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상식을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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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승리로 끝난 임진왜란의 역사를 재조명하다!
다시 쓰는 임진왜란의 역사『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왜곡된 임진왜란의 역사를 바로잡고 한·중·일 삼국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의 개념을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당시 조선은 전쟁을 왜적들이 일으킨 난리로 보았기 때문에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안도가 있었을 뿐 승리의 환호와 민족적 자긍은 없었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당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가가 아닌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의 관군은 무기력했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등의 그동안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한 명확한 사실을 밝힌다. 특히 개전 전야부터 제1차 전쟁인 임진왜란,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까지 당시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시 쓰는 임진왜란의 역사『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왜곡된 임진왜란의 역사를 바로잡고 한·중·일 삼국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의 개념을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당시 조선은 전쟁을 왜적들이 일으킨 난리로 보았기 때문에 난리가 평정되었다는 안도가 있었을 뿐 승리의 환호와 민족적 자긍은 없었다고 분석한다. 이 책은 ‘당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가가 아닌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의 관군은 무기력했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등의 그동안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한 명확한 사실을 밝힌다. 특히 개전 전야부터 제1차 전쟁인 임진왜란, 제2차 전쟁인 정유재란까지 당시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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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왜 한국인은 임진전쟁의 승리를
노래하지 않는 것인가!
420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다시 되짚었다.
'난(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가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기존의 임진왜란에 대한 개념을 일본, 한국, 중국(명)의 국제전쟁의 관점에서 살폈다. 시대상황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한다. 전쟁 발발 전 각국의 정세상황, 일본의 침략 과정, 조선의 대응방법과 당시 수군의 수준, 전쟁 승리의 전략, 명의 파병 이유 등 그간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전전야에서부터 1차 전쟁 임진왜란, 2차 전쟁 정유재란 등 각 장별로 당시 상황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
조선의 최후 승리로 끝난 일본과의 7년 전쟁
다시 쓰는 임진전쟁의 역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으로 다시 불거진 한일관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끊임없는 국제정세의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한일' 관계가 입에 올려지기만 해도 반감이 생기는 이유는 오랜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중 하나의 전쟁이 벌어진 1592년 임진년.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명나라) 삼국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7년간 1,2차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 이후 3국은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 외에 공통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권이 바뀔 만큼 급변한다. 이 전쟁은 4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을 만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국, 일본, 중국(명)은 각각 이 전쟁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는데, '난(亂)'을 붙인 이유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은 '분로쿠노 야꾸(文祿の役)', '게이죠노 야꾸(慶長の役)'라고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1595년 천황의 호이며 '게이죠'는 1596~1614년 천황의 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야꾸(役)'인데, '정벌하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여기서 '원(援)'은 '원조하다, 돕다'는 뜻이다.
이 전쟁을 뜻하는 각각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삼국이 이 전쟁을 해석하는 방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삼국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이 전쟁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리'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사 수업 논쟁의 주제거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더불어 임진왜란에 대한 그간의 역사기술이나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에서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의문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본은 과연 국가도 아니었고 일본 병사들은 그 때까지 조선의 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과 같은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들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 조정과 관군은 과연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도망만 다녔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조선군은 칼과 활 그리고 낫과 죽창 등 원시무기로 무장했고 일본군은 조총(鳥銃) 등 전천후의 신무기로 무장했는가? 조선 수군의 신화는 과연 이순신의 영웅성과 거북선의 초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일까? 명나라는 과연 평소 저들을 잘 섬겨온 조선이 위기에 처한 게 안타까워 조선을 구해주러 저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며 파병했는가? 명나라 군사가 승리를 이끌어주었는가? 그리고 조선은 패전했는가?
조선의 최후 승리는 조선 정부(조정)와 정부군(관군)의 줄기찬 전쟁 수행과 세계 전쟁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조선 의병군의 유격전 활동 그리고 자신들의 국토에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우려해 예방 출전한 중국 명나라 군사와의 연합작전으로 거두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 백성들에서는 물론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인식되어 있지 못하다. 그냥 참담한 민족수난의 역사로만 기억되거나 조선이 처참하게 패전한 것으로 잠재의식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필자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역사기술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나섰다. 필자는 무엇보다 이 전쟁에 대한 오해가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불행하게도 근대 사학으로서의 조선사는 일본인들 손에 의해 편찬됐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켜 회장에 일본인 정무총감(초대 下岡忠治)을, 고문에 친일 조선인(이완용, 박영효) 등을, 위원에 일본인 사학자(今西龍) 등을 임명했다. 특히 해방 후 우리 국사학계 원로로 한국사학에 일제 식민사관을 부동의 정통사관으로 전승시킨 이병도(李丙燾) 등을 수사관보로 참여시켰다. 편수회는 16년간의 방대한 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범이나 다름없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약자논리와 패배주의로 일관된 <임진왜란사>는 이들의 <조선사>왜곡의 산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재조명
양재숙 저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간 왜곡돼 있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꼼꼼히 되짚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일곱 번째 임진년. 임진왜란의 역사가 재탄생했다.
임진왜란은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외교적으로 승인한 국가의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제 일본국 총리(關白)였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로 그가 지휘한 침공군은 일본국 정부군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의 정부군과 일본 정부군이 충돌한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압도한 문명 선진국
조선은 일본에 비해 월등한 문명 선진국이었다. 국가 통치체제와 행정조직 그리고 군사제도는 물론 과학기술문명, 특히 국방과학과 무기체계 등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조선군은 오늘날의 기본화기인 대포[총통(銃筒)], 박격포[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기관총[총통기(銃筒機), 화차(火車)], 로켓포[신기전(神機箭)], 다연장로켓포[신기전기(神機箭機)], 수류탄[질려탄(?藜彈)], 지뢰[지화(地火)]에 이르기까지 초보 단계 화약무기로 무장했다. 조선군이 칼과 창 등 원시무기만으로 무장한 게 아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전함과 화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며 이순신의 상승신화도 바로 이를 바탕으로 가능했다.
조선 관군 주도로 우세
이 전쟁 전 기간 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관군 단독 또는 의병 참전 아래의 관군 주도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 참전 아래의 의병 주도 전투가 18회로 분류된다. 개전 초기에 의병군이 일본군 후방 교란 등 전세 반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의병전투는 7년 전쟁 기간 중 초기 1년에 그쳤고 전쟁은 관군이 주도했다. 총 105회 전투 중 조선군 측 공격이 68회로 조선군이 공세적이었고 조선군 승리 65회, 패배 45회로 전쟁 전 기간 중 개전 초기 후퇴과정 외에는 조선군이 우세했다.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 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2차 전쟁 때의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조선의 조정과 관군이 도망만 다닌 게 아니었다. 전쟁 지도는 조선의 조정이, 대부분 전투는 조선의 관군이 의병군과 명나라 군사의 협력으로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명나라는 국익을 위해 파병 결정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은 갈림길에 섰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러 가겠으니 조선은 길을 빌려라[정명가도(征明假道)]'면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이 망하면 일본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명나라를 침공하게 되고 명나라 국토가 전장이 될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따라서 군사를 보내 조선군과 연합해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면 명나라는 일본군 침공을 미리 막아 저들 국토에 전화가 번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게 명나라 조정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명나라는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파병했다.
조선이 승전했다
국가 간 전쟁의 승패는 교전 당사국의 어느 쪽이 전쟁 목적을 달성했느냐로 가름한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전쟁 목적은 조선을 점령해 병탄(倂呑)한 뒤 명나라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데 있었고 조선은 이를 물리쳐 국가를 보전하는 데 있었다. 일본군은 2차에 걸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끝내 조선 점령과 병탄에 실패했다. 조선군은 일본 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이 승전했고 일본이 패전했다.
조선 조정과 관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패주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수도 서울[한성(漢城)]을 내주고 국토 후방 깊숙이 압록강 변 의주(義州)까지 밀렸다. 그러나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지방 의병군의 유격전으로 육상 보급로가 교란되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군 전력이 급속히 약화됐다. 때마침 한국판 '동장군'이라 할 한겨울 시베리아대륙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치자 명군과 연합한 조선군이 총반격에 나서 일본 침공군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고 최후 승리를 거뒀다.
책속으로 추가
히데요시가 시대를 만든 영웅이라면 이순신은 시대가 만든 영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은 그에게는 영웅의 길, 조선에는 구국의 길, 일본에는 패전의 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장재(將材)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그가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영웅의 조건이 있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수륙병진전략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가 상승 신화의 무대로 삼았던 조선 남해 연안 다도해의 특수한 지형 조건 그리고 전통적으로 바다의 용병들이었던 전라도 수병들과 강력한 조선 수군 포함(砲艦) 등의 무기체계로 그가 영웅의 길, 구국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 침공군 가운데 일본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고 평양까지 쳐들어간 고니시 유키나가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증원군사 10만이 서해를 돌아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조선의 남해 바다는 일명 다도해(多島海)라 부른다. 섬이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많아도 웬만큼 많은 게 아니다. 전라도 해안 쪽에 1,891개, 경상도 해안 쪽에 419개로 무려 2,310개의 섬 무리群가 동쪽의 대마도, 서쪽의 흑산도(黑山島), 남쪽의 제주도(濟州道) 등 큰 섬 사이 75,000㎢의 넓지도 않은 바다 안에 밀집되어 있다. 제주도와 흑산도 외에 큰 섬으로 거제도(巨濟島), 남해도(南海島), 완도(莞島), 진도(珍島) 등이 있고 섬들에는 산도 높아 제주도의 한라산(漢拏山, 1,950m)외에 거제도의 옥녀봉(玉女峰, 555m), 완도의 상황산(象晃山, 644m), 남해도의 망운산(望雲山, 786m) 등이다. 이들 섬들의 해안선을 모두 합하면 4,654㎞, 무려 11,630리(里)에 이른다. p141
조선 수군의 1, 2차 출동으로 8차례 해전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 수군은 무려 114척의 대소 전선을 잃었고 수병 손실이 16,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개전 이래 육전에서 승승장구, 거의 무패의 전황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는 물론 일본 나고야 기지의 히데요시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부산에 상륙할 때 조선 수군으로부터 이렇다 할 저항을 받아 본 일도 없었고 상륙 후 조선 수군이 스스로 전함들을 침몰시키고 자멸했음도 알았을 것이다. 조선 수군쯤은 적수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존재조차 무시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은 부산을 점령하고 육군이 쾌속의 북진을 계속하는 동안 서쪽으로 남해안을 따라 경상도 우수영 관할 수역의 포구들을 차례로 침공하면서 화살 한 대의 저항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포구가 있는 곳이면 제집 마당인 양 들어가 선창에 안심하고 전선들을 밀집 대형으로 정박시켜 놓고 경비선 한 척 배치해 두지 않은 채 육지에 올라가 마음 놓고 분탕질 쳤다. 그러다 난데없이 나타난 조선 수군 함대의 벼락 치듯 하는 기습공격을 받고 번번이 전멸의 화를 입었다. p163
노래하지 않는 것인가!
420년 전 벌어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다시 되짚었다.
'난(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왜구가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본 기존의 임진왜란에 대한 개념을 일본, 한국, 중국(명)의 국제전쟁의 관점에서 살폈다. 시대상황뿐 아니라 7년간의 전쟁 과정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해 자세히 설명한다. 전쟁 발발 전 각국의 정세상황, 일본의 침략 과정, 조선의 대응방법과 당시 수군의 수준, 전쟁 승리의 전략, 명의 파병 이유 등 그간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개전전야에서부터 1차 전쟁 임진왜란, 2차 전쟁 정유재란 등 각 장별로 당시 상황을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역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
조선의 최후 승리로 끝난 일본과의 7년 전쟁
다시 쓰는 임진전쟁의 역사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으로 다시 불거진 한일관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끊임없는 국제정세의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한일' 관계가 입에 올려지기만 해도 반감이 생기는 이유는 오랜 침략과 전쟁의 역사에서부터 기인한다.
그 중 하나의 전쟁이 벌어진 1592년 임진년.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명나라) 삼국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7년간 1,2차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 이후 3국은 승리와 패배라는 결과 외에 공통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정세는 정권이 바뀔 만큼 급변한다. 이 전쟁은 4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을 만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국, 일본, 중국(명)은 각각 이 전쟁을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르는데, '난(亂)'을 붙인 이유는 임진년과 정유년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일으킨 난리라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은 '분로쿠노 야꾸(文祿の役)', '게이죠노 야꾸(慶長の役)'라고 부른다. '분로쿠'는 1592년~1595년 천황의 호이며 '게이죠'는 1596~1614년 천황의 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야꾸(役)'인데, '정벌하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여기서 '원(援)'은 '원조하다, 돕다'는 뜻이다.
이 전쟁을 뜻하는 각각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삼국이 이 전쟁을 해석하는 방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삼국뿐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이 전쟁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난리'로 볼 것인가, '전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에서 승리했는지, 패배했는지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사 수업 논쟁의 주제거리로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더불어 임진왜란에 대한 그간의 역사기술이나 이를 소재로 한 소설들에서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의문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일본은 과연 국가도 아니었고 일본 병사들은 그 때까지 조선의 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과 같은 불법 무장집단에 불과했는가?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들의 두목이었는가? 이 전쟁에서 조선 조정과 관군은 과연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게 도망만 다녔고 오직 의병들만이 분전했는가? 조선군은 칼과 활 그리고 낫과 죽창 등 원시무기로 무장했고 일본군은 조총(鳥銃) 등 전천후의 신무기로 무장했는가? 조선 수군의 신화는 과연 이순신의 영웅성과 거북선의 초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일까? 명나라는 과연 평소 저들을 잘 섬겨온 조선이 위기에 처한 게 안타까워 조선을 구해주러 저들 젊은이들을 희생시키며 파병했는가? 명나라 군사가 승리를 이끌어주었는가? 그리고 조선은 패전했는가?
조선의 최후 승리는 조선 정부(조정)와 정부군(관군)의 줄기찬 전쟁 수행과 세계 전쟁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조선 의병군의 유격전 활동 그리고 자신들의 국토에까지 전화가 번질 것을 우려해 예방 출전한 중국 명나라 군사와의 연합작전으로 거두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조선 백성들에서는 물론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거의 인식되어 있지 못하다. 그냥 참담한 민족수난의 역사로만 기억되거나 조선이 처참하게 패전한 것으로 잠재의식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낀 필자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역사기술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나섰다. 필자는 무엇보다 이 전쟁에 대한 오해가 많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불행하게도 근대 사학으로서의 조선사는 일본인들 손에 의해 편찬됐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켜 회장에 일본인 정무총감(초대 下岡忠治)을, 고문에 친일 조선인(이완용, 박영효) 등을, 위원에 일본인 사학자(今西龍) 등을 임명했다. 특히 해방 후 우리 국사학계 원로로 한국사학에 일제 식민사관을 부동의 정통사관으로 전승시킨 이병도(李丙燾) 등을 수사관보로 참여시켰다. 편수회는 16년간의 방대한 작업 끝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범이나 다름없는 <조선사>를 편찬했다. 약자논리와 패배주의로 일관된 <임진왜란사>는 이들의 <조선사>왜곡의 산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재조명
양재숙 저자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그간 왜곡돼 있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꼼꼼히 되짚었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일곱 번째 임진년. 임진왜란의 역사가 재탄생했다.
임진왜란은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조선과 일본은 서로 외교적으로 승인한 국가의 정통성 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제 일본국 총리(關白)였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로 그가 지휘한 침공군은 일본국 정부군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과 명나라의 정부군과 일본 정부군이 충돌한 국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압도한 문명 선진국
조선은 일본에 비해 월등한 문명 선진국이었다. 국가 통치체제와 행정조직 그리고 군사제도는 물론 과학기술문명, 특히 국방과학과 무기체계 등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조선군은 오늘날의 기본화기인 대포[총통(銃筒)], 박격포[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기관총[총통기(銃筒機), 화차(火車)], 로켓포[신기전(神機箭)], 다연장로켓포[신기전기(神機箭機)], 수류탄[질려탄(?藜彈)], 지뢰[지화(地火)]에 이르기까지 초보 단계 화약무기로 무장했다. 조선군이 칼과 창 등 원시무기만으로 무장한 게 아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의 전함과 화력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며 이순신의 상승신화도 바로 이를 바탕으로 가능했다.
조선 관군 주도로 우세
이 전쟁 전 기간 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 105회 가운데 관군 단독 또는 의병 참전 아래의 관군 주도 전투가 87회, 의병 단독 또는 관군 참전 아래의 의병 주도 전투가 18회로 분류된다. 개전 초기에 의병군이 일본군 후방 교란 등 전세 반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의병전투는 7년 전쟁 기간 중 초기 1년에 그쳤고 전쟁은 관군이 주도했다. 총 105회 전투 중 조선군 측 공격이 68회로 조선군이 공세적이었고 조선군 승리 65회, 패배 45회로 전쟁 전 기간 중 개전 초기 후퇴과정 외에는 조선군이 우세했다.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 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2차 전쟁 때의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조선의 조정과 관군이 도망만 다닌 게 아니었다. 전쟁 지도는 조선의 조정이, 대부분 전투는 조선의 관군이 의병군과 명나라 군사의 협력으로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명나라는 국익을 위해 파병 결정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명나라 조정은 갈림길에 섰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러 가겠으니 조선은 길을 빌려라[정명가도(征明假道)]'면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이 망하면 일본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명나라를 침공하게 되고 명나라 국토가 전장이 될 것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다. 따라서 군사를 보내 조선군과 연합해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면 명나라는 일본군 침공을 미리 막아 저들 국토에 전화가 번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게 명나라 조정의 전략적 판단이었다. 명나라는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파병했다.
조선이 승전했다
국가 간 전쟁의 승패는 교전 당사국의 어느 쪽이 전쟁 목적을 달성했느냐로 가름한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전쟁 목적은 조선을 점령해 병탄(倂呑)한 뒤 명나라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데 있었고 조선은 이를 물리쳐 국가를 보전하는 데 있었다. 일본군은 2차에 걸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끝내 조선 점령과 병탄에 실패했다. 조선군은 일본 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이 승전했고 일본이 패전했다.
조선 조정과 관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군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패주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수도 서울[한성(漢城)]을 내주고 국토 후방 깊숙이 압록강 변 의주(義州)까지 밀렸다. 그러나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지방 의병군의 유격전으로 육상 보급로가 교란되고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군 전력이 급속히 약화됐다. 때마침 한국판 '동장군'이라 할 한겨울 시베리아대륙의 혹독한 한파가 몰아치자 명군과 연합한 조선군이 총반격에 나서 일본 침공군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고 최후 승리를 거뒀다.
책속으로 추가
히데요시가 시대를 만든 영웅이라면 이순신은 시대가 만든 영웅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은 그에게는 영웅의 길, 조선에는 구국의 길, 일본에는 패전의 길이 된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장재(將材)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그가 영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영웅의 조건이 있었다.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수륙병진전략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가 상승 신화의 무대로 삼았던 조선 남해 연안 다도해의 특수한 지형 조건 그리고 전통적으로 바다의 용병들이었던 전라도 수병들과 강력한 조선 수군 포함(砲艦) 등의 무기체계로 그가 영웅의 길, 구국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 침공군 가운데 일본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고 평양까지 쳐들어간 고니시 유키나가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증원군사 10만이 서해를 돌아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할 조선의 남해 바다는 일명 다도해(多島海)라 부른다. 섬이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많아도 웬만큼 많은 게 아니다. 전라도 해안 쪽에 1,891개, 경상도 해안 쪽에 419개로 무려 2,310개의 섬 무리群가 동쪽의 대마도, 서쪽의 흑산도(黑山島), 남쪽의 제주도(濟州道) 등 큰 섬 사이 75,000㎢의 넓지도 않은 바다 안에 밀집되어 있다. 제주도와 흑산도 외에 큰 섬으로 거제도(巨濟島), 남해도(南海島), 완도(莞島), 진도(珍島) 등이 있고 섬들에는 산도 높아 제주도의 한라산(漢拏山, 1,950m)외에 거제도의 옥녀봉(玉女峰, 555m), 완도의 상황산(象晃山, 644m), 남해도의 망운산(望雲山, 786m) 등이다. 이들 섬들의 해안선을 모두 합하면 4,654㎞, 무려 11,630리(里)에 이른다. p141
조선 수군의 1, 2차 출동으로 8차례 해전이 벌어진 가운데 일본 수군은 무려 114척의 대소 전선을 잃었고 수병 손실이 16,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개전 이래 육전에서 승승장구, 거의 무패의 전황에 도취되어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는 물론 일본 나고야 기지의 히데요시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부산에 상륙할 때 조선 수군으로부터 이렇다 할 저항을 받아 본 일도 없었고 상륙 후 조선 수군이 스스로 전함들을 침몰시키고 자멸했음도 알았을 것이다. 조선 수군쯤은 적수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존재조차 무시했을 것이다. 일본 수군은 부산을 점령하고 육군이 쾌속의 북진을 계속하는 동안 서쪽으로 남해안을 따라 경상도 우수영 관할 수역의 포구들을 차례로 침공하면서 화살 한 대의 저항도 받아 본 일이 없었다. 포구가 있는 곳이면 제집 마당인 양 들어가 선창에 안심하고 전선들을 밀집 대형으로 정박시켜 놓고 경비선 한 척 배치해 두지 않은 채 육지에 올라가 마음 놓고 분탕질 쳤다. 그러다 난데없이 나타난 조선 수군 함대의 벼락 치듯 하는 기습공격을 받고 번번이 전멸의 화를 입었다. p163
목차
목차
들어가면서
제1장 개전전야
1. 200년 평화에 국방을 잊어
2. 망국의 길목에 들어선 대명제국
3. 대륙을 향한 군국 일본의 꿈
4.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제2장 1차 전쟁: 임진왜란
1. 침공군 16만 나고야에서 발진
2. 조선왕조 사상 가장 길었던 날
3. 침공 20일 만에 떨어진 수도 서울
4. 평양에서 정지된 일본군 진격
5. 전라도 방어전 승리 군수 병력 수군기지로
6. 무적함대
7. 의병전투
8. 반격작전
제3장 전쟁과 평화
1. 명과 일본 지루한 강화회담
2. 이순신 함대증강, 전함 1509척
제4장 2차 전쟁: 정유왜란
1. 일본군 12만 재침공 명군 재출동
2. 원균 휘하 조선 수근 칠천량에서 전멸
3. 일본군 전군 동원 전라도로 진격
4. 13척이 200척을 격멸_ 명량대해전
5. 일본군 총퇴각, 연합군 총반격
6. 조.명 연합군 최후 공격으로 일본군 패주
7. '이순신은 자살했는가' 의문의 전사
제1장 개전전야
1. 200년 평화에 국방을 잊어
2. 망국의 길목에 들어선 대명제국
3. 대륙을 향한 군국 일본의 꿈
4.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제2장 1차 전쟁: 임진왜란
1. 침공군 16만 나고야에서 발진
2. 조선왕조 사상 가장 길었던 날
3. 침공 20일 만에 떨어진 수도 서울
4. 평양에서 정지된 일본군 진격
5. 전라도 방어전 승리 군수 병력 수군기지로
6. 무적함대
7. 의병전투
8. 반격작전
제3장 전쟁과 평화
1. 명과 일본 지루한 강화회담
2. 이순신 함대증강, 전함 1509척
제4장 2차 전쟁: 정유왜란
1. 일본군 12만 재침공 명군 재출동
2. 원균 휘하 조선 수근 칠천량에서 전멸
3. 일본군 전군 동원 전라도로 진격
4. 13척이 200척을 격멸_ 명량대해전
5. 일본군 총퇴각, 연합군 총반격
6. 조.명 연합군 최후 공격으로 일본군 패주
7. '이순신은 자살했는가' 의문의 전사
저자
저자
양재숙
저자 양재숙은 동아대학교 법경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전북일보〉 기자와 부장을 거쳐 〈전북도민일보〉 편집국장, 부주필을 지냈다. 현재 〈전라일보〉 주필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임진대전쟁≫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원광대학교 채문연구소 논문집 '역사와 사회' 제8·9집에 실린 임진왜란 400주년 기념 〈조선이 이긴 전쟁(The War won by Cho-Su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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