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인생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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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문학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작가 중 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오해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
대부분의 비평가는 모순되는 모습들의 어느 한 면을 다른 면은 무시하면서 부각시켜 왔다. …
이 책은 독자들이 〈월든〉과 「시민 불복종」보다 소로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초대임과 동시에 소로와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좀더 전문적인 연구들을 탐색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이며 출발점이다.
그의 복합적인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소로가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자연주의자이며 정치적 이단자로서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공개적인 작품들과 사적인 일기 둘 다에서 경험과 글쓰기 그리고 인생과 예술을 결합시키려고 고심한 작가로서이다. ― 서문에서
대부분의 비평가는 모순되는 모습들의 어느 한 면을 다른 면은 무시하면서 부각시켜 왔다. …
이 책은 독자들이 〈월든〉과 「시민 불복종」보다 소로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초대임과 동시에 소로와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좀더 전문적인 연구들을 탐색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이며 출발점이다.
그의 복합적인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소로가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자연주의자이며 정치적 이단자로서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공개적인 작품들과 사적인 일기 둘 다에서 경험과 글쓰기 그리고 인생과 예술을 결합시키려고 고심한 작가로서이다. ―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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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삶과 예술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젊은 시절 그 딜레마를 2행 연시로 "내 인생은 내가 쓰고 싶었던 시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도 그것을 말로 할 수도 없었다"고 표현했다. 고뇌하는 작가로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는 사회적 반항자, 자연주의자 그리고 초월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모범이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시대의 삶의 질에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을 하며 예술가로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만년에 이르러 그의 과학적 연구와 여행기들 그리고 정치적 참여행위가 때때로 그가 바랐던 영향을 주지 못했을 때는 적어도 그의 예술작품들?특히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과 ?월든?(Walden)?이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아 그의 삶을 정당화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는 한 친구에게 "나는 개인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입니다. (…) 내가 미약하게나마 발설하는 진리에 비했을 때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요?"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삶과 예술 간의 기본적인 갈등은 그의 인생에 스며들었고, 또한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한편으로 보면, 그의 최고의 문학 작품들은 작품 자체의 힘으로 계속 살아 있다. ?월든?은 소로의 삶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소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지 못한다면, 그가 쓴 것을 매우 오해할 수 있는 위험에 자주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목적은 소로의 인생 사건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흔한 오해의 일부를 불식하는 것이다.
월든 호수 이전 시기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헨리 데이비드 소로(세례명 데이비드 헨리)는 1817년 7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미국의 정치적 자유의 탄생지였으며, 후에 소로의 영향으로 미국의 문학적 독립의 탄생지가 될 곳이었다. 소로의 집안사람들은 매우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헨리의 할아버지 장 소로(Jean Thoreau)는 프랑스 해적이었는데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미국에 정착하여 보스턴 부두에서 상인이 되어 재산을 모았다. 헨리의 아버지인 존 소로(John Thoreau)는 좀 더 조용한 방식으로 그의 독립을 표현했는데, 처음에는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를 "우호적이고 매우 사랑스러운 신사이며 (…) 지나치게 정직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는, 노력하는 상인이었으며, 나중에는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좋은 연필을 만든 성공적인 제조업자이기도 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헨리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헨리 가족의 친구였던 호러스 호스머(Horace Hosmer)가 "포도는 가시나무에서 자라나지 않는다"라고 한 말마따나, 헨리는 적어도 그의 아버지에게서 책에 대한 사랑과 조용하고 완고한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다. 리처드 르보(Richard Lebeaux)는 나아가 "소로는 그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점점 더 경쟁적이고 공격적이고 기업화-산업화된 세상에서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가치와 자신을 자연히 동일시했을지 모른다"고 암시하고 있다.
헨리의 어머니인 신시아 던바 소로(Cynthia Dunbar Thoreau)는 잘 알려진 (아마도 "악명 높은"이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인물로, 콩코드 상점들에서 제일 좋은 물건만을 받아들인 빈틈없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으며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하숙집을 운영했던 입담 좋은 사람이었다. 신시아와 그녀의 시누이 마리아(Maria)는 또한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들이었다. 헨리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입담 좋고 날카로운 언변과 자유로운 지적 탐구의 재능을 물려받았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삶과 작품 속에 배어있다.
소로의 자연 사랑의 씨앗은 유년 시절에 역시 그의 부모에 의해 뿌려졌으며 그가 이십 대의 나이가 되었을 때 활짝 꽃피우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콩코드 근처의 산과 호수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자주 저녁을 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로의 철학적인 이상은 그의 내부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잠자리에 들고서도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왜 잠을 자지 않느냐고 묻자,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혹시 별들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신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이들을 성경에 관한 명상으로 실내에서 낮 시간을 보내게 하는 청교도적 관습 때문에 주일날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방식에 따라 깊게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 내내 교회에 다니기를 거부했다.
고독을 즐기는 그의 성향 또한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다른 아이들은 그의 진지함(별명이 "재판관"이었다)과 그들의 게임 놀이에 합세하길 꺼리는 것 때문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이런 신중함의 대부분은 단순히 그의 기질적 특성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런 성격의 일부분은 집이 하숙을 쳐서 항상 시끌벅적했고 그 때문에 사생활 보호가 거의 되지 않던 삶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소로는 그가 원했을 때는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호스머는 그의 형 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소로가의 형제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헨리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그의 형 존(John)이었다. 둘 중에서 분명히 더 인기가 있던 존을 소로는 전적으로 사랑하고 따랐는데 1842년 존의 죽음은 소로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소로 형제는 마을의 공립학교와 더 권위 있는 사립학교인 콩코드 아카데미(Concord Academy)에서 교육을 받았다. 헨리가 더 훌륭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둘 중에서 누굴 하버드대학에 보낼까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오자(둘을 대학에 보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헨리가 선택되었다. 소로는 비록 하버드대학 입학시험을 겨우 통과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충분히 잘해서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계속 유지했으며 장학금을 주는 상도 몇 차례나 받았다. 그는 특히 언어에 소질을 보였다. 필수과목이었던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충분히 터득하여 후에 다소 별나긴 하지만 괜찮은 번역 작품들을 ?다이얼?(Dial)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자발적으로 이태리어, 불어, 독일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의 근대 언어 과목들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사학과 웅변술 석좌교수였던 에드워드 타이렐 채닝(Edward Tyrrel Channing)의 작문 수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소로가 대학 시절에 쓴 에세이의 문체는 뛰어나진 않을지라도, 부여된 주제의 목록은 채닝이 소로로 하여금 주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은근히 암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그의 글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일기를 계속 쓰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 생각하더라도)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비우호적인 의견의 힘에 대항하려는 또 다른 동기", "어떠한 근거로 공손한 사회의 형식과 의식 그리고 제약이 반대될 수도 있는가?", "심하고 가벼운 벌에 대한 비교적인 도덕 정책", "한 사람의 스타일이 단순함에 맞선다고 말해질 수 있는 방식", "일반적 논리에 만족하는 평범함에 대하여", "사소한 일과 위대한 일에 있어 의무감의 불편함과 순응의 위험에 대해 말해보라", 그리고 자연의 숭고성 이론에 대한 에세이(1837년 3월 31일). 이러한 목록은 그가 일기를 계속 쓴 것, 비순응, 삶과 글에 있어서의 단순함에 대한 강조, 자연의 야성(숭고함)에 대한 관심이라는 씨앗들을 담고 있다. 하버드대학에서의 그의 비순응은 대다수 학생이 학교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을 때 그가 벌을 받지 않은 자기 반의 소수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실천적이기보다는 이론적인 것에 국한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로의 대학 생활은 1836년에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문제로 중단되었다. 1835년 12월부터 1836년 3월까지 돈을 벌기 위해 학교의 허가를 얻어 매사추세츠주 캔턴(Canton)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지만 논란이 있던 인물로 뉴잉글랜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오레스티즈 브라운슨(Orestes Brownson)의 영향을 잠시 받는다. 하버드로 돌아온 다음 그해 봄 늦게 그는 병에 걸려 (아마 폐결핵으로) 대학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다. 하지만 여름을 거쳐 회복한 그는 추가 선택 강의를 들어서 1837년 8월 동급생들과 함께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하버드는 졸업생들에게 8월 학위 수여를 받기 전 6주 동안 여름 방학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소로는 그의 친구인 찰스 스턴스 휠러(Charles Stearns Wheeler)와 링컨(Lincoln)에 있는 플린트 호수(Flint's Pond)에 휠러가 지은 오두막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소로는 휠러와 함께 그 생활을 충분히 즐겼으며, 후에 월터 하딩(Walter Harding)은 "그때의 경험은 의심할 바 없이 나중에 소로의 월든 호수에서의 실험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소로는 졸업을 위해 하버드로 돌아왔으며 졸업식 행사의 일부인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향 사람인 에머슨이 8월 31일 우등생 클럽(Phi Beta Kappa Society)에서 연설한 그 유명한 ?미국의 학자?("American Scholar")를 소로가 들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의 급우 중 한 명의 편지에 의하면, 에머슨의 연설이 있기 전에 소로가 콩코드의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학사(B.A) 학위를 얻은 소로는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졸업생들의 전형적인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였다. 처음에 선택은 쉬워 보였다. 소로의 누나와 형인 헬렌과 존은 이미 교사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헨리 역시 교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콩코드에 있는 센터스쿨(Center School)로 알려진 공립학교에서 교사를 구했고 헨리는 지원하여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사직은 2주가 채 되지 않고 끝났다. 취임 둘째 주 동안에 학교운영위원 한 사람이 학교를 방문하여 소로의 학급이 지나치게 규율이 없음을 발견하고 체벌로 질서를 잡으라고 요구했다.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어쨌든 그는 계약직이었으므로) 소로는 이내 자를 집어 들고 자기 반 학생들 대여섯 명을 때렸으나, 같은 날 저녁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경제적 침체기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 교사직도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뉴잉글랜드 전역은 물론, 버지니아와 켄터키에까지 교직을 얻으려고 지원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연필공장에서 임시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보여주었던 실용적인 기술은 그의 아버지가 질 좋은 연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독일식 연필 제조 방식에 대한 연구를 한 후에, 그는 흑연을 분쇄하고 혼합하는 방법을 개량한 결과, 유럽에서 수입한 연필에 필적하는 최초의 미국제 연필을 만들 수 있게 했고 그의 아버지 회사가 미국시장을 주도하게 했다.
의무를 다하는 아들임과 동시에 그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데이비드 헨리(David Henry)에서 헨리 데이비드(Henry David)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그의 가족이 평생 그를 헨리라고 부르는 습관을 단순히 인정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의 개별성의 분명한 표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교사직 사직과 더불어 이름을 바꾼 것을 그가 사회적 괴짜라는 또 다른 징후로 간주했다. 콩코드 농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내 이름이 헨리 디 소로가 아닌 것처럼 그의 이름은 헨리 디 소로가 아닝겨. 그걸 모두가 알고 있고 그도 알지. 그의 이름은 다-아-비드 헨리이고 다-아-비드 헨리라는 이름 말고는 없능겨."
초월주의자 콩코드의 농부와 상인들 중에는 소로의 끊임없는 지적인 관심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중에 그와 함께 어울린 사람들 중에는 브론슨 올컷(Bronson Alcott),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지만, 그의 지적인 잠재력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었다. 에머슨은 소로에 대해 똑똑한 젊은 대학생으로 알고 있었고 그를 위해 추천서도 써준 적이 있었다. 소로는 하버드대학 4학년 시절 에머슨이 쓴 ?자연론?(Nature)을 읽었다. 1837년 동안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 둘이 더 친밀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에머슨은 소로의 지적 스승(mentor)이 되어주었다. 에머슨은 이 젊은 졸업생에게 그의 서재를 이용하게 해주고 자기 집에 오는 저명한 손님들에게 그를 소개하였으며, 그와 종종 생각을 나누곤 했다.
에머슨으로부터 소로는 사회적이고 지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데 있어 일반적인 철학과 세부적인 지원을 얻었다. 에머슨은 대중에게 "초월주의자"라고 알려진 뉴잉글랜드 지식인들(대부분 유니테리언 성직자들)의 느슨하게 짜인 집단의 비공식적인 지도자였다. 초월주의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 칸트와 헤겔 철학에 대부분 기초한 유럽 낭만주의의 미국적 분파였다. 에머슨 자신이 지적했듯이, 초월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1842년에 나타난 관념주의"였다. 초월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우주를 "자연과 영혼"으로 구분하고, 사람들을 "물질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로 분류하였다. 초월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식이 전적으로 감각에 의해 획득되며 신생아는 따라서 자신의 감각 경험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빈 석판과 같다는 존 로크(John Locke)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삶과 예술 간의 기본적인 갈등은 그의 인생에 스며들었고, 또한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한편으로 보면, 그의 최고의 문학 작품들은 작품 자체의 힘으로 계속 살아 있다. ?월든?은 소로의 삶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유익하게 읽을 수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소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지 못한다면, 그가 쓴 것을 매우 오해할 수 있는 위험에 자주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목적은 소로의 인생 사건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더불어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흔한 오해의 일부를 불식하는 것이다.
월든 호수 이전 시기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헨리 데이비드 소로(세례명 데이비드 헨리)는 1817년 7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미국의 정치적 자유의 탄생지였으며, 후에 소로의 영향으로 미국의 문학적 독립의 탄생지가 될 곳이었다. 소로의 집안사람들은 매우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헨리의 할아버지 장 소로(Jean Thoreau)는 프랑스 해적이었는데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미국에 정착하여 보스턴 부두에서 상인이 되어 재산을 모았다. 헨리의 아버지인 존 소로(John Thoreau)는 좀 더 조용한 방식으로 그의 독립을 표현했는데, 처음에는 그의 이웃 사람들이 그를 "우호적이고 매우 사랑스러운 신사이며 (…) 지나치게 정직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는, 노력하는 상인이었으며, 나중에는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좋은 연필을 만든 성공적인 제조업자이기도 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헨리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헨리 가족의 친구였던 호러스 호스머(Horace Hosmer)가 "포도는 가시나무에서 자라나지 않는다"라고 한 말마따나, 헨리는 적어도 그의 아버지에게서 책에 대한 사랑과 조용하고 완고한 성격을 물려받은 것 같다. 리처드 르보(Richard Lebeaux)는 나아가 "소로는 그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점점 더 경쟁적이고 공격적이고 기업화-산업화된 세상에서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가치와 자신을 자연히 동일시했을지 모른다"고 암시하고 있다.
헨리의 어머니인 신시아 던바 소로(Cynthia Dunbar Thoreau)는 잘 알려진 (아마도 "악명 높은"이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인물로, 콩코드 상점들에서 제일 좋은 물건만을 받아들인 빈틈없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으며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하숙집을 운영했던 입담 좋은 사람이었다. 신시아와 그녀의 시누이 마리아(Maria)는 또한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들이었다. 헨리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입담 좋고 날카로운 언변과 자유로운 지적 탐구의 재능을 물려받았는데 이러한 특징은 그의 삶과 작품 속에 배어있다.
소로의 자연 사랑의 씨앗은 유년 시절에 역시 그의 부모에 의해 뿌려졌으며 그가 이십 대의 나이가 되었을 때 활짝 꽃피우게 되었다. 그의 부모는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콩코드 근처의 산과 호수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자주 저녁을 해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로의 철학적인 이상은 그의 내부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그가 잠자리에 들고서도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왜 잠을 자지 않느냐고 묻자,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혹시 별들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신에 대한 관심은 그러나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이들을 성경에 관한 명상으로 실내에서 낮 시간을 보내게 하는 청교도적 관습 때문에 주일날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방식에 따라 깊게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 내내 교회에 다니기를 거부했다.
고독을 즐기는 그의 성향 또한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마을의 다른 아이들은 그의 진지함(별명이 "재판관"이었다)과 그들의 게임 놀이에 합세하길 꺼리는 것 때문에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이런 신중함의 대부분은 단순히 그의 기질적 특성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런 성격의 일부분은 집이 하숙을 쳐서 항상 시끌벅적했고 그 때문에 사생활 보호가 거의 되지 않던 삶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소로는 그가 원했을 때는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호스머는 그의 형 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소로가의 형제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헨리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그의 형 존(John)이었다. 둘 중에서 분명히 더 인기가 있던 존을 소로는 전적으로 사랑하고 따랐는데 1842년 존의 죽음은 소로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소로 형제는 마을의 공립학교와 더 권위 있는 사립학교인 콩코드 아카데미(Concord Academy)에서 교육을 받았다. 헨리가 더 훌륭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둘 중에서 누굴 하버드대학에 보낼까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오자(둘을 대학에 보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헨리가 선택되었다. 소로는 비록 하버드대학 입학시험을 겨우 통과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충분히 잘해서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계속 유지했으며 장학금을 주는 상도 몇 차례나 받았다. 그는 특히 언어에 소질을 보였다. 필수과목이었던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충분히 터득하여 후에 다소 별나긴 하지만 괜찮은 번역 작품들을 ?다이얼?(Dial)지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자발적으로 이태리어, 불어, 독일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의 근대 언어 과목들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사학과 웅변술 석좌교수였던 에드워드 타이렐 채닝(Edward Tyrrel Channing)의 작문 수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소로가 대학 시절에 쓴 에세이의 문체는 뛰어나진 않을지라도, 부여된 주제의 목록은 채닝이 소로로 하여금 주제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은근히 암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그의 글의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일기를 계속 쓰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 생각하더라도)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비우호적인 의견의 힘에 대항하려는 또 다른 동기", "어떠한 근거로 공손한 사회의 형식과 의식 그리고 제약이 반대될 수도 있는가?", "심하고 가벼운 벌에 대한 비교적인 도덕 정책", "한 사람의 스타일이 단순함에 맞선다고 말해질 수 있는 방식", "일반적 논리에 만족하는 평범함에 대하여", "사소한 일과 위대한 일에 있어 의무감의 불편함과 순응의 위험에 대해 말해보라", 그리고 자연의 숭고성 이론에 대한 에세이(1837년 3월 31일). 이러한 목록은 그가 일기를 계속 쓴 것, 비순응, 삶과 글에 있어서의 단순함에 대한 강조, 자연의 야성(숭고함)에 대한 관심이라는 씨앗들을 담고 있다. 하버드대학에서의 그의 비순응은 대다수 학생이 학교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을 때 그가 벌을 받지 않은 자기 반의 소수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실천적이기보다는 이론적인 것에 국한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로의 대학 생활은 1836년에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문제로 중단되었다. 1835년 12월부터 1836년 3월까지 돈을 벌기 위해 학교의 허가를 얻어 매사추세츠주 캔턴(Canton)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지만 논란이 있던 인물로 뉴잉글랜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오레스티즈 브라운슨(Orestes Brownson)의 영향을 잠시 받는다. 하버드로 돌아온 다음 그해 봄 늦게 그는 병에 걸려 (아마 폐결핵으로) 대학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다. 하지만 여름을 거쳐 회복한 그는 추가 선택 강의를 들어서 1837년 8월 동급생들과 함께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하버드는 졸업생들에게 8월 학위 수여를 받기 전 6주 동안 여름 방학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소로는 그의 친구인 찰스 스턴스 휠러(Charles Stearns Wheeler)와 링컨(Lincoln)에 있는 플린트 호수(Flint's Pond)에 휠러가 지은 오두막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소로는 휠러와 함께 그 생활을 충분히 즐겼으며, 후에 월터 하딩(Walter Harding)은 "그때의 경험은 의심할 바 없이 나중에 소로의 월든 호수에서의 실험에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소로는 졸업을 위해 하버드로 돌아왔으며 졸업식 행사의 일부인 토론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향 사람인 에머슨이 8월 31일 우등생 클럽(Phi Beta Kappa Society)에서 연설한 그 유명한 ?미국의 학자?("American Scholar")를 소로가 들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의 급우 중 한 명의 편지에 의하면, 에머슨의 연설이 있기 전에 소로가 콩코드의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학사(B.A) 학위를 얻은 소로는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졸업생들의 전형적인 정체성 위기에 직면하였다. 처음에 선택은 쉬워 보였다. 소로의 누나와 형인 헬렌과 존은 이미 교사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헨리 역시 교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콩코드에 있는 센터스쿨(Center School)로 알려진 공립학교에서 교사를 구했고 헨리는 지원하여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사직은 2주가 채 되지 않고 끝났다. 취임 둘째 주 동안에 학교운영위원 한 사람이 학교를 방문하여 소로의 학급이 지나치게 규율이 없음을 발견하고 체벌로 질서를 잡으라고 요구했다.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어쨌든 그는 계약직이었으므로) 소로는 이내 자를 집어 들고 자기 반 학생들 대여섯 명을 때렸으나, 같은 날 저녁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경제적 침체기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교 교사직도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뉴잉글랜드 전역은 물론, 버지니아와 켄터키에까지 교직을 얻으려고 지원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연필공장에서 임시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보여주었던 실용적인 기술은 그의 아버지가 질 좋은 연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독일식 연필 제조 방식에 대한 연구를 한 후에, 그는 흑연을 분쇄하고 혼합하는 방법을 개량한 결과, 유럽에서 수입한 연필에 필적하는 최초의 미국제 연필을 만들 수 있게 했고 그의 아버지 회사가 미국시장을 주도하게 했다.
의무를 다하는 아들임과 동시에 그는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데이비드 헨리(David Henry)에서 헨리 데이비드(Henry David)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그의 가족이 평생 그를 헨리라고 부르는 습관을 단순히 인정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의 개별성의 분명한 표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교사직 사직과 더불어 이름을 바꾼 것을 그가 사회적 괴짜라는 또 다른 징후로 간주했다. 콩코드 농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내 이름이 헨리 디 소로가 아닌 것처럼 그의 이름은 헨리 디 소로가 아닝겨. 그걸 모두가 알고 있고 그도 알지. 그의 이름은 다-아-비드 헨리이고 다-아-비드 헨리라는 이름 말고는 없능겨."
초월주의자 콩코드의 농부와 상인들 중에는 소로의 끊임없는 지적인 관심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중에 그와 함께 어울린 사람들 중에는 브론슨 올컷(Bronson Alcott),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지만, 그의 지적인 잠재력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었다. 에머슨은 소로에 대해 똑똑한 젊은 대학생으로 알고 있었고 그를 위해 추천서도 써준 적이 있었다. 소로는 하버드대학 4학년 시절 에머슨이 쓴 ?자연론?(Nature)을 읽었다. 1837년 동안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 둘이 더 친밀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후 몇 년 동안 에머슨은 소로의 지적 스승(mentor)이 되어주었다. 에머슨은 이 젊은 졸업생에게 그의 서재를 이용하게 해주고 자기 집에 오는 저명한 손님들에게 그를 소개하였으며, 그와 종종 생각을 나누곤 했다.
에머슨으로부터 소로는 사회적이고 지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데 있어 일반적인 철학과 세부적인 지원을 얻었다. 에머슨은 대중에게 "초월주의자"라고 알려진 뉴잉글랜드 지식인들(대부분 유니테리언 성직자들)의 느슨하게 짜인 집단의 비공식적인 지도자였다. 초월주의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 칸트와 헤겔 철학에 대부분 기초한 유럽 낭만주의의 미국적 분파였다. 에머슨 자신이 지적했듯이, 초월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1842년에 나타난 관념주의"였다. 초월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우주를 "자연과 영혼"으로 구분하고, 사람들을 "물질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로 분류하였다. 초월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식이 전적으로 감각에 의해 획득되며 신생아는 따라서 자신의 감각 경험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빈 석판과 같다는 존 로크(John Locke)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목차
목차
한국어판에 부치는 글
서문
감사의 말
제1장ㆍ시대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다
제2장ㆍ초월주의 예술가: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
제3장ㆍ<월든>의 현자
제4장ㆍ<메인의 숲>에 나타난 숭고성 탐험
제5장ㆍ<케이프 코드>에 나타난 대자연의 환상 탐구
제6장ㆍ산책하는 눈: 자연 에세이들과 일기
제7장ㆍ용감한 개혁가: <개혁논문선>
제8장ㆍ한 인간의 삶의 진전
참고문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연대기
역자 후기
찾아보기
서문
감사의 말
제1장ㆍ시대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다
제2장ㆍ초월주의 예술가: <콩코드강과 메리맥강에서 보낸 일주일>
제3장ㆍ<월든>의 현자
제4장ㆍ<메인의 숲>에 나타난 숭고성 탐험
제5장ㆍ<케이프 코드>에 나타난 대자연의 환상 탐구
제6장ㆍ산책하는 눈: 자연 에세이들과 일기
제7장ㆍ용감한 개혁가: <개혁논문선>
제8장ㆍ한 인간의 삶의 진전
참고문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연대기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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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저자
Richard J. Schneider
저자 리처드 J. 슈나이더 (Richard J. Schneider)
이 책을 쓸 당시 아이오와주 웨이벌리에 있는 와트버그 대학 영문학과 부교수 겸 학과장이었으며, 1973년부터 1986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윌슨에 있는 애틀랜틱 크리스찬 대학의 영문학 및 현대언어학과 정교수와 학과장을 역임했다. 햄라인 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1967),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1968) 및 박사학위(1973)를 받았다. ESQ: A Journal of the American Renaissance와 Critical Survey of Poetry에 소로에 관한 논문들과 서평들을 발표했고, Critique: Studies in Modern Fiction과 Modern Fiction Studies에 20세기 작가인 윌리암 개스(William Gass)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이 책을 쓸 당시 아이오와주 웨이벌리에 있는 와트버그 대학 영문학과 부교수 겸 학과장이었으며, 1973년부터 1986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윌슨에 있는 애틀랜틱 크리스찬 대학의 영문학 및 현대언어학과 정교수와 학과장을 역임했다. 햄라인 대학교에서 문학사학위(1967),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1968) 및 박사학위(1973)를 받았다. ESQ: A Journal of the American Renaissance와 Critical Survey of Poetry에 소로에 관한 논문들과 서평들을 발표했고, Critique: Studies in Modern Fiction과 Modern Fiction Studies에 20세기 작가인 윌리암 개스(William Gass)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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