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쿠스 모르티스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
『아미쿠스 모르티스』의 저자 리 호이나키는 동생 버나드가 식도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에 빼앗긴 삶의 죽음을 반추한다. 동생 버나드는 저자 자신처럼 책을 많이 읽거나 사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평범한 인물인데 의료기기에 몸을 맡기지 않고 그 ‘죽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삶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Dying is not death'인데 동생 버나드가 ’죽어가는 과정‘을 얼마나 훌륭히 살아냈는가를 표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하나의 충만한 순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충만한 순환이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의료체계에 의해서 깨졌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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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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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자리에서는 정말 많은 이들이 동참한다. 병원에서는 오직 전문가들만이 죽음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뿐이다. 환자들, 친척들, 친구들은 말없이 누워 있거나 앉아 있다. 다시금 나는 버나드와 마릴린의 지혜를 기억한다. 집에서만, 오직 집에서 일상을 유지할 때만, 가족과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죽음에 동참할 수 있다.('3. 죽어가는 과정은 죽음이 아니다' 중에서)
죽어가는 과정은 죽음 아니다.
죽어가는 과정은 광휘에 찬 삶의 다른 모습이다!
저자는 동생 버나드가 식도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에 빼앗긴 삶의 죽음을 반추한다. 동생 버나드는 저자 자신처럼 책을 많이 읽거나 사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평범한 인물인데 의료기기에 몸을 맡기지 않고 그 '죽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삶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Dying is not death'인데 동생 버나드가 '죽어가는 과정'을 얼마나 훌륭히 살아냈는가를 표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하나의 충만한 순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충만한 순환이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의료체계에 의해서 깨졌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이반 일리치의 그 유명한 혹에 대한 일화에서도 저자의 관점은 드러난다. 아마도 '일리치의 혹'에 대한 상세한 고찰은 이 책의 백미 중 하나일 터인데, 일리치는 '치료 행위'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병, 즉 자신의 목에 난 혹을 의술을 통해 물리적으로 떼어냈을 때 자신의 총체성이 깨진다고 판단해 치료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즉 일리치에게 중요했던 것은 치료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존재에 끼치는 영향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의 의료체계는 병이나 질환을 존재와 관계없는 대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저자인 리 호이나키는 그러한 존재에 대한 무례가 근대가 만든 테크놀로지 문명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중세철학과 신학에 그 근거 기반을 두고 있다. 가톨릭 수사로서, 그리고 문명비판의 전위로서 리 호이나키의 통찰력은 신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밑바탕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이나키의 '신'은 삶을 심판하는 도덕적인 초월자가 아니다. 도리어 그의 신은 삶과 세계에 내재해 있다. 삶과 세계에 내재해 있는 신을 근대문명이 추방한 것이며, 우리는 지금이라도 테크놀로지 문명에게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테크놀로지에 저당 잡힌 삶과 죽음
그렇다면 저자는 근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을 어느 지점까지 비판하고 있는가. 이 책 10장 〈백장미단〉에서 저자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매우 계획된 통치를 했다고 설파하면서 그 합리성이 역설적으로 독일 국민의 반합리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합리성의 이름으로 우리 삶에 내재해 있는 '신성'을 파괴한 극단적인 예가 바로 나치라는 것이다. 가톨릭 수사로서 호이나키는 나치를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적그리스도'는 실체가 모호한 사탄이 아니라 근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의 모습으로 출현한다고 보는 게 저자의 근본 입장이다.
하지만 근대인이 근대문명이 제공하는 테크놀로지의 편리를 과연 어디까지 거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우정'이며 이 '우정' 절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의료 시스템과 대면할 때,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예리함으로 우정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강조한다. 순수한 친구는 많은 경우에 중요하지만, 특히 테크놀로지에 침범되는 죽음을 피하고 자신만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일리치는 이런 사람을 아미쿠스 모르티스amicus mortis, 즉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죽음에 임하는 것을 도울 능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지 않는다. 그는 가슴에서 우러난 선량함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는 여러 징후로 나타나는 현대적 기술의 모호함과 문제적 성향에 대한 인식과 나라는 인간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통합할 수 있다. 진정한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은 서로 어울려 드러난다.
"아미쿠스 모르티스"amicus mortis, 즉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라는 개념은 이렇게 탄생한다. 저자에게 죽음의 문제는 곡해된 영생의 의미도 아니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초월의 문제도 아니다. 죽음은 오로지 삶의 문제인 것이다. 죽음을 삶과 떼어내 사고하거나 대할 때 우리는 죽음을 '죽음 장사꾼'에게 넘기고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이것은 명백히 자본주의 체제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강제하는 것은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의료 체계이다. 이 의료 체계가 죽음을 우리로부터 떼어놓고 상품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죽음보다도 '죽어가는 과정' 혹은 그 과정의 진입하기 시작하는 병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저자인 리 호이나키의 입장은 명확하다. 역으로 테크놀로지 문명이 우리를 진실되지 못한 고통에 얽어맨다고.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불길하고 무서운 생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그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반복된 의학적 개입, 놀라운 현대적 최첨단 건강관리가 가져온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불행은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많은 고통을 훨씬 넘어서는, 전적으로 부자연스럽고, 가공할 정도로 왜곡된 것이다.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현대적 의료 관리가 야기한 고통을 볼 수 있다. 악의 얼굴을 말이다.
그렇다면 보통 병과 고통의 상태가 아닌 건강 상태는 무엇인 걸까. 그것 또한 테크놀로지 문명이 짜놓은 그물에 갇힌 개념에 불과하다.
나는 현대사회의 건강에 대한 추구가 순전히 병적인 집착일지도 모르며, 개인의 안녕에 대한 왜곡된 신성화일지도 모른다고 경계한다. 가장 먼저 생각할 일을 놓치고 있다. 이반 일리치가 언급했듯이, "현재를 향유하는 능력은 건강을 추구하는 일에 의해서 무력해졌다."
근대인들은 언제나 건강을 추구하는 일에 진력을 다하다가 "현재를 향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저자의 주장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생활과 관념이 저자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압도적인 환경 속에서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 또한 삶이 테크놀로지 문명에 오염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며칠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공지능과 인간의 바둑 게임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을 가능케 한 자본주의적 구조를 먼저 인식하자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도구적 동물이라는 고전적 명제도 있지만, 지금의 테크놀로지는 도구의 차원을 넘어서 삶의 스타일을 변형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무의식과 감성이 변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삶이 어떤 공간에서 영위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수성과 상상력 없이는 우리는 점점 테크놀로지 문명의 노예가 될 것임은 불 보듯 빤하다 하겠다.
이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바로 서로 보살핌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혹자들은 저자가 구조의 변화를 말하지 않아서 이 책의 가치를 낮게 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 변화는 우리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삶의 본래 가치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현재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고, 우정으로 힘을 얻으며, 통합성을 얻을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이나 친구의 건강을 되찾도록 간호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건강의 추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목차
목차
1. 나 자신으로 죽기 위해 _14
2. 오후의 선물 _48
3. 죽어가는 과정은 죽음이 아니다 _67
4. 저물어가는 시간 속의 제리 _127
5. 나의 죽음과 함께 걷기 _152
6. 고통을 견디는 능력 _182
7. '아니오'라는 대답의 도덕적 아름다움 _213
8.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_248
9. 얼음송곳 청년 _291
10. 백장미단 _327
11. 죽음을 감싸 안는 것 _374
12. 건강 추구 : 또 다른 키메라? _408
주석 _426
옮긴이의 말 _451
저자
저자
저서로는 『Stumbling Toward Justice』(한국어판;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녹색평론사), 『El Camino:Walking to Santiago de Compostela』(한국어판;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달팽이출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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