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보다 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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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아홉보다 더 많은」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온 순애라는 여성의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다. 우리는 탈북민 여성이 지나가고 있는 힘겨운 시간의 이야기를 그녀의 시선, 목소리로 전달받는다. 순애는 탈북 이후 하나원에서 방과 후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동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의 이야기가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아픈 상념들과 교차하며 펼쳐진다.
탈북민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이해자라 할 수 있는 동료 교사 J, 경미를 통해 전해지고 그에 대한 순애의 반응과 내심이 미묘한 지점까지 드러난다. 특히 순애가 J에게 두는 경계심은 J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커지는데, 특별히 영문 이니셜로 표기된 이 인물이 얼마간 작가의 분신일 수 있다는 점에서 탈북민 이야기를 써나가는 소설가 정영선의 자기 점검, 자기 성찰을 독자도 자연스레 겹쳐 보게 된다.
나이도 한 살 적은 J가 순애를 '언니'라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순애는 "마음의 울타리를 촘촘히 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쓸 만한 이야깃거리를 얻으려는 수작이란 게 훤히 보였"(19쪽)기 때문이다. '쓸 만한 이야깃거리'라는 말은 신랄하다.
소설집의 또 다른 탈북 여성 이야기 「무연고 시간」에서 연변에서 낳은 여섯 살 동명을 동생으로 숨기며 키우고 있는 '서원'은 탈북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라오스 땅에서 절규하듯 바닥의 마음을 토해낸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내 몸에 새겨진 이야기로 나를 구별하지 않는 곳, 더 이상 적응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175쪽) 세상의 살아 있는 아픔을 한쪽에 두고 소설의 '이야기'가 얼마나 세심하게 발굴되고 구축되어야 하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을 깊이 의식하면서 정영선의 소설은 탈북민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 순애의 시선도 자기중심적이다. 순애는 음식을 가리는 J를 못마땅해하며 "일주일만 굶기면 밥그릇 밑바닥까지 훑어 먹을 인간들이……"(18쪽)라는 생각을 숨기지 못한다. 허물어야 할 편견은 남쪽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기 위해 순애가 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식당에서 한국말이 서툰 종업원에게 J가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있을 수 있는 관심을 내보일 때, 그런 질문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순애만이 곧장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J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지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게 마련이다. 순애의 휴가 턱으로 마련된 세 사람의 저녁 자리가 순애와 J, 둘만의 이차 자리로 이어지는 가운데 소설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시간에서조차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순애의 날 선 속내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사회적 낙인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탈북민 순애의 불안과 고립감은 하나원 교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만으로는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가 누구든」 「묵은 유자차」 「습기 차는 방」 「고관 입구」 등 소설집 속 다른 네 편은 탈북민의 존재를 세상의 일반적인 좌표 위에, 그러니까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멀찍이 떨어뜨려둔 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교차하고 틈입하는 순간을 찾는다. 가령 「아버지가 누구든」은 아버지 없이 자란 '현정'이란 여성의 이야기인데, 어머니의 침묵과 주변의 소문 사이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아이의 시선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딸을 키우며 혼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어머니는 한국 문학사에 잘 알려진 여성 계보를 환기한다. 종종 '무성(無性)'의 존재처럼 그려지는 그 '억척 어멈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 현정의 시선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잠깐씩 출몰했던 어머니의 남자들에 대한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노년의 어머니가 세탁 후 챙기지 못한 고급스런 속옷의 디테일을 전하는 가운데 정영선의 소설은 부재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방에는 북한 소식을 전하는 '남북의 창'이 자주 켜져 있었고, '새터민 생활안내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조금은 이르게 실버타운으로 들어간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같은 실버타운에 여생을 함께할 '남자'가 있고,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다.
「습기 차는 방」은 7평 반지하 원룸에서 사는 대학생 명준의 이야기다. 휴학과 아르바이트로 대학 생활을 기약 없이 연장해가는 모습은 익숙하다. 아버지 없는 집안 형편이나 엄마의 요란한 연애는 그다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명준의 관심은 편의점 알바 동료인 대학생 '지은'이다. 학교 강의를 몰아서 듣고 교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편의점에 도착하는 지은과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잠깐의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소설은 명준의 반지하 원룸과 편의점에 대한 미시적 관찰을 통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통과하고 있는 삶의 속내를 실감 나게 전한다. '지은'이 종우의 전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명준은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지은이 북한에서 왔다.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건넜다는데 난 좀 부담스럽더라"(115쪽)라는 종우의 뒤늦은 문자는 명준을 흔들지 못한다. 지은이 가고 싶은 여행지가 메콩강이라는, 그전에 지나가듯 던진 종우의 말이 맥락을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정영선 소설의 중요한 관심사다. 「고관 입구」는 그 시간들이 착잡하게 얽혀 있는 부산의 왜관, 유엔묘지, 비석마을 등의 장소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을 횡단하는 역사의 기억으로 다가간다. 소설 화자 '나'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적기'(아카사키赤崎. 지금의 감만동)에서 유엔군 시신 수습 일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미군 부대 군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다. 아버지에게 유엔군은 대한민국의 절대적 은인이며, 노년의 유엔숭모회 활동은 자연스럽다. 작은아버지는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 탈북민 여성 '강 주임'이 근무하고 있다. 강 주임의 부친은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였다. "비석마을이란 데 가보고 싶어요. 저의 아버지 고향도 부산인데, 해방 뒤 오사카에서 사시다 북송선을 타셨어요. 북에서 돌아가시고……"(143쪽) 강 주임의 가족사는 한국 현대사와 이어진 이중 삼중의 디아스포라라 할 만하다. 그리고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유엔묘지, 비석마을, 왜관은 역사와 교차하는 개인의 기억을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마음의 길을 내지만, 지금 당장 강 주임처럼 그 길조차 끊어져버린 사람도 있다. 분단은 어떤 이들에게 기억의 영토까지 앗아가는 현재의 장벽이다.
「묵은 유자차」는 오십대 중년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된 선심이라는 여성을 통해 옛사랑의 씁쓸한 기억을 반추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여고 시절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영우는 지금 군수가 되어 고향에 내려와 있는데, 친자매처럼 지내온 육촌 여동생 명혜의 사랑이기도 했다. 명혜는 결혼 이후까지 영우와의 관계를 놓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꽤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에 오른 남편이나 의대생이 된 아들을 떠나 지금은 '노래 부르는 남자'와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같이 산다는 명혜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캐어 묻고 싶은 여성 인물이다. 선심에 따르면 그녀는 노래로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그러나 소설은 소소한 곡절 너머 좀 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선심의 개업 빵집으로 영우가 찾아온 뒤, 착잡한 기억의 습격 속에서 그녀가 찾는 곳은 인근 내곡리 바닷가 마을에 혼자 사는 숙모, 명혜 어머니의 집이다. '묵은 유자차'의 향이 감도는 어둑신한 방에서 선심은 원산이 고향인 숙모의 이산(離散) 이야기를 듣는다. 두 살 때 엄마 등에 업혀 잠시 서울에 들렀는데, 38선이 생기면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군수가 된 영우가 숙모의 이산 이야기 속에 다시 등장한다. '통일마을'을 조성하려고 하는 영우는 숙모를 그 사업에 참여시키려 하고, 직접 내곡리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통일마을은 아마도 정치나 관광의 영역이 되기 쉬울 것이다. 정영선의 소설은 다시 한번 아주 미세한 지점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발굴한다. 숙모의 장례식장 모습을 전하며 소설은 끝난다. "누구도 숙모가 두 살 때 헤어진 언니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군수는 오지 않았다."(90쪽) 분단과 이산, 혹은 탈북민의 아픔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세상의 아픔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영선의 소설은 잠시 달아오르는 몸의 '열'을 통해 그 질문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북민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이해자라 할 수 있는 동료 교사 J, 경미를 통해 전해지고 그에 대한 순애의 반응과 내심이 미묘한 지점까지 드러난다. 특히 순애가 J에게 두는 경계심은 J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커지는데, 특별히 영문 이니셜로 표기된 이 인물이 얼마간 작가의 분신일 수 있다는 점에서 탈북민 이야기를 써나가는 소설가 정영선의 자기 점검, 자기 성찰을 독자도 자연스레 겹쳐 보게 된다.
나이도 한 살 적은 J가 순애를 '언니'라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순애는 "마음의 울타리를 촘촘히 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쓸 만한 이야깃거리를 얻으려는 수작이란 게 훤히 보였"(19쪽)기 때문이다. '쓸 만한 이야깃거리'라는 말은 신랄하다.
소설집의 또 다른 탈북 여성 이야기 「무연고 시간」에서 연변에서 낳은 여섯 살 동명을 동생으로 숨기며 키우고 있는 '서원'은 탈북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라오스 땅에서 절규하듯 바닥의 마음을 토해낸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내 몸에 새겨진 이야기로 나를 구별하지 않는 곳, 더 이상 적응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175쪽) 세상의 살아 있는 아픔을 한쪽에 두고 소설의 '이야기'가 얼마나 세심하게 발굴되고 구축되어야 하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을 깊이 의식하면서 정영선의 소설은 탈북민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 있다. 순애의 시선도 자기중심적이다. 순애는 음식을 가리는 J를 못마땅해하며 "일주일만 굶기면 밥그릇 밑바닥까지 훑어 먹을 인간들이……"(18쪽)라는 생각을 숨기지 못한다. 허물어야 할 편견은 남쪽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기 위해 순애가 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식당에서 한국말이 서툰 종업원에게 J가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있을 수 있는 관심을 내보일 때, 그런 질문이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순애만이 곧장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J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지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게 마련이다. 순애의 휴가 턱으로 마련된 세 사람의 저녁 자리가 순애와 J, 둘만의 이차 자리로 이어지는 가운데 소설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시간에서조차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순애의 날 선 속내를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사회적 낙인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탈북민 순애의 불안과 고립감은 하나원 교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만으로는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가 누구든」 「묵은 유자차」 「습기 차는 방」 「고관 입구」 등 소설집 속 다른 네 편은 탈북민의 존재를 세상의 일반적인 좌표 위에, 그러니까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멀찍이 떨어뜨려둔 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교차하고 틈입하는 순간을 찾는다. 가령 「아버지가 누구든」은 아버지 없이 자란 '현정'이란 여성의 이야기인데, 어머니의 침묵과 주변의 소문 사이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상상하는 아이의 시선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딸을 키우며 혼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어머니는 한국 문학사에 잘 알려진 여성 계보를 환기한다. 종종 '무성(無性)'의 존재처럼 그려지는 그 '억척 어멈들'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 현정의 시선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잠깐씩 출몰했던 어머니의 남자들에 대한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노년의 어머니가 세탁 후 챙기지 못한 고급스런 속옷의 디테일을 전하는 가운데 정영선의 소설은 부재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방에는 북한 소식을 전하는 '남북의 창'이 자주 켜져 있었고, '새터민 생활안내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조금은 이르게 실버타운으로 들어간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같은 실버타운에 여생을 함께할 '남자'가 있고,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게 밝혀진다.
「습기 차는 방」은 7평 반지하 원룸에서 사는 대학생 명준의 이야기다. 휴학과 아르바이트로 대학 생활을 기약 없이 연장해가는 모습은 익숙하다. 아버지 없는 집안 형편이나 엄마의 요란한 연애는 그다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명준의 관심은 편의점 알바 동료인 대학생 '지은'이다. 학교 강의를 몰아서 듣고 교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편의점에 도착하는 지은과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잠깐의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소설은 명준의 반지하 원룸과 편의점에 대한 미시적 관찰을 통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통과하고 있는 삶의 속내를 실감 나게 전한다. '지은'이 종우의 전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명준은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지은이 북한에서 왔다.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건넜다는데 난 좀 부담스럽더라"(115쪽)라는 종우의 뒤늦은 문자는 명준을 흔들지 못한다. 지은이 가고 싶은 여행지가 메콩강이라는, 그전에 지나가듯 던진 종우의 말이 맥락을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정영선 소설의 중요한 관심사다. 「고관 입구」는 그 시간들이 착잡하게 얽혀 있는 부산의 왜관, 유엔묘지, 비석마을 등의 장소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을 횡단하는 역사의 기억으로 다가간다. 소설 화자 '나'의 아버지는 전쟁 중에 '적기'(아카사키赤崎. 지금의 감만동)에서 유엔군 시신 수습 일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미군 부대 군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한 이다. 아버지에게 유엔군은 대한민국의 절대적 은인이며, 노년의 유엔숭모회 활동은 자연스럽다. 작은아버지는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 탈북민 여성 '강 주임'이 근무하고 있다. 강 주임의 부친은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였다. "비석마을이란 데 가보고 싶어요. 저의 아버지 고향도 부산인데, 해방 뒤 오사카에서 사시다 북송선을 타셨어요. 북에서 돌아가시고……"(143쪽) 강 주임의 가족사는 한국 현대사와 이어진 이중 삼중의 디아스포라라 할 만하다. 그리고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유엔묘지, 비석마을, 왜관은 역사와 교차하는 개인의 기억을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마음의 길을 내지만, 지금 당장 강 주임처럼 그 길조차 끊어져버린 사람도 있다. 분단은 어떤 이들에게 기억의 영토까지 앗아가는 현재의 장벽이다.
「묵은 유자차」는 오십대 중년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와 살게 된 선심이라는 여성을 통해 옛사랑의 씁쓸한 기억을 반추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여고 시절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영우는 지금 군수가 되어 고향에 내려와 있는데, 친자매처럼 지내온 육촌 여동생 명혜의 사랑이기도 했다. 명혜는 결혼 이후까지 영우와의 관계를 놓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딱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꽤 안정적인 사회적 지위에 오른 남편이나 의대생이 된 아들을 떠나 지금은 '노래 부르는 남자'와 혼인 신고도 하지 않고 같이 산다는 명혜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캐어 묻고 싶은 여성 인물이다. 선심에 따르면 그녀는 노래로 잘하고 글도 잘 쓴다. 그러나 소설은 소소한 곡절 너머 좀 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선심의 개업 빵집으로 영우가 찾아온 뒤, 착잡한 기억의 습격 속에서 그녀가 찾는 곳은 인근 내곡리 바닷가 마을에 혼자 사는 숙모, 명혜 어머니의 집이다. '묵은 유자차'의 향이 감도는 어둑신한 방에서 선심은 원산이 고향인 숙모의 이산(離散) 이야기를 듣는다. 두 살 때 엄마 등에 업혀 잠시 서울에 들렀는데, 38선이 생기면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야기. 그리고 군수가 된 영우가 숙모의 이산 이야기 속에 다시 등장한다. '통일마을'을 조성하려고 하는 영우는 숙모를 그 사업에 참여시키려 하고, 직접 내곡리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긴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통일마을은 아마도 정치나 관광의 영역이 되기 쉬울 것이다. 정영선의 소설은 다시 한번 아주 미세한 지점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발굴한다. 숙모의 장례식장 모습을 전하며 소설은 끝난다. "누구도 숙모가 두 살 때 헤어진 언니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군수는 오지 않았다."(90쪽) 분단과 이산, 혹은 탈북민의 아픔에는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세상의 아픔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영선의 소설은 잠시 달아오르는 몸의 '열'을 통해 그 질문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목차
목차
아홉보다 더 많은 7
아버지가 누구든 35
묵은 유자차 63
습기 차는 방 91
고관 입구 119
무연고 시간 149
해설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얼굴 | 정홍수(문학평론가) 177
작가의 말 204
아버지가 누구든 35
묵은 유자차 63
습기 차는 방 91
고관 입구 119
무연고 시간 149
해설 그들의 이야기, 우리의 얼굴 | 정홍수(문학평론가) 177
작가의 말 204
저자
저자
정영선 경남 남해 출생. 1997년 중편소설 「평행의 아름다움」으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실로 만든 달』 『부끄러움들』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 『물의 시간』 『생각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빛』, 소설집 『평행의 아름다움』을 펴냈다.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작가상, 봉생문화상(문학), 요산김정한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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