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두 진리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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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위대한 두 진리』. 이 책은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과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저자는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을 전개한다.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종합『위대한 두 진리』. 이 책은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과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저자는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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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논제에 대한 뛰어난 개관. 그리핀 박사는 독특한 정교성을 갖고서, 자연주의와 기독교 사상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과정신학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God and Contemporary Science』 저자.
"종교연구의 탁월한 작업. 데이비드 그리핀은 명료하고도 매력적인 특징을 지닌 합리적인 사고체계 속에서 새로운 과학적 자연주의와 당당한 기독교 신앙을 융합시켰다."
― 찰스 버취, 시드니 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1990년 템플턴상 수상자.
"권위 있는 신학 작품. 그리핀 박사는 놀라운 설득력으로 하나님의 힘, 창조, 사랑, 삼위일체, 부활과 같은 핵심적인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풍부하게 역사화된 논증을 통해서 포스트모던 범재신론의 '정중한 확신'을 실행시킨다. 이 책의 내용은 과정신학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이트헤드 학파의 관점을 소개하며 심화시킬 것이다."
― 케서린 켈러, 드류 대학 조직신학 교수, 『Face of the Deep』의 저자.
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이 책은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지은이의 책이다.
근대 이후 그 골은 더욱 깊어져,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서 때때로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그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온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 또는 그것이 정당하게 전제해 온 형태의 자연주의와 기독교 복음이 지닌 본래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 온 기독교 신앙 이 둘 사이에 본래적인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유신론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적대적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리핀은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그리핀은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전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져 가던 18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신학 방법론이 열정의 진실함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해명의 깊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만일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Naturalismsam)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도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기독교 신학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라고 하겠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으로, 독립의 순수만으로,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이안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들은 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어가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될 것이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될 것이며,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서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갈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primary doctrine"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내용 소개
1장에서는 지난 2세기 동안 발전되어 온 과학적 자연주의가 매우 모호한 운동이었음을 밝힌다. 한편으로 과학적 자연주의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인과과정에 초자연적 간섭이 있을 수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여 확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 자연주의는 이 진리를 감각주의적, 무신론적, 유물론적 형태로 만들어 왜곡시켰고, 이로써 우리가 지닌 가장 깊은 도덕적 ? 종교적 신념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리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학 자체를 위해서도 부적합한 것이 되게 하였음을 논증한다.
2장에서는 기독교 역시 매우 모호한 운동이었음을 밝힌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 가르침들은 보편적인 중요성을 지닌 위대한 진리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기독교는 이 본래적인 가르침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과 모순되는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교리들에 의지하여, 그 본래적 가르침들의 빛을 잃게 만들고 결국 위대한 진리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왜곡 가운데 중심적인 것이 신의 전능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특히 우리 세계가 절대적 무로부터 피조되었다는 교리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그것은 신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세부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수한 왜곡을 가져왔다. 그중 하나는 악에 관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든 것으로써, 우리 세계를 선하고 자비로운 신적 존재가 창조했다는 본래적 가르침이 이 교리로 손상되었다. 신의 전능이라는 관념은 또한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 질서의 유지를 도왔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신은 정의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기도문을 통해 간구하는 "이 땅 위에서의 신의 통치"를 신 역시 추구한다는 것을 말해 온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본래적 가르침을 침식시켰다. 세 번째의 왜곡은 신의 사랑으로부터 기독교 자체로 관심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기독교는 신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한 대가로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라고 주장되었다.
3장에서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종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 가르침들과 과학이 요구하는 자연주의 사상 양자 모두에게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종합을 기술하기 전에, 저자가 자연주의<샘>이라고 부르는 근대 후기의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에 어떠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근대 자유주의 신학 즉 근대 후기 이신론의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과학 공동체의 세계관과 조화시키려고 하였던 신학 운동에 대하여 논증한다. 4장에서는 1, 2장에서 풀어낸 왜곡된 두 진리, 즉 신의 사랑으로부터 기독교 자체로 관심을 이동시킨 왜곡. 이로써 기독교는 신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한 대가로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라고 주장되었던 왜곡을 주목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서문
근대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실제적인 면과 지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제기된 이런 지적인 도전들 중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근대과학의 세계관과 갈등 속에서 보여준 널리 알려진 광경이다. 이것은 종종 "과학과 종교," "과학과 기독교 신앙," 또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기독교 신앙이 과학 자체와 갈등을 가질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 지구의 나이가 단지 몇 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 혹은 인간은 직접 창조되었지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지 않았다는 생각 등 천문학이나 지질학 그리고 생물학과 같은 경험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것들로 인해 도전받는 여러 관념들과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러한 관념들과 결합된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들에게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도전이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이 결합하고 있는 세계관, 즉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널리 불리는 세계관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 도전이 보다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경험 사실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과학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는 근대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인들과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이 존재하게 된 까닭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단지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지닌 그 어떤 종교적 세계관이라도 제어를 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널리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부분적인 실마리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에 깊은 혼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이 혼동은 과학적 자연주의의 두 가지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기초적generic 혹은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단지 이 세계의 기본적인 인과과정에 초자연주의적 개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 분명히 이런 의미 의 과학적 자연주의가 그동안 나타났던 여러 모양의 기독교 신앙과 갈등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 자체와 갈등을 빚는다거나 건강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까지 억제한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나는 거기에 갈등이 있지 않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이런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인들이 열렬하게 채택해야만 할 위대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이 위대한 진리가 재생되었을 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 위대한 진리는 내가 과학적 자연주의샘(Naturalismsam)이라고 부르는 극히 한정적인 형태의 자연주의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 신앙은 물론이요, 우주에 관한 다른 중요한 종교적인 관점과도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중심과제는 과학적 자연주의의 이 두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러고 나서 가능하다면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주의를 가려내는 이중적 과제를 가진다.
그러나 이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그 자체로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의 명백한 갈등을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수용해 왔던 최근 수 세기 동안의 주도적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이런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왜곡된 위대한 진리라면, 이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도 그러하다고 논증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요한 왜곡은 2세기 후반경에 도입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비성서적인 교리와 연루되어 있다. 이 성서후기의postbiblical 교리는 악이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고 왔던 신의 전능에 관한 교리를 생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토대가 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는 신의 창조에 관한 이 왜곡된 견해가 극복될 때에만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다음과 같은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제안을 따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에서 "무"가 절대적인 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무를 의미한다고 봄으로써, 신이 우리 세계를 혼돈chaos―"혼돈하고 공허한a formless void"(창 1:2-역자)―상태에서 창조하였다는 성서적 견해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외견상의 작은 변화는 악의 문제로부터 기독론,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 이르는 실제적인 모든 논쟁에 대하여 엄청난 함축성을 가진다.
나는 기초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좋은 소식(복음)에 관한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 양자 모두 위대한 진리라고 진실로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진리란 하나이기 때문에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서로 조화로워야만 할 것이다. 이 양자는 각각의 전통이 자신의 진리를 왜곡하여 스스로를 오류에 빠뜨렸기 때문에 결국 서로 갈등하게 되었다.
내가 둘 다를 진리로 보면서 또한 왜곡되었다고도 보는 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명백한 갈등에 대한 나의 처리방식이 주로 하나를 진리로 보고 다른 하나를 오류로 보는 유행하는 대부분의 관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공동체의 많은 선도적 대표자들은 과학의 세계관이 우주에 관한 최종적인 진리에 가깝다고 여기며,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믿음의 방식들이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과 다르면 그건 단지 신화나, 환상, 오류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보수주의로부터 근본주의적인 신학자들은 그들 공동체의 세계관이 실재에 관한 최종 진리에 가깝다고 확신하면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완벽한 오류이고,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오직 과학 공동체가 초자연주의적인 사고틀로 복귀할 경우에만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관점은 양자 간의 토론에서 양자 모두 동일한 정도의 잘못을 하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각자가 매우 위대한 진리를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 점은 양자 간의 논쟁이 왜 그렇게 격렬하고 또 거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지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논쟁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보진 않는다. 양편의 잘못으로부터 진리를 갈라냄으로써, 우리는 양편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학이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각 전체적인 진리의 다른 면에 집중하는 서로 매우 다른 학문적 기획방식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어떤 믿음을 공통적으로 소유할 수도 있다. 한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가 하는 작업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이런 세계관을, 주중에는 다른 세계관을 신봉하는 일이 없이 양쪽 공동체에 충분히 참여할 수도 있다.
―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God and Contemporary Science』 저자.
"종교연구의 탁월한 작업. 데이비드 그리핀은 명료하고도 매력적인 특징을 지닌 합리적인 사고체계 속에서 새로운 과학적 자연주의와 당당한 기독교 신앙을 융합시켰다."
― 찰스 버취, 시드니 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1990년 템플턴상 수상자.
"권위 있는 신학 작품. 그리핀 박사는 놀라운 설득력으로 하나님의 힘, 창조, 사랑, 삼위일체, 부활과 같은 핵심적인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풍부하게 역사화된 논증을 통해서 포스트모던 범재신론의 '정중한 확신'을 실행시킨다. 이 책의 내용은 과정신학을 전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이트헤드 학파의 관점을 소개하며 심화시킬 것이다."
― 케서린 켈러, 드류 대학 조직신학 교수, 『Face of the Deep』의 저자.
아직도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와의 화해는 요원하다. 이 책은 과정사상가이며,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과정신학의 계보를 잇는 존 캅의 제자이고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운영했던 지은이의 책이다.
근대 이후 그 골은 더욱 깊어져, 과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만큼 '과학적'(논리적)이 됐으며, 그에 반하여 기독교 신앙은 더욱 근본주의로 치닫고 있다. 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박사는 과학과 종교 간의 논쟁에 대해,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끌어들여서 때때로 전적으로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두 세계관의 근본적인 종합을 제안한다. 그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란 이름으로 명명되어 온 두 전통 모두가 위대한 진리 즉, 보편적 정당성과 중요성을 지닌 진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양자 모두 왜곡되어 왔으며, 또한 과학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비전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핀은 과학 또는 그것이 정당하게 전제해 온 형태의 자연주의와 기독교 복음이 지닌 본래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이해되어 온 기독교 신앙 이 둘 사이에 본래적인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정사상으로 모색한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화해
기독교의 본래적인 믿음과 가르침을 유신론적 자연주의로 복원시켜낼 수 있는가? 그리핀이 던진 이 질문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인뿐만 아니라, 이 시대 대부분의 지성인에게도 매우 낯선 것이다. 근대 후기(19세기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서 '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매우 한정된 세계관 즉, 감각주의적 인식론과 유물론적 존재론의 조합으로 구성된 세계관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에 맞서 교회는 과학이나 철학과의 대화에서 반지성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고집하며 기독교 신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유신론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적대적인 관계는 불가피한 것인가? 이 책에서 그리핀은 서구 지성사에서 벌어진 기독교 신앙과 과학/철학과의 관계를 살펴 양자의 애증관계를 먼저 해명한다. 이로써 현대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관념 체계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반지성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무신론으로 귀착된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의 한계와 모순을 밝히려 한다. 그리핀은 양자의 대립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양자의 관심과 해명을 종합하려는 데까지 나가면서 자신의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constructive postmodern theology을 전개한다. 탁월한 과정사상가인 그리핀에게 이 작업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일반적 사유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과정철학의 핵심적 이상을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전통주의적 신학에 익숙한 기독교 신앙인은 그리핀의 통합적 방법론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한 가지 뼈아픈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과학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이 조화로운 관계를 누렸던 17세기가 지나고, 기독교 신학이 이신론deism으로 굳어져 가던 18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갈등과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기독교 신학은 과학적 자연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의 파고를 넘기 위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대화를 시도한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신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신학 방법론이 열정의 진실함에서는 의심할 바 없지만 해명의 깊이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물론 만일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기독교 교회는 19세기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신학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핀에 따르면, 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결코 종교적 세계관을 담을 수 없는 왜곡된 자연주의(Naturalismsam)를 자신의 도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몰락 이후 기독교 교회가 선택한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평화로웠던 (17, 18세기적) 과거의 기억(이신론)으로 회귀하여 안전(무신론으로부터의 문단속)을 도모했던 유아론적 시대 역행이다. 이 시대착오적 흐름은 교회의 안전에 대한 열망이 진실했기 때문에 신앙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재등장한 옛 정신으로서 자기 시대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밖에 없었다. 이 전투적인 정신이 근본주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교회 안에서 승리할수록, 교회는 시대정신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기 시대를 이탈한 정신은 결코 안전할 수도 없다는 뚜렷한 가르침만 남겼다. 다른 하나는 소위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이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지성을 흡수했지만, 그 방법론(과학적 자연주의의 활용)을 활용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독교 신학의 성격과 과제를 "독립"시켜, 기독교 신학의 독자성을 얻으려 했다. 어쩌면 이것은 밀려오는 시대사조에 대한 소심한 대응이요, '진정한 진리는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직관을 언어에 담으려고 했던 기독교 신학의 이상에서 이탈한 현상학적 차이에 대한 호소라고 하겠다.
이안 바버가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갈등"도 "독립"도 "대화"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통합" 모델을 제시했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갈등의 독선으로, 독립의 순수만으로, 대화의 열정만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 위치한 포스트모던 시대를 헤쳐 갈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리핀처럼 이안 바버 역시 과정철학의 세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챈 사람들은 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특히 "일반적 사유체계로의 통합"이라는 사상적 목표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정신은 정당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핀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며 배우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특히 기독교 신학이 (초)자연주의와 맺어 온 다채로운 관계를 훑어가다 보면 초자연주의에 경도된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사고방식이 지닌 편향을 보게 될 것이고, 과학적 자연주의가 근대 초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동안 겪게 된 변화를 이해할 때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사적 가치와 한계를 알게 될 것이며, 유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교리주의적 집착을 끊을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경험하고 보다 창조적인 기독교 신학의 미래를 꿈꾸게 될 것이다.
실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은 오늘 신봉하는 교리보다 훨씬 크다. 책임 있는 기독교 신학은 교리를 단순히 "희화화해서 전복"시키려하지 않고, 교리의 잘못된 기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긍정"을 통해서 전통의 참된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갈 것이다. 그리핀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래적 가르침primary doctrine"을 창조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취해 온 과정신학의 이 전통에 충실하다.
이 책은 그리핀 박사가 은퇴할 무렵에 출판된 것(2004년)으로, 그의 사상적 원숙미가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저술에 비해 비교적 작은 분량으로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핀의 과정신학적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내용 소개
1장에서는 지난 2세기 동안 발전되어 온 과학적 자연주의가 매우 모호한 운동이었음을 밝힌다. 한편으로 과학적 자연주의는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인과과정에 초자연적 간섭이 있을 수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여 확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 자연주의는 이 진리를 감각주의적, 무신론적, 유물론적 형태로 만들어 왜곡시켰고, 이로써 우리가 지닌 가장 깊은 도덕적 ? 종교적 신념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리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학 자체를 위해서도 부적합한 것이 되게 하였음을 논증한다.
2장에서는 기독교 역시 매우 모호한 운동이었음을 밝힌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 가르침들은 보편적인 중요성을 지닌 위대한 진리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기독교는 이 본래적인 가르침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과 모순되는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교리들에 의지하여, 그 본래적 가르침들의 빛을 잃게 만들고 결국 위대한 진리를 왜곡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왜곡 가운데 중심적인 것이 신의 전능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특히 우리 세계가 절대적 무로부터 피조되었다는 교리에 의해 뒷받침되었는데, 그것은 신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세부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무수한 왜곡을 가져왔다. 그중 하나는 악에 관한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든 것으로써, 우리 세계를 선하고 자비로운 신적 존재가 창조했다는 본래적 가르침이 이 교리로 손상되었다. 신의 전능이라는 관념은 또한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 질서의 유지를 도왔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신은 정의를 세우는 데 관심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주기도문을 통해 간구하는 "이 땅 위에서의 신의 통치"를 신 역시 추구한다는 것을 말해 온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본래적 가르침을 침식시켰다. 세 번째의 왜곡은 신의 사랑으로부터 기독교 자체로 관심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이로써 기독교는 신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한 대가로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라고 주장되었다.
3장에서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종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 가르침들과 과학이 요구하는 자연주의 사상 양자 모두에게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계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종합을 기술하기 전에, 저자가 자연주의<샘>이라고 부르는 근대 후기의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에 어떠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근대 자유주의 신학 즉 근대 후기 이신론의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과학 공동체의 세계관과 조화시키려고 하였던 신학 운동에 대하여 논증한다. 4장에서는 1, 2장에서 풀어낸 왜곡된 두 진리, 즉 신의 사랑으로부터 기독교 자체로 관심을 이동시킨 왜곡. 이로써 기독교는 신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손상한 대가로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라고 주장되었던 왜곡을 주목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서문
근대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실제적인 면과 지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였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제기된 이런 지적인 도전들 중 하나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근대과학의 세계관과 갈등 속에서 보여준 널리 알려진 광경이다. 이것은 종종 "과학과 종교," "과학과 기독교 신앙," 또는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기독교 신앙이 과학 자체와 갈등을 가질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독교 신앙은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 지구의 나이가 단지 몇 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 혹은 인간은 직접 창조되었지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지 않았다는 생각 등 천문학이나 지질학 그리고 생물학과 같은 경험과학이 새롭게 발견한 것들로 인해 도전받는 여러 관념들과 여전히 결합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러한 관념들과 결합된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존재하고, 이들에게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도전이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이 결합하고 있는 세계관, 즉 과학적 자연주의라고 널리 불리는 세계관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 도전이 보다 심각한 이유는 그것이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경험 사실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과학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는 근대 자유주의적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기독교인들과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이 존재하게 된 까닭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단지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지닌 그 어떤 종교적 세계관이라도 제어를 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널리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부분적인 실마리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토론에 깊은 혼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이 혼동은 과학적 자연주의의 두 가지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기초적generic 혹은 최소한의minimal 의미에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단지 이 세계의 기본적인 인과과정에 초자연주의적 개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 분명히 이런 의미 의 과학적 자연주의가 그동안 나타났던 여러 모양의 기독교 신앙과 갈등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 자체와 갈등을 빚는다거나 건강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까지 억제한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나는 거기에 갈등이 있지 않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나는 참으로 이런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인들이 열렬하게 채택해야만 할 위대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이 위대한 진리가 재생되었을 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 위대한 진리는 내가 과학적 자연주의샘(Naturalismsam)이라고 부르는 극히 한정적인 형태의 자연주의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는 기독교 신앙은 물론이요, 우주에 관한 다른 중요한 종교적인 관점과도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중심과제는 과학적 자연주의의 이 두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그러고 나서 가능하다면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주의를 가려내는 이중적 과제를 가진다.
그러나 이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그 자체로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 사이의 명백한 갈등을 극복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수용해 왔던 최근 수 세기 동안의 주도적 형태의 기독교 신앙이 이런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양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과학적 자연주의가 왜곡된 위대한 진리라면, 이와 똑같이 기독교 신앙도 그러하다고 논증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요한 왜곡은 2세기 후반경에 도입된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비성서적인 교리와 연루되어 있다. 이 성서후기의postbiblical 교리는 악이라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끌고 왔던 신의 전능에 관한 교리를 생산해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기초적 의미에서의 과학적 자연주의와도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근원적 토대가 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자연주의는 신의 창조에 관한 이 왜곡된 견해가 극복될 때에만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다음과 같은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제안을 따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에서 "무"가 절대적인 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무를 의미한다고 봄으로써, 신이 우리 세계를 혼돈chaos―"혼돈하고 공허한a formless void"(창 1:2-역자)―상태에서 창조하였다는 성서적 견해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외견상의 작은 변화는 악의 문제로부터 기독론,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 이르는 실제적인 모든 논쟁에 대하여 엄청난 함축성을 가진다.
나는 기초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과학적 자연주의와 좋은 소식(복음)에 관한 기독교의 본래적인 가르침 양자 모두 위대한 진리라고 진실로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진리란 하나이기 때문에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서로 조화로워야만 할 것이다. 이 양자는 각각의 전통이 자신의 진리를 왜곡하여 스스로를 오류에 빠뜨렸기 때문에 결국 서로 갈등하게 되었다.
내가 둘 다를 진리로 보면서 또한 왜곡되었다고도 보는 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명백한 갈등에 대한 나의 처리방식이 주로 하나를 진리로 보고 다른 하나를 오류로 보는 유행하는 대부분의 관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공동체의 많은 선도적 대표자들은 과학의 세계관이 우주에 관한 최종적인 진리에 가깝다고 여기며, 기독교나 다른 종교의 믿음의 방식들이 오늘날 과학적 세계관과 다르면 그건 단지 신화나, 환상, 오류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보수주의로부터 근본주의적인 신학자들은 그들 공동체의 세계관이 실재에 관한 최종 진리에 가깝다고 확신하면서, 과학적 자연주의는 완벽한 오류이고,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은 오직 과학 공동체가 초자연주의적인 사고틀로 복귀할 경우에만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관점은 양자 간의 토론에서 양자 모두 동일한 정도의 잘못을 하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각자가 매우 위대한 진리를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 점은 양자 간의 논쟁이 왜 그렇게 격렬하고 또 거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지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을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논쟁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보진 않는다. 양편의 잘못으로부터 진리를 갈라냄으로써, 우리는 양편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관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것은 과학과 기독교 신학이 동일한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각 전체적인 진리의 다른 면에 집중하는 서로 매우 다른 학문적 기획방식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어떤 믿음을 공통적으로 소유할 수도 있다. 한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가 하는 작업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이런 세계관을, 주중에는 다른 세계관을 신봉하는 일이 없이 양쪽 공동체에 충분히 참여할 수도 있다.
목차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옮긴이의 말
1장 과학적 자연주의―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과학적 자연주의
2. 과학적 자연주의의 출현
3. 중세시대 그리스 자유주의의 수정
4. 초자연주의적 기계론: 초기 근대의 종합
초자연적 개입으로서 기적
영혼의 불멸성
전능한 신
5.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6.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
2장 기독교 신앙―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기독교 복음의 본래 가르침들
2. 기독교 신앙의 초기 왜곡들
3. 주요 왜곡: 무로부터의 창조
4. 무로부터의 창조와 악의 문제
전통적인 전―결정적 신론의 신정론
전통적인 자유의지 신론의 신정론
5.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로 인한 다른 왜곡들
3장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새로운 종합
1. 근대 자유주의 신학
2. 근대 자유주의 신학
신의 활동
종교적 경험
실제적 존재로서의 신의 실존
죽음 이후의 삶에서의 구원
3. 새로운 세계관의 부상
4. 파악과 비감각적 지각
5. 범경험주의와 정신―육체의 관계
6. 범재신론
범재신론과 악의 문제
신의 존재
다양한 신의 인과관계
4장 기독교 신앙―오만에서 소심으로, 소심에서 예의바른 확신으로
신을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하기
설득을 통한 창조
설득을 통한 성육신
설득을 통한 성화
참고문헌
찾아보기
서문
옮긴이의 말
1장 과학적 자연주의―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과학적 자연주의
2. 과학적 자연주의의 출현
3. 중세시대 그리스 자유주의의 수정
4. 초자연주의적 기계론: 초기 근대의 종합
초자연적 개입으로서 기적
영혼의 불멸성
전능한 신
5.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6. 왜곡된 형태의 과학적 자연주의
2장 기독교 신앙―왜곡된 위대한 진리
1. 기독교 복음의 본래 가르침들
2. 기독교 신앙의 초기 왜곡들
3. 주요 왜곡: 무로부터의 창조
4. 무로부터의 창조와 악의 문제
전통적인 전―결정적 신론의 신정론
전통적인 자유의지 신론의 신정론
5.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로 인한 다른 왜곡들
3장 과학적 자연주의와 기독교 신앙―새로운 종합
1. 근대 자유주의 신학
2. 근대 자유주의 신학
신의 활동
종교적 경험
실제적 존재로서의 신의 실존
죽음 이후의 삶에서의 구원
3. 새로운 세계관의 부상
4. 파악과 비감각적 지각
5. 범경험주의와 정신―육체의 관계
6. 범재신론
범재신론과 악의 문제
신의 존재
다양한 신의 인과관계
4장 기독교 신앙―오만에서 소심으로, 소심에서 예의바른 확신으로
신을 삼위일체적으로 생각하기
설득을 통한 창조
설득을 통한 성육신
설득을 통한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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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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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레이 그리핀
저자 데이비드 그리핀(David Ray Griffin, 1939- ) 박사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와 클레어몬트 대학원(미국, 캘리포니아 소재)의 명예교수로서, 현재 9/11 사태 이후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비판하는 최일선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과정사상가이다. 1973년, 스승이었던 존 캅 박사와 〈과정사상연구소〉를 함께 세우고, 과정사상과 과정신학의 합리주의적 전통을 이끌어 왔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명쾌하고 정연한 사유체계를 30여 권의 저서에 담아냈으며, 특히 구성주의적 포스트모던 신학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Process Theology: An Introductory Exposition'(1976), 'God, Power, and Evil'(1991), 'God and Religion in the Postmodern World'(1995), 'Unsnarling the World-Knot'(1998), 'Religion and Scientific Naturalism'(2000), 'Reenchantment without Supernaturalism'(2001), '9/11 and American Empire'(2006), 'Whitehead's Radically Different Postmodern Philosophy'(2008) 등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 'Process Theology: An Introductory Exposition'(1976), 'God, Power, and Evil'(1991), 'God and Religion in the Postmodern World'(1995), 'Unsnarling the World-Knot'(1998), 'Religion and Scientific Naturalism'(2000), 'Reenchantment without Supernaturalism'(2001), '9/11 and American Empire'(2006), 'Whitehead's Radically Different Postmodern Philosophy'(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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