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꿈꾼 나라(포켓 스마트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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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절세미인 명성황후 얼굴 찾다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힘이 있다면!”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과의 대화 중 했던 말이다. 우리 근세사에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끊임없는 폄훼(貶毁) 대상이 되었지만 이런 평가를 뒤집는 평전(評傳)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가 도서출판 한글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듭해 온 명성황후 원본 사진과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 처음 공개되었다. 여러 사진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대비(對比)하여 분석하고,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까지 추론하여 명성황후 어모(御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로우며 힘이 있다면!”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과의 대화 중 했던 말이다. 우리 근세사에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끊임없는 폄훼(貶毁) 대상이 되었지만 이런 평가를 뒤집는 평전(評傳)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가 도서출판 한글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듭해 온 명성황후 원본 사진과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 처음 공개되었다. 여러 사진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대비(對比)하여 분석하고,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까지 추론하여 명성황후 어모(御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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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과의 대화 중 했던 말이다. 우리 근세사에서 명성황후는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끊임없는 폄훼(貶毁) 대상이 되었지만 이런 평가를 뒤집는 평전(評傳)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가 도서출판 한글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듭해 온 명성황후 원본 사진과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 처음 공개되었다. 여러 사진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대비(對比)하여 분석하고,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까지 추론하여 명성황후 어모(御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혁에 관심이 많아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에 대일조사시찰단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갑신정변을 겪으며 일본과 김옥균 일파에 치를 떨게 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여성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887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명(校名)을 지어줄 만큼 진취적인 분이었다.
저자인 박광민(朴光敏)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은, "흔히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여 국정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일본이 물러간 자리를 메워 들어오는 청나라를 막을 힘이 고종이나 명성황후에게 없었을 뿐"이라고 변론하였다. 「윤치호일기」 1884년 3월 4일자에 고종 내외와 윤치호 사이에 오간 문답은, 주변국의 전횡(專橫)을 막을 힘이 없어 신하에게 강대국의 동태(動態)를 물으며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던 약소국 군주의 서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윤치호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있다.
"이날 오후 2시경에 대궐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두 분 전하께서 내게 물으셨다. 만약 청국(淸國)이 무리하게 우리나라 권리를 압제(壓制)하면 미국과 미국 공사(公使)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를 쟁변(爭辨)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아뢰었다. 무릇 미국은 우리나라가 겪는 수모를 냉정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당굿과 사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것도 1896년에 기쿠치 겐조가 펴낸 「조선왕국(朝鮮王國)」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인들이 이 내용들을 퍼 나르고 돈벌이용 통속 소설을 쓰며 국모(國母)를 악녀로 만든 결과라고 한다.
1931년에 간행된 「명성황후실긔」에 따르면, "기도를 드려 마침내 태자를 탄생하였으므로 태자의 축수(祝壽)를 위하여 금강산 1만 2천봉마다 돈 열 냥과 백미 한 섬씩을 바쳤다"하고, 「매천야록」에도 봉우리마다 돈 만민(萬緡)씩을 바쳤다고 했지만,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1880부터 1881년까지 1년간 조정 각사(各司)에서 쓴 돈이 67만 9천72냥에 불과한데, 내탕금(內帑金)이 있었다고 해도 왕비가 굿을 하는데 12만 냥이나 쓸 만큼 큰 금액도 아니다. 당시 굿을 하여 안녕을 비는 것은 왕실이나 민간이 다르지 않았으며, 왕실에서 굿을 했으니 민간보다는 비용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매천야록」에는 '명성후(明成后)'라는 표현을 비롯해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된 '제국신문' 등이 보이므로 이 책」은 1898년 8월 이후에 저술된 것이며, 여항(閭巷)의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모아놓은 야사류(野史類) 기록이 많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이모(姨母)의 인사 청탁마저 물리칠 만큼 권한 행사에 조심스러워했는데 인사(人事)를 천단(擅斷)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다. 민영소(閔泳韶)에게 보낸 한글 간찰에는, "마패(馬牌)와 척문(尺文)은 남에게 주었다가 폐단(弊端)을 만들까 싶어 그만 두겠다"는 내용도 있다. 고종이 지은 태행황후지문어제행록에는 "혹 (명성황후에게)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하라.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 주겠는가"라고 하여 주변 사람을 단속하는 모습도 있다.
흔히 시부(媤父)인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원수지간(怨?之間)이라고 하지만 고종이 영보당(永保堂) 이씨가 낳은 완화군(完和君)을 원자(元子)로 세우고자 할 때, "중궁이 대군을 낳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느냐"며 완화군 책봉을 막아준 사람이 흥선대원군인데, 임오군란 때 피난지를 떠돌던 명성황후가 청군(淸軍)을 불러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했다는 설도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 전문을 번역해 수록하였는데 저자는, "피란을 떠날 때부터 인후염과 종기, 학질 등에 시달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하룻밤도 편히 묵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닌 명성황후가 어느결에 청군과 연락해 시아버지를 납치했겠는가. 이는 청나라가 외교적 판단에 근거해 시행한 일이며, 김윤식(金允植)의 일기인 「음청사(陰晴史)」 1882년 음력 7월 10일자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며 관련 기록을 번역해 싣고 원문까지 제시하였다.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숨결이 배인 '감고당(感古堂)' 명칭은 인현왕후 당시에는 '양정재(養正齋)'였으며,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閔泳翊) 이후 여러 사람 소유가 되었던 감고당의 유전(流轉) 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명성황후가 시해(弑害) 당한 곳은 곤녕합(坤寧閤) 침전(寢殿)이며, 시해 장소로 잘못 알려진 명성황후의 서루(書樓) 명칭도 옥호루(玉壺樓)가 아니라 옥곤루(玉?樓)라는 사실을 여러 자료를 근거로 논증(論證)하였다.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서부터 시해당할 때까지의 삶을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충실하게 밝힌 자료집 성격의 평전(評傳)이다. 저자가 사실(史實)에 근거해 구성해 넣은 짧은 픽션 형식의 글과 한문 투로 저술되어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풍운한말비록」 및 「조선왕세보」 등을 현대문으로 쉽게 윤문(潤文)해 수록했는데 소설적 재미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時代相)도 들여다볼 수 있다. 명성황후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자료 중심으로 변론하여 독자들이 새로운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게 저술된 좋은 책이다.
이 책에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거듭해 온 명성황후 원본 사진과 '명성황후어진초상화작품'도 처음 공개되었다. 여러 사진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대비(對比)하여 분석하고, 사진을 찍은 시기와 장소까지 추론하여 명성황후 어모(御貌)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혁에 관심이 많아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에 대일조사시찰단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갑신정변을 겪으며 일본과 김옥균 일파에 치를 떨게 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여성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887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명(校名)을 지어줄 만큼 진취적인 분이었다.
저자인 박광민(朴光敏)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은, "흔히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여 국정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일본이 물러간 자리를 메워 들어오는 청나라를 막을 힘이 고종이나 명성황후에게 없었을 뿐"이라고 변론하였다. 「윤치호일기」 1884년 3월 4일자에 고종 내외와 윤치호 사이에 오간 문답은, 주변국의 전횡(專橫)을 막을 힘이 없어 신하에게 강대국의 동태(動態)를 물으며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던 약소국 군주의 서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윤치호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있다.
"이날 오후 2시경에 대궐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서 두 분 전하께서 내게 물으셨다. 만약 청국(淸國)이 무리하게 우리나라 권리를 압제(壓制)하면 미국과 미국 공사(公使)는 반드시 힘을 다해 우리를 쟁변(爭辨)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아뢰었다. 무릇 미국은 우리나라가 겪는 수모를 냉정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당굿과 사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것도 1896년에 기쿠치 겐조가 펴낸 「조선왕국(朝鮮王國)」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인들이 이 내용들을 퍼 나르고 돈벌이용 통속 소설을 쓰며 국모(國母)를 악녀로 만든 결과라고 한다.
1931년에 간행된 「명성황후실긔」에 따르면, "기도를 드려 마침내 태자를 탄생하였으므로 태자의 축수(祝壽)를 위하여 금강산 1만 2천봉마다 돈 열 냥과 백미 한 섬씩을 바쳤다"하고, 「매천야록」에도 봉우리마다 돈 만민(萬緡)씩을 바쳤다고 했지만,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1880부터 1881년까지 1년간 조정 각사(各司)에서 쓴 돈이 67만 9천72냥에 불과한데, 내탕금(內帑金)이 있었다고 해도 왕비가 굿을 하는데 12만 냥이나 쓸 만큼 큰 금액도 아니다. 당시 굿을 하여 안녕을 비는 것은 왕실이나 민간이 다르지 않았으며, 왕실에서 굿을 했으니 민간보다는 비용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매천야록」에는 '명성후(明成后)'라는 표현을 비롯해 1898년 8월 10일에 창간된 '제국신문' 등이 보이므로 이 책」은 1898년 8월 이후에 저술된 것이며, 여항(閭巷)의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모아놓은 야사류(野史類) 기록이 많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이모(姨母)의 인사 청탁마저 물리칠 만큼 권한 행사에 조심스러워했는데 인사(人事)를 천단(擅斷)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다. 민영소(閔泳韶)에게 보낸 한글 간찰에는, "마패(馬牌)와 척문(尺文)은 남에게 주었다가 폐단(弊端)을 만들까 싶어 그만 두겠다"는 내용도 있다. 고종이 지은 태행황후지문어제행록에는 "혹 (명성황후에게)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하라.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 주겠는가"라고 하여 주변 사람을 단속하는 모습도 있다.
흔히 시부(媤父)인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원수지간(怨?之間)이라고 하지만 고종이 영보당(永保堂) 이씨가 낳은 완화군(完和君)을 원자(元子)로 세우고자 할 때, "중궁이 대군을 낳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느냐"며 완화군 책봉을 막아준 사람이 흥선대원군인데, 임오군란 때 피난지를 떠돌던 명성황후가 청군(淸軍)을 불러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했다는 설도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 책에는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 전문을 번역해 수록하였는데 저자는, "피란을 떠날 때부터 인후염과 종기, 학질 등에 시달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하룻밤도 편히 묵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닌 명성황후가 어느결에 청군과 연락해 시아버지를 납치했겠는가. 이는 청나라가 외교적 판단에 근거해 시행한 일이며, 김윤식(金允植)의 일기인 「음청사(陰晴史)」 1882년 음력 7월 10일자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며 관련 기록을 번역해 싣고 원문까지 제시하였다.
인현왕후와 명성황후의 숨결이 배인 '감고당(感古堂)' 명칭은 인현왕후 당시에는 '양정재(養正齋)'였으며,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인 민영익(閔泳翊) 이후 여러 사람 소유가 되었던 감고당의 유전(流轉) 과정을 상세히 밝혔다. 명성황후가 시해(弑害) 당한 곳은 곤녕합(坤寧閤) 침전(寢殿)이며, 시해 장소로 잘못 알려진 명성황후의 서루(書樓) 명칭도 옥호루(玉壺樓)가 아니라 옥곤루(玉?樓)라는 사실을 여러 자료를 근거로 논증(論證)하였다.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서부터 시해당할 때까지의 삶을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충실하게 밝힌 자료집 성격의 평전(評傳)이다. 저자가 사실(史實)에 근거해 구성해 넣은 짧은 픽션 형식의 글과 한문 투로 저술되어 일반인이 읽기 어려운 「풍운한말비록」 및 「조선왕세보」 등을 현대문으로 쉽게 윤문(潤文)해 수록했는데 소설적 재미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時代相)도 들여다볼 수 있다. 명성황후에 대해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자료 중심으로 변론하여 독자들이 새로운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게 저술된 좋은 책이다.
목차
목차
역사 앞에 옷깃을 여미며 3
화보 9
Ⅰ. 그리운 고향에 서린 자취 13
■ 생가生家 초당草堂에서 만난 그리움 13
■ 사찰 입구에서 마주친 역사 23
■ 그리운 아버지, 무너진 하늘 37
Ⅱ. 감고당에 배인 낭랑한 그리움 49
■ 효도와 우애의 훈당訓堂 49
■ 감고당의 기구한 유전流轉 64
Ⅲ. 흥선군의 기계웅략奇計雄略 74
■ 빈한貧寒한 왕족 흥선군興宣君의 눈물과 원지遠志 74
■ 고종의 친정親政과 경복궁 중건重建 84
■ 왕비의 길 93
Ⅳ. 척화斥和와 개혁 사이에서 113
■ 강화도를 침략한 서양인의 오만과 당당한 조선의 대응 113
■ 감내堪耐할 수 없는 연이은 참척慘慽 127
■ 죽동궁 폭사爆死의 진실 153
■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혁 의지 170
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209
■ 왕세자의 두창痘瘡(천연두)과 회복 209
■ 완화군 죽음의 진실과 입방아꾼들 217
■ 임오유월일기-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224
Ⅵ. 명성황후의 얼굴을 찾아서 250
■ 예지叡智로운 언행에 대한 기록들 250
■ 명성황후의 어모御貌와 사진 논쟁 255
■ 처음 공개되는 원본 명성황후 사진 263
■ 명성황후어진초상화 작품 275
■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 286
Ⅶ. 격변의 시대 비겁한 군상群像들 296
■ 대일조사시찰단과 태극기 사용 날짜 296
■ 김옥균의 재지才智와 기질氣質 304
Ⅷ. 냉혹한 국제질서와 시대의 격랑 312
■ 지방관의 탐욕이 부른 동학의 불길 312
■ 조선 독립을 빌미로 내세운 일본의 출병 329
■ 와각지쟁蝸角之爭 속 몰려오는 먹구름 337
Ⅸ. 곤녕합坤寧閤에 흩날린 붉은 꽃잎 346
■ 이토 히로부미와 미우라 고로의 음모 346
■ 죽음의 순간에도 의연毅然했던 대조선大朝鮮의 왕후 364
■ 성공회聖公會 주교主敎 서신과 윤치호 일기 369
■ 침전寢殿 옆 옥곤루玉?樓 명칭의 유래 381
■ 죽음 후에도 신하에게 짓밟히신 왕후 385
■ 왕후王后에서 황후로 392
■ 고영근高永根의 복수와 의거義擧 395
■ 전쟁 없이 양여讓與 당한 오백년 왕조의 종언終焉 415
참고문헌 432
부록 435
화보 9
Ⅰ. 그리운 고향에 서린 자취 13
■ 생가生家 초당草堂에서 만난 그리움 13
■ 사찰 입구에서 마주친 역사 23
■ 그리운 아버지, 무너진 하늘 37
Ⅱ. 감고당에 배인 낭랑한 그리움 49
■ 효도와 우애의 훈당訓堂 49
■ 감고당의 기구한 유전流轉 64
Ⅲ. 흥선군의 기계웅략奇計雄略 74
■ 빈한貧寒한 왕족 흥선군興宣君의 눈물과 원지遠志 74
■ 고종의 친정親政과 경복궁 중건重建 84
■ 왕비의 길 93
Ⅳ. 척화斥和와 개혁 사이에서 113
■ 강화도를 침략한 서양인의 오만과 당당한 조선의 대응 113
■ 감내堪耐할 수 없는 연이은 참척慘慽 127
■ 죽동궁 폭사爆死의 진실 153
■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혁 의지 170
Ⅴ.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209
■ 왕세자의 두창痘瘡(천연두)과 회복 209
■ 완화군 죽음의 진실과 입방아꾼들 217
■ 임오유월일기-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224
Ⅵ. 명성황후의 얼굴을 찾아서 250
■ 예지叡智로운 언행에 대한 기록들 250
■ 명성황후의 어모御貌와 사진 논쟁 255
■ 처음 공개되는 원본 명성황후 사진 263
■ 명성황후어진초상화 작품 275
■ 명성황후가 꿈꾼 나라 286
Ⅶ. 격변의 시대 비겁한 군상群像들 296
■ 대일조사시찰단과 태극기 사용 날짜 296
■ 김옥균의 재지才智와 기질氣質 304
Ⅷ. 냉혹한 국제질서와 시대의 격랑 312
■ 지방관의 탐욕이 부른 동학의 불길 312
■ 조선 독립을 빌미로 내세운 일본의 출병 329
■ 와각지쟁蝸角之爭 속 몰려오는 먹구름 337
Ⅸ. 곤녕합坤寧閤에 흩날린 붉은 꽃잎 346
■ 이토 히로부미와 미우라 고로의 음모 346
■ 죽음의 순간에도 의연毅然했던 대조선大朝鮮의 왕후 364
■ 성공회聖公會 주교主敎 서신과 윤치호 일기 369
■ 침전寢殿 옆 옥곤루玉?樓 명칭의 유래 381
■ 죽음 후에도 신하에게 짓밟히신 왕후 385
■ 왕후王后에서 황후로 392
■ 고영근高永根의 복수와 의거義擧 395
■ 전쟁 없이 양여讓與 당한 오백년 왕조의 종언終焉 415
참고문헌 432
부록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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