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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역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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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주와 진호의 집설을 함께 수록하여,
한대와 송대의 「예기」 주석을 집성한 완역서
△ 「예기」의 대표적 주석서인 「예기집설대전」의 체제에 의거해 구성하고, 한대와 송대의 두 대표적 주석을 함께 완역한 책
본 「예기역주」(전5권)는 김용천, 박례경, 이봉규, 이원택, 장동우 다섯 사람이 권근權近(1352~1409)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역주하면서 함께 「예기」에 대한 연구와 역주를 진행하여 이룬 결과이다. 조선시대 내내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이 「예기」의 대표적 주석서로 사용되었던 것을 고려하여, 경문 배치를 「예기집설대전」의 체제에 의거해서 구성하였다. 다만 「대학」과 「중용」은 「예기집설」에 없어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와 「중용장구」를 새로 번역하여 넣었다. 그리고 십삼경주소본 「예기정의禮記正義」 가운데 정현鄭玄의 주注를 뽑아서 진호陳澔의 집설集說 앞에 배치하여 함께 완역하였다. 정현의 주는 한대漢代 예학 해석의 집성이라고 할 수 있고, 진호의 집설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송대宋代 예설을 수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본 「예기역주」를 통해서 「예기」와 관련한 한대와 송대의 두 대표적 주석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예기」의 성립과 편제에 대하여
현재의 「예기」는 정현이 주석한 본을 전승한 것이다. 정현의 설명에 따르면, 대성이 편찬한 「예기」는 49편이 된다. 「수서」 「경적지」의 설명에 따르면, 대성이 편찬한 「예기」는 46편이고, 「월령月令」, 「명당위明堂位」, 「악기樂記」 등은 마융이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한서漢書」에는 「예문지」를 포함하여 어디에도 대성이 49편 또는 46편을 찬집하여 전하였다는 언급이 없다. 정현의 설을 따라 대성이 「예기」를 편찬하였다고 해도, 대성이 활동한 서한 선제宣帝(기원전91~기원전48) 시기부터 정현(127~200)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예기」가 어떤 형태로 전승되었는지, 나아가 대성 이전에 「예기」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진호는 주희의 설을 기반으로 삼아, 위식이 참고하였던 여러 설들을 선별적으로 채록하였다. 진호가 채록한 설은 대부분 위식의 「예기집설」과 중복되지만, 때로 중복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 「예기」에 대한 역대 주석을 집성해서 살필 때 두 책은 서로 보완이 된다. 진호는 「대학」과 「중용」은 별도로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호의 「예기집설」은 「대학」과 「중용」이 빠진 47편이다. 명대 「영락대전」을 간행하면서 「사서오경대전」에 진호의 「예기집설」이 채택되면서, 「예기」에 대한 표준적 주석서로 영향을 미쳤다. 진호는 예 개념과 의절의 이학적 의리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명물도수名物度數의 고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자세하였다. 이학을 비판하였던 청대 고증학자들은 「주례」나 「의례」와 달리 「예기」만 정현의 고주에 기반하지 않고, 이학에 기반한 진호의 「예기집설」을 채택한 것이 예학의 발전을 후퇴시켰다고 보았다.
당대 공영달이 인용한 정현의 「육예론六藝論」에 “대덕戴德은 「기記」 85편을 전하였다. 「대대례大戴禮」가 그것이다. 대성戴聖은 「예禮」 49편을 전하였다. 이 「예기」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덕戴德(선제 시기 박사)이 그 번잡하고 중복된 부분을 산절하여, 85편으로 합해서 「기記」로 편제하고 「대대기大戴記」라고 불렀다. 대성戴聖(선제 시기 박사)이 다시 대대의 책을 산절하여 46편으로 만들고 「소대기小戴記」라고 불렀다. 한 말기 마융馬融(79~166)이 드디어 대성의 학문을 전승하였다. 마융은 다시 「월령月令」 1편, 「명당위明堂位」 1편, 「악기樂記」 1편을 추가하여 49편으로 합해놓았다. 정현은 마융에게 배웠고 49편에 주석하였다. 오늘날 「주관周官」 6편, 「고경古經」 17편, 「소대기小戴記」 49편 등 전체 3종은 오직 정현의 주注만 학관에 세워져 있고, 그 나머지는 흩어지고 없어진 것이 많은데다 또 전승되는 스승의 설도 없다.”
학계에서는 「예기」의 찬자를 대성으로 설명한 「육예론」과 「경적지」의 설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고, 또 대성을 찬자로 인정하다고 하더라도 대성이 찬집한 「예기」가 정현에게까지 전승된 과정에 대한 해명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마융이 46편에 3편을 추가하여 3편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예기역주 2」의 내용
본 권에서는 「예기역주禮記譯註」 전5권 49편 중에서 왕제王制 제5편, 월령月令 제6편, 증자문曾子問 제7편, 문왕세자文王世子 제8편, 예운禮運 제9편을 번역하여 실었다.
한대와 송대의 「예기」 주석을 집성한 완역서
△ 「예기」의 대표적 주석서인 「예기집설대전」의 체제에 의거해 구성하고, 한대와 송대의 두 대표적 주석을 함께 완역한 책
본 「예기역주」(전5권)는 김용천, 박례경, 이봉규, 이원택, 장동우 다섯 사람이 권근權近(1352~1409)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역주하면서 함께 「예기」에 대한 연구와 역주를 진행하여 이룬 결과이다. 조선시대 내내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이 「예기」의 대표적 주석서로 사용되었던 것을 고려하여, 경문 배치를 「예기집설대전」의 체제에 의거해서 구성하였다. 다만 「대학」과 「중용」은 「예기집설」에 없어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와 「중용장구」를 새로 번역하여 넣었다. 그리고 십삼경주소본 「예기정의禮記正義」 가운데 정현鄭玄의 주注를 뽑아서 진호陳澔의 집설集說 앞에 배치하여 함께 완역하였다. 정현의 주는 한대漢代 예학 해석의 집성이라고 할 수 있고, 진호의 집설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송대宋代 예설을 수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본 「예기역주」를 통해서 「예기」와 관련한 한대와 송대의 두 대표적 주석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예기」의 성립과 편제에 대하여
현재의 「예기」는 정현이 주석한 본을 전승한 것이다. 정현의 설명에 따르면, 대성이 편찬한 「예기」는 49편이 된다. 「수서」 「경적지」의 설명에 따르면, 대성이 편찬한 「예기」는 46편이고, 「월령月令」, 「명당위明堂位」, 「악기樂記」 등은 마융이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한서漢書」에는 「예문지」를 포함하여 어디에도 대성이 49편 또는 46편을 찬집하여 전하였다는 언급이 없다. 정현의 설을 따라 대성이 「예기」를 편찬하였다고 해도, 대성이 활동한 서한 선제宣帝(기원전91~기원전48) 시기부터 정현(127~200)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예기」가 어떤 형태로 전승되었는지, 나아가 대성 이전에 「예기」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진호는 주희의 설을 기반으로 삼아, 위식이 참고하였던 여러 설들을 선별적으로 채록하였다. 진호가 채록한 설은 대부분 위식의 「예기집설」과 중복되지만, 때로 중복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 「예기」에 대한 역대 주석을 집성해서 살필 때 두 책은 서로 보완이 된다. 진호는 「대학」과 「중용」은 별도로 주석을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진호의 「예기집설」은 「대학」과 「중용」이 빠진 47편이다. 명대 「영락대전」을 간행하면서 「사서오경대전」에 진호의 「예기집설」이 채택되면서, 「예기」에 대한 표준적 주석서로 영향을 미쳤다. 진호는 예 개념과 의절의 이학적 의리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명물도수名物度數의 고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자세하였다. 이학을 비판하였던 청대 고증학자들은 「주례」나 「의례」와 달리 「예기」만 정현의 고주에 기반하지 않고, 이학에 기반한 진호의 「예기집설」을 채택한 것이 예학의 발전을 후퇴시켰다고 보았다.
당대 공영달이 인용한 정현의 「육예론六藝論」에 “대덕戴德은 「기記」 85편을 전하였다. 「대대례大戴禮」가 그것이다. 대성戴聖은 「예禮」 49편을 전하였다. 이 「예기」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덕戴德(선제 시기 박사)이 그 번잡하고 중복된 부분을 산절하여, 85편으로 합해서 「기記」로 편제하고 「대대기大戴記」라고 불렀다. 대성戴聖(선제 시기 박사)이 다시 대대의 책을 산절하여 46편으로 만들고 「소대기小戴記」라고 불렀다. 한 말기 마융馬融(79~166)이 드디어 대성의 학문을 전승하였다. 마융은 다시 「월령月令」 1편, 「명당위明堂位」 1편, 「악기樂記」 1편을 추가하여 49편으로 합해놓았다. 정현은 마융에게 배웠고 49편에 주석하였다. 오늘날 「주관周官」 6편, 「고경古經」 17편, 「소대기小戴記」 49편 등 전체 3종은 오직 정현의 주注만 학관에 세워져 있고, 그 나머지는 흩어지고 없어진 것이 많은데다 또 전승되는 스승의 설도 없다.”
학계에서는 「예기」의 찬자를 대성으로 설명한 「육예론」과 「경적지」의 설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고 있고, 또 대성을 찬자로 인정하다고 하더라도 대성이 찬집한 「예기」가 정현에게까지 전승된 과정에 대한 해명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컨대 마융이 46편에 3편을 추가하여 3편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 「예기역주 2」의 내용
본 권에서는 「예기역주禮記譯註」 전5권 49편 중에서 왕제王制 제5편, 월령月令 제6편, 증자문曾子問 제7편, 문왕세자文王世子 제8편, 예운禮運 제9편을 번역하여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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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목차
목차
예기역주 서문■5
일러두기■10
왕제王制 제5■13
월령月令 제6■197
증자문曾子問 제7■429
문왕세자文王世子 제8■527
예운禮運 제9■607
색인■711
일러두기■10
왕제王制 제5■13
월령月令 제6■197
증자문曾子問 제7■429
문왕세자文王世子 제8■527
예운禮運 제9■607
색인■711
저자
저자
진호陳澔
집설集說 : 진호陳澔
진호陳澔(1260~1341)의 자는 가대可大이고 호는 운주雲住, 북산수北山?이다. 귀경歸經선생이라고도 불리었다. 진호가 활동한 시기는 남송 말기와 원 초기의 변동기였다. 진호는 평생 은거하여 강학에 종사하였다. 도창都昌(현 강서성 도창현)에 운주雲住서원을 세워 가르쳤고, 만년에는 2년 동안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강학을 주관하였다. 「강서통지江西通志」의 기록과 진호의 「예기집설서禮記集說序」(1322)에 따르면, 진호의 부친 진대유陳大猷는 황간黃?의 제자인 요로饒魯에게 14년을 배웠고, 「예기」로 향시에 3번이나 합격한 뒤 1259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종정랑從政?, 황주군판관黃州軍判官을 지내고 「상서집전尙書集傳」을 저술하였다. 진호는 서문에서 진기유가 스승에게 「예기」에 대해 배운 것을 정리해 놓고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하여, 자신이 다시 「예기집설禮記集說」을 지었다고 밝혔다. 진호의 「예기집설」은 가학을 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호陳澔(1260~1341)의 자는 가대可大이고 호는 운주雲住, 북산수北山?이다. 귀경歸經선생이라고도 불리었다. 진호가 활동한 시기는 남송 말기와 원 초기의 변동기였다. 진호는 평생 은거하여 강학에 종사하였다. 도창都昌(현 강서성 도창현)에 운주雲住서원을 세워 가르쳤고, 만년에는 2년 동안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강학을 주관하였다. 「강서통지江西通志」의 기록과 진호의 「예기집설서禮記集說序」(1322)에 따르면, 진호의 부친 진대유陳大猷는 황간黃?의 제자인 요로饒魯에게 14년을 배웠고, 「예기」로 향시에 3번이나 합격한 뒤 1259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종정랑從政?, 황주군판관黃州軍判官을 지내고 「상서집전尙書集傳」을 저술하였다. 진호는 서문에서 진기유가 스승에게 「예기」에 대해 배운 것을 정리해 놓고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하여, 자신이 다시 「예기집설禮記集說」을 지었다고 밝혔다. 진호의 「예기집설」은 가학을 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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