스트 역사 쓰기?
"1980년대 후반,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연구자로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설명하는 논의들을 마주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활동가들과 진보적인 학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들의 노동조합운동을 축복하면서 이전 시기 여성이 주도했던 노동자 투쟁에 비판의 시선을 돌렸다. 이 불공정한 관점에 맞설 효과적인 대항 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찾지 못한 나는 좌절감 속에서 식민지 시기 여성운동 연구를 접고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한국 사회운동의 젠더 관계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 격인 이철순이 던진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책을 닫으며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질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공들의 한 세기에 걸친 여정을 따라가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의 '성공'을 상상할 때 사회의 양심과 민주적 약속에 호소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정의와 존중을 요구하며 싸운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소망한 것은 여공의 시선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들의 기여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여성 산업 노동자, 즉 여공들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 십수년간 전순옥, 재니스 김, 김승경, 김원 등 국내외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연구들을 밑거름 삼아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에 걸친 여성 노동운동의 장기 역사를 제안하는 야심 찬 기획으로 2022년과 2023년 존페어뱅크상과 제임스팔레상을 수상했다. 산업화 시기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을 분석한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를 통해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자본-노동' 관계 속에서 생계부양자 역할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욕망이 투쟁의 결정적 동력이었음을 보여 주었던 저자는 이제 시대를 관통하며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운동사의 유효성을 증명해 낸다.
한국학 분야의 대표적인 노동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저자가 애초부터 노동사를 전공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기 여성운동사를 연구하던 그가 방향을 튼 것은 과거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마주하고서였다. 이에 맞서 "효과적인 대항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저자는 그 순간부터 오랫동안 "20세기 한국사를 노동과 젠더에 초점을 맞춰 다시 쓰는 작업"을 꿈꿔 왔다. 특히 이 책을 완성으로 이끈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2011년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과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소환된 강주룡이었다. 시간적 간극을 초월한 두 여성 노동자의 연결성에 매료된 저자는 식민지기 평양의 고무 공장, 해방기 부산의 방직 공장, 산업화 시기 민주노조를 이끈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계속해서 주변으로 밀려나다 비정규직 장기 투쟁 사업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여성들의 연대기를 완성해 냈다.
?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란하는 ?
? 여성 주체의 전투성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끗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근로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1931년 5월 29일 아침 을밀대 지붕 위에서 강주룡
"3월 12일 오전 8시, 주야 근무가 교차하는 시간,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공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노조 위원장이자 조방 대한노총 노조의 설립자 안종우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하는 어려운 임무를 "치밀하고 민첩"하게 수행해 낸 이외선 등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 이 여성들은 공장 내 평조합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회사 측 추산으로도 주간 근무자의 약 81퍼센트가 파업에 참여했다. 공장의 철문은 노동자들의 몸에 밀려 넘어졌고, 경찰이 정문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설치한 10여 대의 트럭은 여성 노동자들의 습격으로 - 그 안의 경찰을 꼬집고 물면서 끌어냈다고 한다 -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간 식민지기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물질적 빈곤에 대한 단순한 반발로 사상적?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운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가 발굴해 낸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전기는 이들을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주체로 재고하게 만든다. 1920, 30년대 노동운동의 고양기에 여러 사회운동의 각축장이었던 평양에서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해 나가는 강주룡의 성장기는 특히 상세한데, 이를 통해 저자는 신여성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계급의식과 정세 판단에 입각한 달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은 강주룡의 능력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무엇보다 남화숙은 '적색 노조'와의 연관 속에서 그가 "엘리트의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여공"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조선인 민족주의 엘리트와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등이 혼재하는 복잡한 운동 진영 속에서 그녀가 체험을 통해 스스로 획득했을 '해방의 지식'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을 부추긴다. 강주룡은 적색 노조와 연관된 기간이 짧고, 그전에 이미 파업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엘리트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자의식을 갖춘" "공장 여성"이라는 주체의 등장을 보여 주는 것. 이는 강주룡과 동료들이 "아사동맹"을 조직하고 "곱비끈흔 노우와가티" "공장을 습격"하며 "파업깨기꾼의 출퇴근을 방해"하는 등의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하는 양상에서도 잘 재현된다.
이 같은 여성 노동자 주체의 전투성은 해방 정국 부산의 조선방직(조방)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로 평가받는 조방 쟁의에서 1천여명에 달하는 조방 여성들은 전시 수도 부산의 임시국회 건물 앞에 이 모여 데모를 하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단 하루 만에 6천여명이 참여하는 파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이 같은 공장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고수익이었고 안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또 전시 상황에서 이런 일자리를 잃을 경우 "사회의 밑바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이 해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최전선에서 수개월을 버텨 낸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파업의 패배 후 해고된 여공 600명 이상이 실제로 성매매 등 "사회의 밑바닥으로 전락"했다는 당대의 기록은 이 같은 투쟁에서 그들이 가졌을 자의식과 굳은 의지에 대한 상상을 더한다. 비록 자신들은 패배했지만 이 같은 전투적 파업은 노동 입법을 자극했고, 1953년 공포된 노동법을 통해 한국에서 노동조합은 기업 측의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직 노동운동의 제도화와 세력 강화로 여성의 역할은 평조합원으로서 남성 지도부에 의해 동원되는 보병의 역할로 축소되고 만다.
? 페미니스트 의식의 등장, 기수회 ?
기존 논의들은 1970년대를 - 민주화 운동 전반에서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민주노조 운동에서조차 - 젠더 문제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기로 간주해 왔다.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고전이 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구해근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성적 이슈가 거의 모든 노동쟁의에서 제기되지 않았다면서 "출산휴가와 공정한 승진 기회를 얻기 위해 싸웠"던 콘트롤데이타의 사례만을 "작은 예외"로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남화숙은 그 시점을 앞당겨 기수회의 등장을 근거로 197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스트 의식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며 여성만의 특수 의제를 제기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저자가 보기에 1976년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노동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난 여공들이 결성한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는 노동운동 대의에 여성 노동자 스스로가 여성해방 대의를 통합해 넣은 최초의 사례에 해당하며, 기수회 회원들은 여러 민주노조들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높은 수준의 페미니스트 의식과 그에 입각한 투쟁을 보여 주었다. 기존의 연구들은 운동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경험하는 성차별적 관행에 얼마나 민감했고 또 저항했는지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기수회 자체는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탄압의 여파로 1979년 사라지지만, 당시 기수회에서 이루어졌던 젠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여성 노조 활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콘트롤데이타 노조, 원풍모방 노조 등 기수회 회원들이 주도한 일부 노조에서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성별 특수 과제들-생리휴가를 무급휴가로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관리직에게만 지급하던 상여금을 여성 생산직에게도 지급하며, 결혼 퇴직제 같은 관행을 폐지하는 등-이 투쟁의 핵심 목표로 부상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 같은 변화의 양상에 입각해 보면, 여성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 사수 투쟁은 계급적 이익 추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자'임에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공순이'라는 단어가 강요한 고통스러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적 회의, 교육 프로그램, 그룹 활동, 시위, 농성, 국가 폭력과 사측에 의한 폭력을 경험하며 주체성의 변화를 겪는 동시에 노조 활동을 통해 직장 문화와 주변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든든해서 안 먹어도 막 배가 부르고 세상에 겁나는 게 없고 우리들한테 요구에 수그리고 들어온다 느끼니까 막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정말 든든한 기분으로 그때 회사에 다녔어요. 너무나 멋있게 그래서 세상에 겁날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웃에 다른 데 노동자들이 이제 노동조합 결성한다고 하면 막 쏘낙비를 맞으면서도 그냥 노동조합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힘이 있는 거고." / 콘트롤데이타 노조 한명희 증언
하지만 이 모든 변화의 가능성들은 1980년 5월 광주 학살로 닫혀 버리고 만다.
? 남성 중심 노조의 역사와 대항 서사 ?
체공녀 연대기가 구성해 낸 여성노동운동사는 남성 중심 노조운동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1930년 평양의 고무 총파업이 패배한 주요 요인은 공장 가동이 재개되고 남성 기술직들이 등을 돌려 업무에 복귀한 데 있었다. 해방 후 조방 파업을 통해 노동법 입안과 단체교섭권을 확보한 노조들은 섬유산업과 같이 여성이 지배적인 부문에서조차 남성이 주도권을 쥐게 됐는데, 여성 평조합원이 반기를 드는 1970년대까지 이들 노조는 가장 부패한 산별노조 중 하나였다. 산업화 시기 제도화된 기존 노조는 - 한국노총 본부부터 지역 단위 노조까지 - 생산성 향상을 위한 '애국적' 노력에 조합원을 동원하는 임무에 집중하면서 정부와 사측의 지시를 따라야 했는데, 이에 따라 거의 모든 산별노조가 어용화되었으며, 이런 노조들과 대비해 청계피복,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콘트롤데이타 등 스스로를 민주노조로 정체화한 곳들은 모두가 여성 지배적 제조업에서 등장한 노조들이었다.
이들 민주노조는 사측과 정부 당국의 노조 와해 공작에 맞서 투쟁하며 성장했는데, 많은 경우 상급 산별노조는 이를 외면하거나 사측의 편에 섰다. 당시 민주노조의 여성들이 특히 외부 지지자들과 강한 유대를 유지하면서 색깔 공세의 표적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요인 때문이었다. 사측의 노조 와해 공작은 "남자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성별 분리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남직원들은 "여자들 치마폭에 쌓여 그 밑에서 일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여성 노조 지도부에 대한 지지를 꺼렸다. 여기에는 이들이 대개 고임금 안정적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도 컸는데, 폐업 가능성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 과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보수적인 성규범이 결합해 이들은 노조에 쉽게 등을 돌리곤 했고, 때로는 구사대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1970, 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도운동사는 고도로 성애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동일방직의 나체 시위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유명한 민주노조 사례들을 재기술하기보다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전남방직 '김 양'의 자살이 미친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여성들만의 민주노조가 조직화되고 확산되는 방식의 특징을 차별적으로 재현해 낸다. 전태일보다 앞선 1962년, 25세 전남방직 여공 김 양의 죽음은 (비록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전국적 이슈가 되진 못했지만) 광주에서 JOC운동이 발전하는 촉매제가 된다. 이 같은 조직화는 주로 '투사 리더'가 이끄는 소규모 팀에서 일상의 힘든 경험들을 공유하고 서로를 일깨우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970년대 후반 광주-전남 지역의 JOC 소그룹은 훈련받은 노동자들이 다시 나가서 또 다른 그룹을 만드는 방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주류 운동권 서사는 전태일이라는 하나의 불꽃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민주노조 운동의 여명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쏘아올린 작은 불꽃들은 외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 그 많던 여공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비정규직의 얼굴로 다시 나타난 여성 노동자
"70년대 노동운동은 연대 투쟁하지 않았다는데 70년대만큼 연대 투쟁한 적도 없어. 연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조합원들 다른 사업장 싸움 때문에 얼마나 두드려 맞고 경찰서를 내 집 드나들듯이 했는데. …… 집회라는 집회는 다 쫓아다녔지. 우린 안간힘을 써서 했어. 그게 연대지." / 원풍모방 박순희
"이 여성 노동자들은 다 뭐가 되어 있습니까? 비정규직이 되어 있지요. 지하철에서 청소용역 노동자들, 학교에서 청소하시는 노동자들 다 그 시절에 그렇게 일했던 노동자들이에요." / 2017년 9월 김진숙의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특강 중에서
1980년 광주학살의 충격 아래 활동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이 개별 사업장에 국한된 경제투쟁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개별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와 정치투쟁을 옹호하고, 더욱더 체계적인 노학 연대를 강조했다. 이런 부당한 '비난의 칼'은 학출 운동가들과 소위 '선진 노동자'들이 초창기 민주노조 운동의 베테랑 여성 활동가들을 향해 휘두른 것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의 베테랑들은 노조를 민주화하고 생활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산업구조 변동으로 공단의 여공들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어제의 산업역군이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산업 쓰레기로 전락하면서 1987년 4만4856명이 일하던 서울 구로공단의 종업원 수는 6년 만에 2만7027명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인력 규모도 2만8022명에서 1만799명으로 감소했지만 여공의 대규모 퇴출은 사회에서도, 조직 노동운동에서도 경각심이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여성들이 딛고 서있던 투쟁의 토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럼에도 21세기 들어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이 또다시, 이번에는 노동시장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새로운 노동운동의 '불씨'를 퍼뜨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부상한 것일까?
저자는 1970년대 여공과 오늘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사이의 구조적 연결성을 지적한다. 1970년대 중반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던 여공이 임금노동자로 계속 일했다면 2000년대에는 40~50대의 중년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다. 여성의 공장 일자리 소멸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속에서 이 시기에는 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1970년대 여공의 역사로부터 분리된 진보적 지식인들과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이 같은 연결성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은 비정규직을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노동 착취 형태로 규정하며 이들 여공의 前史를 지워버린다. 이들에게 비정규직의 경험은 오래전부터 일상이었지만 남성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정규직 담론과 비정규직 조직화 전략의 초점은 남성 노동자들의 새로운 시련, 특히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의 몰락에 맞춰졌다.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의 핵심 동기가 남성 생계 부양자의 일자리를 지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총 남성 지도부가 여성 조합원의 굴곡 많은 고용 이력이나 과거 성별 노동시장 분절의 역사에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성 노조 지도부에게 이들 40, 50대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의 지도를 받는 신참 노조원일 뿐이었다.
'김진숙'이라는 난제
한 세기를 넘어 강주룡을 소환하게 한 크레인 고공농성의 주인공 김진숙은 남성 노조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복잡한 질문을 제기하는 존재였다. 남성들로 가득한 거대한 조선소의 여성 용접공 김진숙이 1980년대 중반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물한 살의 "처녀 용접공"은 어떻게 그토록 남성적인 환경에서 신뢰받는 노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페미니스트들은 김진숙의 자기 재현이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의 '형제'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노동자'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여성' 정체성에 괄호를 치는 방식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들은 김진숙이 동료 노동자에 대한 연대를 충분히 표명하기 위해, 또 남성 중심의 노조 운동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남성적인 자질들을 전유하고 남성적 주체, 특히 "'남성 가장'의 자리에서 발화한다"고 지적했다. 김진숙의 글과 증언에서 작업장 내 만연한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미묘하게 억압된 채로 계속 출몰"하기는 하지만, 2010년대 이전 김진숙의 재현 전략은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적이고 몰성화된 노동운동 담론을 지탱하는 쪽으로 영향을 미쳤다. 금속 노동자 투쟁에서 존재감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숙의 존재는 운동 내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발하지 못했고, 여성 조합원들이 부차적인 - 가족 구성원이나 기껏해야 남성 정치 주체의 조력자라는 -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게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 일반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남화숙은 김진숙의 전 생애사를 촘촘하게 재구성하며 이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십대 때 집을 나와 열악한 여성 일자리들을 전전하다 대공장 엘리트 인력 대열에 합류하게 된 김진숙의 전사前史는 그에게 대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지를 가늠케 한다. 또 동료들과 민주노조를 만들어 나가며 아저씨 노동자들과 "끈끈한 형제애적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 역시 그가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왜 그토록 헌신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 있게 방증한다.
그러나 한진의 일부 남성 노조원들에게 그의 성별은 계속 당혹스러운 난제로 남아 있었다. 남성 중심의 금속 노조 운동에서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유일한 노동운동 지도자라는 그의 독특한 위치는 어떤 남성들에겐 개념적 도전이었다. 2010년 단식투쟁과 2011년 크레인 농성 당시 노조 지도부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의 대중적 리더십이 노조 내에서 상당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김진숙의 입장에도 2000년대 초반부터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있지 못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 예를 들어 2003년 「김주익 추모사」에서 김진숙은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 2010년의 해고 반대 단식 중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노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은 2011년의 크레인 고공 농성 경험이었다. 당시 희망버스를 통해 다양한 그룹의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을 한 이후(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그는 연대의 범위를 훨씬 넓혀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 대중강연에서 김진숙은 만연한 성희롱과 저속한 성적 언사에 시달렸던 자신의 직장 생활 경험을 회상하며 최근에야 그것을 '여혐'(여성혐오)이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그는 음담패설을 일삼는 사람들이 평소 자신을 도와주고 믿어 주던 '선량한 아저씨'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와 같이 오랜 세월 조선소 남성 동료들과 함께 싸워온 김진숙이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조운동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확장해 가는 과정과 희망버스 운동이 남성적 노동운동 문화에 균열을 가하는 장면들을 포착해 내면서 위기를 맞은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질문한다.
?강주룡-김진숙을 연결하는 페미니스트 역사 쓰기?
"1980년대 후반,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연구자로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설명하는 논의들을 마주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활동가들과 진보적인 학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들의 노동조합운동을 축복하면서 이전 시기 여성이 주도했던 노동자 투쟁에 비판의 시선을 돌렸다. 이 불공정한 관점에 맞설 효과적인 대항 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찾지 못한 나는 좌절감 속에서 식민지 시기 여성운동 연구를 접고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한국 사회운동의 젠더 관계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그런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때 그대들이 없었더라면...?'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 격인 이철순이 던진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책을 닫으며 독자에게 남기고 싶은 질문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공들의 한 세기에 걸친 여정을 따라가면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어려운 과제를 모두 달성한 대한민국의 '성공'을 상상할 때 사회의 양심과 민주적 약속에 호소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정의와 존중을 요구하며 싸운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소망한 것은 여공의 시선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들의 기여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여성 산업 노동자, 즉 여공들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최근 십수년간 전순옥, 재니스 김, 김승경, 김원 등 국내외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진행돼 왔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연구들을 밑거름 삼아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까지 100여 년에 걸친 여성 노동운동의 장기 역사를 제안하는 야심 찬 기획으로 2022년과 2023년 존페어뱅크상과 제임스팔레상을 수상했다. 산업화 시기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을 분석한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를 통해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국가-자본-노동' 관계 속에서 생계부양자 역할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욕망이 투쟁의 결정적 동력이었음을 보여 주었던 저자는 이제 시대를 관통하며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운동사의 유효성을 증명해 낸다.
한국학 분야의 대표적인 노동사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저자가 애초부터 노동사를 전공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기 여성운동사를 연구하던 그가 방향을 튼 것은 과거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마주하고서였다. 이에 맞서 "효과적인 대항서사를 꾸릴 언어나 도움이 될 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노동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한 저자는 그 순간부터 오랫동안 "20세기 한국사를 노동과 젠더에 초점을 맞춰 다시 쓰는 작업"을 꿈꿔 왔다. 특히 이 책을 완성으로 이끈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2011년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과 한 세기를 넘어 다시 소환된 강주룡이었다. 시간적 간극을 초월한 두 여성 노동자의 연결성에 매료된 저자는 식민지기 평양의 고무 공장, 해방기 부산의 방직 공장, 산업화 시기 민주노조를 이끈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민주화 이후 계속해서 주변으로 밀려나다 비정규직 장기 투쟁 사업장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여성들의 연대기를 완성해 냈다.
?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교란하는 ?
? 여성 주체의 전투성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끗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근로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 1931년 5월 29일 아침 을밀대 지붕 위에서 강주룡
"3월 12일 오전 8시, 주야 근무가 교차하는 시간,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공장 정문으로 쏟아져 나와 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노조 위원장이자 조방 대한노총 노조의 설립자 안종우는 단 하루 만에 파업을 조직하는 어려운 임무를 "치밀하고 민첩"하게 수행해 낸 이외선 등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 이 여성들은 공장 내 평조합원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회사 측 추산으로도 주간 근무자의 약 81퍼센트가 파업에 참여했다. 공장의 철문은 노동자들의 몸에 밀려 넘어졌고, 경찰이 정문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설치한 10여 대의 트럭은 여성 노동자들의 습격으로 - 그 안의 경찰을 꼬집고 물면서 끌어냈다고 한다 -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간 식민지기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물질적 빈곤에 대한 단순한 반발로 사상적?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운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가 발굴해 낸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전기는 이들을 다양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주체로 재고하게 만든다. 1920, 30년대 노동운동의 고양기에 여러 사회운동의 각축장이었던 평양에서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해 나가는 강주룡의 성장기는 특히 상세한데, 이를 통해 저자는 신여성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계급의식과 정세 판단에 입각한 달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은 강주룡의 능력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무엇보다 남화숙은 '적색 노조'와의 연관 속에서 그가 "엘리트의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여공"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조선인 민족주의 엘리트와 사회주의 운동, 아나키스트 등이 혼재하는 복잡한 운동 진영 속에서 그녀가 체험을 통해 스스로 획득했을 '해방의 지식'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을 부추긴다. 강주룡은 적색 노조와 연관된 기간이 짧고, 그전에 이미 파업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엘리트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 자의식을 갖춘" "공장 여성"이라는 주체의 등장을 보여 주는 것. 이는 강주룡과 동료들이 "아사동맹"을 조직하고 "곱비끈흔 노우와가티" "공장을 습격"하며 "파업깨기꾼의 출퇴근을 방해"하는 등의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하는 양상에서도 잘 재현된다.
이 같은 여성 노동자 주체의 전투성은 해방 정국 부산의 조선방직(조방)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로 평가받는 조방 쟁의에서 1천여명에 달하는 조방 여성들은 전시 수도 부산의 임시국회 건물 앞에 이 모여 데모를 하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단 하루 만에 6천여명이 참여하는 파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에게 이 같은 공장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고수익이었고 안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또 전시 상황에서 이런 일자리를 잃을 경우 "사회의 밑바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들이 해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최전선에서 수개월을 버텨 낸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파업의 패배 후 해고된 여공 600명 이상이 실제로 성매매 등 "사회의 밑바닥으로 전락"했다는 당대의 기록은 이 같은 투쟁에서 그들이 가졌을 자의식과 굳은 의지에 대한 상상을 더한다. 비록 자신들은 패배했지만 이 같은 전투적 파업은 노동 입법을 자극했고, 1953년 공포된 노동법을 통해 한국에서 노동조합은 기업 측의 정당한 파트너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직 노동운동의 제도화와 세력 강화로 여성의 역할은 평조합원으로서 남성 지도부에 의해 동원되는 보병의 역할로 축소되고 만다.
? 페미니스트 의식의 등장, 기수회 ?
기존 논의들은 1970년대를 - 민주화 운동 전반에서뿐만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한 민주노조 운동에서조차 - 젠더 문제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시기로 간주해 왔다.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고전이 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구해근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성적 이슈가 거의 모든 노동쟁의에서 제기되지 않았다면서 "출산휴가와 공정한 승진 기회를 얻기 위해 싸웠"던 콘트롤데이타의 사례만을 "작은 예외"로 언급할 뿐이다. 하지만 남화숙은 그 시점을 앞당겨 기수회의 등장을 근거로 197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스트 의식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며 여성만의 특수 의제를 제기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저자가 보기에 1976년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노동교육 프로그램에서 만난 여공들이 결성한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는 노동운동 대의에 여성 노동자 스스로가 여성해방 대의를 통합해 넣은 최초의 사례에 해당하며, 기수회 회원들은 여러 민주노조들에서 간부로 활동하며 높은 수준의 페미니스트 의식과 그에 입각한 투쟁을 보여 주었다. 기존의 연구들은 운동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경험하는 성차별적 관행에 얼마나 민감했고 또 저항했는지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기수회 자체는 아카데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탄압의 여파로 1979년 사라지지만, 당시 기수회에서 이루어졌던 젠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여성 노조 활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콘트롤데이타 노조, 원풍모방 노조 등 기수회 회원들이 주도한 일부 노조에서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성별 특수 과제들-생리휴가를 무급휴가로 단체협약에 명시하고, 관리직에게만 지급하던 상여금을 여성 생산직에게도 지급하며, 결혼 퇴직제 같은 관행을 폐지하는 등-이 투쟁의 핵심 목표로 부상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 같은 변화의 양상에 입각해 보면, 여성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조 사수 투쟁은 계급적 이익 추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에 몸담았던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자'임에 자긍심을 갖게 되었고 '공순이'라는 단어가 강요한 고통스러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적 회의, 교육 프로그램, 그룹 활동, 시위, 농성, 국가 폭력과 사측에 의한 폭력을 경험하며 주체성의 변화를 겪는 동시에 노조 활동을 통해 직장 문화와 주변의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든든해서 안 먹어도 막 배가 부르고 세상에 겁나는 게 없고 우리들한테 요구에 수그리고 들어온다 느끼니까 막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은 정말 든든한 기분으로 그때 회사에 다녔어요. 너무나 멋있게 그래서 세상에 겁날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웃에 다른 데 노동자들이 이제 노동조합 결성한다고 하면 막 쏘낙비를 맞으면서도 그냥 노동조합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힘이 있는 거고." / 콘트롤데이타 노조 한명희 증언
하지만 이 모든 변화의 가능성들은 1980년 5월 광주 학살로 닫혀 버리고 만다.
? 남성 중심 노조의 역사와 대항 서사 ?
체공녀 연대기가 구성해 낸 여성노동운동사는 남성 중심 노조운동의 흑역사이기도 하다.
1930년 평양의 고무 총파업이 패배한 주요 요인은 공장 가동이 재개되고 남성 기술직들이 등을 돌려 업무에 복귀한 데 있었다. 해방 후 조방 파업을 통해 노동법 입안과 단체교섭권을 확보한 노조들은 섬유산업과 같이 여성이 지배적인 부문에서조차 남성이 주도권을 쥐게 됐는데, 여성 평조합원이 반기를 드는 1970년대까지 이들 노조는 가장 부패한 산별노조 중 하나였다. 산업화 시기 제도화된 기존 노조는 - 한국노총 본부부터 지역 단위 노조까지 - 생산성 향상을 위한 '애국적' 노력에 조합원을 동원하는 임무에 집중하면서 정부와 사측의 지시를 따라야 했는데, 이에 따라 거의 모든 산별노조가 어용화되었으며, 이런 노조들과 대비해 청계피복,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콘트롤데이타 등 스스로를 민주노조로 정체화한 곳들은 모두가 여성 지배적 제조업에서 등장한 노조들이었다.
이들 민주노조는 사측과 정부 당국의 노조 와해 공작에 맞서 투쟁하며 성장했는데, 많은 경우 상급 산별노조는 이를 외면하거나 사측의 편에 섰다. 당시 민주노조의 여성들이 특히 외부 지지자들과 강한 유대를 유지하면서 색깔 공세의 표적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요인 때문이었다. 사측의 노조 와해 공작은 "남자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성별 분리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남직원들은 "여자들 치마폭에 쌓여 그 밑에서 일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여성 노조 지도부에 대한 지지를 꺼렸다. 여기에는 이들이 대개 고임금 안정적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도 컸는데, 폐업 가능성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감 과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보수적인 성규범이 결합해 이들은 노조에 쉽게 등을 돌리곤 했고, 때로는 구사대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1970, 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도운동사는 고도로 성애화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동일방직의 나체 시위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유명한 민주노조 사례들을 재기술하기보다는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전남방직 '김 양'의 자살이 미친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여성들만의 민주노조가 조직화되고 확산되는 방식의 특징을 차별적으로 재현해 낸다. 전태일보다 앞선 1962년, 25세 전남방직 여공 김 양의 죽음은 (비록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전국적 이슈가 되진 못했지만) 광주에서 JOC운동이 발전하는 촉매제가 된다. 이 같은 조직화는 주로 '투사 리더'가 이끄는 소규모 팀에서 일상의 힘든 경험들을 공유하고 서로를 일깨우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970년대 후반 광주-전남 지역의 JOC 소그룹은 훈련받은 노동자들이 다시 나가서 또 다른 그룹을 만드는 방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저자는 주류 운동권 서사는 전태일이라는 하나의 불꽃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민주노조 운동의 여명기에 여성 노동자들이 쏘아올린 작은 불꽃들은 외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 그 많던 여공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비정규직의 얼굴로 다시 나타난 여성 노동자
"70년대 노동운동은 연대 투쟁하지 않았다는데 70년대만큼 연대 투쟁한 적도 없어. 연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조합원들 다른 사업장 싸움 때문에 얼마나 두드려 맞고 경찰서를 내 집 드나들듯이 했는데. …… 집회라는 집회는 다 쫓아다녔지. 우린 안간힘을 써서 했어. 그게 연대지." / 원풍모방 박순희
"이 여성 노동자들은 다 뭐가 되어 있습니까? 비정규직이 되어 있지요. 지하철에서 청소용역 노동자들, 학교에서 청소하시는 노동자들 다 그 시절에 그렇게 일했던 노동자들이에요." / 2017년 9월 김진숙의 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특강 중에서
1980년 광주학살의 충격 아래 활동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이 개별 사업장에 국한된 경제투쟁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개별 사업장을 넘어선 연대와 정치투쟁을 옹호하고, 더욱더 체계적인 노학 연대를 강조했다. 이런 부당한 '비난의 칼'은 학출 운동가들과 소위 '선진 노동자'들이 초창기 민주노조 운동의 베테랑 여성 활동가들을 향해 휘두른 것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의 베테랑들은 노조를 민주화하고 생활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통해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산업구조 변동으로 공단의 여공들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어제의 산업역군이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산업 쓰레기로 전락하면서 1987년 4만4856명이 일하던 서울 구로공단의 종업원 수는 6년 만에 2만7027명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인력 규모도 2만8022명에서 1만799명으로 감소했지만 여공의 대규모 퇴출은 사회에서도, 조직 노동운동에서도 경각심이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공장 여성들이 딛고 서있던 투쟁의 토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럼에도 21세기 들어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이 또다시, 이번에는 노동시장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어나 새로운 노동운동의 '불씨'를 퍼뜨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부상한 것일까?
저자는 1970년대 여공과 오늘날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사이의 구조적 연결성을 지적한다. 1970년대 중반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던 여공이 임금노동자로 계속 일했다면 2000년대에는 40~50대의 중년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다. 여성의 공장 일자리 소멸과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속에서 이 시기에는 이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1970년대 여공의 역사로부터 분리된 진보적 지식인들과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이 같은 연결성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은 비정규직을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노동 착취 형태로 규정하며 이들 여공의 前史를 지워버린다. 이들에게 비정규직의 경험은 오래전부터 일상이었지만 남성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정규직 담론과 비정규직 조직화 전략의 초점은 남성 노동자들의 새로운 시련, 특히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의 몰락에 맞춰졌다.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의 핵심 동기가 남성 생계 부양자의 일자리를 지키는 데 있었기 때문에 민주노총 남성 지도부가 여성 조합원의 굴곡 많은 고용 이력이나 과거 성별 노동시장 분절의 역사에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성 노조 지도부에게 이들 40, 50대 여성 노동자들은 그들의 지도를 받는 신참 노조원일 뿐이었다.
'김진숙'이라는 난제
한 세기를 넘어 강주룡을 소환하게 한 크레인 고공농성의 주인공 김진숙은 남성 노조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에게 복잡한 질문을 제기하는 존재였다. 남성들로 가득한 거대한 조선소의 여성 용접공 김진숙이 1980년대 중반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에 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물한 살의 "처녀 용접공"은 어떻게 그토록 남성적인 환경에서 신뢰받는 노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페미니스트들은 김진숙의 자기 재현이 조선소 남성 노동자들의 '형제'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노동자'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여성' 정체성에 괄호를 치는 방식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들은 김진숙이 동료 노동자에 대한 연대를 충분히 표명하기 위해, 또 남성 중심의 노조 운동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남성적인 자질들을 전유하고 남성적 주체, 특히 "'남성 가장'의 자리에서 발화한다"고 지적했다. 김진숙의 글과 증언에서 작업장 내 만연한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미묘하게 억압된 채로 계속 출몰"하기는 하지만, 2010년대 이전 김진숙의 재현 전략은 전반적으로 남성 중심적이고 몰성화된 노동운동 담론을 지탱하는 쪽으로 영향을 미쳤다. 금속 노동자 투쟁에서 존재감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진숙의 존재는 운동 내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발하지 못했고, 여성 조합원들이 부차적인 - 가족 구성원이나 기껏해야 남성 정치 주체의 조력자라는 - 지위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게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 일반적인 평가였다.
하지만 남화숙은 김진숙의 전 생애사를 촘촘하게 재구성하며 이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십대 때 집을 나와 열악한 여성 일자리들을 전전하다 대공장 엘리트 인력 대열에 합류하게 된 김진숙의 전사前史는 그에게 대공장 정규직 일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을지를 가늠케 한다. 또 동료들과 민주노조를 만들어 나가며 아저씨 노동자들과 "끈끈한 형제애적 공동체"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 역시 그가 그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왜 그토록 헌신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력 있게 방증한다.
그러나 한진의 일부 남성 노조원들에게 그의 성별은 계속 당혹스러운 난제로 남아 있었다. 남성 중심의 금속 노조 운동에서 전국적 인지도를 가진 유일한 노동운동 지도자라는 그의 독특한 위치는 어떤 남성들에겐 개념적 도전이었다. 2010년 단식투쟁과 2011년 크레인 농성 당시 노조 지도부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의 대중적 리더십이 노조 내에서 상당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김진숙의 입장에도 2000년대 초반부터 중요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있지 못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 예를 들어 2003년 「김주익 추모사」에서 김진숙은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 2010년의 해고 반대 단식 중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민주노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결정적 전환점이 된 것은 2011년의 크레인 고공 농성 경험이었다. 당시 희망버스를 통해 다양한 그룹의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을 한 이후(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각자 다른 깃발을 들고도 한 버스에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그는 연대의 범위를 훨씬 넓혀 생각하고 페미니즘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 대중강연에서 김진숙은 만연한 성희롱과 저속한 성적 언사에 시달렸던 자신의 직장 생활 경험을 회상하며 최근에야 그것을 '여혐'(여성혐오)이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그는 음담패설을 일삼는 사람들이 평소 자신을 도와주고 믿어 주던 '선량한 아저씨'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와 같이 오랜 세월 조선소 남성 동료들과 함께 싸워온 김진숙이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노조운동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확장해 가는 과정과 희망버스 운동이 남성적 노동운동 문화에 균열을 가하는 장면들을 포착해 내면서 위기를 맞은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질문한다.
목차
목차
서론 009
1장 식민지 평양에 체공녀가 나타났다 023
2장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여공 079
3장 파업 여공, 근대적 주체의 등장: 식민 통치하 민족?계급?성의 문제 127
4장 격동의 1950년대 여성 노동자 175
5장 산업화 시대 노조를 이끈 여자들 221
6장 민주화 이후 여성 노동자와 기억의 정치 303
감사의 글 369
참고문헌 375
1장 식민지 평양에 체공녀가 나타났다 023
2장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여공 079
3장 파업 여공, 근대적 주체의 등장: 식민 통치하 민족?계급?성의 문제 127
4장 격동의 1950년대 여성 노동자 175
5장 산업화 시대 노조를 이끈 여자들 221
6장 민주화 이후 여성 노동자와 기억의 정치 303
감사의 글 369
참고문헌 375
저자
저자
남화숙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의 워싱턴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타 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워싱턴 대학교 잭슨국제대학 및 역사학과에서 주로 한국사와 노동사를 강의했다. Journal of Korean Studies 공동 편집인, 아시아학회 한국학위원회 위원장, 워싱턴대학교 한국학 프로그램장 등을 역임했고, 『사회와 역사』 『역사와 현실』의 해외 편집위원을 맡아 일했다. 주로 해방 후부터 박정희 시기까지의 노동사, 여성사, 지성사를 연구해 왔으며, 저서로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로 2011년 아시아학회가 한국학 분야에 수여하는 '제임스 팔레 저작상'을 수상했으며, 『체공녀 연대기, 1931~2011』로 제임스 팔레 저작상(2023)과 미국역사학회가 동아시아 역사 부문에 수여하는 존 페어뱅크상(2022)을 수상했다.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로 2011년 아시아학회가 한국학 분야에 수여하는 '제임스 팔레 저작상'을 수상했으며, 『체공녀 연대기, 1931~2011』로 제임스 팔레 저작상(2023)과 미국역사학회가 동아시아 역사 부문에 수여하는 존 페어뱅크상(2022)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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