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계보(양장본 HardCover)
한국인의 영토의식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압록강과 두만강은 어느날 갑자기 국경선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적어도 천여 년 이상 오랜 논쟁과 역사가 있었다. 그러한 투쟁 속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민족의식과 역사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국사의 계보』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영토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천년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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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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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압록강과 두만강은 물론 어느날 갑자기 국경선이 된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적어도 천여
년 이상 오랜 논쟁과 역사가 있었다. 그러한 투쟁 속에서 한국인의 독특한 민족의식과 역
사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천년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북방을 향한 꿈, 한국사의 역사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 북방 경계는 대동강에 불과했고, 고구려의 화려했던 수도 평
양은 신라의 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북방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고려는 청천강까지, 조선 또한 두만강까지 국경선을
밀어올렸고, 대한제국조차 간도로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국사의 역사는 북
방을 향한 꿈이 현실을 만들어낸 역사가 되었다. 과연 그 꿈은 정당했을까? 그것을 둘러싸
고 한국사의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었고,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민족주의 과잉, 이대로 괜찮을까?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는 이른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을 막론하고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친일파 내지 식민사학이라는 낙인은 여전히 강력한 사회적 힘을 발휘하고 있
다. 세계화 시대에 배타적 민족주의는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 책은 일본 학자의 냉철한 한국사 분석으로, 현대 한국의 역사학계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애정어린 충고이기도 하다.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국사 논쟁은 주로 고대사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백제가 요서를 지배했다는 설이나 낙랑군이 만주에 있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오해가 왜 빚어졌는지 그 내막을 상세히 분석하였다.
_ 백제는 대륙을 지배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제는 대륙을 지배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중국의 <송서>나 <양사>
등의 사료에는 백제가 요서를 지배했다고 하는가? 이는 백제 왕실의 성씨에서 비롯된 오
해였다. 백제는 부여의 후손을 자처했고,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는 나라 이름을 부여라고도
했다. 만주에 있었던 부여와 한반도 남서부에 있었던 백제가 '부여'라는 같은 나라이름을
사용함으로 해서 후대 중국의 역사가들에게 혼선이 생겼던 것이다.(56쪽 이하 참조)
_ 만주도 삼한에 속했는가?
지금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상식이 되어 있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상식은 근대기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다.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라고 기록을 남겼다. 한편 조선 초기의 문인 권근은 고구려가 변
한이라고 기록했다. 이들에 의하면 어쨌거나 삼한은 삼국의 영역이었던 만주와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게 된다. 어쩌다가 삼한이 삼국과 겹치는 오해가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 오해
는 어떻게 조선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66쪽 이하)
_ 낙랑군은 도대체 어디인가?
한나라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평양 일대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의하면 한반도 북부의 요서 지역에도 낙랑군이 존재했다. 그래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과 만주에 있었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고구려에 쫓겨난 낙랑군 유민이 요서 지역에서 낙랑군(낙랑교군)
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서 비롯된 오해라고 한다.(38쪽 이하) 뿐만 아니라 낙랑이 백
제의 북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는 신라의 왕을 낙랑군왕으로 책봉한
뒤 발생한 혼란이다.
_평양은 왜 세 번이나 옮겼는가?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평양이 세 번 옮겼다고 분석했다. 즉 평양이 원래는 요서에 있
었는데, 이후 요동으로, 다시 한반도의 현재 평양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는 박지원의 상
상이 아니라 <요사>, <원사>, <금사>, <문헌통고> 등 중국의 역사서를 종합적으로 고찰
한 뒤 정리한 결론이었다. 저자는 박지원이 참조한 자료를 모두 재검토한 뒤 왜 박지원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분석해냈다.(174쪽 이하)
흥미로운 대목들
천년을 이어온 고구려 논쟁
동북공정 이후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 계승 논쟁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
했다. 중국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정리했고, 한국과
북한의 학계 및 시민단체에서는 이를 적극 비판하여 종종 외교문제가 빚어지기도 한
다. 저자는 여기서 누구의 편을 드는 대신 고구려 논쟁이 언제부터 발생해서 어떻게 변
해왔는지를 분석했다. 적어도 고구려 논쟁은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민
족의 역사의식 형성에도 중대한 비중을 차지했다.
_ 진정한 고구려의 계승자는 누구인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수많은 세력들이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했다. 발해는 물론
이고 고려 태조 왕건은 나라 이름을 아예 고려(고구려의 후대 공식 국호)로 정했다. 만주를
지배했던 거란족이나 여진족 또한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했다. 이렇게 저마다 고
구려의 후계를 자처하면서 누가 정통 계승자인가 하는 논쟁이 촉발된 것이다.
_ 서희와 소손녕(소항덕)의 고구려 논쟁
대표적인 고구려 논쟁으로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의 장수 소손녕(소항덕)과 고려의 재상 서
희의 논쟁을 들 수 있다.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의 후예이므로 고려의 북쪽 경계가 거란의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했고, 서희는 이에 맞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이므로 거란의 수도
까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114쪽 이하) 이 논쟁을 통해 고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북방경계를 밀어올릴 수 있었다.
_ 유득공의 [발해고]와 남북국시대
고구려 계승 문제는 조선시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
를 한국사에서 제외시켰던 기존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발해와 고려를 아울러 통일신라가
아니라 남북국시대설을 주장하였다. 유득공의 설은 현대 한국 국사학계에서 그대로 수용
되어 중고교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어 있다.(260쪽 이하)
_ 해결되지 않은 간도 문제
고려 왕건 이후 한반도에서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하며 북방 경계를 위로 끌어올리
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까지도 그대로 이어졌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 또한
만주를 발상지로 간주하기 때문에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다.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국경 분
쟁의 저변에는 고구려 계승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노력 끝에 백
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국경선을 분명히 했지만, 문제는 토문강이었
다. 토문강이 두만강인지 해란강인지 또 다른 어떤 강인지에 대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논란은 조선과 대한제국이 배제된 채로 일제에 의해 <간도협약>을 통해
정리되고 말았다. 당연히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협약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단군신화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단군이 신화인지 실제 역사인지에 대한 논쟁은, 적어도 한국의 인터넷상에서는 가장
뜨거운 주제이다.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단군신화' 자체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그리고 단군신화가 한국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역사적으로 분석한 것이
이 책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_ 분열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로부터 차례로 침략을 받았다. 특히 몽골과의 전쟁은 물경 30여
년이나 이어졌고,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한 채 육지는 적들의 손에 방치되었다. 신라
의 삼국 통일 이후 수백 년간 동화되었던 고려의 백성들은 다시 지역별로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같은 시기 고려와 마찬가지로 북방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침략을 받았던 중국의 송나라에
서는 [춘추]에 의거한 대의명분론을 축으로 민족주의가 부상한 반면, 고려에서는 민족 시
조로서 단군신화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_ 진단은 지나 스타나, 아사달은 아사타
단군신화의 내용은 당시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단군의 땅 진단은 원래 인도
에서 중국을 가리키던 '지나 스타나'라는 용어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인도의 입장에서
중국은 동쪽이기 때문에 나중에 진단은 동방정토라는 의미가 부가되었다. 단군신화에서
는 이러한 불교적 용어가 그대로 차용되었다. 또한 단군이 도읍했던 아사달은 석가모니의
장래를 예언했던 선인 아사타를 한문으로 적은 말이다.(137쪽)
뿐만 아니라 도교의 영향도 뚜렷하다. 평양 주변에서 예로부터 제사지대던 토속 산신들은
단군의 신격으로 통합되어 갔다. 단군은 태백산에서 태어나 평양에 도읍하고 장당경으로
천도했다가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는데, 태백산의 태백선인, 평양의 평양선인, 송악
(아사달)의 운주거사 등 전통 도교 신격이 사실은 모두 단군이었고, 단군이 옮겨다녔기 때
문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전승된 것이라는 논리가 생겨났다. (136쪽 이하)
_ 단군신화는 조선의 건국 이데올로기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했지만, 민심을 얻기 위해서 단군시화를 적극 활용했다. '조
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단군의 나라의 이름이었다. 서울로 천도할 당시 서울이 바로 단군
의 아사달이라는 믿음이 존재했고, 전통적인 풍수사상의 논리대로 터를 잡았다.(157쪽 이
하) 또한 단군과 관련된 다양한 예언들(십팔자 예언, 건목득자 예언, 구변진단 예언 등)이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다.(160쪽 이하)
목차
목차
한국사의 무대
고조선과 낙랑군
낙랑군의 멸망
2. 삼한에서 삼국으로
고구려ㆍ백제의 건국설화
부여의 그림자
삼한 개념의 변용
3. 북진정책의 전개
패강ㆍ평양의 변천
북진정책의 전개
또 하나의 계보
4. 단군신화의 탄생
금나라와 고려
묘청의 난
단군신화의 탄생
5. 고조선 계승
단군과 진단
기자와 평양
요동과 삼한
6. 간도로 가는 길
동북 변경의 개척
정계비와 분계강
국경 담판
7. 대한제국의 꿈
국호 개정
다시 국경 담판
8. 역사관의 상극
한국어판 서문
저자 서문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해제
찾아보기(인지명)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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