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꽃(삶창시선 64)
이현조 시집
이 오래된 ‘유정’은 확실히 독자를 현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 다른 세계에는 “낫 장수 처녀 홀로 남아 장구를 치는”(「낫 장수 처녀의 풍물 장단」) 풍경이 상징하는 우리가 지나온 삶이 있는데, 이현조 시인의 시에서는 그 지나온 시간이 현재가 된다. 이것은 분명 ‘현대’라고 부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현대의 폭력적인 속도가 없는 평정한 세계라는 의미에서 독자에게 ‘현대’를 다시 묻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저 다른 세계의 배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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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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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조 시인의 시에는 멀미나는 속도가 없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냇물처럼, 여기저기 해찰하면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현상은 이정록 시인이 추천사에서 말한 것처럼 "오래전에 도착한 문장을 발굴"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시인 자신을 중심점으로 해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주위의 삶과 숨결을 그대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에피소드라도 시인이 그린 원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슬픔마저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는 시인의 '눈'이 맑은 하늘과 같아서 벌어지는 일일 게다.
오르기 위해선 가벼워야 한다
이승의 밥으로 연명해온 몸
며칠 새 피골이 상접이다
(…)
사선에서 그리운 건 얼굴뿐이다
가족과 친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생
그걸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다
혈서로 맺어진 얼굴
몸보다 더디 비워진다
_「투병 중」 부분
"새털 같은 꺼풀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는 눈"을 가진 혈육의 아픔을 말하는 이 작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인은 단지 슬픈 정서를 토해내지 않고, 도리어 슬픔의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영혼의 평정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 평정 상태가 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족과 친족"을 위한 단순한 삶이었을지언정 그 삶에도 엄연히 무게가 있음을 시인은 아주 '간신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혼의 평정 상태에 대한 시인의 추구가 멀미나는 속도를 덜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영혼의 상태는 주로 노인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한 것도 같다. 시집의 전체에 걸쳐 시인의 눈은 가볍지 않은 역사를 살아온 이들에게 머물러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존재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기도 한다.
여흥 민씨라고만 했다
아버지가 면서기를 지내다 빨갱이에게 처형당했다고 했다
다른 집안 내력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말할 게 없었다
여흥 민씨는 무조건 벼슬을 준다는 황후의 제안도 거절하고
할아버지는 항일운동을 했지만
면서기가 된 아버지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_「장남」 부분
낮은 불길처럼
이 오래된 '유정'은 확실히 독자를 현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 다른 세계에는 "낫 장수 처녀 홀로 남아 장구를 치는"(「낫 장수 처녀의 풍물 장단」) 풍경이 상징하는 우리가 지나온 삶이 있는데, 이현조 시인의 시에서는 그 지나온 시간이 현재가 된다. 이것은 분명 '현대'라고 부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현대의 폭력적인 속도가 없는 평정한 세계라는 의미에서 독자에게 '현대'를 다시 묻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저 다른 세계의 배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할매 하늘이 제법 무겁쥬
하늘이 무겁기루 자식만 허것어
하늘은 흐렸다 개기라두 허지
자식 놈은 맨날 먹구름이여
_「꼬부랑 할머니」 부분
바람의 시간을 오래 견뎌야 품이 생긴다
오래된 집이 처마를 펼쳐 참새를 품고
오래된 축대가 품을 넓혀 민들레를 품었다
_「세대」 부분
알고 보면 '현대'는 "바람의 시간"을 회피하려는 세계이다. 벽과 건물을 세워 바람을 막거나 다른 데로 흘려버리려 애쓰는 시간이다. 하지만 '현대'를 잉태하고 낳은 다른 세계는 '현대'를 아직도 업고 있으며 "처마를 펼쳐" 비바람을 막아준다. 아직도 "참새"나 "민들레" 같은 생명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시간"을 지금도 묵묵히 견디고 있는 이 시간을 '현대'는 망각하거나 지우려고 하지만, "혹시나 해서 발버둥 쳐보는"(「발버둥」) 존재들이 아직은 여전함을 이현조 시인은 말한다. 이 시집의 미덕은 있으면서 있음을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게 온기를 건네는 따스한 불길 같은 시인의 서정에 있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점은, 시인 자신이 자신을 "져야 할 때 피어난 상사화"(「늦은 꽃」)이라고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직은 질 수 없다는 나직한 독백이 비록 거세진 않지만 묵묵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늦은이 아니라) 낮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짱이다".(「삐딱구두」)
목차
목차
제1부
발바닥의 생·14
부대찌개·16
언덕·18
핑계·20
부러진 상사화·22
투병 중·24
귀향·25
벽시계·26
칼바람·27
제주도 막걸리·29
가풍·30
배달의 기수·32
밥집에서·33
생일·35
돌팔매·37
아내·38
늦은 꽃·39
삐딱구두·41
안부 전화·42
제2부
농사·44
죽음에서 배운 삶·46
파란만장·48
식물원·50
장남·52
삼각관계·54
지훈이·56
꽃 소식·57
꼬부랑 할머니·59
방물장수·60
낫 장수 처녀의 풍물 장단·61
정자나무·63
억새꽃 부부·65
제3부
풀 깎기·68
책장·69
암탉·70
마스크·72
동쪽의 집·73
낙엽·75
세대·76
발버둥·77
동백·78
몸의 기억·80
삼불(三佛)·82
오카리나·83
시·84
거울 보기·85
도시로 간다·86
고요한 마을·87
시작(詩作)·88
주소록을 정리하며·89
개천절·90
다알리아·91
철·92
해설
무구한 존재들이 펼치는 여백의 미학(오홍진)·93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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