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그랑서울빌딩의 60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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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땅속에서 찾다
종로 청진동 발굴현장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 서울에도 폼페이가 있었네!”하고 감탄한다. 서울 600년의 모습이 현 지표에서 지하 4.5m 깊이까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곡차곡 문화층별로 쌓여있다. 해마다 여름에는 빗물을 따라 모래층이 쌓이고, 겨울이면 신발에 묻는 검은색 흙이 그 위에 더해져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졌다. 평균 30년에 한번은 풍수해가 들어서 모래 켜가 상당히 높게 쌓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분석하면 조선조 600년의 기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왕조실록에 기록이 잘 남아 있으니 서로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종로 청진동 발굴현장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 서울에도 폼페이가 있었네!”하고 감탄한다. 서울 600년의 모습이 현 지표에서 지하 4.5m 깊이까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곡차곡 문화층별로 쌓여있다. 해마다 여름에는 빗물을 따라 모래층이 쌓이고, 겨울이면 신발에 묻는 검은색 흙이 그 위에 더해져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졌다. 평균 30년에 한번은 풍수해가 들어서 모래 켜가 상당히 높게 쌓이기도 했다. 이것을 잘 분석하면 조선조 600년의 기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왕조실록에 기록이 잘 남아 있으니 서로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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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조선조는 우리에게 가까운 시대이고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기록 문화도 풍부하다. 또한 그 시대의 풍속을 기록했던 문집도 많이 발견되고 있고,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유물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울의 중심에서 조선 600년 역사를 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우선 서울 한양은 유구 보존을 위한 훌륭한 위치에 자리했다. 한양은 지금 을지로에서 인사동까지 지질펀펀한 늪지였다. 여기에 도읍지를 정한 태조는 한양의 대지 조성을 위해 힘든 토목공사를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선 개천(청계천)을 내서 물을 빼내고 물길을 조성하고 그것에 따라 도로와 대지를 조성했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도시계획과 토목공사는 무척 빠르게 진행되었고, 관공서와 높은 귀족들은 자기 편의에 맞게 적당히 자리를 차지해 살게 되었다. 이것을 원래의 도시계획도에 맞게 이미 시행된 토목공사를 고쳐가면서 도시설계를 바꿔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대체로 완성된 것은 세종, 늦게는 예종 때이며 이것이 완성된 때를 이름 그대로 성종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모습들을 우리는 종로 중심지 발굴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양은 낮은 지역이었기에 매년 지반이 올라왔고, 30년이면 큰물이 져서 건물을 다시 개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평균 100년이 되면 새롭게 건물을 신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때는 건물이 평균 50cm에서 거의 1m가까이 지반이 올라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지의 경계, 도로, 개울과 하수를 위한 도랑의 위치는 거의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도자기 기술은 세계적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도자기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특히 고려의 청자는 도자기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것이었지만, 조선조의 도자기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고려청자는 보기에 옥처럼 아름답지만 실용적이진 못했다. 우선 기벽이 얇아서 깨지기 쉬웠고, 굽는 과정에서 매 그릇마다 유약이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갑발을 씌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하자면 실용성에 비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따라서 청자는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관상용으로 쓰였고 실생활에서는 도기나 토기, 혹은 나무그릇을 썼던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던 중국 명나라에서는 실용자기로서 백자를 탄생시킨다. 태토가 백토이기 때문에 기벽을 훨씬 두껍게 만들 수 있었고 백색 유약을 칠하면 도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세밀하고 복잡한 도자기 제작기법은 우리나라 도자사를 100년 단위에서 50년 단위로까지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각 문화층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건축물은 대체로 수명이 100년 내외까지이고 100년이 넘으면,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건물들이 재개발처럼 한꺼번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한 집이 올라서면 그 옆집이 또 올라가고 하면서 600년을 올라간다. 물론 임진왜란처럼 종로 전체가 불에 휩싸여서 불탄 흙(토층)이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두 불에 휩싸였다고 했지만, 토층 상의 층위로는 임진란 때처럼 확실하지 않고 이집 저집 불이 났었구나 하고 읽힐 정도이다. 이 사이에 생산시기를 50년 단위로 구분할 수 있는 도자기가 박혀 있는 것인데, 토층과 도자기의 생산시기를 비교하면서 토층의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뿐, 이보다 더 세밀하게 시기를 구분할 수는 없다. 발굴자가 정확한 생활시기를 알기 위해 탄화된 숯의 탄소 년대를 현대의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해 보더라도 여전히 오차범위 안에서 일어난 일일 따름으로, 도자기에 의해 구분하는 토층과 그 토층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훨씬 정확했다. 토층에 대한 연구가 현대 과학에 의해 더욱 발달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이런 역사적 모습들을 우리는 종로 중심지 발굴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양은 낮은 지역이었기에 매년 지반이 올라왔고, 30년이면 큰물이 져서 건물을 다시 개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평균 100년이 되면 새롭게 건물을 신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때는 건물이 평균 50cm에서 거의 1m가까이 지반이 올라왔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지의 경계, 도로, 개울과 하수를 위한 도랑의 위치는 거의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도자기 기술은 세계적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도자기 역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특히 고려의 청자는 도자기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것이었지만, 조선조의 도자기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고려청자는 보기에 옥처럼 아름답지만 실용적이진 못했다. 우선 기벽이 얇아서 깨지기 쉬웠고, 굽는 과정에서 매 그릇마다 유약이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갑발을 씌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하자면 실용성에 비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따라서 청자는 자연스럽게 예술적인 관상용으로 쓰였고 실생활에서는 도기나 토기, 혹은 나무그릇을 썼던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던 중국 명나라에서는 실용자기로서 백자를 탄생시킨다. 태토가 백토이기 때문에 기벽을 훨씬 두껍게 만들 수 있었고 백색 유약을 칠하면 도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세밀하고 복잡한 도자기 제작기법은 우리나라 도자사를 100년 단위에서 50년 단위로까지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각 문화층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건축물은 대체로 수명이 100년 내외까지이고 100년이 넘으면, 그 위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건물들이 재개발처럼 한꺼번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한 집이 올라서면 그 옆집이 또 올라가고 하면서 600년을 올라간다. 물론 임진왜란처럼 종로 전체가 불에 휩싸여서 불탄 흙(토층)이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두 불에 휩싸였다고 했지만, 토층 상의 층위로는 임진란 때처럼 확실하지 않고 이집 저집 불이 났었구나 하고 읽힐 정도이다. 이 사이에 생산시기를 50년 단위로 구분할 수 있는 도자기가 박혀 있는 것인데, 토층과 도자기의 생산시기를 비교하면서 토층의 시기를 구분할 수 있을 뿐, 이보다 더 세밀하게 시기를 구분할 수는 없다. 발굴자가 정확한 생활시기를 알기 위해 탄화된 숯의 탄소 년대를 현대의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해 보더라도 여전히 오차범위 안에서 일어난 일일 따름으로, 도자기에 의해 구분하는 토층과 그 토층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훨씬 정확했다. 토층에 대한 연구가 현대 과학에 의해 더욱 발달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목차
목차
1. 한성부의 도시계획
1.1. 조선의 역사를 땅속에서 찾다
1.2. 종로 약사
1.3. 한성의 공간 계획
1.4. 한성의 분수(分數) 계획
1.5. 부방계획
1.6. 동계의 변천과 우물
2. 서울의 중심, 보신각과 의금부, 운종가
2.1. 서울의 중심, 보신각과 의금부
2.2. 개천과 도로 등 토목공사
2.3. 운종가와 겹으로 배치된 육의전 행장(市廛行廊)의 변천
2.4. 이문(里門)과 여(閭)의 변천
2.5. 종로1가 39번지의 건물지
2.6. 대지의 변천: 조선조 지적도 찾기
2.7. 기타 여러 유적의 변화
2.7.1. 구들시설(안방과 건넌방)
2.7.2. 마루와 광(건넌방)
2.7.3. 마당과 봉당(안마당) 시설물
2.7.4. 누마루 역할과 시설 변화
2.7.5. 우물의 역할과 변천
3. 문화층위의 변화
3.1. 토층과 문화층이란 무엇인가?
3.2. 조선조 운종가의 문화층위
3.3. 문화층 별 집자리와 간살의 변화
3.3.1. 제1문화층(20세기) 유적의 특징
3.3.2. 제2문화층(19세기 후반) 유적의 특징
3.3.3. 제3문화층(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4. 제4문화층(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5. 제5문화층(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6. 제6문화층(15세기~16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4. 서울의 중심 청진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4.1. 종로1가 시전행랑(제5문화층 임진왜란 전)의 모습은?
4.2. 청진동 100, 101번지(제5문화층, 16세기)은 어떤 집인가?
4.3. 청진동 94번지, 95번지 일원(제5문화층)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4.4. 제5문화층 청진동 89번지(임진왜란 직전 16세기)는 왜 마루만 시설되었을까?
4.5. 의금부뒷길에는 왜 박석포장을 일부 했을까?
5. 중요 유물은 조선시기 어떤 의미를 지닐까?
5.1. 생활용품의 변화
5.1.1. 도자기의 변천
5.1.2. 청동 거울
5.1.3. 목제유물
5.1.4. 신발의 여러 가지
5.1.5. 여러 가지 포목
5.1.6. 20세기 생활용품
5.2. 장신구와 놀이기구의 변화
5.2.1. 장신구
5.2.2. 놀이기구
5.3. 의금부와 관련 있는 대장간과 무기류, 이름 모를 시신, 그리고 호패
5.3.1. 의금부
5.3.2. 대장간이 배치된 이유
5.3.3. 환도와 무기들
5.3.4. 부러진 고급 호패
5.4. 기타 고급 물건의 발굴
5.4.1. 완전히 갖춘 명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5.4.2. 많은 생활용품들
5.4.3. 수많은 돈
5.4.4. 금동향로
5.4.5. 수많은 동물 뼈
5.4.6. 여러 가지 얼굴들
5.4.7. 구멍이 뚫린 전돌
5.5. 유명한 건물
5.5.1. 옛 숙명여고 기숙사 건물
5.5.2. 청진동의 대명사 청진옥(청진동 해장국집)
5.5.3. 수많은 숙박시설과 술집들
6. 서울의 중심 청진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6.1. 600년의 생활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
6.2. 도자기의 변천은 100년~50년 단위로 시기(문화층)를 구분해 준다
6.3. 육의전의 변천과 피맛길의 발생
6.4. 보존 유구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1.1. 조선의 역사를 땅속에서 찾다
1.2. 종로 약사
1.3. 한성의 공간 계획
1.4. 한성의 분수(分數) 계획
1.5. 부방계획
1.6. 동계의 변천과 우물
2. 서울의 중심, 보신각과 의금부, 운종가
2.1. 서울의 중심, 보신각과 의금부
2.2. 개천과 도로 등 토목공사
2.3. 운종가와 겹으로 배치된 육의전 행장(市廛行廊)의 변천
2.4. 이문(里門)과 여(閭)의 변천
2.5. 종로1가 39번지의 건물지
2.6. 대지의 변천: 조선조 지적도 찾기
2.7. 기타 여러 유적의 변화
2.7.1. 구들시설(안방과 건넌방)
2.7.2. 마루와 광(건넌방)
2.7.3. 마당과 봉당(안마당) 시설물
2.7.4. 누마루 역할과 시설 변화
2.7.5. 우물의 역할과 변천
3. 문화층위의 변화
3.1. 토층과 문화층이란 무엇인가?
3.2. 조선조 운종가의 문화층위
3.3. 문화층 별 집자리와 간살의 변화
3.3.1. 제1문화층(20세기) 유적의 특징
3.3.2. 제2문화층(19세기 후반) 유적의 특징
3.3.3. 제3문화층(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4. 제4문화층(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5. 제5문화층(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3.3.6. 제6문화층(15세기~16세기 전반) 유적의 특징
4. 서울의 중심 청진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4.1. 종로1가 시전행랑(제5문화층 임진왜란 전)의 모습은?
4.2. 청진동 100, 101번지(제5문화층, 16세기)은 어떤 집인가?
4.3. 청진동 94번지, 95번지 일원(제5문화층)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4.4. 제5문화층 청진동 89번지(임진왜란 직전 16세기)는 왜 마루만 시설되었을까?
4.5. 의금부뒷길에는 왜 박석포장을 일부 했을까?
5. 중요 유물은 조선시기 어떤 의미를 지닐까?
5.1. 생활용품의 변화
5.1.1. 도자기의 변천
5.1.2. 청동 거울
5.1.3. 목제유물
5.1.4. 신발의 여러 가지
5.1.5. 여러 가지 포목
5.1.6. 20세기 생활용품
5.2. 장신구와 놀이기구의 변화
5.2.1. 장신구
5.2.2. 놀이기구
5.3. 의금부와 관련 있는 대장간과 무기류, 이름 모를 시신, 그리고 호패
5.3.1. 의금부
5.3.2. 대장간이 배치된 이유
5.3.3. 환도와 무기들
5.3.4. 부러진 고급 호패
5.4. 기타 고급 물건의 발굴
5.4.1. 완전히 갖춘 명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5.4.2. 많은 생활용품들
5.4.3. 수많은 돈
5.4.4. 금동향로
5.4.5. 수많은 동물 뼈
5.4.6. 여러 가지 얼굴들
5.4.7. 구멍이 뚫린 전돌
5.5. 유명한 건물
5.5.1. 옛 숙명여고 기숙사 건물
5.5.2. 청진동의 대명사 청진옥(청진동 해장국집)
5.5.3. 수많은 숙박시설과 술집들
6. 서울의 중심 청진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6.1. 600년의 생활사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
6.2. 도자기의 변천은 100년~50년 단위로 시기(문화층)를 구분해 준다
6.3. 육의전의 변천과 피맛길의 발생
6.4. 보존 유구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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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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