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영화 그리고 인문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인류의 미래적 지표를 인문학적으로 짚어보는 에세이집이다. 글쓰기 공동체 〈백년어서원〉의 회원들로 구성된 필자들은 과학기술 영화를 선정, 함께 관람한 후 그 인문적 주제와 방향성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과 글쓰기 수업 과정을 가졌다. 영화가 가진 감수성과 상상력이 글쓰기라는 행위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보다 실천적 성찰은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감성을 선사한다. 영화는 글쓰기를 통해 그 사유가 심화되며, 공존의 상상력으로 확장될 수 있다. 단편적인 토론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개인의 경험과 충분히 어우러진 시간과 공간의 발견은 우리에게 절실한 시대감각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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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해변에 가족인 듯 보이는 사람들이 물에 젖은 서로를 껴안고 있다. 숨 가쁜 호흡이 느껴지고, 동시에 안도가 전해진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 물에 빠진 아이들을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입주 가정부 클레오가 바다에 뛰어들어 구한 후의 장면이다. 나도 그들을 껴안고서 하나의 그림이 되어보는 상상을 했다. 포스터는 영화의 얼굴이다. 영화를 대신해줄 수 있는 한 컷, 저 장면에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2018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각본, 제작, 촬영까지 한 작품은 놀랍게도 흑백영화다. 온갖 색을 생략해버린 흑백은 사람을 단순화시킨다. 당시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흑백은 불안한 사회와 불안한 가정과 불안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또한 이 영화는 배경음악도 없다. 다만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옆집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개 짖는 소리, 해변의 파도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자 롱테이크로 클레오가 집 청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클레오는 일곱 식구로 구성된 중산층 가족의 입주 가정부다. 청소, 세탁, 집안 정리뿐 아니라 음식, 아이들의 등하교, 취침 기상까지 모두 그녀가 해낸다.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영화다. 그런데 그저 일상적인 어쩌면 너무나 평범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장면을 시작부터 길게 보여준다는 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평범이야말로 비범한 것 아니겠는가. 이 평범한 일상은 나의 일상을 불러왔다. 엄마가 해야 할 일들을 가정부가 대신 해낸다는 것이 잠시 부럽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누가 나 대신 내 일들을 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가끔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클레오의 입장이 되어 집안일을 함께 하는 느낌이었다. 클레오의 물은 더럽혀진 집을 씻어내며 오염된 것을 정결하게 씻어낸다. 물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씻어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는 멕시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1971년 6월 10일에 벌어진 '성체 축일 대학살' 사건이 배경이다. 정부 지원을 받은 우익무장단체 세력이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며 백여 명을 살해하는 사건, 정권이 극우 테러단체를 동원해 참정권 보장과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과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공격한 사건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빨래가 널린 옥상과 죽은 이들의 무덤, 손을 핥는 개들과 흉물스러운 동물 머리 박제와 같은 이질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죽을 뻔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은 채로 태어난 클레오의 아이, 상식적이지 않은 한 가장의 곡예 주차와 차를 긁고 망가뜨리는 아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한다면서 무도 정신을 강조했지만 육신의 정욕만을 채우고 임신한 여자 친구에게서 도망친 클레오의 남자 친구 페르민 등 영화는 생명과 소멸, 가정을 파괴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와 같이 불편한 현실들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런 시퀀스들이 영화의 메시지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움직임이 없는 장면들 속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들. 가장인 안토니오의 외도로 안주인인 소피아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힘의 상징인 남성의 폭력이 가정 안으로 들어온다. 평범한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두렵고 무서운 현실이 조용히 진행된다. 권력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도 힘없는 한 여성의 힘, 클레오의 헌신은 흔들리는 가정의 중심에 있고 영화의 중심에 있다. 〈로마〉에서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앵글들은 어떤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감독이 어릴 적 경험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 것이어서 오히려 서툴고, 엉성한 느낌이다. 감독 혼자서 각본, 제작, 촬영까지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잘 짜여진 것 같지 않아서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묘하기까지 하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감독이 카메라 포지션을 하나의 대상에게만 포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란 생각까지 들게 한다. 카메라 시선이 관객의 시선처럼 한 장면에 한 사람과 한 공간을 담지 않는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로마〉는 많은 움직임보다는 가만히 응시하는 앵글이 많다. 이는 영화 속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한다.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어 붙여놓은 느낌은 이처럼 감독의 경험을 관객의 경험으로 이끈다. 감독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특별했던 이야기 하나하나를 조명해보는 작업, 그렇게 감독의 기억에서 출발한 영화 〈로마〉는 과거를 떠올릴 때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화려하거나 감각적이지 않다. 지진, 산불, 학생 시위, 무력 진압 등 빠른 움직임과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영화 속 인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담담한 시선. 개똥 이야기도 그렇다. 영화 속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개똥 또한 매우 상징적이다. 이는 단지 클레오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원주민 피지배 계급의 가정부들의 일상과 그들의 처우를 상징한다. 성스러운 것을 더럽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그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성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부터 개똥을 치우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깨끗이 해야 할 것을, 치워야 할 것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가족인 개, 보리스도 클레오는 보살펴야 하는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인 보리스의 똥을 받아들이는데 가장인 안토니오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 남성은 권력과 권위를 갖춘 지배계층으로 묘사된다. 안토니오는 동물 머리 박제를 힘과 부의 상징으로, 자랑거리로 여긴다. 힘없는 것들을 짓밟은 비열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남성을 보여준다. 집 크기와 맞지 않는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서 바람을 피우는, 가족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남성은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가 개똥을 뭉개버리는 장면은 유독 길고 자세히 묘사되는데 내 눈엔 그 개똥이 바로 안토니오였다.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클레오'와 '소피아' 두 멕시코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로마〉는 1500만 달러라는 적은 예산으로 멕시코에서 멕시코인 스태프와 멕시코인 배우들만 데리고 만든 135분짜리 영화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주연과 조연을 나누지 않는 편이다. 인생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한 사람뿐이듯, 우리는 그 한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로마〉는 클레오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구성원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보살피면서 가족을 지켜내려고 한다. 그들 모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힘든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연대다. 가족의 연대, 한 가정의 평화는 공동체 연대, 사회의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 삶의 이야기 속에서 가벼운 존재는 없다. 이 영화는 감독을 길러준 입주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스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묵묵히 허무한 일상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가정부의 지극히 평범한 삶과 희생에 바치는 영화여서 더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비행기가 날아간다. 더러운 곳에서 정결한 곳으로, 억압과 폭력에서 자유로 날아가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고결한 일상에 대한 경외로 다가왔다. 〈로마〉는 이처럼 감독 개인의 은인에 대한 헌정, 남성 우월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 여성들의 근면에 대한 치하. 독재시대에 대한 비판, 생명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표현해낸다. 다소 무거운 메시지가 있지만 〈로마〉는 피보다 진한 정으로 뭉쳐지는 가족의 연대를 그리고 있어 해체되고 있는 요즘의 가족 문제의 단초를 보여준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한 여성의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낸 영화를 보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신정민, 「숭고한 삶에 바치는 헌화-〈로마〉」
목차
목차
미래를 여는 영화, 내일을 여는 글쓰기
신정민
숭고한 삶에 바치는 헌화-〈로마〉
나는 어디에 있는가-〈루시〉
이수경
현현하는 타자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그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루시〉, 〈컨택트〉
이미 세계가 있었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나의 문어 선생님〉
김묘재
내 자리는 어디인가-〈컨택트〉, 〈내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돈 룩 업〉, 〈루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기준을 다시 세우면-〈루시〉
클레오 누나와 영자 언니-〈로마〉
이경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루시〉
바람계곡, 생명의 공동체가 재건되길 소망하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벽(Wall)을 넘어서-〈월-E〉
목민정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그녀〉
나를 비추는 거울-〈나의 문어 선생님〉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로마〉
떠도는 영혼-〈트랜짓〉
허재원
이름 밖의 존재-〈나의 문어 선생님〉
'차이'를 넘어 '해방'으로-〈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언어의 환영-〈컨택트〉
윤미순
멈춘 바람, 생쥐는 살아있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지금은 사랑할 때-〈내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녀〉
흘수선, 그 경계를 넘다-〈나의 문어 선생님〉
박근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나의 문어 선생님〉
나의 희망 뇌 사용량-〈루시〉
유년의 기억 속 가정부 리보에 대한 추억-〈로마〉
김미경
우주, 상상력이 이끄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세계-〈콘택트〉
인생은 타이밍이다-〈트랜짓〉
과학이라는 종교-〈블레이드 러너 2049〉
일상은 계속된다-〈로마〉
백양휴
AI의 눈물, 몸이 없는 사랑-〈그녀〉
황선화
햇볕 반, 그늘 반-〈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숙연한 삶을 위하여-〈네버 렛 미 고〉
진미현
암흑 속에 반짝이는 C-빔-〈블레이드 러너〉
나를 봐줘-〈써로게이트〉
너에게 닿기를-〈그녀〉
김수우
믿는다는 것-〈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촉수 사유, 그 사랑의 힘을 위하여-〈월-E〉
진실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하여-〈돈 룩 업〉
우리가 본 영화
저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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