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전집 15: 서신(3)(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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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과 1935년의 루쉰 서신
루쉰의 서신은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산문, 잡문 등 다른 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행적과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서신 3’은 1934년과 1935년의 짧은 두 해 동안 550여 통에 이르는 엄청나게 많은 서신을 담고 있어 그의 행적 곳곳을 좀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루쉰의 서신은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산문, 잡문 등 다른 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행적과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서신 3’은 1934년과 1935년의 짧은 두 해 동안 550여 통에 이르는 엄청나게 많은 서신을 담고 있어 그의 행적 곳곳을 좀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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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편지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한 행적
루쉰의 서신은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산문, 잡문 등 다른 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행적과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서신 3'은 1934년과 1935년의 짧은 두 해 동안 550여 통에 이르는 엄청나게 많은 서신을 담고 있어 그의 행적 곳곳을 좀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시기 루쉰의 서신에서 주목할 점은 첫째, 목판화운동과 관련된 일이다. 뤄칭전, 장후이, 리화, 천옌차오, 라이사오치, 탕잉웨이 등 청년 목판화가들과 꾸준히 교유하며, 그들의 작품이 출판되도록 소개하고 인세의 정산을 돕고 서점 판매를 주선했다. 목판화 작품에 관하여 '경험, 관찰, 사색'을 바탕으로 할 것과 그것이 예술작품임을 잊어선 안 됨을 강조하여 청년 작가들의 작품 내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나아가 목판의 성격, 인쇄와 출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수 등을 고려하며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도록 독려하여 목판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둘째, 번역 활동과 청년 작가들에 대한 지원이다. 국민당의 검열과 수배, 암살 등이 횡행하여 루쉰은 자신의 이름으로 집필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명을 쓰거나 번역에 매진했다. 고골의 『죽은 혼』, 판텔레예프의 『시계』 등이 대표적인 역서이다. 또 상하이에 거주하게 된 동북 출신 작가 샤오쥔, 샤오훙과 서신 왕래를 하며, 이들이 상하이 문단의 야수성을 극복하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많은 청년 작가들의 출판을 돕고, 서문을 쓰고, 『역문』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우며 문학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셋째, 정전둬(鄭振鐸)와 함께 고서를 수집, 정리한 일이다. 루쉰은 전 생애에 걸쳐 고대 문물을 수집해 왔고, 비문과 고적을 연구하여 정리하고, 지리지를 펴내는 등 늘 이를 관심의 범위에 두고 있었다. 이때에는 정전둬라는 고서에 능통한 동료를 만나 『베이핑전보』(北平箋譜), 『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 등을 펴내며 교유했다.
이 외에도 양지윈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루쉰 자신의 초기 글에 대한 기억을 언급한 일, 베이징에 있는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상황을 전한 일도 주목해 볼 수 있다. 아들 하이잉이 커 가는 모습과 음식, 발병, 보양과 관련한 신변잡기도 곳곳에 녹아 있어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 볼 수 있다.
루쉰의 서신은 공개적으로 발표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 산문, 잡문 등 다른 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행적과 속마음이 잘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서신 3'은 1934년과 1935년의 짧은 두 해 동안 550여 통에 이르는 엄청나게 많은 서신을 담고 있어 그의 행적 곳곳을 좀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시기 루쉰의 서신에서 주목할 점은 첫째, 목판화운동과 관련된 일이다. 뤄칭전, 장후이, 리화, 천옌차오, 라이사오치, 탕잉웨이 등 청년 목판화가들과 꾸준히 교유하며, 그들의 작품이 출판되도록 소개하고 인세의 정산을 돕고 서점 판매를 주선했다. 목판화 작품에 관하여 '경험, 관찰, 사색'을 바탕으로 할 것과 그것이 예술작품임을 잊어선 안 됨을 강조하여 청년 작가들의 작품 내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나아가 목판의 성격, 인쇄와 출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수 등을 고려하며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도록 독려하여 목판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둘째, 번역 활동과 청년 작가들에 대한 지원이다. 국민당의 검열과 수배, 암살 등이 횡행하여 루쉰은 자신의 이름으로 집필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가명을 쓰거나 번역에 매진했다. 고골의 『죽은 혼』, 판텔레예프의 『시계』 등이 대표적인 역서이다. 또 상하이에 거주하게 된 동북 출신 작가 샤오쥔, 샤오훙과 서신 왕래를 하며, 이들이 상하이 문단의 야수성을 극복하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많은 청년 작가들의 출판을 돕고, 서문을 쓰고, 『역문』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도우며 문학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셋째, 정전둬(鄭振鐸)와 함께 고서를 수집, 정리한 일이다. 루쉰은 전 생애에 걸쳐 고대 문물을 수집해 왔고, 비문과 고적을 연구하여 정리하고, 지리지를 펴내는 등 늘 이를 관심의 범위에 두고 있었다. 이때에는 정전둬라는 고서에 능통한 동료를 만나 『베이핑전보』(北平箋譜), 『십죽재전보』(十竹齋箋譜) 등을 펴내며 교유했다.
이 외에도 양지윈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루쉰 자신의 초기 글에 대한 기억을 언급한 일, 베이징에 있는 어머니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상황을 전한 일도 주목해 볼 수 있다. 아들 하이잉이 커 가는 모습과 음식, 발병, 보양과 관련한 신변잡기도 곳곳에 녹아 있어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 볼 수 있다.
목차
목차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1934년
1935년
『서신 3』에 대하여
1934년
1935년
『서신 3』에 대하여
저자
저자
루쉰
저자 루쉰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위차이(豫才)이며, 루쉰은 탕쓰(唐俟), 링페이(令飛), 펑즈위(豊之餘), 허자간(何家幹) 등 수많은 필명 중 하나이다.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조부의 하옥(下獄), 아버지의 병사(病死) 등 잇따른 불행을 경험했고 청나라의 몰락과 함께 몰락해 가는 집안의 풍경을 목도했다.
1898년부터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과 광무철로학당(?務鐵路學堂)에서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했고, 1902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분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는 망해 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문학으로 중국의 국민성을 개조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대를 중퇴, 도쿄로 가 잡지 창간, 외국소설 번역 등의 일을 하다가 1909년 귀국했다. 귀국 이후 고향 등지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그는 신해혁명 직후 교육부 장관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요청으로 난징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불철저한 혁명과 여전히 낙후된 중국 정치·사회 상황에 절망하여 이후 10년 가까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아Q정전], [쿵이지], [고향]등의 소설과 산문시집 『들풀』, 『아침 꽃 저녁에 줍다』 등의 산문집, 그리고 시평을 비롯한 숱한 잡문(雜文)을 발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예로센코, 네덜란드의 반 에덴 등 수많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웨이밍사(未名社), 위쓰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를 조직, 문학운동과 문학청년 지도에도 앞장섰다.
1926년 3·18 참사 이후 반정부 지식인에게 내린 국민당의 수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한 그는 샤먼(廈門), 광저우(廣州)를 거쳐 1927년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잡문을 통한 논쟁과 강연 활동,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와 판화운동 전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중국의 현실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위차이(豫才)이며, 루쉰은 탕쓰(唐俟), 링페이(令飛), 펑즈위(豊之餘), 허자간(何家幹) 등 수많은 필명 중 하나이다.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조부의 하옥(下獄), 아버지의 병사(病死) 등 잇따른 불행을 경험했고 청나라의 몰락과 함께 몰락해 가는 집안의 풍경을 목도했다.
1898년부터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과 광무철로학당(?務鐵路學堂)에서 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했고, 1902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분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의학으로는 망해 가는 중국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문학으로 중국의 국민성을 개조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대를 중퇴, 도쿄로 가 잡지 창간, 외국소설 번역 등의 일을 하다가 1909년 귀국했다. 귀국 이후 고향 등지에서 교원 생활을 하던 그는 신해혁명 직후 교육부 장관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요청으로 난징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불철저한 혁명과 여전히 낙후된 중국 정치·사회 상황에 절망하여 이후 10년 가까이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아Q정전], [쿵이지], [고향]등의 소설과 산문시집 『들풀』, 『아침 꽃 저녁에 줍다』 등의 산문집, 그리고 시평을 비롯한 숱한 잡문(雜文)을 발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예로센코, 네덜란드의 반 에덴 등 수많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웨이밍사(未名社), 위쓰사(語絲社) 등의 문학단체를 조직, 문학운동과 문학청년 지도에도 앞장섰다.
1926년 3·18 참사 이후 반정부 지식인에게 내린 국민당의 수배령을 피해 도피생활을 시작한 그는 샤먼(廈門), 광저우(廣州)를 거쳐 1927년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잡문을 통한 논쟁과 강연 활동,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와 판화운동 전개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중국의 현실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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