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왕이로소이다
마르크스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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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 실상, 마르크스에게 그 해답을 듣다!
『돈이 왕이로소이다』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배금주의 풍조가 그 어떤 시대보다 만연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사회과학자인 저자가 지닌 특별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하여 마르크스의 저작을 기반으로 한 그와 인터뷰 형식의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 개설서 또는 입문서로서 역할을 해준다.
『돈이 왕이로소이다』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배금주의 풍조가 그 어떤 시대보다 만연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사회과학자인 저자가 지닌 특별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하여 마르크스의 저작을 기반으로 한 그와 인터뷰 형식의 이 책은 마르크스 사상 개설서 또는 입문서로서 역할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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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온갖 부조리와 모순들이 들끓는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 실상에 대하여
선각자 마르크스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
자본주의 세계화는 이미 마르크스가 예측한 바 있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다다른 비극적 진행과정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예견'에 부합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심도 있고 과학적인 분석과 해석이 다급하게 필요한 상황에 서 있는 오늘,
우리는 마르크스가 죽기 전 해인 1882년 영국 런던에서 그를 만나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직접 듣게 된다.
이제, 심각한 위기의 시대, 마르크스의 날카롭고도 진실한 육성에 귀 기울이자.
[이 책의 번역 출판이 지닌 의미와 특징]
1. 한국어판 『나는 왕이로소이다: 마르크스와의 인터뷰』는 오늘의 한국사회 나아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배금주의拜金主義 풍조가 그 어떤 시대보다 만연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
2. 세월호 참사, 4대강 사업, 원전 사업 등 국가 차원의 대형 비리 스캔들에서 드러나듯이 과연 국민을 무시하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 즉 '근대 시민국가 시민정부'의 정체란 무엇인가, 또 그 한계는 무엇인가, 그 한계와 함께 근대 국가와 자본의 관계란 무엇인가 등 시민사회 전반에 대해 이 책은 정확한 시사점과 깊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3.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정치가, 운동가, 학자 및 여러 분야의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황政況상 접근이 쉽지 않았던 대학생 및 일반 지식 대중들에게 세계사 속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자 과학적 유물론의 아버지인 마르크스의 사상을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는 점. 한국 사회에서 제한적으로만 접근 가능한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시켜 주고,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엿보는 데에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준다는 점. 진보적 학자들조차 학술적으로도 제대로 해석하기가 어려운 마르크스의 사상의 전모를 이해시키기 위해,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뽑아내어, 이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
4. 서구의 마르크스 연구 분야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원전原典에 철저한 연구 및 저술 자세로 정평이 난 실력파 좌파학자로서, 아울러 문학적 상상력을 겸비한 스타일리스트적 저술가이기도 한 저자가 프랑스의 지식 대중을 위해 저술한 대중적인 마르크스 사상 개설서 또는 입문서로서, 한국의 지식 대중에게도 널리 공유하고 읽힐 만한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5. 사회과학자인 저자가 지닌 특별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하여, 이 책은 평소 접하기가 부담스럽던 마르크스 사상의 진수를 신선한 느낌을 가지고 편하게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즉, 마르크스가 죽기 1년 전인 1882년의 시점에서 마르크스와의 인터뷰 형식을 통하여, 마르크스를 알고자 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신선한 감각 속에서 부담 없는 독서로 안내한다는 점.
6. 이 책이 프랑스어로 쓰인 마르크스 사상의 대중적인 총체적 개설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역사적 내용들을 깊이 다루고 있는 '다소 부담스런 책'인 만큼, 한국의 독자 대중들이 쉽게 독해할 수 있도록 역주와 편집자주를 각주 형식으로 풍부하게 넣어 편하고도 원활한 독서를 돕고 있다는 점.
새롭게 읽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수!
마르크스가 직접 자기 생각을 말하다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았다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대되면서 스탈린적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조차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자본론Das Kapital』의 저자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들어 볼 때다. 마르크스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를 제대로 소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된 이 책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지배계급의 이익과 사람들의 무지가 맞아떨어져 마르크스의 사상은 한물갔다는 성급한 결론이 나오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가 세계로 뻗어갈수록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았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는 눈치채기 어려운 교묘한 형태의 새로운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그의 사상에 대한 비논리적인 생각과 인용이 판을 치고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참고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 속에서 얼마 안 되는 그 참고자료들마저도 실제로는 마르크스를 풍자하는 시선을 보이고 있다. 이들 자료들도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마르크스 사상을 왜곡하고 있다. 아니, 무지와 왜곡을 동시에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어느새 스탈린처럼 독재를 옹호하는 인물로 왜곡되었다. 더욱이 저명한 사상가들조차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글로 전하고 있다. 전체주의와도 같은 극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뒤섞거나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스탈린의 독재정치는 전혀 관계가 없고 추구하는 바도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가 인간 해방을 옹호했다면 스탈린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인민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혼동과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스탈린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개인과 집단의 해방을 주장하는 철학자였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인간과 인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아일랜드, 폴란드를 비롯한 아브라함 링컨과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 한 것이 그 증거다. 살아생전, 마르크스는 모든 형태의 독단과 개인숭배에 반대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사상을 이용해 경직된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년에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마르크스의 저서는 제대로 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갇혀 마르크스의 저서를 아예 읽지 않거나 읽는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자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미지의 걸작'인 셈이다. 마르크스의 저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부당함에 저항하는 용기를 충분히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20세기의 노동자 투쟁과 이에 따른 성과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신들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안겨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책속으로 추가
뤼즈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이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기술을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인간을 예속 상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같은 비인간적인 변화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마르크스 제조와 작업을 할 때 노동자는 기구를 이용합니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기계를 사용하죠. 하지만 실상 노동자는 기계가 하는 작업을 살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제조 작업에서 노동자들은 살아있는 기계의 부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제조 작업을 독립적으로 하고 노동자는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기계를 이용한 작업은 집중해서 살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대신 노동자는 근육을 다양하게 사용할 기회가 없어지고 육체와 정신을 작업 조건에 맞게 맞추어야 합니다. 기계로 일이 쉬워지면서 오히려 노동자에게는 고문입니다.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가 노동에 갖는 흥미를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뤼즈 그래서 자본과 결합한 기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고 있군요. 언제쯤 기계 파괴를 통한 분노가 격렬하게 표출될 것이라 보십니까?
마르크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미 산업 자본이 생겨날 때부터 대립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업 사회가 되면서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을 뿐입니다. 기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노동자가 기계를 작업 수단의 입장에서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계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자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노동자의 분노가 커지게 됩니다. 노동자가 기계 자체와 기계가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구분할 줄 알게 되어 생산수단으로서의 기계가 아니라 노동의 착취 수단으로 사용되는 기계를 비판하려면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노동자가 잉여 인간이 되어 자본가에게는 당장에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인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노동자는 기존의 제조업을 죽이는 기계 산업에 크게 분노해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본문 56-57쪽》
뤼즈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경제 발전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정당화하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마르크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희생시켜 부를 얻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 나라 안에서 어떻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켜 부를 얻는지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뤼즈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 부르주아 계급은 역사에서 매우 혁신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여기저기서 힘을 얻으면서 봉건적이며 가부장적인 시골 중심의 생활 방식을 무너뜨렸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적인 관계를 없앤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냉정한 계산적 이익, 배금주의를 자리 잡게 했습니다.
뤼즈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급은 그저 모든 것을 금전 관계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까?
마르크스 부르주아 계급은 종교적인 숭배, 기사도 정신 숭배, 소시민의 감상적 성격을 무너뜨리고 이기적인 계산을 탄생시켰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개인을 단순히 교환가치로 전락시키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부르주아 계급은 오직 자유무역이라는 하나의 자유만을 옹호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와 정치가 은밀한 착취를 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드러내놓고 뻔뻔스럽게 직접적인 착취를 합니다.
《본문 62-63쪽》
뤼즈 자본주의로 인해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말씀이 많이 와 닿습니다! 자본주의가 이 심각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시죠?
마르크스 생산, 교역,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적 방식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는 했습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막강한 생산방식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생산방식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사회는 마치 사악한 힘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 마법사와 닮았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산업과 무역의 역사는 노동자들이 근대적 생산관계, 소유관계에 반항하는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적 생산관계, 소유관계야말로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입니다.
뤼즈 통제 불가능하고 절제도, 이성도 없는 발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장 법칙들의 그 '잘난' 조항과 함께 두드러집니다. 지금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인민 주권에 반대하며 내세우는 것이 바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장 법칙들이죠. 부르주아 시스템의 주기적인 위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 상업적 위기가 좋은 예입니다. 상업적 위기가 발생하면 여러 위기를 극복해 왔던 부르주아 계급에게 위협이 됩니다. 그리고 상업적 위기가 발생하면 현존하는 생산물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만들어진 생산력의 상당 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됩니다.
뤼즈 풍요로운 사회가 오히려 생산된 부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다니 정말로 아이러니합니다. 여기에 이미 훼손된 자연은 고갈되고 있고 인간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언젠가 그 한계를 드러내 붕괴할 것이라 보십니까? 지금의 자본주의가 과연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마르크스 사회의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 문명과 부르주아의 소유관계를 발전시켜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산력이 너무 활발해 과도한 생산이 일어나면서 부르주아적 체계가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적 체계가 과다 생산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부르주아의 사유재산도 위협을 받게 됩니다.
《본문 76-78쪽》
뤼즈 우리 시대에서 가장 뚜렷한 모순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는 분명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이에 대해 용기 있게 비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산업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이전 시대에 생각지도 못했던 편리한 생활이 보장되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 말기 때의 공포를 능가하는 쇠퇴의 징후도 존재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모순투성이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노동량을 줄여주는 대신 노동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탄생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노동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부의 원천이 새롭게 발견되었지만 되려 새롭게 발견된 부의 원천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기술의 승리는 이루었지만 대신 윤리의 타락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뤼즈 정말로 탁월한 진단이십니다! 현대 사회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모순적인 면도 많이 생겨났다는 말씀이시죠. 이러한 모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르크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마찬가지로 인간도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어 가거나 야비해집니다. 제아무리 순수한 과학의 빛도 무지몽매한 상황에서는 밝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이 물질적인 능력에 지적인 능력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동시에 인간의 삶을 물질만능주의로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근대산업과 근대과학이 발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비참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생산력은 늘어나고 있지만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근대의 갈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근대의 기술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거나 산업이 엄청나게 진보하면 정치가 필연적으로 상당히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 82-84쪽》
뤼즈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착취로 인해 인간이 충분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이런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 문제 역시 제대로 안 다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마르크스 여성은 집단적 쾌락에서 먹잇감이자 도구로 이용되지만 남성은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이기적인 면을 보입니다. 이처럼 남녀 사이의 불평등은 심화됩니다. 남녀관계는 인간이 어느 정도 인간으로 대우를 받느냐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축소판이 바로 남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남녀관계는 곧 인간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준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인간관계를 상징하죠.
뤼즈 올랭프 드 구주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여성 시민의 해방이야말로 세계가 서둘러 이루어야 할 일로 보았고 선생님도 이와 뜻을 같이 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남녀관계를 보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한 푸리에와도 뜻을 같이 하고 계십니다.
마르크스 남녀관계를 통해 인간의 문화 수준을 전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유적類的 존재인지를 알아보려면 남녀관계가 어떤지를 보면 됩니다. 남녀관계는 인간과 인류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인간답게 살아가고 인간적인 본성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인간과 인류의 관계가 제대로 나타납니다.
《본문 174-175쪽》
뤼즈 소외라는 개념은 현재 확실하게 정의되어 있습니까?
마르크스 노동자가 노동에서 소외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은 단독으로도 살아가지만 현재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립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자신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인 다른 인간들과 그룹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데 이는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동물과도 어우러져 살게 되면 인간이 살 수 있는 자연 공간 역시 넓어집니다. […] 하지만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면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활동에도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노동이 인간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죠.
뤼즈 인간의 활동은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시군요. 환경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도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보이시는데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르크스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자연은 생존수단이자 생존활동의 도구로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자연은 인체 자체는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2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을 자신의 몸처럼 아껴서 언제나 소중히 가꾸는 일입니다. 인간의 육체 및 정신 활동은 자연과는 떼어 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과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 184-185쪽》
선각자 마르크스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다!
자본주의 세계화는 이미 마르크스가 예측한 바 있고
오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다다른 비극적 진행과정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예견'에 부합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심도 있고 과학적인 분석과 해석이 다급하게 필요한 상황에 서 있는 오늘,
우리는 마르크스가 죽기 전 해인 1882년 영국 런던에서 그를 만나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직접 듣게 된다.
이제, 심각한 위기의 시대, 마르크스의 날카롭고도 진실한 육성에 귀 기울이자.
[이 책의 번역 출판이 지닌 의미와 특징]
1. 한국어판 『나는 왕이로소이다: 마르크스와의 인터뷰』는 오늘의 한국사회 나아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배금주의拜金主義 풍조가 그 어떤 시대보다 만연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게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
2. 세월호 참사, 4대강 사업, 원전 사업 등 국가 차원의 대형 비리 스캔들에서 드러나듯이 과연 국민을 무시하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 즉 '근대 시민국가 시민정부'의 정체란 무엇인가, 또 그 한계는 무엇인가, 그 한계와 함께 근대 국가와 자본의 관계란 무엇인가 등 시민사회 전반에 대해 이 책은 정확한 시사점과 깊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3.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정치가, 운동가, 학자 및 여러 분야의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황政況상 접근이 쉽지 않았던 대학생 및 일반 지식 대중들에게 세계사 속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자 과학적 유물론의 아버지인 마르크스의 사상을 쉽고도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는 점. 한국 사회에서 제한적으로만 접근 가능한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시켜 주고,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엿보는 데에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준다는 점. 진보적 학자들조차 학술적으로도 제대로 해석하기가 어려운 마르크스의 사상의 전모를 이해시키기 위해,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뽑아내어, 이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
4. 서구의 마르크스 연구 분야에 있어서 마르크스의 원전原典에 철저한 연구 및 저술 자세로 정평이 난 실력파 좌파학자로서, 아울러 문학적 상상력을 겸비한 스타일리스트적 저술가이기도 한 저자가 프랑스의 지식 대중을 위해 저술한 대중적인 마르크스 사상 개설서 또는 입문서로서, 한국의 지식 대중에게도 널리 공유하고 읽힐 만한 내용과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
5. 사회과학자인 저자가 지닌 특별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하여, 이 책은 평소 접하기가 부담스럽던 마르크스 사상의 진수를 신선한 느낌을 가지고 편하게 마르크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즉, 마르크스가 죽기 1년 전인 1882년의 시점에서 마르크스와의 인터뷰 형식을 통하여, 마르크스를 알고자 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흥미롭고 신선한 감각 속에서 부담 없는 독서로 안내한다는 점.
6. 이 책이 프랑스어로 쓰인 마르크스 사상의 대중적인 총체적 개설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 책의 내용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역사적 내용들을 깊이 다루고 있는 '다소 부담스런 책'인 만큼, 한국의 독자 대중들이 쉽게 독해할 수 있도록 역주와 편집자주를 각주 형식으로 풍부하게 넣어 편하고도 원활한 독서를 돕고 있다는 점.
새롭게 읽는 마르크스 사상의 진수!
마르크스가 직접 자기 생각을 말하다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았다
자본주의가 세계로 확대되면서 스탈린적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조차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자본론Das Kapital』의 저자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들어 볼 때다. 마르크스의 의견에 무조건 동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를 제대로 소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된 이 책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지배계급의 이익과 사람들의 무지가 맞아떨어져 마르크스의 사상은 한물갔다는 성급한 결론이 나오고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가 세계로 뻗어갈수록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았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으며 자본주의 시스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혁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기준으로는 눈치채기 어려운 교묘한 형태의 새로운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그의 사상에 대한 비논리적인 생각과 인용이 판을 치고 있다. 더구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참고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 속에서 얼마 안 되는 그 참고자료들마저도 실제로는 마르크스를 풍자하는 시선을 보이고 있다. 이들 자료들도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마르크스 사상을 왜곡하고 있다. 아니, 무지와 왜곡을 동시에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는 어느새 스탈린처럼 독재를 옹호하는 인물로 왜곡되었다. 더욱이 저명한 사상가들조차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글로 전하고 있다. 전체주의와도 같은 극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뒤섞거나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스탈린의 독재정치는 전혀 관계가 없고 추구하는 바도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가 인간 해방을 옹호했다면 스탈린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인민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혼동과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스탈린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개인과 집단의 해방을 주장하는 철학자였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인간과 인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아일랜드, 폴란드를 비롯한 아브라함 링컨과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뜻을 같이 한 것이 그 증거다. 살아생전, 마르크스는 모든 형태의 독단과 개인숭배에 반대했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의 사상을 이용해 경직된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년에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
마르크스의 저서는 제대로 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갇혀 마르크스의 저서를 아예 읽지 않거나 읽는다 해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자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미지의 걸작'인 셈이다. 마르크스의 저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부당함에 저항하는 용기를 충분히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20세기의 노동자 투쟁과 이에 따른 성과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신들을 이해한 사람들에게 안겨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서
책속으로 추가
뤼즈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이 고된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기술을 이용해 이익을 극대화하고 인간을 예속 상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같은 비인간적인 변화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마르크스 제조와 작업을 할 때 노동자는 기구를 이용합니다. 공장에서 노동자는 기계를 사용하죠. 하지만 실상 노동자는 기계가 하는 작업을 살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제조 작업에서 노동자들은 살아있는 기계의 부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가 제조 작업을 독립적으로 하고 노동자는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기계를 이용한 작업은 집중해서 살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대신 노동자는 근육을 다양하게 사용할 기회가 없어지고 육체와 정신을 작업 조건에 맞게 맞추어야 합니다. 기계로 일이 쉬워지면서 오히려 노동자에게는 고문입니다.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가 노동에 갖는 흥미를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뤼즈 그래서 자본과 결합한 기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고 있군요. 언제쯤 기계 파괴를 통한 분노가 격렬하게 표출될 것이라 보십니까?
마르크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미 산업 자본이 생겨날 때부터 대립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업 사회가 되면서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을 뿐입니다. 기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노동자가 기계를 작업 수단의 입장에서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계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자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노동자의 분노가 커지게 됩니다. 노동자가 기계 자체와 기계가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을 구분할 줄 알게 되어 생산수단으로서의 기계가 아니라 노동의 착취 수단으로 사용되는 기계를 비판하려면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노동자가 잉여 인간이 되어 자본가에게는 당장에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인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노동자는 기존의 제조업을 죽이는 기계 산업에 크게 분노해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본문 56-57쪽》
뤼즈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경제 발전이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정당화하려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마르크스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희생시켜 부를 얻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놀랄 일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 나라 안에서 어떻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켜 부를 얻는지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뤼즈 자본주의 세계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 부르주아 계급은 역사에서 매우 혁신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여기저기서 힘을 얻으면서 봉건적이며 가부장적인 시골 중심의 생활 방식을 무너뜨렸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적인 관계를 없앤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냉정한 계산적 이익, 배금주의를 자리 잡게 했습니다.
뤼즈 그러니까 부르주아 계급은 그저 모든 것을 금전 관계로 만들었다는 의미입니까?
마르크스 부르주아 계급은 종교적인 숭배, 기사도 정신 숭배, 소시민의 감상적 성격을 무너뜨리고 이기적인 계산을 탄생시켰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개인을 단순히 교환가치로 전락시키면서 개인의 존엄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당연히 다양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부르주아 계급은 오직 자유무역이라는 하나의 자유만을 옹호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와 정치가 은밀한 착취를 했다면 부르주아 계급은 드러내놓고 뻔뻔스럽게 직접적인 착취를 합니다.
《본문 62-63쪽》
뤼즈 자본주의로 인해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말씀이 많이 와 닿습니다! 자본주의가 이 심각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미시죠?
마르크스 생산, 교역, 소유에 대한 부르주아적 방식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는 했습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는 막강한 생산방식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막강한 생산방식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사회는 마치 사악한 힘을 통제할 능력이 없어진 마법사와 닮았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산업과 무역의 역사는 노동자들이 근대적 생산관계, 소유관계에 반항하는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적 생산관계, 소유관계야말로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와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입니다.
뤼즈 통제 불가능하고 절제도, 이성도 없는 발전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장 법칙들의 그 '잘난' 조항과 함께 두드러집니다. 지금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인민 주권에 반대하며 내세우는 것이 바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장 법칙들이죠. 부르주아 시스템의 주기적인 위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 상업적 위기가 좋은 예입니다. 상업적 위기가 발생하면 여러 위기를 극복해 왔던 부르주아 계급에게 위협이 됩니다. 그리고 상업적 위기가 발생하면 현존하는 생산물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만들어진 생산력의 상당 부분이 주기적으로 파괴됩니다.
뤼즈 풍요로운 사회가 오히려 생산된 부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다니 정말로 아이러니합니다. 여기에 이미 훼손된 자연은 고갈되고 있고 인간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언젠가 그 한계를 드러내 붕괴할 것이라 보십니까? 지금의 자본주의가 과연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마르크스 사회의 생산력은 더 이상 부르주아 문명과 부르주아의 소유관계를 발전시켜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산력이 너무 활발해 과도한 생산이 일어나면서 부르주아적 체계가 방해물이 되고 있습니다. 부르주아적 체계가 과다 생산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결국 부르주아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부르주아의 사유재산도 위협을 받게 됩니다.
《본문 76-78쪽》
뤼즈 우리 시대에서 가장 뚜렷한 모순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는 분명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이에 대해 용기 있게 비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산업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이전 시대에 생각지도 못했던 편리한 생활이 보장되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 말기 때의 공포를 능가하는 쇠퇴의 징후도 존재합니다. 요즘 시대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모순투성이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노동량을 줄여주는 대신 노동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탄생한 기계가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노동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부의 원천이 새롭게 발견되었지만 되려 새롭게 발견된 부의 원천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기술의 승리는 이루었지만 대신 윤리의 타락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뤼즈 정말로 탁월한 진단이십니다! 현대 사회는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모순적인 면도 많이 생겨났다는 말씀이시죠. 이러한 모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르크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마찬가지로 인간도 지배하는 구조를 만들어 가거나 야비해집니다. 제아무리 순수한 과학의 빛도 무지몽매한 상황에서는 밝은 빛을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이 물질적인 능력에 지적인 능력을 안겨주기도 했으나 동시에 인간의 삶을 물질만능주의로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근대산업과 근대과학이 발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비참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생산력은 늘어나고 있지만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근대의 갈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근대의 기술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거나 산업이 엄청나게 진보하면 정치가 필연적으로 상당히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 82-84쪽》
뤼즈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착취로 인해 인간이 충분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이런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 문제 역시 제대로 안 다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마르크스 여성은 집단적 쾌락에서 먹잇감이자 도구로 이용되지만 남성은 이러한 불평등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이기적인 면을 보입니다. 이처럼 남녀 사이의 불평등은 심화됩니다. 남녀관계는 인간이 어느 정도 인간으로 대우를 받느냐를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축소판이 바로 남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남녀관계는 곧 인간관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준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인간관계를 상징하죠.
뤼즈 올랭프 드 구주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여성 시민의 해방이야말로 세계가 서둘러 이루어야 할 일로 보았고 선생님도 이와 뜻을 같이 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남녀관계를 보면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한 푸리에와도 뜻을 같이 하고 계십니다.
마르크스 남녀관계를 통해 인간의 문화 수준을 전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유적類的 존재인지를 알아보려면 남녀관계가 어떤지를 보면 됩니다. 남녀관계는 인간과 인류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인간답게 살아가고 인간적인 본성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인간과 인류의 관계가 제대로 나타납니다.
《본문 174-175쪽》
뤼즈 소외라는 개념은 현재 확실하게 정의되어 있습니까?
마르크스 노동자가 노동에서 소외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은 단독으로도 살아가지만 현재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립니다. 인간은 개인적인 자신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인 다른 인간들과 그룹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데 이는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동물과도 어우러져 살게 되면 인간이 살 수 있는 자연 공간 역시 넓어집니다. […] 하지만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면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활동에도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노동이 인간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죠.
뤼즈 인간의 활동은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시군요. 환경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도 존중해야 한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보이시는데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마르크스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자연은 생존수단이자 생존활동의 도구로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자연은 인체 자체는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2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을 자신의 몸처럼 아껴서 언제나 소중히 가꾸는 일입니다. 인간의 육체 및 정신 활동은 자연과는 떼어 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과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 184-185쪽》
목차
목차
프롤로그
불어판 편집자 노트
첫번째 인터뷰?돈이 왕이로소이다
두번째 인터뷰?해방
세번째 인터뷰?급진적 인본주의
에필로그
주석
감사의 글
칼 마르크스 연보
옮긴이의 말
불어판 편집자 노트
첫번째 인터뷰?돈이 왕이로소이다
두번째 인터뷰?해방
세번째 인터뷰?급진적 인본주의
에필로그
주석
감사의 글
칼 마르크스 연보
옮긴이의 말
저자
저자
앙리 페나 뤼즈
저자 앙리 페나 뤼즈 Henri Pena-Ruiz는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파리 정치대학 교수인 앙리 페나 뤼즈는 좌파 사상가로 활동하면서 특별히 정교분리, 사회정의, 연대정신에 대한 문제를 연구해오고 있다. 그는 또한 철학의 근간을 이룬 대표적인 신화와 전설들에 관심이 많아 그 주제를 다룬 『세계라는 소설Le Roman du monde』(2001)과 『영원한 이야기Histoires de toujours』(2008)를 썼다. 그 외에도 『어쨌든 마르크스Marx quand m?me』(2012) 등이 있으며 좌파 철학의 기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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