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연기법
정광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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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모의 신작 장편 『어둠의 연기법』은 주인공인 화성 연쇄살인범 ‘나’(두 건의 살인만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가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는 장면에서 소설을 시작함으로써 선행 텍스트의 영향을 아예 인물 내부로 던져 넣는다. 일종의 정면돌파라 할 만한데, 역설적으로 참신한 소설적 상상의 입구를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 「살인의 추억」은 단순히 현실 사건의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외부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내부로 접혀 들어가서 현실 사건에 포함되고 그것을 사후적으로 재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선택은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은 말 그대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구성적 외부이기도 한 것이다. 다른 한편, 영화가 개봉했을 때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진범 이춘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어둠의 연기법』은 사건의 실재에 대한 독자적인 서사와 상상을 여투어둔 채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소설에서는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나’와는 별개로 화성에서 훨씬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도광수라는 존재를 상정한다. 그리고 ‘나’와 도광수의 조우를 특별한 서사적 사건으로 준비하여, 이로부터 악에 대한 ‘나’의 자기기만적 억견과 망상이 자라 나오게 만든다. ‘나’가 자신의 살인을 다룬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영화와 연기의 세계로 뛰어드는 이야기가 『어둠의 연기법』의 중심 서사를 이루고 있다면, ‘나’와 도광수의 이야기는 악에 대한 질문과 탐구라는 소설의 또 다른 목표를 향한 내밀하고 심층적인 출발점이 되고 있다.
『어둠의 연기법』이 영화 「살인의 추억」과 맺고 있는 상호텍스트성은 현실과 허구 양쪽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나’를 연기자의 세계에 투신하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과 허구를 잇는 소설적 뫼비우스의 띠를 중층화하고 정교화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연기는 실재하는 몸으로 현실과 허구를 동시에 사는 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허문비와의 격렬한 격투 신(scene)은 핍진한 연기의 앙상블을 구현하는 시간이면서, 악의 처벌과 응징이 실현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10쪽 넘게 이어지는 격투 신의 묘사에 작가는 특별한 공을 들이는데, 바로 이곳이 소설의 절정이자 정수라는 사실을 힘주어 보여주고자 한다.
『어둠의 연기법』이 영화 「살인의 추억」과 맺고 있는 상호텍스트성은 현실과 허구 양쪽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나’를 연기자의 세계에 투신하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과 허구를 잇는 소설적 뫼비우스의 띠를 중층화하고 정교화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연기는 실재하는 몸으로 현실과 허구를 동시에 사는 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허문비와의 격렬한 격투 신(scene)은 핍진한 연기의 앙상블을 구현하는 시간이면서, 악의 처벌과 응징이 실현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10쪽 넘게 이어지는 격투 신의 묘사에 작가는 특별한 공을 들이는데, 바로 이곳이 소설의 절정이자 정수라는 사실을 힘주어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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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허문비가 주먹을 내 턱에 꽂아 넣는다. 이가 부서진다. 연이은 강타에 내 무릎이 풀린다. 허문비는 이제 마음껏 나를 공격한다. 나는 무너져 내린다. 카메라 두 대가 동시에 클로즈업으로 나를 잡고 있다. (……) 허문비 뒤에 둘러서 있던 유령들이(화성에서 살해된 피해자들-인용자)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안다. 저것들이 나를 끌고 지옥으로 내려가리라는 것을. 거기 들어서면 쓰던 글도, 희망도 버려야겠지. 모로 쓰러진 내 사지가 웅크려들고 몸이 오그라지고 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경련이 내 몸을 지나갔다.(177?178쪽)
그런데 이것은 '나'의 진정한 자기 처벌일 수 있는가. 아무리 실제에 방불한들, 연기는 끝내 연기일 수밖에 없지 않나. 허문비의 언니 역시 잔혹한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에서 '나'에 대한 처벌과 응징의 당위성이 주어질 수는 있다. 소설에는 '나'가 허문비를 폭행하려다(허문비에 대한 '나'의 욕망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으로 나타난다) 거꾸로 제압당해 과거의 살인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온다. 여러모로 허문비는 '나'가 수행하는 자기 처벌의 대리 심판자-수행자로 등장하는데, 처벌이 연기의 프레임 안에 있는 한 상징적인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도광수보다 '착한'(그러니까 덜 악한) 인간이라고 여기는데, 이유는 도광수에 비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횟수가 적기 때문이다. '나'는 사유의 능력도 없지만, 용기도 없다. 기실 '나'의 악은 알통(어린 '나'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한 '가짜 아비')의 악을 모방하는 가운데 자라났고, 악에 대한 생각과 상상 역시 그러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나'가 살인을 연기하는 영화에 매혹을 느끼고, 연기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나'의 연기는 시뮬라크르의 자리에서 진리 과정을 모방할 뿐이다. 그런 한에서 '나'가 연기를 통해 찾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추상적인 가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다른 나'의 발견은 '죽음을 향한 존재', 즉 생물적 종으로서의 '인간-동물'의 자리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불사의 존재'로, '인간'으로 상상하고 주체화해나가려는 충실성의 시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선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진리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삶의 잔혹한 결백성만이 존재할 뿐이다."(같은 책, 76쪽) 진리 과정, 선을 사유하지 못하는 '나'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시뮬라크르의 시간일 뿐이다.
허문비의 역할은 정확히 이러한 '나'의 실패를 증언하고, '나'가 만들어낸 망상으로서의 '악의 기원'에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다. '나'의 살인의 고백이 허문비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광모의 장편 『어둠의 연기법』은 '살인자가 자신의 살인을 다룬 영화를 본다'는 상상에서 출발해 살인자의 혼돈스러운 내면을 다각도로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연쇄살인 사건과 선행 텍스트 「살인의 추억」의 존재는 흥미로운 변용을 거치며 인물을 영화와 연기의 세계로 이끈다. 연기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우고, '또 다른 나'를 사는 가능성으로 부상한다. 소설은 여기서 참회와 구원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하나, 악의 무지에 사로잡힌 인물은 끝내 길을 찾지 못한다. 이 간극, 아이러니가 『어둠의 연기법』을 역설적으로 악에 대한 질문과 사유로 이끈다. 소설에서 제시된 악의 무사유는 반드시 '나'란 인물만의 무능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선을 사유할 수 있는가. 선 혹은 진리의 과정에 우리를 던져 넣는 충실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연기하는 '또 다른 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최초의 사건으로 만드는 '주체화'의 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동물'의 자리를 거절하고, '불사의 존재'로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괴롭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허문비의 심문과 타격은 그 물음이 개시되는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진정한 자기 처벌일 수 있는가. 아무리 실제에 방불한들, 연기는 끝내 연기일 수밖에 없지 않나. 허문비의 언니 역시 잔혹한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에서 '나'에 대한 처벌과 응징의 당위성이 주어질 수는 있다. 소설에는 '나'가 허문비를 폭행하려다(허문비에 대한 '나'의 욕망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혼란스러운 뒤섞임으로 나타난다) 거꾸로 제압당해 과거의 살인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온다. 여러모로 허문비는 '나'가 수행하는 자기 처벌의 대리 심판자-수행자로 등장하는데, 처벌이 연기의 프레임 안에 있는 한 상징적인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도광수보다 '착한'(그러니까 덜 악한) 인간이라고 여기는데, 이유는 도광수에 비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횟수가 적기 때문이다. '나'는 사유의 능력도 없지만, 용기도 없다. 기실 '나'의 악은 알통(어린 '나'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한 '가짜 아비')의 악을 모방하는 가운데 자라났고, 악에 대한 생각과 상상 역시 그러했다. 사정이 그렇다면, '나'가 살인을 연기하는 영화에 매혹을 느끼고, 연기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나'의 연기는 시뮬라크르의 자리에서 진리 과정을 모방할 뿐이다. 그런 한에서 '나'가 연기를 통해 찾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추상적인 가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다른 나'의 발견은 '죽음을 향한 존재', 즉 생물적 종으로서의 '인간-동물'의 자리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불사의 존재'로, '인간'으로 상상하고 주체화해나가려는 충실성의 시간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악이 존재한다면 악은 선으로부터 사고되어야 한다. 선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즉 진리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면 선과 악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삶의 잔혹한 결백성만이 존재할 뿐이다."(같은 책, 76쪽) 진리 과정, 선을 사유하지 못하는 '나'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시뮬라크르의 시간일 뿐이다.
허문비의 역할은 정확히 이러한 '나'의 실패를 증언하고, '나'가 만들어낸 망상으로서의 '악의 기원'에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다. '나'의 살인의 고백이 허문비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광모의 장편 『어둠의 연기법』은 '살인자가 자신의 살인을 다룬 영화를 본다'는 상상에서 출발해 살인자의 혼돈스러운 내면을 다각도로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연쇄살인 사건과 선행 텍스트 「살인의 추억」의 존재는 흥미로운 변용을 거치며 인물을 영화와 연기의 세계로 이끈다. 연기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우고, '또 다른 나'를 사는 가능성으로 부상한다. 소설은 여기서 참회와 구원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하나, 악의 무지에 사로잡힌 인물은 끝내 길을 찾지 못한다. 이 간극, 아이러니가 『어둠의 연기법』을 역설적으로 악에 대한 질문과 사유로 이끈다. 소설에서 제시된 악의 무사유는 반드시 '나'란 인물만의 무능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선을 사유할 수 있는가. 선 혹은 진리의 과정에 우리를 던져 넣는 충실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연기하는 '또 다른 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최초의 사건으로 만드는 '주체화'의 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동물'의 자리를 거절하고, '불사의 존재'로 인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괴롭지만, 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허문비의 심문과 타격은 그 물음이 개시되는 자리일 것이다.
목차
목차
어둠의 연기법
해설 | 선 혹은 진리는 연기할 수 있는가 _정홍수
작가의 말
해설 | 선 혹은 진리는 연기할 수 있는가 _정홍수
작가의 말
저자
저자
정광모
부산 출생. 2010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작화증 사내』 『존슨 기억 판매회사』 『나는 장성택입니다』 『콜트 45』, 장편소설로 『토스쿠』 『마지막 감식』 『유토피아로 가는 네번째 방법』, 서평집으로 『작가의 드론 독서』(1, 2, 3)가 있다. 2015년과 2020년에 아르코창작기금을 받았고, 제13회 부산작가상과 제24회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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