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bara: 샹송의 디바, 바르바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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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샹송의 디바, 바르바라 평전』은 재기 발랄하면서 육감적인 텍스트, 탁월한 음악적 감각 그리고 깊고 맑은 목소리의 샹송의 디바, 바르바라의 삶을 담은 책이다. 샹송을 통하여 그녀의 성장 과정을 되짚어보는 일종의 뮤지컬 전기로,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을 지양하고 그녀의 일생에 진정으로 유의미한 뮤직홀 무대를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카바레 에클뤼즈에서 '한밤의 여가수'로 출발한 바르바라의 데뷔탕 시절을, 뮤직홀 보비노에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감동을, 이어서 모두가 선망하는 무대 올랭피아에서 왕관을 쓰게 되는 '검은 독수리'의 날갯짓을, 전설로 회자되는 파리 겨울 서커스장의 '팡탱 81'공연을,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 '릴리 파시옹'의 르 제니트 무대를, 끝으로 샤틀레 극장에서 펼쳐진 마지막 축제를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카바레 에클뤼즈에서 '한밤의 여가수'로 출발한 바르바라의 데뷔탕 시절을, 뮤직홀 보비노에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감동을, 이어서 모두가 선망하는 무대 올랭피아에서 왕관을 쓰게 되는 '검은 독수리'의 날갯짓을, 전설로 회자되는 파리 겨울 서커스장의 '팡탱 81'공연을,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 '릴리 파시옹'의 르 제니트 무대를, 끝으로 샤틀레 극장에서 펼쳐진 마지막 축제를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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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재기 발랄하면서 육감적인 텍스트, 탁월한 음악적 감각 그리고 깊고 맑은 목소리는 그녀를 좁은 카바레 안에 묶어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새장에 갇힌 검은 독수리와 같았다.
1964년 가을, 뮤직홀 보비노. 브라센스의 공연에 보조출연자로 초빙되어 바르바라는 전반부의 무대에
올랐다. 검은 독수리가 폭발적인 날갯짓으로 하늘을 선회하는 데는 불과 삼십여 분이면 족했다. 몽파르나스의 유서 깊은 공연장은 그날 저녁 피아프를 잇는 디바를 만났다. 객석은 피아프의 환생을 보았다. 새로운 디바는 피아프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해석하고 연기하는 가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텍스트에 자신이 만든 음악을 붙이고 직접 노래하였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샹소니에였다.
[머리말]
프랑스에서 "샹송"(chanson)이란 표현은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흔히 우리가 샹송이라고 할 때는 구전된 작자 미상의 가락에서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방대하게 소비되는 "오늘날의 음악"에 이르는 전체를 아우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샹송은 일반적으로 "바리에테"()로 불리는 것으로, 1851년 저작권협회가 프랑스에서 결성되고 나서 등장한 상업적 성격의 음악 생산물을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샹송은 가사, 음악, 해석이란 세 가지 요소에 기대어 있으며, 이 세 가지의 중요성은 동일하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계기로 서로 융합하면서 샹송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품으로서 샹송은 음악과 가사로서 존재하지만, 대중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샹송이 태어나는데, 이 과정의 매개자가 바로 해석자, 즉 가수에 해당한다.
샹송은 그 시대를 말한다. 단순히 샹송의 가사가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환경을 비추어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바리에테' 샹송은 가능한 가장 널리 보급되기 위하여 전략에 맞춰 생산된 상품이다. 샹송은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목표 의식 안에서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샹송은 예술적 생산품인 동시에 사회적 생산물이기도 하다. 한 시대가 생산하고, 유행시키고, 사랑한 샹송 안에는 당대의 사회적 숨결이 오롯이 살아있다. 시대를 풍미한 샹송들을 깊이 읽는 작업을 통해 우리가 당대의 일상과 사회상, 동시대인의 감정 구조, 그들의 욕망과 좌절, 고통과 환희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895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기간에, 소위 '사실적' 샹송(chansons ralistes)으로 불리는 많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마초적인 남성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 받는 여성이 소재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많은 샹송에서 익살스럽고 코믹하며 성차별적이면서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가사들이 후렴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런 류의 가사들은 프랑스의 오랜 사회적 전통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샹송은 엄격한 검열을 받는다. 모든 것이 파리로부터 통제받던 이 시기는 전장의 실상을 거의 전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비참한 참호 전쟁과는 동떨어진 애국적이면서 감상적인 가사만이 전파될 수 있었다. 이어서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란 기간에 이르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때문에 가사는 더욱더 거짓 평화를 강요한다. 걱정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은 전쟁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등장은 이러한 분위기를 강요하였고 이윽고 소위 "이상한 전쟁"(drole de guerre)이라 불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다음 검열은 타의로 더욱 심해진다. 전후에는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샹송이 자주 등장하고 이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없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더러운 전쟁들, 즉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은 또 다시 국가의 공공연한 검열을 낳게 하였다.
프랑스에서 샹송의 검열과 통제가 극심하던 시절이 1950년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가 프랑스 샹송의 황금기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유달리 천재적인 음유시인이 많이 등장하였다. 실존주의의 산실이었던 파리의 리브 고슈, 생 제르맹 데 프레 지구는 크고 작은 카바레로 넘쳐났다.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 그리고 개인용 음향감상기기가 여전히 조악한 수준에 있던 이 시기에, 샹송의 생산과 소비는 카바레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온갖 아티스트들이 모여들고 교육을 받고 장인이 되는 훌륭한 학교가 바로 카바레였다. 우리는 이 시기에 작사, 작곡, 연출을 다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샹소니에"(chansonnier)들을 만나게 된다. 소위 싱어송라이터로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순전히 프랑스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샹소니에의 전통은 이미 중세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실적이며 풍자적인 샹송을 추구하였으며 동시에 검열을 타파하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샹소니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브라센스(Brassens), 브렐(Brel), 바르바라(Barbara) 이렇게 세 사람을 꼽는데, 모두 B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어 "프랑스 샹송의 B 삼인"(les trois B de la chanson franaise)으로 불린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 가운데 브라센스(여백미디어, 2010)와 브렐(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을 이미 다룬 바 있고, 이제 마지막 순서로 바르바라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바르바라 역시 브라센스나 브렐만큼 한국의 샹송 애호가들에게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적인 샹소니에들이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바르바라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샹송 애호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다.
바르바라는 데뷔 시절, 1900년대를 전후로 한 사실주의적 샹송과 1930년대의 코믹한 샹송의 전통을 흡수하여 여성의 지극히 내면적인 감수성을 주로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세계의 부조리에 눈뜨면서 투쟁하는 가수로 변모하였다. 눈부시고 맑은 발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초기 샹송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경향을 선보인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그녀가 겪어야했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발표한 〈괴팅겐〉(Gottingen)은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서 그녀의 관심은 에이즈 말기 환자, 동성연애자, 마약중독자, 어린이 성매매, 매춘 등 사회적 약자와 비열한 범죄로 옮겨졌고 정치적으로는 사회당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바르바라를 통해 우리는 195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음악 산업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영어권으로부터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음악 탓에 의해 프랑스 바리에테 시장이 극심한 변모와 쇠퇴를 겪음에도 자신의 고유한 음악적 색채를 지키면서 극복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바르바라는 단순히 보호무역적인 방어벽을 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외부에서 몰려오는 새로운 사조를 더욱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려고 하였다. 실제로 그녀의 후기 음악은 다양한 실험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어휘로 자신의 삶의 편린을 적어낸 텍스트는 그녀를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극심한 산고를 겪으면서 한 올 한 올 그려낸 그녀의 시구는 놀랍고 감동적이다. 그녀는 시인으로서 브라센스를 존경하였으나, 음악적 성향은 브렐에 가까웠다. 이 세 사람의 관계 역시 프랑스 샹송의 세계에 흥미를 유발시킨다. 브라센스가 자신의 공연에 보조출연자로 바르바라를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성공하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면, 브렐은 그녀에게 롤 모델이었다. 그녀는 브렐이 감독한 영화 〈프란츠〉에 출연하면서 연기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은 그녀의 공연무대를 더욱 풍부하고 깊게 만들었다.
우리는 바르바라의 샹송을 통하여 그녀의 성장 과정을 되짚어보는 일종의 뮤지컬 전기를 써보기로 한다. 이 뮤지컬 전기는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을 지양하고 그녀의 일생에 진정으로 유의미한 뮤직홀 무대를 중심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카바레 에클뤼즈에서 "한밤의 여가수"로 출발한 바르바라의 데뷔탕 시절을, 뮤직홀 보비노에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감동을, 이어서 모두가 선망하는 무대 올랭피아에서 왕관을 쓰게 되는 "검은 독수리"의 날갯짓을, 전설로 회자되는 파리 겨울 서커스장의 "팡탱 81"공연을,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 "릴리 파시옹"의 르 제니트 무대를, 끝으로 샤틀레 극장에서 펼쳐진 마지막 축제를 차례로 찾아볼 것이다.
제1장 도피의 계절
1966년 초겨울, 바르바라 일행은 순회공연 때문에 그르노블 근처를 자동차로 이동 중이었다. 말없이 메르세데스를 운전하고 있던 피에르에게 바르바라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생 마르슬랭을 지나는 거지? 내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생 마르슬랭이지? 피에르, 분명하지? 그리로 가요!"
피에르와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두 사람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녀는 여행 중 자신이 아는 도시를 지날 때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못 본 척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은 어떤 생각이 든 것일까? 생 마르슬랭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녀는 화장을 했다. 검은 눈, 진홍빛 입술. 그녀는 팔찌를 찰랑거리며 머릿결을 손질했다. 그녀의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저기 차를 세워요."
짤막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진하게 배어나는 목소리임은 분명했다.
광장을 끼고 돌아서 가자 교회가 나왔고,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 가자 또 다른 길이 나왔고, 그곳에 그녀가 찾는 집이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집이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라 장미꽃은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을 쥐고서 그녀는 말이 없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두 눈은 젖어 있었다. 그들은 차로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자동차가 서서히 속력을 높여가자 그녀는 잠이 들었다. 손에는 둘둘 말린 손수건이 흡사 마른 눈덩이처럼 쥐여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 우연한 방문은 <나의 어린 시절>이란 노래가 되어 1968년 여름에 발표된다.
내 잘못이야, 돌아온 건
이 도시에, 멀리, 잊혔던 곳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내 잘못이야, 돌아오려 한 건
이 언덕 저녁이 미끄러져 오던 곳
푸른 잿빛, 침묵의 그림자
그때처럼 난 다시 보았지,
긴 세월이 지난 다음,
그 언덕을, 서 있는 그 나무를
그 옛날처럼,
난 걸었어, 잉걸 같은 관자놀이,
내 발걸음에 눌려 질식했다고 여겼지
우릴 사로잡던 옛날의 그 목소리들이
그들은 조종을 울리러 돌아오네
난 그 나무 아래 누웠지
그 옛날과 같은 향기
하염없이 흘렸네 눈물을,
눈물을
나뭇등걸에 내 등을 붙였어
그 나무는 내게 다시 힘을 주었어
내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오랫동안, 난 눈을 감았어
어쩌면 잠깐 기도를 했는지
나의 순진무구함을 다시 찾았네
저녁이 깊어지기 전에
난 보고 싶었어
그 정원을 어린 우리가 내던 소리는
맑은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지
장, 클로드 그리고 레진, 다시 장
모두가 어제처럼 다시 돌아갔어
진한 향기의 붉은색 샐비어도,
골목에는 갈색 달리아도,
우물도,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분명히, 다른 애들은 덜 행복했어,
그들의 어린 시절 예쁜 그때에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우린 무법자처럼 살았어
난 그게 좋았어, 생각해 보면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
고통스럽게 왜 돌아왔을까
오, 9월의 신선한 호두
오, 밟힌 오디의 향기
미친 짓이야,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돼
추억 속에 숨겨진 시절로
어린 시절의 축복받은 때로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오늘
당신은 땅 속에서 따뜻하게 자고 있네요
나는, 나는 여기에 왔습니다
여기 다시 찾으려고 당신의 웃음을,
당신의 분노를 그리고 당신의 젊음을
그러나 나는 절망 속에 혼자 있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도대체 내가 왜 다시 돌아왔을까요
그것도 혼자, 이 길 저 길을 돌아서,
춥고, 두렵고, 저녁이 깊어갑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 이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네요 나의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은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편의 교향곡이 될 수도 있다. 자크 브렐은 '인생이란 어린 시절의 못 이룬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한 편의 노래 속에 바르바라는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그리고 있다.
정말로 우연히 그녀는 생 마르슬랭을 지나가다가 독일군 점령 시대, 그 위험했던 시절에 그녀의 가족이 숨어 살던 집을 찾게 된다. 그녀의 노래는 사라지고 없는 옛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그리고 있다. 장미꽃, 달리아꽃,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한 정원, 함께 뛰어놀던 오빠 장, 동생 클로드와 레진을. 그들은 "무법자처럼" 살았고 그것을 즐겼다고 했다. 어린아이는 천성적으로 신비와 모험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대인 어린이들은 언제나 도망가고 숨어야했기에 삶을 즐거운 모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전쟁은 그들을 위험한 도피의 길로 내몰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비슷한 운명의 다른 유대인들보다는 행복했다. 그들은 "9월의 신선한 호두도 땅에 떨어진 잘 익은 오디"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르바라는 그리운 어머니를 노래한다. 어머니의 젊음을, 어머니의 분노를,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찾으며 홀로 절망에 빠진다.
노래는 "내 잘못이야"로 시작하여 곳곳에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러지 말 걸"과 같은 후회의 표현을 담고 있다. 옛 이야기는 그녀를 괴롭힌다. 따라서 다시 옛날을 환기하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이다. 추억은 괴로운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스탤지어를 넘어서서 폭력적이다.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녀의 노랫말은 은유적이면서 대단히 정확하여 그녀의 삶의 편린을 응축하여 담아내고 있다. 그녀가 그 속에 심어 놓은 인생의 파편은 생의 궤적을 연대기적으로 잘 배열하고 있다.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은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그 고통과의 화해를 위한 기록의 표제어들이다. 이 표제어 아래 저 깊은 곳에 바르바라가 감추어 놓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을 찾으려면 우리는 펜을 좀 더 옛날로 향해야 할 것 같다.
바르바라는 1930년 9월, 파리 17구, 브로샹 길 6번에 있는 수수한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오후 4시에, 자크 세르프, 에스테르 세르프 부부는 둘째 아이이자 첫째 딸을 얻었다. 부부는 이 딸에게 모니크라는 이름을 주었다. 모니크의 오빠 장은 1928년생으로 아직 만 두 살이 채 되지 않았다. 1905년생인 그녀의 어머니 에스테르는, 모이즈 브로드스키와 하바 브로드스키의 딸로서, 중부 유럽 출신의 유대계 혈통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모이즈는 그녀가 세 살 때 사망해서 그녀에게 외할아버지의 기억은 없었다. 반대로 외할머니 하바는 생생한 기억 속의 존재였다. 그녀는 외할머니를 "그라니(Granny)"라고 불렀는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었다. 밤이 되면 하바는 자신이 살았던 중부 유럽의 전설과 신화로 어린 손녀의 상상을 자극하였고 맛있는 케이크로 어린 손녀를 행복하게 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그리운 할머니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녀는 몸집이 자그마했고, 높은 광대뼈에, 크고 검은 눈 그리고 아주 예쁜 손을 가지고 계셨다. 그녀는 몰다비아 지방의 티라스폴에서 태어나셨는데, 나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태어나셨다. 그녀한테는 꿀 냄새가 났고 코린트 지방의 금빛 포도를 얹은 케이크나, 사과와 껍질 깐 호두를 얹은 스트루델을 만들어 주시곤 하였다." 1904년생인 모니크의 아버지 자크 세르프는, 막심 세르프와 루이즈 세르프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안도 오래 전부터 알자스 지방에서 거주해온 유대계 출신이었다.
1930년대에 에스테르는 파리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몸집이 작고 귀여운 느낌을 주어 주위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닮았다고 했다. 자크는 상업 대리점 업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직장 자체가 불분명하면서 지방 출장이 잦았다. (혹은 모피 의류 외판상을 했다고도 하는데 분명하지 않다.) 부부가 맞벌이를 했지만 살림은 언제나 적자를 걱정해야 했다. 모니크가 아직 아기였을 때 그녀의 부모는 브로샹 길을 떠나 가까운 곳인 놀레 길로 이사했다.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바티뇰 광장이 친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자크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1937년이었다. 자동차로 그들은 파리에서 8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마르세이유로 향했고, 한 해가 지난 다음, 다시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중부 지방 로안느로 떠났다. 이곳에서 1938년 8월 24일, 셋째 아이 레진이 태어난다. 왜 갑작스럽게 마르세이유에서 로안느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니크의 뇌리에는 새벽에 득달같이 찾아와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집달리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안느에서는 가난 그 자체였다. 어른들의 해진 옷을 뜯어고쳐 내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이게 못마땅했지만 할 수 없었다. 로안느에서는 집달리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새벽에만 나타났다! 내 눈 앞에서 가구란 가구는 죄다 없어지는 걸 보았다. 부모님의 침대만 빼놓고."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말만 들었다.
1964년 가을, 뮤직홀 보비노. 브라센스의 공연에 보조출연자로 초빙되어 바르바라는 전반부의 무대에
올랐다. 검은 독수리가 폭발적인 날갯짓으로 하늘을 선회하는 데는 불과 삼십여 분이면 족했다. 몽파르나스의 유서 깊은 공연장은 그날 저녁 피아프를 잇는 디바를 만났다. 객석은 피아프의 환생을 보았다. 새로운 디바는 피아프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해석하고 연기하는 가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텍스트에 자신이 만든 음악을 붙이고 직접 노래하였다. 그녀는 진정한 의미의 샹소니에였다.
[머리말]
프랑스에서 "샹송"(chanson)이란 표현은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흔히 우리가 샹송이라고 할 때는 구전된 작자 미상의 가락에서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방대하게 소비되는 "오늘날의 음악"에 이르는 전체를 아우른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샹송은 일반적으로 "바리에테"()로 불리는 것으로, 1851년 저작권협회가 프랑스에서 결성되고 나서 등장한 상업적 성격의 음악 생산물을 말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샹송은 가사, 음악, 해석이란 세 가지 요소에 기대어 있으며, 이 세 가지의 중요성은 동일하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계기로 서로 융합하면서 샹송이 탄생하는 것이다. 작품으로서 샹송은 음악과 가사로서 존재하지만, 대중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샹송이 태어나는데, 이 과정의 매개자가 바로 해석자, 즉 가수에 해당한다.
샹송은 그 시대를 말한다. 단순히 샹송의 가사가 정치적 사건이나 사회적 환경을 비추어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대중문화와 마찬가지로 '바리에테' 샹송은 가능한 가장 널리 보급되기 위하여 전략에 맞춰 생산된 상품이다. 샹송은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목표 의식 안에서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샹송은 예술적 생산품인 동시에 사회적 생산물이기도 하다. 한 시대가 생산하고, 유행시키고, 사랑한 샹송 안에는 당대의 사회적 숨결이 오롯이 살아있다. 시대를 풍미한 샹송들을 깊이 읽는 작업을 통해 우리가 당대의 일상과 사회상, 동시대인의 감정 구조, 그들의 욕망과 좌절, 고통과 환희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895년에서 1925년에 이르는 기간에, 소위 '사실적' 샹송(chansons ralistes)으로 불리는 많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마초적인 남성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 받는 여성이 소재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많은 샹송에서 익살스럽고 코믹하며 성차별적이면서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가사들이 후렴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런 류의 가사들은 프랑스의 오랜 사회적 전통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샹송은 엄격한 검열을 받는다. 모든 것이 파리로부터 통제받던 이 시기는 전장의 실상을 거의 전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비참한 참호 전쟁과는 동떨어진 애국적이면서 감상적인 가사만이 전파될 수 있었다. 이어서 1930년대 후반 스페인 내란 기간에 이르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 때문에 가사는 더욱더 거짓 평화를 강요한다. 걱정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강한 열망은 전쟁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등장은 이러한 분위기를 강요하였고 이윽고 소위 "이상한 전쟁"(drole de guerre)이라 불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다음 검열은 타의로 더욱 심해진다. 전후에는 레지스탕스와 관련된 샹송이 자주 등장하고 이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없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더러운 전쟁들, 즉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은 또 다시 국가의 공공연한 검열을 낳게 하였다.
프랑스에서 샹송의 검열과 통제가 극심하던 시절이 1950년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가 프랑스 샹송의 황금기이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유달리 천재적인 음유시인이 많이 등장하였다. 실존주의의 산실이었던 파리의 리브 고슈, 생 제르맹 데 프레 지구는 크고 작은 카바레로 넘쳐났다.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 그리고 개인용 음향감상기기가 여전히 조악한 수준에 있던 이 시기에, 샹송의 생산과 소비는 카바레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온갖 아티스트들이 모여들고 교육을 받고 장인이 되는 훌륭한 학교가 바로 카바레였다. 우리는 이 시기에 작사, 작곡, 연출을 다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샹소니에"(chansonnier)들을 만나게 된다. 소위 싱어송라이터로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순전히 프랑스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샹소니에의 전통은 이미 중세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실적이며 풍자적인 샹송을 추구하였으며 동시에 검열을 타파하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샹소니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브라센스(Brassens), 브렐(Brel), 바르바라(Barbara) 이렇게 세 사람을 꼽는데, 모두 B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어 "프랑스 샹송의 B 삼인"(les trois B de la chanson franaise)으로 불린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 가운데 브라센스(여백미디어, 2010)와 브렐(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을 이미 다룬 바 있고, 이제 마지막 순서로 바르바라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바르바라 역시 브라센스나 브렐만큼 한국의 샹송 애호가들에게 소개된 바가 거의 없다.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대표적인 샹소니에들이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바르바라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샹송 애호가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다.
바르바라는 데뷔 시절, 1900년대를 전후로 한 사실주의적 샹송과 1930년대의 코믹한 샹송의 전통을 흡수하여 여성의 지극히 내면적인 감수성을 주로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세계의 부조리에 눈뜨면서 투쟁하는 가수로 변모하였다. 눈부시고 맑은 발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초기 샹송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경향을 선보인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그녀가 겪어야했던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발표한 〈괴팅겐〉(Gottingen)은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서 그녀의 관심은 에이즈 말기 환자, 동성연애자, 마약중독자, 어린이 성매매, 매춘 등 사회적 약자와 비열한 범죄로 옮겨졌고 정치적으로는 사회당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바르바라를 통해 우리는 195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음악 산업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영어권으로부터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음악 탓에 의해 프랑스 바리에테 시장이 극심한 변모와 쇠퇴를 겪음에도 자신의 고유한 음악적 색채를 지키면서 극복해 나가는 그녀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바르바라는 단순히 보호무역적인 방어벽을 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외부에서 몰려오는 새로운 사조를 더욱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려고 하였다. 실제로 그녀의 후기 음악은 다양한 실험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어휘로 자신의 삶의 편린을 적어낸 텍스트는 그녀를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극심한 산고를 겪으면서 한 올 한 올 그려낸 그녀의 시구는 놀랍고 감동적이다. 그녀는 시인으로서 브라센스를 존경하였으나, 음악적 성향은 브렐에 가까웠다. 이 세 사람의 관계 역시 프랑스 샹송의 세계에 흥미를 유발시킨다. 브라센스가 자신의 공연에 보조출연자로 바르바라를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성공하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면, 브렐은 그녀에게 롤 모델이었다. 그녀는 브렐이 감독한 영화 〈프란츠〉에 출연하면서 연기에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은 그녀의 공연무대를 더욱 풍부하고 깊게 만들었다.
우리는 바르바라의 샹송을 통하여 그녀의 성장 과정을 되짚어보는 일종의 뮤지컬 전기를 써보기로 한다. 이 뮤지컬 전기는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을 지양하고 그녀의 일생에 진정으로 유의미한 뮤직홀 무대를 중심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야기는, 카바레 에클뤼즈에서 "한밤의 여가수"로 출발한 바르바라의 데뷔탕 시절을, 뮤직홀 보비노에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감동을, 이어서 모두가 선망하는 무대 올랭피아에서 왕관을 쓰게 되는 "검은 독수리"의 날갯짓을, 전설로 회자되는 파리 겨울 서커스장의 "팡탱 81"공연을, 그리고 뮤지컬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준 "릴리 파시옹"의 르 제니트 무대를, 끝으로 샤틀레 극장에서 펼쳐진 마지막 축제를 차례로 찾아볼 것이다.
제1장 도피의 계절
1966년 초겨울, 바르바라 일행은 순회공연 때문에 그르노블 근처를 자동차로 이동 중이었다. 말없이 메르세데스를 운전하고 있던 피에르에게 바르바라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 우리가 생 마르슬랭을 지나는 거지? 내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생 마르슬랭이지? 피에르, 분명하지? 그리로 가요!"
피에르와 마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어디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두 사람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녀는 여행 중 자신이 아는 도시를 지날 때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못 본 척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은 어떤 생각이 든 것일까? 생 마르슬랭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녀는 화장을 했다. 검은 눈, 진홍빛 입술. 그녀는 팔찌를 찰랑거리며 머릿결을 손질했다. 그녀의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저기 차를 세워요."
짤막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진하게 배어나는 목소리임은 분명했다.
광장을 끼고 돌아서 가자 교회가 나왔고,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따라 가자 또 다른 길이 나왔고, 그곳에 그녀가 찾는 집이 있었다.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집이었는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라 장미꽃은 보이지 않았다. 손수건을 쥐고서 그녀는 말이 없었다. 선글라스 아래로 두 눈은 젖어 있었다. 그들은 차로 천천히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자동차가 서서히 속력을 높여가자 그녀는 잠이 들었다. 손에는 둘둘 말린 손수건이 흡사 마른 눈덩이처럼 쥐여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 우연한 방문은 <나의 어린 시절>이란 노래가 되어 1968년 여름에 발표된다.
내 잘못이야, 돌아온 건
이 도시에, 멀리, 잊혔던 곳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내 잘못이야, 돌아오려 한 건
이 언덕 저녁이 미끄러져 오던 곳
푸른 잿빛, 침묵의 그림자
그때처럼 난 다시 보았지,
긴 세월이 지난 다음,
그 언덕을, 서 있는 그 나무를
그 옛날처럼,
난 걸었어, 잉걸 같은 관자놀이,
내 발걸음에 눌려 질식했다고 여겼지
우릴 사로잡던 옛날의 그 목소리들이
그들은 조종을 울리러 돌아오네
난 그 나무 아래 누웠지
그 옛날과 같은 향기
하염없이 흘렸네 눈물을,
눈물을
나뭇등걸에 내 등을 붙였어
그 나무는 내게 다시 힘을 주었어
내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오랫동안, 난 눈을 감았어
어쩌면 잠깐 기도를 했는지
나의 순진무구함을 다시 찾았네
저녁이 깊어지기 전에
난 보고 싶었어
그 정원을 어린 우리가 내던 소리는
맑은 샘처럼 솟아나고 있었지
장, 클로드 그리고 레진, 다시 장
모두가 어제처럼 다시 돌아갔어
진한 향기의 붉은색 샐비어도,
골목에는 갈색 달리아도,
우물도,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분명히, 다른 애들은 덜 행복했어,
그들의 어린 시절 예쁜 그때에
전쟁이 우릴 그곳에 던져놓았지
우린 무법자처럼 살았어
난 그게 좋았어, 생각해 보면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
고통스럽게 왜 돌아왔을까
오, 9월의 신선한 호두
오, 밟힌 오디의 향기
미친 짓이야, 전부, 난 전부 다시 보았어
그러지 말 걸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 돼
추억 속에 숨겨진 시절로
어린 시절의 축복받은 때로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에
당신은,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오늘
당신은 땅 속에서 따뜻하게 자고 있네요
나는, 나는 여기에 왔습니다
여기 다시 찾으려고 당신의 웃음을,
당신의 분노를 그리고 당신의 젊음을
그러나 나는 절망 속에 혼자 있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도대체 내가 왜 다시 돌아왔을까요
그것도 혼자, 이 길 저 길을 돌아서,
춥고, 두렵고, 저녁이 깊어갑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요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 이곳에
영원히 잠들어 있네요 나의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은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편의 교향곡이 될 수도 있다. 자크 브렐은 '인생이란 어린 시절의 못 이룬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한 편의 노래 속에 바르바라는 자신의 삶을 축약해서 그리고 있다.
정말로 우연히 그녀는 생 마르슬랭을 지나가다가 독일군 점령 시대, 그 위험했던 시절에 그녀의 가족이 숨어 살던 집을 찾게 된다. 그녀의 노래는 사라지고 없는 옛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그리고 있다. 장미꽃, 달리아꽃,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한 정원, 함께 뛰어놀던 오빠 장, 동생 클로드와 레진을. 그들은 "무법자처럼" 살았고 그것을 즐겼다고 했다. 어린아이는 천성적으로 신비와 모험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대인 어린이들은 언제나 도망가고 숨어야했기에 삶을 즐거운 모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전쟁은 그들을 위험한 도피의 길로 내몰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비슷한 운명의 다른 유대인들보다는 행복했다. 그들은 "9월의 신선한 호두도 땅에 떨어진 잘 익은 오디"도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르바라는 그리운 어머니를 노래한다. 어머니의 젊음을, 어머니의 분노를, 어머니의 웃음소리를 찾으며 홀로 절망에 빠진다.
노래는 "내 잘못이야"로 시작하여 곳곳에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러지 말 걸"과 같은 후회의 표현을 담고 있다. 옛 이야기는 그녀를 괴롭힌다. 따라서 다시 옛날을 환기하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왜냐하면, "모든 추억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은 훨씬 괴롭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찢기 때문"이다. 추억은 괴로운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스탤지어를 넘어서서 폭력적이다. "나의 과거가 나를 십자가에 매단"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그녀의 노랫말은 은유적이면서 대단히 정확하여 그녀의 삶의 편린을 응축하여 담아내고 있다. 그녀가 그 속에 심어 놓은 인생의 파편은 생의 궤적을 연대기적으로 잘 배열하고 있다. "오 나의 봄, 오 나의 태양, 오 내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 오 나의 열다섯 살, 오 나의 놀라움"은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그 고통과의 화해를 위한 기록의 표제어들이다. 이 표제어 아래 저 깊은 곳에 바르바라가 감추어 놓은 "잃어버린 그 미친 나날"을 찾으려면 우리는 펜을 좀 더 옛날로 향해야 할 것 같다.
바르바라는 1930년 9월, 파리 17구, 브로샹 길 6번에 있는 수수한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오후 4시에, 자크 세르프, 에스테르 세르프 부부는 둘째 아이이자 첫째 딸을 얻었다. 부부는 이 딸에게 모니크라는 이름을 주었다. 모니크의 오빠 장은 1928년생으로 아직 만 두 살이 채 되지 않았다. 1905년생인 그녀의 어머니 에스테르는, 모이즈 브로드스키와 하바 브로드스키의 딸로서, 중부 유럽 출신의 유대계 혈통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모이즈는 그녀가 세 살 때 사망해서 그녀에게 외할아버지의 기억은 없었다. 반대로 외할머니 하바는 생생한 기억 속의 존재였다. 그녀는 외할머니를 "그라니(Granny)"라고 불렀는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었다. 밤이 되면 하바는 자신이 살았던 중부 유럽의 전설과 신화로 어린 손녀의 상상을 자극하였고 맛있는 케이크로 어린 손녀를 행복하게 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그리운 할머니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녀는 몸집이 자그마했고, 높은 광대뼈에, 크고 검은 눈 그리고 아주 예쁜 손을 가지고 계셨다. 그녀는 몰다비아 지방의 티라스폴에서 태어나셨는데, 나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태어나셨다. 그녀한테는 꿀 냄새가 났고 코린트 지방의 금빛 포도를 얹은 케이크나, 사과와 껍질 깐 호두를 얹은 스트루델을 만들어 주시곤 하였다." 1904년생인 모니크의 아버지 자크 세르프는, 막심 세르프와 루이즈 세르프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안도 오래 전부터 알자스 지방에서 거주해온 유대계 출신이었다.
1930년대에 에스테르는 파리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몸집이 작고 귀여운 느낌을 주어 주위에서 에디트 피아프를 닮았다고 했다. 자크는 상업 대리점 업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직장 자체가 불분명하면서 지방 출장이 잦았다. (혹은 모피 의류 외판상을 했다고도 하는데 분명하지 않다.) 부부가 맞벌이를 했지만 살림은 언제나 적자를 걱정해야 했다. 모니크가 아직 아기였을 때 그녀의 부모는 브로샹 길을 떠나 가까운 곳인 놀레 길로 이사했다.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바티뇰 광장이 친숙해지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자크는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1937년이었다. 자동차로 그들은 파리에서 8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마르세이유로 향했고, 한 해가 지난 다음, 다시 북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중부 지방 로안느로 떠났다. 이곳에서 1938년 8월 24일, 셋째 아이 레진이 태어난다. 왜 갑작스럽게 마르세이유에서 로안느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니크의 뇌리에는 새벽에 득달같이 찾아와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집달리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안느에서는 가난 그 자체였다. 어른들의 해진 옷을 뜯어고쳐 내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이게 못마땅했지만 할 수 없었다. 로안느에서는 집달리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새벽에만 나타났다! 내 눈 앞에서 가구란 가구는 죄다 없어지는 걸 보았다. 부모님의 침대만 빼놓고."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런 말만 들었다.
목차
목차
들어가면서 _ 5
프롤로그 _ 10
제1부 브뤼셀, 내 마음의 워털루 15
1. 도피의 계절 17
2. 북으로 가는 길 38
3. 에클뤼즈 57
제2부 카바레의 스타 83
4. 기약 없는 사랑 85
5. 바르바라, 바르바라를 노래하다 97
6. 고난의 세월은 끝나고 115
7. 친구의 죽음과 영광의 길 128
제3부 뮤직홀의 디바 145
8. 디바의 탄생 147
9. 올랭피아에 오르다 158
10. 레옹과 레오니 172
11. 바르바라 최고의 히트곡 184
12. 파리를 떠나다 195
제4부 바르바라의 전설 209
13. 바르바라 전설을 쓰다 211
14. 무섭다 그러나 나아간다 223
15. 분노하고 참여하다 237
제5부 마지막 앨범 혹은 유언 251
16. 영원한 이별의 전주 253
17. 못다 한 이야기 266
참고자료 _ 273
부록 _ 275
프롤로그 _ 10
제1부 브뤼셀, 내 마음의 워털루 15
1. 도피의 계절 17
2. 북으로 가는 길 38
3. 에클뤼즈 57
제2부 카바레의 스타 83
4. 기약 없는 사랑 85
5. 바르바라, 바르바라를 노래하다 97
6. 고난의 세월은 끝나고 115
7. 친구의 죽음과 영광의 길 128
제3부 뮤직홀의 디바 145
8. 디바의 탄생 147
9. 올랭피아에 오르다 158
10. 레옹과 레오니 172
11. 바르바라 최고의 히트곡 184
12. 파리를 떠나다 195
제4부 바르바라의 전설 209
13. 바르바라 전설을 쓰다 211
14. 무섭다 그러나 나아간다 223
15. 분노하고 참여하다 237
제5부 마지막 앨범 혹은 유언 251
16. 영원한 이별의 전주 253
17. 못다 한 이야기 266
참고자료 _ 273
부록 _ 275
저자
저자
장승일
저자 장승일은 1954년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197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나서,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석사과정(1979년~1980년)을 수료하고,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언어학과 석사(1980년~1982년)와 박사(1982년~1985년) 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1986년~1995년)에 재직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 교수(1995년~현재까지)로 재직 중이다. 『참은 참이라고 말한 것이다』, 『자크 브렐』, 『샹송을 찾아서』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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