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나라로
이태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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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새롭게 투사하는 꿈의 현상학
‘코로나 19’ 시대를 지나가는 시인이 꿈꾸는 나라
중진시인 이태수의 열일곱 번째 시집
등단 47년을 맞은 중진시인 이태수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문학세계사)가 출간됐다. 『거울이 나를 본다』, 『내가 나에게』, 『유리창 이쪽』에 이어 역시 1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는 「나를 기다리며」, 「고요를 향하여」, 「무장산 계곡」, 「수묵화 속으로」, 「한결같이」, 「코로나에게」, 「거리 두기 7」 등 70여 편이 실렸다.
‘실존, 현실, 초월(꿈)’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깊은 사유로 삶의 철학을 명징한 서정적 언어로 구현하는 그의 시는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참된 자아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펴 그윽하게 껴안는 꿈의 현상학을 빚어 보인다.
‘코로나 19’ 시대를 지나가는 시인이 꿈꾸는 나라
중진시인 이태수의 열일곱 번째 시집
등단 47년을 맞은 중진시인 이태수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문학세계사)가 출간됐다. 『거울이 나를 본다』, 『내가 나에게』, 『유리창 이쪽』에 이어 역시 1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는 「나를 기다리며」, 「고요를 향하여」, 「무장산 계곡」, 「수묵화 속으로」, 「한결같이」, 「코로나에게」, 「거리 두기 7」 등 70여 편이 실렸다.
‘실존, 현실, 초월(꿈)’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깊은 사유로 삶의 철학을 명징한 서정적 언어로 구현하는 그의 시는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참된 자아를 되찾으려는 열망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펴 그윽하게 껴안는 꿈의 현상학을 빚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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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참된 자아 회복 추구
삶의 지평에 펼쳐진 꿈의 현상학
실존, 참된 자아 찾기
반세기에 가깝게 시적 내공을 다져온 이태수 시인의 시는 의식의 지향성을 명징한 서정적 언어로 빚어 보인다. 특히 근년에는 해마다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과 필력을 보여 준다.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는 '실존, 현실, 초월(꿈)' 등 세 꼭짓점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이 세 개의 축을 팽팽하게 밀거나 당기면서 그윽한 울림으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낸다. 그의 실존의식은 내면에서 울리는 근원적 자아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깊은 사유의 음영들을 진솔한 언어로 드러내 보이며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로고스와 파토스가 교차하는 현실을 통찰하면서 그 심층을 떠올린다. 나아가 어둡고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본연의 자아를 되찾으려는 꿈을 꾸며, 비상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핀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다 간다
비행기 한 대가 아득히 멀어진다
어느 하늘아래 떠돌고 있는지
돌아올 수 없어서 그런지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간다
나는 다가오다 말고 되돌아간다
허공에 멀겋게 떠 있는 낮달
해가 서산 위에 기울어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참다 못해 찾아 나서 보아도
끝내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면
그대로 되돌아오라는 것인지
나를 목마르게 불러 봐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며」 전문
시인은 '나'라는 두 자아 사이에서 참된 자아를 목말라하며,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내적 고뇌를 거듭 토로한다. 하지만 실존의 심층에서 울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존재의 열림을 기다린다. 자아의 부름에 대한 이 같은 대응은 '범종 소리'을 제재로 한 다음 시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빚는다.
범종 소리에 귀를 가져가면
내가 그 소리 안에 든다
내가 그 소리에 감싸여 솔숲을 지난다
멀리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은
범종 소리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저 소리는 솔숲을 거스르며 가듯 말 듯
범종 속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다시 그 바깥을 떠돈다
-「범종 소리 2」 전문
시인은 범종 소리를 통해 현세의 '나'를 부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목소리는 무의식 깊이 내재된 또 다른 '나'의 부름으로, 범종 소리와 시적 자아가 동일시되면서 그 소리 안에 들어가고 감싸이는 '참된 자아와의 합일'을 꿈꾸기도 한다. 부름과 응답을 통해 시인은 '나'와 대상, 자아와 세계 사이를 끝없이 의식의 지향성으로 연결함으로써 현상학적 의미의 관계 속에 들게 된다. 이 본연의 자아 찾기는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고요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
내면의 고요한 공간으로 내려간다
내려간다기보다 들어서려 한다
그 내면에는 나의
온전한 모습이 자리잡고 있으며
아픔도, 슬픔도, 외로움도, 다정하게
친구가 되어 주고
우울증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으면서 들어서려 한다
들어서려 하기보다
완강하게 안간힘으로 들어간다
한 번도 가 보지는 못한 길이지만
그 고요를 향하여 들어간다
-「고요를 향하여」 전문
시인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참된 자아는 침묵과 고요를 통해 만난다. 시인이 이처럼 말보다는 침묵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쓰디쓴 세상인심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말이 주는 상처와 위선으로부터 자신의 영혼과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의도의 소산으로 보인다.
현실, 그 아픈 풍경들
이 시집에서는 현실이 여러 빛깔의 층으로 퇴적되어 밀도 있게 탐사된다. 시인은 자신이 놓인 현실을 통해 상실의 아픔과 정신적 방황, 영혼의 상처와 소외감, 비판과 용서 등 다양한 심적 상태를 드러낸다. 이별한 어린 혈육의 모습을 반추하는 「은수저」와 시집간 누이가 젊은 나이에 태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세상을 떠난 비극을 그린 「누이」는 상실(죽음)의 아픔을 떠올린다. 이런 상실감은 감내해야 할 현실이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상황을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또 다른 현실 바라보기는 '존재론적 방황'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하루해가 저물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초저녁 길을 걷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호젓한 오솔길,
그 초입의 소나무에 기대선다
멀지 않은 못 물 위에 총총 뜨는 별들,
온 길로 되돌아갈까, 한참 주저한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느린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쳐간다
저 사람도 무슨 상심에 젖어 있는지,
나처럼 요즘 세상을 비껴서고 싶은지,
아니면, 실의에 빠져 방황하는 건지,
어깨 처져 가는 뒷모습이 안쓰럽다
그 사람이 안 보이게 되자
나도 어디로 갈까, 다시 망설인다
못 건너편 외딴 주막의 희미한 불빛,
그 불빛에 끌리듯이 걸어간다
세상사에 찌든 듯한 노신사 몇 분이
거나하게 취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들 옆에 나도 끼어든다
-「방황」 전문
시인은 앞을 스쳐 가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에게 "세상을 비껴서고 싶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서 "나도 어디로 갈까, 다시 망설"이며, 실존적 번민과 고뇌에 빠져든다. 세상을 "비껴서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내보이면서 "어디로 갈까" 주저하다가 "세상사에 찌든 듯한 노신사 몇 분이 / 거나하게 취해 푸념을 늘어놓는" 옆자리에 끼어든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신적 방황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오늘도 왜 이리 인적도 없는
산길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것일까
날 저물자 발길을 돌리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상처 때문에
멀리 켜지는 마을의 불빛들마저 아프다
-「배음」 부분
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 방황의 이유가 "잊히지 않는 상처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 같은 방황은 삶의 목표나 정신적 중심축의 상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세인들의 위선과 인간적 배신 등에서 빚어진 절망감과 상처 때문이다. 그의 이런 현실 바라보기는 최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코로나 19의 광풍'을 제재로 하는 연작시에서 더욱 우울한 풍경으로 떠오른다. 2020년의 코로나 쓰나미는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분지의 도시를 뒤덮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 세계적으로도 확산되어 이른바 전 인류가 팬데믹 현상에 빠졌다. 그 결과 「거리 두기 1」에서 보듯 사람 사이의 단절감과 대인 접촉 기피증이 만연해 "가까운 적 없이 멀어진 사람들을 / 마스크 낀 채 바라봐야 할 뿐"인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이 단절감은 사람 간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리 두기 2」에서처럼 인간과 자연의 단절이라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했다. 시인은 "뜰에 활짝 핀 영산홍 앞에서도 / 마스크 낀 채 거리를 둡니다"라고 되뇌면서 무의식화돤 대상 기피증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 폐해는 관계 단절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리 두기 3」에서 보듯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까지 파생되고 있다. 이 사실은 "저 사람은 일자리를 잃었을까 / 제 발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와 "질 나쁜 바이러스 때문에 잃은 / 일자리와의 먼 거리가 저토록 아픈 걸까"라는 구절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사람 사이의 단절감은 또 다른 문제로 인해 시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준다.
마스크를 끼고, 말에 마스크 채우고
집과 집 옆 글방을 오갔다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등 뒤로 날아드는 칼, 안 보이지만
꿈속에서도 잠을 깨게 하는
칼날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탈무드에서 읽은 물고기와 인간의
입이 자주 떠오르기도 했다
항상 입으로 낚이는 물고기,
입으로 걸리는 인간이지 않았던가
입 열고 싶어 돌 것 같아도
진실이 말을 해줄 때까지는
말에 마스크 채우고 있기로 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 사람의 아들,
그 십자가를 우러러 무릎을 꿇었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아도
입 다물고 견디기로 했다
세상이 몰라주어도 참고 기다린다
-「사계, 2020」 전문
시인은 '마스크'를 끼지만 '입'이 아니라 '말'에 마스크를 채우고 집과 자신의 글방을 오간다. 시인은 왜 이 펜데믹 시대에 입이 아니라 말에 마스크를 채우려 할까? 여기에 대해 시인은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 등 뒤로 날아드는 칼, 안 보이지만 / 꿈속에서도 잠을 깨게 하는 / 칼날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이 사실은 "가까웠던 사람들이 등 돌렸기 때문일까 / 오늘도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거리 두기 6」), "내가 수모를 당한다고 /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게"(「친구에게」), "또 악령이 따라붙는다 / 누가 나를 자꾸만 불러내지만"(「악몽」) 등에서도 드러난다. 이 아린 상처로 인해 시인은 불면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괴로워한다.
현실에서 모든 아픔은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이 남발된 뒤틀려지고 일그러진 시니피앙의 폐해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탈무드'에서처럼 세상 사람들은 결국 "항상 입으로 낚이는 물고기, / 입으로 걸리는 인간"과 같음을 깨닫고, "진실이 말을 해줄 때까지는 / 말에 마스크 채우고 있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람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매달린 "그 십자가를 우러러 무릎을 꿇"고 "저들이 하는 짓을 알아도 / 입 다물고 견디기로" 하면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려 한다. 십자가의 희생제의처럼 절대자 앞에 개인적 양심을 번제물로 바쳐 연소시키면서 시련을 초극하려는 태도가 깊은 감명으로 다가온다.
이런 양심의 작용 탓일까? 시인은 자신이 몸담은 현실에 대해 "도무지 세상은 어디로 가는지 / 멈추지 않고 가고 있어 / 낭패 날 게 불을 보는 듯한데 / 세상만 바뀌면 된다고 / 자기네 세상이면 그뿐이라고"(「걱정」), "때가 왔다고 나부대지 마라 / 때가 지나면 남는 게 무엇일는지 / 세상사 인생사도 새옹지마"(「오만에 대해」)라고 하며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제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오늘 등 돌려도 원망하지는 말아야지 / 그가 기회주의자라도 / 나도 그처럼 얼굴 바꿔버리거나 / 등에다 비수를 꼽지는 말아야지"(「마냥 이대로」)라며, 수모와 상처를 준 사람들까지 포용하려 한다. 이 관용과 더불어 시인은 "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같은 시)면서, 상처도 아픔도 없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어두운 현실 저편에서 활짝 열리기를 소망한다.
초월, 존재 전환의 의지
꿈을 모티프로 하는 현실 초월 의지는 그의 시집들에서 지속적으로 목도되는 시세계의 중요한 축이다. ?꿈꾸는 나라로?라는 이 시집의 표제가 암시하듯이, 초월 의지는 돌올한 빛깔로 여기저기 나타난다. 그 초월은 어느 먼 별나라로의 일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참된 자아를 되찾고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실존의 의식 활동이다.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이 물화된 즉자처럼 생명을 잃어갈 때, 시인은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면서 실존적 한계상황을 초극하려 한다. 이 초월 의지는 그의 시에서는 항상 자연 심상과 더불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시인은 욕망과 이해타산으로 오염된 현실에서 내면의 상처가 깊어갈수록 자연으로 의식을 옮아가 깃들이며 열락과 안식을 되찾으려 한다.
눈길을 걸으면서 봄을 기다린다
빈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가 왜 이리 마음 설레게 할까
나무들 사이 눈을 헤집으며
봄을 끌어당기고 있는 눈새기꽃들
-「봄 마중 1」 부분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 없이
말없는 말을 하는 포구나무의
이 푸근한 그늘,
먼 파도 소리를 지그시 당기듯
나를 붙들어 깃들게 하는 품속 같다
-「여름 포구나무」 부분
마을 향해 발길을 돌리는데도
어둠살 뒤집어쓰고 있는 구절초들은
예불 소리에 귀를 가져다대니
발치에 차이는 낙엽인들
무심하게 뒤채기만 할까
풍경 소리가 점점 멀어지지만
하룻밤 머물 마을 또한 낯설진 않다
-「그윽한 풍경」 부분
「봄 마중 1」에서 시인은 겨울의 시련에서 벗어나 봄을 기다리면서 "빈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 작은 새가 왜 이리 마음 설레게 할까"라고 하며 존재의 '설렘'을 느낀다. 한 편의 수채화 속으로 들어간 듯 봄꽃들과 나무들이 맑은 숨을 쉬고 있는 숲속은 시인의 훼손된 자아를 치유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또한 「여름 포구나무」에서는 자연을 통해 모성애적 포근함을 체감한다. 그는 여름의 "포구나무" 그늘 아래서 "먼 파도 소리를 지그시 당기듯 / 나를 붙들어 깃들게 하는 품속 같다"고 하면서 존재의 안온함을 느낀다. 「그윽한 풍경」에서도 "구절초"와 "낙엽"과 "풍경소리"가 어우러진 자연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룻밤 머물 마을 또한 낯설진 않다"는 친화감을 내비친다. 자연을 통한 이러한 설렘과 안온함, 친화감은 시인의 내면에 잠재된 바이오필리아(녹색회귀증)을 떠올린다. 이같이 자연을 매개로 하는 시인의 현실 초극 의지는 '꿈'을 통한 존재 전환의 몸짓으로 더욱 인상 깊게 나타나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풀잎 하나」 전문
시인이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의 자연으로 들어서는 순간,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고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이른다. 자연은 인간의 이해타산으로 분절된 세계가 아니라 '찰라'와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미분화된 상태를 보이는 융합된 세계이다. 이 천연의 순수한 "밀림"은 원시의 싱그러운 숨결이 혼돈 미만해 있는 카오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기만도 위선도, 탐욕도, 단절도, 삶의 낯섦도 없는 곳이다. 이 원융의 세계에서 시인은 현실에서 상처받고 훼손된 자아에서 벗어나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아주 "조그만 풀잎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바람은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에서 느껴지듯이 '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풀잎'으로 전환한다. 이 존재 전환의 몸짓은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동화를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동화의 꿈을 통해 시인은 욕망과 상처로 얼룩진 현세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자연이 주는 내적 평화를 누리고자 한다. 꿈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초월 의지에 대해 이태수 시인은 특히 이전부터 상승과 하강 구조를 즐겨 이용하면서 절묘한 대비 효과를 나타낸다.
외로울 때면 너의 창가에 서서
꿈꾸던 노래 들려주게
우리 노래를 들려주게
사랑스러운 그대,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사랑스러운 그대,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천사와 같은 비둘기의 은빛 날개,
꿈꾸는 나라로
함께 떠날 은빛 날개의 비둘기여
-「라 팔로마」 부분
맑고 깨끗한 마음의 근원은
오르는 데 있지 않다고,
누군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내려가는 데 있다고 했던가
무장산 계곡을 내려오는데
물소리, 은피리, 안 들리는 피리소리,
황혼의 나무 그림자들이 발길을 늦춘다
그윽하게 마음이 맑아지려면 비우고
내려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무장산 계곡」 부분
꿈과 결부된 시인의 초월 의지는 「라 팔로마」의 경우 "비둘기"라는 자연 심상의 매개체를 통해 상승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의 작곡가 S. 이라디에르의 노랫말을 시인이 개사한 이 시는 상처와 우울함으로 가득 찬 황량한 현실에서 벗어나 "천사와 같은 비둘기의 은빛 날개"에 실려 "꿈꾸는 나라"로 비상하고 싶은 소망을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부사가 암시해주는 것에 주목된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의 상징물인 '비둘기'와 더불어 꿈의 나라로 비행함으로써, 실존적 고독에서 일탈하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장산 계곡」은 '물'이라는 자연 심상을 통해 시인의 꿈이 하강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맑고 깨끗한 마음의 근원은 / 오르는 데 있지 않다"면서 인생에서 '내려감'의 덕목을 강조한다. "무장산 계곡"을 내려오면서도 "그윽하게 마음이 맑아지려면 비우고 /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실 초월은 상승만이 아니라 비움과 내려옴을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 같은 꿈의 상승과 하강작용은 그의 다른 시, "꿈결 같은 물소리, / 나도 지그시 눈 감고 따라간다 / 반눈을 뜨고 마음 가라앉히고 있으면 // 시름들이 물소리에 떠 있다"(「물, 물소리」), "나는 때때로 / 물이 되고, 새가 되고 싶다 / 때때로 나는 /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싶다"(「나는 때때로」), "그는 이 산중 암자에서 / 얼마간 수행하고 하산하는 것일까 / 어떻게 비우고 내려놓은 뒤 얼마나 채워서"(「수묵화 속으로」) 등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황량하고 쓸쓸한 삶의 한 지평에서 상승과 하강의 끈을 팽팽히 밀고 당기며 자아의 꿈을 구현해가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생의 활력과 치열한 시정신을 엿보게 한다. 꿈을 모티프로 한 시인의 초월 의지는 다음 시에서 마침내 극대화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마음 어둡고 무거워지면
꿈꾸는 나라로
외롭고 슬프고
괴로워도 꿈꾸는 나라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꿈꾸는 나라로
꿈속의 세상에
닿기까지 꿈꾸는 나라로
꿈을 꾸다 쓰러질지라도
꿈꾸는 나라로
시 바깥에서도
한결같이 꿈꾸는 나라로
-「한결같이」 전문
시인은 꿈꾸는 나라로 가기 위해 간절한 소망에 사로잡힌다. "마음 어둡고 무거워지"거나 "외롭고 슬프고 / 괴로워"질 때, 아니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 우울해질 때면 "꿈꾸는 나라로" 가자고 반복적으로 토로한다. 시인은 욕망과 위선, 슬픔과 상처로 얼룩진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의 순수가 훼절되지 않은 꿈의 세계로 안착하고 싶어진다. 이 잠재몽이 상징하듯이 시인이 얼마나 현실에서 실존적 아픔과 고독을 느꼈으며, 얼마나 간절하고 집요하게 "꿈꾸는 나라"로 가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미지의 세계는 시인의 마음 깊이 내재된 고요하고 평화로운 영혼의 처소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초월의 꿈을 꾼다는 것은 결국 내면에 은폐된 순수한 자아를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태수 시인의 이 열일곱 번째 시집은 반세기에 가까운 시력이 말해주듯이, 깊은 사유와 울림으로 충전된 삶의 철학을 명징하게 구현하고 있다. 우울한 실존의 한계상황 속에서도 아프게 음각된 영혼의 상처를 외롭게 어루만지며, 시인은 꿈을 통한 초월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실감과 단절감으로, 때로는 삭막한 현실의 부조리에 그의 실존은 높낮은 파동으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싱그러운 자연과 부단히 숨결을 나누면서 훼손된 자아의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혼신의 몸짓이야말로 낯선 생의 지평에서 모든 번민과 고뇌를 판단중지해 내면의 괄호 안에 넣은 다음, 삶을 새롭게 투사하고 껴안아 보려는 꿈의 현상학임이 분명하다.
삶의 지평에 펼쳐진 꿈의 현상학
실존, 참된 자아 찾기
반세기에 가깝게 시적 내공을 다져온 이태수 시인의 시는 의식의 지향성을 명징한 서정적 언어로 빚어 보인다. 특히 근년에는 해마다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왕성한 창작열과 필력을 보여 준다. 열일곱 번째 시집 『꿈꾸는 나라로』는 '실존, 현실, 초월(꿈)' 등 세 꼭짓점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이 세 개의 축을 팽팽하게 밀거나 당기면서 그윽한 울림으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낸다. 그의 실존의식은 내면에서 울리는 근원적 자아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깊은 사유의 음영들을 진솔한 언어로 드러내 보이며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 로고스와 파토스가 교차하는 현실을 통찰하면서 그 심층을 떠올린다. 나아가 어둡고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본연의 자아를 되찾으려는 꿈을 꾸며, 비상과 초월 의지에 불을 지핀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다 간다
비행기 한 대가 아득히 멀어진다
어느 하늘아래 떠돌고 있는지
돌아올 수 없어서 그런지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간다
나는 다가오다 말고 되돌아간다
허공에 멀겋게 떠 있는 낮달
해가 서산 위에 기울어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참다 못해 찾아 나서 보아도
끝내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면
그대로 되돌아오라는 것인지
나를 목마르게 불러 봐도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며」 전문
시인은 '나'라는 두 자아 사이에서 참된 자아를 목말라하며, "나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내적 고뇌를 거듭 토로한다. 하지만 실존의 심층에서 울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존재의 열림을 기다린다. 자아의 부름에 대한 이 같은 대응은 '범종 소리'을 제재로 한 다음 시에서 더욱 깊은 울림을 빚는다.
범종 소리에 귀를 가져가면
내가 그 소리 안에 든다
내가 그 소리에 감싸여 솔숲을 지난다
멀리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은
범종 소리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저 소리는 솔숲을 거스르며 가듯 말 듯
범종 속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다시 그 바깥을 떠돈다
-「범종 소리 2」 전문
시인은 범종 소리를 통해 현세의 '나'를 부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목소리는 무의식 깊이 내재된 또 다른 '나'의 부름으로, 범종 소리와 시적 자아가 동일시되면서 그 소리 안에 들어가고 감싸이는 '참된 자아와의 합일'을 꿈꾸기도 한다. 부름과 응답을 통해 시인은 '나'와 대상, 자아와 세계 사이를 끝없이 의식의 지향성으로 연결함으로써 현상학적 의미의 관계 속에 들게 된다. 이 본연의 자아 찾기는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고요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
내면의 고요한 공간으로 내려간다
내려간다기보다 들어서려 한다
그 내면에는 나의
온전한 모습이 자리잡고 있으며
아픔도, 슬픔도, 외로움도, 다정하게
친구가 되어 주고
우울증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으면서 들어서려 한다
들어서려 하기보다
완강하게 안간힘으로 들어간다
한 번도 가 보지는 못한 길이지만
그 고요를 향하여 들어간다
-「고요를 향하여」 전문
시인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참된 자아는 침묵과 고요를 통해 만난다. 시인이 이처럼 말보다는 침묵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쓰디쓴 세상인심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말이 주는 상처와 위선으로부터 자신의 영혼과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의도의 소산으로 보인다.
현실, 그 아픈 풍경들
이 시집에서는 현실이 여러 빛깔의 층으로 퇴적되어 밀도 있게 탐사된다. 시인은 자신이 놓인 현실을 통해 상실의 아픔과 정신적 방황, 영혼의 상처와 소외감, 비판과 용서 등 다양한 심적 상태를 드러낸다. 이별한 어린 혈육의 모습을 반추하는 「은수저」와 시집간 누이가 젊은 나이에 태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바꿔 세상을 떠난 비극을 그린 「누이」는 상실(죽음)의 아픔을 떠올린다. 이런 상실감은 감내해야 할 현실이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상황을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또 다른 현실 바라보기는 '존재론적 방황'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하루해가 저물고 있다
달이 뜨지 않는 초저녁 길을 걷는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호젓한 오솔길,
그 초입의 소나무에 기대선다
멀지 않은 못 물 위에 총총 뜨는 별들,
온 길로 되돌아갈까, 한참 주저한다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느린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쳐간다
저 사람도 무슨 상심에 젖어 있는지,
나처럼 요즘 세상을 비껴서고 싶은지,
아니면, 실의에 빠져 방황하는 건지,
어깨 처져 가는 뒷모습이 안쓰럽다
그 사람이 안 보이게 되자
나도 어디로 갈까, 다시 망설인다
못 건너편 외딴 주막의 희미한 불빛,
그 불빛에 끌리듯이 걸어간다
세상사에 찌든 듯한 노신사 몇 분이
거나하게 취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들 옆에 나도 끼어든다
-「방황」 전문
시인은 앞을 스쳐 가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에게 "세상을 비껴서고 싶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서 "나도 어디로 갈까, 다시 망설"이며, 실존적 번민과 고뇌에 빠져든다. 세상을 "비껴서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내보이면서 "어디로 갈까" 주저하다가 "세상사에 찌든 듯한 노신사 몇 분이 / 거나하게 취해 푸념을 늘어놓는" 옆자리에 끼어든다. 그렇다면 이 같은 정신적 방황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오늘도 왜 이리 인적도 없는
산길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것일까
날 저물자 발길을 돌리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상처 때문에
멀리 켜지는 마을의 불빛들마저 아프다
-「배음」 부분
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 방황의 이유가 "잊히지 않는 상처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 같은 방황은 삶의 목표나 정신적 중심축의 상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세인들의 위선과 인간적 배신 등에서 빚어진 절망감과 상처 때문이다. 그의 이런 현실 바라보기는 최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코로나 19의 광풍'을 제재로 하는 연작시에서 더욱 우울한 풍경으로 떠오른다. 2020년의 코로나 쓰나미는 시인이 거주하고 있는 분지의 도시를 뒤덮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 세계적으로도 확산되어 이른바 전 인류가 팬데믹 현상에 빠졌다. 그 결과 「거리 두기 1」에서 보듯 사람 사이의 단절감과 대인 접촉 기피증이 만연해 "가까운 적 없이 멀어진 사람들을 / 마스크 낀 채 바라봐야 할 뿐"인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이 단절감은 사람 간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리 두기 2」에서처럼 인간과 자연의 단절이라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했다. 시인은 "뜰에 활짝 핀 영산홍 앞에서도 / 마스크 낀 채 거리를 둡니다"라고 되뇌면서 무의식화돤 대상 기피증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 폐해는 관계 단절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리 두기 3」에서 보듯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까지 파생되고 있다. 이 사실은 "저 사람은 일자리를 잃었을까 / 제 발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와 "질 나쁜 바이러스 때문에 잃은 / 일자리와의 먼 거리가 저토록 아픈 걸까"라는 구절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사람 사이의 단절감은 또 다른 문제로 인해 시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준다.
마스크를 끼고, 말에 마스크 채우고
집과 집 옆 글방을 오갔다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등 뒤로 날아드는 칼, 안 보이지만
꿈속에서도 잠을 깨게 하는
칼날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탈무드에서 읽은 물고기와 인간의
입이 자주 떠오르기도 했다
항상 입으로 낚이는 물고기,
입으로 걸리는 인간이지 않았던가
입 열고 싶어 돌 것 같아도
진실이 말을 해줄 때까지는
말에 마스크 채우고 있기로 했다
"저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 사람의 아들,
그 십자가를 우러러 무릎을 꿇었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아도
입 다물고 견디기로 했다
세상이 몰라주어도 참고 기다린다
-「사계, 2020」 전문
시인은 '마스크'를 끼지만 '입'이 아니라 '말'에 마스크를 채우고 집과 자신의 글방을 오간다. 시인은 왜 이 펜데믹 시대에 입이 아니라 말에 마스크를 채우려 할까? 여기에 대해 시인은 "코로나 바이러스뿐 아니라 / 등 뒤로 날아드는 칼, 안 보이지만 / 꿈속에서도 잠을 깨게 하는 / 칼날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이 사실은 "가까웠던 사람들이 등 돌렸기 때문일까 / 오늘도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거리 두기 6」), "내가 수모를 당한다고 /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게"(「친구에게」), "또 악령이 따라붙는다 / 누가 나를 자꾸만 불러내지만"(「악몽」) 등에서도 드러난다. 이 아린 상처로 인해 시인은 불면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괴로워한다.
현실에서 모든 아픔은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이 남발된 뒤틀려지고 일그러진 시니피앙의 폐해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탈무드'에서처럼 세상 사람들은 결국 "항상 입으로 낚이는 물고기, / 입으로 걸리는 인간"과 같음을 깨닫고, "진실이 말을 해줄 때까지는 / 말에 마스크 채우고 있기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람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매달린 "그 십자가를 우러러 무릎을 꿇"고 "저들이 하는 짓을 알아도 / 입 다물고 견디기로" 하면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참고 기다리려 한다. 십자가의 희생제의처럼 절대자 앞에 개인적 양심을 번제물로 바쳐 연소시키면서 시련을 초극하려는 태도가 깊은 감명으로 다가온다.
이런 양심의 작용 탓일까? 시인은 자신이 몸담은 현실에 대해 "도무지 세상은 어디로 가는지 / 멈추지 않고 가고 있어 / 낭패 날 게 불을 보는 듯한데 / 세상만 바뀌면 된다고 / 자기네 세상이면 그뿐이라고"(「걱정」), "때가 왔다고 나부대지 마라 / 때가 지나면 남는 게 무엇일는지 / 세상사 인생사도 새옹지마"(「오만에 대해」)라고 하며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제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오늘 등 돌려도 원망하지는 말아야지 / 그가 기회주의자라도 / 나도 그처럼 얼굴 바꿔버리거나 / 등에다 비수를 꼽지는 말아야지"(「마냥 이대로」)라며, 수모와 상처를 준 사람들까지 포용하려 한다. 이 관용과 더불어 시인은 "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기다리"(같은 시)면서, 상처도 아픔도 없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어두운 현실 저편에서 활짝 열리기를 소망한다.
초월, 존재 전환의 의지
꿈을 모티프로 하는 현실 초월 의지는 그의 시집들에서 지속적으로 목도되는 시세계의 중요한 축이다. ?꿈꾸는 나라로?라는 이 시집의 표제가 암시하듯이, 초월 의지는 돌올한 빛깔로 여기저기 나타난다. 그 초월은 어느 먼 별나라로의 일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참된 자아를 되찾고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실존의 의식 활동이다.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이 물화된 즉자처럼 생명을 잃어갈 때, 시인은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면서 실존적 한계상황을 초극하려 한다. 이 초월 의지는 그의 시에서는 항상 자연 심상과 더불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시인은 욕망과 이해타산으로 오염된 현실에서 내면의 상처가 깊어갈수록 자연으로 의식을 옮아가 깃들이며 열락과 안식을 되찾으려 한다.
눈길을 걸으면서 봄을 기다린다
빈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가 왜 이리 마음 설레게 할까
나무들 사이 눈을 헤집으며
봄을 끌어당기고 있는 눈새기꽃들
-「봄 마중 1」 부분
단 한 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 없이
말없는 말을 하는 포구나무의
이 푸근한 그늘,
먼 파도 소리를 지그시 당기듯
나를 붙들어 깃들게 하는 품속 같다
-「여름 포구나무」 부분
마을 향해 발길을 돌리는데도
어둠살 뒤집어쓰고 있는 구절초들은
예불 소리에 귀를 가져다대니
발치에 차이는 낙엽인들
무심하게 뒤채기만 할까
풍경 소리가 점점 멀어지지만
하룻밤 머물 마을 또한 낯설진 않다
-「그윽한 풍경」 부분
「봄 마중 1」에서 시인은 겨울의 시련에서 벗어나 봄을 기다리면서 "빈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 작은 새가 왜 이리 마음 설레게 할까"라고 하며 존재의 '설렘'을 느낀다. 한 편의 수채화 속으로 들어간 듯 봄꽃들과 나무들이 맑은 숨을 쉬고 있는 숲속은 시인의 훼손된 자아를 치유하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또한 「여름 포구나무」에서는 자연을 통해 모성애적 포근함을 체감한다. 그는 여름의 "포구나무" 그늘 아래서 "먼 파도 소리를 지그시 당기듯 / 나를 붙들어 깃들게 하는 품속 같다"고 하면서 존재의 안온함을 느낀다. 「그윽한 풍경」에서도 "구절초"와 "낙엽"과 "풍경소리"가 어우러진 자연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서 "하룻밤 머물 마을 또한 낯설진 않다"는 친화감을 내비친다. 자연을 통한 이러한 설렘과 안온함, 친화감은 시인의 내면에 잠재된 바이오필리아(녹색회귀증)을 떠올린다. 이같이 자연을 매개로 하는 시인의 현실 초극 의지는 '꿈'을 통한 존재 전환의 몸짓으로 더욱 인상 깊게 나타나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 밀림에 깃들면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다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다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그만 풀잎 하나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
-「풀잎 하나」 전문
시인이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의 자연으로 들어서는 순간, "찰나와 영원이 하나같"고 "지나간 시간도 다가오는 시간도 /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이른다. 자연은 인간의 이해타산으로 분절된 세계가 아니라 '찰라'와 '영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미분화된 상태를 보이는 융합된 세계이다. 이 천연의 순수한 "밀림"은 원시의 싱그러운 숨결이 혼돈 미만해 있는 카오스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기만도 위선도, 탐욕도, 단절도, 삶의 낯섦도 없는 곳이다. 이 원융의 세계에서 시인은 현실에서 상처받고 훼손된 자아에서 벗어나 "울창한 나무 그늘에서 흔들리는" 아주 "조그만 풀잎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바람은 "꿈꾸다 꿈속에 든 풀잎 하나"에서 느껴지듯이 '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풀잎'으로 전환한다. 이 존재 전환의 몸짓은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동화를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동화의 꿈을 통해 시인은 욕망과 상처로 얼룩진 현세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 자연이 주는 내적 평화를 누리고자 한다. 꿈을 매개로 하는 이러한 초월 의지에 대해 이태수 시인은 특히 이전부터 상승과 하강 구조를 즐겨 이용하면서 절묘한 대비 효과를 나타낸다.
외로울 때면 너의 창가에 서서
꿈꾸던 노래 들려주게
우리 노래를 들려주게
사랑스러운 그대,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사랑스러운 그대,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천사와 같은 비둘기의 은빛 날개,
꿈꾸는 나라로
함께 떠날 은빛 날개의 비둘기여
-「라 팔로마」 부분
맑고 깨끗한 마음의 근원은
오르는 데 있지 않다고,
누군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내려가는 데 있다고 했던가
무장산 계곡을 내려오는데
물소리, 은피리, 안 들리는 피리소리,
황혼의 나무 그림자들이 발길을 늦춘다
그윽하게 마음이 맑아지려면 비우고
내려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무장산 계곡」 부분
꿈과 결부된 시인의 초월 의지는 「라 팔로마」의 경우 "비둘기"라는 자연 심상의 매개체를 통해 상승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의 작곡가 S. 이라디에르의 노랫말을 시인이 개사한 이 시는 상처와 우울함으로 가득 찬 황량한 현실에서 벗어나 "천사와 같은 비둘기의 은빛 날개"에 실려 "꿈꾸는 나라"로 비상하고 싶은 소망을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부사가 암시해주는 것에 주목된다. 그것은 순수한 자연의 상징물인 '비둘기'와 더불어 꿈의 나라로 비행함으로써, 실존적 고독에서 일탈하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장산 계곡」은 '물'이라는 자연 심상을 통해 시인의 꿈이 하강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맑고 깨끗한 마음의 근원은 / 오르는 데 있지 않다"면서 인생에서 '내려감'의 덕목을 강조한다. "무장산 계곡"을 내려오면서도 "그윽하게 마음이 맑아지려면 비우고 /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실 초월은 상승만이 아니라 비움과 내려옴을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 같은 꿈의 상승과 하강작용은 그의 다른 시, "꿈결 같은 물소리, / 나도 지그시 눈 감고 따라간다 / 반눈을 뜨고 마음 가라앉히고 있으면 // 시름들이 물소리에 떠 있다"(「물, 물소리」), "나는 때때로 / 물이 되고, 새가 되고 싶다 / 때때로 나는 /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싶다"(「나는 때때로」), "그는 이 산중 암자에서 / 얼마간 수행하고 하산하는 것일까 / 어떻게 비우고 내려놓은 뒤 얼마나 채워서"(「수묵화 속으로」) 등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황량하고 쓸쓸한 삶의 한 지평에서 상승과 하강의 끈을 팽팽히 밀고 당기며 자아의 꿈을 구현해가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생의 활력과 치열한 시정신을 엿보게 한다. 꿈을 모티프로 한 시인의 초월 의지는 다음 시에서 마침내 극대화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마음 어둡고 무거워지면
꿈꾸는 나라로
외롭고 슬프고
괴로워도 꿈꾸는 나라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꿈꾸는 나라로
꿈속의 세상에
닿기까지 꿈꾸는 나라로
꿈을 꾸다 쓰러질지라도
꿈꾸는 나라로
시 바깥에서도
한결같이 꿈꾸는 나라로
-「한결같이」 전문
시인은 꿈꾸는 나라로 가기 위해 간절한 소망에 사로잡힌다. "마음 어둡고 무거워지"거나 "외롭고 슬프고 / 괴로워"질 때, 아니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 우울해질 때면 "꿈꾸는 나라로" 가자고 반복적으로 토로한다. 시인은 욕망과 위선, 슬픔과 상처로 얼룩진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의 순수가 훼절되지 않은 꿈의 세계로 안착하고 싶어진다. 이 잠재몽이 상징하듯이 시인이 얼마나 현실에서 실존적 아픔과 고독을 느꼈으며, 얼마나 간절하고 집요하게 "꿈꾸는 나라"로 가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미지의 세계는 시인의 마음 깊이 내재된 고요하고 평화로운 영혼의 처소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초월의 꿈을 꾼다는 것은 결국 내면에 은폐된 순수한 자아를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태수 시인의 이 열일곱 번째 시집은 반세기에 가까운 시력이 말해주듯이, 깊은 사유와 울림으로 충전된 삶의 철학을 명징하게 구현하고 있다. 우울한 실존의 한계상황 속에서도 아프게 음각된 영혼의 상처를 외롭게 어루만지며, 시인은 꿈을 통한 초월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실감과 단절감으로, 때로는 삭막한 현실의 부조리에 그의 실존은 높낮은 파동으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싱그러운 자연과 부단히 숨결을 나누면서 훼손된 자아의 동일성을 회복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혼신의 몸짓이야말로 낯선 생의 지평에서 모든 번민과 고뇌를 판단중지해 내면의 괄호 안에 넣은 다음, 삶을 새롭게 투사하고 껴안아 보려는 꿈의 현상학임이 분명하다.
목차
목차
Ⅰ
나를 기다리며
어느 날
범종 소리 2
침묵과 말
허공
다시 고엽
물, 물소리
봄 마중 1
봄 마중 2
다시, 페튜니아
벚나무 아래서
풀꽃
풀잎 하나
여름 포구나무
황금비
고요를 향하여
몇 마디의 말
Ⅱ
그윽한 풍경
이태백의 달
무장산 계곡
수묵화 속으로
오어사 물고기
고무방
분주
고월
사라리
달에 구름 가듯이
과동
노신사
어떤 언약
어떤 대화
내포와 외연
한결같이
라 팔로마
Ⅲ
먼길 1
먼길 2
우리의 길
다시, 비가 1
다시, 비가 2
산당화
떼죽나무꽃
초롱꽃
큰아우 생각
은수저
누이
음지식물
방황
배음
겨울 계수나무
나는 때때로
숨비소리
Ⅳ
코로나에게
거리 두기 1
거리 두기 2
거리 두기 3
거리 두기 4
거리 두기 5
거리 두기 6
거리 두기 7
사계, 2020
걱정
외길
마냥 이대로
친구에게
밀과 가라지
오만에 대해
악몽
유치한 소망
[해설] 이진엽(시인, 문학평론가)
나를 기다리며
어느 날
범종 소리 2
침묵과 말
허공
다시 고엽
물, 물소리
봄 마중 1
봄 마중 2
다시, 페튜니아
벚나무 아래서
풀꽃
풀잎 하나
여름 포구나무
황금비
고요를 향하여
몇 마디의 말
Ⅱ
그윽한 풍경
이태백의 달
무장산 계곡
수묵화 속으로
오어사 물고기
고무방
분주
고월
사라리
달에 구름 가듯이
과동
노신사
어떤 언약
어떤 대화
내포와 외연
한결같이
라 팔로마
Ⅲ
먼길 1
먼길 2
우리의 길
다시, 비가 1
다시, 비가 2
산당화
떼죽나무꽃
초롱꽃
큰아우 생각
은수저
누이
음지식물
방황
배음
겨울 계수나무
나는 때때로
숨비소리
Ⅳ
코로나에게
거리 두기 1
거리 두기 2
거리 두기 3
거리 두기 4
거리 두기 5
거리 두기 6
거리 두기 7
사계, 2020
걱정
외길
마냥 이대로
친구에게
밀과 가라지
오만에 대해
악몽
유치한 소망
[해설] 이진엽(시인, 문학평론가)
저자
저자
이태수
1947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그림자의 그늘』(1979), 『우울한 비상의 꿈』(1982), 『물 속의 푸른 방』(1986),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1990), 『꿈속의 사닥다리』(1993), 『그의 집은 둥글다』(1995), 『안동 시편』(1997), 『내 마음의 풍란』(1999), 『이슬방울 또는 얼음꽃』(2004), 『회화나무 그늘』(2008), 『침묵의 푸른 이랑』(2012), 『침묵의 결』(2014), 『따뜻한 적막』(2016), 『거울이 나를 본다』(2018), 『내가 나에게』(2019), 『유리창 이쪽』(2020), 시선집 『먼 불빛』(2018), 육필시집 『유등 연지』(2012), 시론집 『여성시의 표정』(2016), 『대구 현대시의 지형도』(2016), 『성찰과 동경』(2017), 『응시와 관조』(2019), 『현실과 초월』(2021) 등을 냈다. 매일신문 논설주간, 대구한의대 겸임교수, 대구시인협회 회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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