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양장본 Hardcover)
심영의 장편소설
심영의의 장편소설『사랑의 흔적』. 서로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모습일 것이 분명한 무수한 그녀들과 함께 숱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호명하고 있다. 작중 인물들의 사랑의 흔적들을 통해 저자는 '절망하지 않고 견뎌내는 유일한 힘'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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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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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오늘은 오전 수업 한 과목만 있는 날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한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걸어 나오다가 학교 정문 입구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몇몇 방송국 카메라도 와 있었다. 모두가 여성들인 이십 여 명 남짓의 사람들이 저마다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하마터면 그 대열로 들어가 함께 구호를 외칠 뻔했다. 처벌하라, 처벌하라, 처벌하라. 사람들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앞뒤로 맞춰 흔들며,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래야 마땅한 일이었다. 마침 나는 수업 때, 인터넷에서 접한 그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가 강의를 하는 학교에서 일어났던가 보았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같은 대학에 다니는 남자친구의 전화를 새벽 한 시에 받는다. 잠결이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 남자친구를 이제 그만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처음과는 달리 입이 거칠고 손버릇이 나빴다. 아무 데나 가래침을 뱉고 걸핏하면 욕을 했다. 새벽 한 시에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여자가 전화를 무성의하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나빴다. 그렇잖아도 그를 대하는 여자의 표정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있음을 자주 느끼던 참이었다. 혼을 내주어야 했다. 한번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버릴 때까지 내 것이어야 마땅했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러했다. 여자에게는 두려움을 알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그는 배웠다. 그는 군 복무 대신 공익근무를 했으나 남자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차를 몰고 그녀가 혼자 사는 학교 근처 원룸으로 향한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그 여학생은 이 고장엔 처음이었다. 나이가 어느덧 서른에 이르렀으나 그동안에 이 고장에 따로 와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도 없고 강도 없고 하천도 없는 밋밋한 도시였다. 하천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이미 죽은 하천이어서 수량도 메말랐고 고기는 살지 않았다. 그녀는 빨리 졸업해서 빨리 이 고장을 떠나고 싶었다. 남자가 도착했다. 딩동딩동딩동.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녀는 잠깐 생각했으나 이웃 사람들에게 소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곤 아직은 완전히 헤어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헤어지고 싶었으나, 이제 그만 만나자는 그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여자에게 남자는 두려운 존재였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를 만나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 이렇게도 큰 두려움이 수반한다면 그게 무슨 사랑일 것인가, 그녀는 종종 제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지방법원의 판사는 새벽 한 시에 여자 친구가 혼자 사는 원룸에 들어가 무려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 남자에게 벌금형을 선고한다. 실형을 선고하면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을 당할 것이고,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제적을 당하면 남자는 의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꼭 의사가 되어야 했다. 학교는 최종판결을 기다려서 남자에 대한 징계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대법원의 최종판결까지는 2년 남짓 걸리고, 그동안에 남자는 의학전문대학원을 마치고 의사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된다. 남자는 여자의 뺨을 이백 번 넘게 후려갈기고, 목을 조르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왜 전화를 성의 없게 받았느냐고 묻고 또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곤 죽여 버리겠다고,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욕설을 동원하여 그녀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여자는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 오빠, 살려줘, 제발 살려줘. 오빠, 살려줘, 제발 살려줘. 살려줘.
그들의 손팻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겨울이었으므로 두터운 아웃도어 차림의 중년 여성 혼자서 커다란 팻말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혼자 서 있다고 외롭지는 않아 보였다. 그 손팻말엔,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어간 지 600일이 되는 날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600일이라니, 벌써 어느덧 600일이라니,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으나, 마음만 그랬다.
나는 집에 돌아와 늦은 아침이면서 다소 빠른 점심을 차린다. 밥을 먹기 전, 습관인 탓에 텔레비전 뉴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계사에 피신 중인 노동자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어제는 그를 사찰 안에서 끌어내 사찰 밖에 대기 중인 경찰에 넘기려 한 사찰 신도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만간 감옥에 갇힐 것이다. 꿈은 일상을 이기지 못하며, 꿈꾸는 자 필경 갇히고 마는 게 우리 시대의 문법인 탓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다음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 다시 거리에 설 것이고, 다시 어딘가에 피신할 것이고, 그러나 그곳이 다시는 조계사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이제는 명동 성당도 아닐 것이고, 그러면 그는 이제 더는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갇히게 될 것이다. 나는 밥술을 입에 넣으며 별로 소용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나는 몹시 피곤해서 오후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나는 요즘 몹시 피곤하다. 날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밥벌이를 해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다 또 그나마 하루도 쉬지 않고 해야 할 밥벌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는 몹시 피곤해서 오후 내내 죽은 듯이 잠을 잤다. 그런데 문득 한기를 느껴 눈을 떴는데, 아직까지 집 안에 남아 있던 모기에게 하필 눈두덩을 물리고 말았다. 나는 더 할 수 없이 심하게 화가 났다. 그러나 모기를 잡지는 못했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는 여자는 그날 새벽 내내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끌려가고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매질을 당해야 했던 기억은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간 탓에 이제는 그 기억에서 두려움이 환기되지는 않는다. 참 다행이지 싶다. 그러하니 여인이여, 오래 살아남으라.
밤엔 느닷없이 보일러가 고장 났다. 벌써 영하의 날씬데, 온수도 나오지 않고 보온도 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감옥에도 온수도 나오지 않고 보온도 되지 않을 것이다. 첫눈이 폭설이었으니 올겨울은 여느 해 보다는 덜 추울지도 모르겠으나, 겨울이므로 겨울답게 춥기는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갇힌 자들은 겨울이 내내 춥고 여름은 내내 더울 것이다.
목차
목차
프롤로그
만해마을
잘 만들어진 유죄-전展
묻다-전展
판타지의 거리
도시의 북쪽 끝
아프리카 그림-전展
밤의 기차
생의 감각
영랑생가
영결식
에필로그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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