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Regular price
$19.10
Sale price
Regular price
✈️
Estimated delivery date 예상 배송일
Standard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8-12 영업일
Express Shipping
불러오는 중...
주문일로부터 6-8 영업일
10월 항쟁, 그 잊지 못할 항거와 희생
1946년 10월 1일 정오경 대구역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튿날 10월 2일에 죽은 한 사람의 시신을 싣고 학생과 시민들이 대구 도심 전역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해방된 새 나라를 건설하자”, “친일 경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또 다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총을 맞고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10ㆍ1폭동’, ‘대구 10월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10월 항쟁』의 저자 김상숙은 ‘10월 사건(폭동, 소요)’이 아닌 민중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10월 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제주도의 4ㆍ3항쟁이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공식 인정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데 비해, 대구ㆍ경북 지역의 10월 항쟁은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중에 살아 있다.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2016년 10월 1일은 항쟁 70주년이다.
1946년 10월 1일 정오경 대구역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튿날 10월 2일에 죽은 한 사람의 시신을 싣고 학생과 시민들이 대구 도심 전역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해방된 새 나라를 건설하자”, “친일 경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또 다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총을 맞고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10ㆍ1폭동’, ‘대구 10월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10월 항쟁』의 저자 김상숙은 ‘10월 사건(폭동, 소요)’이 아닌 민중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10월 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제주도의 4ㆍ3항쟁이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공식 인정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데 비해, 대구ㆍ경북 지역의 10월 항쟁은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중에 살아 있다.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2016년 10월 1일은 항쟁 70주년이다.
Couldn't load pickup availability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을 찾아서
한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페이지
그러나 잊지 못할 항거와 희생, 그 이름없는 임들의 이야기
김상숙의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항쟁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대구·경북 일대의 사회운동과 학살의 역사를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다. 해방 직후 일회적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이 실제로는 경북 지역, 아니 미군정 하의 남한 전역에서 진보세력 주도로 일어난 건국운동이자 시민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찰과 군인이 자행한 학살 사건으로 전개되는 과정까지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중요한 연구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다른백년 연구원장)
1946년 10월 1일 정오경 대구역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튿날 10월 2일에 죽은 한 사람(김용태, 27세, 역수)의 시신을 싣고(시신 시위) 학생과 시민들이 대구 도심 전역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해방된 새 나라를 건설하자", "친일 경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또 다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총을 맞고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10ㆍ1폭동', '대구 10월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폭동인가, 항쟁인가―사건을 둘러싼 역사의 왜곡과 진실
저자 김상숙은 '10월 사건(폭동, 소요)'이 아닌 민중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10월 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심지어 '10ㆍ1폭동'이라는 명칭에는 소수의 '좌익 분자'들이 일으킨 소요로서 '사건'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군정과 경찰이 '폭동' 또는 '소요'라고 규정하고 반공이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항쟁은 오랜 시간 그렇게 인식되었다.
제주도의 4ㆍ3항쟁이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공식 인정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데 비해, 대구ㆍ경북 지역의 10월 항쟁은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후사를 연구한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추수 봉기'라고 하여 미군정 경제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농민 봉기로서 의미를 부여했으며, 국내 학계에서는 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조류 속에서 사회과학자 정해구가 전민적 규모의 '인민 항쟁'으로서 적극적 의미 부여를 시도한 바 있다.
10월 항쟁이 민중 항쟁 또는 시민 항쟁으로서 평가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시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선공산당(조공)과 이후 무장투쟁을 이끈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반공 국가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며 항쟁 자체가 '좌익'의 권력 투쟁이나 반란으로 오인되었다는 데 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면서 좌익을 포함한 범진보세력은 지하에서 암약할 수밖에 없었고, 항쟁 이후 상당수 청년들은 산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의 일원인 '빨치산'이 되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빨치산은 군경의 전면적 토벌로 인해 진압되었고, 이 진압은 빨치산뿐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대적 학살로 귀결되었다.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한국전쟁 직후에 학살된 민간인의 수가 1만 5천 명에 이른다고 저자 김상숙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다. 이는 당시 경북 인구의 0.5퍼센트에 이르는 수치다. 그리고 좌파를 포함하여 건준(건국준비위원회),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우 합작을 시도했던 인사들과 항일운동가 출신의 사회운동가들은 10월 항쟁 이후 타의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되었다. 대구ㆍ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10월 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해방정국에서 대중운동 및 사회운동을 주도한 한 세대가 사실상 이때 절멸을 면치 못했는데, 이는 한때 한국 진보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대구 지역이 강경 보수화되는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골로 간다"(골짜기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이 역사를 간신히 증거하고 있다.
좌익 전위 엘리트가 선도한 '소요'가 아닌, 노동자ㆍ학생ㆍ기층 민중이 참여한 시민 항쟁
1946년 10월 1일 대구철도노조를 비롯한 노동조합의 시위는 통설대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가령 박헌영의 지시)이 기획한 것이었을까.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자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과의 협상 노선에서 투쟁 노선으로 선회한다. 그런데 대구 지역의 노동조합은 지역에서 자주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당 조직도 중앙과 위계적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 김상숙의 판단이다.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항일운동과 대중운동의 경험이 있었던 인사들이 조선공산당이나 조선인민당, 민전 등의 단체에 두루 참여하고 있었으며, 좌우익 인사들은 항일운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구공동위원회를 통해 좌우 합작을 모색했으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모았다. 즉 그들이 이 당시 한 일은 건국운동의 일환이었지, 미군정과 경찰의 공식 발표처럼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았다.
저자는 대구 항쟁이 좌절하게 된 한 원인으로 지도부와 조직 역량의 부족을 든다. 가령 시위대 대표단으로 경찰서장과 면담을 한 조선공산당과 민전 간부들은 경찰의 발포 중지 요구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대구 항쟁의 주요한 축으로서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대 학생들, 그리고 시내 중학생들(오늘날의 중고등학생)을 이끌었던 대구의대 학생 최무학(학생자치회 회장)이 학생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했을 뿐, 항쟁의 공식 지도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이 '좌익' 계열의 지도부가 시위를 선동하여 폭동이 일어났다고 발표한 것은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고 있었던 정황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10월 1일과 2일 있었던 시민의 시위에는 1946년 내내 지속되었던 기아 빈민 시위가 항쟁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아사 직전에 있던 기아 빈민들이 미군정을 상대로 "쌀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생존 투쟁을 벌였다. 이 책은 10월 항쟁이 좌익 전위 엘리트가 선도한 '소요'와 '반란'이 아니라 노동자, 학생들과 더불어 기층 민중이 전면에 나선 시민 항쟁이었음을 90년대 이후 공개된 미군 문서와 항쟁 참여자 및 목격자의 증언 구술을 통해 새롭게 입증하고 있다.
항쟁의 배경―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해방 이후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건국운동이 각계각층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항일운동을 했던 좌우파 사회운동가들의 주도 하에 다양한 건국운동 및 정당 조직이 만들어졌다. 해방 공간에서는 좌파와 우파, 좌우 합작 노선 세력이 공존하며 경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군정과도 협상 노선을 견지하면서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스스로 조직되는 등 온 나라가 건국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혼돈의 시기였지만 그만큼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을 통치하는 데 식민지 시대 일본에 부역했던 경찰과 관료들을 다시금 불러들여 중용한다. 미군정 하의 친일 경찰은 해방 공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시대의 통치 방식을 답습하여 사회를 통제했다. 당시 미군의 한 보고서는 10월 항쟁의 원인을 경찰의 횡포로 보기도 했다. 해방된 나라를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친일 경찰의 재등장은 일제 식민지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악몽이었다.
미군정이 선택한 정당 파트너 한국민주당(한민당)은 기득권 세력과 지주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군정 하에서 농지개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고, 지주-소작 관계의 봉건제적 구습은 청산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주-소작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계급 차별의 문제로, 농민들이 10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원인이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10월 항쟁을 '농민 봉기'(추수 봉기)로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군정은 도시 지역에 부족한 식량을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미곡수집령을 내려 농촌에서 대대적으로 식량을 공출해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는 식량난이 심각했으며 아사자가 속출했다. 1946년 내내 벌어진 기아 빈민 시위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이것은 미군정 경제정책의 중대한 실패로 지적되는 문제이다.
친일 세력을 청산하기는커녕 그들을 중용한 미군정의 또 다른 차원의 식민 정책, 농지개혁의 지연으로 인한 봉건제 구습의 잔존, 식량난이라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10월 항쟁 촉발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였고, 건국운동 조직과 진보 정당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등의 자주적 조직들, 학생과 시민들, 농민들이 항쟁에 참여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경북 각 지역은 물론이고 남한 전역 73개 시ㆍ군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항쟁은 1948년 제주도 4ㆍ3항쟁과 여순 항쟁으로 이어진다.
미완의 시민혁명,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항쟁 70주년을 맞아
10월 항쟁은 오랜 시간 한국 현대사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폄하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선산 인민위원회 및 민전 간부)가 항쟁 중에 경찰에게 피살되었다는 사실로 더 잘 알려진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식민 통치와 봉건제 유산의 청산을 시도했던 미완의 시민혁명이자, 미군정과 친일 경찰로부터 건국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숭고한 항거였으며, 전국으로 확산된 항쟁이라는 점에서 '제2의 3ㆍ1운동'이라고 부를 만했다. 농민의 자발적 봉기 양상은 19세기 농민 항쟁(1862년 농민 봉기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계승이었다.
도시에서의 항쟁은 미군정의 계엄령 하에 진압되었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청년들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군경 토벌대는 빨치산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과거 사회운동에 관여했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수많은 사람들이 값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 현대 국가로서 반공 우익 국가인 한국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학살은 한 세대 사회운동의 절멸을 의미했으며, 국가 권력의 토대를 강화하는 폭력적 방법이었다. 시민혁명을 통해 성립하지 못한 한국 사회는 10여년 후 4ㆍ19라는 뒤늦은 시민혁명이 뒤따랐고, 쿠데타로 인해 좌절된 시민혁명의 이상은 다시 20년 후 5ㆍ18항쟁으로 현현했다.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중에 살아 있었다.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2016년 10월 1일은 항쟁 70주년이다.
저자 김상숙은 2007~2010년까지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대구 10월 사건'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담당한 조사관이었다. 2010년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뒤 더 이상 조사관의 신분이 아니면서도 항쟁 참여자 및 목격자, 유족의 증언 구술을 찾아 다녔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그러면서 '대구 10월 사건'이 시민 항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 『10월 항쟁』은 9년 동안 진행한 조사와 연구의 결과물이다.
한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페이지
그러나 잊지 못할 항거와 희생, 그 이름없는 임들의 이야기
김상숙의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항쟁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대구·경북 일대의 사회운동과 학살의 역사를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다. 해방 직후 일회적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이 실제로는 경북 지역, 아니 미군정 하의 남한 전역에서 진보세력 주도로 일어난 건국운동이자 시민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경찰과 군인이 자행한 학살 사건으로 전개되는 과정까지 살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중요한 연구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다른백년 연구원장)
1946년 10월 1일 정오경 대구역 광장에서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동자 두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튿날 10월 2일에 죽은 한 사람(김용태, 27세, 역수)의 시신을 싣고(시신 시위) 학생과 시민들이 대구 도심 전역에서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해방된 새 나라를 건설하자", "친일 경찰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쳤다. 경찰은 또 다시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었고,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이 총을 맞고 여기저기서 쓰러졌다. '10ㆍ1폭동', '대구 10월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폭동인가, 항쟁인가―사건을 둘러싼 역사의 왜곡과 진실
저자 김상숙은 '10월 사건(폭동, 소요)'이 아닌 민중 항쟁으로서의 의의를 부여하고자 '10월 항쟁'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심지어 '10ㆍ1폭동'이라는 명칭에는 소수의 '좌익 분자'들이 일으킨 소요로서 '사건'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군정과 경찰이 '폭동' 또는 '소요'라고 규정하고 반공이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항쟁은 오랜 시간 그렇게 인식되었다.
제주도의 4ㆍ3항쟁이 국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공식 인정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데 비해, 대구ㆍ경북 지역의 10월 항쟁은 학계에서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전후사를 연구한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추수 봉기'라고 하여 미군정 경제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농민 봉기로서 의미를 부여했으며, 국내 학계에서는 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조류 속에서 사회과학자 정해구가 전민적 규모의 '인민 항쟁'으로서 적극적 의미 부여를 시도한 바 있다.
10월 항쟁이 민중 항쟁 또는 시민 항쟁으로서 평가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시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선공산당(조공)과 이후 무장투쟁을 이끈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반공 국가가 되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며 항쟁 자체가 '좌익'의 권력 투쟁이나 반란으로 오인되었다는 데 있다.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면서 좌익을 포함한 범진보세력은 지하에서 암약할 수밖에 없었고, 항쟁 이후 상당수 청년들은 산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의 일원인 '빨치산'이 되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빨치산은 군경의 전면적 토벌로 인해 진압되었고, 이 진압은 빨치산뿐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대적 학살로 귀결되었다.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한국전쟁 직후에 학살된 민간인의 수가 1만 5천 명에 이른다고 저자 김상숙은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다. 이는 당시 경북 인구의 0.5퍼센트에 이르는 수치다. 그리고 좌파를 포함하여 건준(건국준비위원회),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우 합작을 시도했던 인사들과 항일운동가 출신의 사회운동가들은 10월 항쟁 이후 타의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되었다. 대구ㆍ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10월 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해방정국에서 대중운동 및 사회운동을 주도한 한 세대가 사실상 이때 절멸을 면치 못했는데, 이는 한때 한국 진보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대구 지역이 강경 보수화되는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골로 간다"(골짜기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이 역사를 간신히 증거하고 있다.
좌익 전위 엘리트가 선도한 '소요'가 아닌, 노동자ㆍ학생ㆍ기층 민중이 참여한 시민 항쟁
1946년 10월 1일 대구철도노조를 비롯한 노동조합의 시위는 통설대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가령 박헌영의 지시)이 기획한 것이었을까.
미군정이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자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과의 협상 노선에서 투쟁 노선으로 선회한다. 그런데 대구 지역의 노동조합은 지역에서 자주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정당 조직도 중앙과 위계적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 김상숙의 판단이다.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항일운동과 대중운동의 경험이 있었던 인사들이 조선공산당이나 조선인민당, 민전 등의 단체에 두루 참여하고 있었으며, 좌우익 인사들은 항일운동을 함께했기 때문에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구공동위원회를 통해 좌우 합작을 모색했으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힘을 모았다. 즉 그들이 이 당시 한 일은 건국운동의 일환이었지, 미군정과 경찰의 공식 발표처럼 '반란'이나 '소요'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았다.
저자는 대구 항쟁이 좌절하게 된 한 원인으로 지도부와 조직 역량의 부족을 든다. 가령 시위대 대표단으로 경찰서장과 면담을 한 조선공산당과 민전 간부들은 경찰의 발포 중지 요구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대구 항쟁의 주요한 축으로서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대 학생들, 그리고 시내 중학생들(오늘날의 중고등학생)을 이끌었던 대구의대 학생 최무학(학생자치회 회장)이 학생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했을 뿐, 항쟁의 공식 지도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경찰이 '좌익' 계열의 지도부가 시위를 선동하여 폭동이 일어났다고 발표한 것은 미군정이 공산당을 탄압하고 있었던 정황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10월 1일과 2일 있었던 시민의 시위에는 1946년 내내 지속되었던 기아 빈민 시위가 항쟁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아사 직전에 있던 기아 빈민들이 미군정을 상대로 "쌀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생존 투쟁을 벌였다. 이 책은 10월 항쟁이 좌익 전위 엘리트가 선도한 '소요'와 '반란'이 아니라 노동자, 학생들과 더불어 기층 민중이 전면에 나선 시민 항쟁이었음을 90년대 이후 공개된 미군 문서와 항쟁 참여자 및 목격자의 증언 구술을 통해 새롭게 입증하고 있다.
항쟁의 배경―항쟁은 왜 일어났는가
해방 이후 새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건국운동이 각계각층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항일운동을 했던 좌우파 사회운동가들의 주도 하에 다양한 건국운동 및 정당 조직이 만들어졌다. 해방 공간에서는 좌파와 우파, 좌우 합작 노선 세력이 공존하며 경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군정과도 협상 노선을 견지하면서 인민위원회가 전국에서 스스로 조직되는 등 온 나라가 건국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혼돈의 시기였지만 그만큼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을 통치하는 데 식민지 시대 일본에 부역했던 경찰과 관료들을 다시금 불러들여 중용한다. 미군정 하의 친일 경찰은 해방 공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시대의 통치 방식을 답습하여 사회를 통제했다. 당시 미군의 한 보고서는 10월 항쟁의 원인을 경찰의 횡포로 보기도 했다. 해방된 나라를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친일 경찰의 재등장은 일제 식민지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악몽이었다.
미군정이 선택한 정당 파트너 한국민주당(한민당)은 기득권 세력과 지주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군정 하에서 농지개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고, 지주-소작 관계의 봉건제적 구습은 청산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주-소작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계급 차별의 문제로, 농민들이 10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원인이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10월 항쟁을 '농민 봉기'(추수 봉기)로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군정은 도시 지역에 부족한 식량을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미곡수집령을 내려 농촌에서 대대적으로 식량을 공출해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는 식량난이 심각했으며 아사자가 속출했다. 1946년 내내 벌어진 기아 빈민 시위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이것은 미군정 경제정책의 중대한 실패로 지적되는 문제이다.
친일 세력을 청산하기는커녕 그들을 중용한 미군정의 또 다른 차원의 식민 정책, 농지개혁의 지연으로 인한 봉건제 구습의 잔존, 식량난이라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10월 항쟁 촉발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였고, 건국운동 조직과 진보 정당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등의 자주적 조직들, 학생과 시민들, 농민들이 항쟁에 참여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경북 각 지역은 물론이고 남한 전역 73개 시ㆍ군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항쟁은 1948년 제주도 4ㆍ3항쟁과 여순 항쟁으로 이어진다.
미완의 시민혁명,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항쟁 70주년을 맞아
10월 항쟁은 오랜 시간 한국 현대사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한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폄하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선산 인민위원회 및 민전 간부)가 항쟁 중에 경찰에게 피살되었다는 사실로 더 잘 알려진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갈림길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었다. 식민 통치와 봉건제 유산의 청산을 시도했던 미완의 시민혁명이자, 미군정과 친일 경찰로부터 건국의 주권을 탈환하기 위한 숭고한 항거였으며, 전국으로 확산된 항쟁이라는 점에서 '제2의 3ㆍ1운동'이라고 부를 만했다. 농민의 자발적 봉기 양상은 19세기 농민 항쟁(1862년 농민 봉기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계승이었다.
도시에서의 항쟁은 미군정의 계엄령 하에 진압되었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 청년들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군경 토벌대는 빨치산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과거 사회운동에 관여했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수많은 사람들이 값없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 현대 국가로서 반공 우익 국가인 한국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학살은 한 세대 사회운동의 절멸을 의미했으며, 국가 권력의 토대를 강화하는 폭력적 방법이었다. 시민혁명을 통해 성립하지 못한 한국 사회는 10여년 후 4ㆍ19라는 뒤늦은 시민혁명이 뒤따랐고, 쿠데타로 인해 좌절된 시민혁명의 이상은 다시 20년 후 5ㆍ18항쟁으로 현현했다. 10월 항쟁은 한국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으로 한국인의 무의식중에 살아 있었다. 이제 봉인된 시간 속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이다. 2016년 10월 1일은 항쟁 70주년이다.
저자 김상숙은 2007~2010년까지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대구 10월 사건'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담당한 조사관이었다. 2010년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뒤 더 이상 조사관의 신분이 아니면서도 항쟁 참여자 및 목격자, 유족의 증언 구술을 찾아 다녔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그러면서 '대구 10월 사건'이 시민 항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 『10월 항쟁』은 9년 동안 진행한 조사와 연구의 결과물이다.
목차
목차
책을 펴내며. 낮은 목소리의 이야기를 따라
서장. 10월 항쟁은 무엇이었는가
1부. 10월 항쟁
1장. 건국의 푸른 꿈
1. 건국운동의 열기
해방 직후 건국운동의 조직|노동자의 조직 과정|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활기|빈민조직의 부재|정당과 통일전선조직|경북정치학교, 건국의 푸른 꿈과 지역운동의 도전|농촌조직의 영향력과 폐쇄성
2. 되풀이되는 식민지의 악몽
점령군의 등장, 친일파의 귀환|지방 보수세력의 형성|식량난과 사회·경제적 불안정성|대중투쟁의 폭발|좌우 합작과 대구공동위원회|미군정의 탄압과 9월 총파업
3. 혼돈 속의 건국운동과 항쟁 전야
2장. 대구, 10월 항쟁의 서막
1. 대구역 광장 시위와 경찰의 발포
10월 1일: 노동자·시민이 연대한 시위 그리고 경찰의 발포|10월 2일: 시위의 전개와 경찰의 발포 시점|10월 1일 경찰 발포 피살자는 누구인가|10월 2일 경찰 발포 피살자의 신원 추정
2. 청년·학생 연합 시위와 시민 항쟁
시신 시위의 조직과 청년·학생 연합 시위의 지도부|시위의 실질적 지도부는 누구였는가|10월 2일 오전: 청년·학생 연합 시위, 시민 항쟁으로의 전환|10월 2일 오후: 지도부 없는 기층 민중의 봉기, 사회적 트라우마의 폭발|10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반응
3. 시민 항쟁으로서의 대구 항쟁의 의의와 한계
3장. 농촌으로 간 10월 항쟁
1. 경북 전역으로 번지는 항쟁
제2의 3·1운동|항쟁의 지역별 양상과 전개 과정
2. 농민 항쟁으로서의 영천 항쟁
항쟁의 배경과 원인|영천읍, 항쟁의 폭발|면 단위로 확산되는 항쟁|항쟁의 전파 경로|항쟁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3. 항쟁의 조직 기반과 농민 항쟁의 역사적 계승
하층민 조직: 계급적 동질성에 의한 결합|친족 관계: 일가주의적 동질성에 의한 결합|마을 자치조직의 전통: 마을공동체의 동질성에 의한 결합|19세기 농민 항쟁의 역사적 계승
4. 10월 항쟁, 도시에서 농촌으로
2부. 작은 전쟁과 학살
4장. 삐라를 뿌리는 소년들
1. 항쟁의 진압과 민간인 학살
2. 항쟁 이후의 사회운동
남로당의 결성과 민전의 활동|노동운동의 탄압과 학생운동의 성장|이름도 무덤도 없는 청년·학생 운동가들|대중화하는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3. 대중운동의 탄압과 무장투쟁의 발전
당국의 탄압과 통제|지방 보수세력의 강화|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운동|무장투쟁의 발전, 야산대에서 유격대로
4. 대중운동의 재편과 좌우의 분열
5장. 산으로 간 청년들과 작은 전쟁
1. 대중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대구 제6연대 사건과 유격대의 형성|군경의 빨치산 토벌|1949년 대구 지역의 투쟁 활동|1949년 무장투쟁기의 남로당
2. 빨치산과 군경 사이에서
산사람과 들군|빨치산의 생활과 활동|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이
3. 빨치산에 대한 기억과 집단적 트라우마
'빨갱이 고수'와 '지방 빨갱이'|똑똑하고 말 잘하고 잘생긴|우익이 좋은동, 좌익이 좋은동, 알아야 뭘 하지요
4. 반공의 사회심리와 냉전 통치성
6장. 학살과 통제
1. 민간인 학살과 체제 통제
정부 수립기 대구 지역의 민간인 학살|정부 수립기 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영천의 사례|국민보도연맹과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2. 기록으로 본 학살 사건
경주·월성|경산·청도·영일|칠곡·고령·성주·군위·김천·금릉|영덕|영양·안동·영주·예천·의성·봉화·문경|학살의 유형
3. 피학살자들은 누구인가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나|언제, 어떤 지역에서 학살되었나|피학살자의 사회인구학적 구성
4. 학살, 진보의 절멸과 국가 권력의 토대 강화
에필로그: 10월 항쟁의 유산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1. 10월 항쟁, 미완의 시민혁명
노동자·시민이 연대한 대중운동이자 사회운동|항쟁 지도부와 조직 역량의 부족|전통적 농민 항쟁의 전승이자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
2. 남겨진 이야기: 전쟁 후의 또 다른 전쟁
아홉 살 '이쁜이'는 왜 '10·1폭동 처형자'로 기록되었나|학살 후 홀로 된 여성들|70년간의 기다림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서장. 10월 항쟁은 무엇이었는가
1부. 10월 항쟁
1장. 건국의 푸른 꿈
1. 건국운동의 열기
해방 직후 건국운동의 조직|노동자의 조직 과정|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활기|빈민조직의 부재|정당과 통일전선조직|경북정치학교, 건국의 푸른 꿈과 지역운동의 도전|농촌조직의 영향력과 폐쇄성
2. 되풀이되는 식민지의 악몽
점령군의 등장, 친일파의 귀환|지방 보수세력의 형성|식량난과 사회·경제적 불안정성|대중투쟁의 폭발|좌우 합작과 대구공동위원회|미군정의 탄압과 9월 총파업
3. 혼돈 속의 건국운동과 항쟁 전야
2장. 대구, 10월 항쟁의 서막
1. 대구역 광장 시위와 경찰의 발포
10월 1일: 노동자·시민이 연대한 시위 그리고 경찰의 발포|10월 2일: 시위의 전개와 경찰의 발포 시점|10월 1일 경찰 발포 피살자는 누구인가|10월 2일 경찰 발포 피살자의 신원 추정
2. 청년·학생 연합 시위와 시민 항쟁
시신 시위의 조직과 청년·학생 연합 시위의 지도부|시위의 실질적 지도부는 누구였는가|10월 2일 오전: 청년·학생 연합 시위, 시민 항쟁으로의 전환|10월 2일 오후: 지도부 없는 기층 민중의 봉기, 사회적 트라우마의 폭발|10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반응
3. 시민 항쟁으로서의 대구 항쟁의 의의와 한계
3장. 농촌으로 간 10월 항쟁
1. 경북 전역으로 번지는 항쟁
제2의 3·1운동|항쟁의 지역별 양상과 전개 과정
2. 농민 항쟁으로서의 영천 항쟁
항쟁의 배경과 원인|영천읍, 항쟁의 폭발|면 단위로 확산되는 항쟁|항쟁의 전파 경로|항쟁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3. 항쟁의 조직 기반과 농민 항쟁의 역사적 계승
하층민 조직: 계급적 동질성에 의한 결합|친족 관계: 일가주의적 동질성에 의한 결합|마을 자치조직의 전통: 마을공동체의 동질성에 의한 결합|19세기 농민 항쟁의 역사적 계승
4. 10월 항쟁, 도시에서 농촌으로
2부. 작은 전쟁과 학살
4장. 삐라를 뿌리는 소년들
1. 항쟁의 진압과 민간인 학살
2. 항쟁 이후의 사회운동
남로당의 결성과 민전의 활동|노동운동의 탄압과 학생운동의 성장|이름도 무덤도 없는 청년·학생 운동가들|대중화하는 농민운동과 학생운동
3. 대중운동의 탄압과 무장투쟁의 발전
당국의 탄압과 통제|지방 보수세력의 강화|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운동|무장투쟁의 발전, 야산대에서 유격대로
4. 대중운동의 재편과 좌우의 분열
5장. 산으로 간 청년들과 작은 전쟁
1. 대중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대구 제6연대 사건과 유격대의 형성|군경의 빨치산 토벌|1949년 대구 지역의 투쟁 활동|1949년 무장투쟁기의 남로당
2. 빨치산과 군경 사이에서
산사람과 들군|빨치산의 생활과 활동|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빨치산이
3. 빨치산에 대한 기억과 집단적 트라우마
'빨갱이 고수'와 '지방 빨갱이'|똑똑하고 말 잘하고 잘생긴|우익이 좋은동, 좌익이 좋은동, 알아야 뭘 하지요
4. 반공의 사회심리와 냉전 통치성
6장. 학살과 통제
1. 민간인 학살과 체제 통제
정부 수립기 대구 지역의 민간인 학살|정부 수립기 경북 지역의 민간인 학살: 영천의 사례|국민보도연맹과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
2. 기록으로 본 학살 사건
경주·월성|경산·청도·영일|칠곡·고령·성주·군위·김천·금릉|영덕|영양·안동·영주·예천·의성·봉화·문경|학살의 유형
3. 피학살자들은 누구인가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나|언제, 어떤 지역에서 학살되었나|피학살자의 사회인구학적 구성
4. 학살, 진보의 절멸과 국가 권력의 토대 강화
에필로그: 10월 항쟁의 유산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1. 10월 항쟁, 미완의 시민혁명
노동자·시민이 연대한 대중운동이자 사회운동|항쟁 지도부와 조직 역량의 부족|전통적 농민 항쟁의 전승이자 현대 민중 항쟁의 원형
2. 남겨진 이야기: 전쟁 후의 또 다른 전쟁
아홉 살 '이쁜이'는 왜 '10·1폭동 처형자'로 기록되었나|학살 후 홀로 된 여성들|70년간의 기다림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저자
김상숙
저자 김상숙은 1980년대 대구의 사회운동 단체에서 일했다. 노동운동 관련 연구를 하다가 2007년에 '1980년대 대구 지역 여성노동운동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서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일을 했다.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로 근무했으며, 지금은 고려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사회학 과목을 강의하고 한국 현대사와 사회운동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5·18기념재단, 김근태기념치유센터 등 여러 기관의 구술조사 사업에 참여하면서 현장에서 지역민들을 만나 과거사의 기억을 되살리고, 국가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사라지고 숨겨진 이야기를 복원하여 사회적 치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농민 항쟁의 측면에서 본 1946년 10월 사건」, 「1948~1949년 지역 내전과 마을 청년들의 경험」, 「가톨릭 노동운동의 재평가를 통한 현 노동운동의 대안 모색」 등이 있다.
Payment & Security
Payment methods
Your payment information is processed securely. We do not store credit card details nor have access to your credit card informa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