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을 켜다(삶창시선 48)
손병걸 시집
‘어두운’ 시집이라고 해서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어둡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손병걸의 시는 밝다. 그런데 그 ‘밝음’은 ‘어둠’을 단지 배경으로만 하지 않고 어둠을 베어 문 상태에서 밝다. 손병걸 시인은 20년 전에 현실의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서 밝음을 발굴하는 고된 시적 노역의 길을 나섰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밝음의 세계에서 어둠을 향해 갱도를 파 들어갈 때 그는 역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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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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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어둠을 더듬이로 삼아 빛깔들을 분별하며 세상과 시적인 것들을 읽어낸다. 어둠에 채이고 묶인 "젖은 깃털"로 그리는 묵화일 텐데, 희한하게도 그 그림들이 누져 있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인가. 우리가 올 한 해 광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경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빛이 그의 어둠을 이길 수 없는 까닭이다.
20여 년 전 그는 고통스럽게 빛을 잃고 어둠을 얻었다. 자연히 그의 모든 시공간은 암실이었다. 어둠은 종종 예술을 인화시킨다. 어찌 시뿐이랴. 모든 사물과 사태를 소리와 손끝의 감각으로 식별할 테지만, 그가 모르는 세상사는 거의 없는 듯 보였다.
우리가 바닥에 산다면 그는 해저를 사는 사람이라 봐야 할 터인데, 그의 삶과 시는 물속에 사는 반딧불이 같다. 필사적으로 젖으며 스스로 빛을 내고야 마는 발광체다. 교란된 세상에서 소리를 분별하는 일은 보는 일만큼이나 중요해졌다. 큰 목소리에는 허세와 허언이 끼게 마련이고 시적인 목소리는 아주 작고 흐리게 들리니까 어쩌면 시인은 그의 순명이어야 할까. 그는 시집 전체에서 '소리'에 대한 감응을 점자화하는 독보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소리들'에 집중하는 이유는 소리가 그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책 소개
어두워서 밝은 시!
여기 한 권의 '어두운' 시집이 있다!
'어두운' 시집이라고 해서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어둡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손병걸의 시는 밝다. 그런데 그 '밝음'은 '어둠'을 단지 배경으로만 하지 않고 어둠을 베어 문 상태에서 밝다. 손병걸 시인은 20년 전에 현실의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속에서 밝음을 발굴하는 고된 시적 노역의 길을 나섰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밝음의 세계에서 어둠을 향해 갱도를 파 들어갈 때 그는 역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말한다.
몸속 깊이 고인 어둠이
고이다 끝내 넘친 어둠이
돌벼루 속에서 찰랑인다
어둠보다 선명한 것이 있을까
- 「묵화를 그리며」 부분
손병걸 시인에게는 "어둠보다 선명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세계는 어둠의 세계이지만 언제나 빛을 향해 있으니까. 도리어 어둠을 어둡다고 말하는 존재는 그칠 줄 모르는 빛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 빛은 "선명"하지 않고 도리어 존재와 존재가 거처하는 세계를 어둡게 만든다. 손병걸 시인의 위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래서 이렇게 된다.
까무룩 완성된 그림 한 점 향기가 명쾌하다
이쯤 되면 손병걸 시인을 '어둠의 시인'으로 명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손병걸 시인이야말로 빛의 시인이며 그의 빛은 기존의 빛을 역설적으로 의문에 부친다. 그래서 이런 구절이 가능한 것이다.
비어 있어서 명백히
비어 있지 않다는 드넓은 소리
밤하늘에 빛나는 시공의 소리
언제나 꽉 찬 공명
먹먹하게 환한
저 빈칸 혹은, 빈 줄이라는 말
- 「빈칸」 부분
통증을 켜다
하지만 손병걸 시인의 이런 관점들이 어떠한 시적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일종의 정신 승리 또는 자신의 '장애'를 갑옷으로 한 인정투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손병걸 시인의 '밝은' 작품들을 허투루 읽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에는 어떤 아픔들이 생선 가시처럼 작품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손병걸 시인을 처음 읽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빗물 고인 병실 창문에서
아침 햇빛이 반짝거린다
참다못해 먹구름 녹아내리듯
내가 몽땅 흘려보낸 눈물이
종내엔 돌아와 창문을 적셨으니
빗소리를 외면한 새벽녘
지나치게 네 안이 건조했던 건
지극히 옳다
(…)
절망의 태풍이 휩쓸고 간
네 속에 뜨거운 사막을
갈증으로만 여기지 않겠다
- 「투병」 부분
아직도 그에겐 "불치의 빗줄기가 흘러 몸이 패"인 자리가 있다. 다만 그 '패인 자리'를 "넓은 바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공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힘'이 무엇인가는 시에서 드러내기 쉽지 않지만 아무튼 이 '힘'으로 손병걸은 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 시는 통증을 켜는 스위치 역할도 한다.
꺼진 별들 뒤에 감춘 통증을 켜야
별똥별 점자는 멀리 빛나는 것
이것이 시력 없는 내 생활의 활자이다
(…)
와글와글 모여든 별빛이 흘러가면
비로소 먼바다에 해가 솟듯
꺼진 별들을 켜는 내 문장은
명백한 실존이다 농도 짙은 기록이다
- 「점핀」 부분
통증을 켜서 "별똥별 점자"를 멀리 빛나게 한 다음에 손병걸 시인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빛을 밝히는 어둠
죽지 못해 살아 있어 살아야 할
나도 분명 할 일이 있다 아내와 현관문을 열고
불빛 한 점 없는 빈집의 불을 켜야 한다
여전히 차가운 바다 밑인 듯
구명조끼를 동여맨 아이가 갇혀 있다
- 「빈집」 부분
어디에도 따스한 4월은 없다 급기야
와르르 무너진 하늘 아래 시푸른 생매장
누대에 누대를 걸쳐온 악마들의 권력이
비로소 부족분의 순장을 완성했다
- 「순장」 부분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최후의 발바닥까지
녹아내리고 있다 타오르고 있다
시퍼런 말들의 춤이
빛나는 노래가 되어
캄캄한 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촛불」 부분
마냥 어둠에 산다고 느꼈을 법한 손병걸 시인의 시는 어느새 이렇게 이른바 빛의 세계로 성큼 나와 있었다. 「빈집」과 「순장」은 우리가 잊지 못할 세월호 참사를 겪은 다음에 시인이 내보인 자신의 다른 내면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들리는 소리로 세상을 보는 시인에게 바닷속에 가득 찬 비명과 공포들이 안 들렸을 리 없다. 「빈집」은 바다에 갇힌 영혼들을 위해 불빛을 켜는 작품이고 「순장」은 바다에 "시푸른" 영혼들을 가둔 "악마들의 권력"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작품이다.
또 「촛불」은 명백히 지난겨울 얼어붙은 광장을 녹인 '촛불'에 대한 헌시이다. 손병걸 시인에게 지난겨울의 "촛불"은 "말들의 춤"이었고 "빛나는 노래"였다. 이제 그의 어둠은 "춤"으로 "노래"로 그 진화의 방향을 잡은 듯하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은 그는 언제나 깊이 모를 '어둠'을 뒷배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거기가 바로 실존의 토대라는 것이다.
어둠에서 사는 삶처럼 강한 게 있으랴!
목차
목차
제1부
제2부
제3부
제4부
발문 _ 어둠보다 선명한 것이 없을 이에게 ㅣ 문동만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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